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 깅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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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트 깅리치는 미국의 정치인이자 작가로, 1943년 6월 17일에 태어났다. 그는 공화당 소속으로 1979년부터 1999년까지 하원의원으로 재직했으며, 1995년부터 1999년까지 하원 의장을 역임했다. 깅리치는 1994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를 이끈 ‘미국과의 계약’을 주도했고, 1995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하원 의장 재임 중 윤리 문제로 징계를 받았으며, 1999년 의원직에서 사임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작가, 컨설턴트, 방송인 등으로 활동하며,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중도 사퇴했다.

뉴트 깅리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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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의 깅리치
출생 이름뉴턴 리로이 맥퍼슨
출생일1943년 6월 17일
출생지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
정당미국 공화당
배우자재키 배틀리 (1962년 결혼, 1981년 이혼)
마리안느 긴서 (1981년 결혼, 2000년 이혼)
캘리스타 비섹 (2000년 결혼)
자녀2명
친척캔디스 깅리치 (어머니 쪽 이복 형제자매)
교육에모리 대학교 (문학사)
툴레인 대학교 (문학 석사, 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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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웹사이트gingrich36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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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직책미국 하원 의장
임기 시작1995년 1월 4일
임기 종료1999년 1월 3일
이전톰 폴리
이후데니스 해스터트
직책 1미국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
임기 시작 11995년 1월 3일
임기 종료 11999년 1월 3일
이전 1로버트 H. 미셸
이후 1데니스 해스터트
직책 2미국 하원 원내총무
대표 2로버트 H. 미셸
이전 2딕 체니
이후 2데이비드 보니어
임기 시작 21989년 3월 20일
임기 종료 21995년 1월 3일
이후 3조니 아이잭슨
주 3조지아주
선거구 36구역
이전 3존 플린트
임기 시작 31979년 1월 3일
임기 종료 31999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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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에서 태어난 깅리치는 조지아주에서 성장했다. 에모리 대학교툴레인 대학교에서 사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70년부터 웨스트조지아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공화당 소속으로 1974년1976년 두 차례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낙선했으나, 1978년 당선되어 1979년부터 하원의원으로 재직했다.

보수주의를 주도하며 이름을 알린 깅리치는 1988년 민주당 출신 짐 라이트 하원의장의 독직사건 연루 의혹을 제기하며 특별검사 임명을 강력하게 주장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결국 라이트 하원의장은 1989년 6월에 의장직을 사임했고, 깅리치는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로 선출되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 후에는 클린턴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1994년 중간 선거를 앞두고 깅리치는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보수주의적 공약 입안을 주도하여 공화당이 하원 선거에서 40년 만에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공약은 '깅리치 혁명'으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고, 그는 1995년 새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재임 기간 동안 클린턴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와 윤리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96년 하원 선거에서 9석을 잃었으나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며 하원의장직을 이어갔다. 이후 ‘르윈스키 스캔들’로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논란이 계속되자, 깅리치는 클린턴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고 이를 1998년 중간 선거에 이용했다.

1998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 의석 5석을 잃었고, 깅리치는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과 개인적인 문제로 당내 비판에 직면하며 영향력을 잃고 하원의장직 사임을 발표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12월 20일 하원을 통과했다. 깅리치는 1999년 1월 3일 하원의장과 의원직을 동시에 사임하며 20년간의 하원의원 생활을 마감했다. 정계 은퇴 후 깅리치는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의 우세를 보며 공화당의 개혁을 촉구했으며,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 경선에서 미트 롬니, 릭 샌토럼, 론 폴에 이어 4위에 그쳤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깅리치, 젊은 역사학 교수 시절
깅리치, 젊은 역사학 교수 시절

펜실베이니아주해리스버그에서 뉴턴 르로이 맥퍼슨(Newton Leroy McPherson영어)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캐슬린 "키트" 도허티(Kathleen "Kit" Daugherty)는 16세, 친아버지 뉴턴 시얼스 맥퍼슨(Newton Searles McPherson)은 19세 때 결혼했으나 며칠 만에 파경을 맞았다. 깅리치는 잉글랜드계 미국인, 독일계 미국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미국인의 후손이다.

1946년, 어머니는 한국과 베트남에서 복무한 직업 군인 로버트 깅리치(Robert Gingrich)와 재혼했고, 깅리치는 그에게 입양되었다. 1956년, 가족은 유럽으로 이주하여 프랑스 오를레앙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잠시 살았다.

