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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 푸아티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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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732년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과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 지휘 하의 이슬람 군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슬람 세력이 프랑스 아키텐 지역을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카를 마르텔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 결과, 프랑크 왕국이 승리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진출이 좌절되었고, 카를 마르텔은 권력을 강화하여 카롤링거 왕조 성립의 기반을 마련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 문명을 지켜낸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지만, 이슬람 측에서는 소규모 충돌로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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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 푸아티에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전투명투르-푸아티에 전투
일부우마이야 왕조의 갈리아 침공
날짜732년 10월 10일
장소무세라바타유, 프랑스,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
결과프랑크 왕국의 승리, 우마이야 왕조의 철수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바스코네스
교전국 1 세부아우스트라시아의 군대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왕국
슈바벤
아키텐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
라인 강 일대의 이교도 용병들
유럽 지역의 군대
교전국 2우마이야 칼리파국
교전국 2 세부아랍인
베르베르인
지휘관
지휘관 1카롤루스 마르텔
아키텐 공작 오도
지휘관 2아브드 알 라만†
병력 규모
병력 115,000–20,000명 (Gore에 따르면 15,000-20,000명, 다른 추정 3만)
병력 220,000명 (Gore에 따르면 20,000-25,000명, 다른 추정 60,000-400,000)
사상자
사상자 11,000명 (추정 1,500명)
사상자 212,000명 (피해 막심)
관련 전투
전투투르 전투
기타
샤를 드 스테우벤의 투르 전투 그림
샤를 드 스테우벤의 '732년 10월 투르 전투'는 승리한 카롤루스 마르텔이 압드 알 라만 알 가피키를 마주하는 모습을 낭만적으로 묘사함

2. 배경

우마이야 왕조북아프리카를 넘어 711년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침략하면서 20년간 유럽 정복을 감행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옛 속주였던 갈리아 지역의 프랑크 영토로 군사 원정을 이어갔다. 우마이야 군대는 아키텐부르고뉴까지 북쪽으로 진출하여 보르도에서 주요 전투를 치르고 오통을 급습하기도 했다.[15][16]

당시 프랑크 왕국에서는 메로빙거 왕조 대신 재상 카를 마르텔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기병을 훈련시키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14] 732년 스페인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이 프랑스 아키텐을 침공하자, 아키텐 공작 에우도는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했다.[14]

730년, 알-안달루스의 왈리로 임명된 가르피키는 사르데냐에서 독립 정권을 세우려 한 무누자를 공격하여 살해했다. 무누자의 아내는 히샴 이븐 압드 알-말리크의 하렘으로 보내졌다. 우드 공작은 카를 마르텔과 교전 중이어서 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이후 우드 공작은 카를 마르텔에게 패배하여 아키텐을 몰수당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아키텐으로 침공한 가르피키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과, 영토를 잃은 우드 공작과 그의 신하들은 보르도 전투에서 대결했다. 가르피키는 우드 공작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키텐 북부까지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우드 공작은 도망쳐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카를 마르텔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알게 된 카를 마르텔은 우드 공작을 자신의 우익에 편입하고 다른 영주들을 모아 프랑크 연합군을 조직했다.

2. 1. 우마이야 왕조의 확장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세력은 북아프리카를 넘어 스페인 지방을 정복하고 서유럽을 노렸다. 732년 스페인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은 프랑스 아키텐을 침공하여 아키텐 공작 에우도를 무찔렀고, 에우도는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재상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했다.[14]

줄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Julius Schnorr von Carolsfeld)가 1822년부터 1827년 사이에 그린 "파리 외곽의 사라센 군대"의 세부 묘사.


투르 전투는 711년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20년간의 우마이야 칼리파의 유럽 정복에 이은 사건이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옛 속주였던 갈리아 지역의 프랑크 영토로 군사 원정이 이어졌다. 우마이야의 군사 작전은 아키텐과 부르고뉴까지 북쪽으로 진출하여 보르도에서 주요 전투를 치르고 오통을 급습하기도 했다.[15][16]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 침략은 라시둔 칼리파 시대(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이후 순니파 이슬람 제국의 첫 순니파 칼리파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بنو أمية banū umayya / الأمويون al-umawiyyūnar)에 의해 수행되었다. 투르 전투 당시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세계 최고의 군사 강국이었을 것이다. 칼리파국의 엄청난 확장은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하에 일어났다. 무슬림 군대는 7세기 후반에 페르시아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진격했다.[25]

우마이야 제국은 이제 다양한 민족을 지배하는 광대한 영토였다. 그들은 사산 왕조를 패배시키고 완전히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 아르메니아,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비잔티움 제국의 대부분을 정복했다.[25]

칼리프 시대. 720년경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는 중동에서 이베리아 반도까지, 나르본 항구를 포함하여 뻗어 있었다.


