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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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규원사화는 효종~숙종 시대의 선비 북애자가 고려 말 도인 청평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쓴 역사서이다. 1925년 《단전요의》에 일부가 인용된 것을 시작으로, 1932년 이전에 전체 내용이 등사되었으며, 1945~1946년 국립중앙도서관이 필사본을 구입했다. 1972년에는 진본 판정을 받았으나, 위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규원사화는 규원사화서,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 만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단군을 고조선의 시조로 하여 고조선 역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민족주의 사관과 단군을 민족의 기원으로 인식하는 역사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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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 | |
---|---|
도서 정보 | |
제목 | 揆園史話 (규원사화) |
원제 | (Gyuwon Sahwa) |
저자 | 北崖子 (북애자) |
국가 | 조선 |
언어 | 漢文 (한문) |
장르 | 偽史 (위사), 사화 |
출판일 | 1675년 |
미디어 종류 | 写本 (사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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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자
《규원사화》의 저자는 북애자(北崖子)와 청평 이명(淸平 李茗)으로 알려져 있다. 북애자는 효종 ~ 숙종 시대의 인물로, 스스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라 소개하며, 전국을 방랑하던 중 청평 이명이 쓴 진역유기를 얻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청평 이명은 고려 말 청평산에 머물렀던 도인으로 추정되며, 진역유기 3권을 저술했다. 이 책은 조선 선조 때 조여적이 쓴 《청학집》에 간략히 언급된다.[4][1]
2. 1. 북애자
북애자(北崖子)는 효종 ~ 숙종 시대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라고 스스로 소개한다. 붓을 던지고 전국을 방랑하던 중 산골에서 청평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를 얻어 역사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4]2. 2. 청평 이명
청평 이명(淸平 李茗)은 고려 말 청평산에 머물렀던 도인으로 추정된다. 그는 '선가의 말이 많은(도교 용어가 많이 사용된)' 진역유기 3권을 저술하여 산골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여적의 《청학집》에는 도인의 계보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 청평 이명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1]3. 전래 과정
1972년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은 《규원사화》를 조선 숙종 1년(1675년)에 작성된 진본으로 판정하였다.[5]
3. 1. 초기 공개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같은 내용이 인용되었고, 1932년 5월 이전에 전체 내용이 등사되었다.[3]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4]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다.3. 2. 필사본 발견 및 등사
《규원사화》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그 내용은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인용되었고, 1932년 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3] 1934년에는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4]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5]3. 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경위
국립중앙도서관은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5]3. 4. 진본 판정 논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 《규원사화》의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같은 내용이 인용되었고, 1932년 5월 이전에 전체 내용이 등사되었다.[3]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4]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국립중앙도서관은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5] 이후 위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2년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이 심의하여 숙종 1년(1675년)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하였다.4. 구성
《규원사화》는 〈규원사화서〉,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 〈만설〉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사화서〉와 〈만설〉은 북애자가 직접 썼으며,[1]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북애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함께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1]
〈조판기〉는 하늘과 땅이 나뉘고 환인, 환웅천왕과 그 무리들의 활동으로 동식물과 사람들이 나타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태시기〉는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인간 세상을 다스리던 1만 1천 년간의 일을 다룬다.[1]
〈단군기〉는 단군임금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후 47대에 걸쳐 만주,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다스린 1200여 년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1]
〈만설〉은 북애자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을 담은 부분이다.
