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도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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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라도섬은 플라이오세에 융기된 호르스트로 형성된 섬으로, 동중국해를 마주하며,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쭉한 형태를 띤다. 과거 수나라, 당나라, 신라 시대부터 중요한 기항지였으며, 가마쿠라 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1550년 포르투갈 상선이 내항하면서 남만 무역항으로 기능했으며, 이후 네덜란드, 영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다 쇄국 정책으로 중단되었다. 현재는 히라도 대교와 이키츠키 대교를 통해 규슈 본토와 연결되어 있으며, 사이카이 국립공원과 히라도성 등 관광 자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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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도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히라도 섬 (平戸島) |
로마자 표기 | Hiradoshima |
별칭 | 해당사항 없음 |
위치 | 동해 |
좌표 | 33°22′5″N 129°33′13″E |
위치 (일본 내) | 나가사키현 히라도시 |
![]() | |
지리 | |
군도 | 해당사항 없음 |
총 섬 수 | 해당사항 없음 |
주요 섬 | 해당사항 없음 |
면적 | 163.42 km2 |
길이 | 32 km |
폭 | 10 km |
해안선 길이 | 203.5 km |
최고봉 | 야스만다케 산 |
해발고도 | 535 m |
인구 통계 | |
인구 (2005년 기준) | 21355 명 |
인구 밀도 | 131 명/km2 |
민족 | 일본인 |
2. 지리
히라도섬은 남북 32km, 동서 최대 폭 약 10km로,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쭉한 형태이다. 북단의 타노우라에서 남단의 미야노우라까지는 약 45km이며, 차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동쪽은 히라도 해협을 사이에 두고 규슈 본토와 마주하며, 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은 약 570m이다. 이곳에는 1977년에 히라도 대교가 개통되었다.[1]
섬 주변에는 타쿠시마, 아즈치오시마, 이키츠키 섬, 타카시마 등 여러 유인도와 구로코 섬, 나카노에 섬, 아치가 섬, 오노에 섬 등 무인도가 분포하고 있다.
2. 1. 지형
히라도섬은 플라이오세에 해저에서 융기된 호르스트로 형성되었다. 섬의 기반암은 제3기의 해양 퇴적암과 최근의 화성암이 혼합되어 덮여 있다. 비교적 젊은 섬이기 때문에 해발 200m가 넘는 지역이 넓게 분포하는 등 매우 험준하며, 평지는 해안 평야로 제한되어 있다.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며, 하구를 제외하고 동중국해를 마주보는 북서쪽 해안 전체에 걸쳐 큰 절벽이 특징이다.[1]남북 32km, 동서 최대 폭 약 10km의 섬으로,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쭉한 형태를 하고 있다. 북단의 타노우라에서 남단의 미야노우라까지의 거리는 약 45km이며, 차로 1시간 정도 걸린다. 동쪽은 히라도 해협을 사이에 두고 규슈 본토와 마주한다. 히라도 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은 약 570m로, 이곳에는 1977년 (쇼와 52년)에 히라도 대교가 개통했다.
주변의 유인도는 북쪽 약 3km 해상에 타쿠시마, 북쪽 약 7km 해상에 아즈치오시마, 북서쪽 1km 해상에 이키츠키 섬, 남서쪽 300m 해상에 타카시마가 있다. 이키츠키 섬과의 사이에는 1991년 (헤이세이 3년)에 이키츠키 대교가 완성되었다. 타쿠시마와 아즈치오시마는 히라도항에서, 타카시마는 미야노우라 어항에서 각각 배편이 있다. 그 외에도 구로코 섬, 나카노에 섬, 아치가 섬, 오노에 섬 등 주변 각지에 무인도가 있다.
