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조노 마사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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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에조노 마사키요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1992년 요코하마 플뤼겔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2005년 은퇴했다. U-23 일본 대표팀 주장으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끌었으며, 성인 대표팀으로 1996년 AFC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클럽에서는 요코하마 플뤼겔스, 도쿄 베르디, 안양 LG 치타스, 인천 유나이티드 등에서 활약했으며, 1996년 J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은퇴 후에는 축구 해설가,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2017년 댄서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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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조노 마사키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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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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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에조노 마사키요 () |
출생일 | 1973년 10월 29일 |
출생지 | 일본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시 |
신장 | 170cm |
포지션 | 미드필더 / 공격수 |
주발 | 오른발 |
클럽 경력 | |
유소년 클럽 | 가고시마 실업 고등학교 (1989-1991) |
프로 클럽 | 요코하마 플뤼겔스 (1992-1996) - 128경기 25골 도쿄 베르디 (1997-2002) - 63경기 9골 산투스 FC (1998, 임대) - 5경기 1골 고이아스 EC (1999, 임대) - 8경기 1골 쇼난 벨마레 (2000, 임대) - 38경기 11골 FC 서울 (2003) - 16경기 0골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4) - 4경기 0골 |
총 출장 및 득점 | 262경기 47골 |
국가대표 경력 | |
청소년 국가대표 | 일본 U-23 (1995-1996) - 3경기 2골 |
국가대표 | 일본 (1994-1997) - 19경기 4골 |
수상 내역 | |
소속팀 | 요코하마 플뤼겔스 |
우승 | 천황배 (1993) |
2. 유소년 경력
4살 위 형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축구를 접했다.[5] 토고 초등학교 2학년 때 '토고 소년 축구단'에 가입했고[6], 5학년 때는 현 대회 4강에 진출했다.[7] 비디오를 통해 디에고 마라도나를 알게 된 후 그를 동경하며, 비디오를 반복해서 보면서 드리블 연습에 매진했다.[8][9][10]
사쓰마센다이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1992년 요코하마 플뤼겔스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93년 6월 J리그에 데뷔하여 주전 선수로 빠르게 자리 잡았고, 팀의 1993년 천황배 우승과 1994-95년 아시안 컵 위너스 컵 우승에 기여하며 전성기를 보냈다.
토고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당시 축구부가 없었기 때문에 잠시 육상부에 소속되었다.[11] 2학년 3학기에 축구부가 창단되었고[12], 3학년 때는 현 대표 선수로 선발되었다.[13]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때부터 주전 선수로 활약했으며[14],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에 3년 연속 출전했다.[14] 2학년 때 참가한 제69회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14]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으로는 엔도 삼형제의 장남 엔도 타쿠야, 후지야마 류지, 니타오 히로유키가 있었고, 2년 후배로는 훗날 애틀랜타 올림픽 일본 대표팀에서 함께 뛰게 되는 조 쇼지와 엔도 아키히로가 있었다.[14][15]
3. 클럽 경력
1997년 베르디 가와사키(현 도쿄 베르디)로 이적했으나, 이전과 같은 활약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1998년 10월에는 브라질로 건너가 산투스와 고이아스에서 잠시 활동했다.
2000년 일본으로 돌아와 J2리그의 쇼난 벨마레에 입단했고, 2001년에는 도쿄 베르디로 복귀했다. 그러나 부상 등으로 인해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2003년에는 대한민국 K리그로 무대를 옮겨 안양 LG 치타스(현 FC 서울)에 입단했으며, 2004년에는 신생팀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다. K리그에서는 두 시즌 동안 총 29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2005년 5월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2]클럽 기록 리그 컵 리그 컵 합계 시즌 클럽 리그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일본 리그 천황배 (일본) J.리그컵 합계 1992 요코하마 플뤼겔스 J1 리그 - 0 0 0 0 1993 24 2 5 1 5 0 34 3 1994 38 8 2 0 2 0 42 8 1995 40 7 2 0 - 42 7 1996 26 8 2 0 11 7 39 15 1997 베르디 가와사키 J1 리그 28 5 2 0 0 0 30 5 1998 22 3 0 0 2 1 24 4 브라질 리그 코파 두 브라질 리그 컵 합계 1998 산투스 세리 A 5 1 5 1 1999 고이아스 세리 B 0 0 0 0 일본 리그 천황배 (일본) J.리그컵 합계 2000 쇼난 벨마레 J2 리그 38 11 3 2 2 0 43 13 2001 도쿄 베르디 J1 리그 13 1 0 0 2 0 15 1 2002 0 0 0 0 0 0 0 0 대한민국 리그 FA컵 리그컵 합계 2003 안양 LG 치타스 K리그 16 0 0 0 0 0 16 0 2004 인천 유나이티드 K리그 4 0 0 0 9 1 13 1 국가 일본 229 45 16 3 24 8 269 56 브라질 5 1 5 1 대한민국 20 0 0 0 9 1 29 1 합계 254 46 16 3 33 9 303 58
3. 1. 요코하마 플뤼겔스 (1992-1996)
1992년 J리그의 요코하마 플뤼겔스에 입단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입단 첫 해에는 가모 슈 감독이 추구하는 존 프레스 축구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주로 위성팀에서 활동했다. J리그 개막을 앞둔 1993년 상반기에는 아르헨티나의 히무나시아 라 플라타로 2개월간 단기 유학을 다녀왔다.
