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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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두환은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으로 복무했다. 그는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1980년 5.17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제11, 12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경제 성장과 서울 올림픽 유치를 이끌었지만, 삼청교육대 운영, 언론 통폐합,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퇴임 후에는 비자금 조성과 5.18 관련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1996년 사형, 1997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특별 사면되었다. 2021년 사망했으며, 그의 삶과 통치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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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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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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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전두환 |
출생일 | 1931년 1월 18일 |
출생지 | 고센, 게이쇼난도, 일본 제국, 한국 |
사망일 | 2021년 11월 23일 |
사망지 | 서울, 대한민국 |
로마자 표기 | Jeon Duhwan |
한자 | 全斗煥 |
음력 생일 | 1월 18일 |
호 | 일해 |
자 | 용성 |
직책 | |
직책 | 대한민국 대통령 |
재임 시작 | 1980년 9월 1일 |
재임 종료 | 1988년 2월 24일 |
전임자 | 최규하 박충훈 (대행) |
후임자 | 노태우 |
소속 정당 | 민주정의 |
민주정의당 총재 시작 | 1981년 1월 15일 |
민주정의당 총재 종료 | 1987년 7월 10일 |
민주정의당 총재 전임자 | 신설 |
민주정의당 총재 후임자 | 노태우 |
군사 경력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최종 계급 | 대장 |
복무 기간 | 1951년–1987년 |
참전 | 베트남 전쟁 |
주요 지휘 | 국군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 |
지휘관 경력 |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 대대장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연대 연대장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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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
배우자 | 이순자 (1958년 결혼) |
자녀 | 4명 |
학력 | |
출신 학교 | 육군사관학교 (BS) |
서명 | |
총리 | |
국무총리 | 남덕우 유창순 김상협 진의종 노신영 김정렬 |
기타 정보 | |
종교 | 불명 |
친척 | 전창규 (조카 아들) 이원근 (처조카 아들) 이웅석 (사촌 처남) |
서훈 | 데이터 없음 |
지도 정보 |
2. 생애
전두환은 퇴임 후 재단을 설립하여 원로 정치인으로 활동하려 했으나, 특혜 개입 등으로 친족이 체포되자 1988년 11월 23일 사재를 국고에 헌납하고 강원도 백담사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68][69]
그러나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내란죄와 부정 축재 의혹은 끊이지 않았고, 1995년 12월 3일 구속되었다.[70][71] 1996년 8월 26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72][73]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74][75]
1997년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추징금 2.205조원을 부과했다.[77] 자택 등이 경매에 부쳐져 5330억원이 징수되었지만, 거액의 미납금이 남았다.[77] 2003년 검찰의 재산 명시 신청에 전두환은 "통장에 290000KRW뿐"이라고 답변하여 국민을 분노케 했다.[77]
2013년 "전두환 추징법" 제정으로 시효가 연장되고, 일가의 부정 축재에 대한 강제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해 9월 10일, 미납 추징금 1.672조원 완납을 발표했지만,[78] 계획대로 상환되지 않았다.[79]
이후 전두환은 알츠하이머병을 이유로 2018년 8월 28일 명예훼손 재판 출석을 거부했다.[82] 그러나 2019년 1월 16일 2018년 12월 골프 목격담이 보도되며 병에 대한 주장에 의문이 제기되었다.[86]
2017년 회고록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술로 유족에게 고소당했다. 2019년 3월 11일 법원 명령으로 출석했으나,[88] 이후 재판에 불참했다. 2020년 11월 30일, 광주지법은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90]
2021년 8월 9일 재판 중 호흡 곤란으로 퇴정, 8월 13일 입원했다. 8월 21일 다발성 골수종 보도가 나왔다.
2021년 11월 23일 오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했다.[58][91][92][93][94][95] 노태우와 달리 국장 없이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국립묘지 안장도 보류되었다. 청와대는 조문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96]
2023년 3월, 손자 전우원이 부정 축재를 폭로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 피해자에게 사과했다. 같은 달 28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마약 혐의로 체포되었다.[97]
2. 1.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난 전두환은 5세 때 대구로 이사하여 대구공립본정尋常小学校(대구종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4학년 때 휴학하고 낫토 장사 등으로 생계를 꾸렸으며,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가 1941년에 대구로 돌아왔다. 1944년 소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립공업학교(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했다.성적이 우수하여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한국 전쟁 중 육군사관학교(11기)에 입학했다. 동기로는 노태우 등이 있었고, 후에 박정희의 묵인 아래 군 내부 친위 그룹인 비밀결사 하나회를 결성했다.
1960년 6월, 육군 소위로 최세창, 장기오, 차지철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특수전 교육 기관에서 6개월 동안 늪지, 산악 생존 훈련 등의 “레인저 훈련 코스”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낙하산 강하 훈련을 받고 공수부대 창설 요원이 되었다.[60]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지지를 표명하여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제9사단[61] 제29연대장으로 참전[62]하고 귀국했다.
1969년 특수전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제1공수여단을 모체로 여단들이 잇달아 생겨났고, 전두환 자신도 제1여단장을 역임했다.[60] 특수전략사령부를 거쳐 1979년에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사건 수사를 지휘하며 김재규를 체포, 처형했다. 그 과정에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과 대립을 심화시켜, 같은 해 12월 12일 하나회 멤버들과 함께 쿠데타를 실행하여 정승화를 체포했다(12·12 사태). 당시 대통령 최규하는 이를 묵인했다.
1980년 5월 17일, 전국 각지에서 다발하는 노동쟁의와 학생 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의 추인 아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실시했다. 쿠데타 후 김대중을 포함한 야당 정치인들을 체포 또는 가택연금하고, 비상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에 반발하던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육군 부대를 파병하여 시민들이 대량 학살당했다(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국정을 사실상 장악하고, 사회악 일소 특별 조치를 발표하여 약 4만 명을 체포하여 군대의 「삼청교육대」에서 가혹한 훈련과 강제 노역을 시켰다.
2. 1. 1. 출생과 가계
全斗煥중국어은 1931년 1월 18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의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 전씨이며, 13대조인 전제가 임진왜란 때 권율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후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 전상우는 가난한 농부였지만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한문 지식이 있었고, 약간의 의학 지식으로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132] 어머니 김점문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강하여, 승려의 말을 듣고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전두환은 위로 형 열환(1914년생), 규곤(1916년생), 기환(1929년생)과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선학(1924년생)이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점학(1936년생), 남동생 석환(1941년생), 경환(1946년생)이 있었다.
유년 시절 전두환은 근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5세 때 가족이 대구로 이사했고, 7세 때인 1937년에 희도소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 소학교를 휴학하고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낫토 배달, 약전골목에서 약 배달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131] 1939년, 아버지 전상우는 동네 노름꾼 지인의 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고, 이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피해 다녔다.[132]
1941년 4월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희도국민학교에 복학, 1944년 3월 25일에 졸업했다. 그해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하여 50리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중학생 때 권투부 부원으로 활동했고, 별명은 '몽땅'이었다. 한국 전쟁 발발 전에는 자발적으로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학교를 순찰하기도 했다. 1950년 2월 10일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 1. 2. 유년기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의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다. 전두환의 가문은 원산 전씨이다. 그의 14대 조상 전제(全霽)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명령을 어겨 처형당한 무관이었다.[12] 전두환은 전상우와 김정문 사이에서 태어난 열 자녀 중 넷째 아들이었다.[12] 전두환의 형인 열환과 규곤은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사고로 사망했다. 전두환은 남은 형 기환과 동생 경환과 함께 성장했다.1936년경 전두환의 가족은 대구로 이사했고, 그는 호란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전두환의 아버지는 과거 헌병대와 마찰을 빚었으며, 1939년 겨울에는 경찰서장을 살해했다.[12] 가족들은 즉시 만주국 길림으로 도피하여 2년간 숨어 지낸 후 돌아왔다. 전두환은 다시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원래 또래보다 2년 늦었다.
1947년 전두환은 집에서 약 25km 떨어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12] 이후 대구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2. 1. 3. 청년기
1931년 3월 6일, 경상남도 합천에서 몰락한 양반 집안의 6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어느 정도 학문을 닦았고, 민간 요법으로 마을 사람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5세 때 대구로 이사하여 대구공립본정尋常小学校(대구종로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4학년 때 휴학하고 낫토 장사 등으로 생계를 보탰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여 아버지가 한의원을 개업했지만 실패하고, 1941년에 대구로 돌아왔다. 1944년 소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립공업학교(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육군사관학교(11기)에 입학했다. 동기로는 노태우 등이 있었고, 후에 박정희의 묵인 아래 군 내부 친위 그룹인 비밀결사 하나회를 결성했다.1960년 6월, 육군 소위로 최세창, 장기오, 차지철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특수전 교육 기관에서 6개월 동안 늪지, 산악 생존 훈련 등의 “레인저 훈련 코스”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낙하산 강하 훈련(옵션으로 추정됨)을 받고 공수부대 창설 요원이 되었다.[60]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25보병사단 소대장에 보임되고, 그해 9월 30일 광주 육군보병학교 초군반(초등군사반)에 입교하였다. 이때 그는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4년 동안의 생도시절에 나는 축구와 권투를 한 탓인지 학과성적이 좀 뒤진편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관들의 기대를 그리 모으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미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두 똑같은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입니다." 라고 말을 하였다. 초군반 수료 후 제21보병사단으로 배속되었다.

1956년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7년 10월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교육장교로 전속되고, 이후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이 되었다. 1958년 육군 대위로 진급하였다.
1959년 1월 3일 육군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4월 20일 수료했다. 1959년 5월 육군 공수특전단 본부로 배속되었다가, 6월 12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브랙 기지로 군사 유학을 갔다. 통역장교를 포함한 총 5명의 대한민국 육군장교들이 같이 유학 갔고, 노태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와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 과정을 차례로 수료했다.[134]
1960년, 다른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에 입교하여 6월에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6월 25일 미국 육군보병학교의 유격훈련 교관교육 과정에 입교하였다. 특수전학교 과정에는 노태우를 비롯한 4인의 한국 장교들과, 레인저 스쿨 과정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5인의 한국 장교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지만, 이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은 한국인으로서는 홀로 교육받았다. 영어에 서툴렀지만 통과하여 미국 육군보병학교 유격훈련 교관 과정을 수료하였다.