2. 2. 주변 섬
히라도섬 주변의 유인도로는 북쪽으로 약 3km 해상에 타쿠시마, 북쪽으로 약 7km 해상에 아즈치오시마, 북서쪽으로 1km 해상에 이키츠키 섬, 남서쪽으로 300m 해상에 타카시마가 있다. 1991년에는 히라도섬과 이키츠키 섬 사이에 이키츠키 대교가 완공되었다. 히라도항에서는 타쿠시마와 아즈치오시마로 가는 배편이, 미야노우라 어항에서는 타카시마로 가는 배편이 운항되고 있다. 그 외에도 구로코 섬, 나카노에 섬, 아치가 섬, 오노에 섬 등 주변 각지에 무인도가 있다.3. 자연
섬의 지질은 제3기층 위에 안산암·현무암질 용암이 덮여 산지를 형성한다. 전역이 산지여서 평지가 부족하며, 구릉지가 해안까지 닿아 있다. 섬을 따라 해발 200-500m의 산지가 거의 2열로 이어진다.
서쪽 (해발) | 동쪽 (해발) |
---|---|
이러한 산지에는 카미소네 강, 아마 강, 나카츠라 강, 후루타 강 등 많은 강에 의해 골짜기가 새겨져 있다. 다만 강은 모두 소규모로, 최대인 카미소네 강도 연장 6km, 유역 면적 9km2에 그친다. 농업 용수 및 상수도 용수 이용을 위해 각지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다.
해안선은 굴곡이 풍부하며, 동중국해를 바라보는 서해안에서는 대규모 해식 절벽이 발달한다. 우스즈키 만, 후루에 만, 시지키 만 등 각지의 만은 어항으로 이용되는 외에, 센리가하마·네시코·니시하마 등 모래사장이 발달한 지역도 있어, 해수욕장으로 사랑받는다.
3. 1. 기후
히라도섬은 온난 습윤 기후 지역(쾨펜 ''Cfa'')에 위치해 있으며, 사계절이 뚜렷하다. 겨울철에는 섬에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다. 히라도섬의 봄은 온화하게 시작하여 매우 습하게 끝난다. 여름은 히라도섬의 가장 습한 계절로, 쓰유|梅雨|tsuyu|"매화 비"일본어 — 장마철 — 은 6월 초(평균: 6월 7일)에서 7월 말(평균: 7월 21일) 사이에 나타난다. 이 섬의 날씨는 인근의 리만 해류|リマン海流일본어의 영향을 받으며, 따뜻한 쿠로시오 해류로부터 규슈 섬에 의해 보호받아, 북위 30도 부근에서 예상되는 것보다 더 춥고 습한 기후를 보인다. 히라도섬의 기후는 주변 바다에 의해 크게 완화되어 계절 및 일교차의 변동이 줄어든다.[9][10][11]
3. 2. 식생
히라도섬의 기후는 쓰시마 해류의 영향으로 온난하며, 섬 곳곳에 상록활엽수림이 발달해 있다.[1] 사람의 손길이 닿은 촌락, 초원, 밭 등이 있으며, 모래사장과 암반을 포함하여 다양한 자연 환경이 펼쳐진다.[1] 식물로는 남방계 식물 외에, 단기쿠 등의 대륙계 식물이나 떡갈나무 등 북방계 식물을 볼 수 있다.[1] 히라도섬 고유종에는 이토락교가 있지만, 종 수준에서는 섬 밖 각지에 변종이 분포하여 엄밀한 고유종이라고 할 수는 없다.[1] 또한, "히라도"의 이름을 딴 교배종으로 히라도 철쭉이 있다.[1]4. 역사
히라도섬에서는 구석기 시대부터의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1950년에 발굴된 네고시 유적에서는 야요이 시대 중기의 여성 인골이 발견되었다. 이 인골은 발치되었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혀 있었으며, 야요이 시대에 여성이 전쟁에 참여했고, 전투 집단 내에서 통솔자적 입장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다.[7]
히라도섬은 고대부터 중세, 근세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겪었다. 각 시대별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시대 | 주요 사건 |
---|---|
