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드 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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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시드 타하는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음악가로, 라이 음악과 록을 융합한 독특한 스타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58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하여 1982년 아랍 록 밴드 카르트 드 세주르(Carte de Séjour)를 결성, 프랑스어와 아랍어로 노래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담았다. 솔로 활동을 시작한 후, 앨범 '디완'을 통해 알제리와 아랍 전통 음악을 리메이크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Rock the Casbah'를 아랍어로 커버하기도 했다. 201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사후 앨범 'Je suis Africain'이 발매되었다.

라시드 타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1년의 타하
2011년의 타하
출생일1958년 9월 18일
사망일2018년 9월 12일 (향년 59세)
출생지프랑스령 알제리 시그 또는 오랑
사망지레릴라, 일드프랑스, 프랑스
국적알제리
직업싱어송라이터, 활동가
활동 기간1980년 ~ 2018년
장르월드 뮤직, 록 음악, 라이, 알제리 샤비
레이블나이브, Knitting Factory, 아일랜드, 바클레이
웹사이트라시드 타하 공식 웹사이트
관련 활동
과거 멤버카르트 드 세주르
공동 작업자스티브 힐리지, 페미 쿠티
악기우드, 다르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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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58년 알제리 전쟁이 한창일 때 오랑에서 태어나, 10세에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리옹교외에서 난방 공장 공원이나, 의학사전의 방문 판매 등을 했다.

18세에 집을 나와, 이민자들이 모이는 리옹의 나이트클럽에 드나들었으며, 1982년 아랍 록 밴드 "카르트 드 세주르"의 가수로 데뷔했다. 밴드명은 "체류 허가증 (그린 카드)"을 의미하며, 이민자들의 분노 등을 뉴 웨이브, 펑크, 레게, 펑크 등을 섞은 록에 실어, 아랍어로 노래했다. 그룹은 선구적인 음악성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3장의 앨범을 남기고 1989년에 해산했다.

1989년 솔로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여, 1991년 앨범 『바르베스』를 발표했다. 이어진 1993년의 두 번째 앨범 『라시드 타하』에서는, 카르트 드 세주르의 앨범 『아랍마니아』 이래로 스티브 힐리지가 프로듀스를 담당했다. 힐리지는 타하의 앨범 9장에서 음악 프로듀서를 맡았다.

1998년에는, 파리의 베르시 극장에서 1만 6천 명을 모은 대규모 라이 콘서트 "앙 두 트루아 소레이유 (1,2,3 Soleils)"를 실현시켰다. 이 라이브는 "라이의 제왕" 할리드, "라이의 작은 왕자" 포델과 합동으로 진행되었으며, 당일의 모습을 담은 라이브 앨범은 6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

타하는 "사교적"이고 "미소를 짓는 데 빠르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밤새 파티를 즐기는 사람이었고, 또한 국제적인 친구 그룹을 가지고 있었다. 타하는 "나는 내 동네, 내 공동체에만 머물고 싶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일종의 순응주의다. 모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타하는 현대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나는 또 다른 부르주아 작가주의 쓰레기 작품보다 멍청한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시 행정부를 비판했지만, 이란 폭격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고 "이란은 핵무기를 가질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2.1. 초기 생애

1958년 알제리 라이의 발생지이자 알제리 독립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인 시그에서 태어났다. 다른 자료에서는 알제리 해안 도시인 오랑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알제리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1958년은 프랑스 권력에 맞선 알제리 독립 투쟁의 중요한 해였다. 그는 1960년대에 샤비라고 불리는 거리 스타일 음악을 포함한 알제리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또한, 마그레브 지역의 음악도 그의 성장 과정의 일부였다.