4. 1. 규원사화서
〈규원사화서〉는 규원사화의 저술 배경을 밝히고 있으며, 북애자가 썼다.[1] 〈만설〉 역시 북애자의 글이다.[1]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를 표시하고 있다.[1]4. 2. 조판기
〈조판기〉는 수백만 년간의 혼돈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고 환인, 환웅천왕과 그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무리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20만 년간의 내용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4. 3. 태시기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등으로 대표되는 3천의 무리와 함께 인간 세상을 다스리며 1만 1천 년에 해당되는 ‘궐천년’ 간의 일을 다룬다.[1]치우씨와 신농씨가 탁록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장군 81명을 선발하여 탁록(涿鹿)에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서 승리하였고, 이때 한 해 동안 9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한다.[1] 후에 다시 유망의 나라 도읍인 공상(空桑)을 공격하였으며, 도읍 공격 이후 한 해 만에 12제후의 나라를 합쳤다고 한다.[1]
4. 4. 단군기
〈단군기〉는 단군임금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후 47대에 걸쳐 만주,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다스린 1200여 년간의 치세를 다룬다. 북애자는 아사달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 지역으로 지금의 지린시 방면이라고 보았다.[1]4. 4. 1. 역대 단군 목록
〈단군기〉에는 단군임금이 고조선을 세운 이후 47대에 걸쳐 만주,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다스린 1200여 년간의 치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북애자는 아사달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 지역으로 지금의 지린시 방면이라고 보았다.[1]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즉위 년도 | 주요 업적 |
---|---|---|---|---|
1 | 단군임금 | 93년 | 기원전 2333년 | 고조선 건국, 우수하 벌판에 임검성(수도) 건설. |
2 | 부루(夫婁) | 34년 | 기원전 2240년 | |
3 | 가륵(嘉勒) | 51년 | 기원전 2206년 | |
4 | 오사(烏斯) | 49년 | 기원전 2155년 | |
5 | 구을(丘乙) | 35년 | 기원전 2106년 | |
6 | 달문(達文) | 32년 | 기원전 2071년 | |
7 | 한율(翰栗) | 25년 | 기원전 2039년 | |
8 | 우서한(于西翰) | 57년 | 기원전 2014년 | |
9 | 아술(阿述) | 28년 | 기원전 1957년 | |
10 | 노을(魯乙) | 23년 | 기원전 1929년 | |
11 | 도해(道奚) | 36년 | 기원전 1906년 | |
12 | 아한(阿漢) | 27년 | 기원전 1870년 | |
13 | 흘달(屹達) | 43년 | 기원전 1843년 | |
14 | 고불(古弗) | 29년 | 기원전 1800년 | |
15 | 벌음(伐音) | 33년 | 기원전 1771년 | |
16 | 위나(尉那) | 18년 | 기원전 1738년 | |
17 | 여을(余乙) | 63년 | 기원전 1720년 | |
18 | 동엄(冬奄) | 20년 | 기원전 1657년 | |
19 | 구모소(緱牟蘇) | 25년 | 기원전 1637년 | |
20 | 고홀(固忽) | 11년 | 기원전 1612년 | |
21 | 소태(蘇台) | 33년 | 기원전 1601년 | |
22 | 색불루(索弗婁) | 17년 | 기원전 1568년 | |
23 | 아물(阿勿) | 19년 | 기원전 1551년 | |
24 | 연나(延那) | 13년 | 기원전 1532년 | |
25 | 솔나(率那) | 16년 | 기원전 1519년 | |
26 | 추로(鄒盧) | 9년 | 기원전 1503년 | |
27 | 두밀(豆密) | 45년 | 기원전 1494년 | |
28 | 해모(奚牟) | 22년 | 기원전 1449년 | |
29 | 마휴(摩休) | 9년 | 기원전 1427년 | |
30 | 나휴(奈休) | 53년 | 기원전 1418년 | |
31 | 등올(登兀) | 6년 | 기원전 1365년 | |
32 | 추밀(鄒密) | 8년 | 기원전 1359년 | |
33 | 감물(甘勿) | 9년 | 기원전 1351년 | |
34 | 오루문(奧婁門) | 20년 | 기원전 1342년 | |
35 | 사벌(沙伐) | 11년 | 기원전 1322년 | |
36 | 매륵(買勒) | 18년 | 기원전 1311년 | |
37 | 마물(麻勿) | 8년 | 기원전 1293년 | |
38 | 다물(多勿) | 19년 | 기원전 1285년 | |
39 | 두홀(豆忽) | 28년 | 기원전 1266년 | |