고대 | 수나라, 당나라, 신라 등 해외 국가와 교류하는 중요한 거점. 헤이안 시대 이후 마쓰우라 당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왜구를 포함한 해적 활동. |
중세 | 원나라의 일본 원정 시 몽골 제국군의 주요 거점. 무로마치 시대에는 왜구 해적들의 중심지. |
근세 | 1550년 포르투갈 선박 내항으로 남만 무역 시작.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 예수회 선교사에 의한 기독교(가톨릭) 포교와 이후 탄압. 1584년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과 무역 재개. 1599년 히라도 번 성립, 히라도 성 축성. 1609년 네덜란드 상관, 1613년 윌리엄 애덤스에 의해 영국 상관 설립. 쇄국 정책으로 1623년 영국 상관 폐쇄, 1641년 네덜란드 상관 데지마 이전. |
근현대 | 1889년 정촌제 시행, 1925년과 1955년 합병을 거쳐 2005년 현재의 히라도 시 형성. 1955년 사이카이 국립공원 지정. 1977년 히라도 대교 개통으로 규슈 본토와 교통 편리. |
4. 1. 고대
히라도섬은 7~9세기에 수나라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과 당나라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의 주요 출발지였다.[2] 수나라, 당나라, 신라 시대부터 해외와의 중요한 교통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히라", "히라노시마" 등으로 불렸으며, 히젠국과 비라 섬 사이의 해협이 "히라노토"라고 불린 것에서 유래하여 가마쿠라 시대부터 "히라도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마쓰우라 당의 본거지가 되었고, 왜구를 포함한 해적인 팔번(바한)도 활동했다.[7]가마쿠라 시대 중기, 몽골 제국(대원 울루스)은 두 차례 일본을 침공했다(원나라의 일본 원정). 첫 번째 침공인 분에이의 역에서 히라도섬도 원군의 습격을 받았지만, 하카타만에서 상륙한 원군은 일본 측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철수했다.[7]
두 번째 침공인 고안의 역에서 원군은 한반도에서 출발한 몽골군, 여진족, 고려군 등으로 구성된 동로군과 구 남송 영토에서 출발한 구 남송·한 병사 등으로 구성된 강남군, 두 방향에서 일본을 침공했다. 히라도섬은 이 동로군과 강남군의 합류 지점이 되었다. 원군이 히라도섬을 주목한 이유는 다자이후에 가깝고, 지형이 군선을 정박하기에 편리하며, 일본 측의 방비가 허술했기 때문이다. 히라도섬에 도착한 원군은 일본군의 습격에 대비하여 섬에 루를 쌓아 진지를 구축했다. 동로군은 이키 섬 전투 이후 히라도섬으로 이동하여 강남군과 합류했다. 이후 원군은 히라도섬에 부대를 남겨두고 다카시마로 이동하여 일본 측과 해전을 벌였고(다카시마 해전), 태풍을 만나 철수를 결정했다. 히라도섬에 주둔한 군대는 군선의 군마를 버리고 인원을 수용하여 철수했다.[7]
4. 2. 중세
히라도섬은 7세기에서 9세기 사이 수나라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과 당나라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의 주요 출발지였다.가마쿠라 시대 중기, 몽골 제국(대원 울루스)은 두 차례 일본을 침공했다(원나라의 일본 원정). 첫 번째 침공인 분에이의 역에서 히라도섬도 원군의 습격을 받았지만, 하카타만에서 상륙한 원군은 일본 측의 격렬한 저항을 받아 철수했다. 1274년 10월 16일, 히라도섬은 몽골의 일본 침략의 일환으로 몽골 군대의 별동대에 의해 침략당했다.
