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테만 전투
1. 개요
레이테만 전투는 1944년 10월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벌어진, 일본과 미국의 해군력 간의 대규모 해전이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탈환하려는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3개의 함대를 투입하는 대규모 작전을 펼쳤지만, 미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의해 실패했다. 이 전투는 여러 해전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사마르 해전은 미 호위 항공모함과 일본 중부군의 치열한 교전으로 유명하다. 레이테만 전투는 일본 해군의 주력 함대 대부분을 잃게 만들었고,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전투명 | 레이테만 전투 |
|---|---|
| 다른 이름 | 라반안 사 골포 응 레이테 (필리핀어) 레이테 오키 카이센 (일본어, 로마자: Reite oki Kaisen, 레이테 해전) |
| 위치 | 레이테만, 필리핀 |
| 좌표 | 북위 10.370°, 동경 125.355° |
| 날짜 | 1944년 10월 23일 ~ 10월 26일 |
| 교전 세력 |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제국 |
| 결과 | 연합군 승리, 일본 연합 함대 괴멸 |
| 관련 전투 | 필리핀 전역 (1944-1945), 태평양 전쟁, 남서 태평양 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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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군 지휘관 | 윌리엄 홀시 (3함대) 토머스 킨케이드 (7함대) 클리프턴 스프라그 (태피 3 / 제77.4.3 임무 부대) 제시 올덴도르프 (제77.2 임무 집단) 존 콜린스 (제74 기동 부대) |
|---|---|
| 일본군 지휘관 | 구리타 다케오 (중앙 부대) 니시무라 쇼지 (남부 부대) 시마 기요히데 (남부 부대) 오자와 지사부로 (북부 부대) 세키 유키오 (가미카제) |
| 연합군 부대 | 3함대 제38 기동 부대 7함대 제77 기동 부대 |
| 일본군 부대 | 연합 함대 제2함대 제3함대 제5함대 해군 항공대 제1항공함대 제2항공함대 |
| 연합군 전력 | 총 ~300척 항공모함 8척 경항공모함 9척 호위 항공모함 18척 전함 12척 순양함 24척 구축함 및 호위 구축함 116척 다수의 PT 보트, 잠수함, 함대 보조함 항공기 약 1,500대 |
| 일본군 전력 | 총 67척 이상 항공모함 1척 경항공모함 3척 하이브리드 항공모함/전함 2척 전함 7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35척 이상 항공기 300대 이상 (육상 기반 항공기 포함) |
| 연합군 사상자 | 사망 약 3,000명 함선 11척 침몰: 경항공모함 1척 호위 항공모함 2척 구축함 2척 호위 구축함 1척 PT 보트 1척 손상 항공기 255대 |
| 일본군 사상자 | 사망 약 12,000명 함선 26척 침몰: 항공모함 1척 경항공모함 3척 전함 3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9척 항공기 ~300대 |
| 관련 전투 | 필리핀 전역 (1944–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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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주의 역사 -
레이테 전투
레이테 전투는 1944년 10월 20일부터 12월 26일까지 필리핀 레이테섬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국이 일본 점령지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해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하여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하고 일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일본 본토 공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
레이테주의 역사 -
킴니르바나 호 침몰사고
킴니르바나 호 침몰사고는 여객선 킴니르바나 호가 침몰한 사고로, 세월호 참사와 같이 과적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위키백과 모바일 웹사이트에서 관련 템플릿 표시 문제와 모바일 페이지 조회수 통계 미제공 문제가 있었고, 난파선 관련 토막 문서로 분류된다. -
1944년 필리핀 -
레이테 전투
레이테 전투는 1944년 10월 20일부터 12월 26일까지 필리핀 레이테섬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국이 일본 점령지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해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하여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하고 일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일본 본토 공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
1944년 필리핀 -
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
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일본 간의 전투와 작전을 포괄하며, 일본의 필리핀 점령으로 시작되어 미군의 반격으로 레이테 만 해전을 거쳐 필리핀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해전 -
산호해 해전
산호해 해전은 1942년 5월 미국과 일본 해군이 산호해에서 벌인 해전으로, 일본의 MO 작전은 실패하고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으며, 항공모함 중심 해전의 시작을 알렸다. -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해전 -
이호 작전
이호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1943년 4월 초에 남태평양의 연합군 진격을 늦추기 위해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지휘 하에 솔로몬 제도와 뉴기니 지역의 연합군 기지를 공습한 공세 작전이다.
2. 배경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군은 중앙 태평양 및 남태평양 지역에서 점령지를 상실해갔다. 솔로몬 제도, 비스마르크 제도 등 주요 기지들이 고립되었다. 1944년 6월, 미 해군 고속 항공모함 기동함대는 마리아나 제도 대부분을 점령, 일본의 근접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장거리 폭격기 운용 기지를 확보했다.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반격했으나, 항공모함 3척과 다수의 항공기를 잃고 항공모함 기반 전력과 숙련된 조종사를 상실했다.
어니스트 킹을 비롯한 미군 수뇌부는 일본군을 필리핀에 묶어두고 타이완을 공격하여 일본과 남방 사이 병참선을 끊고자 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필리핀 공격을 원했는데, 이는 필리핀이 일본의 병참선이자 1942년 철수 당시 "나는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 때문이었다.
체스터 니미츠 등은 필리핀 주둔 일본 항공 세력이 강력하여 우회를 고려했다. 니미츠는 타이완이 일본의 병참선 차단에 더 중요하다고 보았으나, 맥아더는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맥아더, 니미츠 회의에서 필리핀의 전략적 중요성이 확인되었으나, 공격 결정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니미츠는 맥아더의 계획에 동의하게 된다.
당시 미군은 태평양에 추가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고, 유럽 전선이 정리되기 전까지 병력 수급이 어려웠다.
맥아더 부대가 레이테섬을 공격하는 동안 토마스 C. 킨케이드 휘하 7함대가 상륙 및 근접 해군 지원을, 윌리엄 홀시 주니어 휘하 3함대가 외곽 지원을 담당하기로 했다. 7함대는 미 해군, 뉴질랜드 해군, 네덜란드 해군,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혼성 함대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카운티급 중순양함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미군 지휘 체계 혼선으로 전술적 위기가 초래될 뻔했는데, 7함대 킨케이드는 맥아더에게, 3함대 홀시는 니미츠에게 보고했다.
일본 역시 3개 함대를 분할 운용하여 통일된 명령 체계가 없었다. 연합 함대 도요다 소에무 사령관은 쇼1호작전(필리핀), 쇼2호 작전(타이완), 쇼3호 작전(류큐 제도), 쇼4호 작전(쿠릴 열도)을 준비했다. 각 작전은 연료 부족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공세 계획을 포함했다.
1944년 10월 12일, 홀시의 3함대는 레이테 상륙작전 지원을 방해하기 위해 타이완과 류큐 제도에 대한 항공모함 강습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쇼2호 작전을 발동, 미 3함대 항공모함을 공격했으나 3일 만에 600기의 전투기를 상실했다. 이후 일본 해군은 첩 1호 작전으로 전환했다.
쇼1호 작전은 오자와 지사부로 지휘 '북방군'이 미 함대를 레이테만 밖으로 유인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북방군은 항공모함 중심이었지만 항공기, 항공요원이 거의 없었다. 항공모함이 미끼가 되어 미 함대를 유인하면, 니시무라 쇼지, 시마 기요히데 지휘 '남방군'이 수리가오 해협을, 구리타 다케오 지휘 '중부군'이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 레이테만 서쪽에서 미 상륙부대를 타격하는 것이었다. 중부군은 일본군 중심 전력이었다.
이 작전은 북방군의 괴멸적 손해를 피할 수 없었지만, 도요다는 "필리핀 해역에서 패배하면 함대가 살아남더라도 병참선이 차단되어 연료, 탄약, 무기 공급이 불가능해지므로 함대를 남기고 필리핀을 상실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진술했다.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 기동 부대는 항공모함 3척과 함재기, 탑승원을 대부분 잃는 대패를 당했다. 대본영은 사이판 섬 구원책을 검토했지만, 미군 기동 부대에 맞설 전력이 없었다.
9월 미 3함대는 이오 섬, 오가사와라 제도를 공격하고, 모로타이 섬, 펠렐리우 섬 (펠렐리우 전투), 안가우르 (안가우르 전투)에 상륙했다. 9월 23일에는 울리시 환초를 점령, 후방 보급 거점으로 사용했다.
다바오는 미국군 상륙 가능성이 높아 제1호 작전의 제1 후보지였다. 9월 일본군은 사란가니 주 관측소의 오보로 테라오카 킨페이 사령관이 항공기를 세부 섬으로 피신시키고 사령부를 후퇴시키는 등 혼란을 겪었다. ("다바오 오보 사건"). 이 사건으로 항공기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일방적으로 공격받았고, 제1항공함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육군의 바콜로드 기지도 피해를 입었다. 남방총군은 해군과 협력하여 미 기동부대 섬멸을 꾀했지만 승인받지 못했다.
19일, 제1항공함대와 육군 제4항공군은 "대기동부대 전투 협정"을 체결, 육군 항공 병력도 적 기동부대 공격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바오 오보 사건으로 제1항공함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격화되는 필리핀 공격으로 미군 침공이 확실해졌지만, 정확한 시점은 10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바오 공습을 하던 핼시는 일본군 반격력이 약하고 레이테 섬에 일본군이 없다는 정보를 얻었다. 13일, 핼시는 니미츠에게 레이테 섬 공략을 건의했다. 니미츠는 제2차 퀘벡 회담 중이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맥아더도 14일, 레이테 섬 공격을 건의했다. 루스벨트는 공략 시기 단축에 따른 선거전의 긍정적 영향도 고려하여 동의했고, 15일 통합 참모 본부는 10월 20일에 레이테 섬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대만 해전에서 제38기동부대는 남서 제도, 대만을 공습했다. 일본 항공 부대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
10월 17일, 술루안 섬에 미군 제6 레인저 대대 D중대가 상륙했다. 현지 부대는 미군 접근을 감지하지 못했고, 술루안 섬 상륙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미카와 구니이치는 항공 정찰을 명령했고, 육군도 정찰했지만 기상 악화로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토미나가 쿄지 제4항공군 사령관은 상륙 또는 일부 부대 상륙으로 판단, 테라우치 히사̄이치에게 제1호 작전 발동을 요청했다.Sfn|방위연구소1972|pp=22-23
남부 필리핀 방어를 담당하는 제35군은 처음에는 해군 감시소 정보를 믿지 않았다.
연합함대 구사카 류노스케는 적이 2개 부대로 진공해오고 있다고 판단했다. 토요다 소에무는 "제1호 작전 경계"를 발령했다.Sfn|방위연구소1972|p=26
8시 48분, 연합함대는 각 부대에 출격 준비를 명령했다.Sfn|방위연구소1972|p=25 오자와 지사부로는 미끼 발상이 토요다 대장의 발상이라고 언급했다.
10월 18일, 레이테 섬은 적 함재기의 맹공에 시달렸다. 마키노 시로 사단장은 적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군령부는 미군의 본격적인 공략 작전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대본영은 미군이 비시를 공략해 온다고 판단, 제1호 작전을 발동했다.Sfn|방위연구소1972|pp=32-33
20일 7시, 미 함대의 함포 사격과 함재기 공습이 시작되었고, 9시 43분 상륙이 시작되었다. 제16사단은 혼란 속에 사령부를 후퇴시켰다.Sfn|방위연구소1972|p=42 더글러스 맥아더는 20일 14시에 상륙, "나는 돌아왔다" 연설을 했다.
23일, 제16사단은 방어선이 돌파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
3. 일본군의 작전 계획 (쇼호 작전)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군은 중앙 태평양 및 남태평양 지역에서 점령지를 상실하며 솔로몬 제도, 비스마르크 제도, 애드미럴티 제도 등 주요 기지가 고립되었다. 1944년 6월, 미 해군 5함대의 고속 항공모함 기동함대에 의해 마리아나 제도 대부분이 점령당하며 일본의 근접 방어선이 붕괴, 미군은 B-29 슈퍼포트리스를 이용해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반격했으나, 항공모함 3척 파괴, 다수의 전투함 피해, 600여 기의 항공기를 잃고 항공모함 기반 항공 세력과 숙련된 조종사를 거의 상실했다.
어니스트 킹을 비롯한 합동 참모부는 일본군을 필리핀에 묶어두고 타이완을 공격하여 일본과 남아시아 사이의 병참선을 끊고자 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필리핀 공격을 주장했는데, 이는 필리핀이 일본의 병참선이자 1942년 철수 당시 "나는 돌아오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체스터 니미츠를 포함한 일부 지휘관들은 필리핀 주둔 일본 항공 세력이 강력하다고 판단, 타이완이 일본의 동남아시아 병참선 차단과 미군의 중국 본토 전개에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의 회의에서 필리핀의 전략적 중요성이 확인되었으나, 공격 결정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니미츠는 맥아더의 계획에 동의하게 된다.
타이완 상륙에는 12개 사단 규모의 지상군이 필요했으나, 당시 미군은 태평양 전선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고, 오스트레일리아 군도 다른 지역을 담당하고 있어 가용 병력이 부족했다. 유럽 전선 정리 전까지 병력 수급이 어려워 보였다.
맥아더 부대가 레이테섬을 공격하는 동안, 토마스 C. 킨케이드 휘하 7함대가 상륙과 근접 해군 지원을, 윌리엄 홀시 주니어 휘하 3함대가 외곽 지원을 담당하기로 했다. 7함대는 미 해군, 뉴질랜드 해군, 네덜란드 해군,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중순양함, 구축함 포함)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군 지휘 체계 혼선으로 전술적 위기가 발생했다. 킨케이드는 맥아더에게, 홀시는 니미츠에게 보고하는 이원화된 체계였다.