1960년 12월 16일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 작전과장으로 보임되어 잠시 근무하다가 1961년 4월 초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로 발령되고, 4월 10일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로 발탁되었다. 1개월가량 근무하다가 예비장교훈련단(ROTC) 창단을 서두를 때 준비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담당 교관요원으로 추천되었고, 서울대 문리대의 ROTC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2. 1. 4. 초기 장교 시절
195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KMA)에 입학했다. 육사 재학 중 그는 훗날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핵심 인물들과 친구가 되었다. 1955년 2월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미국에서 훈련을 받으며 게릴라전과 심리전을 전문으로 익혔고, 1958년 육사 재학 당시 사관학교장의 딸인 이순자와 결혼했다.[13][14]
1960년 6월, 육군 소위로 최세창, 장기오, 차지철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특수전 교육 기관에서 6개월 동안 늪지, 산악 생존 훈련 등의 “레인저 훈련 코스”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낙하산 강하 훈련(옵션으로 추정됨)을 받고 공수부대 창설 요원이 되었다.[60]
당시 대위였던 전두환은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육군사관학교 내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사령관의 비서관이 되었고,[13][14] 박정희의 직속 부하가 되었다. 1962년에 소령으로 승진했고 계속해서 막강한 인맥을 쌓았다. 소령으로서 그는 특수전사령부 작전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민정장교로 근무했다. 1963년에는 중앙정보부(KCIA) 인사국장직을 맡았다. 1969년까지 그는 육군참모총장의 수석 고문을 역임했다.[13][14]
2. 1. 5. 5.16 지지와 월남전 참전
1961년 당시 대위였던 전두환은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육군사관학교 내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사령관 비서관이 되었고,[13][14] 박정희의 직속 부하가 되었다. 1962년에 소령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특수전사령부 작전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민정장교로 근무했다. 1963년에는 중앙정보부(KCIA) 인사국장직을 맡았다. 1969년까지 그는 육군참모총장의 수석 고문을 역임했다.[13][14]1960년 6월, 육군 소위로 최세창, 장기오, 차지철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특수전 교육 기관에서 6개월 동안 늪지, 산악 생존 훈련 등의 “레인저 훈련 코스”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낙하산 강하 훈련(옵션으로 추정됨)을 받고 공수부대 창설 요원이 되었다.[60] 1969년 특수전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제1공수여단을 모체로 여단들이 잇달아 생겨났고, 전두환 자신도 제1여단장을 역임했다.[60] 1970년 대령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대한민국 제9보병사단 29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971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맡았고, 이후 준장으로 진급했다.[13][14]
2. 1. 6. 숙청 위기와 중앙 복귀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144]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합동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했다.[144] 1979년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가 결정되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전두환은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되어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 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144]같은 날,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144] 이들을 몸수색한 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리고 범인이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며, 박준광 육군 소령을 통해 각 기관에 업무 지침을 통보했다.[144] 중앙정보부에는 예산 집행을 제한하고, 모든 정보 보고를 합동수사본부에 제출하도록 지시했다.[144]
이러한 혼란 속에서 전두환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이 되었다. 그는 군내 인맥을 동원, 중정 요원들을 제압하고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체포에 나섰다. 10월 27일 오후,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김재규, 박흥주, 박선호 등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으로 체포하고 언론에 발표했다. 이후 언론 브리핑을 통해 수사 결과와 취조 과정을 공개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2. 1. 7. 10.26 사태 전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체포된 김재규를 면담하고 "그대는 역적이고 배신자이니 어쩔 수 없이 죽어야 된다"고 말했다.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에게도 "나는 군 선배로서의 김재규 장군은 존경하지만 국가원수에 대한 일이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해해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145] 또한 김항규에게 "미국의 카터나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찾아와도 형님은 살릴 수 없다."고 했다.[145]1979년 11월 6일, 계엄사 합수부장으로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계엄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할 것을 언론사에 발표했다. 이날 그는 10.26 사건은 김재규 단독 계획범행이고 정승화는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내외부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수사 기간 중 협조해준 국민과 관계기관에 감사를 표한다고 발표했다.[146] 같은 해 11월 초, 전두환은 노태우를 불러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12월 6일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등이 주도하는 하나회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신군부를 형성했고, 일부 선후배 기수들을 끌어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 1. 8. 김재규 체포와 수사결과 발표
전두환은 체포된 김재규를 면담하고 그에게 역적이며 배신자이므로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두환은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에게도 이러한 상황을 양해했다고 한다. 김항규에 따르면, 전두환은 "군 선배로서 김재규 장군은 존경하지만 국가원수에 대한 일이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145] 또한 전두환은 김항규에게 미국의 카터나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찾아와도 김재규를 살릴 수 없다고 했다.[145]1979년 11월 6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계엄군법회의에서 공개 재판할 것을 언론에 알렸다. 이날 그는 10.26 사건은 김재규의 단독 계획 범행이며 정승화는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내외부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수사 기간 중 협조해준 국민과 관계 기관에 감사한다고 밝혔다.[146]
2. 1. 9. 쿠데타에 의한 집권과정
12.12 사태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특권을 누려온 존재들로서, 민주화는 곧 자신들의 특권 상실을 의미했기에 반유신세력의 집권을 원치 않았다.[158]신군부는 1980년 5월 26일, 권력 접수 시나리오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안을 최규하에게 재가해 줄 것을 요구했다.[159] 최규하는 이 요구를 회피하며 하루 동안 시간을 끌었으나, 5월 2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5월 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가 발족됐다. 국보위는 허화평이 보고한 <5·16교본>에 따라 1961년의 국가 재건최고회의를 흉내 낸 군사혁명위원회와 같은 기구였다.[143][160][159] 전두환은 1980년 5월 27일 국보위를 설치하고, 6월 초 국보위 위원에 피선되었으며, 국보위 상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됐다. 1980년 7월 1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국보위만을 관할하다가 1980년 8월 5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고, 1980년 8월 22일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전두환 등은 국보위를 통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하야하도록 했다.[158] 최규하는 이를 두고 오래도록 고민하였다. 1980년 7월에는 충청북도 일대에 수해가 발생하자, 7월 23일 국보위 내무분과위원회 위원장 이광로를 대동하고 충청북도 청주시와 보은군, 경상북도 문경군의 점촌읍, 마성면 등 수해지역을 시찰, 김종호 충북도지사와 김무연 경상북도지사 등으로부터 수해상황을 보고받고 돌아왔다. 한편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전두환은, 박정희의 전례에 따라 육군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전역한 다음 유신체제의 유산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158] 최규하는 한달 사이에 전두환의 어깨에 두 별을 달아주었다.
2. 1. 10. 국보위 설치와 정권장악 기도
12.12 사태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등은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특권을 누려왔으며, 민주화는 곧 자신들의 특권 상실을 의미했다.[158] 이들은 반유신세력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았다.신군부는 1980년 5월 26일 최규하에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안을 재가해줄 것을 요구했으나,[159] 최규하는 이를 회피하며 하루 동안 시간을 끌었다. 5월 27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후, 5월 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가 발족되었다. 국보위는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였으며,[160][159] 허화평이 보고한 <5·16교본>에 따라 1961년의 국가 재건최고회의를 흉내 낸 기구였다.[143]
전두환은 5월 27일 국보위를 설치하고, 6월 초 국보위 위원에 피선되었으며, 국보위 상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됐다. 이후 7월 1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국보위만을 관할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전두환 등은 국보위를 통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하야토록 했다.[158]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전두환은 박정희의 전례에 따라 육군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전역한 다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158]
5월 28일부터 전두환은 국내 경제학자들을 초빙하여 경제에 대한 특별 과외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무식함을 인정하고 경제학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들에게 수시로 도움을 청했다. 1980년 5월 말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되자 김재익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매일 아침 2시간씩 경제 공부를 시작했다.[143] 전두환은 김재익의 명쾌한 설명에 감복하여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를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했다.[143]
김재익이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락 조건을 묻자, 전두환은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하고 내맡겼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143] 그 후에도 김기환·사공일·차수명 등으로부터 경제 과외수업을 계속했다.
전두환은 과거 새벽 3시에 일어나 공부하던 때처럼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빠른 습득 및 적응 능력을 바탕으로 몇 달간 경제 공부에 집중하여 "나 나름대로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끌고 나갈 방향과 시책이 정립되더라"라고 회고했다.[143]
2. 1. 11. 경제 수업
전두환은 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했기에, 김재익을 비롯한 경제 전문가들에게 경제 정책을 위임하였다.2. 2. 대통령 재임시
전두환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정책을 시행하고 다양한 사건을 겪었다.1980년대 중반, 이른바 '3저 현상'(국제 유가 하락, 달러 가치 하락, 금리 하락)과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수출이 호조를 보였다. 특히 현대자동차의 포니, 엑셀이 1986년 미국에 수출되면서 한국 자동차 산업은 선진국과 경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선진국의 시장 개방 압력으로 농축산물 수입 자유화가 확대되면서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대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은 가속화되었다.
수출 호조에 힘입어 1980년대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 내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1인당 GNP는 1987년 3천 달러를 돌파하며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4년 겨울,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하여 60억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2] 그는 3S 정책을 통해 1988 서울 올림픽 준비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2]
1983년, 미얀마 양곤 방문 중 북한 공작원의 암살 시도를 받았다. 이 테러로 전두환 수행원 17명이 사망했다.[25]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를 내렸다.[204] 같은 해 5월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김포국제공항으로 나가 교황을 영접했다.
1985년 보안사의 친위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206] 1986년 4월에는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등 구주 4개국을 순방했다.
1986년 5.3 인천사태와 10.28 건국대 항쟁 등을 보며 개헌 요구가 심해지자 계엄령 선포를 준비했으나[207] 김대중의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계획을 거두게 된다.
전두환은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2. 2. 1. 제11대 대통령 취임
전두환은 취임 후 학원 수업을 단속하고 개인 교습을 금지했다. 1980년 9월에는 연좌제를 폐지했다. 1981년에는 '보호관찰' 법안을 제정했는데, 전두환은 상습범이 형기를 마치면 곧바로 사회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1984년 겨울, 한국 경제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기 전에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하여 60억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는 무시되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3S정책이 시행되었다. 우익 일본 활동가 세지마 류조의 제안을 바탕으로 전두환은 1988 서울 올림픽 준비의 성공을 위해 시민들에게 호소하려 했다. 전두환은 이를 위해 프로 야구와 축구 리그를 창설하고, 전국적으로 컬러 TV 방송을 시작하며, 선정적인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검열을 완화하고, 교복을 자율화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신속하게 시행했다. 1981년에는 "한국바람 '81'('국풍 '81')"이라는 대규모 축제를 개최했지만,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다.
2. 2. 2. 12대 대통령
1981년 1월 12일 전두환은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하였고, 1982년 1월 22일에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의하였다. 1981년 4월 10일, 전두환은 국무총리에게 부랑인 단속 및 보호 조치를 지시하여 부랑인 보호시설이 급증하는 계기가 되었다.1981년 보호·감호법을 제정하여 상습범은 형기 종료 후에도 즉각적인 사회 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호감호제도를 시행하고, 같은 해 강원도 춘천시 춘천교도소에 보호감호시설을 설치했다. 춘천교도소 보호감호소는 1983년 2월 12일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이전했다.[182] 1982년 10월 26일 강원도의 이승복기념관 준공식에 참석하여 이승복의 반공정신을 기리고, 이를 통해 국민정신교육과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83] 삼청교육대를 통해 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계 인사, 반체제 인사, 5.18 민주화운동 참가자, 범죄자 등을 잡아들여 특수훈련을 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인권탄압 논란이 일었다. 또한, 녹화사업을 통해 운동권 대학생들의 사상개조를 시도했다.
1982년 12월 13일, 김대중의 미국 여행 청원 탄원서를 받고 이를 허락했다. 1983년 3월 22일, 민정당 전국 시도 전당대회에 참석했지만, 당권은 사실상 노태우에게 위임했다.


'3S 정책'의 일환으로 1982년 한국 프로야구를 출범시키고,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에서 시구를 했다.
1983년 5월 18일, 5·18 이후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영삼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아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저항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184] 1981년 3월 26일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축전을 보냈다.
1983년부터 각 학교 두발, 복장자율화를 실시했지만, 보수단체와 교수, 학부모들의 항의로 1985년에 폐지했다.
취임 후 학원 수업을 단속하고 개인 교습을 금지했다. 1980년 9월에는 연좌제를 폐지했다. 1981년에는 '보호관찰' 법안을 제정했는데, 전두환은 상습범이 형기를 마치면 곧바로 사회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1984년 겨울, 한국 경제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기 전에 일본을 방문하여 60억달러의 대출을 요청했다.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는 무시되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3S정책(섹스, 스크린, 스포츠)이 시행되었다. 일본 우익 활동가 세지마 류조의 제안을 바탕으로 1988 서울 올림픽 준비를 위해 시민들에게 호소하려 했다. 이를 위해 프로 야구와 축구 리그를 창설하고, 전국적으로 컬러 TV 방송을 시작하며, 선정적인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검열을 완화하고, 교복을 자율화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시행했다. 1981년에는 "한국바람 '81"(''국풍 '81'')이라는 대규모 축제를 개최했지만,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다.
