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마두크 피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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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마두크 픽탈은 1875년 런던에서 태어나 1936년 사망한 영국의 작가이자 이슬람 학자이다. 그는 성공회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해로우 스쿨에서 윈스턴 처칠과 동문으로 지냈으며, 중동 여행을 통해 아랍어와 이슬람 문화에 심취했다. 1917년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무함마드"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영국 이슬람 협회에서 활동했다. 픽탈은 쿠란의 영어 번역본인 《영광스러운 코란의 의미》를 출판하여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인도에서 언론인, 교육자로도 활동했다.
마르마두크 픽탈은 여러 동방 국가를 여행하며 중동 학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전부터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동양 연구를 바탕으로 여러 기사와 소설을 출판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글을 적극적으로 썼으며, 특히 아르메니아인 학살 소식이 전해지자 오스만 제국을 옹호하며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잔혹 행위를 폄하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광적인 튀르크 옹호론자(Turkophile)"라는 평판을 얻었고, 이 때문에 영국 정부의 아랍국(Arab Bureau) 직책을 얻지 못했다. 이 자리는 대신 T. E. 로렌스에게 돌아갔다.
픽탈은 중근동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졌으며, 일반적으로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견해는 복잡했는데,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의 영국 총독의 식민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1906년 덴슈와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집트 민족 해방 운동이 고조되고 영국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일었으나, 픽탈은 마을 주민들에 대한 교수형을 포함한 영국의 강경 진압을 지지했다. 후에는 인도에서의 영국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집트 문제에 대한 기존의 입장은 유지했다. 그는 애국적인 보수당 지지자였지만, 영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대립에는 반대했다.
마르마두크 피크탈은 소설가이자 번역가로서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저작 활동은 크게 초기 소설 집필 시기와 후기 이슬람 관련 논픽션 및 번역 활동 시기로 나눌 수 있다.
2. 생애
픽탈의 정치적 견해는 다소 복잡했는데, 이집트에서의 영국 식민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후일 인도에서의 영국 제국주의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보수당 지지자였으나 영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대립에는 반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터키인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면 기꺼이 참전하겠다"고 말하며 오스만 제국의 중립을 주장했다. 또한 전쟁 중 영국의 대 터키 정책 지속과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터키인의 미덕과 이슬람 부흥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1917년 6월, 발푸어 선언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다.[9] 같은 해 11월 이슬람교로 개종했다.[9] 개종 이후 그는 와킹 모스크 등에서 설교하고 이슬람 관련 단체 활동에 참여했으며, 런던에서 이슬람 정보국을 운영하며 주간지 ''무슬림 아웃룩(The Muslim Outlook)''을 발행하기도 했다.[10][11] 이후 인도에서 활동하며 쿠란 영어 번역이라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8]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마르마두크 윌리엄 픽탈은 1875년 4월 7일 런던 리젠트 파크 근처 케임브리지 테라스에서 태어났으며, 목사인 찰스 그레이슨 픽탈(1822–1881)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메리 헤일(née O'Brien, 1836–1904)의 두 아들 중 장남이었다.[1] 찰스는 성공회 성직자였으며, 서퍽주 우드브리지 근처 마을인 칠레스포드의 교구 목사였다.[1][2] 픽탈 가문은 정복왕 윌리엄의 기사인 로저 드 푸아투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여기서 그들의 성씨가 유래되었다.[2] 아일랜드의 Inchiquin 가문 출신인 메리는 윌리엄 헤일의 미망인이자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한 도나트 헨치 오브라이언 제독의 딸이었다.[2][3] 픽탈은 어릴 때 몇 년 동안 시골에서 보냈으며, 시골 서퍽에 있는 아버지의 사제관에서 여러 명의 이복 형제들과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4] 그는 병약한 아이였으며, 생후 약 6개월쯤에 홍역에 기관지염이 합병되어 심하게 앓았다.[3] 1881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족은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는 해로우 스쿨에 다녔지만 6학기 만에 학교를 떠났다.[5] 해로우에서 픽탈은 윈스턴 처칠의 동급생이자 친구였다.[6]
2. 2. 중동 여행과 이슬람으로의 개종
1896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레반트 영사관 시험에 응시했으나 언어 외 과목 성적이 좋지 않아 실패했다. 해로우 스쿨로 돌아가는 대신,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실무 경험을 쌓기 위해 레반트행을 선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 미만이었다. 어머니의 친구는 성공회 예루살렘 주교 업무를 돕던 토마스 다울링이었고, 픽탈은 팔레스타인으로 가게 되었다.