일본 역시 3개 함대를 분할 운용하며 통일된 명령 체계가 없었다. 연합 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는 4개의 작전을 준비했다. 쇼1호작전(捷1号作戦)은 필리핀에서의 대규모 해상 작전, 쇼2호 작전, 쇼3호 작전, 쇼4호 작전은 각각 타이완, 류큐 제도,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 대비 작전이었다. 이 작전들은 일본의 부족한 연료 공급 상황에도 정교한 공세 계획을 포함했다.
1944년 10월 12일, 홀시의 3함대는 레이테 상륙작전에 일본군 항공 지원을 방해하기 위해 타이완과 류큐 제도에 대한 항공모함 강습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쇼2호 작전을 발동, 미군 3함대 항공모함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3일 만에 600여 기의 전투기를 상실했다. 필리핀 근해 공격에 대항하여 일본 해군은 첩 1호 작전으로 전환했다.
쇼1호 작전은 오자와 지사부로 지휘의 '북방군'이 미군 주력 함대를 레이테만 밖으로 유인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북방군은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했지만, 항공기나 항공요원은 거의 없었다. 니시무라 쇼지와 시마 기요히데 지휘의 '남방군'이 수리가오 해협을, 구리타 다케오 지휘의 '중부군'이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하여 레이테만 서쪽에서 미군 상륙부대를 타격하는 계획이었다. 중부군은 일본군의 중심 전력이었다.
이 작전은 괴멸적 손해를 피할 수 없었지만, 도요다는 "필리핀 해역에서 패배하면 함대가 살아남더라도 병참선이 차단되어 연료, 탄약, 무기 공급이 불가능해 함대를 남기고 필리핀을 상실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진술했다.
7월 18일, 군령부는 차기 작전 지도 대강 작성 연구를 시작, 21일 "대본영 작전 지도 대강"이 결정되었고, 24일에 재가되었다. 같은 날 군령부 주최의 도상 연습이 진행되었으며, 26일 대해지 제435호로 차기 작전 호칭을 "첩호 작전"으로 결정했다.
연합군의 강력한 항공모함 기동 부대에 맞서, 제1기동함대는 항공 전력을 상실하여 핵심 전력으로 기대할 수 없었다. 첩호 작전에서는 기지 항공대를 전력 핵심으로 삼아, 결전 시기까지 해군 1,300기, 육군 1,700기를 정비할 계획이었지만, 예상되는 연합군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육해군 항공 부대 간의 견해를 통일하고 통합 발휘를 도모하고자 대본영 육해군부에서 협의가 이루어졌다. 해군은 적 기동 부대를 주 목표로, 육군은 상륙 부대 및 호위 함정을 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의는 평행선을 그렸다. 그러나 해군이 적 기동 부대 공격을 중시하면서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적 상륙 시 전력이 고갈되어 상륙 부대를 막지 못하는 사태가 빈번했던 점, 아호 작전의 대패 등을 육군이 지적하자, 해군은 "적 기동 부대 공격 우선"을 주장할 수 없었다.
7월 24일 "첩호 항공 작전에 관한 육해군 중앙 협정"이 체결되어, 항공모함 기동 부대 공격은 억제하고 전력 온존을 도모, 해군은 항공모함 공격, 육군은 공략 부대 공격 및 육전 항공 지원으로 역할을 정하기로 하여, 육군 측 주장이 관철되었다.
8월 4일, 연합함대는 "기밀GF명령 작제85호"로 "연합함대 제호 작전 요령"을 발령하여, 작전 개요를 공지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기지 항공대는 적 기동 부대 공격을 회피하고 전력을 집중, 적절히 전진 기지로 진출한다. 수상 부대도 진출하여 상륙 지점에 쇄도한다. 적 상륙 2일 이내에 해상 부대 돌입을 실시한다. 기지 항공대는 수상 부대 돌입 2일 전부터 항공 격멸전을 실시한다. 상륙될 경우, 적 증원을 격멸, 지상 부대와 호응하여 적을 수면에서 섬멸한다.
#* 기지 항공대는 제1, 제2 항공 함대 전력을 투입한다. 제2 항공 함대는 본토 서부에 전개하여 비(比)섬에 전개할 수 있도록 한다. 제3, 제12 항공 함대는 예비 전력으로 본토에서 대기한다.
#* 공격 목표는 적 항공모함, 수송선이며, 신예 최강 전력은 적 항공모함 공격에 충당한다.
#* 적 기동 부대 단독 공격 시 손모를 피한다. 기회가 있다면 기지 항공 부대가 단독으로 적 기동 부대를 공격하는 경우가 있으며, 연합함대에서 "기지 항공 부대 제1호 작전"을 발동하므로 공세에 나선다.
# 수상 부대는 제1유격부대(구리다 함대)는 링가 정박지, 제2유격부대(시마 함대), 기동부대 본대(오자와 함대)는 내지에 있으며, 작전 발동과 함께 제1유격부대는 브루나이 또는 코론, 기마라스 방면으로, 제2유격부대는 내해 서부 또는 남서 제도 방면으로, 기동부대 본대는 내해 서부에서 출격 준비를 갖추고 특령에 의해 출격한다.
#* 적이 상륙했다면 제1유격부대는 기지 항공대의 항공 공격에 작응하여 상륙 지점에 돌입한다.
#* 제2유격부대와 기동부대 본대는 적 함대를 북방으로 유치한다.
# 잠수 부대는 적 내습 예견 시 지정 해면에 진출 또는 집중, 적 상륙 전 수송선단을 포착 격멸하고, 증원 수송을 차단한다.
"기지 항공 부대 제1호 작전" 발동은 연합함대가 육군이나 대본영과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발동할 수 있었다. 전기를 놓치지 않고 즉응한다는 면에서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해군, 현지 부대가 독단으로 제호 작전을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은 육해군 전력 통합이라는 제호 작전 근본을 뒤엎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군령부는 제호 작전 필승을 위해 아래의 특별 조치도 실시했다.
# 연합함대 사령 장관의 전 해군 부대 통일 지휘
# 기지 항공대의 공지 분리 방식 채용
# 필사 기습 전법 채용, 특공 병기 개발
# 대잠수함 전문 부대 창설
8월 10일, 기동 부대 지휘관 오자와 지사부로는 "기동 부대 명령 작제76호 기동 부대 제호 작전 요령"을 발령, 기동 부대 소속 각 대에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지시했다. 그 내용(제1호 작전에 한함)은 다음과 같다.
# 기동 부대 작전은 아군(기지 항공대, 잠수 부대 등)과 협력, 적 함대 및 공략 부대를 격멸한다.
# 제1호 작전
#* 아군은 기지 항공대가 적 기동 부대 초동 공격을 회피, 전 전력을 전개, 적을 유인한 다음 상륙 전날 혹은 당일에 적 기동 부대 및 공략 부대에 총 공격을 실시한다. 잠수함 부대도 요격에 힘쓰고, 수비 부대는 적을 수면에서 격멸, 상륙 시 비행장 점령 사용을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 제1유격부대는 적 상륙 의도 판명 즉시 출격, 브루나이 또는 비(比)섬 중북부에 진출 보급 후, 적 공략 부대 상륙 시 상륙 지점에 도착을 목표로 출격한다. 기지 항공 부대 총 공격에 연계, 적 기동 부대 공격을 배제하며 진격한다. 돌입 저지 적 수상 부대와 결전하여 격멸하고, 상륙 지점에서 적 선단 및 상륙군을 공격 격멸한다.
#* 기동 부대 본대는 제1유격부대에 호응하여 출격, 적 기동 부대를 북동쪽으로 견제하여 제1유격부대 돌입을 용이하게 하면서, 적 기동 부대 일익에 공격을 실시한다. 적 보급 부대를 발견하고 기습 공격에 성산이 있을 경우 격멸한다.
# 모함 항공 부대는 상황에 따라 기지 항공 전력으로 전개, 작전에 참가하는 경우가 있다.
# 상황에 따라 비행기를 탑재하지 않은 항공모함도 수반시켜, 견제 기동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 시에는 특령으로 지시한다.
# 당초 계획하는 각 대 병력 배치
::1, 제1병력 배치
| 지휘관 | 소속 부대 | 병력 | 주요 임무 |
|---|---|---|---|
| 오자와 지사부로 | 기동 부대 본대 | 제3함대 ・제1항공전대(운룡 결) ・제3항공전대 ・제4항공전대 | 1, 훈련 정비 2, 특령에 의해 일부 작전 참가 |
| 구리다 다케오 | 제1유격부대 | 제2함대 제10전대(일부 결) ・모가미, 아키츠시마 | 1, 적 기동 부대 및 상륙 병단 격멸 2, 해상 기동 병단 수송 또는 호위 3, 해상 교통 보호 4, 훈련 정비 |
| 시마 기요히데 | 제2유격부대 | 제5함대 제11수뢰전대 제61구축대(료게츠 결) ・유키카제, 후소, 야마시로 | 1, 적 기동 부대 및 상륙 병단 격멸 2, 해상 기동 병단 수송 또는 호위 3, 해상 교통 보호 4, 훈련 정비 |
:::주, 본 배치는 8월 하순까지로 하고, 특령을 띄어 제2병력 배치로 이행한다.
::2, 제2병력 배치
| 지휘관 | 부대명 | 소속 부대 | 병력 | 주요 임무 |
|---|---|---|---|---|
| 오자와 지사부로 | 갑부대 | 기동 부대 본대 | 제1항공전대(운룡 결) | 1, 적 기동 부대 및 상륙 병단 격멸 2, 해상 기동 병단 수송 또는 호위 3, 해상 교통 보호 4, 훈련 정비 |
| 오바야시 스에요 | 을부대 | 제3항공전대 | ||
| 마쓰다 지아키 | 병부대 | 제4항공전대 | ||
| 시마 기요히데 | 제2유격부대 | 제5함대 ・제21전대 ・제1수뢰전대 제11수뢰전대 제61구축대 모가미 | ||
| 구리다 다케오 | 제1유격부대 | 제2함대 제16전대 제10전대(구축함 2결) 후소, 야마시로, 아키츠시마 | ||
:::주1, 특령에 의해, 8월 하순경 본 병력 배치로 이행한다
:::주2, 제호 작전이 긴박해지면, 특령에 의해 제3병력 배치로 이행한다
::3, 제3병력 배치
| 지휘관 | 부대명 | 소속 부대 | 병력 | 주요 임무 |
|---|---|---|---|---|
| 오자와 지사부로 | 을부대 | 기동 부대 본대 | 제3항공전대 제5함대 ・제21전대의 구축함 2결 ・제21구축대 결 제11수뢰전대 제61구축대 모가미 | 1, 적 기동 부대 및 상륙 병단 격멸 2, 해상 기동 병단 수송 또는 호위 3, 해상 교통 보호 4, 훈련 정비 |
| 마쓰다 지아키 | 병부대 | 제4항공전대 제21전대의 구축함 2 제11수뢰전대로부터 구축대 1 제21구축대 | ||
| 구리다 다케오 | 제1유격부대 | 제2함대 제16전대 제10전대(구축함 2결) 후소, 야마시로, 아키츠시마 | ||
:::주, 본 병력 배치는 8월 하순 이후 제호 작전에 있어서, 주로 본대 항공 기동전 실시 중에 적용한다
::4, 제4병력 배치
| 지휘관 | 부대명 | 소속 부대 | 병력 | 주요 임무 |
|---|---|---|---|---|
| 오자와 지사부로 | 을부대 | 기동 부대 본대 | 제3항공전대 제11수뢰전대 제61구축대 모가미 | 1, 적 기동 부대 및 상륙 병단 격멸 2, 해상 기동 병단 수송 또는 호위 3, 해상 교통 보호 4, 훈련 정비 |
| 하야타카 함장 | 병부대 | 항공모함 "준요", "류호" 제634항공대의 대부분 제11수뢰전대로부터 구축함 3 | 1, 항공 기동전 2, 수상 전투 부대 추진 원호 | |
| 구리다 다케오 | 제1유격부대 | 제2함대 제16전대 ・제10전대(구축함 2결) 후소, 야마시로, 아키츠시마 | 1, 적 기동 부대 및 상륙 병단 격멸 2, 해상 기동 병단 수송 또는 호위 3, 해상 교통 보호 4, 훈련 정비 | |
| 대기 부대 | 출격 불가능한 각 부대 함 | 1, 훈련 정비 2, 대기 | ||
| 보급 부대 | 편성은 별령 | |||
:::주, 본 병력 배치는 8월 하순 이후 제호 작전에 있어서 주로 본대 수상 전투 실시 중에 적응한다
기동부대 본대에는 항공모함 즈이카쿠, 즈이호, 류호, 준요, 치토세, 치요다 6척, 항공전함 이세・휴가 2척이 있었다. 8월 상순 운류, 아마기, 10월 중 시나노가 완성될 예정으로, 일본 예상 미군 침공 기일인 11월 중 함대 전력이 갖춰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함재기, 탑승원 보충 훈련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8월 10일부터 급속 훈련이 시작되었다. 재건 목표는
# 제1항공전대: 운류, 아마기, 제601해군항공대 294기 (재건 목표 12월)
# 제3항공전대: 즈이카쿠, 치토세, 치요다, 즈이호, 제653해군항공대 182기 (재건 목표 10월)
# 제4항공전대: 이세, 휴가, 준요, 류호, 제634해군항공대 132기 (재건 목표 8월 말)
이었다. 훈련은 늦어졌지만, 9월 말까지 제3・4항공전대에서 240기 항공전력이 작전 가능해질 전망이었다.