깅리치는 어머니로부터 두 명의 여동생 캔디스와 수잔 깅리치, 그리고 로베르타 브라운이 있다. 험멜스타운과 양아버지가 주둔했던 군 기지에서 자랐으며, 가족의 종교는 루터교였다. 친아버지 쪽으로는 이부 여동생과 이부 남동생 랜디 맥퍼슨이 있다. 196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족은 포트 무어에 있는 조지아주로 이사했다.

1961년, 베이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십 대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며,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베르됭 전투 현장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치러진 희생과 정치 지도력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다.

1965년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툴레인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아 문학 석사(1968) 및 유럽사 박사 학위(1971)를 받았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6개월 동안 브뤼셀에서 논문 '콩고의 벨기에 교육 정책 1945–1960'을 집필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학생이자 아버지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징병 유예를 받았다. 1985년 그는 "제가 믿는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저의 큰 부분은 제가 참전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1970년, 웨스트 조지아 칼리지의 역사학과에 합류했다. 그는 새로운 환경 연구 프로그램을 조정했고, 1976년까지 역사학과에서 지리학과로 옮겨졌다.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미국 하원에 출마하기 위해 세 번 무급 휴가를 갔고, 두 번 패배한 후 대학을 떠났다. 그는 종신 재직권을 거부당한 후 1977년에 대학을 떠났다.

2.2. 학자 경력

에모리 대학교툴레인 대학교에서 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0년부터 웨스트조지아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95년에는 조지아주 웨일스카의 라인하르트 칼리지에서 미국 문명 갱신이라는 대학 강좌를 가르쳤는데, 이 강의는 마인드 익스텐션 대학교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되었다.

3. 정치 경력

1978년 공화당 소속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979년부터 하원의원으로 재직했다. 보수주의를 주도하며 이름을 알렸고, 1988년 민주당 출신의 짐 라이트 하원의장이 수많은 독직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특별검사 임명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전국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결국 라이트 하원의장은 1989년 6월에 의장직을 사임하였고, 깅리치는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로 선출되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 후 클린턴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1994년 중간 선거를 앞두고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보수주의적 공약 입안을 주도하여 인기를 모아 공화당이 하원 선거에서 40년 만에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주도한 공약으로 공화당의 승리는 미국의 변혁을 이끈 깅리치 혁명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그는 새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어 1995년 1월 40년 만의 공화당 출신 하원의장이 되었다.

1995년 1월부터 시작된 의회 회기에서 깅리치는 "미국과의 계약"에 따른 법안들을 제출하며 빌 클린턴 행정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특히, 미성년 미혼모에 대한 복지 중단 및 고아원 수용 제안은 힐러리 클린턴 등으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균형 재정을 의무화하는 헌법 수정안은 상원에서, 대통령의 항목별 거부권을 허용하는 법안은 대법원에서 각각 위헌 판결을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깅리치가 이끄는 공화당은 예산안, 특히 세출 삭감 규모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민주당 최초로 균형 재정안(2005년까지 균형 달성)을 제시하며 공화당에 반격했다. 이러한 대립으로 1995년 10월, 새해가 시작되었음에도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했다. 결국, 잠정 예산 통과 지연으로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정부 기능이 정지되는 셧다운 사태가 발생했다.

깅리치는 셧다운을 불사하는 강경한 태도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이츠하크 라빈 총리 장례식 후 에어포스원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더욱 엄격한 예산안을 제출했다고 발언하여 인격적인 면에서 비판받았다. 과거의 결혼 생활과 금전 스캔들 역시 그의 인기를 하락시켰고, 이후 백악관에서 공개된 사진은 깅리치의 이미지 추락을 더욱 가속화했다.

재임 기간 동안 클린턴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와 윤리 문제로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96년 하원 선거에서는 어려움이 예상되었으나, 9석만 잃고 다수당 지위를 유지, 하원의장으로 계속 재임했다. 그 후 ‘르윈스키 스캔들’로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논란이 계속되자 그는 클린턴 대통령의 거취 문제를 법적으로 심판하자는 논리로 탄핵을 추진하고 이를 1998년 11월 중간 선거에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 의석 5석을 잃고 다수당 지위는 유지했으나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고, 그의 개인적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공화당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영향력을 급속히 잃었고 곧바로 하원의장직 사임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12월 20일 하원을 통과했다. 깅리치는 1999년 1월 3일 하원의장과 의원직을 동시에 내놓고 20년 간의 하원의원 생활을 마감하였다.