10세 때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여 1968년 리옹 주변의 이민자 공동체에 정착했다. 그의 아버지는 섬유 공장 노동자였으며,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렸고, 한 기록에 따르면 그의 삶은 "현대판 노예"와 같았다. 17세에 타하는 "하찮은 일"로 묘사된 중앙 난방 공장에서 낮에 일했고, 이 일을 몹시 싫어했지만, 밤에는 클럽 DJ로 일하며 아랍 음악, , 살사, 훵크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연주했다.

1970년대 후반, 타하는 아랍 팝 클래식과 레드 제플린, 보 디들리, 크라프트베르크의 비트를 매시업하는 클럽 The Rejects (프랑스어로 Les Refoulés)를 설립했다.

2.2. 카르트 드 세주르 (Carte de Séjour) 시절

1981년, 리옹에 살던 타하는 모하메드 아미니, 목타르 아미니를 만났고, 이 세 사람은 자멜 디프, 에릭 바케와 함께 곧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1982년, 타하는 아랍어 록 그룹의 리드 보컬을 맡았고, 그들은 밴드 이름을 까르뜨 드 세주르(Carte de Séjour)라고 지었는데, 이는 번역에 따라 '영주권' 또는 '체류 허가증'을 의미했다. 그는 프랑스어아랍어로 노래했지만, 주로 아랍어로 불렀다. 타하는 그룹 더 클래시(The Clash)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클래시의 보컬 조 스트러머
클래시의 보컬 조 스트러머

타하는 파리에서 더 클래시(The Clash)의 멤버들을 만났다. 1981년 9월, 타하는 파리의 테아트르 모가도르에서 공연을 하기 직전 밴드의 네 멤버 모두와 우연히 마주쳤다. 타하는 리옹 출신으로 알제리 라이를 펑크와 펑크 록과 결합한 그의 밴드 까르뜨 드 세주르(체류 허가증)의 데모 테이프를 그들에게 건넸다. 타하는 그의 초기 녹음이 더 클래시가 "록 더 캐스바(Rock the Casbah)"를 만드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믿었다.

이 시기는 레코드 가게들이 종종 "아랍인들이 가게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들의 레코드 판매를 거부했기 때문에 어려웠다. 돈은 거의 없었고, 밴드는 리옹의 교외에서 공연했다. 타하는 1940년대에 샤를르 트르네가 처음 녹음했던 표준 애국가 "달콤한 프랑스"(Douce France프랑스어)를 가져와 가사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격렬한 아이러니"로 불렀는데, 특히 "지저분하고 보헤미안적인 아랍인 가수"의 목소리로 많은 프랑스 청취자들을 짜증나게 했고, 결국 타하의 버전은 프랑스 라디오에서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랄한"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타하에게 진지한 예술가로서의 인정을 안겨주었다. 그룹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그 결과 타하는 공장, 집 페인터, 식기 세척기, 나중에는 백과사전 판매원 등 일련의 임시직으로 일해야 했다.

1983년, 그들은 첫 번째 맥시 앨범인 까르뜨 드 세주르(Carte De Séjour)를 녹음했다. 1984년, 영국 기타리스트 스티브 힐리지의 도움으로, 이 그룹은 라디오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 "날카롭고 역동적인 사운드"를 얻었고, LP는 로로마니(Rhoromanie)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타하는 작사에서 망명 생활과 프랑스 내 알제리 이민자로서의 문화적 갈등에 대해 썼다. 1986년, 그의 "냉소적인 펑크 록 버전의 '달콤한 프랑스'"는 "이민자 하층민에 대한 국가의 대우에 대한 명백한 항의"로 여겨졌고, 프랑스 정치계에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의 노래 "Voilà, Voilà"는 인종차별에 항의했다. 타하는 반아랍 감정과 혼란에 대처해야 했다. 예를 들어, 뉴욕 타임스는 타하가 알제리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라고 앞면 기사에서 밝혔지만, 나중에 정정했다. 이후, 2007년에는 타하가 이민자로서 프랑스 국립 이민 역사 센터에서 언급되었다.

