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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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음포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에 위치한 지역으로, 고려 시대 팔만대장경 판각과 관음포대첩, 조선 시대 노량 해전 등 역사적 사건의 무대였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이 고려 고종 23년(1236) 관음포에서 판각되었으며, 정지 장군의 관음포 전투와 이순신 장군의 노량 해전이 벌어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사적 제232호로 지정된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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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은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협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 함대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로서 일본 수군을 맞아 크게 승리한 해전으로, 일본군의 철수를 막으려는 조명 연합군과 철수를 돕고자 한 일본군의 목적이 충돌하며 발생했으며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전사했다. - 경상남도의 사적 - 김해 봉황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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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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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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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 125번지 |
종류 | 포구 |
상세 정보 | |
역사적 의의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지리적 특징 | 남해군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노량 해협과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
주변 환경 | 주변에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이 조성되어 있다. |
현재 | 역사적인 장소로 보존되고 있으며,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
2. 역사
관음포는 노량 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이자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 수군은 관음포 앞바다에서 도망가는 왜군을 맞아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불리며, 마주보는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순조 32년(1832)에는 왕명에 따라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단과 비, 비각이 세워졌다. 1965년에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의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가 경내에 걸렸다.[1]
이락사와 관음포 앞바다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충성심이 깃든 역사의 현장이자, 전쟁 극복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관음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는 고려 말 우왕 때 해도원수 정지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한 남해관음포대첩이 기록되어 있다. 지명 유래는 불성지(佛聖地)의 의미가 담긴 관음의 포구였기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1]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북쪽 21리에 신우 때 해도도원수 정지 장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이 우리에게 패전하게 된 것은 이 전역(戰役)에서 처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현에서 북으로 21리에 있다."라고, 조선지지자료에는 포상리(浦上里)에 관음포가 기재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도에 처음 수록되었으며, 1872년지방지도와 대동여지도에도 관음포가 나타난다.[1]
2. 1. 고려 시대
남해 사람들은 이곳 관음포를 호국성지라고 부른다. 고려 고종 23년(1236) 세계문화유산이자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이 남해군 고현지역인 관음포에서 판각되었다.[1][2] 불교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온 백성의 힘을 모았던 큰 역사가 남해에서 이루어졌다. 정안은 사재를 털어 남해에 정림사를 짓고 팔만대장경 판각에 참여하였다. 경판 판각에 필요한 목재를 운송하는데 해상경로를 이용하기에 관음포가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2. 1. 1. 관음포대첩 (남해대첩)
1383년 고려 (우왕 9년) 해도도원수 정지가 경상도 남해현 북방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1598년 12월 16일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와 싸운 전투이다.[1]
2. 1. 2. 팔만대장경 판각
남해 사람들은 이곳 관음포를 호국성지라고 부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이 고려 고종 23년(1236) 남해현 북방지역인 '''관음포''' (현재 위치는 남해군 고현지역)[1][2]에서 판각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있다. 불력으로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전체 민중의 힘을 모았던 대역사가 남해에서 이뤄졌고, 팔만대장경 중 종경록 권27에 “정미세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이라는 간기가 있다. 또한 정안은 사재를 털어 남해에 정림사를 짓고 팔만대장경 판각에 참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판 판각에 필요한 수많은 목재를 운송하는데 해상경로를 이용하기에 관음포가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2. 2. 조선 시대
노량 해전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이자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관음포라는 지명은 불성지(佛聖地)의 의미가 담긴 관음의 포구였기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부터 이 지명이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는 고려 말 우왕 때 해도원수 정지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한 남해관음포대첩에 대한 기록이 있다.[1]『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북쪽 21리에 신우 때 해도도원수 정지 장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이 우리에게 패전하게 된 것은 이 전역(戰役)에서 처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여지도서』에는 "현에서 북으로 21리에 있다."라고, 『조선지지자료』에는 고현면 포상리(浦上里)에 관음포가 기재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1] 『동국여지도』에 처음 수록되었으며, 『1872년지방지도』와 『대동여지도』에도 관음포가 나타난다.[1]
남해대첩은 고려 말 국운이 쇠퇴할 때 잦아진 왜구의 노략질에 맞서 고려 수군이 함포를 사용해 왜적을 막은 전투이다. 1380년 진포해전에서 왜선 500척이 격침되자, 1383년 왜구는 120척의 군선을 이끌고 합포(지금의 마산)를 공격했다. 해도도원수 정지는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이동하여 왜구와 맞섰다. 왜구는 정예병 140명씩을 배치한 큰 군선 20척을 앞세워 공격해 왔으나, 정지는 화포를 사용하여 17척을 격파하였다. 당시 고려군 화포 책임자는 최무선이었다.
정지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쾌한 적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왜선을 철저히 격파했다. 이 해전에서 왜구는 17척의 배와 2,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다. 관음포대첩은 왜구에게 고려 수군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었고, 세계 해전사에서 함포로 적을 물리친 최초의 전투라는 의의를 지닌다. 이 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고려군은 관음포대첩으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마도정벌을 추진하였다.
2. 2. 1. 노량 해전
노량 해전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1]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은 도망가는 왜군을 관음포 앞바다에서 맞아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불린다.[1]
2. 2. 2. 이충무공 유적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은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이 퇴각하는 왜적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관음포 앞바다였다. 이 전투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 때문에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의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불리며, 맞은편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순조 32년(1832)에는 왕명에 따라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단과 비, 비각이 세워졌다. 1965년에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의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가 경내에 걸렸다.이락사와 관음포 앞바다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충성심이 깃든 역사의 현장이자, 전쟁 극복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사적 제232호인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은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 있으며, 1973년 6월 11일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3. 사건사고
- '''노량 해전'''[1]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곳이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때 이순신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불린다.[1]
고려 말 우왕 때 해도원수 정지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한 대첩이다. 남해대첩이라고도 한다. 왜구는 합포(지금의 마산)를 공격했고, 정지는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이동했다. 정지가 섬진강 어구에서 군사를 소집하여 전열을 정비할 때 왜구는 이미 관음포에 도착해 있었다. 정지의 함대는 박두양(朴頭洋)에서 왜구의 배들과 마주쳤고, 왜구는 정예병 군사 140명씩을 배치한 큰 군선 20척을 앞세워 공격해 왔다. 정지는 앞서서 공격하는 배를 격침시킨 다음 함포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17척을 대파하였다. 이 해전에서 왜구는 17척의 큰 배를 잃고 2,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참조
[1]
뉴스
'일연선사로 풀어본 팔만대장경 판각의 비밀'
http://news.bbsi.co.[...]
[2]
뉴스
'[강의실 중계] 고려대장경 판각과 일연선사'
http://www.hyunbulne[...]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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