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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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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1916년 런던에서 태어난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시사 평론가이다. 런던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부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74년부터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중동 및 이슬람 역사 연구에 기여했다. 루이스는 중세 아랍 및 오스만 제국 연구를 시작으로, 현대 중동 정치,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해 명성을 얻었지만, 오리엔탈리즘,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 이라크 전쟁 지지 등과 관련하여 논란과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저서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2. 생애

2007년의 버나드 루이스


버나드 루이스는 1916년 5월 31일, 런던 스토크 뉴잉턴에서 중산층 영국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16] 어린 시절 바르 미츠바를 준비하며 언어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런던 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원(SOAS)에서 근동 및 중동 역사 연구로 학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17] 파리 대학교에서도 수학했다.[13]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육군의 왕립 기갑 부대와 정보 부대에서 복무한 뒤 외무부로 파견되었다.[19] 전쟁 후 모교인 SOAS로 돌아와 교수로 재직하며 근동 및 중동 역사 학과장 등을 역임했다.[1] 1974년부터는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와 고등 연구소에서 공동 직책을 맡았으며, 1986년 프린스턴에서 은퇴한 후에는 코넬 대학교에서도 활동했다.[13] 그는 1982년 미국 귀화 시민이 되었다.

1947년 루스 헬렌 오펜헤임과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두었으나, 1974년 이혼했다.[13]

학문 활동 외에도 북미 중동 연구 협회(MESA) 창립 멤버로 참여했으며, 이후 2007년에는 중동 및 아프리카 연구 협회(ASMEA)를 설립하기도 했다.[20] 1990년에는 국립 인문학 기금이 수여하는 제퍼슨 강연자로 선정되었고,[21][22] 2007년에는 미국 기업 연구소에서 어빙 크리스톨 강연을 했다.[23]

그는 여러 학술적 영예와 상을 받았으며,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연도수상 내역비고
1963년영국 학사원 회원 선출[1]
1973년미국 철학회 회원 선출[87]
1978년테크니온 - 이스라엘 공과대학교 하비 상"중동 사람들의 삶과 풍습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저술을 통해 보여준 공로"[88]
1983년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 선출[89]
1990년국립 인문학 기금 제퍼슨 강연 강사 선정[21]
1996년전미 도서 비평가 협회상 일반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저서 The Middle East[90]
1999년전미 유대교 도서상 (이스라엘 부문)저서 The Multiple Identities of the Middle East[91]
2002년미국 철학회 토머스 제퍼슨 메달예술, 인문 및 사회 과학 분야[92]
2002년아타튀르크 국제 평화상터키 및 아타튀르크의 긍정적 영향 분석 공로[93]
2004년업적 아카데미 골든 플레이트 상[94]
2006년국립 인문학 기금 국립 인문학 훈장[95]
2007년미국 기업 연구소 어빙 크리스톨 상[23]
2007년워싱턴 근동 정책 연구소 학자-정치가 상[96]



루이스는 101세의 나이로 2018년 5월 19일 뉴저지주 보히스 타운십의 요양 시설에서 사망했으며,[85] 텔아비브의 트럼펠도르 묘지에 묻혔다.[86]

2. 1. 유년기와 교육

버나드 루이스는 1916년 5월 31일, 런던 스토크 뉴잉턴에서 중산층 영국 유대인 부모인 해리 루이스와 제인 레비 사이에서 태어났다.[16] 그는 바르 미츠바를 준비하면서 언어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런던 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원 (SOAS)을 졸업했다.

2. 2. 학문적 경력



1936년, 루이스는 런던 대학교 산하 동양 아프리카 연구 대학원(SOAS)에서 근동 및 중동 역사를 중심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3년 후인 1939년에는 같은 대학원에서 이슬람 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17] 이 과정에서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중동 역사 연구로 방향을 정했다. 1937년에는 파리 대학교에서 루이 마시뇽의 지도를 받으며 "세미트 연구 디플로마"를 취득하기도 했다.[13] 1938년부터는 모교인 SOAS에서 이슬람 역사 조교 강사로 활동을 시작했다.[18]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루이스는 영국 육군의 왕립 기갑 부대에서 복무했으며, 1940년부터 1941년까지는 정보 부대에서 병장으로 근무한 후 외무부로 파견되었다.[19] 전쟁이 끝난 후 SOAS로 복귀하여 약 25년간 재직했다.[1] 1949년에는 33세의 나이로 신설된 근동 및 중동 역사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에는 영국 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

1974년, 57세가 된 루이스는 프린스턴 대학교와 고등 연구소의 공동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의 임명 조건은 루이스가 일 년에 한 학기만 강의하고, 행정적 책임을 면제받아 이전보다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루이스의 프린스턴 도착은 그의 연구 경력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의 시작을 알렸으며, 그는 이 기간 동안 이전에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수많은 책과 기사를 출판했다. 1986년 프린스턴에서 정년 퇴임한 후에는 1990년까지 코넬 대학교에서 활동했다.[13]