40 | 달음(達音) | 14년 | 기원전 1238년 | |
41 | 음차(音次) | 19년 | 기원전 1224년 | |
42 | 을우지(乙于支) | 9년 | 기원전 1205년 | |
43 | 물리(勿理) | 15년 | 기원전 1196년 | |
44 | 구홀(丘忽) | 7년 | 기원전 1181년 | |
45 | 여루(余婁) | 5년 | 기원전 1174년 | |
46 | 보을(普乙) | 11년 | 기원전 1169년 | |
47 | 고열가(古列加) | 30년 | 기원전 1158년 |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128년까지 47대 1205년간 존속하였다.[1]
4. 5. 만설
漫說중국어은 북애자 개인이 품고 있는 주관적인 생각을 풀어 서술한 부분이다.5. 내용
〈규원사화〉는 〈규원사화서〉,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 〈만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규원사화서〉는 서문에 해당하며 저술 배경을 적고 있고, 〈만설〉은 북애자의 글이다.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를 표시하고 있다.[6]
각 단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판기(肇判記): 수백만 년간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는 과정을 설명한다. 환인과 환웅 및 그들이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20만 년간의 내용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6]
- 태시기(太始紀):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인간 세상을 다스리던 1만 1천 년간의 일을 설명한다. 이 시기에는 치우씨와 신농씨가 탁록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치우씨가 승리하여 여러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한다.[6]
- 단군기(檀君紀):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후 47대에 걸쳐 만주와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다스린 1천 2백여 년간의 치세 내용을 담고 있다. 각 임금의 치세 기간과 주요 업적은 하위 섹션의 표에 정리되어 있다.[6]
5. 1. 《진역유기》와의 관계
북애자(北崖子)는 스스로 효종~숙종 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라고 소개한다. 그는 붓을 던지고 전국을 방랑하던 중 산골에서 청평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를 얻어 역사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6]청평 이명(淸平 李茗)은 고려 말 청평산에 머물렀던 도인으로 추정되며, '선가의 말이 많은(도교 용어가 많이 사용된)' 진역유기 3권을 지어 산골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여적의 《청학집》에 도인의 계보를 설명하는 중에 간략하게 언급되었다.[6]
《규원사화》는 산속의 바위굴에 보관된 《진역유기》를 주로 참조하였으며, 《진역유기》는 고려 말기 사람인 청평 이명이 저술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진역유기》는 다시 발해의 역사서인 《조대기》를 참조하여 저술되었으므로, 《규원사화》는 《조대기》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6]
5. 2. 조판기의 상세 내용
수백만 년간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었다. 환인(一大主神)과 환웅천왕, 그리고 그들이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20만 년간의 내용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6]5. 3. 태시기의 상세 내용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등으로 대표되는 3천의 무리와 함께 인간 세상을 다스리며 1만 1천 년에 해당되는 ‘궐천년’ 간의 일이 설명된다.[6]치우씨와 신농씨가 탁록을 중심으로 벌인 전투에서는 장군 81명을 선발하여 탁록(涿鹿)에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서 승리하였으며, 이때 한 해 동안 9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후에 다시 유망의 나라 도읍인 공상(空桑)을 공격하였으며, 도읍을 공격한 이후로는 한 해 만에 12제후의 나라를 합쳤다고 설명하였다.[6]