알-안달루스 총독 알-삼흐 이븐 말릭 알-카울라니 지휘 아래 우마이야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를 휩쓴 후 719년 세프티마니아를 점령했다. 알-삼흐는 720년부터 무어인들이 아르부나라고 불렀던 나르본을 중심지로 삼았다. 나르본 항구를 확보하자 우마이야 군대는 알레, 베지에, 아그드, 로드브, 마궤롱, 등 비시고트 백작들이 여전히 지배하던 도시들을 거의 저항 없이 신속하게 정복했다.[26]

아키텐으로의 우마이야 원정은 툴루즈 전투에서 일시적인 좌절을 겪었다. 오도 대공은 툴루즈 공성전을 돌파하여 알-삼흐 이븐 말릭의 군대를 기습했고, 알-삼흐 이븐 말릭은 치명상을 입었다. 이 패배는 옛 로마 갈리아 침입을 막지 못했고, 나르본에 견고한 기지를 두고 바다를 통해 손쉽게 보급을 받은 무어 군대는 720년대에 동쪽으로 진격하여 725년 부르고뉴의 오통까지 진출했다.[26]

남쪽의 우마이야 군대와 북쪽의 프랑크족 모두에게 위협받은 오도는 730년 카탈루냐가 될 지역의 부총독인 베르베르 지휘관 우쓰만 이븐 나이사(프랑크족은 "무누자"라고 불렀다)와 동맹을 맺었다. 동맹을 맺기 위해 우쓰만은 오도의 딸 람파지와 결혼했고, 무어인들은 오도의 남쪽 국경인 피레네 산맥을 넘어 침략하는 것을 중단했다.[26] 그러나 이듬해 베르베르 지도자는 우르젤 주교 낭보두스를 살해하고 코르도바의 아랍 주인들로부터 독립했다. 압드 알 라흐만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원정대를 보낸 다음 우쓰만의 동맹자인 오도를 공격했다.[27]

오도는 보르도에서 군대를 모았지만 패배했고, 보르도는 약탈당했다. 이어진 가론 강 전투에서 ''754년 연대기''[28]는 "하느님만이 죽은 자의 수를 아신다"라고 언급했다.[29] 연대기는 그들이 "산을 뚫고, 거칠고 평평한 땅을 짓밟고, 프랑크족의 땅 깊숙이 약탈하고, 모든 것을 검으로 쳤으므로, 에우도가 가론 강에서 그들과 싸우러 왔을 때 그는 도망쳤다"라고 덧붙였다.

우마이야 칼리파 왕조는 이슬람 세계 최초의 제국으로, 제10대 칼리프 히샴 이븐 압드 알-말리크 시대에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를 보냈다. 제6대 칼리프 왈리드 1세 시대에 이슬람 군대의 진격으로 안달루스(현 스페인)가 지배하에 들어왔다. 이 정복에 대해 현지 기독교 영주들은 저항했고, 소규모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샤리아(이슬람법)의 지즈야를 납부하면 신앙의 자유는 인정되었지만, 아랍인과 그들을 따른 베르베르인, 그리고 현지 기독교인들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생활했다. 또한 아랍인이 직접 통치하는 도시에서는 이슬람교적 색채가 짙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알-안달루스의 왈리였던 알-삼 이븐 말리크 알-카울라니는 툴루즈 전투에서 유럽으로의 영토 확장을 시도했으나 아키텐 공작 우드에게 패배하고 중상을 입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완충 지대에 위치한 아키텐에는 항상 불안감이 존재했다.

이후 우드 공작은 자신의 딸 람페기아를 알-안달루스 부지사였던 무누자(카탈루냐의 영주, 베르베르인)에게 시집보냈다. 우드 공작은 아키텐을 완충지대로 하기 위해 무누자와 화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로 알-안달루스 총독에 임명된 가르피키는 무누자를 반란을 꾀하는 자로 의심하게 된다. 한편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궁재인 카를도 이슬람 국가와 통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고 아키텐을 침략했다.

730년(히즈라력 112년)에 왈리로 임명된 가르피키는 사르데냐에서 독립 정권을 세우려 한 무누자를 공격했다. 무누자는 살해되었고, 그의 아내 람페기아는 히샴 이븐 압드 알-말리크의 하렘으로 보내졌다. 우드 공작은 원군을 보내고 싶었지만, 불신을 산 궁재 카를과 교전 중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우드 공작 또한 궁재 카를에게 패배하여 아키텐은 몰수되었다. 이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우드 공작의 영토인 아키텐으로 침공한 가르피키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과, 영토를 잃은 우드 공작과 그의 신하들은 가론 강 전투(보르도 전투)에서 대결했다. 가르피키는 우드 공작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키텐 북부까지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우드 공작은 도망쳐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궁재 카를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알게 된 궁재 카를은 우드 공작을 자신의 우익에 편입하고 다른 영주들을 모아 프랑크 연합군을 조직했다.