1993년 6월 5일, 베르디 가와사키와의 경기에서 연장 후반 교체 투입되어 공식 데뷔전을 치렀다. 같은 해 7월 10일 요코하마 마리노스전에서는 결승골을 넣어 J리그 첫 득점을 기록했다. 1993년 J리그 시즌에는 24경기에 출전해 2골을 넣었으며, 제73회 천황배 결승전에서는 선발 출전하여 드리블 돌파로 페널티킥을 얻어내는 등 팀의 창단 첫 메이저 타이틀 획득에 기여했다. 또한 아시아 무대에서는 1994-95년 아시안 컵 위너스 컵 우승을 경험했다.
1994년에는 리그에서 8골을 기록하며 팀의 주전 선수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1995년에도 핵심 선수로 활약했는데, 3월 22일 벨마레 히라츠카와의 가나가와 더비에서는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넣었고, 4월 15일 세레소 오사카전에서는 상대 수비수 2명과 골키퍼를 제치고 득점하며 스스로 '커리어 최고의 골'이라 자평하기도 했다. 이 골은 J리그 30주년 베스트 골 기술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95 시즌에는 40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했다.
단일 시즌 제도가 처음 도입된 1996년 J리그에서는 지뉴, 삼파이오, 에바에르 등 브라질 선수들과 야마구치 모히로, 미우라 아츠히로 등과 함께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개막 8연승을 이끌었다. 전반기를 선두로 마쳤으나 후반기에는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최종 순위는 3위에 머물렀다. 마에조노는 이 시즌 리그와 컵 대회를 합쳐 15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인정받아 J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스페인의 세비야 FC 관계자가 일본을 방문하여 영입을 타진하기도 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U-23 일본 대표팀 주장으로 참가한 이후,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해외 진출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30]. 1996 시즌 종료 후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는 스페인 이적을 염두에 두고, 일본 축구계에서는 이례적으로 에이전트를 통해 협상을 진행했다[31][32]. 하지만 요코하마 플뤼겔스 구단 측이 이적료 전액(3.5억엔) 지불을 고수하면서 해외 이적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33]. 또한, 세비야 외 다른 클럽들의 접촉 사실이 본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단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33]. 결국 마에조노는 1997년 1월 31일, 해외 이적을 용인한다는 조건으로 베르디 가와사키로 이적하며 요코하마 플뤼겔스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했다[34][35]. 베르디 가와사키가 요코하마 플뤼겔스에 지불한 이적료는 당시 J리그 최고액인 추정 3.5억엔으로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구단 간 협상을 통해 대폭 삭감되어 2억엔에서 2.5억엔 정도로 정해졌다고 한다[36][37].
3. 2. 베르디 가와사키 (1997-1998)
1996년 J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요코하마 플뤼겔스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마에조노는 1997년 베르디 가와사키(현 도쿄 베르디)로 큰 기대를 받으며 이적했다. 하지만 이적 후에는 이전과 같은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부진에 빠졌다.[40] 경기장에서 투지를 보이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고 교체 선수로 출전하는 횟수가 늘어났다.[41] 또한, 이 시기에 다수의 TV 광고에 출연하면서 축구 외적인 활동에 집중한다는 비판도 받았다.[40]
당시 베르디 가와사키는 1997 시즌 개막부터 부상 선수가 많았고[40], 마에조노 역시 부진이 이어지면서[40] 팀 성적은 하락했다. 결국 J리그 1st 스테이지 도중 가토 히사시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기도 했다.[41]
마에조노 본인은 이 시기의 부진에 대해, 1996년 스페인 세비야 FC 이적이 무산된 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경기력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30][32][42] 또한 이적 과정에서의 문제로 인해 사람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고도 언급했다.[43]
결국 1998년 10월, 마에조노는 브라질로 건너가 산투스에서 잠시 활동하게 된다.