1966년, 루이스는 북미 중동 연구 협회(MESA)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2007년에는 MESA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중동 및 아프리카 연구 협회(ASMEA)를 별도로 설립했는데, 이에 대해 《뉴욕 선》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 내 역할에 비판적인 학자들이 지배하는 단체"라고 언급했다.[20]

1990년, 국립 인문학 기금은 루이스를 제퍼슨 강연자로 선정했는데, 이는 미국 연방 정부가 인문학 분야의 업적에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였다. 그의 강연 제목은 "서구 문명: 동양의 시각"이었으며, 《애틀랜틱 먼슬리》에 "이슬람 분노의 뿌리"라는 제목으로 수정되어 재출판되었다.[21][22] 2007년 어빙 크리스톨 강연은 미국 기업 연구소에서 열렸으며, 《유럽과 이슬람》으로 출판되었다.[23]

2. 3. 정치적 영향력

1960년대 중반부터 루이스는 현대 중동 문제에 대한 주요 논평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분석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상에 대한 그의 견해는 널리 알려졌으며, 동시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미국의 역사학자 조엘 베이닌은 그를 "아마 북미 중동 학계에서 가장 명확하고 학식이 풍부한 시온주의 옹호자"라고 평가했다.[52] 이러한 학문적 권위를 바탕으로 루이스의 정책 조언은 상당한 비중을 가졌다.[24]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는 "이 새로운 세기에 그의 지혜는 정책 입안자, 외교관, 동료 학자,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매일 추구받고 있다"고 언급했다.[53]

루이스는 소련에 대해 강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으며, 이슬람 역사 연구에서 자유주의적 전통을 따랐다. 그의 첫 저서인 『이스마일주의의 기원』에는 초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반영되었으나,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했다. 그의 후기 저작들은 중동 연구 분야의 주요 흐름 중 하나였던 제3세계주의의 좌파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평가받는다.[13]

데이비드 호로비츠가 2011년에 버나드 루이스를 인터뷰하고 있다


루이스는 활동 기간 동안 세계 여러 정부와 관계를 맺었다. 이스라엘골다 메이어 총리는 그의 글을 내각 구성원들에게 읽도록 지시했으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부시 대통령 본인 등에게 조언을 제공했다. 또한 요르단후세인 국왕 및 그의 동생 하산 빈 탈랄 왕자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외에도 이란의 마지막 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케난 에브렌이 이끌던 터키 군사 정권, 안와르 사다트이집트 정부와도 교류했다. 1971년에는 사다트 행정부의 대변인 타하신 바시르의 요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중재자 역할을 맡아, 평화 협정 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이스라엘 정부에 전달했다.[73]

루이스는 소련의 중동 내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며 서방 세계와 이스라엘, 터키 간의 긴밀한 협력을 옹호했다. 특히 현대 터키가 서방 세계의 일원이 되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자신의 중동 지역 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부여했다.[13] 그는 터키 연구 분야에서의 학문적 업적과 기여를 인정받아 터키 연구소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다.[54]

루이스는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를 7세기 이슬람 출현 이후 지속적으로 충돌해 온 문명으로 간주했다. 1990년 발표한 에세이 『무슬림의 분노의 뿌리』에서 그는 서방과 이슬람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에세이와 그 기반이 된 1990년 제퍼슨 강연은 북미 지역에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5] 또한 이 에세이는 사무엘 P. 헌팅턴의 저서로 유명해진 "문명의 충돌"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56] 그러나 다른 자료에 따르면 루이스는 이미 1957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57]

1998년, 루이스는 런던 기반의 신문 『알 쿠드스 알 아라비』에 실린 오사마 빈 라덴의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문을 접했다. 그는 "살인 면허"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빈 라덴의 언어를 "지하드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하고, 그가 서방 세계에 가할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56] 이 에세이는 클린턴 행정부와 미국 정보 기관이 수단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을 추적하기 시작한 이후에 발표되었다.