2. 2. 프랑크 왕국의 상황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 지방을 정복하고 서유럽을 노리던 시기, 프랑크 왕국에서는 메로빙거 왕조 대신 재상 카를 마르텔이 실권을 장악하고 기병을 훈련시키고 있었다.[14] 732년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이 프랑스 아키텐을 침공하자, 아키텐 공작 에우도는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4]

이후 우마이야 군대는 로마 제국의 옛 속주였던 갈리아 지역의 프랑크 영토로 군사 원정을 이어갔다. 이들의 군사 작전은 아키텐과 부르고뉴까지 북쪽으로 진출하여 보르도에서 주요 전투를 치르고 오통을 급습하기도 했다.[15][16]

당시 카를 마르텔 치하의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크 왕국은 북부 및 동부 프랑스(오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고뉴), 서독 대부분, 그리고 저지대 국가들(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을 포함했다. 그러나 삭손족, 프리지아족과 같은 외부 세력과, 아키텐 공작이자 바스코뉴 공작인 위대한 오도(고대 프랑스어: 에드, 또는 에우도)가 이끄는 바스크-아키텐인들과 같은 다른 적들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730년에 알-안달루스의 왈리로 임명된 가르피키는 사르데냐에서 독립 정권을 세우려 한 무누자를 공격하여 살해했다. 무누자의 아내 람페기아는 히샴 이븐 압드 알-말리크의 하렘으로 보내졌다. 우드 공작은 원군을 보내고 싶었지만, 카를 마르텔과 교전 중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이후 우드 공작은 카를 마르텔에게 패배하여 아키텐을 몰수당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우드 공작의 영토인 아키텐으로 침공한 가르피키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과, 영토를 잃은 우드 공작과 그의 신하들은 보르도 전투에서 대결했다. 가르피키는 우드 공작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키텐 북부까지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우드 공작은 도망쳐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카를 마르텔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알게 된 카를 마르텔은 우드 공작을 자신의 우익에 편입하고 다른 영주들을 모아 프랑크 연합군을 조직했다.

3. 전투 과정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끄는 이슬람 군은 코르도바군과 베르베르인들로 편성된 기병, 투창병 부대를 이끌고 이베리아반도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이들은 아키텐을 침공하여 아키텐 공작 에우도의 사위이자 갈리아 남서부 총독이었던 무슬림 오트만 벤 아비네를 론케발레스 언덕에서 크게 격파하고 전사시켰다.[14] 이슬람 군은 프랑크 왕국 남서부로 진격하여 보르도를 공격했고, 보르도의 프랑크 군대는 대패했다. 보르도는 파괴되고 약탈과 방화, 살육의 현장이 되었다.

카를 마르텔은 투르 시를 방어하기 위해 훈련시킨 기병대를 주둔시켰다. 에우도의 잔류군을 규합하고 추가로 군사를 모집하여 왕국의 남서부 프로방스로 내려갔다. 푸아티에를 지나 투르를 약탈하고 다시 푸아티에를 거쳐 이베리아반도로 돌아가려던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를 추격했다. 푸아티에 근처에서 아브드 알 라흐만은 카를 마르텔 군대의 추격을 인지하고 군사를 정비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군대는 푸아티에와 투르 중간 지점에 매복하여 카를 마르텔군을 기다렸다.

프랑스 대연대기(Grandes Chroniques de France)에 묘사된 투르 전투의 샤를 마르텔


카를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 왕국군은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에 맞서 유리한 지형을 선택했다. 이슬람 군의 주력이 기병이었기 때문에, 카를 마르텔은 언덕과 나무가 많은 지형을 택하여 기병의 기동력을 제한하고 보병 중심의 밀집 대형(팔랑크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방어 태세를 갖췄다.[20] 이는 보병과 기병의 전투였으나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고, 7일 동안 소규모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슬람 측은 프랑크 왕국군의 주력이 보병이라는 점을 근거로 전투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두 군대는 투르푸아티에 사이의 클랭 강과 비엔느 강 합류 지점에서 만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양측 군대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17] 라틴어 자료인 『754년 모사라베 연대기』에는 정확한 병력 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당시의 군수 지원 상황을 고려할 때, 양 진영의 동원 병력은 프랑크 왕국군 1만 5천~2만 명,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끄는 알 안달루스 원정군 2만~2만 5천 명으로 추정된다.[77]