3. 3. 브라질 시절 (1998-1999)
1998년 10월, 3개월간의 임대 이적으로 브라질 상파울루주의 명문 클럽 산투스 FC에 입단했다.[44] 본래 넬시뉴 감독이 이끌던 상파울루 FC로의 이적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나, 넬시뉴 감독이 해임되면서 무산되었고,[45] 대신 에메르송 레앙 감독이 지휘하는 산투스로 이적이 결정되었다.[45]
10월 18일, 브라질 전국 선수권의 포르투게자와의 경기에서 후반 20분(65분) 교체 출전하여 데뷔했고, 투입된 지 1분 만인 후반 21분(66분)에 첫 골을 기록했다.[46] 하지만 이후 출전 기회는 많지 않았으며,[47] 공식 경기 4경기 출전 1득점에 그쳤다. 그럼에도 마에조노 본인은 산투스 시절에 대해 "풀타임으로 출전한 경기는 하나도 없었지만, 벤치에 앉아 있어도 매우 설렜다. 축구를 하고 있다는 충족감이 있었다"[47]라고 회상했다.
1999년, 임대 이적 기간을 연장하여 산투스에서 계속 활약할 예정이었으나, 산투스가 다른 일본인 선수 스가와라 사토시 영입을 결정하면서 "일본인은 두 명이나 필요 없다"는 이유로 마에조노와의 계약을 보류했다.[48] 이에 따라 1월 25일, 고이아스주의 강호 클럽 고이아스 EC로 다시 임대 이적하게 되었다.[49] 고이아스에서는 3월 3일 데뷔전에서 선발로 출전하여 풀타임을 소화하며 1개의 도움을 기록하는 등[50] 이적 초기에는 꾸준히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점차 아우조스 감독의 팀 구상에서 벗어나 출전 기회를 잃었고, 결국 계약 기간 만료 전에 일본으로 귀국했다.[51]
이후 이적을 전제로 포르투갈의 비토리아 기마랑이스[52]와 그리스의 PAOK 테살로니키[53]에서 연습에 참가했지만, 정식 계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특히 기마랑이스의 경우, 당시 원소속팀이던 V 가와사키가 요구한 1억엔의 이적료가 협상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52]
3. 4. J리그 복귀 (2000-2002)
2000년, 가토 히사시 감독의 요청으로[54] 그해 J2 리그로 강등된 쇼난 벨마레로 임대 이적하며 J리그에 복귀했다. 쇼난의 J1 리그 재승격을 이끌 핵심 선수로 기대를 모았고, 9월 3일 베갈타 센다이와의 31라운드 경기에서는 프로 데뷔 후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55]. 하지만 팀은 8위에 그쳐 승격에는 실패했다. 마에조노는 훗날 이 시즌에 대해 "팀으로서나 개인으로서나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40경기 가까이 뛰면서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선수 생명이 더 짧아졌을 것"이라고 회고했다[56].
2001년에는 보유권을 가진 J1 리그의 도쿄 베르디 1969와 반년 계약을 맺고 3년 만에 복귀했다. 7월 마쓰키 야스타로 감독이 해임되고 오미 유키타카가 새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기회를 받았다[57]. 그러나 9월 15일, 2nd 스테이지 5라운드 요코하마 F. 마리노스와의 경기에서 전반 35분 골문 앞으로 쇄도하며 선제골을 넣는 과정에서 상대 골키퍼 가와구치 요시카쓰와의 충돌을 피하려다 왼발이 잔디에 걸려 발목 골절 부상을 당했다[58]. 이 부상으로 장기간 전력에서 이탈하게 되었고, 그대로 2001 시즌을 마감했다. 결과적으로 이 경기가 그의 마지막 J리그 출전 경기가 되었다.
2002년 7월, 마에조노는 니시다 요시히로, 이시즈카 게이지와 함께 로리 감독의 구상에서 제외되어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59]. 당시 스포츠 신문들은 도쿄 베르디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로리 감독이 이전부터 세 선수의 훈련 태도에 불만을 품고 개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전력 외로 분류했다고 보도했다[59]. 하지만 마에조노는 이에 대해 "신문에는 그렇게 나왔지만, 나로서는 명확한 이유도 납득할 만한 설명도 없었다. 훈련 태도라고 해도, 나는 재활 중이었기 때문에 로리 감독 부임 이후 계속 훈련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더 이상 쓸 생각이 없으니, 따로 훈련해 달라'고 말했고, 셋이서 훈련을 했다. (...)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지금도 전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59].