정계 은퇴 후 깅리치는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계속 주장하고 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의 우세를 보며 공화당의 개혁을 촉구했으며,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 경선에서 미트 롬니, 릭 샌토럼, 론 폴에 이어 4위에 그쳤다.

3.1. 초기 정치 경력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에서 태어나 조지아주에서 성장하였다. 에모리 대학교툴레인 대학교에서 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0년부터 웨스트조지아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공화당 소속으로 1974년1976년 두 차례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낙선했으나, 1978년 당선되어 1979년부터 하원의원으로 재직했다. 1968년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는 넬슨 록펠러의 남부 지역 국장을 맡았다. 그는 보수주의를 주도하며 이름을 알렸고, 1988년 민주당 출신의 짐 라이트 하원의장이 수많은 독직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며 특별검사 임명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전국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3.2. 연방 하원의원 시절 (1979-1999)

1974년과 1976년 두 차례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78년 선거에서 당선되어 1979년부터 하원의원으로 재직했다. 보수주의를 주도하며, 1988년 민주당 출신 짐 라이트 하원의장의 독직사건 연루 의혹을 제기하고 특별검사 임명을 강력히 주장하여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결국 라이트 의장은 1989년 6월 사임했고, 깅리치는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로 선출되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 후 클린턴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1994년 중간 선거를 앞두고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보수주의 공약 입안을 주도, 공화당의 하원 선거 승리에 기여했다. 이는 '깅리치 혁명'으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고, 1995년 1월 깅리치는 40년 만의 공화당 출신 하원의장이 되었다.

1979년 뉴트 깅리치의 공식 의회 사진.
1979년 뉴트 깅리치의 공식 의회 사진.


하지만 재임 기간 동안 클린턴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 윤리 문제 등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96년 하원 선거에서 9석을 잃었으나 다수당 지위를 유지, 하원의장으로 재임했다. 이후 '르윈스키 스캔들'을 계기로 클린턴 대통령 탄핵을 추진, 1998년 11월 중간 선거에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선거에서 공화당은 5석을 잃었고, 깅리치는 개인 문제까지 불거지며 당내 비판에 직면, 영향력을 잃고 하원의장직 사임을 발표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12월 20일 하원을 통과했다. 깅리치는 1999년 1월 3일 하원의원직을 사임, 20년 의원 생활을 마감했다.

많은 학자들은 깅리치가 미국의 민주적 규범을 훼손하고 정치 양극화와 당파적 편견을 가속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학자 다니엘 지블랫과 스티븐 레비츠키는 깅리치가 공화당에 "호전적인" 접근 방식을 심어 혐오스러운 언어와 과도한 당파성이 보편화되고 민주적 규범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한다. 깅리치는 민주당원의 애국심에 자주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을 부패, 파시스트에 비유하며 미국을 파괴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여러 차례의 주요 정부 폐쇄를 감독했다.

메릴랜드 대학교의 정치학자 릴리아나 메이슨은 깅리치가 공화당에게 민주당에 대해 "배신, 기괴함, 부패, 파괴, 탐식, 탐욕, 거짓말, 한심함, 급진적, 이기적, 수치, 병듦, 도둑질, 반역자"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도록 지시한 것을 사회 규범 위반이자 당파적 편견을 악화시키는 사례로 꼽았다.

깅리치는 하원의장실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젊고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하원 의원들을 예산 위원회와 같은 강력한 위원회로 승진시켰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원회의 내부 규범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임기 제한 또한 위원장에게 부과되어 공화당 위원장이 공화당과 분리된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막았다. 그 결과 깅리치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 순응도가 높아졌다.

3.3. 공화당 혁명과 하원의장 (1995-1999)

1994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54석을 확보하여 1954년 이후 처음으로 하원을 장악했다. 깅리치는 이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으며, 타임은 그를 1995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1995년 1월, 40년 만에 공화당 출신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깅리치는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보수주의적 공약을 입안하여 1994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 승리는 '깅리치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하원의장으로서 기독교 보수주의를 공화당과 더욱 연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깅리치의 하원의장 재임 기간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끊임없는 대립, 그리고 깅리치 자신의 윤리적인 문제는 계속해서 논란을 야기했다. 특히, 1995년과 1996년 두 차례의 셧다운 사태는 깅리치의 강경한 태도에 대한 비판 여론을 증폭시켰다.