5. 4. 단군기의 상세 내용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고 이후 역대 임금들이 47대에 걸쳐 만주와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다스린 1천 2백여 년간의 치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사달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 지역으로 지금의 지린시 방면'이라는 북애자의 의견이 포함되었다.[6]각 임금의 치세 기간은 다음과 같다.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즉위 년도 | 비고 |
---|---|---|---|---|
1 | 단군 | 93년 | 기원전 2333년 | 고조선 건국. 우수하 벌판에 수도를 세우고 임검성(壬儉城)이라 함. |
2 | 부루(夫婁) | 34년 | 기원전 2240년 | |
3 | 가륵(嘉勒) | 51년 | 기원전 2206년 | |
4 | 오사(烏斯) | 49년 | 기원전 2155년 | |
5 | 구을(丘乙) | 35년 | 기원전 2106년 | |
6 | 달문(達文) | 32년 | 기원전 2071년 | |
7 | 한율(翰栗) | 25년 | 기원전 2039년 | |
8 | 우서한(于西翰) | 57년 | 기원전 2014년 | |
9 | 아술(阿述) | 28년 | 기원전 1957년 | |
10 | 노을(魯乙) | 23년 | 기원전 1929년 | |
11 | 도해(道奚) | 36년 | 기원전 1906년 | |
12 | 아한(阿漢) | 27년 | 기원전 1870년 | |
13 | 흘달(屹達) | 43년 | 기원전 1843년 | |
14 | 고불(古弗) | 29년 | 기원전 1800년 | |
15 | 벌음(伐音) | 33년 | 기원전 1771년 | |
16 | 위나(尉那) | 18년 | 기원전 1738년 | |
17 | 여을(余乙) | 63년 | 기원전 1720년 | |
18 | 동엄(冬奄) | 20년 | 기원전 1657년 | |
19 | 구모소(緱牟蘇) | 25년 | 기원전 1637년 | |
20 | 고홀(固忽) | 11년 | 기원전 1612년 | |
21 | 소태(蘇台) | 33년 | 기원전 1601년 | |
22 | 색불루(索弗婁) | 17년 | 기원전 1568년 | |
23 | 아물(阿勿) | 19년 | 기원전 1551년 | |
24 | 연나(延那) | 13년 | 기원전 1532년 | |
25 | 솔나(率那) | 16년 | 기원전 1519년 | |
26 | 추로(鄒盧) | 9년 | 기원전 1503년 | |
27 | 두밀(豆密) | 45년 | 기원전 1494년 | |
28 | 해모(奚牟) | 22년 | 기원전 1449년 | |
29 | 마휴(摩休) | 9년 | 기원전 1427년 | |
30 | 나휴(奈休) | 53년 | 기원전 1418년 | |
31 | 등올(登兀) | 6년 | 기원전 1365년 | |
32 | 추밀(鄒密) | 8년 | 기원전 1359년 | |
33 | 감물(甘勿) | 9년 | 기원전 1351년 | |
34 | 오루문(奧婁門) | 20년 | 기원전 1342년 | |
35 | 사벌(沙伐) | 11년 | 기원전 1322년 | |
36 | 매륵(買勒) | 18년 | 기원전 1311년 | |
37 | 마물(麻勿) | 8년 | 기원전 1293년 | |
38 | 다물(多勿) | 19년 | 기원전 1285년 | |
39 | 두홀(豆忽) | 28년 | 기원전 1266년 | |
40 | 달음(達音) | 14년 | 기원전 1238년 | |
41 | 음차(音次) | 19년 | 기원전 1224년 | |
42 | 을우지(乙于支) | 9년 | 기원전 1205년 | |
43 | 물리(勿理) | 15년 | 기원전 1196년 | |
44 | 구홀(丘忽) | 7년 | 기원전 1181년 | |
45 | 여루(余婁) | 5년 | 기원전 1174년 | |
46 | 보을(普乙) | 11년 | 기원전 1169년 | |
47 | 고열가(古列加) | 30년 | 기원전 1158년 |
- 치세 기간은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128년으로, 47대 1205년간 지속되었다.
6. 진위 논란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가 조선 숙종 년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과,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이 병립하고 있다.[7] 조선 후기의 저술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통치 연대를 《규원사화》와 다르게 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제도에 대한 묘사나 전조선(단군조선)의 1,200년간 47대 왕이 통치한 평균 재위년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고조선 사회의 설명에 해당 내용들을 채택하였다.[9][10]
6. 1. 위서론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가 조선 숙종 년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과,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이 병립하고 있다.[7] 조선 후기의 저술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8]《규원사화》는 《단기고사》나 《환단고기》와 함께 '《환단고기》류'로서 20세기에 쓰여진 위서로 간주되기도 한다.
위서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문은 다음과 같다.