교전 초반, 프랑크 군대는 기습 공격한 우마이야 군대의 기병과 투창병의 공격에 고전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기병과 투창병 중심이었고, 화살과 칼을 소지하고 있었다. 기병의 창으로 적군에게 부상을 입힌 뒤 투창병이나 칼, 화살을 쏘는 보병, 궁병을 이용해 목표를 타격했다. 카를 마르텔의 군대는 프란키스카라 불리는 무거운 대형 도끼를 든 보병과 기타 도끼를 든 보병, 철제 투구와 미늘 갑옷 차림이었다. 카를 마르텔은 프랑크 군 외에도 아키텐 군, 슈바벤 군, 바이에른 군, 프랑크 왕국 동부의 게르만족 군대 및 노르만 군까지 동원했다. 이들은 주로 창이나 도끼를 소지하고 있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카를 마르텔의 프랑크-게르만 연합군이 밀집해 있자, 좌우 양쪽에서 기병대를 보내 공격했다. 투창과 화살, 칼이 날아왔고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프랑크 족의 갑옷은 단단하여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자 프랑크 군은 한 곳으로 뭉쳤다. 병사들이 서로 달라붙어 진격한 프랑크 군은 부상당해도 참고 행진했고, 동료 군사가 죽어도 시신을 밟고 행진했다. 기병대와 궁수들이 계속 사격했지만, 한데 뭉친 프랑크-게르만 군은 그대로 행진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투창병과 칼, 화살을 다루는 보병, 용병인 투아레크 족을 보내 돌격시켰다. 프랑크-게르만 군과 가까워지자 이들은 투창과 화살을 날리고 칼로 공격했다. 프랑크-게르만 군은 프란키스카 및 도끼로 공격했다. 우미야드 군과 베르베르 군은 프란키스카에 큰 부상을 당했다. 프랑크 군의 사상자는 증가했지만, 투창과 화살이 떨어져 감에 따라 도끼를 든 프랑크-게르만 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갑옷과 방패가 가볍거나 없던 우마이야 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창과 투창, 화살이 거의 바닥나자 우마이야의 경기병들과 투창병, 보병들은 옆으로 돌아서 회군했고, 이어 아랍 군의 기병대와 궁수들이 돌격을 시도했다. 투창 공격과 화살 공격 후 전열이 무너진 적군을 보병대와 칼을 다루는 병사들, 그리고 중기병대가 상대해서 궤멸시키는 전술이 통하지 않자 아브드 알 라흐만은 당황했다. 전사자를 많이 냈지만 프랑크-게르만 연합군은 전열을 흐뜨러뜨리지 않고 단단하게 뭉쳐서 행진했다. 우마이야 기병대와 베르베르 기병대 및 칼을 다루는 보병들은 직접 프랑크-게르만 군을 상대했고, 처음에는 우마이야-베르베르 기병대가 빠른 속도로 움직여 우세했지만, 점차 무거운 갑옷과 프란키스카를 비롯한 무거운 도끼로 중무장한 프랑크-게르만 군대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사상자가 속출했고, 서고트족 용병들과 북아프리카 아랍군들조차 도망쳤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베르베르 군과 투아레크 족을 정렬시켜 공격했지만, 프랑크군은 서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계속 행진했다. 아랍군들은 대부분 도주했고, 아우스트라시아 군들과 슈바벤 군들은 남은 아랍 군대를 도끼로 베고 계속 아브드 알 라흐만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카를 마르텔은 계속해서 진두지휘했고,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통제권을 상실했다. 아랍 기병들이 던지는 창은 프랑크-게르만 군들의 방패를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으며, 아랍 군들은 프랑크-게르만 군들이 던지는 프랑키스카와 도끼에 맞아 죽었다. 마지막 날 저녁, 아우스트라시아-바이에른 군대는 아랍 군들의 본진으로 쳐들어가 아랍 군과 베르베르 군대를 도끼로 쳐 죽였다.

마지막 날, 프랑크 군이 이슬람 군의 약탈품을 실은 수레 등을 공격했다.[77] 인종, 민족, 종교가 뒤섞인 알 가피키의 군대에서는 전리품 방어와 공격으로 인해 지휘 체계가 혼란에 빠졌다. 알 가피키는 혼란에 빠진 자신의 군대를 정비하려고 앞으로 나섰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알 가피키의 사망은 『754년 모사라베 연대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슬람 측 기록에 따르면, 알 가피키 사후 유력자들이 회의를 열었지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밤에 후퇴했다고 한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공격했지만, 아랍 군과 코르도바 군은 패주하여 달아났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그날 저녁 혹은 옴미야드 군이 거의 대부분 도주하는 그 다음날 아침에 전사했다고 한다. 이들은 보르도를 넘어 이베리아로 급히 달아났으며, 보르도, 투르, 푸아티에, 아키텐 등지에서 약탈한 보물들 중 거의 대부분을 놔두거나 버리고 달아났다.

프랑크 왕국군은 이후의 공격에 대비하여 곧바로 무장 해제하지 않았다.

3. 1. 이슬람 군의 진격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끄는 이슬람 군은 코르도바군과 베르베르인들로 편성된 기병, 투창병 부대를 이끌고 이베리아반도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이들은 아키텐을 침공하여 아키텐 공작 에우도의 사위이자 갈리아 남서부 총독이었던 무슬림 오트만 벤 아비네를 론케발레스 언덕에서 크게 격파하고 전사시켰다.[14] 이슬람 군은 프랑크 왕국 남서부로 진격하여 보르도를 공격했고, 보르도의 프랑크 군대는 대패했다. 보르도는 파괴되고 약탈과 방화, 살육의 현장이 되었다.

3. 2. 카를 마르텔의 대응

카를 마르텔은 투르 시를 방어하기 위해 훈련시킨 기병대를 주둔시켰다. 에우도의 잔류군을 규합하고 추가로 군사를 모집하여 왕국의 남서부 프로방스로 내려갔다. 푸아티에를 지나 투르를 약탈하고 다시 푸아티에를 거쳐 이베리아반도로 돌아가려던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를 추격했다. 푸아티에 근처에서 아브드 알 라흐만은 카를 마르텔 군대의 추격을 인지하고 군사를 정비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군대는 푸아티에와 투르 중간 지점에 매복하여 카를 마르텔군을 기다렸다.

교전 초반, 프랑크 군대는 우미야드 군대의 기병과 투창병의 공격에 고전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기병과 투창병 중심이었고, 카를 마르텔의 군대는 프란키스카라 불리는 무거운 도끼를 든 보병과 철제 투구, 미늘갑옷 차림이었다. 카를 마르텔은 프랑크군 외에도 아키텐군, 슈바벤군, 바이에른군, 게르만족 군대, 노르만군까지 동원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프랑크-게르만 연합군이 밀집하자, 기병대를 보내 공격했다. 투창과 화살, 칼 공격에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프랑크 족의 갑옷은 단단하여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병사들이 서로 달라붙어 진격한 프랑크군은 아브드 알 라흐만의 투창병과 보병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프란키스카 및 도끼들로 반격했다. 우미야드군과 베르베르군들은 프란키스카에 큰 부상을 당했다.