2. 2. 3. 취임 초기
1980년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전두환은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99.9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 그는 9월 1일에 공식 취임하였다.[1]전두환은 취임 직후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10월 17일),[1] 언론 통폐합 조치를 시행했다(11월).[1] 1981년 1월에는 자신의 정당인 민주정의당을 창당했는데, 이는 사실상 민주공화당의 후신이었다.[1] 이후 통신비밀의 원칙을 명시하고 고문을 금지하는 등 유신헌법보다 완화된 내용의 새 헌법이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권한이 부여되었다.[1]
1981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은 90%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1] 같은 해 치러진 전국구 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이 69.5%의 의석을 차지하며 압승하였다.[1]
전두환은 학원 수업을 단속하고 개인 교습을 금지했으며,[2] 1980년 9월에는 연좌제를 폐지했다.[2] 1981년에는 '보호관찰' 법안을 제정했다.[2]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3저 현상'(국제 유가 하락, 달러 가치 하락, 금리 하락)과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수출이 호조를 보였다. 특히 현대자동차의 포니, 엑셀이 1986년 미국에 수출되면서 한국 자동차 산업은 선진국과 경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선진국의 시장 개방 압력으로 농축산물 수입 자유화가 확대되면서(1986년 기준 91.5%)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양곡 자급률은 1970년 86%에서 1985년 48.4%로 하락했다. 반면 대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은 가속화되어, 10대 대기업의 국민총생산(GNP) 비중은 1979년 33%에서 1989년 54%로 증가했다.
수출 호조에 힘입어 1980년대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 내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1인당 GNP는 1987년 3천 달러를 돌파하며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0년 컬러 TV 방송 시작은 이러한 경제 성장의 상징이었다.
1984년 겨울,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하여 60억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2] 그는 3S정책을 통해 1988 서울 올림픽 준비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2] 이를 위해 프로 야구와 축구 리그를 창설하고, 전국에 컬러 TV 방송을 시작하고, 교복 자율화를 시행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2] 1981년에는 "국풍81"이라는 대규모 축제를 개최했지만,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다.[2]
2. 2. 4. 경제 정책
전두환은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경제기획원이 아닌, 청와대의 경제수석에게 경제 정책을 맡기고 자신이 사실상 경제 정책의 주도권을 쥐었다. 취임 당시, 경제성장률은 -4.8%, 물가상승률은 42.3%, 무역적자는 44USD였다. 전두환은 경제성장이 없이는 국가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국민총생산 600억 달러를 목표로, 일본을 배우고 일본을 따라잡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는 업무 중간에도 경제학 박사나 재계 실업가 등을 불러 경제 공부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그 결과, 1987년에는 경제 지표가 크게 개선되었다.
지표 | 1980년 (취임 당시) | 1987년 |
---|---|---|
경제성장률 | -4.8% | 12.8% |
물가상승률 | 42.3% | 0.5% |
무역수지 | 44USD 적자 | 114USD 흑자 |
1인당 GNP | - | 3098USD |
국민총생산 | - | 1284USD |
2. 2. 5. 외교 정책
1980년 군사 쿠데타로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전두환은 사거리 180km를 초과하거나 453kg 이상의 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발표했고, 레이건 행정부는 전두환의 군사 정부를 승인했다.[22][23] 전두환은 자신의 정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인정이 필요했다.[24]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기는 냉전 시대였으며, 그의 외교 정책은 북한과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에 맞서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일본 신문들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기 몇 달 전부터 이미 사실상 국가 지도자였다고 보도했다.
1982년 전두환은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한국어"을 발표했지만, 북한의 거듭된 거부로 실행되지 못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그는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과 필리핀-대한민국 간의 경제, 사회, 문화적 우호 증진을 위한 회담을 개최했다.
전두환은 한국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현재의 한국을 포함한 조선반도가 일본의 영토[98]가 된 것은 대한제국에도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했으며, 이는 당시 일본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1981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연설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두고 일본 제국주의를 책망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우리 스스로의 책임을 엄격히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이듬해 광복절 기념식에서도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 거부가 발생하는 등 반일 감정이 격렬했던 한국에서 강경한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했던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더욱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극일(克日)"을 강조했다.
1982년에는 일한기본조약 체결 당시 묵인하기로 약속했던 독도를 "독도 해조류 번식지"로 한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99]
1984년 겨울, 한국 경제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기 전에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하여 60억달러의 대출을 요청했다.
2. 2. 6. 교육·문화 정책
전두환은 취임 후 학원 수업을 단속하고 개인 교습을 금지했다. 1980년 9월에는 연좌제를 폐지했다.[203] 1981년에는 '보호관찰' 법안을 제정했는데, 전두환은 상습범이 형기를 마치면 곧바로 사회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203]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는 무시되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3S 정책이 시행되었다.[203] 세지마 류조의 제안을 바탕으로 전두환은 1988 서울 올림픽 준비를 성공시키기 위해 시민들에게 호소하려 했다.[203] 이를 위해 프로 야구와 축구 리그를 창설하고, 전국적으로 컬러 TV 방송을 시작하며, 선정적인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검열을 완화하고, 교복을 자율화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시행했다.[203] 1981년에는 "국풍81"이라는 대규모 축제를 개최했지만,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다.[203]2. 2. 7.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 전후
1983년, 전두환은 양곤 방문 중 북한 공작원의 암살 시도를 받았다. 이 테러로 전두환 수행원 17명이 사망했는데, 여기에는 장관급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얀마 정부 관계자 4명도 이 공격으로 사망했다.[25]
전두환은 한국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현재의 한국을 포함한 조선반도가 일본의 영토[98]가 된 것은 자신의 나라(당시 대한제국)에도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했으며, 당시 일본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1981년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연설에서는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두고 일본 제국주의를 책망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우리 스스로의 책임을 엄격히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광복절 기념식에서도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 거부가 발생하는 등 반일 감정이 격렬했던 한국에서 강경한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했던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더욱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밖에 없다"고 말하며, "극일(克日)"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1982년에는 일한기본조약 체결 당시 묵인하기로 약속했던 독도를 "독도 해조류 번식지"로 한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99]
1984년 민청학련에 연루됐던 윤보선으로부터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요청받았다.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를 내렸다.[204] 같은 해 5월 로마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했을 때 직접 김포국제공항으로 나가 교황을 영접했다. 전두환은 특별지시로 교황의 임시 경호원을 설정했으며, 교황과 회담 후 교황은 서울 시내를 순방한 후 3일 만에 바티칸으로 되돌아갔다.
1984년 가을 한국 경제가 모라토리움 선언 직전의 상태까지 가자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 60억 달러의 융자를 요청했다.[205] 일본은 논란 속에 60억 달러의 지원을 결정했고, 한국 정부는 일본의 차관을 받았다.[205] 1984년 11월에는 포울 슐뤼터(덴마크) 국무총리, 조앙 비에이라 (기니비사우) 대통령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방한을 연이어 받았다.

1985년 보안사에서 국회를 해산하려는 명분으로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985년 2월 10일 실시된 12대 의원 총선 결과 의석수로는 민정당이 의석의 과반수를 약간 상회했으나 야당인 신민당과 민한당이 합한 득표수는 14% 정도 민정당보다 많은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보안사 감찰실장이었던 한용원에게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친위쿠데타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하지만 한용원은 친위쿠데타까지 할 필요성은 없다고 보고했다.[206] 1986년 4월에는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등 구주 4개국을 순방하고 귀국했다.
1986년 4월 30일 개헌가능성을 열어두었던 전두환은 5.3 인천사태와 10.28 건국대 항쟁 등을 보며 개헌 요구가 심해지자 11월 7일 계엄령 선포를 준비했으나[207] 이틀 전인 11월 5일 김대중 신민당 상임고문이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자 계획을 거두게 된다.
2. 2. 8. 임기 중반
전두환은 취임 초부터 지방자치제도를 시행하려 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주영복 등의 강력 반대로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전두환은 자기 시절에 지방자치제 입문이라도 해 놓았다는 업적을 의식하고 일부 지자체에 대한 실험적 자치단안을 내렸으나[208], 주영복은 "통치권위에 도전적 요소가 될 수도 있고 국민의 긴장감도 이완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208] 계속된 반대에 전두환은 지방자치제를 포기하게 된다.전두환 정부는 박정희 정부가 누렸던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정부는 미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종식시켰다.[22][23] 이 기간 동안 전두환은 박정희의 장기 독재 정권 말기에 크게 악화된 한국-미국 관계에 대해 우려했다. 전두환은 자신의 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24]
전두환은 취임 후 학원 수업을 단속하고 개인 교습을 금지했다. 1980년 9월에는 연좌제를 폐지했다. 1981년에는 '보호관찰' 법안을 제정했는데, 전두환은 상습범이 형기를 마치면 곧바로 사회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1984년 겨울, 한국 경제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기 전에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하여 60억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는 무시되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3S정책이 시행되었다. 우익 일본 활동가 세지마 류조의 제안을 바탕으로 전두환은 1988 서울 올림픽 준비의 성공을 위해 시민들에게 호소하려 했다. 전두환은 이를 위해 프로 야구와 축구 리그를 창설하고, 전국적으로 컬러 TV 방송을 시작하며, 선정적인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검열을 완화하고, 교복을 자율화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신속하게 시행했다. 1981년에는 "한국바람 '81"(''국풍 '81'')이라는 대규모 축제를 개최했지만,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다.
2. 2. 9. 지방자치제도 시행 계획과 무산
전두환은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시험 무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27개국에서 3,345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27개 종목이 치러졌으며, 유도, 태권도, 여자 사이클, 여자 사격이 처음 실시되었다. 83개의 아시아 신기록과 3개의 세계 신기록이 수립되었다.[7]아시아경기연맹 36개 회원국 중 27개국 4,839명(임원 1,419명, 선수 3,420명)이 참가하여 아시아게임 사상 최대 규모였다. 북한은 불참하였고, 라오스, 몽골, 베트남, 남예멘, 시리아, 캄보디아 등 7개국이 북한에 동조하여 불참하였다. 미얀마, 브루나이, 아프가니스탄은 국내 사정으로 불참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1990년 아시안 게임 개최국이라는 점 때문에 참가하였다.[7]
2. 2. 10. 아시안 게임 개최
전두환은 일본 우익 활동가 세지마 류조(Sejima Ryuzo)의 제안을 받아 1988 서울 올림픽 준비를 성공시키기 위해 시민들에게 호소하려 했다.2. 2. 11. 임기 후반
1988년 3월 4일, 전두환은 그 해 노벨 평화상 후보 중 한 명으로 추천되었다.[216] 이는 같은 해 1월 29일에 추천 절차가 완료된 결과였다. 유럽 관계자들은 전두환이 재임 기간 동안 발생한 심각한 안보 위협, 즉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미수 사건과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한반도 평화 유지에 기여했다는 점을 들어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216]1988년 2월,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되면서 5공 청문회가 열렸다. 이 청문회에서 전두환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비리 문제로 책임 추궁을 당했다. 1988년 11월 19일, 약 1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 시내에서 전두환 구속을 요구하는 2차 궐기대회를 열었다.[217]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의 형제들을 구속했다.[217]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이순자와 함께 강원도 백담사로 내려가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11월 29일에는 민주정의당을 탈당했다. 백담사에서 불경을 외우던 전두환은 1989년 12월 31일 국회 증언대에 섰다. 이후 다시 백담사로 돌아갔다가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여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전두환은 자신의 불경 강해 실력이 웬만한 승려보다 뛰어나다고 자랑했다.[218]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에서 명예총재직 제의가 들어왔으나, 민자당 내 김영삼과 민주계 인사들의 반발로 인해 전두환은 이 제의를 사양했다.
