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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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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인도 관계는 무역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해상 교역이 활발해졌다. 로마는 인도로부터 사치품을 수입하고, 인도는 로마의 금을 얻는 등 무역 불균형이 발생했다. 주요 문헌으로는 《에리트라해 안내기》,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등이 있으며, 아리카메두, 무지리스 등 남인도 지역에서 로마 유물이 발견되어 교역의 증거를 보여준다. 또한, 로마 황제 시대의 금화가 발견되어 로마와 인도 간의 활발한 교역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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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도 관계
지도
개요
관계 시기기원전 4세기 ~ 서기 5세기
관련 국가로마
인도
주요 교역품향신료
직물
보석
후추
귀금속
유리 제품
와인
올리브 오일
역사적 맥락
기원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우리아 제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
초기 교류메가스테네스의 마우리아 궁정 방문 (기원전 302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인도 사절 파견 (기원전 3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인도 왕국의 로마 방문 및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로마 제국과 남인도 판디아 왕조와의 사절 교환
제국 시대트라야누스 황제의 인도 원정 계획
인도 상인의 로마 제국 내 활동
로마 제국의 인도양 무역 독점 시도
쇠퇴 및 종말5세기 이후 로마 제국의 쇠퇴와 함께 관계 약화
주요 교역 중심지
로마로마
폼페이
오스티아
알렉산드리아
인도무지리스
아리카메두
바라나시
타밀 지방
푸하르
문화적 영향
로마의 영향로마 상품과 예술품의 인도 전파, 인도 미술에 로마 양식의 영향
인도의 영향불교의 로마 전파 (일부 학설)
인도 철학과 종교의 서양 사상에 대한 영향
고고학적 증거
로마 유물인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로마 주화, 도자기, 유리 제품 등
인도 유물로마에서 발견되는 인도 상아, 향신료, 직물 등
추가 정보
관련 인물플리니우스
스트라본
프톨레마이오스
메가스테네스
참고 문헌"The 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 (알려지지 않은 선원의 항해기)
고대 로마와 인도의 역사 기록

2. 초기 접촉

인도-로마 관계의 증거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의 초상이 새겨진 쿠샨 왕조의 반지.


인도-로마 관계는 주로 무역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내륙의 캐러밴을 통한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직접적인 해상 교역으로 발전하였다.

스트라본은 그의 저서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장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이집트 총독으로 있던 시절(기원전 26년–24년)에 매년 120척에 달하는 배들이 미오스 호르모스에서 인도로 항해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 소수의 배만이 교역에 나섰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증가한 수치였다. 스트라본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쨌든, 갈루스가 이집트의 프라이펙투스이던 시절에, 나는 그와 함께 나일강을 타고 내려가 저 멀리 아스완악숨 왕국의 국경까지 이르렀고, 무려 120척이나 되는 선박들이 미오스 호르모스에서 인도 아대륙까지 항해하고 있었음 알게 되었는데, 불과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있던 시절에는, 아주 소수의 선박만이 항해에 나서 인도 상인들에게 화물을 전하였다고 한다."[23]

아우구스투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관리하던 홍해 지역 항구와 홍해에서 나일강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유지했으며, 이곳을 통해 들어온 상품들은 펠루시움과 알렉산드리아 항구 등으로 운송되었다. 그는 또한 해적 소탕을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홍해 순찰 함대를 대체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6년기원전 20년에 인도의 왕들로부터 사절단을 맞이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가 캐리(Carey)는 "사절단의 임무는 무의미한 찬사 어구를 교환하는 것 그 이상에 의도를 분명히 두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1]

카시우스 디오는 그의 저서 《로마사》 54.9에서 인도 사절단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호랑이를 비롯한 여러 선물을 바치며 동맹을 맺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 동물을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이 처음 본 것이라고 언급했다.[3]

내륙 교역로는 쿠샨 제국이 서기 1세기 동안 북인도로, 서기 2세기 초에는 갠지스강 유역으로 확장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4] 로마 시대에 여러 인도 사절단이 로마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라틴어 문헌에는 최소 네 개의 사절단이 언급된다.