벨기에에서 공연하는 타하
벨기에에서 공연하는 타하

라이브 공연을 할 때, 타하는 가죽 페도라 모자, 그리고 나중에는 빨간 카우보이 모자 등 다양한 의상을 착용했다. 밴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LP인 람사(Ramsa, Five)는 1986년에 발매되었다. 밴드는 1989년에 해체되었다.

카르트 드 세주르 시절의 음반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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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년도음반 종류음반 제목
1983년EP카르트 드 세주르(Carte de séjour)
1984년정규 앨범로로마니(Rhoromanie)
1986년정규 앨범2½ (두 에 드미)(Deux Et Demi)

2.3. 솔로 활동과 국제적 성공

1989년, 타하는 솔로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롤링 스톤스와 관련된 프로듀서였던 뮤지션 돈 워스와 함께 녹음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초청받기도 했다. 타하는 자신의 사운드를 위해 다양한 악기와 스타일을 혼합했다. 둠벡 또는 다르부카라고 불리는 드럼 악기를 사용하여 그의 새로운 그룹은 아랍 스타일의 비트를 연주했다. 앨범 바르베스가 발매된 후, 미국에서의 판매량은 실망스러웠는데, 이는 아마도 미국인들이 제1차 걸프 전쟁 당시 아랍풍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993년, 타하는 힐라지와 다시 협력하여 그의 두 번째 솔로 앨범 라시드 타하를 제작했고, "클럽랜드-라 synthesis"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힐라지는 1993년부터 2006년까지 9개의 타하 솔로 앨범에 참여하여 타하가 그의 "북아프리카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도왔다. 1995년, 그는 앨범 올레 올레를 발매했는데, 타하는 탈색한 금발 머리와 파란색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여 반아랍 편견과 "북아프리카 문화의 동성애 혐오"에 대한 주장을 펼치며 "아리안형 안드로진"처럼 보였다. 발렌시아에는 커스티 호크쇼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1997년, 그의 노래 "야 라야"가 히트했다. 그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공연했다.

2001년, 타하는 메디나에서 제작됨을 발매했고, 한 음악 평론가는 그가 "온전하고 다양한 악기 팔레트"와 "그가 어떤 스타일을 사용하든 초월하는 아찔한 보컬 능력"을 사용했다고 언급했다. 이 앨범은 파리, 뉴올리언스, 런던에서 녹음되었으며, 미국의 잼 밴드 갤럭틱이 참여했다. 타하는 아프리카 음악과 미국 음악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뉴올리언스는 알제와 같다... 둘 다 한때 프랑스 식민지였고, 심지어 그곳에는 알제라고 불리는 지역도 있다"라고 말했으며, 루이지애나 자이데코 드럼 패턴이 라이 음악과 유사하다고 언급했다. 메디나에서 제작됨은 힐라지에 따르면 알제리 뿌리, 테크노, 팝 음악, 초기 록과 펑크의 영향을 "놀라운 일관성"으로 이전 작품과 결합했다. 그의 음악에는 정치적 항의 요소가 있었고, BBC 평론가는 그를 "자신의 문화를 비민주적이라고 도전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문제적 예술가"라고 묘사했다. 가디언은 타하가 팝 음악에서 컬트 지위를 획득했다고 보도했다.