그의 일부 견해는 논란이 많은 주장인 유라비아 테제와 유사성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유럽이 세기 말까지 이슬람화될 것이며,[58] "아랍 서부, 즉 마그레브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59] 그의 2007년 소책자 『유럽과 이슬람』[60]에서는 이러한 인구 통계학적 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 4. 사망

버나드 루이스는 101세의 나이로 2018년 5월 19일 뉴저지주 Voorhees 타운십의 요양 시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102번째 생일 12일 전이었다.[85] 그는 텔아비브의 트럼펠도르 묘지에 묻혔다.[86]

3. 주요 연구 분야 및 업적

버나드 루이스는 중세 이슬람 역사 연구로 학문적 경력을 시작하여 오스만 제국 연구를 거쳐 현대 중동 문제 및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영향력 있는 논평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의 연구는 학계를 넘어 정책 결정과 대중 인식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나, 동시에 여러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초기에는 이스마일파의 기원, 역사 속의 아랍인, 암살단 등 중세 이슬람 사회와 역사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쌓았다.[13][24][97]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아랍 국가에서의 연구가 어려워지자, 그는 서방 연구자들에게 새롭게 접근 가능해진 오스만 제국 기록 보관소를 활용하여 연구 방향을 전환했다.[13] 오스만 제국 연구를 통해 그는 이슬람 사회의 정부, 경제, 인구 통계 등 다방면에 걸친 분석을 제시하며 중동 역사 연구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4]

그러나 루이스는 중동의 발전이 정체된 원인을 서구 식민주의보다는 이슬람 문화와 종교 자체의 내부적 요인, 특히 "문화적 오만함"에서 찾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펼쳤다.[13][25] 이러한 시각은 에드워드 사이드와 같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로부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을 받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98] 사이드는 루이스가 서구 중심적 시각에서 이슬람 세계를 왜곡하고 단순화한다고 주장했다.[63][67]

1990년 발표한 에세이 '무슬림 분노의 뿌리'는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널리 알리고, 새뮤얼 P.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론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55][56][99][100] 그는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의 오랜 충돌을 강조했으며, 9.11 테러 이후 그의 저작들은 다시 주목받았다.

루이스는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며 역사 수정주의 논란을 일으켰고, 프랑스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34][35][36] 또한, 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등 네오콘과 가까운 행보를 보이며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71][101][102] 이러한 그의 학문적, 정치적 입장은 지속적인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29][30][77]

아래는 버나드 루이스의 주요 저서 목록이다.

원제출판 연도한국어 번역본 (존재하는 경우)
The Origins of Ismailism1940해당 없음
A Handbook of Diplomatic and Political Arabic1947해당 없음
역사 속의 아랍인 (The Arabs in Historyeng)1950해당 없음
The Emergence of Modern Turkey1961김대성 옮김, 《오스만제국 근대사》(펴내기, 1994) (일부 번역)[106]
Istanbul and the Civilizations of the Ottoman Empire1963해당 없음
암살단: 이슬람의 암살 전통 (The Assassins: A Radical Sect in Islameng)1967주민아 옮김, 《암살단: 이슬람의 암살 전통》(살림출판사, 2007)
The Cambridge History of Islam (공저)1970해당 없음
Islam: From the Prophet Muhammad to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 (편집)1974해당 없음
History — Remembered, Recovered, Invented1975해당 없음
Race and Color in Islam1979해당 없음
Christians and Jews in the Ottoman Empire: The Functioning of a Plural Society (공저)1982해당 없음
The Muslim Discovery of Europeeng1982해당 없음
The Jews of Islam1984해당 없음
Semites and Anti-Semites1986해당 없음
Islam from the Prophet Muhammad to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1987해당 없음
The Political Language of Islam1988해당 없음
Race and Slavery in the Middle East: an Historical Enquiry1990해당 없음
The World of Islam: Faith, People, Culture (편집)1992김호동 옮김, 《이슬람 문명사》(이론과실천, 1994) / 김호동 옮김, 《이슬람 1400년》(까치, 2001) (개역판)
Islam and the West1993해당 없음
Islam in History1993해당 없음
The Shaping of the Modern Middle East1994해당 없음
Cultures in Conflict1994해당 없음
중동의 역사 (The Middle East: A Brief History of the Last 2,000 Yearseng)1995이희수 옮김, 《중동의 역사》(까치, 1998)
The Future of the Middle East1997해당 없음
The Multiple Identities of the Middle East1998해당 없음
A Middle East Mosaic: Fragments of Life, Letters and History2000해당 없음
Music of a Distant Drum: Classical Arabic, Persian, Turkish, and Hebrew Poems2001해당 없음
무엇이 잘못되었나? (What Went Wrong?: The Clash Between Islam and Modernity in the Middle Easteng)2002서정민 옮김, 《무엇이 잘못되었나: 서구와 중동, 그 화합과 충돌의 역사》(나무와숲, 2002)
이슬람의 위기 (The Crisis of Islam: Holy War and Unholy Terroreng)2003해당 없음
From Babel to Dragomans: Interpreting the Middle East2004해당 없음
Islam: The Religion and the People (공저)2008해당 없음
Faith and Power: Religion and Politics in the Middle East2010해당 없음
Notes on a Century: Reflections of a Middle East Historian (공저)2012서정민 옮김, 《100년의 기록: 버나드 루이스의 생과 중동의 역사》(시공사, 2015)



아래는 버나드 루이스가 받은 주요 상훈 목록이다.