저자 | 논문 제목 | 발표 시기 및 지면 |
---|---|---|
송찬식 | 〈僞書辨〉 | 《月刊中央》, 1977, 9월호 |
이순근 | 〈고조선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 《성심여자대학교》, 1987.5.15 |
조인성 | 〈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 《李丙燾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
조인성 | 〈《揆園史話》論添補〉 | 《慶大史論》3, 1987, 경남대학교 |
조인성 |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 |
- 조인성,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1987.3
6. 2. 진서론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가 조선 숙종년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과,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7] 조선 후기의 저술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8]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통치 연대를 《규원사화》와 다르게 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제도에 대한 묘사나 전조선(단군조선)의 1,200년간 47대 왕이 통치한 평균 재위년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고조선 사회의 설명에 해당 내용들을 채택하였다.[9][10]
《규원사화》를 진서로 보는 주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이상시(1990),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규원사화》 〈단군기〉의 중국과의 외교·전쟁 등에 해당되는 중국 사서의 기록과 연대가 부합함을 제시하였다.
- 최인철(2005),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규원사화》는 다른 단군관계비사들에 비해 과장이나 가필이 적다고 판단, 일부 내용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 초 북애자가 쓴 진서라는 설에는 동의하지만, 그 내용의 사료적 가치보다는 조선 후기 민족주의 흐름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더 비중을 두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한영우(1975), "17세기의 반존화적 (反尊華的) 도가사학의 (道家史學) 성장 - 북애의 (北崖) 〈 규원사화 (揆園史話) 〉에 대하여 -", 한국학보.
- 정영훈(1981), 〈규원사화의 민족사상〉, 고려대학교.
- 정영훈(1993),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 정영훈(2005),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비주류사상인 선가(仙家)의 역사인식에 주목하였다.
- 심백섭(1993), 〈'규원사화'의 본문구조와 세계관 형태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6. 2. 1. 국립중앙도서관의 인증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인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3인이 귀중본 《규원사화》의 지질 등을 심의한 결과, 조선 중기에 쓰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다.[11] 그러나 이병도, 조인성, 송찬식 등 한국사학계의 상당수 학자들은 여전히 위서라고 판단하고 있다.2003년 3월 서지 전문가들이 비공식적이나마 재감정을 실시하였는데, 대체로 진본이 아니며 일제강점기에 필사되어 제본된 것으로 판단하였다.[12]
6. 3. 위서론 및 반론의 주장
위서론 | 반론 |
---|---|
19세기 이전의 원본이나 필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 분야별 전문가의 감정을 거친 조선시대 필사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근대어나 사용하지 않았던 말들이 등장한다. 특히 文化는 당시의 의미인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의미로 쓰이지 않고, culture의 의미로 쓰였다. (文化之啓發, 更可速矣의 文化, 壬辰之役, 先民, 民氣, 强國之要, 天主 등)[15] | 조인성 교수는 先民, 民氣라는 단어가 중국 고전에서 용례를 찾을 수 있고, 天主 또한 숙종 이전에 알려졌다고 설명한다. 조 교수는 [culture가 문화로 번역되어 사용된 것이 일본에서부터]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숭녕 박사의 《한국언어발달사》를 제시했으나, 일제 이후 각 분야에 새로운 일본식 한자어가 침투했다고 설명하고 있을 뿐, [culture를 뜻하는 문화라는 글자가 원래 일본에서 사용되었는데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
후대에 출간된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사》에서 잘못 인용한 내용이다. 《규원사화》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데,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참고했다는 것이다. 《해동역사》에는 전거가 된 문헌을 모두 밝히고 있지만 《규원사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전거가 된 다른 문헌에서 이 잘못된 인용구를 찾을 수 없다.[16] | 《규원사화》의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기존의 역사책을 인용하여 내용을 서술하고, 쟁점이 되는 사항을 비교한 다음,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순서로 책을 쓰고 있다. 