기타리스트 스티브 힐리지는 타하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주로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기타리스트 스티브 힐리지는 타하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주로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타하의 솔로 앨범 디완은 그의 베스트셀러로, 알제리아랍 전통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들이 수록되었다. 이 앨범에는 우드와 같은 전통 악기가 포함되었지만 "프로그래밍된 타악기와 샘플이 추가된 현대적인 외관"을 갖추었다. 타하는 우드를 현악기와 혼합하여 현대적인 비트와 기타 연주를 사용했다고 한다. 스티브 힐리지가 프로듀싱한 타하의 앨범 테키토이 2004년에 발매되어 다른 록 뮤지션들로부터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거리 속어"로, 대략 "너 도대체 누구야?"라는 뜻이다(프랑스어 "Tu es qui, toi ?"에서 축약된 "T'es qui, toi ?"). 옵서버는 이 음악이 "조 스트러머의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했다. 2005년 타하는 로버트 플랜트, 패티 스미스, 브라이언 이노와 함께 공연했다. 그는 클래쉬의 노래 "Rock the Casbah"를 아랍어로 "Rock El Casbah"로 개사하여 커버했다. 이 노래는 클래쉬의 리더 조 스트러머에 관한 2007년 영화 미래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에 등장했다. 이 노래는 록 음악을 "금지되었지만 멈출 수 없는" 것으로 표현했다. 타하는 이 노래를 클래쉬의 뮤지션 믹 존스와 함께 공연했다. 가디언은 "Rock El Casbah"를 최고의 커버 곡 50곡 중 하나로 선정했다.

2006년 모로코에서 공연했다. 2007년, 타하는 캐나다에서 공연했고, 몬트리올 가제트는 그의 공연을 묘사했다.

알제리 만돌 또는 만돌루트, Mon côté punk의 멤버가 연주한다.
알제리 만돌 또는 만돌루트, Mon côté punk의 멤버가 연주한다.


2008년 그는 밴드 댕기열 피버와 함께 공연했다. 그는 "야생 알제리 펑크 팬"으로 묘사되었으며, "서아프리카 음악의 누구를 말할 것인가"와 같은 라인업에서 공연했으며, 밥 겔도프라이브 8 음악 축제에 아프리카 뮤지션이 부족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아프리카 익스프레스"의 일원이었다.

2008년, 타하는 캐나다와 같은 곳에서 더 많은 관객을 확보하면서 점점 더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의 음악이 프랑스에서 "방송을 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는 나이지리아 아티스트 페미 쿠티와 세운 쿠티와 함께 라고스에서 그들의 아버지 펠라 쿠티의 음악을 기리는 "펠라브레이션"에서 공연했으며, 런던에서 열린 반전 콘서트에서 브라이언 이노와도 함께 공연했다.

2009년, 타하는 봉주르를 발매했는데, 가디언의 음악 평론가 로빈 덴슬로우는 새로운 프로듀서 가에탕 루셀의 지휘 아래 "진정되었다"라고 묘사했다. 덴슬로우는 "그 결과, 타하가 그 야생적인 반항적인 이미지를 약화시키면서 새롭고 더 넓은 시장을 의도적으로 공략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예상치 못한 세트가 되었다."라고 썼다. 덴슬로우는 이 음악이 더 "상업적"이고 "그의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 아니다"라고 느꼈다. 여기에는 클래쉬의 기타리스트 조 스트러머에게 바치는 그의 커버 곡 Rock El Casbah에 대한 "열렬한 찬사"가 포함되었다. 2010년, 타하는 대규모 관객 앞에서 캐나다 토론토에서 공연했다. 타하는 우드를 연주하는 알제리 아티스트 메흐디 하다브와 함께 공연했다. 타하의 노래 "Habina"는 2010년 영화 코미디 영화에 수록되었다.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는 그의 노래 Migra를 녹음하여 2,50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타하는 미국두바이를 포함한 여러 국가를 순회했다.

2013년 타하는 저스틴 아담스가 프로듀싱하고 믹 존스와 브라이언 이노가 게스트로 참여한 앨범 을 발매했다. 존스는 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타하와 함께 투어했다. 이 앨범에는 "Voilà, Voilà"의 새로운 녹음이 포함되었다. 타하는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전에 녹음했던 "지금 아니면 결코"(애런 슈로더 / 월리 골드 작사/작곡)를 녹음했는데, 이 곡에는 잔느 아데가 영어로 노래하는 부분이 있다.