두 번째 침공인 고안의 역에서 원군은 한반도에서 출발한 몽골군, 여진족, 고려군 등으로 구성된 동로군과 구 남송 영토에서 출발한 구 남송·한 병사 등으로 구성된 강남군 두 방향에서 일본을 침공했다. 히라도섬은 이 동로군과 강남군의 합류 지점이 되었다. 원군은 히라도섬이 다자이후에 가깝고, 지세로 군선을 정박시키기에 편리하며, 일본 측의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주목했다. 히라도섬에 도착한 원군은 일본군의 습격에 대비하여 루를 쌓아 진지를 구축했다. 동로군은 이키 섬 전투 이후 히라도섬으로 이동하여 강남군과 합류했다. 합류를 완료한 원군은 히라도섬에 부대를 남겨두고 다카시마로 이동하여 일본 측과 해전을 벌였다(다카시마 해전). 그 후, 태풍을 맞은 원군은 계승할지 철수할지를 두고 군의를 열고 철수로 결정했고, 히라도섬에 주둔한 군대는 히라도섬에 군선의 군마를 버리고 군선에 인원을 수용하여 철수해 갔다. 1281년 2차 침략 동안, 섬은 침략 실패 후 버려질 때까지 몽골의 중요한 후방 기지였다.[2]
14세기의 무로마치 시대부터 섬은 왜구 해적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4. 3. 근세
히라도섬은 수나라, 당나라, 신라 시대부터 기항지로 이용되어 해외와의 중요한 교통 거점이 되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히라", "히라노시마"라고 불렸으며, "히라"에는 "비량", "비라", "비란" 등의 글자가 사용되었다. 히젠국과 비라 섬 사이의 해협이 "히라노토"라고 불렸으며, 이것에 기인하여 가마쿠라 시대부터 "히라도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마쓰우라 당의 본거지가 되었고, 왜구를 포함한 해적도 활동했다.가마쿠라 시대 중기, 몽골 제국(대원 울루스)에 의해 두 차례 일본 침공(원나라의 일본 원정)이 있었다. 첫 번째 침공인 분에이의 역에서는 히라도섬도 원군의 습격을 받았지만, 하카타만에서 상륙한 원군은 일본 측의 격렬한 저항을 받아 철수했다.
이어진 두 번째 침공인 고안의 역에서는 원군은 한반도에서 출발한 몽골군, 여진족, 고려군 등으로 구성된 동로군과 구 남송 영토에서 출발한 구 남송·한 병사 등으로 구성된 강남군 두 방향에서 일본을 침공했다. 히라도섬은 이 동로군과 강남군의 합류 지점이 되었다. 원군이 히라도섬에 눈독을 들인 것은, 히라도섬이 다자이후에 가깝고, 지세로 군선을 정박시키기에 편리하며, 일본 측의 방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라도섬에 도착한 원군은 일본군의 습격에 대비하여 히라도섬에 루를 쌓아 진지를 구축했다. 동로군은 이키 섬 전투 이후 히라도섬으로 이동하여 강남군과 합류했다. 합류를 완료한 원군은 히라도섬에 부대를 남겨두고 다카시마로 이동하여 일본 측과 해전을 벌였다(다카시마 해전). 그 후, 태풍을 맞은 원군은 계속 싸울지 철수할지를 두고 군의를 열고 철수로 결정했고, 히라도섬에 주둔한 군대는 히라도섬에 군선의 군마를 버리고 군선에 인원을 수용하여 철수해 갔다.
1550년 (덴분 19년)에 포르투갈 배가 내항하여, 히라도항은 남만 무역항으로 기능하게 된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가톨릭)가 포교되었지만, 그 후에는 기독교 탄압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포르투갈 배는 1561년 (에이로쿠 4년)의 미야노마에 사건에 의해 무역 거점을 사세보만 내의 요코세우라(오무라번 영지·현재의 사이카이시사이카이정 요코세)로 옮겨 버렸지만, 1584년 (덴쇼 12년)에는 에스파냐, 그 후 네덜란드·영국의 배도 내항했다. 1599년 (게이초 4년)에는 히라도번 초대 번주가 되는 마쓰우라 시게노부에 의해 최초의 히라도성 축성이 시작되었다.
1609년 (게이초 14년)에 네덜란드 상관, 1613년 (동 18년)에 윌리엄 애덤스(미우라 안진)에 의해 영국 상관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쇄국 정책으로 1623년 (겐나 9년)에 영국 상관 폐쇄, 네덜란드 상관도 1641년 (간에이 18년)에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이전하여, 히라도항에서의 남만 무역은 끝났다. 이후의 히라도항은 히라도번의 성하 도시로 번성했다.