요령에서는 기동부대 본대는 적 기동부대를 북동 방면으로 유인, 항공모함 대 항공모함 결전을 벌이고, 기동부대를 공격 전력으로 사용했다. 오자와 지사부로 지휘 제1기동함대가 전반적인 작전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오자와는 제1유격부대와 기동부대 본대가 2600해리나 떨어져 행동하므로 작전 지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9월 10일, 오자와는 연합함대 사령부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제1기동함대가 제1유격부대를 지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동부대 본대, 제1유격부대, 제2유격부대로 군대를 구분하여 연합함대가 지휘 통솔하는 것이 작전 지도상 적절하다.
# 기동부대 작전은 현 상황으로는 소망하는 시기에 기동작전 성과를 올려 제1유격부대 작전을 필성시키는 것은 어렵다.
# 제1유격부대 돌입 성공을 위해 수상 전력 강화와 직접 협력 항공 전력 확보가 필요하다.
# 기동부대 본대는 항공 전력 정비까지 견제를 주임무로 하고, 병력 축소도 부득이하므로 제1유격부대에 항공전대 1개 및 제2 제10전대를 조속히 배속해야 한다.
# 제1항공전대 재편 완료 시, 기동부대 본대 병력을 충실히 하여 남북에서 공격하는 2개 기동부대 작전으로 해야 한다.
도요다 소에무는 9월 중순 참모 다카다 도시타네를 파견, 오자와의 통일 지휘를 요청했으나, 오자와는 찬동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10월 대만 해전에서 기동부대 본대 항공 전력을 육상 기지에 전용, 함재기가 120기 정도밖에 없는 상태로 제호 작전에 임하게 되어, 기동부대 본대가 공격 주력을 담당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제1유격부대가 기동부대에서 떨어져 연합함대 직솔이 되었고, 지휘권은 오자와의 진언대로 되었다.
이 시기, 제1유격부대는 링가 정박지에 있었다. 마리아나 해전 실패 후, 6월 23일 내지로 귀환한 부대는 다음 작전 지시를 기다리며 출격을 준비했다. 제2함대 참모장 고야나기 도미지는 상경하여, 항공모함 부대가 괴멸된 상황에서 제1유격부대를 어떻게 작전시킬 것인지 확인하고, 작전 준비와 훈련을 하려 했다. 그러나 군령부는 혼란스러워 작전 방침 전망도 서 있지 않았고, 연합함대 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고야나기는 제1유격부대 기함을 야마토형 전함으로 바꾸고 싶다고 희망했지만 찬동을 얻지 못했다.
고야나기 귀착 후 6월 28일, 연합함대와 제1기동함대로부터 제1유격부대의 링가 정박지 진출 내의를 받았다. 연료가 부족한 내지에 계속 머무는 것보다 풍부한 링가 정박지로 이동하여 훈련에 매진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었다. 유격부대는 7월 1일부터 남방 수송 물자 인원을 탑재하여 수시로 진발, 제1전대에는 버마 파견 보병 제106연대 및 다이토섬 보병 제36연대를 태우고 7월 8일 출격했다.
링가 정박지는 싱가포르 남쪽 약 100해리에 위치, 수심 평균 20~30m의 평온한 정박지였다. 정비 보급 지점인 싱가포르와 바렌판 유전에 가깝고, 수심이 얕아 잠수함 침입이 어렵고 경계하기 쉬우며, 넓은 해역이므로 훈련하기 쉽다는 등 함대 거점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제1유격부대는 주력을 갑을 2부대로 나누어 출격, 구리타 자신[구리타 테오]이 이끄는 주력 갑부대는 7월 16일 싱가포르에 도착, 물자 인원을 내린 후 18일 링가 정박지로 이동, 을부대와 별동 중인 타 함정도 8월 중에는 링가 정박지에 집결을 마쳤다.
연합함대는 8월 1일, 기함 오요도에서 내지에 체류 중인 각 부대 사령관, 참모장 등을 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지만, 제1유격부대는 참가할 수 없었다. 연합함대 참모 간다 시게노리와 군령부 참모 에노키오 요시오가 마닐라로 날아가, 남서 방면 함대 사령부에서 미카와 군이치 사령장관 이하 사령부 요원, 제1유격부대에서 고야나기 참모장과 작전 참모 오타니 후지노스케가 마닐라까지 와서, 8월 10일 회의를 열었다.
제1유격부대를 선단 공격을 위해 레이테 만에 돌입시킨다는 작전을 들은 고야나기는 간다와 다음과 같은 논의를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후, 다음 날 11일까지 남서 방면 함대 사령부원과 협의, 링가 정박지에 귀착 후 다음 날 제1유격부대 소속 사령관・함장 등에게 작전 설명이 행해졌다. 종래 방침과 크게 다른 수상 함정에 의한 수송 부대 공격 작전에 현장 지휘관들은 아연실색, 불만,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정박지 내에 돌입하여 공격하는 것을 염두에 둔 훈련 계획을 작성했다. 고야나기 진술에서는 아래의 5종으로 구분하여 실시했다고 한다.
# 만 내 정박 선박에 대한 공격법
# 야전 훈련
# 대공 전투 훈련
# 전탐 사격 훈련
# 야전에서의 성탄 사용법
지휘관들 중에는 수송 선단 공격으로 수상 부대를 소모시키는 것에 납득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우가키 마토메는 일지 『전조록』 9월 20일 기술에서, 자신이 탑승한 전함 야마토에 고야나기와 참모 야마모토 유지가 내함했으므로, "수송 선단을 공격하는 것보다 적 주력 부대와의 결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토네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도 구리타 사령부가 25일 낮 레이테 만 돌입을 그만두고 적 주력 부대 공격으로 향하는 결단을 내린 것을 "당연하다"고 전후에 말하고 있으며, 전대 사령, 함장 클래스 중에도 레이테 만에 돌입하여 수송 선단과 서로 맞바꾸는 것에 완전히 납득하지 않은 자도 있었다는 것을 고야나기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불만을 억누르면서, 전례 없는 임무를 향한 훈련을 실시하면서, 당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연합함대와 제1유격부대는 8월 10일 작전 설명 이후 회합 기회를 얻지 못한 채 10월 18일 작전 발동
4. 연합군의 작전 계획
어니스트 킹 제독, 합동참모본부의 다른 위원, 그리고 니미츠 제독은 필리핀에서 일본군을 봉쇄하고 타이완을 침공하는 것을 선호했다. 반면 미국 육군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42년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약속을 이행하기를 원하며 필리핀 침공을 지지했다.
포모사(타이완)는 중국 본토 침공의 기지로도 사용될 수 있었지만, 미국 육군과 미국 해병대에서 약 12개 사단을 필요로 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호주군은 병력이 부족하여 그러한 작전에 투입할 병력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포모사 침공은 독일의 패배로 필요한 병력이 확보될 때까지 연기될 것이었다.
맥아더, 니미츠, 루스벨트 대통령 간의 회담은 필리핀을 전략적 목표로 확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논쟁은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니미츠는 생각을 바꿔 맥아더의 계획에 동의했고, 맥아더의 부대가 필리핀 중부의 레이테 섬을 침공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부제독 토마스 C. 킨케이드가 상륙 부대와 근접 해군 지원을 제공할 예정이었다.
미국 제3함대는 윌리엄 F. 할시 주니어 제독의 지휘를 받았으며, 주력 부대인 제38기동부대(TF38, 기동부대, 마크 미처 부제독 지휘)는 상륙 작전을 위한 원거리 지원과 엄호를 제공할 예정이었다. 이 계획의 근본적인 결함은 전체를 지휘하는 단일 미국 해군 제독이 없다는 점이었다. 킨케이드 제독은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남서 태평양 지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를 받았으며, 할시 제독의 제3함대는 태평양 지역 총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보고했다. 이러한 지휘 통일성의 부재는 통신 실패와 함께 미국군에게 위기를 초래했다.
헐시 제독과 제3함대 참모진은 산베르나디노 해협을 방어하기 위한 기동 부대를 준비했다. 이 부대는 제34 기동 부대(TF34)로 지정되었으며, 윌리스 A. 리 제독의 지휘 하에 전함 4척, 순양함 5척, 구축함 14척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10월 24일 15시 12분에 헐시는 이 비상 계획의 세부 사항을 담은 무선 전신 전신 메시지를 보냈지만, 킨케이드 제독(제7함대)은 정보 수신자로 포함하지 않았다. 헐시는 TF34를 그가 명령할 때 형성하고 분리하는 비상 계획으로 의도했지만, 킨케이드 제독은 TF34가 형성되었으며 산베르나디노 해협에서 대기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헐시는 17시 10분에 TF34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하는 두 번째 메시지를 보냈지만, 제7함대는 이를 가로채지 못했고, 헐시는 니미츠나 킹, 킨케이드에게 전신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 오해는 전투의 진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필리핀 탈환 일정은 대일 반격이 상당히 진전된 후에도 주요 지휘관 간의 의견 차이, 유럽 전선과의 병력 배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둔 주요 관계자들의 행동, 대일전 종결 후 중화민국의 장제스 정권 지원을 위한 대륙 병력 전개와 같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중부 태평양 진공과 뉴기니에서 필리핀 방면으로의 진공을 모두 추진하는 방침이 정해졌지만, 우선순위는 중부 태평양이 더 높았으며, 해군 작전 부장 어니스트 킹 제독은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필리핀보다는 타이완으로 향하는 루트에 집착했다. 1944년 3월 12일, 통합 참모 본부는 당면한 공략 예정지를 결정했고, 여기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남서 태평양 방면 최고 사령관이 지지하는 할마헤라, 민다나오 등, 남서 태평양에서 남부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곳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6월 단계에서도 통합 참모 본부는 필리핀을 건너뛰고 싶어 하는 의향을 보였고, 킹은 대만으로 진공할 것을 제안했다. 통합 참모 본부는 전쟁 종결을 앞당기기 위해, 6월 13일 맥아더, 니미츠 양자에게 대일 진공 재검토를 명령했지만, 양자 모두 이러한 계획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했다. 조지 C. 마셜 육군 참모총장은 6월 24일, 맥아더에게 오키나와 진공을 제안했지만, 맥아더는 반대하고 1945년 5월 루손 섬에 진공하는 레노 5호(Reno-V) 계획을 제출했다.
맥아더는 군사적 이유로, 필리핀은 원래 미국의 식민지였고 친미 게릴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으며, 도서에 대한 해상 진공과 비교하여 지상 거점도 여러 곳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킹은 맥아더 대장의 제안하는 레노 5호는 대일전 조기 종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니미츠는 1945년 2월에 타이완 남부에 진공하는 그래나이트 2호(Granite-2)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존 노선을 유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7월 4일에 통합 참모 본부에 예정대로 진공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기존의 작전 계획을 수행할 것과, 맥아더 대장의 주장을 따른 기동 부대와 육상 기지를 연계한 작전이 적절하다는 두 가지 점을 회신했다. 이러한 의견을 바탕으로 통합 참모 본부는 7월 11일, 유럽 정세와 연계하여 다음을 제안하며, 팔라우 점령(당시 예정은 9월 15일)과 민다나오 공략 사이에 결정하기로 했다.
킹은 스프루언스 제5함대 사령관, 터너 제51임무부대 지휘관에게 차기 진공은 어디가 바람직한지를 물었지만 양자 모두 필리핀이라고 답했고, 스프루언스는 그 이유로 사이판과 같은 도서보다는 항만에 적합한 지형이 많고, 마닐라만 등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킹은 이해는 하면서도, 지론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경계하여, 지금까지 별로 공을 세우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4월 말에 불출마를 선언했고, 루스벨트는 7월 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것이 확실해져, 20일에 지명을 받았다. 그 후 루스벨트는 선거 유세를 벌였고, 중순양함 볼티모어를 타고 오아후섬 호놀룰루로 향했다.
7월 26일, 군 관계자를 초청하여 만찬회를 열었고, 윌리엄 리히 육해군 참모총장 회의 의장, 맥아더, 니미츠 4자 회담을 진행했다. 맥아더는 민다나오에서 레이테를 거쳐 루손으로 향하는 코스를 제시하며 지론을 펼쳤다.
*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게릴라 협력을 기대할 수 있다.
* 대만은 반세기나 일본의 통치하에 있어 오히려 주민이 일본 측에 협력할 것이다.
* 기독교도가 많은 필리핀 주민은 1942년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 필리핀을 버리는 것은 미국의 명예에 큰 오점이 된다.
니미츠는 대만에 집착하지 않았다. 킹이 제창하는 대만 진공에는 5~10개 육군 사단이 필요하다고 보여 육군의 협력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루스벨트와 회담 후 "국민의 격렬한 분노는 이번 가을 선거에서 각하에 대한 반대표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협박했다. 이에 루스벨트는 "필리핀을 우회하지 않겠다"고 인정하며 "이제 킹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대만 진공과 루손 진공안의 관계는 뒤로 미뤄졌고, 9월 퀘벡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협의한 결과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킹은 즉시 대만 공략을 주장하며 니미츠에게 "인사를 다루는 항해국 출신이라 타협만 한다"며 분노를 드러냈다. 한편 해군 내에서도 할제이는 필리핀 공략의 의의를 인정하는 진언을 했고, 스프루언스나 터너가 차기 진공 목표로 필리핀을 추천하는 등, 해군도 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어쨌든 필리핀 진공 결정은 고도의 정치성을 포함하게 되었다.
8월에 들어 테니안, 괌이 잇따라 함락되어 마리아나 제도를 완전히 점령한 미국군은 펠렐리우, 야프, 타라우드 제도 등을 다음 목표로 삼게 되었다.