2.4. 사회 참여와 음악적 저항

1958년 알제리 라이의 발생지이자 알제리 독립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인 시그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프랑스로 이주하여 리옹 근처의 이민자 공동체에서 살았다. 낮에는 발전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랍 음악, , 살사, 훵크 등 여러 가지 장르의 음악을 틀어주는 디스크 자키로 일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레 르풀레(Les Refoulés, 거부당한 자들)라는 나이트클럽을 만들어 유명한 아랍 가요곡과 레드 제플린 등 서양 록 밴드의 음악을 섞는 작업을 했다.

18세에 집을 나와, 이민자들이 모이는 리옹의 나이트클럽에 드나들었으며, 1982년 아랍 록 밴드 "카르트 드 세주르"의 가수로 데뷔했다. 밴드명은 "체류 허가증 (그린 카드)"을 의미하며, 이민자들의 분노 등을 뉴 웨이브, 펑크, 레게 등을 섞은 록에 실어, 아랍어로 노래했다.

2.5. 대한민국과의 관계

주어진 소스에서는 라시드 타하와 대한민국 간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

2.6. 사망

타하는 1987년에 키아리 기형을 진단받았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무대에서 술 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지쳤다. 이것이 아놀드 키아리 질환의 증상이다. 나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다. 몸에 장애가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타하는 2018년 9월 12일, 60번째 생일을 6일 앞두고 수면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망 후 앨범인 Je suis Africain은 사망 전에 완성되었으며, 2019년 9월 20일에 발매되었다.

3. 음악 스타일

라시드 타하는 알제리 음악 스타일과 록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로코의 Nass El Ghiwane이라는 샤아비 밴드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들은 모로코의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에 비유되기도 한다. 1989년 솔로 활동을 시작한 후, 둠벡 (다르부카)이라는 드럼 악기를 사용하여 아랍 스타일의 비트를 연주했다. 1993년에는 스티브 힐리지와 협력하여 두 번째 솔로 앨범 라시드 타하를 제작, "클럽랜드-라 synthesis"를 달성했다.

2001년 발매된 메디나에서 제작됨 앨범은 테크노, 팝, 초기 록과 펑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BBC 평론가는 그를 "자신의 문화를 비민주적이라고 도전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문제적 예술가"라고 묘사했다. 그의 획기적인 앨범 디완은 알제리와 아랍 전통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들을 수록, 우드와 같은 전통 악기를 사용하면서도 현대적인 요소를 더했다.

2004년에는 스티브 힐리지가 프로듀싱한 테키토이를 발매, 옵서버는 이 음악이 "조 스트러머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그는 더 클래시의 노래 "Rock the Casbah"를 아랍어로 개사하여 커버했고, 가디언은 이 곡을 최고의 커버 곡 50곡 중 하나로 선정했다.

그의 음악은 전통적인 북아프리카, 록, 테크노, 댄스 음악을 혼합한 것이 특징이다. 만돌린을 사용하여 북아프리카 리듬과 현악 오케스트라의 화려함을 빅 비트 테크노, 일렉트릭 기타 등과 섞었다. 그의 앨범 Made in Medina는 아랍식 "챈팅"과 함께 브레이크 비트, 플라멩코 기타, 아프리카 코러스, 하드 록 등을 특징으로 한다.

3.1. 더 클래시와의 관계

1981년, 리옹에서 타하는 더 클래시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더 클래시가 과격하고 쾌락주의적이며, 반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록 밴드라고 생각했다. 조 스트러머는 펑크의 냉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힙합, 레게, 스카, 컨트리 웨스턴, 디스코 등 다양한 장르를 자신만의 사운드로 만들어냈다. 타하는 이것이 프랑스 뮤지션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타하는 파리에서 더 클래시 멤버들을 만나 자신의 밴드 까르뜨 드 세주르의 데모 테이프를 건넸다. 몇 달 후, 타하는 더 클래시의 "록 더 캐스바"를 듣고 자신의 테이프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디 로젠은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 타하의 "록 더 캐스바" 커버 버전을 두고, 타하가 더 클래시의 뜻밖의 후계자라고 평했다.