출발지동반 인물/특이사항전달품비고
푸루 (젤룸강과 비아스강 사이 지역)뱀, 무지개꿩, 호랑이, 그리스어로 쓰인 서신[5]
브로치게르마노스라는 불교 승려[5]
체라무지리스(크란가노르 근처)에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졌다고 보고.[5]
판디아귀금속, 진주, 코끼리[5]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인도와 로마 간의 교역 관계는 크게 성장했지만, 무역 수지는 초기부터 인도 측에 유리했으며, 그 결과 로마의 금이 인도로 많이 유출되었다.[5]

2. 1. 히팔로스의 발견

아우구스투스 시대 혹은 그 이전에 히팔로스라는 이름의 선장은 여름 몬순을 이용하여 아덴에서 출발하고 겨울의 무역풍을 타고 돌아오는, 비교적 안전하고 정기적인 인도 항해법을 "발견" (혹은 서방 세계에 알렸다). 이 항로는 기원전 1세기로마가 아덴을 해군력으로 점령하면서 더욱 안전하고 편리해졌다.[2]

3. 주요 문헌 기록



인도와 로마의 관계는 주로 무역을 통해 형성되었다. 로마의 인도 무역은 처음에는 내륙의 캐러밴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직접적인 해상 교역으로 발전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그의 저서 《지리지》(II.5.12)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장악한 직후,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이집트 총독으로 있던 시절(기원전 26년–24년)에 매년 120척에 달하는 배들이 미오스 호르모스 항구에서 인도로 항해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이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소수의 선박만이 인도와 교역했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증가한 수치이다. 스트라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무튼, 갈루스가 이집트 총독이었을 때, 나는 그를 따라 나일강시에네에티오피아 국경까지 거슬러 올라갔는데, 미오스 호르모스에서 인도까지 120척이나 되는 배가 항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전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는 겨우 몇 척만이 항해를 감행하여 인도 상품을 거래했을 뿐이다."[23] [https://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trabo/2E1*.html]

아우구스투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관리하던 홍해 항구와 나일강 연결망을 유지하여 상품이 펠루시움과 알렉산드리아 등 주요 항구로 운송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해적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홍해의 순찰 함대를 강화했다. 그는 기원전 26년과 20년에 인도의 왕들로부터 사절단을 맞이했는데, 비록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역사가 캐리(Carey)는 이 사절단 파견이 단순한 외교적 수사 교환 이상의 목적을 가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1]

아우구스투스 시대 또는 그 이전에 히팔루스라는 이름의 선장이 계절풍을 이용하여 아덴에서 인도로 가는 비교적 안전하고 정기적인 항로를 발견했거나 서방 세계에 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항로는 여름 계절풍을 타고 인도로 갔다가 겨울의 무역풍을 타고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가 아덴을 해군력으로 공격한 이후 이 항로는 더욱 안전하고 편리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2]

로마의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그의 저서 《로마사》(54.9)에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인도 사절단이 로마를 방문하여 호랑이를 비롯한 여러 선물을 바치고 동맹을 맺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로마인들이 이때 호랑이를 처음 보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많은 사절단들이 그(아우구스투스)에게 찾아왔고, 이전에 동맹의 조약을 맺을 것을 뜻을 보이던 인도인들이 로마인, 그리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로 처음 본 호랑이, 짐승 등 선물을 가져와 동맹을 맺었다. . . .[3]

한편, 육로를 통한 교역은 서기 1세기경 쿠샨 왕조가 북인도를 장악하고 2세기 초에는 갠지스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4]

>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적어도 여러 사절단이 육로를 통해 로마에 도착했다. 라틴 문헌에는 적어도 4개의 사절단이 언급되어 있는데, 1) 푸루 지방(젤룸강과 비아스강 사이)에서 온 사절단은 로마로 뱀, 모날, 호랑이와 그리스어로 쓰인 편지를 가져왔고, 2) 브로치에서 온 사절단은 게르마노스라는 불교 승려를 동반했으며, 3) 체라에서 온 사절단이다. 무지리스 (크란가노르 근처)에는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사원이 세워졌다고 로마에 보고되었고, 4) 판디아에서 온 사절단은 귀석, 진주, 코끼리를 가져왔다. 우리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인도와 로마 간의 상업 관계가 성장했지만, 이 무역에서는 처음부터 인도가 유리했고, 그 결과 로마의 금이 이 나라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5]

3. 1. 에리트라해 안내기

에리트라해 안내기는 신원 미상의 그리스 항해사가 작성한 문헌으로, 작성 시기는 서기 40년과 70년 사이, 혹은 더 좁혀 서기 40년과 50년 사이로 추정된다.[28][29][6][7]

