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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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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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기주 자사를 역임했다. 동탁에 의해 기주 자사로 임명된 후, 원소와 동맹을 맺었으나, 원소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껴 기주를 원소에게 넘겨주었다. 원소의 통치하에서 고통을 겪던 한복은 장막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장막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고 오해하여 자결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고, 원소에게 기주를 넘기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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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영천 한씨 - 한연
한연은 후한 시대의 관료로, 하내 태수, 단양 태수 등을 거쳐 사공과 사도를 역임했으나 양기의 권력 남용을 묵인한 죄로 투옥되었고, 이후 사례교위로 복귀하여 환관을 탄핵하며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관리로 평가받았다. - 영천 한씨 - 한강백
한강백은 동진 시대에 뛰어난 재능으로 이름을 알리고 간문제 사마욱의 담객으로 발탁되어 시중에 이르렀으며, 왕탄지와 원굉의 논쟁을 중재하기 위한 《변겸》과 역학에 대한 이해를 담은 《역계사전주》를 남긴 인물이다. - 후한의 기주자사 - 원소 (후한)
원소는 후한 말 군벌로, 명문가 출신으로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였으나 조조와의 관도 대전에서 패배하여 세력이 몰락했다. - 후한의 기주자사 - 공손도
공손도는 후한 말 요동 지역의 군벌로, 요동태수를 거쳐 평주목을 자칭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고구려와 오환을 정벌하며 독립 의지를 드러내다 조조에게 무위장군으로 임명되었으나 불만을 품고 사망했다. - 날붙이로 자살한 사람 - 민영환
민영환은 1861년 서울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요직을 거치며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개화파 인물로,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했으며 그의 유서는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날붙이로 자살한 사람 - 주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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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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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자 | 韓馥 |
로마자 표기 | Han Fuk |
자 | 문절 (文節, Munjeol) |
출생지 | 예주영천군 |
사망지 | 진류군 |
사망년도 | 191년 |
직업 | 군인, 정치인, 군벌 |
관직 | |
관직 | 어사중승 (御史中丞, Eosajungseung) |
임기 | ?–189년 |
군주 | 영제 / 헌제 |
관직 | 상서 (尙書, Sangseo) |
임기 | ?–? |
군주 | 영제 |
관직 | 기주목 (冀州牧, Gijumok) |
임기 | 189년–191년 |
군주 | 헌제 |
전임자 | 가총 |
후임자 | 원소 |
최종 직위 | 분위장군 (奮威將軍, Bunwijanggun) |
소속 세력 | |
초기 소속 | 동탁 |
이후 소속 | 독립 세력 → 원소 → 장막 |
기타 | |
관련 인물 | 원소 (적대) |
기타 정보 | 기주를 원소에게 양도 |
2. 생애
189년(중평 6년),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한복은 어사중승에서 기주목으로 임명되었다.[8] 기주는 인구가 많고 군량이 풍족한 지역이었으나, 발해태수 원소를 경계했다.[7]
동군태수 교모는 삼공의 공문서(이서, 移書)를 위조하여 각 주·군에 돌렸다. 공문서의 내용은 동탁의 죄악을 규탄하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환난을 해소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복은 종사들에게 원소와 동탁 중 누구를 도와야 할지 물었다. 유자혜는 “나라를 위해 의병이 일어나는 데 원소나 동탁이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답하며 대의를 강조했고, 한복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유자혜는 전쟁은 흉한 일이니 주도하지는 말고, 봉기하는 이가 있으면 함께하라고 조언했다. 한복은 유자혜의 조언을 옳게 여겨 원소에게 동탁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고 거병을 용인하였다.[7][9]
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원소를 맹주로 일어섰고, 한복도 이에 참여하여 위군 업현에서 군량을 지원했다. 동탁이 원소의 일족을 몰살하자 호걸들이 원소에게 모여들었고, 한복은 인심이 원소에게 쏠리는 것을 걱정하여 보급을 줄이려 했다.[10]
연주자사 유대는 유자혜에게 서신을 보내, '동탁은 무도하여 곧 죽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동탁 사후에는 군사를 돌려 한복을 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두려워진 한복은 유자혜에게 책임을 씌워 죽이려 했으나, 경무 등이 유자혜를 엎드려 감싸며 같이 죽겠다고 하여 실패하고, 도형에 처했다.[11]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세우려는 원소의 계획에 동참했다.[12] 191년, 헌제가 어리고 동탁에게 억압받아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명분으로 유우 옹립을 시도했으나, 유우가 완강히 거절했다.[13]
원소는 한복의 수하인 국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국의와 결탁하고,[14] 공손찬을 사주하여 한복을 공격하게 했다. 원소는 장도, 곽도,[14] 순심, 고간 등을 보내 한복에게 기주를 양보하도록 설득했다. 순심은 한복에게 '천하가 귀부하는 너그러운 포용력', '책략을 짜내 결단하는 지혜와 용기', '대대로 베푼 가문의 은덕'의 세 가지가 원소만 하냐고 물었고, 한복은 모두 아니라고 답했다. 순심은 한복의 능력 부족과 원소의 뛰어남을 비교하며, 공손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원소에게 기주를 넘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득했다.