연도상훈명수여 기관/사유
1963영국 학사원 회원영국 아카데미[1]
1973회원미국 철학회[87]
1978하비 상테크니온 - 이스라엘 공과대학교 ("중동 사람들의 삶과 풍습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저술을 통해 보여준 공로")[88]
1983회원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89]
1990제퍼슨 강좌 강사 선정인문학 국립 기금[21]
1999전미 유대교 도서상 (이스라엘 부문)The Multiple Identities of the Middle East 저서[91]
2002예술, 인문 및 사회 과학 분야의 탁월한 업적에 대한 토마스 제퍼슨 메달미국 철학회[92]
2002아타튀르크 국제 평화상터키 (역사 연구 기여 공로)[93]
2004골든 플레이트 상업적 아카데미[94]
2006국립 인문학 훈장인문학 국립 기금[95]
2007어빙 크리스톨 상미국 기업 연구소[23]
2007학자-정치가 상워싱턴 근동 정책 연구소[96]


3. 1. 초기 이슬람 역사 및 중세 이슬람 사회

버나드 루이스는 중세 아랍, 특히 시리아 역사를 연구하며 연구 경력을 시작했다.[13] 그의 첫 번째 논문은 중세 이슬람의 전문 길드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 연구는 약 30년 동안 해당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저작으로 널리 인정받았다.[24]

루이스의 초기 연구는 이슬람 역사와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의 주요 초기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 ''The Origins of Ismailism'' (1940): 이스마일파의 기원을 다룬 연구.[97]
  • ''역사 속의 아랍인'' (The Arabs in Historyeng, 1950): 아랍 역사를 개괄적으로 다룬 저서로,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13]
  • ''암살단: 이슬람의 암살 전통'' (The Assassins: A Radical Sect in Islameng, 1967): 중세 이슬람의 급진 분파였던 암살단을 조명했다.
  • ''Islam: From the Prophet Muhammad to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 (1974, 편집) 및 ''Islam from the Prophet Muhammad to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 (1987):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까지의 이슬람 역사를 다루었다.


이러한 초기 연구를 통해 루이스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주었으며, 서구 학계에 이슬람 역사를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7]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중세 이후 이슬람 문명의 발전에 대해 보다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1982년 저서 ''유럽을 발견한 무슬림''(The Muslim Discovery of Europeeng)에서 루이스는 무슬림 사회가 서구 세계와의 교류에서 수동적이었으며, 십자군의 성공 역시 부분적으로는 무슬림 내부의 약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25] 그는 11세기 초부터 이슬람 사회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외부적 요인보다는 "문화적 오만함"과 같은 내부적 문제, 즉 외부 문물을 창의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13]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이후 그의 연구 방향과 오리엔탈리즘 논쟁에 영향을 미쳤다.[98]

3. 2. 오스만 제국 연구

버나드 루이스는 중세 아랍, 특히 시리아 역사를 연구하며 연구 경력을 시작했다.[13] 그의 첫 번째 논문은 중세 이슬람의 전문 길드에 관한 것이었으며, 오랫동안 해당 분야의 권위 있는 저작으로 인정받았다.[24] 그러나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유대인 학자들이 아랍 국가에서 기록 보관 및 현장 연구를 수행하기 어려워지자, 루이스는 연구 방향을 오스만 제국 연구로 전환했다. 이는 당시 서방 연구자들에게 새롭게 접근이 가능해진 오스만 제국의 기록 보관소를 활용하기 위함이기도 했다.[13]

루이스는 오스만 제국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슬람 사회의 정부, 경제, 인구 통계 등 다양한 측면을 조명하는 여러 논문을 발표하며 중동 역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4] 그의 주요 저서로는 ''The Emergence of Modern Turkey'' (1961), ''Istanbul and the Civilizations of the Ottoman Empire'' (1963) 등이 있다.

루이스는 중동의 상대적 후진성이 19세기 유럽 식민주의의 영향이라는 탈식민주의적 시각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중동의 쇠퇴가 문화와 종교를 포함한 내부적인 요인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1982년 저서 ''유럽을 발견한 무슬림''에서 그는 무슬림 사회가 서구를 따라잡지 못했으며, 십자군의 성공 역시 부분적으로는 무슬림 내부의 약점에서 기인했다고 분석했다.[25] 나아가 그는 11세기 초부터 이슬람 사회의 쇠퇴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외부적 압력보다는 창의적 수용을 가로막는 "문화적 오만"과 같은 내부 문제의 결과라고 보았다.[13]