많은 학자들은 깅리치가 미국의 민주적 규범을 훼손하고 정치 양극화와 당파적 편견을 가속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민주당을 향해 "배신", "부패", "파괴"와 같은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며 대립을 격화시켰고, 이는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깅리치는 1998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이 의석을 잃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99년 하원의장직과 의원직을 모두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3.3.1. 주요 입법 활동

깅리치 하원의장 공식 초상화
깅리치 하원의장 공식 초상화


하원은 '미국과의 계약' 10가지 쟁점 모두를 회기 100일 안에 표결하겠다는 깅리치의 약속을 이행했다. 제104대 미국 의회에서 제안된 법안에는 의회 하원의원의 임기 제한, 감세, 복지 개혁, 균형 예산 수정안뿐만 아니라 하원 재정의 독립적인 감사 및 하원 이발소 및 구두닦이 판매와 같은 불필요한 서비스 제거가 포함되었다. 깅리치가 하원의장으로 처음 2년을 보낸 후, 공화당은 1996년 선거에서 과반수를 재확보했는데, 이는 공화당이 68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고 민주당 대통령이 재선되는 시점에 하원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80년 만에 처음이었다.

깅리치는 하원의장으로서 기독교 보수주의를 공화당과 더욱 연계하려고 했다.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거부한 두 개의 복지 개혁 법안을 만든 후, 깅리치와 그의 지지자들은 복지 시스템을 재구성하기 위한 개인 책임 및 근로 기회 법안의 통과를 추진했다. 이 법안은 주 정부에 복지 제공에 대한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연방 정부의 책임을 줄였다. 이 법안은 복지 지원에 시간 제한을 두고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미성년 자녀 부양 지원 프로그램을 대체하는 빈곤 가정 임시 지원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복지 시스템에 대한 다른 변화로는 식료품 지원 대상 자격 요건 강화, 이민자 복지 지원 축소, 수혜자에 대한 근로 요건 등이 있었다. 이 법안은 1996년 8월 22일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서명되었다.

3.3.2. 정부 폐쇄 (1995-1996)

1994년 미국과의 계약의 핵심은 균형 예산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 폐쇄 이후, 깅리치와 공화당 지도자들은 1996년에 균형 예산을 달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이미 백악관의 승인을 받은 일부 예산 삭감을 승인하고 다음 선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1995년 1월부터 시작된 의회 회기에서 공화당은 "미국과의 계약"에 따른 법안들을 제출하며 빌 클린턴 행정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특히, 미성년 미혼모에 대한 복지 중단 및 고아원 수용 제안은 힐러리 클린턴 등으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균형 재정을 의무화하는 헌법 수정안은 상원에서, 대통령의 항목별 거부권을 허용하는 법안은 대법원에서 각각 위헌 판결을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깅리치가 이끄는 공화당은 예산안, 특히 세출 삭감 규모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민주당 최초로 균형 재정안(2005년까지 균형 달성)을 제시하며 공화당에 반격했다. 이러한 대립으로 1995년 10월, 새해가 시작되었음에도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했다. 결국, 잠정 예산 통과 지연으로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정부 기능이 정지되는 셧다운 사태가 발생했다.

깅리치는 셧다운을 불사하는 강경한 태도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이츠하크 라빈 총리 장례식 후 에어포스원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더욱 엄격한 예산안을 제출했다고 발언하여 인격적인 면에서 비판받았다. 과거의 결혼 생활과 금전 스캔들 역시 그의 인기를 하락시켰고, 이후 백악관에서 공개된 사진은 깅리치의 이미지 추락을 더욱 가속화했다.

결국 공화당은 클린턴 행정부의 재정 균형안을 수용했고, 재정 균형과 복지 국가 효율화라는 깅리치의 주된 의제는 민주당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3.3.3. 윤리 문제와 하원의장 사임

1994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되는 데 기여한 후, 1995년 하원의장으로 선출된 깅리치는 재임 기간 동안 빌 클린턴 행정부와의 불편한 관계와 윤리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98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 의석 5석을 잃었고, 이에 대한 책임과 개인적인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깅리치는 하원의장직 사임을 발표했다.

깅리치는 1988년 민주당 출신 짐 라이트 하원의장의 독직사건 연루 의혹을 제기하며 특별검사 임명을 강력히 주장하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고, 결국 라이트 의장은 1989년 사임했다.

1995년 1월부터 시작된 의회 회기에서 깅리치는 '미국과의 계약'에 기초한 법안들을 제출하며 클린턴 행정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특히, 미성년 미혼모에 대한 복지 중단 및 고아원 수용 제안은 힐러리 클린턴 등으로부터 반발을 샀다. 균형 재정을 의무화하는 헌법 수정안과 대통령의 항목별 거부권을 가능하게 하는 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지만, 전자는 상원에서, 후자는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다.