8월 16일, 마셜은 일정을 단축할 수 있다고 설명한 맥아더에게 계획 재제출을 명령했다. 맥아더는 작전 명칭을 머스킷티어(Musketeer)로 개명하고 27일에 계획을 제출했으며, 이 중 일부를 통합참모본부가 채택했다. 킹은 여전히 타이완에 집착했고, 맥아더는 레이테, 해군과 해병대는 타이완을 공략할 것을 제안하며 은연중에 레이테 상륙에 대한 비협조를 시사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레이테 상륙을 뒤로 미루는 것으로 합의했다.
9월 9일, 통합참모본부는 민다나오 섬 공략 예정일을 11월 15일, 레이테 섬을 12월 20일로 정하고, 각각 "킹 I", "킹 II"로 명명했다. 하지만 이후 루손과 타이완 중 어디로 진공할지는 미정이었다.
킹 II 작전에서는, 작전 구역이 남서태평양군과 남태평양군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연합참모총장회의(Combined Chiefs of Staff)는 통일적인 행동을 위해 지휘권을 개정하여 작전의 최고 지휘관을 맥아더로 정했다. 먼저 필리핀 주변의 광범위한 일본군 거점을 공격하여 제압한 후, 레이테 섬에 상륙한다. 육군 부대의 상륙 작전 지원은 토머스 C. 킨케이드 중장의 제7함대가 담당하며, 함선에 의한 포격 지원, 수송선 호위 등을 수행한다. 할제의 제3함대도 이를 엄호하기로 결정되었다.
총 862척 (전투 함정 157척, 수송선 420척, 특무 함선 157척, 기타 128척)。
제2차 퀘벡 회담에서 레이테 공략을 최종 결정한 1944년 9월, 연합 참모총장 회의의 결정에 따라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 지휘의 제7함대가 상륙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때, 윌리엄 할제이 주니어 대장의 상륙 부대 이관의 진언도 있어 태평양 함대에서 윌킨슨 중장의 양용전 부대가 이관되었지만, 제3함대를 중심으로 하는 항공모함 기동 부대와 그 보급 부대는 체스터 니미츠 대장 지휘하의 태평양 함대에 남겨졌으며, 그 임무는 제7함대를 지원하고, 일본 함대가 출현했을 경우에는 그 격멸을 우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3함대와 제7함대에서는 지휘 계통이 크게 달랐다。
* 사령장관: 윌리엄 할제이 주니어 대장 기함: 전함 뉴저지 이하 204척
참모장: 로버트 카니 소장 ()
작전 주임 참모: 랄프 윌슨 대령
항공 참모: 호레스트 몰튼 대령
통신 참모: 레오나드 도우 대령
정보 참모: 매리언 치크 대령
작전 부참모: 허버트 호너 대령
전무 부참모: 해롤드 스태슨 대령
* 사령관: 마크 A. 미처 중장,
참모장: 알레이 A. 버크 준장, 기함: 항공모함 렉싱턴
* 호위 항공모함 11척, 구축함 18척, 호위 구축함 27척, 예인선 10척, 유조선 35척
※ 12개의 그룹으로 분할하여 일본군 초계권 밖의 지정 해역 ~ 울시 환초 간에서 이동 및 대기
수면 타격 임무 부대
사령관: 윌리스 A. 리(Willis A. Lee) 중장 기함: 워싱턴
10월 24일 15시 30분, 제38임무 부대 제2군, 제3군, 제4군에서 수면 부대(전함 6척, 순양함 7척, 구축함 17척)를 추출하여 편성. 단, 편성을 선언했지만 실시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또한, 24일 저녁 무렵에는 제3군의 함선은 집결 지점 근해에 없었다.
* 제7전대(Battleship Division 7) 사령관: 오스카 C. 배저 2세(Oscar C. Badger II) 소장
전함 뉴저지(할시 대장 승함), 아이오와
* 제8전대(Battleship Division 8)
전함 매사추세츠, 워싱턴
* 제9전대(Battleship Division 9)
전함 앨라배마, 사우스다코타
* 제6순양대(Cruiser Division 6)
중순양함 뉴올리언스, 위치타
* 제13순양대(Cruiser Division 13) 사령관: 로렌스 T. 듀보스(Laurence T. DuBose) 소장
경순양함 산타페, 모빌, 버밍햄
* 제14순양대(Cruiser Division 14)
경순양함 빈센스, 마이애미, 빌록시
* 제52구축전대(Destroyer Squadron 52)
구축함 4척
* 제104구축대(Destroyer Division 104)
구축함 4척
* 제100구축전대(Destroyer Squadron 100), (제46구축전대, 제12구축전대의 일부 함선으로 편성)
구축함 6척
* 제50구축전대(Destroyer Squadron 50)
구축함 4척
남서 태평양 방면 최고 사령관 지휘 하(최고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대장, 기함: 경순양함 내슈빌)
병원 수송선 53척, 화물 수송선 54척, 기타 포함해 공략 부대 함선 총 658척, 전투 함정 총 157척
사령관: 토머스 C. 킨케이드 중장, 기함 와사치 (수륙 양용 작전 부대 기함)
* 상륙 지휘함 와사치
* 경순양함 내슈빌
* 구축함 4척
북부 공격 (사령관: 바베이 소장)
* 기함: 상륙 지휘함 블루 리지
남부 공격 (사령관: 윌킨슨 중장)
* 기함: 상륙전 지휘함: 마운트 올림푸스, 아팔라치안
태평양 함대 잠수함 부대 사령관: 찰스 A. 록우드 중장
* 드럼, 할리벗, 브림 외 21척
미국 육군 제6군
총 병력 20만 2,500명 (사령관: 월터 크루거 중장)
* 제10군단 53,000명 (사령관: 프랭클린 C. 시버트 중장)
제1기병사단 산호세, 드라그 방면에 상륙 (사령관: B. 매지 소장)
제24사단 타클로반, 파로 방면에 상륙. 1개 연대는 파나온 해협 방면에 상륙 (사령관: F. 어빙 소장)
* 제24군단 51,500명 (사령관: 존 리드 호지 중장)
제7사단 산호세, 드라그 방면에 상륙 (사령관: A. 아놀드 소장)
제96사단 산호세, 드라그 방면에 상륙 (사령관: J. 브래들리 소장)
* 군 직할 지원 부대
* 제6 레인저 보병 대대
* 군 예비 부대 28,500명
제32사단 (사령관: W. 길 소장)
제77사단 (사령관: A. 브루스 소장)
5. 주요 해전
1시 40분의 "야소 3스"에서의 적 발견 보고 이후, 야간 수색에 나선 적 정보 보고를 받은 후쿠도메 장관은 공격대의 준비를 진행하는 동시에, 전탐으로 포착한 적을 포착하기 위해 수색기를 잇따라 출격시켰다. 7시에는 제1차 공격대로서 전폭 연합 약 104기(제로센 47기, 폭장 제로센 28기, 99식 함폭 24기, 혜성 5기)가 출격하여, 적이 있다고 여겨지는 레가스피 동방 해면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분 후, 제1유격부대로부터 사마르 섬 남동 해역에서 미 해군 항공모함 부대와 조우하여 교전에 들어갔다는 연락이 도착했다. 이미 출격시킨 제1차 공격대를 그쪽으로 향하게 하기에는 항속 거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야간 공격에 예정되어 있던 제2차 공격대의 1식 육공, 은하 총 10기를 급히 그쪽으로 향하게 했지만, 부대 지휘관에게 이 지령이 전달된 것이 다음날 26일로 대폭 늦어져 결국 해당 부대는 예정대로 야간 공격에 출격하여,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후쿠도메 장관에게 "우키 5소에 항공모함 3척을 포함한 적 부대 있음"이라는 정보가 전달되어, 츠게가라오 기지로 귀환했던 제3항공전대의 잔여기에 공격을 요청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전보의 지연이나 정비의 지연 등으로 인해 출격하지 못했다.
제1차 공격대는 레가스피 동방을 진격하여, 9시경에는 예정 항로의 선단에 도달했지만 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거기서 정서쪽으로 항로를 바꿔 진격했지만 발견하지 못한 채, 레가스피 기지로 전대가 귀환했다. 그 사이에 혜성 함폭 2기가 손실되었다.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제6기지 항공부대가 레가스피 동쪽으로 전력 출격하고 있을 무렵, 제1유격부대와 교전한 태피 3을 공격한 항공대가 있었다. 훗날 '통솔의 외도'라고 지휘관인 제5기지 항공부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이 스스로 칭한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통칭 '특공대'라고 불리는 항공기에 의한 자폭 공격 부대이다. 이것은 타이완 해전으로 인해 가동 기체 수가 불과 제로센 30기 정도로 격감한 항공 전력으로 제1유격부대의 레이테 만 돌입을 원호해야 했던 오니시가 고육지책으로 발령한 것이라고 전해진다.인사 및 기재 개조 등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서 작전의 하나로서 원래 군령부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어떻게 오니시 중장이 특공 전술 도입에 이르렀는지 등은 그가 종전 직후 아무 말 없이 자결했기에 아직도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육군은 토미나가 쿄지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부대가 "반다대" 및 "후가쿠대"의 2개 부대를 특별 공격대로 출격시켰지만, 이것은 해전 후 11월에 들어서면서 일어난 일이며, 해전 당시 실행 부대는 아직 내지에서 편성 중이었다.
특별공격대는 20일, '시키시마대'(대장 세키 유키오 대위)·'야마토대'(동 쿠노 요시토 중위)·'아사히대'·'야마자쿠라대'가 편성되었다. 21일 아침, 각지에서 출격했지만 기상 악화 등으로 적을 만나지 못했고, 이후 24일까지 3번 출격했지만 모두 귀환했다. 그 사이 야마토대에서는 2기의 미귀환기가 발생했다.22일에는 마바라캇 기지에서 새롭게 '기쿠스이대'·'하사쿠라대'·'와카자쿠라대'가 편성되었다.
그리고 25일, 통산 4번째 출격이 이루어졌다. 6시 30분, 처음으로 출격한 것은 아사히대, 야마자쿠라대, 기쿠스이대였지만, 그중 기쿠스이대가 시알가 섬 앞바다의 미국 호위 항공모함군 '태피 1'을 발견하고 공격하여 1기가 항공모함 산티의 비행 갑판 좌현 전부에 명중하여 화재를 발생시켰다. 게다가 다른 1기씩이 항공모함 산가몬, 페트로프 베이에 돌입했지만 항공모함 스와니의 대공포화로 격추되었다. 그러나 그 스와니에 마지막 돌입이 있었고 후부 엘리베이터 부근에 명중, 기쿠스이대는 2척의 호위 항공모함에 손상을 입혔다. 이러한 공격은 원래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의 첫 번째 전과'였지만, 전과 확인에 시간이 걸려 연합함대 사령부에 보고가 늦어져 이후 시키시마대의 공격이 첫 번째 특공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같은 날 출격한 아사히대, 야마자쿠라대는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엄호기 2기를 잃고 귀환했다.
7시 25분, 시키시마대의 제로센 9기(돌입대: 세키 유키오 대위 이하 5기, 엄호대: 니시자와 히로요시 비행조장 이하 4기)가 출격, 10시 40분, 제1유격부대의 추격을 벗어난 태피 3을 발견하고 즉시 돌입을 시작한다. 기함 키토칸 베이가 처음으로 노려져 1기가 돌입한다. 이것을 가까스로 회피했지만 탑재하고 있던 폭탄이 폭발하여 손해를 입었다. 게다가 항공모함 화이트 플레인스를 노린 2기 중, 1기가 피탄 후 목표를 바꿔 항공모함 세인트 로에 돌입, 비행 갑판을 관통하여 내부에서 폭발, 항공 연료와 탄약이 유폭, 동함은 대화재를 발생시켜 11시 15분에 침몰했다.
동대는 세인트 로 침몰 직후, 2번째 특별 공격대의 공격을 받는다. 9시에 출격한 야마토대(동대는 엄호기를 포함해 전 기가 미귀환되어, 전과 확인을 할 수 없다) 혹은 이날 급히 마바라캇 기지에서 편성된 혜성 함폭 2기에 의한 특공으로 보인다. 이 공격으로 키토칸 베이에 2기가 명중(비행 갑판, 및 후부 굴뚝)했다.
이 공격으로 호위 항공모함 1척을 격침, 3척을 격파했다. 하지만 해군은 정규 항공모함의 격침·격파로 오인. 이 후 일본군은 종전까지 이 전법을 정규 전술로 작전 전개해 나가게 된다. 이렇게 태피 3은 호위 항공모함 2척의 침몰 외에 전사자 약 1,200명, 부상자 800명, 비행기 손실 100기 등 대손해를 입고 철수했으며, 대신 제38임무부대 제4군이 호위에 나섰다. 이 함대도 특공기에 공격을 받아, 29일에 항공모함 프랭클린 및 경항공모함 벨로우 우드가 손상되어 피항했다.
13시경, 후쿠도메의 지휘하에 있던 제1유격부대로부터 11시 50분에 발신된 "0945 야키 1카의 적을 공격하라"는 요청문이 도착했다. 9시 40분 발견된 우키 5소의 적 정보도 있었기 때문에, 후쿠도메는 망설임 없이 "1305 6FGB 공격 가능, 전력으로 적 항공모함 공격 실시"라는 전령을 발신했고, 오니시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도 "전력으로 지점 '야키 1카'의 적 기동부대를 공격하라"고 휘하 부대에 명령했다.