포트사이드를 통해 이집트로 들어가 아랍어를 배우며 카이로의 뒷골목을 탐험했다. 이후 야파행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현지인처럼 옷을 입고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여행기 ''Oriental Encounters''에 기록되었다. 픽탈은 1890년대 초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알레포, 카이로 등지에서 목격한 일상이 "옛날 『천일야화』에서 읽은 그대로였다"고 회상하며, "타락과 빈곤조차도 유럽에서 보는 어떤 것과 비교해도 생의 기쁨으로 가득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퍼블릭 스쿨 학생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웠던 자유로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술회했다.
1898년 유럽으로 돌아와 스위스 레만호반에서 결혼했으며, 같은 해 중동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여행기를 출판했다. 1907년 다시 중동으로 떠나 이집트 영국 영사관의 손님으로 10년간 머물렀다.
중동에서 유럽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보며 기독교 공동체에 점차 실망감을 느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면서 영국 제국과 오스만 제국, 두 제국에 대한 충성심 사이의 모순으로 괴로워하며 신경쇠약을 겪기도 했다.
1917년 11월, 픽탈은 와킹 이슬람 선교원(Woking Muslim Mission)에서 카와자 카말-우드-딘의 지원을 받아 샤하다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이슬람교로 개종했다.[9] 그는 이슬람이 기독교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문제를 처리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9] 개종 후 "무함마드"라는 무슬림 이름을 얻었으며, 자신을 "하나피(Hanafi) 수니(Sunni) 무슬림"이라고 밝혔다. 그는 영국 내 여러 이슬람 단체에서 "타고난 지도자"로 활동하며 와킹 모스크와 런던에서 금요 설교(쿠트바)를 진행했고,[10] 영국 이슬람 협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2. 3. 인도에서의 활동과 말년

1920년 그는 아내와 함께 인도로 가서 ''봄베이 크로니클(Bombay Chronicle)''의 편집자로 일했다. 하이데라바드 니잠의 요청에 따라 1926년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의 차다르가트 고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30년에는 쿠란의 영어 번역본인 ''영광스러운 코란의 의미(The Meaning of the Glorious Koran)''를 출판했다. 이 번역은 카이로의 알 아자르 대학교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으며, ''타임스 문학 부록(Times Literary Supplement)''은 "영광스러운 코란을 영어로 번역한 뛰어난 번역가, 위대한 문학적 업적"이라며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8]
1931년 6월, 니잠 정부의 제안으로 하이데라바드 주의 홍보 담당관으로 임명되어 차다르가트 고등학교 교장직과 겸임했다.[14]
1935년에 영국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콘월주 세인트 아이브스에서 사망했다. 픽탈은 잉글랜드 서리 브룩우드 묘지의 무슬림 구역에 묻혔으며,[6] 이곳에는 나중에 압둘라 유수프 알리도 안장되었다.
3. 정치적, 종교적 관점
1912년부터 1920년까지 영국에 머물며 국제 관계가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 활발히 글을 썼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발칸 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터키인을 악마시하는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고, 불가리아에서 기독교인에 의한 무슬림 학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해체가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 더 위험할 수 있으며, 터키 무슬림에 대한 공격은 전 세계 무슬림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1914년), 픽탈은 "터키인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면 기꺼이 한 병사로서 싸우겠다"고 말하며, 오스만 제국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중립을 지키고 독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오스만 제국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기존 영국의 대(對)터키 정책 유지, 러시아 외교 정책의 영향력에 대한 우려 표명, 발칸 반도의 기독교인들이 단지 같은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영국의 보호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반론을 제기했다. 또한 터키인의 미덕을 칭찬하며 이슬람 부흥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소식이 영국에 전해졌을 때, 픽탈은 오스만 제국을 옹호하며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잔학 행위를 축소하려 했고,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전쟁 중 "광적인 튀르크 옹호론자(Turkophile)"라는 평판을 얻었고, 영국 아랍국(Arab Bureau)에서 직책을 얻는 데 실패했으며, 그 자리는 대신 T. E. 로렌스에게 돌아갔다. 1917년 6월에는 밸푸어 선언 논쟁 속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9]
픽탈의 가족 중에는 성공회 성직자가 많았고, 그 자신도 기독교적 배경에서 자랐으며 중동 문화를 처음 접한 계기도 기독교회와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중동에서 유럽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목격하면서 점차 기독교 공동체에 실망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면서 영국 제국과 오스만 제국, 두 제국에 대한 충성심 사이의 모순으로 괴로워하며 신경쇠약에 걸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1917년 11월 29일, 픽탈은 와킹 이슬람 선교원(Woking Muslim Mission)에서 카와자 카말-우드-딘의 지원 아래 공개적으로 샤하다(신앙 고백)를 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했음을 선언했다.[9] 그는 "무함마드"라는 무슬림 이름을 얻었다. 개종 직후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법을 비교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문제 해결에 이슬람이 기독교보다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9]