클래시의 보컬 조 스트러머
클래시의 보컬 조 스트러머

4. 음반 목록

라시드 타하는 다양한 음반을 발매했다. 다음은 그의 음반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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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도
Carte de Séjour1983년
Bleu De Marseille1984년
Rhorhomanie1984년
Douce France1986년
2½ (Deux Et Demi)1986년
Ramsa1987년
Barbès1991년
Voilà, Voilà1993년
Rachid Taha1993년
Olé, Olé1995년
Olé, Olé1996년
Carte Blanch1997년
Ya Rayah1997년


정규 앨범, 라이브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그리고 카르트 드 세주르 시절의 음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라시드 타하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4.1. 정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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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 타하의 정규 앨범
제목연도
바르베스1991년
라시드 타하1993년
올레 올레1995년
디완1998년
메이드 인 메디나2000년
테키토와?2004년
디완 22006년
봉주르2009년
2013년

4.2. 라이브 앨범

* 1, 2, 3 Soleils프랑스어 (1999년) ※ 칼레드, 포델과의 공동 공연 라이브
* Rachid Taha Live프랑스어 (2001년)

4.3. 컴필레이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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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도
Carte blanche1997년
더 디피니티브 컬렉션2007년
Voilà voilà le Best Of2011년
Rock N Raï2020년

4.4. 카르트 드 세주르 시절

1981년, 리옹에서 모하메드 아미니, 목타르 아미니와 함께 밴드를 결성했다. 1982년, 아랍어 록 그룹의 리드 보컬을 맡았고, 밴드 이름을 까르뜨 드 세주르(Carte de Séjour)('영주권' 또는 '체류 허가증'을 의미)라고 지었다. 프랑스어아랍어로 노래했지만, 주로 아랍어로 불렀다. 더 클래시(The Clash)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더 클래시의 보컬 조 스트러머
더 클래시의 보컬 조 스트러머

파리에서 더 클래시(The Clash)의 멤버들을 만났으며, 초기 녹음이 더 클래시가 "록 더 캐스바(Rock the Casbah)"를 만드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믿었다.

당시 레코드 가게들이 "아랍인들이 가게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아서" 레코드 판매를 거부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밴드는 리옹의 교외에서 공연했고, 수입은 거의 없었다. 1940년대 샤를르 트르네가 처음 녹음했던 애국가 "달콤한 프랑스"(프랑스어: Douce France)를 가사는 그대로 유지한 채 "격렬한 아이러니"를 담아 불렀는데, 이는 프랑스 라디오에서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해 여러 임시직으로 일해야 했다.

1983년, 첫 맥시 앨범 카르트 드 세주르(Carte De Séjour)를 녹음했다. 1984년, 영국 기타리스트 스티브 힐리지의 도움으로 라디오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 "날카롭고 역동적인 사운드"를 얻었고, LP 로로마니(Rhoromanie)를 발매했다. 망명 생활과 프랑스 내 알제리 이민자로서의 문화적 갈등에 대해 작사했다. 1986년, "냉소적인 펑크 록 버전의 '달콤한 프랑스'"는 "이민자 하층민에 대한 국가의 대우에 대한 명백한 항의"로 여겨져 프랑스 정치계에 당혹감을 안겼다. "Voilà, Voilà"는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노래였다.

벨기에에서 공연하는 타하
벨기에에서 공연하는 타하

라이브 공연에서 가죽 페도라 모자, 빨간 카우보이 모자 등 다양한 의상을 착용했다. 1986년, 두 번째이자 마지막 LP 람사(Ramsa, Five)가 발매되었다. 밴드는 1989년에 해체되었다.

카르트 드 세주르 시절 음반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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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도
Carte de Séjour1983년
Rhorhomanie1984년
2½ (Deux Et Demi)198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