경무, 민순, 기도위 저수, 치중(治中) 이력(李歷) 등은 기주의 군사력과 물자가 충분하다며 원소에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다. 종사 조부와 정환은 원소군의 약점을 지적하며 수비에 힘쓸 것을 간언했다.[16] 그러나 한복은 "나는 원씨의 옛 관리였고 재주도 원소만 못하오. 덕망을 헤아려 양보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귀히 여겼는데 어찌 여러분만이 저어하는가?"라며 순심의 권고를 받아들여 기주를 원소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15] 결국 한복은 직위에서 물러났다.[16] 이때가 191년 7월이었다.[7]
원소는 한복을 분위장군(奮威將軍)에 임명했으나, 실제로 군사를 지휘하게 하지는 않았다.[17] 하내군 출신 주한(朱漢)은 원소의 도관종사(都官從事)가 되었는데, 과거 한복에게 냉대받은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원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독단적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한복의 집을 습격했다. 한복은 누각 위로 피신했으나, 그의 큰아들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원소는 즉시 주한을 체포하여 처형했다.[17]
이 사건으로 원소에게 위협을 느낀 한복은 작별을 고하고 진류태수 장막에게 의탁했다. 얼마 후, 원소는 장막에게 사자를 보내 은밀히 상의할 것이 있다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를 목격한 한복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모의로 오해하고, 측간에서 서도(書刀)로 자살하였다.[18]
2. 1. 격변 속의 기주
189년(중평 6년),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한복은 어사중승에서 기주목으로 임명되었다.[8] 기주는 인구가 많고 군량이 풍족한 지역이었으나, 발해태수 원소가 자신을 엎을까 두려워 부발해종사(部勃海從事)를 시켜 감시했다.[7]동군태수 교모는 삼공의 공문서(이서, 移書)를 위조하여 각 주·군에 돌렸다. 공문서의 내용은 동탁의 죄악을 규탄하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환난을 해소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복은 종사들에게 원소와 동탁 중 누구를 도와야 할지 물었다. 유자혜는 “나라를 위해 의병이 일어나는 데 원소나 동탁이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답하며 대의를 강조했고, 한복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하였다. 유자혜는 전쟁은 흉한 일이니 머리가 되지는 말고, 봉기하는 이가 있으면 함께하라고 조언했다. 또한 기주는 다른 곳보다 약하지 않으니 다른 이들의 공이 기주보다 높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한복은 유자혜의 조언을 옳게 여겨 원소에게 동탁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고 거병을 용인하였다.[7][9]
2. 2. 거친 생각과 불안
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원소를 맹주로 일어섰다. 한복도 이에 참여하여 위군 업현에서 군량을 지원했다. 동탁이 원소의 일족을 몰살하자 호걸들이 원소에게 모여들었고, 한복은 인심이 원소에게 쏠리는 것을 걱정하여 보급을 줄이려 했다.[10]연주자사 유대가 유자혜에게 서신을 보내, '동탁은 무도하여 곧 죽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동탁 사후에는 군사를 돌려 한복을 쳐야 한다. 강한 병력을 가지고도 흉악하니 어찌 이대로 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두려워진 한복은 유자혜에게 책임을 씌워 죽이려 했으나, 경무 등이 유자혜를 엎드려 감싸며 같이 죽겠다고 하여 실패하고, 도형에 처했다.[11]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세우려는 원소의 계획에 동참했다.[12] 191년, 헌제가 어리고 동탁에게 억압받아 멀리 가버려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명분으로 유우 옹립을 시도했다. 낙랑태수를 지낸 장기 등을 유우에게 보내 존호를 올렸으나 유우가 완강히 거절했다. 한복 등은 유우가 영상서사라도 맡아 황제의 관작 수여 권한을 대행해주기를 바랐으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13]
2. 3. 원소의 모략
원소는 한복의 수하인 국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국의와 결탁하고,[14] 공손찬을 사주하여 한복을 공격하게 했다. 공손찬은 겉으로는 동탁을 정벌하겠다며 남하했지만, 실제로는 원소의 사주를 받아 한복을 습격하려던 것이었다.원소는 장도, 곽도,[14] 순심, 고간 등을 보내 한복에게 기주를 양보하도록 설득했다. 순심은 한복에게 '천하가 귀부하는 너그러운 포용력', '책략을 짜내 결단하는 지혜와 용기', '대대로 베푼 가문의 은덕'의 세 가지가 원소만 하냐고 물었고, 한복은 모두 아니라고 답했다. 순심은 한복의 능력 부족과 원소의 뛰어남을 비교하며, 공손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원소에게 기주를 넘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득했다.