스스로를 "하나피(Hanafi) 수니(Sunni) 무슬림"이라고 밝힌[10] 픽탈은 여러 이슬람 단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영국 이슬람 협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와킹 모스크와 런던에서 금요일 쿠트바(설교)를 진행했으며, 그의 설교 중 일부는 후에 출판되었다.[10] 런던에서는 1년 동안 Islamic Information Bureaueng(이슬람 정보국)을 운영했고,[10] 이 기관을 통해 주간지 ''무슬림 아웃룩(The Muslim Outlook)''을 발행했다.[11] 또한 쿠란 번역가인 압둘라 유수프 알리와 함께 와킹의 샤 자한 모스크(Shah Jehan Mosque)와 이스턴 런던 모스크의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12][13]
4. 저작
초기에는 ''어부의 말''(1903), ''이슬람의 집''(1906) 등 주로 중동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1912년까지 발표된 작품들은 대부분 이러한 소설류에 속한다.
이후 그의 관심사는 점차 이슬람 연구와 소개로 옮겨갔으며, 이는 그의 저작 활동에도 반영되었다. 특히 1930년에 출판한 꾸란 영어 번역본인 ''영광스러운 꾸란의 의미: 해설 번역''(The Meaning of the Glorious Koran: An Explanatory Translationeng)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이 번역본은 영어권 세계에 꾸란을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 튀르키예어, 포르투갈어, 우르두어, 타갈로그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는 기초가 되었다. 꾸란 번역 외에도 ''이슬람의 문화적 측면''(1927) 등 이슬람 문화와 관련된 여러 논픽션 저작을 남겼다.
피크탈의 저작 목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4. 1. 소설
1912년까지 발표된 위의 저작들은 주로 소설이며, 이후 발표된 작품들은 꾸란 영어 번역본인 ''영광스러운 꾸란의 의미: 해설 번역'' (1930)을 제외하면 대부분 논설이나 팸플릿 형태이다.
4. 2. 논픽션 및 기타
1912년 이후의 저작은 꾸란의 영어 번역을 제외하고는 주로 논설 및 팸플릿이다. 주요 논픽션 및 기타 저작은 다음과 같다.
1930년에 출판한 ''영광스러운 꾸란의 의미''(The Meaning of the Glorious Koraneng)는 피크탈의 가장 유명한 저작 중 하나이다. 이 번역본은 이후 튀르키예어, 포르투갈어, 우르두어, 타갈로그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기반이 되었다.
4. 3. 편집
참조
[1]
encyclopedia
Pickthall, Marmaduke William (1875–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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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Marmaduke Pickthall: a brief biography
http://www.masud.co.[...]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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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tchinson &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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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A Great English Muslim
[5]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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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odjourn.[...]
2014-02-09
[6]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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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jazeera[...]
2016-06-18
[7]
웹사이트
GRAND MEETING REGARDING THE COLLAPSE OF KHILAFAH
https://meeraath.w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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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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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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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7
[9]
서적
Marmaduke Pickthall : Islam and the modern world
2017
[10]
서적
Brave Hearts: Pickthall and Philby: Two English Muslims in a Changing World
https://books.google[...]
The Other Press
2020-02-03
[11]
웹사이트
Marmaduke Pickthall - a brief biography
http://www.masud.co.[...]
2020-02-04
[12]
간행물
'Ali, Abdullah Yusuf (1872–1953)’
Oxford University Press
2012-10
[13]
웹사이트
East London Mosque - London Muslim Centre
https://www.eastlond[...]
2020-02-06
[14]
서적
Marmaduke Pickthall: Islam and the Modern World
https://brill.com/di[...]
Brill
2023-05-31
[15]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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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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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논문
Review: ''Pot an Feu'' by Marmaduke Pickthall
https://babel.hathit[...]
1911-03-11
[17]
웹인용
www.islamispeace.org.uk
http://www.islamispe[...]
200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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