창과 투창, 화살이 바닥나자 우마이야 경기병들과 투창병, 보병들은 회군했고, 아랍 기병대와 궁수들이 돌격을 시도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전술이 통하지 않자 당황했지만, 프랑크-게르만 연합군은 전열을 유지하며 행군했다. 우마이야 기병대와 베르베르 기병대, 보병들은 직접 프랑크-게르만군을 상대했지만, 무거운 갑옷과 도끼로 중무장한 프랑크-게르만 군대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사상자가 속출했고, 서고트족 용병들과 북아프리카 아랍군들조차 도망쳤다.

아브드 알 라만은 베르베르군과 투아레크들을 정렬시켜 공격했지만, 프랑크군은 서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계속 행진했다. 아랍군들은 대부분 도주했고, 아우스트라시아군들과 슈바벤군들은 남은 아랍 군대를 도끼로 베고 아브드 알 라흐만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카를 마르텔은 계속해서 진두지휘했고,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통제권을 상실했다. 아랍 기병들이 던지는 창은 프랑크-게르만군들의 방패를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으며, 아랍군들은 프랑키스카와 도끼에 맞아 죽었다. 아우스트라시아-바이에른 군대는 아랍군들의 본진으로 쳐들어가 아랍군과 베르베르군대를 도끼로 쳐 죽였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공격했지만, 아랍군과 코르도바군은 패주하여 달아났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그날 저녁 혹은 다음날 아침에 전사했다. 이들은 보르도, 투르, 푸아티에, 아키텐 등지에서 약탈한 보물들 중 대부분을 놔두거나 버리고 달아났다.

카를 마르텔의 기병대는 푸아티에 근처에서 옴미아드군을 격파했고, 아브드 알 라만은 전사했다. 이후에도 우미야드군은 프랑크 왕국 남부와 남서부 해안가를 약탈했고, 카를 마르텔은 그 때마다 군대를 이끌고 우미야드군을 상대해야 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가 759년 나르본을 수복할 때까지 무슬림들은 프로방스 해안 및 티레니아해에서 세력을 떨쳤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두 군대가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의 클랭 강과 비엔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만났다고 추정한다. 각 군대의 병력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754년 모사라베 연대기(Mozarabic Chronicle of 754)』는 "수적으로 우세하고 무장이 뛰어난 오스트라시아의 백성[프랑크 군대]이 아브드 알-라흐만 왕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7] 이는 많은 아랍과 이슬람 역사가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서구 자료는 이에 반박하며 프랑크 군의 수를 3만 명으로 추산하며, 이는 무슬림 군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이다.[18]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당시 지형과 마르텔이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을 고려하여, 무슬림 전체 병력이 프랑크 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폴 K. 데이비스(Paul K. Davis)는 우마이야 군대를 8만 명, 프랑크 군을 약 3만 명으로 추산하면서[18] 현대 역사가들이 투르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의 규모를 2만~8만 명으로 추산했다는 점을 지적한다.[19] 그러나 에드워드 J. 쇼엔펠드(Edward J. Schoenfeld)는 6만~40만 명의 우마이야 군과 7만 5천 명의 프랑크 군이라는 기존 수치를 반박하며, "우마이야 군이 5만 명이 넘는 병력(프랑크 군은 그 이상)을 보유했다는 추산은 물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12] 역사가 빅터 데이비스 한슨(Victor Davis Hanson)도 두 군대의 규모가 거의 비슷했으며, 각각 2만~3만 명이었다고 생각한다.[20][21]

현대 역사 분석은 당시의 물류 능력 추산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중세 자료보다 더 정확할 수 있다. 데이비스와 한슨은 두 군대 모두 주변 지역에서 식량을 조달해야 했으며, 물류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른 자료들은 프랑크 군을 1만 5천~2만 명, 무슬림 군대를 약 2만~2만 5천 명으로 추산한다.[22]

전투 중 손실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후대의 편년사가들은 샤를 마르텔 군대의 손실을 약 1,500명으로 추산한 반면, 우마이야 군대는 최대 37만 5천 명에 달하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자 수치는 『교황 연대기(Liber Pontificalis)』에서 오도 대공(Odo the Great)의 툴루즈 전투 승리와 관련하여 기록되었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자신의 『롬바르디아 역사(History of the Lombards)』(약 785년 저술)에서 『교황 연대기』가 이러한 사상자 수치를 오도의 툴루즈 전투 승리와 관련하여 언급했다고 정확하게 보고했지만, 후대의 저술가들은 무슬림 사상자를 샤를 마르텔에게만 돌리고, 그들이 전사한 전투는 [투르-푸아티에] 전투가 되었다.[23] 8세기 중반에 쓰여진 『파르둘푸스 전기(Vita Pardulfi)』는 전투 후 '압드 알-라흐만의 군대가 리무쟁 지역을 불태우고 약탈하면서 알-안달루스로 돌아갔다고 전하는데, 이는 『프레데가르 연대기 속편』에서 상상했던 정도로 그들이 완전히 궤멸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24]