클린턴 행정부와의 예산안 대립으로 인해 1995년 10월과 11월, 12월에 두 차례 정부 기능이 정지되는 '셧다운' 사태가 발생했다. 깅리치는 셧다운을 불사하는 타협 없는 태도로 여론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츠하크 라빈 총리 장례식 후 에어포스원 안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무시당했다는 발언으로 인품 논란에 휩싸였다. 또한, 잦은 결혼 이력과 금전 스캔들 역시 그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1998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은 의석을 잃었고, 깅리치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99년 의원직을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깅리치는 당시 현재 부인인 칼리스타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을 2007년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4. 정계 은퇴 이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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깅리치는 정계 은퇴 후 미국 기업 연구소 선임 연구원, 스탠퍼드 대학교 후버 연구소 객원 연구원, FOX 뉴스 분석가 등으로 활동하며 보수적인 견해를 유지했다.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고, 트럼프 당선 후에는 국무장관 등으로 거론되었으나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2020년 대선에서는 트럼프의 재선을 지지하며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했고, 조 바이든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4.1. 정책 활동 및 저술

깅리치는 정계 은퇴 후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계속 주장하고 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의 우세를 보며 공화당의 개혁을 촉구했으며,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 경선에서 미트 롬니, 릭 샌토럼, 론 폴에 이어 4위에 그쳤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었으며,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중에서는 루돌프 줄리아니, 존 매케인에 이어 항상 3위였다. 국방부·국방 정책 위원으로서 이라크 전쟁을 추진하는 한편, 부시 행정부와는 거리를 두었으며, 보수의 재건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저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2007년에 들어 프레드 톰슨 전 상원 의원이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보수 표는 톰슨에게로 쏠려 인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9일,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표명했다.

선거 기간 중, 환경 문제에 관한 존 케리와의 논쟁 속에서 녹색 보수주의를 주창하여, 이 이념의 보급에 일조하게 되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그 후에도 공화당의 보수파로서 당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현재는 미국 기업 연구소 선임 연구원, 스탠퍼드 대학교 후버 연구소 객원 연구원, FOX 뉴스의 분석가(또는 해설가) 등을 맡고 있다.

4.2. 2012년 대선 출마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의 우세를 보며 공화당의 개혁을 촉구했으며,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 경선에서 미트 롬니, 릭 샌토럼, 론 폴에 이어 4위에 그쳤다.

깅리치가 2011년 9월 아이오와주에서 자신의 21세기 미국의 계약을 발표하고 있다.
깅리치가 2011년 9월 아이오와주에서 자신의 21세기 미국의 계약을 발표하고 있다.


2008년 말, The Atlantic의 마크 앰빈더The Washington Post의 로버트 노바크를 포함한 여러 정치 평론가들은 깅리치를 2012년 대선의 유력한 후보로 지목했으며, 앰빈더는 깅리치가 "이미 아이오와주, 뉴햄프셔주에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0년 7월에 실시된 퍼블릭 폴리시 폴링(Public Policy Polling) 여론조사에 따르면 깅리치는 공화당 예비 후보 중에서 23%의 공화당 유권자들이 그에게 투표하겠다고 답하여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2009년 3월 그레타 밴 서스터렌과의 On the Record에 출연하여 그는 후보로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많은 공화당원들이 이 나라가 세출 항목에 질색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미국인]들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돌보는 것에 질색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돈이 전혀 변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에 질색합니다... 저는 미국 납세자들이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짐에 따라 대항마가 있는 현직 의원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2011년 3월 3일, 깅리치는 대통령 출마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공식적인 탐사 위원회 대신 "Newt Exploratory 2012"라는 웹사이트를 공식 발표했다. 2011년 5월 11일, 깅리치는 2012년 공화당 후보 지명에 대한 의사를 공식 발표했다.

2011년 6월 9일, 깅리치의 선임 선거 참모진들이 대거 캠프를 떠나면서 그의 대통령 출마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2011년 6월 21일, 두 명의 선임 참모가 더 떠났다. 이에 깅리치는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사퇴하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의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기 위해 5년 동안 선거운동을 하고, 16년 동안 하원에서 공화당 다수를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수십 년 동안 조지아주에서 공화당 다수를 구축하는 데 힘썼던 자신의 경험을 지적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깅리치의 대통령 선거 운동과 관련하여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보여준 회복력에 주목했다.