3. 3. 현대 중동 정치 및 이슬람 근본주의

1960년대 중반부터 루이스는 현대 중동 문제에 대한 논평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분석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상에 대한 견해로 명성을 얻었으나 동시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52] 미국의 역사학자 조엘 베이닌은 그를 "아마 북미 중동 학계에서 가장 명확하고 학식이 풍부한 시온주의 옹호자"라고 평가했다.[52] 루이스의 학문적 권위는 그의 정책 조언에 특별한 무게를 실어주었다.[24]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는 "이 새로운 세기에 그의 지혜는 정책 입안자, 외교관, 동료 학자,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매일 추구받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53]

소련에 대한 강한 비판가였던 루이스는 이슬람 역사 연구에서 자유주의적 전통을 이어갔다. 그의 초기 저서인 『이스마일주의의 기원』에는 마르크스주의적 견해가 일부 반영되었지만, 루이스는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버렸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제3세계주의의 좌파적 흐름에 대한 반작용이며, 이는 중동 연구에서 중요한 흐름이 되었다.[13]

루이스는 경력 동안 전 세계 정부와 관계를 맺었다.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루이스의 기사를 내각 구성원에게 읽도록 할당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부시 자신을 포함한 행정부 구성원들에게 조언을 했다. 그는 또한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그의 형제인 하산 빈 탈랄 왕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또한 이란의 마지막 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케난 에브렌이 이끈 터키 군사 독재 정권, 그리고 안와르 사다트의 이집트 정부와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1971년 사다트의 대변인 타하신 바시르의 요청으로 사다트 행정부와 이스라엘 간의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이스라엘 정부에 평화 협정의 가능성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73]

루이스는 소련의 중동 영향력 확대를 고려하여 서방과 이스라엘, 터키 간의 더 긴밀한 관계를 옹호했다. 현대 터키는 서방의 일부가 되려는 노력을 통해 루이스의 관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3] 그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학문적 탁월함과... 터키 연구 분야에 대한 오랜 헌신적인 봉사를 바탕으로" 수여되는 터키 연구소의 명예 회원이었다.[54]

루이스는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을 7세기 이슬람의 출현 이후 끊임없이 충돌해 온 문명으로 본다. 그의 에세이 『무슬림의 분노의 뿌리』(1990)에서 그는 서방과 이슬람 간의 투쟁이 강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 에세이(그리고 이 기사의 기반이 된 루이스의 1990년 제퍼슨 강연)가 처음으로 북미에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도입했다고 한다.[55] 이 에세이는 사무엘 P. 헌팅턴의 동명의 저서에서 두각을 나타낸 "문명의 충돌"이라는 구절을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56] 그러나 다른 소식통은 루이스가 1957년 워싱턴에서 열린 회의에서 처음으로 "문명의 충돌"이라는 문구를 사용했으며, 이는 회의록에 기록되었다고 지적한다.[57]

1998년 루이스는 런던에 본부를 둔 신문 『알 쿠드스 알 아라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읽었다. 그의 에세이 "살인 면허"에서 루이스는 빈 라덴의 언어를 "지하드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고 빈 라덴이 서방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56] 이 에세이는 클린턴 행정부와 미국 정보 기관이 수단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을 추적하기 시작한 후에 출판되었다.

그의 견해 중 일부는 유라비아 테제와 유사하며, 예를 들어 유럽이 세기 말까지 이슬람으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58] "아랍 서부, 마그레브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59] 그의 2007년 소책자 『유럽과 이슬람』[60]은 인구 통계학적 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루이스는 지하드를 명확한 종교적 의무로 묘사하면서도 테러 행위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61]

> 코란 또는 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희생자에게 강요하는 광신적인 전사는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소위 선택—개종 또는 죽음—또한 드물고 이례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실이 아니다. 무슬림의 불신자 및 이교도에 대한 관용은 17세기 세속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기독교 세계에서 가능한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나았다.[61]

>

> 무슬림 전사들은 여성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여성, 어린이 또는 노인을 죽이지 말 것, 포로를 고문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학대하지 말 것, 적대 행위의 개시 또는 휴전 후의 재개에 대한 공정한 경고를 할 것, 협정을 존중할 것을 명령받았다. 고전적인 법학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어떠한 승인이나 정당성도 제공하지 않았다. 실제로 오늘날 실행되는 테러리즘의 사용에 대한 증거도 없다.[61]

>

> 지금까지 널리 퍼진 자살 폭탄 테러 행위의 등장은 20세기의 발전이다. 이것은 이슬람 역사에 전례가 없으며, 이슬람 신학, 법 또는 전통의 관점에서 정당성이 없다.[61]