이 안내기는 오늘날 카라치 인근 인더스강 하류의 바르바리콘 항구에서 시작하여 인도 아대륙 남쪽 끝을 지나, 현재의 콜카타 근처 갠지스강 하류에 있는 항구들까지 소개하고 있다. 인도 서쪽 해안의 항구들에 대해서는 정보가 풍부하게 기록된 반면, 동쪽 해안 항구들에 대해서는 정치적 상황 등 구체적인 정보가 거의 없는데,[30][8] 이는 저자가 해당 지역을 직접 방문하지 않았음을 시사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안내기는 당시 서방 상선들이 일반적으로 인도 대륙 남쪽 끝 너머로는 항해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이유로는 인도와 스리랑카(안내기에서는 팔라이시문두 또는 타프로바네로 언급됨) 북쪽 끝 사이 해협의 수심이 얕아 대형 선박의 통행이 어려웠고, 스리랑카 섬을 돌아가는 항로가 너무 길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31][9] 이러한 지리적, 시간적 제약 때문에 이집트로 돌아가는 데 적합한 계절풍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야 했고, 따라서 인도 남단 너머의 무역은 현지 선박들에게 맡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3. 2. 플리니우스의 기록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인도 락슈미 상. 서기 1세기경 로마와 인도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서기 23년–79년), 일반적으로 대 플리니우스로 알려진 그는 서기 77년경에 《박물지》(Naturalis Historialat)를 저술했다. 이 책은 고대 로마와 인도 간의 무역에 관해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플리니우스는 인도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으며, 비록 모든 내용이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기록은 당시 로마에 인도 문화와 무역이 얼마나 알려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플리니우스는 특히 인도의 사치품에 주목했다. 그는 "산호는 인도인들에게 인도산 진주만큼이나 높이 평가받는다"고 기록했다. 그는 홍해에서도 산호가 발견되지만 색이 어둡고, 가장 귀한 산호는 스토에카데스 제도 주변의 갈리아 만, 이올리아 제도 주변의 시칠리아 만 등지에서 발견된다고 언급했다. 인도인들이 산호를 귀하게 여긴 이유에 대해, 플리니우스는 "인도 점술가들과 예언가들은 산호가 위험을 물리치는 부적으로서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이유로 인도인들은 미적 이유와 종교적 면에서 산호를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과거 골족이 칼, 방패, 투구를 장식하는 데 산호를 사용했지만, 로마 시대에는 그 가치가 높아져 희귀해졌다고 덧붙였다.[10]

플리니우스는 로마의 동방 무역 규모가 연간 약 1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이 수치는 당시 화폐 가치만으로는 과장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무역의 총 가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면 상당히 신빙성 있는 규모로 볼 수 있다. 그는 구체적인 예시로 무지리스(현재 남인도체라 왕조 지역)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한 화물선에 실린 나르드(방향성 발삼) 약 317.51kg~약 771.11kg, 상아 약 2131.88kg 이상, 직물 약 약 358.34kg의 가치가 총 131 탈란트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이집트의 최고급 농지 2400acre를 살 수 있는 금액이라고 기록했다. 플리니우스는 평균적인 로마 화물선이 약 150개의 유사한 탁송물을 실을 수 있었다고 언급하며, 이러한 막대한 이익 때문에 로마 정부가 인도와의 무역을 장려하고 홍해의 레우케 코메와 같은 항구에서 인도 상품에 25%의 세금을 부과했다고 설명했다.[11]

4. 로마 제국의 확장과 교역



로마와 인도의 관계는 주로 무역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육로 대상로를 통해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직접적인 해상 무역로가 열렸다.

스트라보의 기록(II.5.12)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장악한 직후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이집트 총독으로 재임하던 시기(기원전 26–24년)에는 매년 최대 120척의 배가 홍해의 미오스 호르모스 항구에서 인도로 출항했다고 한다. 이는 이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소수의 배만이 인도 상품을 거래했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증가한 수치였다.[1] 아우구스투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사용하던 홍해 항구와 나일강 연결로를 유지하여 상품 운송을 원활하게 했으며,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순찰 함대를 운영했다. 그는 기원전 26년과 20년에 인도 왕들로부터 사절단을 맞이했는데,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를 넘어 실질적인 교류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카시우스 디오 역시 그의 저서 ''로마사''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인도 사절단으로부터 호랑이를 포함한 선물을 받았다고 기록했다.[3]