순심은 "장군의 자질은 세 가지나 원소보다 못한데도 오래도록 그 위에 있었습니다. 원소는 한 시대의 영걸이라 필시 장군의 아래에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라며 원소의 야망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공손찬은 공손찬대로 연(燕)과 대(代) 땅의 병졸을 끌고 와 그 예봉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라며 공손찬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순심은 "지금으로선 원소에게 기주를 넘겨주는 것만한 계책이 없습니다. 틀림없이 장군은 우대받고 공손찬은 원소와 다툴 수 없습니다. 장군은 유능한 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명성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몸은 태산보다도 평안할 것입니다.”라며 한복을 설득했다.
2. 4. 여러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무, 민순, 기도위 저수, 치중(治中) 이력(李歷) 등은 기주의 군사력과 물자가 충분하다며 원소에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들은 "기주가 못나도 갑옷을 두른 이가 백만이고 곡식은 10년을 버틸 수 있습니다. 원소는 오갈 데 없이 궁지에 몰린 처지로 우리의 콧김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젖만 안 줘도 굶겨 죽일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15]종사 조부와 정환은 원소군의 약점을 지적하며 수비에 힘쓸 것을 간언했다. 이들은 "원소군은 한 말[斗]의 양식도 없어 흩어지기 직전이며 장양과 어부라가 새롭게 합세했어도 선뜻 쓰지는 못하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열흘만 수비해도 원소군은 지반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박살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16]
그러나 한복은 "나는 원씨의 옛 관리였고 재주도 원소만 못하오. 덕망을 헤아려 양보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귀히 여겼는데 어찌 여러분만이 저어하는가?"라며 순심의 권고를 받아들여 기주를 원소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15] 결국 한복은 직위에서 물러나 조충의 옛 집으로 갔고, 인수(印綬)는 아들에게 주어 여양현(黎陽縣)의 원소에게 전하게 하였다.[16] 이때가 191년 7월이었다.[7]
2. 5. 기주 양도 후의 말로
원소는 한복을 분위장군(奮威將軍)에 임명했으나, 실제로 군사를 지휘하게 하지는 않았다.[17] 하내군 출신 주한(朱漢)은 원소의 도관종사(都官從事)가 되었는데, 과거 한복에게 냉대받은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원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독단적으로 성곽의 병사들을 이끌고 한복의 집을 습격했다. 한복은 누각 위로 피신했으나, 그의 큰아들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원소는 즉시 주한을 체포하여 처형했다.[17]이 사건으로 원소에게 위협을 느낀 한복은 작별을 고하고 진류태수 장막에게 의탁했다. 얼마 후, 원소는 장막에게 사자를 보내 은밀히 상의할 것이 있다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를 목격한 한복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모의로 오해하고, 측간에서 서도(書刀)로 자살하였다.[18]
3. 《삼국지연의》에서의 한복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한복은 반동탁 연합군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제5회에서 연합군의 제2진으로 처음 등장하며, 사수관 전투에서 부하 반봉(潘鳳)이 화웅에게 죽는다. 제7회에서는 원소가 공손찬을 부추겨 한복을 공격하게 하고, 한복은 모사인 순심, 신평의 의견에 따라 경무의 간언을 듣지 않고 기주를 원소에게 넘긴다. 이후 원소는 한복의 권력을 빼앗고, 한복은 뒤늦게 후회하며 장막에게 의탁한다.
동탁 토벌전에 참여한 한복은 연합군이 붕괴된 후 기주로 돌아간다. 원소는 군량 보급 문제 해결을 위해 방기의 조언에 따라 공손찬과 한복의 영토를 분할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며 공손찬의 침공을 유도한다. 이에 한복은 두려움에 휩싸여 원소에게 영토를 넘기고, 원소는 기주를 장악한 후 한복을 쫓아낸다. 실망한 한복은 가족을 버리고 장막에게 의탁하기 위해 진류군으로 간다.
《삼국지연의》에서 한복은 반동탁 연합군의 제2진 기주 자사(사실은 목)로 등장한다. 동탁군의 맹장 화웅에 맞서 부하 반봉을 출전시키지만, 반봉은 순식간에 죽는다. 이후 공손찬의 위협에 겁을 먹은 한복은 경무의 간언을 무시하고 원소에게 기주를 양도하며, 실권을 잃고 후회하며 장막에게 도망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소설에서는 그의 최후가 명확히 언급되지 않는다.
순심과 신평은 한복의 막료로 등장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들은 한복을 섬긴 적이 없다. 반면, 역사 속 부하였던 저수, 장합, 곡의는 《삼국지연의》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4. 섬긴 사람들
섬긴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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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後漢書
[2]
서적
英雄記
[3]
서적
吳書
[4]
서적
九州春秋
[5]
서적
九州春秋
[6]
서적
英雄記
[7]
서적
영웅기
[8]
서적
삼국지
[9]
서적
영웅기
[10]
문서
196년 원소가 허도 조정에 올린 변명문
[11]
서적
영웅기
[12]
서적
삼국지
[13]
서적
후한서
[14]
서적
영웅기
[15]
문서
‘孤客窮軍 仰我鼻息’(고객궁군 앙아비식)
[16]
서적
구주춘추
[17]
서적
영웅기
[18]
서적
구주춘추
[19]
서적
후한서
[20]
서적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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