2. 3. 퇴임 후
198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는 과반수 득표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진 대한민국의 전국 단위 선거였으며, 야당 후보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표 분산으로 인해 노태우가 승리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임기를 마치고 1988년 2월 25일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이루었다.1981년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제한했다. 전임자들과 달리 전두환은 1987년 대선에 다시 출마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할 수 없었다.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연장하는 어떤 개정도 현직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밝힘으로써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는 것 이외에는 전두환의 임기를 연장하려는 어떤 시도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체제 개방 요구를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그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자신의 군부 지지자 중 한 명이 될 것이며, 그의 후계자는 7년 전 자신을 당선시킨 것과 유사한 간접 선거를 통해 선출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발표는 민주화 운동 세력을 격분시켰고, 그해 전두환 정부의 여러 스캔들과 맞물려 서울 성공회 성당에서 연설을 시작으로 시위대의 운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두 달 후, 그는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는데, 이는 모든 면에서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사실상 넘겨준 것이었다. 이 발표는 전국적인 대규모 민주화 집회인 6월 항쟁을 촉발했다.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노태우는 훨씬 더 민주적인 헌법과 16년 만의 첫 직선 대통령 선거를 약속하는 연설을 했다. 1987년 7월 10일, 전두환은 민정당 대표직에서 사퇴하고 명예총재로 남았지만, 다가오는 선거 운동의 공식 지도력은 노태우에게 넘겼다.
2. 3. 1. 문민정부 이후
1992년 10월,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만 명의 국민이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죄 및 내란죄로 고발했다. 1994년 총무처 장관 서석재와 국회의원 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했으나, 전두환은 무대응으로 대응했다. 1995년 8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반란죄 및 내란죄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불구속 기소했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의 구속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어졌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도 공소시효 정지 규정 등을 둔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선언했다. 검찰은 5.18 사건 재수사에 착수하면서 동시에 제5공화국의 비리에 대한 수사도 진행했다.[219]1995년 12월 2일 전두환은 1989년 12월 15일에 있었던 노태우와 김영삼·김종필·김대중의 영수회담에서 나온 결정에 따라 그해 12월 31일에 13대 국회의 증언대에 올라 과거 문제의 매듭을 지었고 김영삼 정부는 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고 자신은 검찰의 소환요구에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고 12·12를 포함한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니 여타의 사람들에 대한 정치보복적 행위가 없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12월 15일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고 했으며 1996년 1월 24일 검찰은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 수감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전두환은 처음에는 의혹에 대해 웃음과 무답변으로 넘어갔지만, 1995년 12월 그는 정치보복론을 주장하였다.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대구, 경북 사람들에게는 정치보복일 뿐이었다. 전두환은 치졸한 정치보복이라고 김영삼을 공격하였다. 전두환은 징역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대구, 경북에서는 정치보복으로 '고난받는 영웅'으로 부활했다.
1996년 3월, 공개 재판이 시작되었다.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26] 1996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은 무기징역과 2200억원원의 벌금을 선고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전두환은 반란 주도, 반란 모의, 반란 가담, 불법 병력 이동 명령, 계엄령 중 직무유기, 상관 살해, 상관 살인미수, 부하 살해, 반란 주도, 반란 모의, 반란 가담, 반란 목적 살인 등의 혐의와 더불어 뇌물 수수 관련 여러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이 확정된 후 전두환은 복역을 시작했다. 1997년 12월 22일, 당선 대통령 김대중의 자문에 따라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전두환의 무기징역형이 감형되었다.[27] 전두환은 여전히 벌금을 납부해야 했지만, 당시 그는 총 벌금액의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533억원원만 납부했다. 전두환은 "내 이름으로 된 돈은 290000KRW원뿐이다"라고 말해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머지 1667억원원은 결코 징수되지 않았다.[28]
2. 3. 2. 김영삼과의 갈등
전두환은 1995년 12월 정치보복론을 주장하며 김영삼을 공격했다. 김영삼은 취임 직후 TK 인맥을 해고하고 PK 인맥으로 채웠으며, 하나회가 물러간 자리를 PK의 군홧발이 점령했다고 주장했다.[220] 전두환은 김영삼이 금융실명제마저 정적 제거 수단으로만 여겼다며, 김영삼에게도 국가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220]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대구, 경북 사람들에게는 정치보복으로 여겨졌으며[221], 전두환은 '고난받는 영웅'으로 부활했다.[221] 1999년 대구, 경북 주민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50% 이상이 '5공신당'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222][223][224][225]
전두환은 12.12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재판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 당위성과 좌파 세력의 공세를 주장했다. 그의 발언에 대해 시인 공선옥 등은 인간이 되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1996년 8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2.205조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226]
투옥 직후 전두환은 김영삼의 정치보복, 정치탄압이라며 단식투쟁을 감행했다. 이를 두고 극작가 신봉승은 어리광, 땡깡이라며 조롱하였다.[227][228]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은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 대상이 아니었고, 전두환은 2.205조원의 추징금 중 5320억원만 납부한 뒤, 자신의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여 약 1.673조원이 환수되지 않고 있다.[235]
2. 3. 3. 구속과 석방
1992년 10월, 안중근 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에 추대됐다.[219]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만 명의 국민이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죄 및 내란죄로 고발했다. 1994년 총무처 장관 서석재와 국회의원 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했으나, 전두환은 무대응으로 대응했다. 검찰은 1995년 8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반란죄 및 내란죄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불구속 기소했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의 구속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어졌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도 공소시효 정지 규정 등을 둔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선언했다. 검찰은 5.18 사건 재수사에 착수하면서 동시에 제5공화국의 비리에 대한 수사도 진행했다.1995년 12월 2일 전두환은 1989년 12월 15일에 있었던 노태우와 김영삼·김종필·김대중의 영수회담에서 나온 결정에 따라 그해 12월 31일에 13대 국회의 증언대에 올라 과거 문제의 매듭을 지었고, 김영삼 정부는 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자신은 검찰의 소환요구에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고, 12·12를 포함한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니 여타의 사람들에 대한 정치보복적 행위가 없기를 희망한다고 했다.[219] 12월 15일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고 했으며, 1996년 1월 24일 검찰은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 수감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1994년 이후부터 전두환은 5공 신당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2·12 사건과 5·18 관련 재판으로 신당 창당 추진 계획은 무산됐다. 1996년 2월 3일, 전두환은 5공 신당 창당에 여야 정치인 200여 명에게 5백억 원 이상을 뿌렸던 것으로 확인되었다.[236][237]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238][239] 전두환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240]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241][242]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243]
2. 3. 4. 5공신당 창당계획
1994년부터 전두환은 5공 신당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재판으로 신당 창당 추진 계획은 무산되었다. 1996년 2월 3일, 전두환은 5공 신당 창당에 여야 정치인 200여 명에게 5000억원 이상을 뿌렸던 것으로 확인되었다.[236][237]2. 3. 5. 사회 활동
1992년 10월,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219]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 만명의 국민이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죄 및 내란죄로 고발했다. 1994년 총무처 장관과 서석재와 국회의원 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했으나, 전두환은 무대응으로 대응했다.[219] 검찰은 1995년 8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반란죄 및 내란죄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불구속 기소했다.[219]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244]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집행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문으로 추대한 데서 논란이 발생했다.[244] 회원 중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행부측도 당초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245] 이후 전두환은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1999년 전국체육대회 때 하키 결승이 열린 성남운동장을 방문,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우승 팀에 저녁식사를 대접했다.[246]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남자하키 선수들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초청, 다과를 베풀기도 하였다.[246]
1999년 5월 "우리 정부가 허락하고 북한이 받아준다면 북한의 이곳 저곳을 자유스럽게 방문해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며 북한에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247]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와 면담하려 했던 것은 그가 정부의 대북특사 역할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두환은 그동안에도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대북특사를 맡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248]
1999년 7월 그는 김대중에게 자신이 대북 특사로 다녀올 것을 제의하였다. 전두환은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려고 한다"며 "대통령 각하와 국무총리께 건의하고 북측과도 협의해 본인의 희망사항이 성사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요청했다.[249] 그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85년 허담 노동당 비서와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의 서울-평양 교차방문을 통해 김일성 주석과 남북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히면서 남북간에 '다양한 비정규 대화선(對話線)'을 가동할 것을 제안했다.[250]
전두환은 안현태(安賢泰) 전 대통령 경호실장을 통해 방북 희망과 김정일 총비서 면담 의사를 서한으로 전달해 왔었다. 그러나 임동원은 "당시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서해교전 직후 등 시기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전 전대통령측에 전했다"고 밝혔다.[249] 정부는 임 장관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어 전 전 대통령의 방북이 시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양영식(梁榮植)통일부차관을 전 전 대통령에게 보내 그같은 입장을 설명했다.[250]
2. 3. 6. 대북 특사 파견 제의와 거절
1999년 5월 전두환은 "우리 정부가 허락하고 북한이 받아준다면 북한의 이곳 저곳을 자유스럽게 방문해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며 북한에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247] 그는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대북특사를 맡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248]1999년 7월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자신이 대북 특사로 다녀올 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려고 한다"며 "대통령 각하와 국무총리께 건의하고 북측과도 협의해 본인의 희망사항이 성사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요청했다.[249] 그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985년 허담 노동당 비서와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의 서울-평양 교차방문을 통해 김일성 주석과 남북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히면서 남북간에 '다양한 비정규 대화선(對話線)'을 가동할 것을 제안했다.[250]
전두환은 안현태 전 대통령 경호실장을 통해 방북 희망과 김정일 총비서 면담 의사를 서한으로 전달했었다. 그러나 임동원은 "당시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서해 교전 직후 등 시기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전 전대통령측에 전했다"고 밝혔다.[249] 정부는 임 장관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어 전두환의 방북이 시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양영식 통일부차관을 전두환에게 보내 그같은 입장을 설명했다.[250]
2. 4. 2000년대 이후
2003년 2월 16일, SBS와의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정의하여 논란이 일자, 운동권과 시민단체들은 분노하였다. 같은 해 7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한상범은 전두환의 소환조사를 추진할 계획을 발표하였으나,[255] 전두환은 2002년 8월 10일 녹화사업 개입 여부에 대한 소환조사 요청에 이어[256] 이 조사도 거부했다.2. 4. 1. 국민의 정부 시절
2001년 11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여 김 대통령 내외와 오찬에 참석했다. 김대중은 유럽 순방 결과를 설명한 뒤 경제 경쟁력 강화, 민생 안정, 남북관계 개선 등 국정 과제 수행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전두환에게 조언 및 협력을 요청했다.[251]2002년 7월 1일 국군수도병원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희생자 장병 3인의 합동영결식에 참석하여 유가족들을 찾아 조문하였다.[252]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참석차 일본으로 출국한 상태라 불참하였다.