2012년 2월 CPAC에서 연설하는 깅리치
2012년 2월 CPAC에서 연설하는 깅리치


당시 선두 주자였던 허먼 케인이 과거 성희롱 혐의로 타격을 입은 후 깅리치는 지지를 얻었고, 케인이 선거 운동을 중단한 후 특히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2011년 12월 4일까지 깅리치는 전국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내내 경쟁자들의 부정적인 광고가 쏟아진 후, 깅리치의 전국 지지율은 밋 롬니와 동률을 이루며 하락했다.

2012년 1월 3일, 깅리치는 아이오와 공화당 코커스에서 릭 새토럼, 롬니, 론 폴에 한참 뒤진 4위를 기록했다. 1월 10일, 깅리치는 뉴햄프셔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롬니, 새토럼, 존 헌츠먼, 폴에 크게 뒤진 5위를 기록했다.

헌츠먼과 릭 페리가 경선에서 사퇴하면서 경쟁 구도가 좁혀진 후, 깅리치는 1월 21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득표율 약 40%를 얻어 롬니, 새토럼, 폴을 크게 앞서며 승리했다. 이 예상 밖의 승리로 깅리치는 플로리다로 향하면서 다시 한 번 선두 주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2012년 1월 31일, 깅리치는 플로리다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47% 대 32%로 15% 포인트 차이로 패배하여 2위를 차지했다. 이 결과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롬니의 두 차례에 걸친 강력한 토론 실력(이는 일반적으로 깅리치의 강점이었다), 깅리치 선거 캠프가 TV 광고에서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는 점, 그리고 2020년까지 미국의 우주 프로그램을 되살리기 위해 달에 영구적인 식민지를 건설하겠다는 깅리치의 널리 비판받은 제안이 있었다. 나중에 롬니가 플로리다 토론에서 더 나은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토론 코치를 고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깅리치는 새토럼과 폴보다 훨씬 더 많은 표를 얻었다. 2012년 2월 4일, 깅리치는 네바다 공화당 코커스에서 21%를 얻어 50% 이상을 득표한 롬니에게 패배하여 2위에 머물렀다. 2012년 2월 7일, 깅리치는 미네소타 공화당 코커스에서 약 10.7%를 득표하며 최하위를 기록했다. 새토럼이 이 코커스에서 승리했고, 폴과 롬니가 그 뒤를 이었다.

슈퍼 화요일에 깅리치는 가장 많은 대의원을 보유한 자신의 고향인 조지아주에서 승리했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못한 밤"이었다. 새토럼은 깅리치가 이전에 여론조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테네시주와 오클라호마주를 차지했지만, 깅리치는 롬니에 이어 근소한 차이로 3위를 기록했다. 4월 4일, 릭 새토럼 선거 캠프는 입장을 바꿔 깅리치에게 경선에서 사퇴하고 새토럼을 지지하라고 촉구했다.

4월 10일, 새토럼은 선거 운동 중단을 발표했다. 이 발표에 따라 Newt 2012 캠페인은 깅리치를 "마지막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는 새로운 슬로건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19일, 깅리치는 뉴욕의 공화당원들에게 롬니가 후보 지명을 받으면 롬니의 총선 승리를 돕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4월 24일 델라웨어 예비 선거에서 실망스러운 2위를 기록하고 400만 달러가 넘는 선거 캠페인 부채를 안게 된 깅리치는 2012년 5월 2일 선거 운동을 중단하고 선두 주자인 밋 롬니를 지지했다. 그 후 롬니를 대신하여 유세 연설 및 TV 출연을 했다.

깅리치는 나중에 탬파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전국 공화당 위원회가 주최한 "뉴트 대학교"라는 여러 정책 워크숍을 주최했다. 그와 그의 아내 칼리스타는 로널드 레이건을 주제로 한 소개와 함께 마지막 날에 전당 대회에서 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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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공화당 내에서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에 대항할 수 있는 후보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2011년 5월 11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공화당 후보 지명 선거에 출마한다고 발표했다. 당내에서 손꼽히는 의회통 베테랑 의원으로서, 또한 신보수주의자를 자임하는 한편, 군사 개입에 회의적인 자유지상주의자까지 배려하는 보수파의 통합 후보로서 주목을 받았다.