아사드 아부칼릴은 이러한 견해를 비판하며 "방법론적으로, [루이스]는 개별 무슬림의 테러리즘을 이슬람 테러리즘으로 간주해야 하는 반면, 개별 유대인 또는 기독교인의 테러리즘은 결코 유대교 또는 기독교 테러리즘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62] 그는 또한 루이스의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이해를 비판하며, 루이스가 빈 라덴을 알 가잘리와 같은 고전적인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영향력 있는 무슬림 신학자"로 해석하는 것을 "그가 바로 테러리스트 광신자"로 보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보았다. 아부칼릴은 또한 루이스의 세계관에서 이슬람의 위치를 더 일반적으로 비판하며, 그의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학 중심주의"(막심 로딘손의 용어를 빌려)였다고 주장했다. 즉, 루이스는 무슬림 사람들, 그들의 언어, 무슬림이 우세한 지리적 지역, 이슬람 정부, 아랍 국가의 정부 및 샤리아 연구를 "이슬람"이라는 라벨 아래에 묶어 모든 측면의 행동을 오직 이슬람 신학의 렌즈를 통해 해석한다. [73]

2006년, 루이스는 이란이 15년 동안 핵무기를 개발해 왔다고 썼다. 2006년 8월, 루이스는 이란과의 관계에서 상호확증파괴 개념이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사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에 2006년 8월 22일이 이슬람력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썼다. 이란 대통령은 그날까지 이란의 핵 개발에 대한 미국의 요구에 대한 답변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루이스는 그 날짜가 1427년 라자브 달의 27일에 해당하며, 이슬람교도들이 무함마드예루살렘에서 천국으로 갔다가 돌아온 '밤의 비행'(Isra and Mi'raj)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썼다. 루이스는 그 날짜가 "이스라엘과, 필요하다면 세계의 종말을 위한 적절한 날"이 될 것이라고 썼다.[78] 루이스에 따르면, 상호확증파괴는 이란의 지도자들이 가진 "종말론적 세계관"과 "오늘날 이슬람 세계의 일부를 괴롭히는 자살 또는 순교 콤플렉스" 때문에 이란의 경우 효과적인 억지력이 아니다.[79] 루이스의 기사는 상당한 언론 보도를 받았다.[80][81] 그러나 아무런 사건 없이 그 날이 지나갔다.[82][83][84]

루이스는 중동의 중세 이슬람사 연구를 시작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후 시사 평론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미국의 중동·이슬람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의 이슬람 연구 분야의 권위자로 일컬어진다. 초기에는 이슬람에 대한 긍정적인 연구로 명성이 높았으며, 마르크스주의제3세계로서의 이슬람 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로 알려졌다.[97] 그러나 점차 '몰락'했다고 여기며 근대 이슬람 문명에 부정적인 논조를 보이기 시작했고, 1978년에는 포스트콜로니얼 이론 연구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해 서양 문명 우월주의적인 관점에서 후진적인 이슬람 세계의 이미지를 퍼뜨리는 '오리엔탈리스트'로 비판받았다.[98]

1990년에 발표한 『무슬림의 분노의 기원』이라는 에세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최초 사용례로 여겨지며[99], 그 안의 '문명의 충돌'이라는 단어는 새뮤얼 P. 헌팅턴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100]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중동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101], 딕 체니로부터 칭찬을 받는 등 네오콘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그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102]

4. 논란과 비판

버나드 루이스는 중동19세기 유럽식민주의로 인해 후진성을 겪게 되었다는 일반적인 탈식민주의적 시각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중동의 쇠퇴가 외부 요인보다는 문화와 종교 등 내부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1982년 저서 ''유럽을 발견한 무슬림''에서는 이슬람 사회가 서구를 따라잡지 못했으며, 십자군의 성공 역시 일정 부분 무슬림의 약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25] 루이스는 이슬람 사회의 쇠퇴가 11세기 초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십자군과 같은 외부적 압력보다는 "문화적 오만"과 같이 외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된 내부적 문제 때문이라고 보았다.[13]

또한 루이스는 이스라엘을 인종차별 국가로 규정하려는 소련과 아랍권의 시도에 대응하여 반유대주의를 다룬 연구서 ''셈족과 반셈족''(1986)을 저술했다.[13] 그는 다른 저작들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세계의 분노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앙아시아 무슬림 지역 통제, 1982년 하마 학살, 알제리 내전, 이란-이라크 전쟁 등 무슬림 세계 내부의 다른 비극이나 문제들에 비해 과도하게 표출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6]

이러한 그의 분석과 주장은 학계와 대중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나, 동시에 여러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역사학자 리처드 불리엣은 루이스가 현대 아랍인을 서구화된 정도로 평가하며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루이스를 시오니스트 옹호자이자 아랍인을 비하하는 오리엔탈리스트라고 강하게 비판했다.[29][30][31] 사이드와의 상세한 논쟁은 아래 '오리엔탈리즘 비판' 섹션에서 다루어진다.