기원전 1세기경, 히팔루스라는 이름의 선장이 몬순 바람을 이용하여 아덴에서 인도로 가는 안전하고 정기적인 항해법을 발견(또는 서방 세계에 알림)하면서 해상 교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로마가 아덴을 해군 급습으로 점령하면서 이 항로는 더욱 안전하고 편리해졌다.[2]

육로 교역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1세기경 쿠샨 제국이 북인도를 장악하고 2세기 초 갠지스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육상 교역로를 통한 인도 접근이 더욱 용이해졌다.[4]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푸루 지방, 브로치, 체라 왕조, 판디아 왕국 등 여러 인도 지역에서 사절단이 육로를 통해 로마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5]

이후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서기 98-117년)에 로마 제국은 더욱 확장되었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를 격퇴하고 티그리스강을 따라 남하하여 페르시아만 북쪽 해안까지 진출했다.[13] 이러한 군사적 성공과 영토 확장은 인도와의 교역로를 더욱 안정시키고 교류를 촉진했다.[14]

4. 1. 트라야누스 시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다키아인들을 패배시키고 서기 105년경에는 페트라를 중심으로 한 나바테아의 아랍인들을 병합하였다. 로마로 돌아온 뒤 그는 여러 지역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했는데, 여기에는 인도 지역의 사절단도 포함되었다.

"...신디족 (인더스강 유역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야만족들로부터 몹시나 많은 사절단들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123일간의 구경거리를 열었으며, 이 기간에 야생 동물과 길들여진 짐승들을 포함해 대략 1만 1천 마리가 도살되었고, 1만 명의 검투사들이 경기를 치렀다."[34]


이후 트라야누스는 동방으로 눈을 돌려 파르티아를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다. 그는 115년에서 116년 사이에 파르티아 세력을 격퇴하고 티그리스강을 따라 남하하여 페르시아만 북쪽 해안까지 도달하였다.[35] 로마 군대가 파르티아를 제압하고 페르시아만에 이르자, 승리한 임페라토르 트라야누스는 과거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북서부 지역까지 진군했던 것처럼 원정을 이어가고 싶어 했으나, 당시 그의 나이가 많아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36] 이러한 동방 원정은 결과적으로 인도와의 교역로 확보 및 확장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5. 후대 문헌 및 기록

'포이팅거 지도'에 표시된 인도 남단 인근의 무지리스.


4세기 또는 5세기 초에 제작된 세계 지도의 중세 사본인 '포이팅거 지도'에는 인도 남서 해안의 주요 교역항 무지리스에 '아우구스투스 신전'이 표시되어 있다.[37][15] 이는 당시 작성된 대리인 간의 대출 계약서나 《에리트레아 해 안내기》의 기록과 더불어, 해당 지역에 로마인 정착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38][16]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년-337년) 시대에는 '동방의 인도인들'에게서 온 사절단이 로마 궁정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9][17] 서기 361년 율리아누스 황제 때에도 몰디브스리랑카 등 인도 지역에서 온 사절단이 로마를 찾았다는 기록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저술에 나타난다.[40][18] 이후 6세기 중반의 역사가 요안니스 마랄라스는 서기 530년에 인도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되었다고 기록하였다.[39][17] 이러한 기록들은 로마 제국 후기에도 인도와의 교류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5. 1.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

콘스탄티누스 1세의 궁정에는 '동방의 인도인들'로부터 온 사절단이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그의 저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서 이 사절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7]

"동방의 인도인 사절단이 선물을 가져왔다. . . . 그들은 그의 주권이 그들의 바다까지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시로 왕(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제시했다. 그들은 또한 인도 군주들이 그를 그들의 독재자이자 왕으로 인정하는 표시로 그의 명예를 기리는 그림과 조각상을 봉헌했다고 말했다."[17]


이 기록은 당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멀리 인도에까지 인식되고 있었으며, 인도 지역의 통치자들이 로마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음을 보여준다.

5. 2.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

서기 361년, 율리아누스 시대에도 인도에서 사절단이 로마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모든 곳에서 온 사절단이 그(361년의 율리아누스)에게 몰려들었고, 인도 민족은 디비 (몰디브)와 세렌디비 (스리랑카)에서 온 선물을 가지고 최고의 사람들을 보내는 데 열심을 다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역사》 XXII.vii.10.[18]

5. 3. 6세기 기록

요안니스 마랄라스(491년경–578년)는 그의 기록 477쪽에 서기 530년에 인도의 사절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졌다고 기록하였다.[39]

6. 고고학적 증거

아리카메두 비람파트남에서 발견된 이탈리아 아레초 제작 로마 시대 도자기 조각 (서기 1세기).