한때 지지율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동성애자에 대한 정책은?"이라는 질문에 "오바마에게 투표하라"고 답하거나, "팔레스타인인은 테러리스트", "팔레스타인 국가는 허구" 등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으며, 두 번의 이혼 경력에 대해서도 공격받는 등 기세가 꺾였다. 선두를 달리는 밋 롬니가 독주하는 가운데, 획득 대의원 수 2위였던 릭 새토럼이 2012년 4월 7일에 사퇴하면서 차점으로 밀려났고, 선거전에 남은 유일한 보수계 후보가 되었지만, 승산 부족과 자금난으로 5월 2일에 사퇴하고 롬니 지지를 표명했다.

4.3.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

깅리치는 다른 많은 주류 공화당원들보다 빠르게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의 2016년 선거 운동에 자문한 후, 깅리치는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트럼프를 지지하도록 동료 공화당원들을 격려했다. 깅리치는 트럼프의 최종 부통령 후보 3인 안에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국 부통령 자리는 인디애나 주지사 마이크 펜스에게 돌아갔다.

2017년 10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있는 깅리치 부부
2017년 10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있는 깅리치 부부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깅리치가 국무장관, 비서실장 또는 고문으로 임명될 가능성에 대한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깅리치는 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와 관련된 어떤 역할도 맡을 의향이 없다며, 사적인 신분으로서 구직보다는 "전략적 계획"을 위해 개인과 교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7년 5월, 그는 201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전국위원회 직원 세스 리치가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음모론을 유포했다.

깅리치는 2017년 10월 백악관에서 자신의 아내가 미국 교황청 대사로 취임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저널리스트 로버트 미켄스에 따르면, 깅리치는 칼리스타 깅리치가 The Atlantic의 맥케이 코핀스에 의해 "일반적으로 대사관의 의례적인 얼굴로 여겨진다"는 표현처럼, 사실상 대사 또는 "그림자 대사" 역할을 했다.

2016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정권 인수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지명되었다.

2020년 12월, 트럼프 행정부의 국방부 자문위원회 인사에서 크리스토퍼 C. 밀러 국방장관 대행에 의해 마이클 필즈버리를 새로운 위원장으로 하는 국방 정책 위원회 멤버로 선출되었지만, 2021년 1월에 출범한 조 바이든 행정부의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에 의해 해임되었다.

4.4. 2020년 대선 이후

2020년 대선 개표 과정에서 깅리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시도를 지지하며, 근거 없는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투표 집계 중단을 요구했다. 깅리치는 2020년 대선 이후에도 부정 선거 주장을 이어가며 조 바이든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펜실베이니아 투표 관리원들의 체포를 요구하기도 했다.

5. 정치적 입장

깅리치는 1994년 미국과의 계약과 가장 널리 연관되어 있다. 그는 미래를 위한 미국 솔루션의 창립자이다. 최근 깅리치는 환경 보호국을 "환경 솔루션 기구"로 대체할 것을 옹호했다.

그는 이민 국경 정책과 객원 근로자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에너지 정책과 관련하여 그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에 대한 가변 연료 의무를 옹호하고 일반적으로 에탄올 사용을 장려했다. 2021년 8월 깅리치는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대체 이론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깅리치는 다자주의유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2015년에 "유엔을 수년간 지켜본 결과, 부패하고 비효율적이어서 합리적인 사람은 아무도 믿음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깅리치는 미국에서 신을 재발견하다를 저술했다. 깅리치의 후기 저서는 미래를 쟁취하다미국을 구하기 위해를 포함하여 대규모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깅리치는 교육을 "우리의 미래 번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규정하고 있으며, 교육 문제에 대해 앨 샤프턴과 교육부 장관 아르네 던컨과 협력해 왔다. 그는 이전에 동성결혼에 반대했지만, 2012년 12월 깅리치는 공화당이 이에 대한 반대를 재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4년 깅리치는 존 코자 박사에게 서한을 보냈다. 국민투표 전국 기구, Inc.는 국민투표 주간 협약을 지지하며, 이에 따라 참여 국가는 선거인단 투표를 미국의 전국 국민투표 승자에게 수여하게 된다.

2016년 7월 14일, 깅리치는 샤리아 율법을 믿는 무슬림 배경의 미국인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또는 알카에다를 홍보하는 웹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은 중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관찰자들은 이러한 견해가 미국 수정 헌법 제1조의 언론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 조항을 위반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2016년 7월 21일, 깅리치는 NATO 회원국이 미국의 방위에 대한 약속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 모든 대통령이 NATO 국가들이 정당한 몫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미국이 러시아의 침공 시 에스토니아(NATO 회원국)에 지원을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맥락에서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이언스 잡지에 따르면 깅리치는 기후 변화에 대한 견해를 "1980년대 후반의 조심스러운 회의론자에서 2000년대 후반의 신봉자로, [2016] 선거 기간 동안 다시 회의론자로" 바꿨다.