《규원사화》는 인용할 때 대부분 曰을 넣고 이따금 按, 云으로 표시한다. 조인성 교수의 의견처럼 《고려사》를 인용했다면, [高麗史 曰] 또는 [高麗史 云]으로 시작되는 [고려사에 의하면]의 형태를 띄어야 한다. 하지만 [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 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 則白頭之名 始見於此]라는 문장 형식을 띄고 있고, [의하면]에 해당하는 云자가 白頭山外居之 다음에 쓰여 있다. 《해동역사》에서는 [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 女眞 於白頭山外居之]로 쓰여 있는데, 여기에도 《고려사》 다음에 云이 들어있지 않다. 《규원사화》나 《해동역사》의 저자들이 직접 《고려사》를 인용하지 않고, 고려사 광종 10년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도록 하였다고 쓰인 다른 책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17] |
저자는 〈만설〉에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으나 숙종 원년은 전란과 같은 큰 문제가 없었던 시기였다. | 문맥을 고려하면 문제 없는 내용 전개이다. 빼앗긴 강토는 발해의 영토인 만주와 요동을 의미한다. |
청평이 부연 설명한 고려 시대 팔성당의 내용이 다르다. | 청평은 묘청의 불교적 해석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
청평은 고려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고려 시대의 책에서는 임금의 이름으로 쓰인 治자를 사용할 수 없다. | |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하였다. 《규원사화》나 진역유기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 | 진역유기는 산골 마을에서 발견되었다고 북애자가 이미 설명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 이후 2백여 년간 언급되지 않은 것은, 만설에서 담고 있는 북애자의 (청과 손잡고 만주와 중토를 지배하자는) 의견이 명에 대한 보은과 청에 대한 패배감으로 북벌을 준비하던 당시의 정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
북애자의 생각을 적은 만설에 경주의 첨성대는 천수백 년이 지났는데 우뚝 솟아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규원사화》가 저술했다고 주장하는 시기는 1675년이고 첨성대는 선덕여왕대(632년~647년)에 건립 되었으니 맞지 않다. | 송호정 교수가 말하기를 [관자23권][경중갑]편에서 조선이 제나라와 약 12874.72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 거리는 약 12874.72km가 안되는데, 이 말은 곧, 고전 특유의 과장법으로 그만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18] 위의 예에서 보듯이, 북애자의 [천수백년이 지났다는] 말 또한 과장법으로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
1889년 일제 육군참모본부가 편찬한 《만주지지(滿洲地誌)》를 구절을 인용한 1914년에 김교헌이 쓴 《신단실기》의 "전 세계를 통치하는 무량의 지능을 가지셨으나 그 형제를 드러내지 않고 최상지천에 앉아 계시니(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 구절이 《규원사화》에 들어있다.[19] |
7. 역사적 인식
민족주의사학에서는 민족 중심의 역사 이해, 사대모화사상 비판, 북방 중심의 역사 인식, 단군을 민족의 기원으로 인식하는 등 《규원사화》에 나타난 역사적 인식을 주목한다.[14]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가 조선 숙종 연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과,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이 병립하고 있다.[7] 조선 후기 저술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통치 연대를 《규원사화》와 다르게 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제도에 대한 묘사나 전조선(단군조선)의 1,200년간 47대 왕이 통치한 평균 재위년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고조선 사회 설명에 해당 내용들을 채택하였다.[9][10]
참조
[1]
뉴스
Why 솔깃하지만 믿기엔… 너무 찬란한 한민족 상고사
http://news.chosun.c[...]
2009-07-04
[2]
서적
한배달
1989
[3]
논문
규원사화론 첨보
1987
[4]
서적
조선역사
1934
[5]
문서
[6]
문서
조대기
[7]
서적
한국사 권4 - 초기국가 – 고조선.부여.삼한
국사편찬위원회
1997
[8]
간행물
규원사화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1996
[9]
서적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10]
논문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11]
서적
한배달
1989
[12]
논문
상고사 연구에 관련되는 문헌비판
국방대학원
2004
[13]
서적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14]
논문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15]
기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16]
기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17]
기타
일본역사교과서왜곡대책반 실무반장 성삼제
[18]
기타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19]
서적
유사역사학 비판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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