3. 3. 전투의 전개



카를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 왕국군은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에 맞서 유리한 지형을 선택했다. 이슬람 군의 주력이 기병이었기 때문에, 카를 마르텔은 언덕과 나무가 많은 지형을 택하여 기병의 기동력을 제한하고 보병 중심의 밀집 대형(팔랑크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방어 태세를 갖췄다.[20] 이는 보병과 기병의 전투였으나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고, 7일 동안 소규모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슬람 측은 프랑크 왕국군의 주력이 보병이라는 점을 근거로 전투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두 군대는 투르푸아티에 사이의 클랭 강과 비엔느 강 합류 지점에서 만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양측 군대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17] 라틴어 자료인 『754년 모사라베 연대기』에는 정확한 병력 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당시의 군수 지원 상황을 고려할 때, 양 진영의 동원 병력은 프랑크 왕국군 1만 5천~2만 명,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끄는 알 안달루스 원정군 2만~2만 5천 명으로 추정된다.[77]

역사가 폴 K. 데이비스는 1999년 이슬람 군대를 약 8만 명, 프랑크 왕국군을 약 3만 명으로 추정했다.[18] 반면 에드워드 J. 쇼엔펠트는 우마이야 왕조의 병력이 6만~40만 명, 프랑크 왕국군이 7만 5천 명이었다는 기존의 추정치를 기각했다. 그는 전장의 넓이와 당시의 보급 상황을 고려할 때 5만 명이 넘는 병력은 운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12] 테리 L. 고어는 프랑크 왕국군을 1만 5천~2만 명, 이슬람 군대를 2만~2만 5천 명으로 추산했다.[77]

교전 초반, 프랑크 군대는 기습 공격한 우마이야 군대의 기병과 투창병의 공격에 고전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기병과 투창병 중심이었고, 화살과 칼을 소지하고 있었다. 기병의 창으로 적군에게 부상을 입힌 뒤 투창병이나 칼, 화살을 쏘는 보병, 궁병을 이용해 목표를 타격했다. 카를 마르텔의 군대는 프란키스카라 불리는 무거운 대형 도끼를 든 보병과 기타 도끼를 든 보병, 철제 투구와 미늘 갑옷 차림이었다. 카를 마르텔은 프랑크 군 외에도 아키텐 군, 슈바벤 군, 바이에른 군, 프랑크 왕국 동부의 게르만족 군대 및 노르만 군까지 동원했다. 이들은 주로 창이나 도끼를 소지하고 있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카를 마르텔의 프랑크-게르만 연합군이 밀집해 있자, 좌우 양쪽에서 기병대를 보내 공격했다. 투창과 화살, 칼이 날아왔고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프랑크 족의 갑옷은 단단하여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자 프랑크 군은 한 곳으로 뭉쳤다. 병사들이 서로 달라붙어 진격한 프랑크 군은 부상당해도 참고 행진했고, 동료 군사가 죽어도 시신을 밟고 행진했다. 기병대와 궁수들이 계속 사격했지만, 한데 뭉친 프랑크-게르만 군은 그대로 행진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투창병과 칼, 화살을 다루는 보병, 용병인 투아레크 족을 보내 돌격시켰다. 프랑크-게르만 군과 가까워지자 이들은 투창과 화살을 날리고 칼로 공격했다. 프랑크-게르만 군은 프란키스카 및 도끼로 공격했다. 우미야드 군과 베르베르 군은 프란키스카에 큰 부상을 당했다. 프랑크 군의 사상자는 증가했지만, 투창과 화살이 떨어져 감에 따라 도끼를 든 프랑크-게르만 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갑옷과 방패가 가볍거나 없던 우마이야 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창과 투창, 화살이 거의 바닥나자 우마이야의 경기병들과 투창병, 보병들은 옆으로 돌아서 회군했고, 이어 아랍 군의 기병대와 궁수들이 돌격을 시도했다. 투창 공격과 화살 공격 후 전열이 무너진 적군을 보병대와 칼을 다루는 병사들, 그리고 중기병대가 상대해서 궤멸시키는 전술이 통하지 않자 아브드 알 라흐만은 당황했다. 전사자를 많이 냈지만 프랑크-게르만 연합군은 전열을 흐뜨러뜨리지 않고 단단하게 뭉쳐서 행진했다. 우마이야 기병대와 베르베르 기병대 및 칼을 다루는 보병들은 직접 프랑크-게르만 군을 상대했고, 처음에는 우마이야-베르베르 기병대가 빠른 속도로 움직여 우세했지만, 점차 무거운 갑옷과 프란키스카를 비롯한 무거운 도끼로 중무장한 프랑크-게르만 군대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의 나팔수들은 뿔나팔을 불고 투창 경기병대들과 보병대는 재빨리 퇴각했다. 이들은 다시 투창으로 재무장하고 돌격했다. 그러나 갑옷, 방패가 가벼운 경기병대는 오히려 프랑크-게르만 군의 무거운 도끼에 쉽게 당했고,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사상자가 속출했다. 서고트에서 데려온 서고트족 용병들은 거의 대부분 도망쳤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베르베르 군과 투아레크 족을 정렬시켜 공격했다. 남은 아랍 군들과 중기병대와 함께 프랑크 군을 공격했지만, 이들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서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계속 행진했다. 남아있던 아랍 군들은 공포감을 느끼고 대부분 도주했다. 아우스트라시아 군들과 슈바벤 군들은 남은 아랍 군대를 도끼로 베고 계속 아브드 알 라흐만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방어 장비를 갖추지 못한 북아프리카의 아랍 군들은 쉽게 프랑크-게르만 군대에게 쓰러졌다. 카를 마르텔은 계속해서 진두지휘를 했고, 화살과 투창 등이 바닥난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우왕좌왕했고, 통제권을 상실했다. 아랍의 기병들이 던지는 창은 프랑크-게르만 군들의 방패를 뚫지 못하고 번번히 튕겨나갔으며, 아랍 군들은 프랑크-게르만 군들이 던지는 프란키스카와 도끼에 맞아 죽었다. 마지막 날 저녁, 아우스트라시아-바이에른 군대는 아랍 군들의 본진으로 쳐들어가 아랍 군과 베르베르 군대를 도끼로 쳐 죽였다.