같은 해 8월, 제5공화국 당시 녹화사업에 청와대 고위간부 개입설과 전두환이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에 착수했다. 이 녹화사업은 전두환의 지시와 녹화사업은 당시 보안사, 치안본부, 검찰, 안기부, 문교부, 대학 등이 총동원돼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2002년 2월 19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대공처장(대령)이었던 최경조가 2001년 12월 "82년 청와대에서 보안사 간부들이 만찬을 할 때 전씨가 (입대한 운동권 학생들 때문에 군내에 불온낙서 등이 빈발하고 있다는 등의) 군내 상황을 듣고 있다가 '야, 최경조, 너 임마 뭐하는거야'라며 혼을 냈고, 그 말을 듣고 보안사가 정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교육계획(녹화사업)을 세웠다"라고 진술했다고 밝혔다.[253] 최씨는 이어 "(대통령의) 대책을 수립하라는 이야기 속에 지시가 다 들어있는 것으로, 구상은 (내가) 직접 했다"면서 "입안 후 대통령에게 보고해 결재를 맡았다"고 말했다.[253]
2002년 8월 28일 개그맨 이주일의 빈소를 방문했다. 오후 5시 20분께 장세동 전 경호실장과 앞서 도착한 박종환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의 안내로 분향소에 도착, 간단한 묵념과 함께 헌화했다.[257] 이어 1호 접객실로 옮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이주일씨가 화장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도 군대시절부터 화장하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며 "나도 죽으면 화장하겠다"고 즉석 화장 서약을 했다.[257]
2002년 9월 30일 서울 강서하키장에서 열린 부산아시안게임 남자하키 A조 예선 한국-일본전에 아내 이순자, 측근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20여명과 참관하여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고,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인사했다.[246] 경기가 끝난 후 한-일전에서 첫승을 거둔 대한민국 남자하키팀 국가대표 선수들을 면담, 격려했다.[258]
2002년 10월 녹화사업 관련 전두환이 직접 지시를 내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발견됐고, 10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82년 8월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따르면 80년대 초 '녹화사업'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는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며 관련문서를 처음 공개했다.[259][260] 80년대 초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해 프락치로 활용한 의혹을 받고 있는 소위 '녹화사업'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259]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5공 시절 2인자로 불렸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하고 투표 하루 전 날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군소후보토론회에서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던 김영규 후보는 군사 쿠테타의 하수인과 토론을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발언을 남기며 악수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전두환은 장세동의 대선 출마를 만류했으나, 끝내 출마를 해버렸다며 "장세동 씨도 나이 먹으니 내 말을 안 듣더라"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261]
2. 4. 2. 참여정부 시절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노태우, 최규하, 김영삼 전 대통령 등과 함께 참석했다. 전두환과 이순자 내외는 취임식 오후에 열린 축하 리셉션에도 참석하였다.[251]2003년 2월 16일, SBS와의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정의하여 논란이 되었다. 또한 자신의 추징금에 대해 "노태우, 김영삼 정권 시절 3년여 이상 주위 사람들을 조사했으나 없는 것으로 나왔다"며 재산을 숨기고 있다는 의혹을 부인하였다.[254] 이 인터뷰는 운동권과 시민단체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2003년 7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한상범은 전두환 소환조사를 추진할 계획을 발표했으나,[255] 전두환은 2002년 8월 10일 녹화사업 개입 여부에 대한 소환조사 요청에 이어[256] 이 조사도 거부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 자살했을 때, 전두환은 전립선 수술을 이유로 빈소에 불참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란 분께서 꿋꿋하게 버티시지, 그렇게 가느냐. 조금만 더 버티지"라고 말했다.[279]
2. 4. 3.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 정부 시절 전두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 시기 전후에 발생한 관련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2013년 2월 25일, 전두환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담요를 김영삼의 무릎에 덮어주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두환의 재산을 환수하기 위해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했고,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은 추징 시효를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불법 재산을 취득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재산에서 유래한 재산을 가진 제3자에게도 추징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283] 검찰은 전두환 일가의 미술품 수백 점을 압수하여 경매에 부쳤고, 두 차례의 경매에서 모든 작품이 100% 완판되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다.[284]
2. 4. 4. 박근혜 정부 시절
박근혜 정부 시절 전두환은 회고록 출판 및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재판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2017년 8월 4일, 법원은 전두환 회고록 제1권 '혼돈의 시대'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표현 33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 및 판매를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285] 전두환 측은 문제가 된 부분을 검은색으로 칠해 재출간했으나, 2018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은 36개 내용을 추가로 거짓으로 인정하며 다시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286]
이후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287] 전두환은 알츠하이머 투병을 이유로 재판 불출석을 통보했다.[288] 2018년 8월 27일 공판에서 재판부는 회고록 발매 시점(2017년 4월)과 알츠하이머 진단 시점(2013년) 간의 모순을 지적했고, 변호인은 회고록 준비가 오래전부터 진행되었다고 해명했다.[289]
2019년 3월 11일, 전두환은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혐의로 35년 만에 광주에서 열린 재판에 참석했다. 2020년 4월 27일 재판에도 참석했으나 불성실한 태도로 비난을 받았다.[290]
2. 4. 5. 문재인 정부 시절
전두환은 2021년 11월 23일 오전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1세로 사망했다.[291]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으며, 사망 이후 국가장 추진 논란과 여야 대선 후보 간 조문 논란이 일었다.[292]2017년 작성한 회고록에서 화장 후 북녘이 보이는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는 문구를 남겼고, 생전 별도의 유언을 남기지 않아 이 문장이 실질적인 유언으로 취급되었다. 1997년 재판을 통해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해 국립현충원 안장 및 국가장은 불가능했다. 유서에서 화장 후 북녘이 보이는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대구나 경남 합천은 검토되지 않고 있으며, 본인이 생전에 현충원은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국 여야 지도부 4인과 대선 후보들 모두 조문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윤석열 후보는 검토는 하였으나 취소하였다. 전두환 사망으로 정부는 노태우와 달리 5.18 광주사태와 12·12 군사반란으로 국가장 및 현충원 안장 등 전직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되어 전두환은 연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유해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서울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어 유골은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되었다.
2. 5. 사망 및 조문논란
전두환은 2021년 11월 23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혈액암 합병증으로 사망했다.[35][36][37][38] 그는 후임인 노태우보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다.전두환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39]에서의 역할과 과거 범죄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었기에, 청와대는 대변인을 통해 유족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조화를 보낼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사망 후에도 여당과 야당 모두 공식적인 조문을 삼갔다.[40]
대한민국 정부는 전두환에 대한 국가장을 거행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의 장례는 정부의 지원 없이 유족에 의해 치러졌다.[41]
그의 유해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화장된 후 매장될 예정이었다. 전두환은 과거 전과 기록과 유죄 판결로 인해 법적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없었다. 그의 부인 이순자에 따르면, 전두환은 유족들에게 장례 절차를 최소화하고, 묘를 만들지 말고, 그의 유골을 북한을 바라보는 곳에 뿌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42][43]
2021년 11월 27일, 장례식장에서 이순자는 전두환의 통치로 인한 "고통과 상처"에 대해 간략하게 사과했다. 그러나 이 사과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에 대한 전두환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 결과, 유족 단체를 포함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시민 단체들은 그의 사과가 모호하고 불완전하다고 비판하며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44][45][46]
3. 상훈
연도 | 훈장 | 비고 |
---|---|---|
1968년 4월 | 4등 근무공로훈장 | |
1971년 11월 | 월남 엽성무공훈장 | |
1980년 8월 | 무궁화 대훈장 | |
1981년 | 5.16 재단 5.16 민족상 | |
1981년 | ||
1981년 | ||
1984년 | ![]() | |
1981년 | ||
- | 대통령 표창, 공로 표창 |
2006년 국무회의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하기로 의결했다.[293]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을 비롯한 서훈 취소 대상자 절반 가까이가 훈장 반환 요구에 대해 반환 기한일까지 반환은커녕 사유서조차 내지 않았다. 이에 행자부 관계자는 "서훈 취소자의 경우 훈장 기록부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이 사실을 관보 등을 통해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훈장에 따른 영예가 모두 상실됐다고 볼 수 있다"며 "반환 의무 규정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296] 그러나 전두환은 6년이 지난 현재도 취소된 훈장은 반납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이에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국무회의에 의결을 통해 환수하기로 의결했지만 적극적으로 환수 노력을 하지 않는 행안부를 비판했다.[295]
취소된 훈장
훈장 | 비고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서훈취소/06.03.21 |
태극무공훈장 | 서훈 취소/06.03.21[293][294][295] |
화랑무공훈장 | 서훈취소/06.03.21 |
충무무공훈장 | 서훈취소/06.03.21 |
을지무공훈장 | 서훈취소/06.03.21 |
보국훈장 국선장 | 서훈취소/06.03.21 |
보국훈장 천수장 | 서훈취소/06.03.21 |
보국훈장 삼일장 | 서훈취소/06.03.21 |
수교훈장 광화대장 | 서훈취소/06.03.21 |
4. 논란과 의혹
전두환에 대한 논란과 의혹은 현재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으므로,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5. 평가와 비판
전두환은 집권 과정과 통치 기간, 그리고 퇴임 이후에도 많은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326]
삼청교육대 운영으로 인한 인권 침해 논란도 있었다. 1989년 12월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은 전두환 등을 감금, 폭행 및 가혹행위, 살인 및 살인교사죄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으나,[297] 3년 뒤 서울지검은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297]
전두환은 박정희의 묵인 하에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하여 군 내부 요직을 독점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3S 정책은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억누르기 위한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프로야구 창설, 서울 올림픽 유치 등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육성했지만, 이는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1988년 11월 24일, 전두환은 친인척 비리에 대해 "많은 친족들이 기소될 정도로 부정을 저질러 국민 여러분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은 정말 송구한 일"이라며 공개 사과했다.[102]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며, 박근혜가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전달했다고 한다.[103]
2020년 6월, 광주시 구 전라남도 도청 앞에 설치된 "전두환 치욕의 동상"이 시민들에게 파손되었고,[104] 같은 해 11월에는 청주시 청남대에 설치된 전두환 동상 목이 잘리는 등[105] 전두환에 대한 반감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5. 1. 인물평
전두환은 유들유들하고 비위를 잘 맞추는 성격으로, 위관급 장교 시절부터 '정치군인'의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309]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험은 그에게 '정치군인'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했다는 견해도 있다.[309] 정승화는 전두환을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310] 전두환은 박정희와 자주 교류하며 권모술수를 익힌 것으로 알려졌다.[311] 그는 자신의 붙임성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312]이희호는 "전두환의 숫기와 입담은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선고하려 했던 '수괴'의 아내를 동네 복덕방 아저씨처럼 대했다"고 회고했다.[313]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전두환을 '미국이 오랫동안 키운 친미분자'라고 평가했다.[314] 김영삼은 전두환을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박찬종은 전두환에게 국정파탄의 책임이 있다며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석고대죄할 것을 촉구했다.[315]
전두환은 12·12 군사 정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주동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김대중 당선자의 주선으로 사면 및 복권되었다. 이후 자신의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9년, 전두환은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를 모욕한 회고록으로 인해 광주에서 명예훼손 재판을 받았다. 그는 조철현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칭하며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을 부인했다.[32] 2020년, 전두환은 조 신부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33]
전두환은 항소했으나 2021년 5월과 6월 항소심 재판에 불출석했다.[34] 8월 9일, 광주지법 항소심 법정에 처음 출석했지만 수척하고 허약한 모습이었다. 호흡 곤란으로 25분 만에 법정을 떠났고, 판사 질문에 답하거나 졸기도 했다. 8월 21일, 연합뉴스는 전두환이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았다고 보도했다.[34]
2020년 6월, 광주 구 전라남도 도청 앞 "전두환 치욕의 동상"이 시민들에게 파손되었고,[104] 11월에는 청주시 청남대의 전두환 동상 목이 잘리는 등[105] 현재까지도 반감이 남아 있다.
5. 2. 긍정적 평가
- 박정희 사망 이후 경제 회생에 힘써 헌정 사상 최고의 호황을 이끌었다.[318]
- 1986년 아시안 게임(1981년 11월 26일)과 1988년 하계 올림픽(1981년 9월 30일)을 성공적으로 유치했다.[319]
- 임기 동안 경제기획원의 관치 경제를 통해 평균 물가상승률을 6.1%로 안정시켰다.[321][322]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7·30 교육개혁조치로 대학졸업정원제와 과외 금지 조치를 시행하여 과열 과외로 인한 계층 간 위화감을 해소하고자 했다.[323][324]
- 프로야구(1982년 창설)와 프로축구(1983년 창설) 리그를 만들어 1988년 하계 올림픽으로 이어지는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325]
-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대대장으로서 곡사포와 조명탄을 발사하여 게릴라 진압에 기여했다.
- 1974년 제1사단장으로서 북한의 남침 땅굴을 발견했다.
- 이승만과 장면(미국), 박정희와 최규하(일본)와 달리, 역대 한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순수하게 국내에서 교육받은 인물이다.
- 3S 정책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과 달리 오락 분야에 관대하여 프로야구 창설, 서울 올림픽 유치, 영화법 개정을 통한 표현의 자유 완화, 외국 영화 수입 및 포르노 영화 제작 해금, 관광업과 서비스업, 특히 성산업을 허용하여 국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 1980년 한국 주부들 사이에서 조지루시 전기밥솥이 유행하자, 한국산 전기밥솥 개발을 지시했다는 일화가 있다.[101]
- 2015년 11월, 미국은 전두환 일가의 은닉 재산을 한국에 반환하는 데 합의했다.