3. 5. K리그 시절 (2003-2004)
도쿄 베르디 퇴단 후, 마에조노는 지인을 통해 한국의 K리그 구단으로의 이적을 모색했다.[60] 처음으로 연습에 참가한 성남 일화 천마에서는 체력적인 문제로 인해 계약이 무산되었지만[60], 다음 팀인 안양 LG 치타스에서는 조광래 감독의 평가를 받아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60]
2003년 안양 LG 치타스 (현 FC 서울) 소속으로 K리그에 데뷔하여 리그 개막전부터 10경기 연속 선발 출전을 달성했지만[61], 시즌 중반 이후에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62]
2004년에는 K리그의 신생팀인 인천 유나이티드 FC와 계약했다.[63] 인천 유나이티드에서는 주로 컵 대회를 중심으로 기용되었고[64], 2004년 8월 1일 FC 서울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K리그 데뷔골을 성공시켰으며, 이 골은 경기의 결승골이 되었다.[64] 그러나 시즌 중 왼발 약지 골절 부상으로 인해 3개월 이상 전력에서 이탈했고, 11월에 복귀했다.[64] 2004 시즌 종료 후 인천 유나이티드와 계약이 해지되었다.
3. 6. 은퇴 (2005)
2005년 5월에 은퇴를 발표했다.
4. 국가대표팀 경력
마에조노 마사키요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과 일본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다. 1994년 5월 22일, 호주와의 기린컵 축구 경기를 통해 성인 대표팀에 데뷔했으며, 같은 해 1994년 아시안 게임 축구에도 참가했다.
1995년부터는 U-23 대표팀에 집중하며 주장을 맡아 올림픽 예선을 통과, 일본의 28년 만의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본선에서는 브라질을 꺾는 이른바 '마이애미의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올림픽 이후 성인 대표팀에 복귀하여 1996년 8월 우루과이전에서 A매치 첫 골을 기록했고, 같은 해 1996년 AFC 아시안컵 등에 출전했다. 1997년까지 A매치 통산 1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1]
연도 | 출장 | 득점 |
---|---|---|
1994 | 6 | 0 |
1995 | 4 | 0 |
1996 | 7 | 4 |
1997 | 2 | 0 |
합계 | 19 | 4 |
4. 1. 올림픽 대표팀 (1994-1996)
1994년 1월, 니시노 아키라 감독이 이끄는 U-21 일본 대표팀(애틀랜타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하는 팀)의 1차 합숙에 소집되었다.[67] 1995년 1월 호주 국제 토너먼트 참가 시 니시노 감독으로부터 U-23 대표팀의 주장으로 지명되었다.[68][69] 마에조노는 그때까지 축구 인생에서 주장을 맡은 경험이 없었으며[70], 니시노 감독 또한 그의 성격이 리더에 적합하지 않다고 분석했지만, 때로는 자기중심적인 플레이를 하기 쉬운 마에조노를 일부러 주장으로 임명함으로써 그에게 팀 전체를 의식한 플레이를 하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71][72]마에조노는 이미 성인 대표팀에도 소집되어 두 대표팀을 겸하고 있었지만, 1995년 3월 마에조노 본인의 의향도 수렴한 후 올림픽 대표팀을 우선시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73] 1995년 5월부터 6월까지 태국과 일본에서 열린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에 출전하여 4경기 5골(페널티킥 2골 포함)을 기록했고, 일본은 4전 전승으로 최종 예선 진출을 결정했다.
1996년 3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에 출전했다. 3월 24일 준결승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2골을 넣어 승리에 기여하며, 일본의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이후 28년 만의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최종 예선에서는 총 4경기 4골(페널티킥 1골 포함)을 기록했다.
같은 해 7월, 미국에서 개최된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에 주장으로 출전했다. 일본은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금메달 후보였던 브라질을 1-0으로 꺾는 이변을 일으켰는데, 이는 일본에서 '마이애미의 기적'(マイアミの奇跡|마이애미노 키세키일본어)으로 불린다. 3차전 헝가리전에서는 마에조노가 2골(페널티킥 1골 포함)을 넣어 3-2 승리를 이끌었다. 일본은 나이지리아, 브라질과 함께 2승 1패(승점 6점)를 기록했으나, 골득실차에서 밀려 결선 토너먼트 진출에는 실패했다. 마에조노는 본선 3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다.