4. 1. 오리엔탈리즘 비판

루이스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문학 이론가인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학문적 논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이드는 자신의 저서에서 오리엔탈리즘 연구를 분석하고 비판하고자 했다.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였던 사이드는 1978년에 출간한 ''오리엔탈리즘''과 1981년 후속작 ''이슬람을 덮다: 미디어와 전문가가 우리가 세상의 나머지를 어떻게 보는지 결정하는 방법''에서 루이스의 저작들을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했다.[63]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분야가 객관적인 연구라기보다는 서구 중심적인 자기 확신에 기반한 정치적 지성이며,[64] 일종의 제국주의적 지배 도구이자 인종차별의 한 형태라고 주장했다.[65] 그는 또한 루이스를 포함한 일부 주요 중동 학자들의 연구가 과학적 중립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알 아람(Al-Ahram)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이드는 루이스의 중동 관련 지식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버나드 루이스는 적어도 40년 동안 중동, 특히 아랍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 그는 터키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고 들었지만, 아랍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66] 사이드는 루이스가 이슬람을 그 내부의 다양성, 역동성, 역사적 복잡성을 무시한 채 획일적인 대상으로 다룬다고 보았으며, 그를 "선동과 노골적인 무지"라고 비판했다.[67] ''이슬람을 덮다''에서 사이드는 루이스가 "이슬람의 다양성은 물론이고 인간 삶의 다양성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슬람은 낯설고, 근본적으로 다르며, 이해할 수 없는 '타자'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루이스가 "이슬람인들이 서구인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계산된 시도에서 벗어나, 그들 고유의 문화적, 정치적, 역사적 실천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63]

이에 대해 루이스는 서구 학문이 중동에 대해 편향되어 있다는 사이드의 견해를 반박했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이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는 별개로 유럽 인문주의의 한 갈래로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13] 루이스는 프랑스와 영국이 16세기와 17세기에 이미 이슬람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는 그들이 중동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갖기 훨씬 이전의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오리엔탈리즘 연구의 상당 부분이 제국주의적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1993년 저서 ''이슬람과 서구''에서 루이스는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문자를 해독하고 이집트인들에게 그들의 잊혀진 고대 과거에 대한 지식과 자부심을 되찾아준 것이 어떤 제국주의적 목적에 기여했는가?"라고 반문했다.[68]

나아가 루이스는 사이드가 중동 연구, 특히 아랍 연구를 정치화했으며, 오리엔탈리스트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소홀히 한 채 자신의 편견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69]

4. 2.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 부정 참고

루이스의 저서 『현대 터키의 등장』(1961년 및 1968년) 초판에서는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을 "1915년의 끔찍한 대학살,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고 묘사했다.[32] 이후 판에서는 이 내용이 "1915년의 끔찍한 학살로, 추산에 따르면 100만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과 알려지지 않은 수의 터키인이 사망했다"로 변경되었으며,[33] 이 구절에서 루이스는 사망이 두 경쟁 민족주의 운동 사이의 같은 땅을 위한 투쟁의 결과라고 주장했다.[15]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에 대한 루이스의 설명 변화와 미국 의회 결의안 반대 청원 서명은 일부 아르메니아 역사가와 언론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루이스가 자신의 정치적, 개인적 이익을 위해 역사 수정주의에 관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4]

루이스는 1993년 11월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를 "이 역사의 아르메니아 버전"이라고 지칭하여 게소법 위반 혐의로 프랑스 법원에서 민사 소송을 당했다.[35] 그러나 법원은 해당 법이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기소는 실패했다. 1995년,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 생존자 세 명이 제기한 다른 민사 소송에서 프랑스 법원은 프랑스 민법 제1382조에 따라 루이스의 발언이 제3자에게 해를 끼쳤다고 판결하고 상징적인 1프랑의 벌금을 부과했으며, 루이스의 비용으로 『르 몽드』에 판결문을 게재하도록 명령했다. 법원은 루이스가 자신의 견해를 가질 권리는 인정했지만, "피고는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요소를 숨김으로써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에 대한 '심각한 증거'가 없다고 진술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36] 이 외에도 프랑스 아르메니아 민족 위원회와 자크 트레몰레 드 빌리에가 제기한 세 건의 소송은 파리 법원에서 기각되었다.[37][38]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에 대한 루이스의 견해는 알랭 핀키엘크로트, 이브 테르논, 리처드 G. 호바니시안, 로버트 멜슨, 피에르 비달-나케 등 많은 역사가와 사회학자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9][40][41][42]