마지막 날, 프랑크 군이 이슬람 군의 약탈품을 실은 수레 등을 공격했다.[77] 인종, 민족, 종교가 뒤섞인 알 가피키의 군대에서는 전리품 방어와 공격으로 인해 지휘 체계가 혼란에 빠졌다(당시 약탈품은 병사들의 봉급과 같았다. 또한 이슬람 측은 가족을 동반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알 가피키는 혼란에 빠진 자신의 군대를 정비하려고 앞으로 나섰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알 가피키의 사망은 『754년 모사라베 연대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슬람 측 기록에 따르면, 알 가피키 사후 유력자들이 회의를 열었지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밤에 후퇴했다고 한다.(알 가피키는 이슬람 측에서는 민족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공격했지만, 아랍 군과 코르도바 군은 패주하여 달아났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그날 저녁 혹은 옴미야드 군이 거의 대부분 도주하는 그 다음날 아침에 전사했다고 한다. 이들은 보르도를 넘어 이베리아로 급히 달아났으며, 보르도, 투르, 푸아티에, 아키텐 등지에서 약탈한 보물들 중 거의 대부분을 놔두거나 버리고 달아났다.

프랑크 왕국군은 이후의 공격에 대비하여 곧바로 무장 해제하지 않았다.

4. 결과 및 영향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 양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군대는 투르 전투 이전에는 프랑크족을 포함한 게르만 부족들을 크게 우려하지 않았으나, 전투 이후에야 프랑크족을 주목할 만한 군사 세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20]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북쪽의 잠재적 적에 대한 정찰을 소홀히 했는데, 만약 정찰을 제대로 했다면 717년부터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며 성장해 온 카를 마르텔을 경계했을 것이다.

전투에서 카를 마르텔은 기습 공격을 성공시켰고, 방어적인 팔랑크스 진형을 구축했다.[20] 아랍 자료에 따르면, 프랑크족은 큰 정사각형 형태로 진을 치고, 언덕과 나무를 이용하여 무슬림 기병대의 돌격을 방해하거나 분산시켰다.[20]

프랑크 기병과 우마이야 칼리파 기병의 충돌 (19세기 샬럿 메리 영의 삽화)


샤를 마르텔은 10년 전 툴루즈 전투 이후 이 전투를 준비해 왔다.[20] 그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중기병이 없었지만, 노련하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보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32] 이 보병들은 중무장을 하고 팔랑크스 진형을 형성하여 기병대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32]

754년 모사라베 연대기는 이 전투를 상세히 묘사하며, 북방 민족들이 마치 빙하처럼 단단히 뭉쳐 벽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33] 프랑크군은 수적으로 우세하고 무장이 뛰어난 아랍군을 격파하고, 압드 알-라흐만 왕을 죽였다.[33]

이 전투의 승리로 카를 마르텔은 "마르텔(망치)"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프랑크 왕국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의 아들 피핀은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으며,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800년에 프랑크-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4. 1. 이슬람 세력의 후퇴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진출은 좌절되었다.[41] 이후에도 이슬람 세력은 프랑크 왕국 남부 해안가를 약탈했으나, 카를 마르텔은 계속해서 이들을 격퇴하였다.[43] 735년, 알-안달루스의 새로운 총독 우크바 이븐 알-하자즈는 투르 전투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고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갈리아를 침략했다. 그는 아를을 함락하고 아비뇽을 점령하는 등 프로방스 중심부까지 진격했다.[43]

우크바 이븐 알-하자즈의 군대는 4년 동안 셉티마니아와 프로방스 일부에 머물며 리옹, 부르고뉴, 피에몬테를 습격했다. 카를 마르텔은 두 차례에 걸쳐 이 지역을 침략했지만, 결국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프랑크 영토로 후퇴해야 했다.[43] 비록 피레네 산맥을 넘는 대규모의 이슬람 원정은 실패했지만, 소규모 습격은 계속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내부의 혼란도 추가적인 원정을 어렵게 만들었다.[43]