5. 3. 부정적 평가
전두환은 집권 과정과 통치 기간 동안 여러 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정통성 결여: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통해 불법적으로 집권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하여 정권의 정통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326]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전두환은 계획적인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직무와 관련 없는 참모들에게 지시하여 불법적인 조치를 실행했다.[326]
- 인권 유린 및 민주주의 탄압: 국가안전기획부, 경찰청 대공분실, 보안사 등을 통해 반체제 인사와 학생운동가를 고문하고, 김근태, 박종철, 권인숙 등 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했다.
- 언론 탄압: K공작계획 등 언론 공작을 통해 언론을 회유하고, 언론 강제 통폐합을 단행하여 언론의 자유를 훼손했다.[149] 보도 지침을 통해 여론을 조종하고, 외국 잡지나 신문 검열을 통해 정보를 통제했다.[328]
- 권력형 비리: 재임 기간 중 장영자·이철희 사건,[329] 명성그룹 사건, 영동진흥개발 사건 등 여러 권력형 비리 사건이 발생했다.[329] 동생 전경환을 비롯한 친인척들의 비리도 끊이지 않았다.[330]
- 경제 정책 실패: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여 경제 기강을 무너뜨리고, 국제그룹 해체 등 정경유착의 문제점을 드러냈다.[332]
- 3S 정책: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스포츠, 영화, 성(性) 산업을 육성하는 3S 정책을 실시했다.[333]
- 추징금 미납: 2200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으나, 대부분을 납부하지 않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어 비판받았다.[334]
- 5·18 민주화운동 관련: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명령 등 진압 과정에 대한 책임 문제와 진상 규명 노력이 미흡하다.[338] 2019년에는 5.18 희생자들을 모욕한 혐의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32]
- 지역 감정 조장: 전두환 정부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지역 감정을 조장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01] 하나회 등 영남 출신 군인 중심의 세력이 지역 감정을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301]
- 기타:
- 박정희를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평가하거나,[311] 김재규를 망상가로 비웃는 등 좌파나 민중의 믿음과 다른 발언들을 남겼다.[316][317]
- 김영삼은 전두환을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315]
- 박찬종은 전두환에게 국정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며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석고대죄할 것을 촉구했다.[315]
- 과외 금지 조치가 음성적인 불법 비밀 과외를 번성하게 하고, 과외비 폭등의 원인이 되었다.[337]
6. 가족 관계
- 아버지: 전상우(全相禹, 1893년 1월 9일~1967년 3월 2일)
- 어머니: 김점문(金點文, 1898년~1978년 4월 10일)[343]
- 배우자: 이순자(李順子, 1939년 3월 24일~, 본관은 성주)
- 형제자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전열환 | 1915년 | 1925년 | 요절 |
전규곤 | 1916년 | 1916년 | 요절[344] |
전홍렬 | 1918년 | ? | |
전명렬 | 1922년 | ||
전선학 | 1928년 | ||
전기환 | 1929년 | 2019년 | 경찰 출신, 1988년 비리 혐의로 구속[345][346] |
전학렬 | 1934년 | ||
전점학 | 1935년 | ||
전석환 | 1937년 | ? | 요절 |
전경환 | 1942년 10월 20일 | 2021년 10월 21일 | 기업인,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역임 |
- 자녀
이름 | 출생 | 배우자 | 비고 |
---|---|---|---|
전재국 | 1959년 10월 26일 | 정도경(1961년 5월 30일~) | 기업인, 시공사 대표 역임 |
전효선 | 1962년 3월 19일 | 윤상현(1962년~) (2004년 9월 이혼) | 미국 변호사, 서경대학교 교양과정부 조교수[347] |
전재용 | 1964년 9월 22일 | 박경아, 최정애(2006년 이혼), 박상아(1972년~) | 본명 전재용(全載容)[348] |
전재만[351] | 1971년 4월 10일 | 이윤혜 | 외교관 |
- 기타 가족 관계
- 장인: 이규동(李圭東, 1911년 11월 7일~2001년 9월 11일)
- 처남: 이창석(李昌錫, 1951년 1월 11일~)
전두환 재임 시절 형 전기환은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은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이권을 챙기는 등 비리를 저질러 퇴임 후 물의를 일으켰다.[345][346]
7. 학력
8. 자택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해 있으며, 정식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27나길 11-14이다.
전두환은 1970년부터 연희동에서 거주하였다. 1980년 대통령 취임 후에는 청와대에서 생활하다가, 1986년부터 기존 연희동 사저를 개보수하였고, 임기가 끝난 뒤 보수가 완료된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가 사망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352]
연희동 자택의 규모는 대지 816.5m²(약 247평), 연면적 238m²(약 72평)이다. 1987년 전두환은 인근 땅을 매입하여 본채 및 별채 3개를 추가로 세웠고, 이 과정에서 국비 10억원이 소요되었다.[353] 1988년 5공 청문회 직전 전두환은 연희동 자택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백담사로 떠난 뒤 이 약속은 흐지부지되었고, 백담사에서 유배 생활을 끝낸 뒤 다시 연희동 자택에 돌아와 거주하였다. 1995년 12월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연희동 자택 골목 앞에서 성명문을 발표하고 합천군으로 떠났는데, 이를 '골목 성명'이라고도 부른다.
2003년 검찰은 추징금 징수를 위해 연희동 자택의 별채를 공매했으나, 처남 이창석 씨가 51억원에 낙찰받은 뒤 셋째 며느리에게 소유권을 넘겨주면서 다시 전두환 일가의 소유가 됐다. 2013년 '전두환 추징법' 관련 논란으로 검찰에 출두한 아들 전재국은 연희동 자택을 추징금으로 자진 납부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전두환이 사망할 때까지도 연희동 자택은 압류되어 추징되지 못했다.
한편 전두환의 연희동 자택에 대한 많은 경찰 경비로 인한 논란이 있었다. 연희동 자택 앞에는 경호동 3채가 위치하여 있으며, 사저 앞 골목에 대한 자유로운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1997년 대법원 판결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했으나, 경호 혜택은 유지되어 1998년부터 경찰에서 경호를 맡아왔다. 2012년 1월, 박원순은 전두환 사저 인근에 설치된 경호동을 폐쇄할 것을 검토하였다.[354]
9. 군 복무 경력
소위 | 중위 | 대위 | 소령 | 중령 | 대령 | 준장 | 소장 | 중장 | 대장 |
---|---|---|---|---|---|---|---|---|---|
1955년 2월 28일 | 1956년 3월 2일 | 1958년 3월 2일 | 1961년 11월 1일 | 1963년 1월 1일 | 1969년 11월 1일 | 1973년 1월 1일 | 1977년 2월 1일 | 1980년 3월 1일 | 1980년 8월 5일 |
- 1966년 -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 1967년 -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대대장
- 1969년 - 육군참모총장실 주석부관
- 1970년 - 제9사단 29연대장(베트남 주둔 백마부대)
- 1971년 - 제1공수특전단 단장
- 1976년 -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 1978년 - 제1사단장
- 1979년 - 보안사령관, 박정희 암살 사건 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12·12 사태로 정권 장악
- 1980년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 상임위원장
- 1980년 - 예비역 편입
전두환은 박흥주 대령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복권을 여러 번 시도했다.[306] 10.26 사태 이후 재판 당시 현역 대령 신분이었던 박흥주는 법의 적용을 받았지만, 전두환은 박흥주의 유족에게 연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306] 그러나 총무처와 국방부는 현행법을 고치지 않는 한 어렵다고 거절했다.[306] 그럼에도 전두환은 보훈처장이 자신의 부탁을 끝내 거절한 것을 서운해하면서도 보훈처장은 자기 임무에 충실하였다며 경질하지 않았다.
10. 기타
1987년 전두환은 박흥주의 유족에게 연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총무처와 국방부에서는 현행법을 고치지 않는 이상 어렵다고 거절했다. 그는 평소 의리를 모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나중에 박흥주 대령에 대한 것을 다시 접하게 된 전두환은 박흥주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복권을 여러 번 시도했다.[306]
재판 당시에도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던 박흥주는 사후 연금을 받지 못했다. 박흥주의 측근인 H모의 증언에 의하면, 경기 안양 근처에 있던 자신의 사단장이 "각하의 지시로 박 대령의 유가족을 도와야겠다"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으나, 박흥주의 부인은 "경제적인 도움은 필요 없다. 김재규가 연금이 나오는 등 실질적으로 예비역 중장 신분이 회복된 상태인 만큼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박 대령도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 사단장은 청와대에서 보내준 것이라며 금일봉을 놓고 갔다.[306] 전두환은 보훈처장이 자신의 부탁을 끝내 거절한 것을 서운해 하면서도 보훈처장은 자기 임무에 충실하였다며 경질하지 않았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자신이 북조선에 특사로 다녀오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하였다. 1999년 5월 "우리 정부가 허락하고 북한이 받아준다면 북한의 이곳 저곳을 자유스럽게 방문해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며 북한에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308] 1999년 7월 당시 자신은 '남북 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다[249]'고 신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임동원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985년 허담 조선로동당 비서와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의 서울-평양 교차방문을 통해 김일성 주석과 남북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며 남북간에 다양한 비정규 대화선(對話線)을 가동할 것을 당시 국민의 정부에 제의하였다.[250] 일각에서는 그가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307]
닮은 연예인(박용식)에 대한 탄압도 간혹 회자되곤 한다. 또한 제5공화국 기간 중에는 대머리, 주걱턱 등은 영화계나 드라마계에서 금칙어가 됐다.
2002년 8월 이주일의 빈소에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주일 씨가 아들이 사망한 뒤 박종환 감독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 함께 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257] 2008년 4월에는 팬클럽인 전사모에 의해 전두환 기념관이 설립되려다가[355] 무산되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셋 뿐인 '''정치 경력이 아예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나머지 두 명은 박정희와 윤석열이며 박정희, 전두환 둘 다 장성급 장교에서 바로 대통령이 되었고, 윤석열은 검찰총장에서 바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술을 좋아했으나, 2007년에 공식적으로 술을 줄였다고 밝혔다. 애연가이기도 했던 전두환은 1987년 자신의 퇴임식 등 공식 석상에서도 흡연을 하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의 식단을 보면 전두환만 유난히 고기가 많은데, 축구 골키퍼 출신이라서 운동을 해야 했고 그에 따라 영양섭취를 많이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11. 유행어
- 1980년 이후 9시 뉴스의 첫 기사로 전두환 대통령의 일정이 보도되어 땡전 뉴스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 1995년 재판정에서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푸념한 것이 화제가 되어 한동안 유행했다.
- 2003년 4월 28일 법정 회견에서 "29만 원 밖에 없다."고 하여 이 발언이 한동안 유행했다.[356][357][358]
- 2008년 4월 방송 인터뷰에서 "겪어보지도 않고 나를 미워한다"라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같은 해 4월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 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나라도 대단히 좋은 나라가 됐다."며 "누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더라도 헌법을 개정해서 장기집권하겠다고 할 사람은(없을 것)… 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간덩이가 큰 사람"이라고 말했다.[363] 또한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찍는단 말이야. 인상 나쁘게... 젊은 사람들은 나에게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고 한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363][364][365]
- 2009년 8월, 전두환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는 발언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366][367]
- 전두환은 친인척이 추징금을 대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면 "겨우 먹고 살만한 정도라 가족이 추징금을 대납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368]
- 전두환의 재판 때 전두환이 같이 재판을 받는 노태우에게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프라이 주나?"라고 하자, 노태우는 "안 준다."라고 답하였고, 전두환은 "우리도 안 줘."라고 대답했다.[369]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광주는 어~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라고 망언한데 대해 일간베스트저장소나 디시인사이드 등지에서는 한동안 5.18을 비하할 의도로 그의 말투가 패러디되곤 한다.
12. 방송 출연
13. 문화에 나타난 전두환
전두환은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와 맞물려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으로 프로야구(1982년 창설)와 프로축구(1983년 창설) 리그를 만들었다.[325]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배우 이덕화가 전두환 역을 연기했다.