그러나 야키 1카의 적도, 우키 5소의 적도, 이른 아침에 발견한 5곳의 적도 모두 오인 혹은 오보였다. 이 중 야키 1카의 소재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후쿠도메 장관이 입수했던 "0940 지점 '우키 5소'에 적 항공모함 3척 발견"이라는 정보도 발신자의 기록도 수전의 기록도 되어 있지 않다. 이 외에도 제6함대에서는 11시 37분경에 휘하의 잠수함에 보낸 "6F 기밀 제251137번 전"에서 언급된 "0900 지점 '얀메 55'에 적 항공모함 3척 남하 중"이라는 정보도 있다. 얀메 55는 함선용 지점 약어이며 항공용으로 하면 노키 5소로, 야키 1카, 우키 5소의 대략 중간에 위치하는 곳이지만, 이것 역시 정보원이 어디인지는 기술이 없다.
이러한 발신 기록이 없는 적 항공모함 발견의 보고가 거의 같은 시각에 마닐라와 내지에서 수신되어, 각 부대가 그것에 따라 행동을 일으키고 있다. 이 외에도 제61항공전대로부터 휘하의 채운 정찰기로부터의 정보로 9시부터 9시 6분까지 야키 1카와 우키 5소에 가까운 4지점(노테 4케, 노키 4에, 야키 3쿠, 노츠 4에의 4곳. 채운이 귀환 후에 보고되어 동 전대에서 발신되었다)에서 적을 발견했다는 정보가 11시경에 발신되었으며, 어느 지점에도 실제로는 미 함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보에 기지 항공대는 휘둘렸고, 제1차 공격대는 완전히 헛수고로 끝났다.
귀환한 제1차 공격대는 보급 후, 제1유격부대로부터의 "야키 1카" 지점에 대한 공격을 위해 수시로 출격했다. 먼저 13시 50분부터 클라크 기지에서 제1차 공격으로 제로센 28기, 99식 함폭 2기가 출격, 이어서 14시 50분부터 레가스피 기지에서 제2차 공격으로 혜성 함폭 4기, 15시에는 제3차 공격으로 제로센 35기, 99식 함폭 23기가 텐잔 2기의 선도하에 출격했다. 그러나 제1차, 제2차 공격대는 모두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귀환한다. 제3차 공격대는 16시 16분에 제1유격부대의 상공을 통과하여 동 부대의 사기를 높이지만, 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17시에 미국 전투기 35기와 조우하여 공중전이 벌어졌고, 제로센 6기, 99식 함폭 2기를 잃고 퇴각, 19시 30분에 레가스피 기지로 귀환했다. 또한 동 공격대의 일부는 16시 40분경부터 공습을 받은 제1유격부대를 '일본군기에 공격을 받는 미 함대'로 오인하여 하고로에 공격을 가했다(실제 653공 전투 상세 보고서에 적 함대 공격 전과 불명의 기술이 있다).
이 후에도 기지 항공대는 박모・야간 공격을 기도하여 공격대(제로센 35기, 텐잔 9기, 1식 육공 13기)를 출격시켰지만, 모두 적을 포착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그러나 퇴피하는 중순양함 쿠마노가 아군기의 오폭을 받았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제1유격부대 측에서도 두 번에 걸쳐 오폭이 있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20시에 후쿠도메로부터 "오늘 밤의 공격을 중지하라. 아군 오사多し"라는 지령이 내려진다. 오니시도 제1유격부대에 오폭이 있었다고 하며, 아군 식별에 주의하도록 휘하 부대에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이렇듯 25일의 공격은 또다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제1항공함대의 가미카제 특별 공격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오니시의 "제2항공함대에서의 특별 공격 편성 요청"에 완강하게 고개를 젓지 않던 후쿠도메도, 기존의 작전으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제51항공전대 소속의 함폭대에 의한 "제2신풍 특별 공격대"를 편성한다. 동 부대는 10월 27일부터 수시로 편성되어 특공 작전을 개시, 이로써 가미카제 특별 공격은 지속적으로 실시되게 되었고, 이후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지게 된다.
5.1. 팔라완 해협 해전 (10월 23일)
브루나이에서 출항한 구리타 제독의 중부군은 5척의 전함(야마토, 무사시, 나가토, 곤고, 하루나)과 10척의 중순양함(아타고, 마야, 타카오, 초카이, 묘코, 하구로, 쿠마노, 스즈야, 치쿠마), 2척의 경순양함(노시로, 야하기) 및 15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리타 함대는 10월 23일 자정 무렵 팔라완섬을 통과했다. 미 해군 잠수함 다터와 데이스는 근처 수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10월 23일 00:16, 다터함의 레이다는 27,000m 거리에서 일본 함대를 탐지했다. 다터함 함장이 육안으로 접적을 확인하고 최소 3회에 걸쳐 보고하는 사이, 두 잠수함은 일본 함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야마토함의 무선병은 최소한 한번 이상 해당 무전을 탐지했지만, 구리타 제독은 적절한 대잠수함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
다터함과 데이스함은 최대 출력으로 수상 기동하여 구리타 함대 진형의 진행 방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일출과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05:24에 다터함은 6발의 어뢰를 발사, 최소 4발이 구리타 함대의 기함인 아타고(다카오급)에 명중했다. 10분 후, 다터함은 다카오함에 2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05:56에 데이스함은 마야함(다카오급)에 4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아타고함과 마야함은 곧 침몰하였다. 다카오함은 2척의 구축함과 함께 브루나이로 회항했으나, 다터함과 데이스함이 계속 추격하였다. 아타고함은 매우 빠르게 침몰하여 구리타 제독도 직접 수영을 해야 했다. 제독은 일본 구축함 키시나미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야마토함에 옮겨타게 된다.
10월 24일, 다카오함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다터함은 모래톱에 좌초, 승무원 전원은 데이스함에 구조되었다. 다카오함은 싱가포르로 귀항하였다.
5.2. 시부얀 해전 (10월 24일)
1944년 10월 24일 오전 8시경, 연합군은 시부얀 해로 진입하는 일본 중부군(구리타 함대)을 발견했다. 미 해군 제3함대 소속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USS Enterprise, CV-6)에서 발진한 F6F 헬캣 전투기, SB2C-3 급강하폭격기, TBF 어벤저 뇌격기로 구성된 공격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제3함대는 전력이 막강했으나, 전투함 배치가 적절하지 못했다. 10월 22일, 홀시 제독은 2개 함대전투단을 울리티 섬의 함대 기지로 보내 보급 및 재무장을 받도록 했다. 잠수함 다터의 접촉 보고 후 데이비슨 제독의 함대전투단을 소환했으나, 제38기동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존 S. 매케인 제독의 함대전투단은 울리티 섬으로 계속 항해하도록 했다. 10월 24일 매케인 전투단이 소환되었으나, 이 지연으로 인해 미 해군 최강 함대전투단은 전투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제3함대 가용 항공 전력의 40%에 해당했으며, 6척의 중순양함 중 4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10월 24일 아침, 구리타 함대를 공격할 수 있는 함대전투단은 3개뿐이었고, 그중 가장 좋은 위치에 있던 제럴드 F. 보겐 제독의 제38기동함대 2함대전투단(TG 38.2)은 정규항모 1척(인트레피드, USS Intrepid, CV-11)과 경항모 2척으로 구성된 가장 약한 전력이었다.
보겐 함대전투단 소속 항공모함 인트레피드와 카봇(USS Cabot, CVL-28)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은 오전 10시 30분경 공격을 시작, 나가토, 야마토, 무사시에 명중탄을 기록하고 중순양함 묘코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인트레피드, 에섹스(USS Essex, CV-9), 렉싱턴(USS Lexington, CV-16)에서 발진한 2차 공격대는 에섹스함 소속 VB-15 헬다이버와 VF-15 헬캣을 주축으로 무사시에 10발을 명중시켰다. 무사시가 철수를 시도하는 동안 엔터프라이즈와 프랭클린(USS Franklin, CV-13)에서 발진한 3차 공격대는 추가로 11발의 폭탄과 8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구리타 제독은 함대의 침로를 변경하여 항공모함 작전 거리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피해를 입은 무사시함을 지나쳤다. 그는 오후 5시 15분에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으로 이동하기 전 무사시함의 응급 복구를 기다렸으나, 무사시는 최소 17발의 폭탄과 19발의 어뢰에 피격되어 전복, 오후 7시 30분에 침몰했다.
한편,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루손 섬에서 휘하 항공기로 3개 공격대를 편성, 셔먼 제독의 제38기동함대 3함대전투단(TG 38.3)을 공격했다. TG 38.3은 루손 섬 비행장을 폭격하여 일본 육상 발진 항공기가 레이테 만에 접근하는 연합군 함정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각 공격대는 50~60기의 항공기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의 일본 공격기는 셔먼 제독의 전투 초계 비행 중인 헬캣 전투기에 요격되거나 항로를 이탈했다. 특히 데이비드 맥켐벨 비행대장의 지휘 하에 에섹스함에서 출격한 2개 전투기 분대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맥켐벨 비행대장은 이 작전에서 9기의 적기를 격추했다. 그러나 일본 폭격기 1기(요코스카 D4Y3, "주디Judy")가 방어선을 뚫고 오전 9시 8분에 경항모 프린스턴(USS Princeton)에 250kg급 철갑탄을 명중시켰다. 폭발로 프린스턴함 격납고에 큰 화재가 발생했으나, 살수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화재는 빠르게 번져 2차 폭발이 계속되었다. 15시 23분, 함의 폭탄 저장소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폭발로 프린스턴함과 화재 진압을 돕던 경항모 버밍햄(USS Birmingham, CL-62)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버밍햄함은 심각한 피해를 입어 퇴역했다. 프린스턴함을 구조하려는 노력은 실패했고, 오후 5시 50분 생존자 철수 후 경순양함 레노(USS Reno)의 어뢰로 자침되었다. 프린스턴함 승무원 108명이 사망하고 1,361명이 구조되었다. 프린스턴함은 레이테만 전투에서 미국이 상실한 가장 큰 전투함이었다.
10월 24일, 제3함대는 일본 중부군에 대해 259회의 비행 출격을 감행했으나, 대부분 핼켓 전투기였다. 이는 10월 25일 훨씬 약한 전력의 일본 북방군 오자와 함대에 대한 527회 출격에 비하면 구리타 함대를 무력화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공격은 전함 무사시에 집중되었다. 무사시함은 침몰하고 순양함 묘코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구리타 함대의 다른 전투함들은 대부분 전력을 보존했다. 홀시 제독의 오판으로 구리타 함대는 밤중에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 다음 날 사마르 해안에 등장하게 된다.
5.3. 수리가오 해협 해전 (10월 25일)
니시무라 쇼지 중장이 이끄는 "남방군" 니시무라 함대는 전함 야마시로(山城)를 기함으로 하여 후소(扶桑), 중순양함 모가미(最上), 구축함 시구레(時雨), 미치시오(滿潮), 아사구모(朝雲), 야마구모(山雲)로 구성되었다. 이 함대는 10월 22일 브루나이를 출발, 술루해를 거쳐 수리가오 해협으로 진입했다. 니시무라 함대는 레이테만에서 구리타 함대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시마 기요히데 중장이 지휘하는 "2차 공격대" 시마 함대는 중순양함 나치(那智)를 기함으로, 아시가라(足柄), 경순양함 아부쿠마(阿武隈), 구축함 아케보노(曙), 우시오(潮), 가스미(霞), 시라누이(不知火) 등으로 구성되어 니시무라 함대를 뒤따랐다.
| "남방군" 니시무라 함대 (괄호 안의 년도는 촬영 년도) | |||
|---|---|---|---|
후소급 전함 야마시로(1917) | 175px]]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1944) | 175px]] 시라쓰유급 구축함 시구레(1939) | 모가미, 시구레를 제외한 다섯 척이 격침되고 모가미는 퇴각 중 공격을 받아 자침. 최종적으로 귀환한 배는 시구레 한 척 뿐이다. |
| 175px]] 후소급 전함 후소(1933) | 175px]] 아사시오급 구축함 미치시오(1937) | 175px]] 아사시오급 구축함 아사구모(1939) | 175px]] 아사시오급 구축함 야마구모(1939) |
10월 24일, 니시무라 함대는 미 해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경미한 피해만 입었다. 그러나 무선 침묵으로 인해 시마 함대 및 구리타 함대와 보조를 맞추기 어려웠다.
10월 25일 새벽, 니시무라 함대는 제시 올덴도르프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7함대 지원부대의 매복에 걸렸다. 미군은 전함 6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28척, 어뢰정 39척의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22시 36분, 미 해군 어뢰정 PT-131이 일본 함대와 접촉, 이후 3시간 반 동안 교전했다. 03시경, 후소가 미 해군 구축함 멜빈의 어뢰에 피격되어 침몰했다. 야마구모는 미 해군 구축함 맥덜무트의 어뢰에, 미치시오는 미 해군 구축함 허친스의 어뢰에 각각 격침되었다. 아사구모는 뱃머리가 손상되어 표류했다.
03시 16분, 미 해군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의 레이다가 야마시로를 탐지, 03시 53분에 포격을 개시했다. 캘리포니아, 테네시도 합류, 미군은 레이더 사격 관제 기술을 활용하여 일본군이 반격할 수 없는 거리에서 공격했다. 야마시로와 모가미는 큰 피해를 입었고, 시구레는 퇴각 중 조향력을 잃었다. 야마시로는 04시 20분에 침몰했다.
시마 함대는 니시무라 함대의 후방에서 접근 중이었으나, 레이다 문제와 어뢰정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경순양함 아부쿠마가 어뢰에 피격되어 낙오했다. 시마 함대는 후소의 잔해를 보고 니시무라 함대가 전멸했다고 판단, 후퇴를 명령했다. 그러나 퇴각 중 나치가 모가미와 충돌, 모가미는 침수되었다.
결국 니시무라 함대에서 시구레만이 살아남았다. 시마 함대는 8척이 생존했다. 수리가오 해협 해전은 역사상 마지막 전함 간의 전투였으며, 정자전법(T자형 진형)이 사용된 마지막 전투였다.