루이스는 대량 학살 발생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청년 투르크 정부의 의도적인 정책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제노사이드로 분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43] 2002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부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옹호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이며, 오늘날에는 "제노사이드"라는 단어가 심지어 유혈 사태가 전혀 없는 경우에도 매우 느슨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거절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불쾌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특정 사건에서 제기된 요점은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의 학살이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에게 일어난 일과 같다는 것이며, 이는 명백한 허위입니다. 아르메니아인에게 일어난 일은 심각한 아르메니아인의 무장 반란의 결과였으며, 이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시작되었고 더 큰 규모로 계속되었습니다. 군인을 포함한 많은 수의 아르메니아인이 탈영하여 국경을 넘어 터키를 침공하는 러시아군에 합류했습니다. 아르메니아 반군은 실제로 반 시를 점령하여 잠시 동안 점령하여 침략자들에게 넘겨주려고 했습니다. 아나톨리아 전역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터키에 맞서는 아르메니아인의 민족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터키인들은 분명히 그것을 격퇴하기 위해 매우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터키 정부가 아르메니아 인구를 민감한 지역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는 당연히 아나톨리아 전체를 의미합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아랍 지방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학살 결정에 대한 증거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을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 시도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상당한 증거가 있습니다. 네, 엄청난 학살이 있었고, 그 숫자는 매우 불확실하지만 백만 명은 가능할 것입니다.[44] [그리고] 학살은 불규칙병, 그들에게 행해진 일에 반응하는 지역 주민,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비교하려면 독일 유대인이 독일 국가에 맞서 무장 반란에 가담하여 독일을 상대로 동맹국과 협력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함부르크와 베를린 시가 추방 명령에서 면제되었고, 국가에 고용된 사람들은 면제되었으며, 추방은 독일 본토의 유대인에게만 적용되었기 때문에 폴란드에 도착했을 때 폴란드 유대인에 의해 환영받고 보호받았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다소 터무니없는 비유로 보입니다."[45]

이러한 입장 때문에 루이스는 스티븐 주네스,[46] 이스라엘 차르니,[2] 데이비드 B. 맥도널드[47] 및 미국 아르메니아 민족 위원회로부터 "제노사이드 부인자"로 불렸다.[48] 이스라엘 역사가 야이르 아우론은 "루이스의 지위가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에 대한 학술 연구를 모호하게 만드는 터키의 국가적 의제에 고상한 은폐를 제공했다"고 비판했다.[49] 이스라엘 차르니는 루이스가 아르메니아인을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하고 추방 정책만을 강조함으로써, 조직적 추방이 곧 조직적 대량 학살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고 지적했다.[50] 차르니는 루이스가 제노사이드 부인에 사용한 "논리 구조"를 에른스트 놀테가 홀로코스트 부인에 사용한 논리 구조와 비교하기도 했다.[51] 또한 루이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실제로는 가지지 못했던 군대와 경찰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처럼 거짓으로 암시했다는 비판도 받는다.[43]

4. 3. 이라크 전쟁 지지

루이스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기에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학문적 권위를 바탕으로 한 정책 조언은 상당한 비중을 가졌으며,[24]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는 루이스의 지혜가 정책 입안자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언급하기도 했다.[53] 실제로 루이스는 이라크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그리고 조지 W. 부시 대통령 본인을 포함한 행정부 고위 인사들에게 중동 문제에 관한 조언을 제공했다.[73] 이는 그가 당시 미국의 대중동 정책, 특히 이라크 관련 결정에 간접적으로나마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5. 한국에의 영향

버나드 루이스의 중동 및 이슬람 역사에 대한 연구는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에도 그의 주요 저서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그의 학문적 성과와 분석이 한국의 독자들과 학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저작들은 한국에서 중동 지역과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자세한 번역 저서 목록은 아래 하위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5. 1. 한국어로 번역된 주요 저서


  • ''The Emergence of Modern Turkey'' (1961)
  • 김대성 옮김, 《오스만제국 근대사》(펴내기, 1994): 원저의 1부에서 “케말 이후의 터키 공화국”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번역본.[106]
  • ''The Assassins: A Radical Sect in Islam'' (1967)
  • 주민아 옮김, 《암살단: 이슬람의 암살 전통》(살림출판사, 2007)
  • ''The World of Islam: Faith, People, Culture'' (1992, 편저)
  • 김호동 옮김, 《이슬람 문명사》(이론과실천, 1994)
  • 김호동 옮김, 《이슬람 1400년》(까치, 2001): 1994년 번역본의 개역판.
  • ''The Middle East: A Brief History of the Last 2,000 Years'' (1995)
  • 이희수 옮김, 《중동의 역사》(까치, 1998)
  • ''What Went Wrong?: The Clash Between Islam and Modernity in the Middle East'' (2002)
  • 서정민 옮김, 《무엇이 잘못되었나: 서구와 중동, 그 화합과 충돌의 역사》(나무와숲, 2002)
  • ''Notes on a Century: Reflections of a Middle East Historian'' (2012, 분치 엘리스 처칠과 공저)
  • 서정민 옮김, 《100년의 기록: 버나드 루이스의 생과 중동의 역사》(시공사, 20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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