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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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정건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887년 대구에서 태어나 1910년 중국으로 유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에 참여하고,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부정에 반대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펼쳤다. 상하이에서 조선인 학생들을 위한 교육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32년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사망했다.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소설가 현진건의 형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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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현정건 |
원래 이름 | 玄鼎健 |
출생일 | 1887년 6월 29일 |
국가 | 대한 임정 |
직책 | 군무부 행정관 직무대리 |
직책2 |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대구 |
사망지 |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의전병원 |
사망일 | 1932년 12월 30일 (45세) |
거주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
임기 | 1919년 5월 29일 ~ 1919년 9월 2일 |
대통령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총리 |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
장관 | 노백린 대한 임정 군무총장 직무대리 |
차관 | 김희선 대한 임정 군무차장 이춘숙 대한 임정 군무차장 |
임기2 | 1919년 9월 17일 ~ 1923년 2월 5일 |
대통령2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경력 | 前 고려공산당 상임위원 겸 당무위원 前 대한국민대표회의 외교분과위원 前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겸 전임위원 |
배우자 | 윤덕경 |
자녀 | 無 |
본관 | 연주(延州) |
부모 | 현경운(부) |
친인척 | 현영운(숙부) |
정당 | 무소속 |
2. 약력
현정건은 고종 24년(1887년)에 대구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이규홍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1]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 회의[1]에 윤자영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윤해·신숙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2]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2]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2] 8월에 조선의 관서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3]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4]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4]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5]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6]
이때 청년동맹회의 선언 문제로 의열단에서 시비를 걸어와 의열단측에서 윤자영을 구타하는 등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고 한다.[6]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여운형·윤자영·김상덕·최창식·김규면·손두환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7]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홍남규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 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것
- 한국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8]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황의춘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이희적·탁창하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현석건[9]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10]자살하였다.[11] 남편이 죽은지 41일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2. 1. 생애 초기
현정건은 고종 24년(1887년)에 대구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1]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1]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1]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2]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2]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2] 8월에 조선의 관서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다.[3]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4]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金鍾商)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4]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5]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6] 이때 청년동맹회의 선언 문제로 의열단에서 시비를 걸어와 의열단측에서 윤자영을 구타하는 등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고 한다.[6]
2. 2.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활동
현정건은 1887년 고종 24년에 대구에서 현경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1] 1920년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 회의[1]에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창조파에 속하여 왕삼덕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 여운형과 함께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 건국을 결정하자,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2]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 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 조선 관서 지방의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상하이교민단의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통해 9월 26일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다.[3]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가르쳤다.[4] 이후 상하이 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 의사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었다.[5]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6]
1925년 5월 9일, 조소앙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 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7]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0월 10일 중국사정연구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에 따라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등의 강령을 결정하였는데, 이때 집행위원으로 이동녕, 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8]
1928년 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렸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1933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은 남편이 죽은 뒤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10] 자살하였다.[11]
2. 3. 체포 및 투옥, 사망
현정건은 1928년 봄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9] 11월 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9]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9] 1932년 6월 10일에 만기 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10]자살하였다.[11] 남편이 죽은 지 41일 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3. 사후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4. 가족 관계
현정건은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현진건의 형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부인 윤덕경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이자 연인으로 계옥(桂玉, 현규옥)이 있었다.
현정건의 집안은 윤치호, 윤치영, 윤보선 가문과 겹사돈 관계였다. 현정건은 윤치호, 윤치영의 7촌 조카딸이 되는 윤덕경(尹德卿)과 결혼하였다. 현정건의 숙부인 현영운과 배정자의 둘째딸 현송자는 윤치호의 사촌이자 윤치영의 형인 윤치오의 후처가 되었다. 윤치오는 윤보선의 큰아버지가 된다.
5. 평가
5. 1. 긍정적 평가
5. 2. 비판적 평가
6. 기타
7. 참조자료
wikitext
참조
[1]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2]
뉴스
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06-25
[3]
뉴스
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
1923-10-04
[4]
뉴스
上海에 豫備講習
동아일보
1924-06-06
[5]
간행물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동문사서점(東文社書店)
1946
[6]
뉴스
上海淸年同盟 宣言問題 解決
동아일보
1925-01-09
[7]
서적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국회도서관
1976
[8]
서적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국회도서관
1976
[9]
문서
현정건의 친형이다.
[10]
뉴스 인용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① 현진건의 딸이자 박종화의 며느리 玄和壽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4-12
[11]
뉴스
玄鼎健氏未亡人 尹德卿女史殉從
중앙일보
193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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