이집트 베레니케에서 발견된 베레니케 붓다


인도 아대륙로마의 존재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는 주로 남인도 지역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아리카메두와 무지리스가 있다.

아리카메두는 로마와의 주요 교역항이었으며, 로마 도자기 제작소 표시가 있는 암포라 등 다양한 로마 유물이 발견되어 고대 타밀 지역과 로마 간의 활발했던 교역 관계를 뒷받침한다. 케랄라 지역의 무지리스 역시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최근 파타남 마을에서 대량의 로마 주화와 암포라 조각들이 발견되어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41][19]

또한, 이집트의 항구 도시 베레니케에서는 서기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 양식의 불상인 '베레니케 붓다'가 발견되어, 두 지역 간의 문화 교류 가능성을 시사한다.[42][20] 이 외에도 쿠샨 제국 시대 유물 중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황후 율리아 돔나의 초상이 새겨진 반지가 발견되는 등, 다양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로마와 인도 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6. 1. 아리카메두 유적



인도 아대륙로마의 존재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는 남인도 지역, 특히 아리카메두 유적에서 발견된다.

아리카메두는 원래 타밀족의 어촌 마을이었으나, 촐라 시대에는 구슬을 만들어 로마 상인들과 교역하는 주요 항구로 발전했다. 이 항구는 로마인들이 서기 5세기에 떠날 때까지 수세기 동안 번성했다.

이곳에서는 VIBII, CAMURI, ITTA 등 로마 도자기 제작소의 표시가 새겨진 다수의 암포라를 포함하여 다양한 로마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타밀 나두, 케랄라, 스리랑카 지역을 아우르는 고대 타밀 지역과 로마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고고학적 기록이 풍부한 또 다른 중요한 장소로는 케랄라 지역의 무지리스가 있다. 무지리스는 체라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 타밀라캄 지역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다. 파타남 마을에서 대량의 동전과 수많은 암포라 조각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고대 무역항 무지리스의 유력한 위치라는 고고학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19]

한편, 서기 2세기에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인 '베레니케 붓다'가 이집트의 항구 도시 베레니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20] 이는 로마-인도 간 문화 교류의 또 다른 증거로 볼 수 있다.

6. 2. 무지리스 유적

케랄라 지역에 위치한 무지리스 역시 고고학적 기록이 풍부한 중요한 유적지이다. 무지리스는 체라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 타밀라캄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다. 파타남 마을에서 대량의 주화 무더기와 수많은 암포라 조각들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고대 무지리스 항구 도시의 유력한 위치일 가능성에 대한 고고학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41][19]

6. 3. 베레니케 불상



이집트의 항구 도시 베레니케에서는 서기 2세기에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인 ''베레니케 불상''이 발견되었다.[42][20]

7. 주화 기록

남인도에서 발견되는 로마의 금화는 인도와 로마 간의 활발했던 무역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이다.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하여 서기 1세기와 2세기의 로마 황제들 시대에 주조된 아우레우스(금화) 무더기들이 남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주화들의 발견은 당시 두 지역 간의 교역 규모와 경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7. 1.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데나리우스

남인도에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서기 1세기 및 2세기 로마 황제들 시기의 로마 금화 무더기들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 시대까지 약 120여 년간 주조된 아우레우스데나리우스 등 다수의 로마 주화들이 망갈로르에서 무지리스를 거쳐 남인도 끝 주변을 지나 동인도의 항구 도시들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따라 발견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기(기원전 63년–서기 14년)에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은 3.9g으로 정해졌으며, 이 함량은 네로 시대(서기 37년-68년)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43][44] 이러한 특징과 주화의 분포는 인도의 서쪽 해안가에서 서고츠산맥의 팔가트 산길을 통과하여 동쪽 해안에 이르는 육상 교역로가, 인도 아대륙의 남단이나 스리랑카 주변을 돌아가는 위험하거나 우회적인 해상 교역로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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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웹인용 Kodungallur : The Cradle of Christianity in India 2000 http://www.indianchr[...] 2023-07-26
[45] 서적 Kodungallur...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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