2022년 1월 깅리치는 1월 6일 공격에 대한 하원 특별 위원회를 "기본적으로 린치 폭도"로 묘사하며, 위원회가 법을 위반하고 시민의 자유를 짓밟고 있으며, 공화당이 그 해 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할 경우 위원회 구성원을 투옥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6. 개인 생활

깅리치는 1943년 6월 17일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 병원에서 뉴턴 르로이 맥퍼슨(Newton Leroy McPherson)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캐슬린 "키트"(Kathleen "Kit", 1925–2003)와 친아버지 뉴턴 시얼스 맥퍼슨(Newton Searles McPherson, 1923–1970)은 1942년 9월에 결혼했지만, 며칠 만에 파경을 맞았다. 깅리치는 잉글랜드계 미국인, 독일계 미국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미국인의 후손이다.

1946년, 그의 어머니는 로버트 깅리치(Robert Gingrich, 1925–1996)와 결혼했으며, 로버트 깅리치는 그를 입양했다. 로버트 깅리치는 한국과 베트남에서 복무한 직업 군인이었다. 1956년, 가족은 유럽으로 이주하여 프랑스 오를레앙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잠시 살았다.

깅리치는 어머니로부터 두 명의 여동생 캔디스와 수잔 깅리치, 그리고 로베르타 브라운을 두었다. 깅리치는 험멜스타운 (해리스버그 근처)과 양아버지가 주둔했던 군 기지에서 자랐다. 가족의 종교는 루터교였다. 그는 또한 친아버지 쪽으로 이부 여동생과 이부 남동생 랜디 맥퍼슨이 있다. 196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족은 포트 무어에 있는 조지아주로 이사했다.

1961년, 깅리치는 베이커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곳에서 수학 선생님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십 대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베르됭 전투 현장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치러진 희생과 정치 지도력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다.

깅리치는 1965년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툴레인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아 문학 석사 (1968) 및 유럽사 박사 학위 (1971)를 받았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6개월 동안 브뤼셀에서 논문 '콩고의 벨기에 교육 정책 1945–1960'을 집필했다.

깅리치는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학생이자 아버지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징병 유예를 받았다. 1985년 그는 "제가 믿는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저의 큰 부분은 제가 참전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깅리치는 세 번 결혼했다. 1962년, 19세였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기하학 교사였던 재클린 메이 "재키" 배틀리(Jacqueline May "Jackie" Battley, 1936년 2월 21일 ~ 2013년 8월 7일)와 결혼했으며, 당시 재키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들은 두 딸을 두었다. 깅리치 커뮤니케이션의 사장인 캐시와 작가, 보수 논평가이자 정치 평론가인 재키 수이다.

1980년 봄, 그는 매리앤 깅터와 불륜을 시작한 후 재키와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재키는 나중에 1984년에 이혼이 자신에게 "완전한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1981년, 재키와의 이혼이 확정된 지 6개월 후, 깅리치는 마리앤 진터와 결혼했다.

1993년, 깅리치는 여전히 마리앤과 결혼한 상태에서 20살 이상 어린 하원 직원 캘리스타 비섹과 불륜을 시작했다. 깅리치는 마리앤이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지 몇 달 후인 1999년에 마리앤과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2000년 8월, 깅리치는 마리앤과의 이혼이 마무리된 지 4개월 만에 캘리스타 비섹과 결혼했다. 그는 캘리스타와 함께 버지니아주 맥린에 거주하고 있다.

루터교 신자로 성장한 깅리치는 대학원 시절 남침례교 신자였다. 그는 2009년 3월 29일 세 번째 부인인 캘리스타 비섹의 종교인 가톨릭교로 개종했다.

7.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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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74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94대공화당48.54%46,308표2위낙선
1976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95대공화당48.29%72,400표2위낙선
1978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96대공화당54.40%47,078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80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97대공화당59.05%96,071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82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98대공화당55.27%62,352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84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99대공화당69.14%116,655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86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100대공화당59.55%75,583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88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101대공화당58.92%110,169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90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102대공화당50.31%78,768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92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103대공화당57.74%158,761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94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104대공화당64.17%119,432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96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105대공화당57.80%174,155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1998년 선거하원의원 (조지아 제6선거구)106대공화당70.70%164,966표1위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
조지아주 하원의원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