5.4. 사마르 해전 (10월 25일)
일본 해군의 북방군에 남아 있는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하여 3함대의 가용 전력 전부를 북진하도록 명령한 홀시 제독의 결정은 결국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이 전혀 방비되지 않은 상태로 놔두게 되었다. 킨케이드 제독과 참모를 포함한 7함대의 지휘관들은 홀시 제독이 34 기동함대(TF 34)을 산베르다르디노 해협을 지키도록 하고 남은 3척의 항공모함을 지휘하여 북진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실제로는 6척의 전함을 포함한 3함대의 가용한 전력 전부가 북진하고 있었다.
결국 구리타의 중부군은 방해받지 않고 10월 25일 03:00에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에 나타나 사마르섬을 끼고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는 미해군은 7함대 소속의 호위항공모함(호출부호 '테피(Taffy)' 1, 2, 3) 3척을 포함한 16척의 작고 매우 느리며 비무장인 호휘항공모함과 경무장이거나 비무장인 구축함 혹은 더 소형인 호위구축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팔라완 통로와 시부얀 해전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의 중부군은 야마토함을 포함한 4척의 전함과 6척의 중순양함, 2척의 경순양함 및 11척의 구축함을 포함하는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구리타 함대는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제독 휘하의 전투단 77.4.3 ('Taffy 3')를 부지불식간에 따라잡았다. 스프레이그 제독은 휘하의 항모들에 함제기를 발진시키라고 명력하였으며, 스콜에 숨기 위하여 동쪽으로 항진하였다. 구축함과 호위구축함들은 연막을 이용하여 항공모함의 후퇴를 가리고자 하였다.
구리타 제독은 오자와 함대의 유인 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홀시 제독의 3함대 소속 항공모함을 찾았다고 판단하고, 대 항공모함 전투 대형으로 함대를 제편하였다. 또한 '일반 공격' 명령을 통하여 휘하의 함대가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공격하도록 하였다.
미해군 구축함 존스턴(USS Johnston, DD-557)은 적 함대에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함장 어네스트 에반스(Ernest E. Evans) 소령은 적 함대와의 압도적인 전력차를 확인 하고 전속력으로 적 함대로 뛰어들며 중순양함 쿠마노(Kumano)를 어뢰로 공격하였다. 쿠마노함은 피격되어 전열에서 이탈한다. 이를 목격한 스프레이그 제독은 남은 전투단 소속의 소형 함정에 같은 역할을 명령한다. Taffy 3 소속의 다른 두척의 구축함(호엘(USS Hoel, DD-522), 허만(USS Heermann, DD-532))과 호위구축함(사무엘 로버트(USS Samuel B. Roberts, DE-413))은 자살적 공격을 감행한다. 일본 함대는 화력이 분산되고, 공격하는 어뢰를 회피하기 위하여 함대의 대형이 흐트러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함대는 항공모함에 계속 접근하며 호엘함과 로버트함을 침몰시킨다. 존스턴함 역시 보유한 어뢰를 모두 소모하고 5인치 주포로 계속 교전하였으나, 일본 구축함에 의해 침몰한다.
교전이 진행되는 중에 토마스 스프레이그(Thomas Sprague) 제독(클리프턴과 가족이 아니다)은 휘하 3개 전투단(Task unit) 소속 16척의 호위항공모함에서 즉각적으로 모든 항공기에 이함을 명령한다. 이 이함 명령은 매우 급박하게 이루어졌으며, 기총만 장비한 상태에서 이함한 경우도 있었다. 스프레이그 제독은 16척의 호위항공모함에 450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항공기가 FM-2 와일드캣이나 TBM 어벤저 뇌격기와 같은 구형 모델이었으나 당시 일본 함대는 항공 세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미군 항공기들은 방해받지 않고 일본 함대에 접근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함대에 지속적인 항공 공격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펠릭스 스텀프(Felix Stump) 제독 지휘하의 Taffy 2 전투단(Task Unit 77.4.2)의 공격은 매우 위력적이었다.
Taffy 3 전투단 소속 항공모함들은 포화를 피해 계속 남진하였다. 함열의 가장 뒤에서 항진하던 호위항공모함 겜비어 베이(USS Gambier Bay, CVE-73)은 야마토함의 표적이 되어 다수의 포격에 명중되고 09:07에 전복된다. 그러나 다른 항공모함은 다소간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후퇴할 수 있었다.
스프레이그 함대의 격렬한 반격 때문에 일본 측은 교전 상대가 미해군 주력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구리타 함대 기함이었던 야마토를 비롯하여 여러 함들이 항공 공격과 어뢰에 대한 회피 기동 과정에서 전투에서 이탈하거나 전열이 흐트러지게 된다. 구리타 제독은 모든 함들에 대하여 야마토함이 북진하고 있음을 알리고 함열을 재정비하고자 노력하였다. 레이테만으로 전체 함대의 방향을 돌리기 직전에 구리타는 미해군 항공모함 전단이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수송함보다 전투함과 교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북쪽에 있다던 미해군 항공모함 전단에 대한 보고는 잘못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구리타 함대는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해 후퇴하기로 한다. 이상의 전투 과정에서 구리타 제독은 3척의 중순양함을 잃었으며, 더이상의 교전이 지속되면 손실이 확대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더구나, 후퇴를 결정한 시점에서 구리타 제독의 판단은 오자와 함대가 미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미해군의 실질 전력 대부분을 레이테만 밖으로 끌어내었다는 사실을 모른체 이루어졌다. 일본 함대 사이의 불충분한 의사 소통과 항공 정찰 정보의 부족 때문에 구리타 제독은 작전 계획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리타는 레이테만에 남은 미해군 상륙전력에 대한 공격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레이테만에 남은 미해군 상륙전력은 수상함과 교전할 만한 전력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했다. 구리타 제독은 자신이 미해군 3함대의 주전력과 교전한다고 생각했으며, 곧 포위섬멸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구리타 함대의 남은 전투함은 대부분 탈출에 성공하였다. 뒤늦게 전황을 파악하고 상륙전력을 구출하기 위하여 회항한 홀시 제독의 3함대는 구리타 함대를 놓치게 된다. 나가토함, 하루나함, 공고함은 Taffy 3 전투단의 호위항모에서 발진한 항공전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구리타 함대는 5척의 전함으로 전투를 시작하였으나, 종료 시점에서 전투 가능한 전함은 야마토 뿐이었다.
전세가 기울면서 다끼지로 오니시제독은 '특별 공격대' 출동을 명령한다. 이는 레이테만과 사마르 해안에 위치한 연합군 수상함에 대한 가미카제공격을 의미한다. Taffy 3 전투단 소속 호위항모 세인트로(USS St. Lo, CVE-63)가 가미카제 공격에 이은 내부 폭발로 인하여 침몰한다.
5.5. 엔가뇨곶 해전 (10월 25-26일)
1944년 10월 25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엔가뇨 곶 해전에서 오자와 지사부로(小澤 治三郎) 제독의 "북방군"은 즈이카쿠를 포함한 4척의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미끼 작전을 수행했다. 즈이카쿠는 진주만 공격에 참여한 베테랑 항공모함이었다. 북방군은 항공모함 외에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함으로 건조되어 항공전함으로 개조된 휴가와 이세, 3척의 경순양함, 9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었지만, 탑재 항공기는 108기에 불과했다.
오자와 함대의 위치는 10월 24일 16시 40분까지 파악되지 않았다. 이는 셔먼 제독의 38.3 함대전투단에 책임이 있었다. 반면, 윌리엄 홀시 제독이 이끄는 미 제3함대는 5척의 항공모함, 5척의 경항공모함, 6척의 전함, 다수의 순양함과 구축함을 포함하여 600기에서 1,000기의 항공기를 탑재, 북방군을 압도하는 전력이었다.
10월 25일 새벽, 오자와 제독은 75기의 항공기를 출격시켜 미 제3함대를 공격했으나, 대부분 요격되었고 일부는 루손의 기지로 복귀했다. 밤중에 홀시 제독은 38 기동함대의 지휘권을 미처 제독에게 넘겼고, 미처 제독은 180기로 구성된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08시, 미군 공격대는 일본 해군 전투기 30여 기를 격추하고 공격을 개시, 즈이카쿠, 경항공모함 지토세, 즈이호, 구축함 아키즈키를 침몰시켰다. 경항공모함 지요다와 순양함 다마는 큰 피해를 입었고, 오자와 제독은 기함을 경순양함 오요도로 옮겼다.
같은 날 08시 직후,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니시무라 제독의 남방군과 교전 중이던 킨케이드 제독의 제7함대로부터 긴급 구조 요청이 왔다. 킨케이드 제독은 전함의 포탄 부족을 호소했지만, 홀시 제독은 즉각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 실제 7함대의 탄약 보유량은 부족하지 않았다.
킨케이드 제독의 구조 요청 이후 3시간이 지나서야 홀시 제독은 34 기동함대를 남진시켰으나, 이는 너무 늦은 조치였다. 16시 22분, 홀시 제독은 34.5 함대전투단을 편성하여 구리타 함대를 추적했지만 놓쳤다. 34.5 함대전투단은 구축함 노와키를 격침했다. 11시 15분, 홀시 제독은 38 기동함대를 편성, 드보즈 제독에게 남방군 잔존 병력 소탕을 명령했다. 드보즈 함대는 경순양함 치요다를 격침하고, 구축함 하츠즈키와 교전 끝에 격침시켰다. 오자와 제독은 전함 이세와 휴가에게 드보즈 함대 공격을 명령했지만 실패했다.
23시 10분, 미 해군 잠수함 욜라오(SS-368)가 경순양함 타마를 격침시켰다.
6. 결과 및 영향
레이테만 전투의 결과로 미해군 호위항공모함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작전 실패와 오판으로 인해 Taffy 3의 생존자들에 대한 구조 작업이 늦어졌으며, 결과적으로 피할 수 있던 인명손실이 증가하였다.
전투 기간이 길고 규모가 방대하여, 레이테만 전투에 해당하는 전과로 평가하는데 이견이 있어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숫자는 다음과 같다.
미해군은 6척의 수상전투함을 잃었다.
* 경항공모함 1척: 프린스턴(USS Princeton, CVL-23)
* 호위항공모함 2척: 겜비어베이(USS Gambier Bay, CVE-73), 세인트로(USS St. Lo, CVE-63, 가미가제 공격에 의한 첫 번째 전투함 손실)
* 구축함 2척: 호엘(USS Hoel, DD-533), 존스턴(USS Johnston, DD-557)
* 호위구축함 1척: 사무엘 B.로버트(USS Samuel B. Roberts, DE-413)
* 이외에 4척의 수상함에 피해를 입음
일본군은 26척의 수상전투함을 잃었다.
* 항공모함 1척: 즈이카쿠(미끼로 사용된 북방군의 기함)
* 경항공모함 3척: 즈이호, 치요다, 치토세
* 전함 3척: 무사시(일본 제국 해군 연함 함대 기함), 야마시로(남방군 기함), 후소
* 중순양함 6척: 아타고(중부군 기함), 마야, 스즈야, 초카이, 치쿠마, 모가미
* 경순양함 4척: 노시로, 아부쿠마, 타마, 키누
* 구축함 9척: 노와기, 하야시모, 야마구모, 아사구모, 미치시오, 아키즈키, 하츠즈키, 와카바, 우라나미
레이테만 전투의 결과로 레이테섬에서 미육군 6군단의 교두보가 바다로 부터의 적의 공격에 안전해졌다. 그러나 연합군은 레이테섬의 완전 점령을 위하여 1944년 12월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전투를 진행해야 했다. 이후 레이테 전투는 섬에서의 지상전 뿐 아니라 일본 제국군의 보급과 보충의 저지하고, 해상-공중 우세를 확보하기 위한 여러번의 추가적인 상륙 작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추가적인 상륙작전은 오르모크 만 해전으로 통칭된다.
일본 제국 해군은 함선과 승무원 측면에서 역대 최대의 손실을 입었다. 연합군의 레이테섬 상륙을 저지하지 못했으므로, 필리핀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축소된다. 특히 일본은 전투함과 비행기의 연료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공급 받았고, 포탄과 같은 군수품의 기초 자원의 공급도 제한되므로, 전쟁수행능력에 크게 타격을 받게 된다. 또한, 제국군의 레이테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은 1945년에 연합군에 의한 류큐 제도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레이테만 전투 결과 일본 제국 해군은 대부분의 전투력을 손실하게 된다. 결국, 레이테만 전투와 1945년 일본 패망 사이에 일본 제국 해군에 의하여 수행된 대규모 전투는 텐고 작전 하나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텐고쿠 작전은 자살 공격 임무였고, 결과적으로 야마토함과 남은 호위함들이 미해군 항공 세력에 의하여 파괴된다.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중순양함 오스트레일리아가 10월 21일에 가미카제에 피격된 것이 첫 번째 가미카제 공격이었으며. "특수 공격대"에 의하여 이루어진 조직적인 가미카제 공격에 의하여 사마르 해전이 끝날 무렵인 10월 25일에 호위항모 세인트로가 격침된다.