4. 4. 근현대
7세기부터 9세기까지 히라도섬 항구는 수나라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과 당나라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의 주요 출발지였다.[2]1274년 10월 16일, 히라도섬은 몽골의 일본 침략 때 몽골 군대의 별동대에 의해 침략당했다.[2] 1281년 2차 침략 때, 섬은 침략 실패 후 버려질 때까지 몽골의 중요한 후방 기지였다.[2]
14세기 무로마치 시대부터 섬은 왜구 해적들의 중심지가 되었다.[2] 유럽과의 남만 무역이 발전하면서, 1550년부터 1561년까지 포르투갈 무역 기지가 섬에서 운영되었다.[2] 1584년에는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상인들이 다시 섬을 방문하기 시작했다.[2]
히라도 번은 1599년 마쓰우라 씨족의 지도하에 설립되었고 히라도 성이 건설되었다.[2] 성은 1613년에 파괴되었고 1704년에 재건되었다.[2]
1609년에서 1641년까지 네덜란드 무역 기지가 히라도섬에 설립된 후 데지마로 이전되었다.[2] 1613년부터 윌리엄 아담스의 선박도 히라도섬에서 운항하기 시작했지만, 영국 무역 사절단은 1623년에 폐쇄되었다.[2]
1889년 (메이지 22년) 정촌제 시행으로 섬 내에는 1정 7촌이 설치되었다. 그 후 1925년 (다이쇼 14년) 히라도 정·히라도 촌의 합병으로 1정 6촌, 1955년 (쇼와 30년) 히라도시 1시 체제가 되었다. 2005년에는 인접한 타비라, 이키츠키와 합병하여 히라도시를 형성하여 히라도섬 전체와 규슈의 일부를 포함하게 되었다.[2]
1955년 (쇼와 30년)에 주변 지역과 함께 사이카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섬의 24%가 국립공원의 범위 내에 들어갔다. 1977년 (쇼와 52년)에 히라도 대교가 개통되어 규슈 본토와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5. 문화
2010년 히라도섬은 숨은 크리스천의 전통과 계단식 논 등의 독특한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중요문화경관의 "이키즈키・히라도의 문화경관"으로 선정되었으며, 이후 "히라도섬의 문화경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5. 1. 중요문화경관
2010년 섬 동해안에 있는 호키, 타자키, 칸도리, 무카에, 히모사시의 취락과 마에노시마, 히라코시마, 쿠로시마, 노지마, 서해안에 있는 카스가, 시시, 네시코의 계단식 논, 아만다케와 이키즈키섬을 포함한 약 1100ha가 숨은 크리스천의 전통과 계단식 논 등의 독특한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중요문화경관의 "이키즈키・히라도의 문화경관"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히라도 서해안의 이이라 지구와 히라도・이키즈키의 서해안 앞바다, 히라도・이키즈키 간의 해협인 타츠노세토 및 나카에노시마 등 해양역이 추가 선정되어 "히라도섬의 문화경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6. 교통
히라도 대교는 히라도섬과 규슈를 연결하는 570m가 넘는 해협을 가로지른다. 이 다리는 1977년에 완공되었으며, 통행료는 2010년에 폐지되었다. 이키츠키 대교(1991년 완공)는 히라도섬과 이키츠키 섬을 연결한다. 이 섬은 383번 국도가 지나간다. 인근의 작은 섬으로 이동하기 위한 페리가 운행된다.
7. 관광
참조
[1]
서적
Geology of Japan
[2]
웹사이트
Internet archive of 2012 - Van hier tot Tokio. 400 jaar handel met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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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Hirado weather station homepage
https://www.jma.go.j[...]
[4]
웹사이트
平戸 平年値(年・月ごとの値) 主な要素
http://www.data.jma.[...]
Japan Meteorological Agency
2017-08-04
[5]
웹사이트
Hirado Climate Normals 1961-1990
ftp://ftp.atdd.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2013-01-06
[6]
서적
平成19年 理科年表
[7]
서적
王権をめぐる戦い
中央公論社
1986
[8]
뉴스
博多港築港と明治人の気概
https://www.data-max[...]
【公式】データ・マックス NETIB-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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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平戸 平年値(年・月ごとの値) 主な要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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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양대기청
201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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