13. 1. 문학
- 전두환 회고록한국어 1권, 2권, 3권
- 백무현의 만화 전두환한국어 - 전두환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 겸 만화
-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한국어 - 전두환 전기
13. 2. 사이버 공간
일베저장소에서는 전두환을 ‘땅크성님’, ’엔젤두환’ 등으로 부른다.13. 3. 전두환이 등장한 작품
- 박용식 - 1991년 MBC 드라마 《땅》
- 박용식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
- 박용식 -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
- 정종준 -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
- 전운 - 1996년 MBC 드라마 《화려한 휴가》[381]
- 장광 -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
- 이덕화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
- 염동헌 - 2012년 MBC 드라마 《빛과 그림자》 - 각색한 인물 '정장군'
- 윤동환 - 2013년 MBN 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
- 윤길, 오원준 - 2013년 Jtbc 드라마 《민주를 위해서 목숨을...》
- 장광 - 2013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
- 장광 - 2015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 노민 - 1995년 KBS 라디오 드라마 《그때 그 사건》
- 신성호 - 1995년 MBC 라디오 드라마 《격동 30년》
- 김길호 - 1989년 영화 《서울 무지개》(영화에서는 실명을 언급하지 않고 "어른"이라는 표현으로 나온다.)
- 정종철 - 2005년 KBS2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에서 옥장군으로 연기함)
- 임범[382] - 2005년 영화 《그때 그 사람들》
- 이의선[383] - 2006년 영화 《홀리데이》
- 이강영 -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홍보물)
- 장광 - 2012년 영화 《26년》 (영화에서는 실명을 언급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나온다.)[384][385][386][387][388]
- 서현우 - 2020년 영화 《남산의 부장들》[389]
- 손성호 - 2022년 영화 《헌트》[390]
- 백현진 - 2022년 영화 《서울대작전》[391]
- 황정민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392]
- 유재명 - 2024년 영화 《행복의 나라》 [393]
- 2012년 대한민국 영화 《26년》은 전두환 암살 계획을 다룬다.
- 전두환을 모델로 한 가상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2021년 JTBC 드라마 설강화에 무명 배우의 카메오로 등장한다.
- 전두환을 모델로 한 가상의 대한민국 장군이 "전두광"이라는 이름으로 2023년 대한민국 영화 12.12: 그날에 등장한다.[56]
- 전두환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랑군 폭격 사건에 대한 개입으로 인해 군 정보 장교의 보복 대상으로 등장하는 대한민국 액션 스릴러 영화 헌트에서 가상의 인물로 등장한다.
14.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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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の全斗煥元大統領が死去 90歳、クーデターで実権
https://www.nikkei.c[...]
2021-11-23
[95]
웹사이트
【政界地獄耳】韓国元大統領・全斗煥死去 光州事件の真実、明かされぬまま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1-11-25
[96]
뉴스
全斗煥氏死去 国葬も国立墓地埋葬もなし=光州事件などで反省示さず
https://jp.yna.co.kr[...]
2021-11-23
[97]
웹사이트
全斗煥家の不正暴露し帰国 韓国、元大統領の孫 空港で逮捕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社
202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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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韓国併合
[99]
웹사이트
http://www.chosuno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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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韓国元大統領「昭和天皇」に遺憾と反省求める…“植民地支配”「最大限強い言葉で反省を」 韓国外交文書で発覚
https://web.archive.[...]
産経新聞
201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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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해외여행 자유화 30년…글로벌 에티켓은 몇 점?
https://www.yna.co.k[...]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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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朝鮮民族を読み解く 北と南に共通するもの
筑摩書房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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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全斗煥氏「朴槿恵氏に大統領職は困難と判断」=回顧録で語る
http://japanese.yonh[...]
聯合ニュース
2017-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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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写真】市民の殴打で破損した「全斗煥の恥辱の銅像」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20-11-19
[105]
웹사이트
全斗煥元韓国大統領の銅像の首切断した50代、現行犯逮捕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20-11-19
[106]
웹사이트
'전두환 동생' 전경환, 지병으로 사망
https://www.yna.co.k[...]
2021-10-22
[107]
웹사이트
'누가 봐도 죄인' 박상아, 남편 전재용의 목사 길 반대했던 이유
https://mobile.busan[...]
2021-03-07
[108]
웹사이트
고승덕 반대편에 선 박태준 가문의 사람들
https://www.business[...]
2014-06-02
[109]
웹사이트
전재용이 처음 밝힌 소문의 진실 & 전처 최씨 측 입장|여성동아
https://woman.donga.[...]
2007-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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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썰렁한 전두환 빈소 첫날, 의원중엔 前사위 윤상현만 찾았다 [전두환 1931~2021]
https://www.joongang[...]
202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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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112]
웹사이트
今日の歴史(3月20日)
https://megalodon.jp[...]
200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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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金守漢] 전두환 노태우 학병을 내 휘하에서 훈련시켜
https://monthly.chos[...]
월간조선
2010-06-17
[114]
뉴스
'수상한 5.18 유공자' 이해찬? 김진태, 무지하거나 사악하거나
https://m.news.naver[...]
오마이뉴스
2019-02-18
[115]
백과사전
간접선거
두산백과
[116]
백과사전
간접 선거
[117]
뉴스
오늘 속으로 全盧재판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4-08-26
[118]
뉴스
전두환.노태우 감형 판결과 사면 여부 관련 여론조사 결과
https://imnews.imbc.[...]
MBC뉴스데스크
1996-12-19
[119]
뉴스
대통령.이회창 대표,두 전직 대통령 특별 사면 파문 관련 심야 긴급 회동
https://imnews.imbc.[...]
MBC
1997-09-02
[120]
뉴스
빠른 시일 내에 전노씨 사면, 이인제 후보 기자회견서 밝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2-16
[121]
백과사전
15대 대선 전두환 노태우 사면 문단
[122]
뉴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사면에 여야 모두긍정적 반응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12-21
[123]
뉴스
영남 보수 신당 창당 추진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9-01-29
[124]
뉴스
5공 세력이 돌아온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9-03-13
[125]
뉴스
5공 세력 정치재개 진통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9-03-15
[126]
뉴스
全斗煥(전두환)-金重權(김중권) 골프 회동 與圈(여권),5共(공)에 손내미나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9-08-31
[127]
뉴스
전두환 재판 참석, 불성실한 태도 논란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20-04-27
[128]
뉴스
폭언에 꾸벅꾸벅 전두환씨
https://news.v.daum.[...]
MBC뉴스
2020-11-30
[129]
법원기록
광주지방법원2018고단1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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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전두환, 5·18 사과 없이 사망
https://www.dong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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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news.joins.co[...]
[132]
뉴스
대통령의 아버지, 누구인가?…가난한 농사꾼에서 거제도 갑부까지 ①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00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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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보관된 사본
http://news20.busan.[...]
2009-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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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육사12기 장교출신이 쓴 회한의 육필수기 내가 겪은 전두환 노태우와 박태준
https://blog.naver.c[...]
신동아
19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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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www.ohmynews.[...]
[136]
기타
[137]
웹사이트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나" 박정희의 전두환 총애, 이유 있었다
http://www.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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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경향신문
1980-08-21
[13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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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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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board > 칼럼 > 안케 패스 전투, 1972
http://www.leesangdo[...]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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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43]
뉴스
[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이야기 전두환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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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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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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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실록 청와대 궁정동 총소리
한국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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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재규 단독계획 범행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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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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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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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신군부, 언론통제 실상 드러나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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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5.18사건 재수사 종결,내일 기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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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공소장으로 본 5.18 전개과정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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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광주항쟁 30년](4) 광주가 우리에게 묻는 것 - 남은 자의 과제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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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일본 커넥션 - 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http://www.im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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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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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양당 국회 대책 개헌해제논의 등 활성화
http://dna.naver.com[...]
198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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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미국, 80년대 학생운동 세력에 "버릇없는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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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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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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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우리 한국사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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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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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61]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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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대한민국 우주시대 '카운트다운' 우주강국 코리아 '카운트다운'
https://news.v.daum.[...]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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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북한의 로켓발사 정국과 북미 관계의 함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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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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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동아일보
198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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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동아일보
198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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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수환 추기경 어록>(종합)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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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김수환 추기경과 관계가 깊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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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삼성경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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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삼성경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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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이슈&현장] '공정한 사회' 과제와 실천방안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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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지방선거 '양극화 세력' 대 '복지 세력'의 대회전"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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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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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북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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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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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국내서 82년 플루토늄 극미량 추출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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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한국, 82-83년 극비리 핵개발 추진"
https://news.naver.c[...]
YTN
200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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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이건이 전두환 핵무기개발 직접 저지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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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83년 레이건이 핵개발 중지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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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4-09-09
[178]
뉴스
80년대초 국내서 플루토늄 추출
http://www.hani.co.k[...]
한겨레
200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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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까
http://weekly.hankoo[...]
주간한국
2004-09-23
[180]
뉴스
'제5공화국' 전두환, 핵무기개발 포기 방영후 네티즌 비난
http://www.heraldbiz[...]
해럴드경제
[181]
뉴스
전직 대통령 북핵실험 진단 `3인3색`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6-10-10
[182]
웹인용
22년 만에 간판 내리는 청송감호소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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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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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이승복기념사업 25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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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http://enc.daum.net/[...]
Daum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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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https://archive.toda[...]
[186]
뉴스
[뉴시스아이즈]이슈진단 '가열되는 통일비용 논란'-역대 정부 통일방안 살펴보니…정국따라 천차만별
https://news.naver.c[...]
[187]
뉴스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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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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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남북관계史와 '쌀'지원 함수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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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뉴스테이션/딥포커스] 북한의 '도발과 대화' 이중전술의 비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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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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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정부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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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후의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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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을 동맹급으로 이끈 나카소네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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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시기 한일경협차관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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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대일 경제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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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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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餘滴(여적)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8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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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보일원화 공약 어떻게됐나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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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홍보의 불균형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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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 근·현대사
도서출판 기파랑
200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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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http://www.seoul.co.[...]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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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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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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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박정희 시대 경제의 명과 암
http://breaknews.com[...]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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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한용원 "안필준 보안사령관 친위쿠테타 지시"
https://web.archive.[...]
201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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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1986년 11월 29일 민주정의당 중앙집행의원 및 상임의원장들과의 만찬 석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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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한국의 이너서클 <15>허삼수와 허화평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1-12-03
[209]
웹인용
전대통령 취임 6주년 각료들과 오찬 및 환담
https://web.archive.[...]
198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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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전대통령, 재임 6주년 세계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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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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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전두환대통령 특별담화]임기 만료 후 후임자에게 정부 이양
http://imnews.imbc.c[...]
1987-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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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전두환대통령 특별담화]담화 발표에 국민들 기대 가져[안재기]
http://imnews.imbc.c[...]
1987-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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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정치동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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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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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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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올 노벨 평화상 후보 전 전임대통령 추천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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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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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대국민성명 전문
한국일보
199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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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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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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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YS-전두환 영남나들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9-04-05
[223]
뉴스
TK지역'5共(공) 신당說(설)'불길 심상찮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9-05-10
[224]
뉴스
대구 경북 현지 분위기, 5공 신당 반응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9-05-10
[225]
뉴스
5공 세력 움직임 심상찮다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9-05-24
[226]
판결문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http://glaw.scourt.g[...]
199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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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도서출판 답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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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도서출판 답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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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영삼 대통령.이회창 대표,두 전직 대통령 특별 사면 파문 관련 심야 긴급 회동
http://imnews.imbc.c[...]
mbc
1997-09-02
[230]
뉴스
빠른 시일 내에 전노씨 사면, 이인제 후보 기자회견서 밝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2-16
[231]
뉴스
영남 보수 신당 창당 추진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9-01-29
[232]
뉴스
5공 세력이 돌아온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9-03-13
[233]
뉴스
5공 세력 정치재개 진통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9-03-15
[234]
뉴스
全斗煥(전두환)-金重權(김중권) 골프 회동 與圈(여권),5共(공)에 손내미나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9-08-31
[235]
뉴스
경제난에 '두 끼 먹자'
http://ilyoseoul.co.[...]