전투가 끝난 후 한달이 지나서, 미해군은 대중에게 레이테만 전투가 홀시 제독의 작전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선전하였지만, 수년 후에는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무방비로 열어둔 홀시 제독의 오판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4척, 전함 3척, 중순양함 6척 외 다수의 함정을 잃었고, 잔존 함정은 연료가 없는 본토와 연료는 있어도 본격적인 수리 개장이 불가능한 남방으로 분단되어 조직적인 공격 능력을 상실했다. 또한, 본 해전 후 마닐라 만에 모여 있던 함정 중 10월 29일의 공습으로 중순양함 나치가 대파, 11월 5일에 재차 공습을 받아 침몰했다. 마찬가지로 마닐라에 있던 중순양함 구마노, 아오바는 29일의 공습 후 본토로 철수하지만 구마노는 미군기의 공습에 노출되어 침몰, 아오바만이 무사히 귀환했다. 또한, 브루나이에 피퇴한 부대 중에서도, 전함 콩고가 본토로 귀항 중에 미국 잠수함 시라이언에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실제 전과와는 달리 일본군은 미국군에게 일정 수준의 전과를 올렸다고 생각했다. 10월 27일, 군령부는 본 해전에 있어서의 전과 및 피해를 대본영 발표로 제시하고, 아울러 본 해전을 필리핀 해전이라고 칭하는 것을 발표했다. 발표된 전과는 격침·항공모함 8척, 순양함 3척, 구축함 2척, 수송선 4척 이상. 격파·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격추 약 500기였지만, 이는 군령부 제1부가 각 부대의 보고를 집계한 종합 전과와 거의 일치하며, 당시 해군 내부의 인식은 작전이 실패했다는 인식보다는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장의 의견에 대해, 연합함대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군령부 제1과장이었던 야마모토 치카오 대좌의 회상 수기에 따르면, 제1유격부대가 내지로 귀환하여 군령부에 출두했을 때, 제2함대 참모 야마모토 유지 대좌로부터 항공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수상 함정을 돌입시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실시가 어려운지에 대해 다시 한번 보고되었는데
라고, 군령부에서 연합함대 사령부에 지도해 주기를 강력히 요청했다.
결국 레이테 만 해전 후에도, 칸의 항공 지원의 중요성에 대한 무이해(나쁘게 말하면 객관적 근거 없는 정신론, 근성론)는 계속되었고, 1945년 4월부터의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다시 항공 지원 없는 돌입을 입안했고, 레이테 만 해전의 실패는 다시 반복되어 제2함대는 야마토, 야하기 등 6척을 잃고, 약 3,700명의 장병이 사망했다.
일본 측에서는 대체로 사전 준비, 조직 간의 정보 전달, 연계 조정의 실패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적되었으며, 도야마 사부로도 병력 차이 외에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쇼와 천황은 종전 후 "해군은 무모하게 함대를 내보내 비과학적으로 싸워 실패했다"라고 평가했다.
이토 마사노리는 본 해전을 "무리(無理)의 집대성이며, 그리고 무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도리의 증명으로 끝났다"라고 평가했다.
7. 비판 및 논란
윌리엄 홀시 제독은 오자와 지사부로의 미끼 함대를 추격하기 위해 제34기동부대를 북쪽으로 이동시킨 결정과, 토머스 C. 킨케이드 제독이 처음 지원을 요청했을 때 제34기동부대를 분리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미 해군에서는 할시의 행동을 "불스 런(Bull's Run)"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할시의 별명인 "불(Bull)"과 제1차 불런 전투를 빗댄 표현이다. 제1차 불런 전투에서 북군은 형편없는 조직력과 결단력 부족으로 패배했다.
사마르 해전에서 제77.4.3 기동부대 사령관이었던 클리프턴 스프레이그는 할시의 결정과 킨케이드 및 제7함대에 북쪽 측면이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리지 못한 것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어떤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북쪽 측면이 충분한 경고 없이 노출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사무엘 모리슨은 사마르 해전에서 제7함대가 처음으로 지원을 요청했을 때 할시가 제34기동부대를 남쪽으로 돌리지 않은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윌리스 리 제독은 제34기동부대 사령관으로서의 작전 보고서에서 "제34기동부대로 작전하는 동안 적에게 어떠한 전투 피해도 입히거나 입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전투 후 보낸 전문에서, 할시는 북쪽으로 이동한 결정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할시는 또한 제34기동부대를 항공모함 지원 없이 해협을 방어하도록 놔두면 육상 기반 항공기의 공격에 취약해질 것이며, 전함들을 엄호하기 위해 1개의 기동부대를 남겨두면 오자와를 공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향하는 공군력 집중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리슨은 윌리스 리 제독이 전투 후, 제77기동부대의 각 호위 항공모함에는 최대 28대의 항공기가 있었지만, 구리다 다케오의 전통적인 해군 부대(항공 지원 부족)로부터의 해상 함선 보호가 거의 없었기에, 전함들이 항공 엄호 없이 샌버나디노 해협을 방어하는 것에 완전히 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제출된 석사 논문에서 켄트 콜먼 중령은 할시가 체스터 니미츠에게 보고하고 킨케이드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보고하는 제3함대와 제7함대의 지휘 계층 분할이 구리다 다케오의 공격이 거의 성공한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콜먼은 "분리된 미 해군 지휘 체계가 할시와 킨케이드 사이의 통신 및 조정 문제를 증폭시켰다. 이러한 분리된 지휘는 할시가 내린 전술적 결정보다 전투의 진행 방향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했으며, 구리타의 임무가 성공할 뻔하도록 한 미국의 노력의 불화를 초래했다"고 결론 내린다.
제3함대는 이 해전 도중부터 일본 측의 작전대로 미끼인 오자와 함대를 찾아 북상했고, 구리타 함대의 침입을 허용하여 급히 남하했지만, 그 완전한 격파에도 실패했다.
윌리엄 홀시는 24일 밤 단계에서는 구리타 다케오 함대를 격파하고 퇴각시켰다고 믿었지만, 전투 후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나아가는 강력한 수상 전력을 항공 공격만으로 저지하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발언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변명했다. 전후에는 회고록에서 토머스 C. 킨케이드를 비판했기 때문에, 분노한 킨케이드가 이에 반론했고, 이에 편승한 "구경꾼"들 사이에서 레이테 만에서의 홀시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묻는 논쟁이 발발했다. 또한, 상관인 체스터 니미츠는 해전 전에 홀시에게 일본 함대를 격파하라고 지시했었다.
미국 측에서는 이 건에 관해 많은 논의가 벌어졌다. 문제 중 하나는 제3함대가 다양한 임무를 요구받아 목적이 불분명해졌다는 점이 있었다. 칼 솔버그에 따르면, 어니스트 킹이 엄격하게 지휘권을 분할한 것에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니미츠는 "온 세상은 알고 싶어한다"로 제3함대를 구리타 다케오 함대에 대한 무의미한 추격전에 투입한 책임에서인지, 전후에는 눈에 띄는 발언이 없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킨케이드는 제7함대의 기본적인 임무인 양용 작전의 호위와 지원에 의식이 집중되어 있었고, 당시 제3함대가 산베르나디노 해협을 봉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장교들과 달리, 회고록류는 쓰지 않았다.
전시 중에는 억제되었던 홀시에 대한 비판은, 전후에 일본군 측의 사정도 밝혀지면서 점차 격렬해져 갔다. 미국 해사사 연구의 제일인자였던 새뮤얼 모리슨은 전시 중에는 홀시와 친밀했지만, 1950년이 되자 해군 장교들에게 강연에서 산베르나디노 해협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 홀시의 결정을 대실패로 단정했다. 홀시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모리슨에게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모리슨이 지론을 뒤집는 일은 없었고, 자신의 저서인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영어" 제12권에서 "홀시는 그를 북쪽으로 유인하는 일본군의 책략에 말려든 것이며, 사마르 해에서의 간신히 피한 총붕괴는 홀시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라고 분명하게 단정했다. 격노한 홀시는 해군 고위 장교로 승진한 과거의 부하를 이용해 반론하려 했지만, 그 부하는 "모리슨의 평판은 난공불락입니다", "당신의 어떤 일격도, 아무리 이치에 맞더라도, 저 건조물(모리슨의 평판)을 파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보다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홀시에게 만류하도록 설득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나 오키나와 전투 등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투를 종군 기자로 취재하여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군사 평론가 Hanson W. Baldwin영어은, 미국 국내에서의 논의를 본 뒤 아래와 같이 총괄하고 있다。
# 홀시 함대 혹은 제7함대, 또는 양 함대가 산베르나디노 해협을 엄중하게 초계해야 했다.
# 홀시는 북쪽으로 유인되어 산베르나디노 해협을 구리타 다케오 함대에게 열어주었다.
# 구리타 다케오의 소심함, 졸렬함 때문에, 또한 호위 항공모함과 구축함의 용감한 지연 작전 때문에, 일본 중앙 함대의 레이테 만 침입이 저지되었다.
# 설령 구리타 다케오 함대가 레이테의 교두보와 레이테 만의 수송 선단에 포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더라도, 상륙 작전에 약간의 지연을 초래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리고, 홀시가 오자와 함대에 유인된 것에 대해서는, 항공 분야 출신이었던 홀시는 일본의 항공모함 함대야말로 가장 두려운 위험한 함선이라고 믿고 있었고, 오자와 함대의 탑재기가 그렇게 적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오자와 함대를 일본군의 주력이라고 오해하여, 그 격멸이 자신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마리아나 해전에서, 수상 부대 출신인 레이먼드 스프루언스가, 본래의 임무를 사이판 섬 상륙 부대에 대한 지원으로 생각하고, 패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볼드윈은 이 두 지휘관의 대비도 하고 있으며, 홀시는 능동적인 지휘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군 항공모함 함대의 격멸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며, 넬슨 제독과 같은 호탕한 지휘관이지만, 스프루언스와 같은 냉정한 계산과 철저함이 부족했다. 반면 스프루언스는, 홀시와 같은 다이내믹하고 화려한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고, 홀시만큼의 인기와 지명도도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둘 다 각자의 방식과 스타일로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군에 대해서는, 해전사상 가장 복잡한 계획 중 하나를 시도했지만, 그 성공을 위해서는 완벽한 타이밍, 뛰어난 통신 연락과 희생적 용기가 필요했지만, 착상의 대담함에 비해 실시는 졸렬했다고 지적, 실시의 졸렬함의 상세한 내용으로는, 통신 연락의 불비, 항공 부대의 원조의 결여, 해공 작전의 조정 결여, 타이밍에서의 끔찍한 결여, 졸렬한 판단, 그리고 작전을 지휘한 4명의 주요 지휘관 중에서, 진정으로 임무를 완수한 것은 미끼가 된 오자와 뿐이고 다른 3명은 엉뚱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꽤나 엄격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그리고, 레이테 해전은, 거포의 대형 함선이 주요 역할을 연기한 마지막 해전이 되었고, 전함에게 웅대한 고별사를 읽어주었다고 동시에 일본의 운명을 봉하고, 태평양 전쟁의 최종 페이지를 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숨을 죽이고 해전의 경과를 지켜봤지만, 구리타 다케오 함대가 산베르나디노 해협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자 맥아더 사령부에는 절망감이 만연했다고 한다. 맥아더의 막료 중 한 명이었던 선임 해군 참모 레이 터백 대령은 "우리는 탄환도 다 쓴 상태와 같고, 어뢰도 써버렸으며, 연료는 얼마 남지 않았고, 상황은 절망적이다"라고 당일 일기에 적었다。구리타 다케오 함대는 반전했고 맥아더의 위기는 사라졌지만, 그날 밤 막료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맥아더의 막료들은 자신들을 위기에 빠뜨린 홀시에 대한 비난을 시작했고, "멍청이"나 "저런 엉터리 홀시"등을 욕했지만, 그걸 듣고 있던 맥아더는 격노하여 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며 큰 소리로 "블루(홀시의 별명)는 이제 그만 둬라. 그는 내게는 아직 용감한 제독이다"라고 옹호했다。맥아더는 전후에 "절박해진 일본군은, 아끼던 대함대를 내보내, 레이테 침입을 격퇴하고, 필리핀 방위 태세를 지켜내려는 일대 도박을 벌였다. 미국군 부대를 레이테 해안에서 몰아내려고 한 일본군의 결의는, 실제로 성공의 문턱까지 갔다", "도요다 제독이 세운 계획은, 훌륭한 착상에 기초한 훌륭하고 큰 규모의 것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휘 하에 있던 제7함대 사령관 킨케이드에게 "나의 제7함대는, 이 해전 이전에도 이후에도 일관되게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때도 그랬으며, 킨케이드 제독은 이 전투에서 미국 해전사의 위대한 지휘자들 사이에 이름을 올렸다"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한편, 해전 중에 발생한 미국군 측의 문제에 대해서는, 동일 작전의 지휘 계통의 분단, 통신 불통・지연을 지적, 그 책임은 워싱턴에 있다고 단정했다。
태피 3의 사령관 클리프턴 스프라그는 "구리타 다케오가 반전을 결정한 이유는 단순했고, 구리타 다케오는 피해가 계속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을 뿐이다"라고 간주했다。또한, 스프라그는 사마르 해전을 회상하며 "적 주력 및 포위 태세를 취했던 적의 경량 함정이, 우리 기동 부대의 전 함선을 완전히 말살하지 못했던 원인은, 우리가 능숙하게 연막을 치고, 어뢰로 반격하고, 포격과 뇌격과 공중 소사로 끊임없이 적을 괴롭히고, 적절한 함대 조작을 행한 것, 그리고 분명히 전능하신 신이 우리를 편애해 준 것에 있다"라고 총괄했다。스프라그는 구리타 다케오 함대와의 교전 후에도, 가미카제 특별공격대로부터 큰 손해를 입어, 이 해전의 미국군 중에서 가장 수난을 겪은 함대가 되었지만, 스프라그는 이 해전을 "우리는 그 때까지 끔찍한 일을 겪었고, 호위 부대가 있든 없든,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
패배한 일본에서는 종전 후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출판 기록을 통해 드러난다. 일본 측에서는 논의의 대부분이 구리타 함대의 행동에 집중되었으며, 종전 후에는 비판, 옹호, 중간적인 의견 등 다양한 견해가 번갈아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관이나 실증성과 관련된 문제로, 탄약 문제, 당시 현장 지휘관의 상황 인식에 대해서는 현재에도 새로운 자료에 주목하며, 기존의 설이 속설로 비판받기도 한다.