투르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마이야 왕조는 셉티마니아 일부 지역을 27년 동안 더 지배했다. 734년 나르본 총독 유수프 이븐 압드 알라흐만 알피흐리는 카를 마르텔의 침략에 대비하여 여러 도시들과 공동 방위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를 마르텔은 남부 지역을 점차 장악하며 우마이야 왕조의 요새들을 정복하고, 아비뇽 공성전(737)과 님 공성전에서 수비대를 파괴했다.[44] 베르 강 전투에서 나르본을 구원하려던 이슬람 군대는 궤멸되었지만, 카를 마르텔은 737년 나르본 공성전에서 도시를 함락시키는데 실패했다.[44]

4. 2. 프랑크 왕국의 성장

카를 마르텔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여 에우도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은 아키텐 지역에 대한 권한을 확보하고, 프랑크 왕국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다.[36] 이 승리로 카를은 "마르텔(망치)"이라는 칭호를 얻어 "카를 마르텔"로 불리게 되었다.[46] 그의 아들 피핀은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피핀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피핀의 아들 카를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샤를마뉴(카를 대제)(800년에 프랑크-로마 황제로 즉위)이다.

4. 3. 역사적 평가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전투를 이슬람 세력의 유럽 확장을 저지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해왔다. 754년의 『모사라베 연대기』, 『프레데가르 연대기』 등 초기 사료들은 이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는 샤를 마르텔이 기독교 세계를 구원했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많은 역사가들은 투르 전투를 세계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았다. H. G. 웰스는 샤를 마르텔이 알프스 북쪽 유럽의 여러 하급 영주들을 지배했으며,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48] 벨기에 역사가 고드프루아 쿠르는 이 전투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며, 기독교 문명의 존속 여부를 결정지었다고 주장했다.[49] 독일 역사가들은 샤를 마르텔을 특히 칭송했는데, 슐레겔은 이 "위대한 승리"가 서구 기독교 국가들을 이슬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했다고 말했다.[50] 레오폴트 폰 랑케는 이 시기를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 중 하나로 보았다.[50] 한스 델브뤼크는 이 전투가 세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고 평가했다.[50]

그러나 현대에 들어 일부 역사가들은 투르 전투의 중요성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 전투가 단순한 약탈 행위였으며, 칼리프에게는 작은 문제에 불과했다고 본다. 알레산드로 바르베로는 샤를 마르텔이 격파한 이슬람 군대의 목적은 프랑크 왕국 정복이 아니라 투르의 성 마르탱 수도원 약탈이었다고 지적한다.[71] 토마즈 마스트낙은 현대 역사가들이 이 승리를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 유럽을 구원한 것으로 묘사하는 신화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72] 필립 쿠리 히티는 이 전투에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슬람 군대는 이미 지쳐 자연스러운 한계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73]

반면, 이슬람 측에서는 이 전투를 작은 충돌 정도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아랍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언급하더라도 사소한 충돌로 묘사한다.[57] 구스타브 폰 그루네바움은 이 패배가 당시 무슬림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고 썼다.[58] 당대 아랍과 무슬림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제2차 공방전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아서 C. 클라크는 이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이 승리했다면 인류의 발전이 더 빨라졌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78] 이는 중도 진보적 관점과 유사하게, 다양한 역사적 가능성을 열어두고 평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5. 전투의 명칭

영어로는 “Battle of Tours(투르 전투)”, 아랍어로는 "معركة بلاط الشهداءar(마우라카트・바라트 알-슈하다(순교자의 길) 전투)”라고 불린다.[76] 이슬람교도 측의 명칭 유래는 14세기 모로코마라케시 역사학자 이븐 이다리(Ibn Idhari)의 역사서 "البيان المغرب في اختصار أخبار ملوك الأندلس والمغربar" (약칭 바얀(بيانar))에 유래한다. 이 책은 알안달루스 역사에서 이븐 하얀(Ibn Hayyan)의 자료를 인용하여 “안달루시아의 지배자 압드 알-라흐만 이븐 압드 알라 알-가피키(Abd al-Rahman ibn Abd Allah al-Ghafiqi)는 로마인의 땅에 침입하여, 히즈라력 115년에 “순교자의 길(بلاط الشهداءar)”로 알려진 곳에서 그의 군대와 함께 순교하였다.”라는 기록을 담고있다. 이븐 하얀은 전투터에서 아잔이 오랫동안 들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국어로는 '투르-푸아티에 전투'로 통칭한다.

6. 한국의 관점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유럽이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막고 기독교 문명을 지켜낸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이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던 카를 마르텔이 이끄는 군대가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이슬람 군대를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서유럽이 이슬람화되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카를 마르텔은 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어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754년 모사라베 연대기는 이 전투를 "북방 민족들이 마치 추운 지방의 빙하처럼 단단히 뭉쳐 벽처럼 움직이지 않았다"라고 묘사하며, 프랑크 군의 용맹함을 강조했다.[33] 이는 프랑크 군대가 보병 중심의 전술로 기병 중심의 이슬람 군대를 격파한,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 계속편''에서는 카를 마르텔을 "위대한 전투의 사나이"로 묘사하며, 그가 이 전투에서 "그들을 짚처럼 흩어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34] 이러한 기록들은 카를 마르텔의 군사적 역량과 투르 푸아티에 전투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베다의 ''영국 교회사''에서는 투르 전투를 "사라센의 무서운 역병"으로 묘사하며, 이슬람 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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