일요서울
2008-07-31
[236]
뉴스
비록 문민정부 특별조사실 12.12 5.18 사건, 5공 신당 창당설과 전두환교 맹신도들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8-04-23
[237]
뉴스
전씨 5공 신당 추진 등 비자금 880억원 뿌려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6-02-03
[238]
뉴스
김영삼 대통령.이회창 대표,두 전직 대통령 특별 사면 파문 관련 심야 긴급 회동
http://imnews.imbc.c[...]
mbc
1997-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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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빠른 시일 내에 전노씨 사면, 이인제 후보 기자회견서 밝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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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보수 신당 창당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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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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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세력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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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99-03-13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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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세력 정치재개 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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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9-03-15
[243]
뉴스
全斗煥(전두환)-金重權(김중권) 골프 회동 與圈(여권),5共(공)에 손내미나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9-08-31
[244]
뉴스
(풍향계) 박정희기념관 건립과 도덕적 해이
http://www.kyosu.net[...]
교수신문
200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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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news.donga.co[...]
[246]
뉴스
아시안게임 전두환 전대통령의 하키 '애정'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247]
뉴스
전두환씨 기자간담『통일특사役 하고 싶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1999-05-04
[248]
뉴스
전두환씨 방북추진/김정일 면담요청 안팎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1999-10-25
[249]
뉴스
정부, 전두환 전대통령 방북 추진 거부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9-10-25
[250]
뉴스
전두환씨, 7월 訪北 극비 추진…정부에 주선 요청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1999-10-25
[251]
뉴스
김대통령 전두환씨 오찬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252]
뉴스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http://media.daum.ne[...]
Daum 미디어다음
[253]
뉴스
'녹화사업', 82년 전두환씨 지시
http://www.munhwa.co[...]
munhwa.com
[254]
웹인용
전두환 광주 폭동 발언
https://www.youtube.[...]
[255]
뉴스
녹화사업 조사위해 전두환씨 소환
http://www.donga.com[...]
donga.com
[256]
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 '녹화사업' 조사 불응
http://www.hani.co.k[...]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257]
뉴스
이회창 후보, 전두환 前 대통령 조문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258]
뉴스
하키장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259]
뉴스
'녹화사업' 대통령지시 시사문건 확인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60]
뉴스
전두환, 녹화사업 지시 추정문서 발견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61]
뉴스
전두환씨 “장세동도 나이드니 내말 안들어”
https://n.news.naver[...]
한겨레
2002-10-22
[262]
뉴스
전두환 前대통령 재산명시 심리재판 舌戰
https://n.news.naver[...]
동아일보
2003-04-28
[263]
뉴스
‘전사모’ 활동 입체추적
http://www.ilyosisa.[...]
이슈사
2013-07-08
[264]
뉴스
"5·18은 북한군이 조종" 주장 전사모 항소심도 무죄
http://www.edaily.co[...]
이데일리
2014-09-26
[265]
뉴스
전두환 · 노태우씨 서훈 취소
https://n.news.naver[...]
부산일보
2005-12-21
[266]
뉴스
전두환씨 부자 "세금 80억 돌려달라" 증여세 취소 소송
http://www.hani.co.k[...]
한겨레
[267]
뉴스
전두환 "인질 석방 안 되면 내가 대신 인질 될까 고민"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08-29
[268]
뉴스
전두환, 이명박에 입심 과시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007-08-30
[269]
뉴스
인터넷 스타 ‘전두환 인질’ 발언
http://www.hani.co.k[...]
한겨레21
[270]
뉴스
권영길 후보 논평, 전두환 덕분에 웃겼다
연합뉴스
2007-08-29
[271]
뉴스
전두환 "문상와서 시끄럽게 하는 것 아니거든"
https://n.news.naver[...]
오마이뉴스
2006-10-23
[272]
뉴스
전 前대통령의 '으스스한' 농담, 구설 올라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8-04-17
[273]
뉴스
YS "잘할 것으로 믿어" DJ "서민 살피길"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2008-02-25
[274]
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 윤현진 아나 결혼식 참석
http://sports.hankoo[...]
스포츠한국
[275]
뉴스
전두환 "하루에 두 끼만 먹기 운동하자" 이색 제안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8-07-22
[276]
뉴스
"경제 어려운데 하루 두 끼 먹기 운동 어떤가"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8-07-22
[277]
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헛개그를 고찰함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278]
뉴스
전두환, 고 김수환 추기경 '뒷짐 조문' 결례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9-02-18
[279]
뉴스
노무현, 전태일, 예수
http://www.newsnjoy.[...]
뉴스앤조이
2009-06-01
[280]
뉴스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http://news.kukinews[...]
쿠키뉴스
[281]
웹인용
전두환 전 대통령도 DJ 문병 "틀림없이 완쾌될 것"
https://web.archive.[...]
2009-08-14
[282]
웹사이트
노컷뉴스
http://www.cbs.co.kr[...]
[283]
뉴스인용
16년 만에 還收… '전두환 추징법(추징시효 연장·타인명의 은닉 재산 환수 가능)'·朴대통령 의지가 결정적 動因
http://news.chosun.c[...]
[284]
뉴스인용
[이슈&토크] '전두환 미술품' 100% 완판 비결은?
http://mn.kbs.co.kr/[...]
[285]
뉴스인용
[취재파일] '전두환 회고록' 판매 금지…어기면 '건당 5백만 원 벌금'
https://news.sb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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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전두환, 5·18명예훼손"…『전두환 회고록』 또다시 출판 금지
https://news.joins.c[...]
[287]
뉴스인용
전두환씨, 광주서 열리는 첫 형사재판 출석할까?
http://www.hani.co.k[...]
2018-08-27
[288]
웹인용
전두환, 재판 불출석..."알츠하이머 투병 중"
http://ytn.co.kr/_ln[...]
[289]
뉴스인용
전두환 '광주 5·18 재판' 불출석…"강제 구인해야"(종합)
http://news1.kr/arti[...]
[290]
뉴스
전두환 재판 참석, 불성실한 태도 논란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20-04-27
[291]
뉴스인용
전두환 씨, 향년 90세로 사망..."화장실에서 발견"
https://www.ytn.co.k[...]
2021-11-23
[292]
뉴스
전두환씨 23일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
https://news.v.daum.[...]
2021-11-23
[293]
뉴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76명 서훈취소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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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노태우씨 훈장반환 '버티기'
http://www.hani.co.k[...]
한겨레
[295]
뉴스
전두환·노태우, 4년째 훈장 반납 안하고 버티기 2006년 서훈 취소 후 全 9개, 盧 11개 등 모두 20개 미반납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1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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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노태우씨 훈장반환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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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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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렬 최대통령 하야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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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김영삼 전 대통령: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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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편중이 지역감정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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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청와대 궁정동 총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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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씨 방북추진/김정일 면담요청 안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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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9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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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씨 기자간담『통일특사役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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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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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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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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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남편의 사형선고 소식때 나는 외롭게 감금당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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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 "전두환, 現국정파탄 책임 이순신 동상앞 석고대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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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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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라더니"…전두환 골프 라운딩 포착 / 연합뉴스 (Yonha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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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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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전사-7화]유신 최후의 만찬, 김재규 망상이 빚은 ‘촌극’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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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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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욕하는 `전두환`, 세계에선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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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코리아
20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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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5공화국', `전두환=29만원?' 홈피에 논란 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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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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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 수공계략 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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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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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정책 가장 실패한 대통령은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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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201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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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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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88-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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課外 學父母명단공개·免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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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8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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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社會淨化委 課外학생 入試資格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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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1-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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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30년만에 밝혀지는 ‘88서울올림픽 유치’ 성공 비화… ‘왕회장’의 꽃다발, 日 물량공세 꺾었다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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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12.12및 5.18 사건관련 全斗煥씨 범죄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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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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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신현확 육성증언(上), 12.12 밤에 정승화 체포 재가 끝까지 반대
https://www.pennmike[...]
펜앤드마이크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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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울 첫 상주특파원 눈에 비친 5.18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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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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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의사회' 내세웠던 전직 대통령의 파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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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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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 시절 5공 청산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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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200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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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한국경제 제 3의 길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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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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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200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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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BC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을 말한다"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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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추징금 300만원 납부 왜?… 여론 피하고 시효연장 '꼼수'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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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비자금' 미국에 있었다?
http://media.daum.ne[...]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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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1672억 추징금 미납' 전두환, 300만원만 납부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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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이슈진단 '약탈형 한국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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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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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5·18 내란 사건 대법원 판결문 (96도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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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5·18 발포 요청자·명령자 이미 규명돼 있다" <주간조선> 전 안기부 간부 증언 보도... 88년 제작한 '광주백서'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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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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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씨 5·18때 '자위권 발동'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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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200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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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과거사위, 5·18때 전두환씨 '자위권 발동 주장'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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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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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5.18 때 전두환씨 '자위권 발동'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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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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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지종학풍수지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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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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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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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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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조영래 눈물의 변론' 끝내 외면…"사법부 몰락을 봤다"
http://www.hani.co.k[...]
한겨레
[346]
뉴스
정권마다 반복된 '가족 옥살이' 언제까지…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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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씨 외동딸 이혼
http://www.hani.co.k[...]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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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349]
뉴스
거미줄처럼 끈끈하게 얽힌 인연… 헤어질 땐 그들도 '으르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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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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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열애설 해결하려다 사랑에 빠진 전재용 & 탤런트 박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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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경향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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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재산 29만원’ 전두환 아들 전재만 유흥업소 여성에 4600만원 시계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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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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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연희동 자택 고쳐서 사용… 노무현, 최초로 지방에 사저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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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2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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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연희동 전두환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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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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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박원순 “전두환 경호건물 폐쇄 검토”
https://m.khan.co.kr[...]
경향신문
201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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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사모' 사무실 문 열어... "전두환 기념관 세우겠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356]
뉴스
사이버공간은 전두환 패러디 글로 '들썩'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357]
뉴스
전씨는 구호대상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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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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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全씨 재임중 9,500여억 거둬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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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씨 민사집행법 위반여부 검토중"<검찰>(종합)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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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29억"
http://search.ytn.co[...]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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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씨 '재산 허위명시' 무혐의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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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씨 `재산 허위명시` 무혐의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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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 前대통령의 '으스스한' 농담, 구설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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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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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은 죽어도 그 이름은 남을 것이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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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ttp://www.magaz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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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DJ 때 전직 대통령 제일 행복"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00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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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DJ 재임시절에 전직 대통령들 제일 행복"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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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G20 만찬주, 전두환 아들이 만든 포도주 사용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369]
뉴스
전두환 첫 마디 "자네 구치소에선 계란 프라이 주나?"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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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전두환 백담사 은둔(1988.11.23)
http://www.ihs21.org[...]
2009-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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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전두환의 불교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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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월주스님 "10ㆍ27법난 때 죄수복입고 조사받아"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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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치와 교회] ④끝나지 않은 ‘신종교 죽이기’… “부패 숨기고 기득권 유지 위해 사이비로 매도”
https://www.newscj.c[...]
202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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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한국 개신교 이단의 발생과 교리 특징] (16)재림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
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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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문병간 전두환씨 "DJ 대통령때 전직 가장 행복"
http://www.hani.co.k[...]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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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문병 온 전두환 "DJ 집권때 제일 행복"
http://www.seoul.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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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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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이제 음식도 술도 안 먹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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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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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뉴스추적」'대통령 성공할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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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신문
200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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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영화 '29년' 제2의 '그때 그사람들'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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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8-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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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들어지는 웹툰 '26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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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2012-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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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은 '26년', 전두환 언급 없이 '그 사람' 단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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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
20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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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의 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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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2014-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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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대신 나라도 사과해야지
https://news.naver.c[...]
씨네21
201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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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390]
텍스트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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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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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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