공식 자료로는 일본과 미국의 전투 기록(전투 상세 보고서) 등 1차 자료, 해전 후에 미군 내에서 이루어진 일부 지휘관에 대한 진술 기록, 종전 직후 GHQ와 제2복원성 등에서 실시된 일본 측 지휘관의 진술 기록, 그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한 공표된 전사(戰史) (복수)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장교부터 사병, 민간 선원에 이르기까지 일본 측에서 개인적으로 이 전투의 기록을 남긴 자들이 많이 확인되었으며, 자비 출판 등의 사례도 많다. 한편, 교전국인 미국 측에도 많은 사료가 존재하며, 그중에는 번역된 것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수요와 가격 측면에서 출판되어도 널리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2000년대에 들어서 처음 발굴, 번역 등이 이루어져 간행되기도 한다.
레이테 해전 당시 해군이 각 대형 수상함에 탑재한 가칭 2호 전파탐신의 2형 개4는 전함 정도의 목표라면 야간 15,000m, 주간 25,000m(34,000~35,000m 설도 있다)의 포착 거리가 있어, 야마토를 시작으로 하는 전함군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더 사격을 실시하고 있다. 그 성능은 "그럭저럭 신뢰하고 사용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하지만 각 함의 평가에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 해군에서는 레이더 사격이 실용 가능한 수준에 이른 반면, 일본 해군에서는 레이더 기술이 뒤떨어져 그 성능이 열악했다고 한다. 반면, 하쓰즈키나 니시무라 부대에 대한 레이더 사격(아래)을 예로 들어, 미국 해군의 레이더 사격도 명중률의 높이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전자의 경우, 하쓰즈키 단함 격침에 순양함 4척을 포함한 13척의 함정으로 2시간이나 걸렸고, 순양함만으로 주포탄 1,200발을 소비했다는 점에서 레이더 사격의 정확성을 의심하고 있다.
만약 구리다 함대가 반전하지 않고 레이테 만으로의 돌입을 계속했다면, 니시무라 부대를 격멸하고 북상하는 제77임무부대 제2군(Task Group 77.2), 통칭 '올덴도르프 함대'와 레이테 만 입구 앞에서 교전했을 것이라는 점은 많은 관계자, 연구가, 작가가 인정하고 있다. 그 경우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올덴도르프 함대 포탄의 잔량 문제나, 전함 야마토의 성능에 대한 과도한 평가 때문에, 구리다 함대가 쉽게 만 입구에 돌입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그 정설을 뒤집는 자료나 조사 결과도 나오고 있다.
"레이테 돌입을 실행하면 탄약이 부족했던 올덴도르프 함대를 격멸할 수 있었다"는 뿌리 깊은 통설이 있다. 예를 들어, 한도 가즈토시는 "상대에게 탄약이 없으니, 무서울 것이 전혀 없다"고 발언했고, 타니 미츠타로는 "포탄 잔량이 부족했다. 제7함대(올덴도르프 함대)는 간단히 격파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확실히,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 참가한 올덴도르프 함대는 니시무라 부대를 추격하고 있었고, 이를 되돌리는 데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탄약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수신한 스프레이그의 무전을 읽은 킨케이드 제독은 7시 25분에 할제이 제독에게 "제7함대는 탄약이 부족하다"고 통신을 보냈다。
한편, 이러한 설에 대해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하며 반증하고 있다.
# 부족했다고 여겨지는 올덴도르프 함대의 포탄 수량이지만, 중핵을 이루는 전함에 관해서는 한 번의 회전을 치를 정도의 분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 수리가오 해협 해전 전
# 6척 합계 철갑탄 1,637발・고성능탄 1,602발
#* 수리가오 해협 해전 후
# 6척 합계: 철갑탄 1,352발・고성능탄 1,513발
# 순양함의 포탄에 대해서는 각 함의 각 포당 50~80발의 철갑탄이 남아 있었다
# 수 시간 후에 도착한 탄약 보급함으로부터 전함 부대는 철갑탄 48발, 고성능탄 1,000발을 보급받았으며, 다른 함정에도 보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 구리타 함대를 비롯한 일본 측은 후세의 평론가들과 달리 올덴도르프 함대의 탄약 상황에 대해 알 수 없으므로, "무서울 것이 전혀 없다"는 상대로 인식할 수 없다.
# 올덴도르프 함대는 구리타 함대에 대해 전함에서 1.5배, 순양함에서 2배 이상, 구축함에서 3배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전함 부대만 보더라도 성능적으로 우세한 것은 야마토뿐이며, 나가토는 메릴랜드, 웨스트 버지니아와 동등하고, 콩고, 하루나는 펜실베이니아, 테네시, 캘리포니아보다 전함으로서의 성능이 떨어진다. 순양함과 구축함은 수적으로 압도당한다. 만약 쌍방의 상태가 만전이었다고 해도, 이 전력 차이로는 일본이 압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전함과 순양함과의 대함 전투에 필요한 철갑탄은 일정 수가 남아 있었고, 유탄은 장갑 관통력은 없지만, 측거기 등, 비장갑 부분을 파괴하여 전투력을 빼앗을 수 있으므로, 현재는 올덴도르프 함대의 전함이 구리타 함대에 맞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 여겨지고 있다。
한편, 수뢰전의 요체인 구축함 27척에 대해서는, 수리가오 해협 해전 전에 5인치 포탄이 정수의 20퍼센트밖에 없었다고 한다。한편 어뢰는 지금까지 다 소모했다고 생각되었지만, 미군의 전투 보고서에 따르면 탑재 어뢰를 전부 발사한 것은 3척뿐, 잔수 1발의 함도 3척으로, 총 6척이 "거의 소모된 상태"이며, 그 외의 함은 각 함당 5 - 10발의 어뢰를 남겨두었던 것이 판명되어, 이 설도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술리가오 해협 해전 당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했다는 의견도 있다.
* 웨스트 버지니아(USS West Virginia (BB-48)): 사격 중 전방 Mk.8 레이더 고장. 1, 3번 포탑 장탄기 고장. 1, 3번 포탑에서 각각 한 문씩 발화 오류로 이후 사격 불능.
* 메릴랜드(USS Maryland (BB-46)): 레이더 목표 식별 불가, 웨스트 버지니아의 물기둥(스크린 상의 허상)을 목표로 사격, 효과 없음.
* 캘리포니아(USS California (BB-44)): 대부분의 사격은 9문으로 실시. 1번 포탑에서 장약 파손. 2, 4번 포탑에서 발화 오류로 포탑 고장, 이후 사격 불능.
* 미시시피(USS Mississippi (BB-41)): 레이더 목표 식별 불가. 일제 사격으로 종료.
* 펜실베이니아(USS Pennsylvania (BB-38)): 목표 식별 불가, 사격 불능.
이 중 웨스트 버지니아의 전방 레이더 고장은 일시적인 것으로, 신속하게 후방 레이더로 전환되었고, 곧 수리되었기에 포격에 지장은 없었다. 메릴랜드, 미시시피, 펜실베이니아 3척이 목표를 식별하지 못한 원인은 고장 등이 아니라, 탑재했던 레이더가 구식 Mark 3이었고, 원래 그런 능력이 없었을 뿐이며, 트러블 등은 아니었다. 효과적으로 포격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신식 Mark 8을 탑재한 웨스트 버지니아, 캘리포니아, 테네시(USS Tennessee (BB-43)) 3척이었다.
전함 부대에 의한 사격은 탄수 279발 중 명중탄수 2발로 (명중률 0.68%) 레이더 사격이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USS West Virginia)의 전투 보고서에서는 처음과 그 다음의 제사에서 각각 여러 발의 명중탄을 기록하고 있다. 동 보고서에서는 13회 실시된 제사 모두가 목표를 협차했고, 1·2·6번째 제사에서 명중이 확인되었다.
미일 모두 공산 사격이었던 당시의 포격에서, 초탄부터 협차가 되는 것은 매우 우수한 사격이며, 동 보고서도 "매우 효과적(very effective)"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보고에서는 웨스트 버지니아(USS West Virginia)만으로 명중탄을 3발로 보고하고 있으며, "전함 부대 전체의 주포탄 명중 수가 2발"이라는 이야기는 엉터리임이 명백하며, 명중탄의 유무는 별개로 하더라도 웨스트 버지니아가 모든 제사에서 협차에 성공한 사실에서 보더라도 미국 전함 부대의 사격은 양호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당시의 레이더 사격은 레이더는 어디까지나 기존의 포격 절차에서 "적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이며, 조준 등은 기존과 같은 방식이다. 따라서 레이더 사격이라고 해서 기존의 사격과 명중률에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공산 사격"이라는 것 자체는 미일 해군 모두 같으며, 협차의 상태가 만들어지면, 그 후 그것을 유지하여 명중할 때까지 계속 쏘는 "운에 맡기는" 것이다. 당시 레이더 사격의 이점은 "주야 관계없이", "날씨에 그다지 좌우되지 않고", "시계 상황도 관계없이"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실제로 웨스트 버지니아(USS West Virginia)는 야마시로(戦艦山城)를 향해, 야간이면서 초탄부터 협차의 상태를 만들고, 이후에도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목표의 위치 파악이 극히 정확했다는 증거이며, 레이더 관측의 성과가 컸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만약 구리타 함대가 반전하지 않고 레이테 만구 앞에서 올텐도르프 함대(Orterndorf fleet)와 조우했을 경우, 신식 레이더를 탑재한 전함 3척만 효과적으로 포격을 할 수 있었던 수리가오 해협(Surigao Strait)과는 달리, 구식 레이더를 탑재한 3척도 광학 측거에 의한 측거를 실시하여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미국 측의 포격전에서의 전력 저하는 그다지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구리타 함대는 태피 1·2(Taffy 1,2) 등의 항공기의 공습을 받으면서 포전을 벌이게 되므로, 더욱 불리함을 입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 외의 점으로는, 사마르 해전 등 다른 전투에서는 미국 구축함대는 높은 전의를 보였으며, 일본 측에서 문제가 되는 연료의 면도 로지스틱스는 만전인 경우가 있다. 종래의 연구에서도 포탄에 대해 언급한 문헌에서는 일본 함대의 압승을 예측하는 것은 없다.
반전 시의 구리타 함대의 상태에 관해서는, 미국 측보다 마이너스 요소가 많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 장병의 피로:구리타 함대는 작전 개시 이래 거의 3주야를 불면불휴의 긴장 상태로 보냈고, 구리타 이하 장병은 피로와 소모의 극에 달해 있었다。 그 결과, 이미 사마르 해전 시점에서, 호위 항공모함과 정규 항공모함, 적의 연막과 직격탄을 식별조차 할 수 없는, 조급해져 정신이 팔려 기량이나 명중률은 고사하고 그 이전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대로 레이테 만에 돌입했을 경우, 장병이 더욱 피로·소모되어, 더욱 능력이 저하된 상태로 적과 교전하게 된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 포탄 어뢰 연료 잔량:포탄 잔량에 대해서는 미국 측보다 심각한 상태였다. 전함에는 포탄이 남아 있었지만, 다른 함정은 포탄이나 어뢰를 꽤 소비하고 있었으며, 중순양함 하고로모는 2번 포탑을 잃었고, 4번 포탑은 탄약이 다 떨어졌으며, 건전한 3개의 포탑으로 남은 포탄의 총합은 125발뿐이었다. 도네도 4할 가까운 포탄(408발)을 소비했다。 어뢰도 하고로모는 전부 발사했고 도네도 4발을 발사했다。 수뢰 부대에서는, 경순양함 야하기는 어뢰 7발을 발사(그 중 1발은 불발로 인한 투기), 제17구축대도 야하기의 "발사 본수 4토스" 명령에 따라 동시각에 어뢰 16발을 발사했다고 보고。 그 중 이소카제는 어뢰 8발을 발사했다고 동함 수뢰장이 기록하고 있으며, 제10전대의 발사 어뢰 수는 27발이다. 남은 어뢰는 야하기 9발(그 중 3발은 기총 소사로 사용 불능)・제17구축대 28발(실수)。 제2수뢰전대의 어뢰 잔량은 제10전대보다 많다. 또한 구축함 등 항속력이 짧은 함선에서는 연료가 감소하고 있으며, 전속력으로의 전투 행동은 어려워지고 있으며, 귀로 구리타 함대는 연료에 여유가 있는 함선에서 연료를 나누면서, 함대를 분할하여 브루나이로 귀환했다.
# 그 외의 장비·능력에 관하여:곤고는 7시가 넘어 적 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의해 전루 최상부에 설치된 측거기가 파괴되었으며, 이후 포탑 측거기에 의한 사격이 되었기 때문에, 포격전에서 큰 불리함을 안게 되었다。 하루나는 마리아나 해전에서의 손상 수리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26노트 이상은 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제7함대의 전함군보다는 우속이지만, 제7함대의 전함군과 거의 다름없는 속력밖에 낼 수 없는 호위 항공모함의 추격에서도 지장이 발생했다。 이 외에도, 야하기는 24일의 공습으로 함수 우현을 파손, 30노트 이상 내면 파공이 확대되어 위험한 상태였지만, 사마르 해전에서는 무리를 해서 32노트를 내고 있는 상태였다。 하고로모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2번 포탑이 피탄되어 사용 불가 상태였고, 구축함에도 피탄 손상된 함이 여러 척 있는 상태였다.
# 지나친 성능 은닉:수상 함정의 능력을 활용한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