'''올림픽 대표팀 주요 대회 기록'''
대회 | 장소 | 경기 수 | 득점 (PK) |
---|---|---|---|
1995년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 | 태국, 일본 | 4 | 5 (2)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 말레이시아 | 4 | 4 (1)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 미국 | 3 | 2 (1) |
4. 2. 성인 대표팀 (1994-1997)
파울루 로베르투 팔캉 일본 대표팀 감독에 의해 발탁되어 1994년 5월 22일, 기린컵 축구의 오스트레일리아전을 통해 국제 A매치에 데뷔했다.[74] 같은 해 10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1994년 아시안 게임 축구에서는 전 경기에 출전했으나, 8강전에서 한국에 2-3으로 패하며 탈락했다.1995년에는 애틀랜타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하는 U-23 대표팀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성인 대표팀에서 물러났으며, 이 기간 동안 1995년 다이너스티컵에도 참가했다.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진출과 '마이애미의 기적'으로 불리는 브라질전 승리를 이끈 후, 1996년 8월 성인 대표팀에 복귀했다. 8월 25일 오사카에서 열린 우루과이와의 친선 경기에서 프리킥으로 A매치 첫 골을 기록했다.[75] 10월 13일 고베에서 열린 튀니지와의 친선 경기(푸마컵)에서도 결승골을 넣어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12월에는 UAE에서 개최된 1996년 AFC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조별 리그 2차전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는 직접 프리킥 골과 개인기를 이용한 추가 골로 총 2골을 기록하며 팀의 4-0 대승에 기여했다.[76] 그러나 8강전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는 부진하여 전반전만 소화하고 교체되었고,[77] 일본은 0-2로 패배하여 탈락했다.
1997년, 이적 문제 등이 겹치며 경기력이 저하되었다. 3월 월드컵 프랑스 대회 아시아 1차 예선 오만 라운드 멤버로 소집되었으나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A매치 경기는 1997년 3월 15일 방콕에서 열린 태국과의 친선 경기(1-3 패)였다.[78] 이후 대표팀 내 입지가 줄어들고 나카타 히데토시가 새로운 핵심 선수로 부상하면서 대표팀에서 멀어졌다. 마에조노와 나카타는 A대표팀에서 함께 뛴 경험이 없다.
마에조노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일본 성인 대표팀 소속으로 총 1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연도 | 출전 | 득점 |
---|---|---|
1994 | 6 | 0 |
1995 | 4 | 0 |
1996 | 7 | 4 |
1997 | 2 | 0 |
통산 | 19 | 4 |
# | 날짜 | 장소 | 상대팀 | 점수 | 결과 | 대회 |
---|---|---|---|---|---|---|
1 | 1996년 8월 25일 | 오사카, 일본 | 우루과이 | 1골 | 5–3 승 | 친선 경기 |
2 | 1996년 10월 13일 | 고베, 일본 | 튀니지 | 1골 | 1–0 승 | 친선 경기 (푸마컵) |
3 | 1996년 12월 9일 | 알아인, 아랍에미리트 | 우즈베키스탄 | 2골 | 4–0 승 | 1996년 AFC 아시안컵 |
4 |
5. 은퇴 후 활동
은퇴 후, 도쿄 베르디 시절 팀 동료였던 라모스 루이 감독의 부름을 받아 일본 비치사커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일본 대표팀은 2009년 AFC 비치사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같은 해 2009년 FIFA 비치사커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마에조노는 2009년 10월 포르투갈 대표팀과의 친선 경기 2경기에 출전하며 비치사커 선수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축구 해설가로서 TV 도쿄, 니혼 TV의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 중계 등에 출연하고 있으며, 소년 축구 보급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2007년부터는 JFA 앰배서더로 활동 중이다. 2006년 8월에는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ZONO 축구 스쿨'을 설립하여 축구 보급에 기여하고 있다. 2008년에는 나카타 히데토시가 창설한 전직 축구 선수들로 구성된 축구팀 'TAKE ACTION F.C.'의 일원이 되었다.
2012년에는 JFA 공인 S급 코치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2013년 10월 13일, 술에 취해 택시 운전사를 폭행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다음 날인 14일 처분 보류로 석방되었고, 같은 날 사죄 기자회견을 열어 TV 도쿄 계열 'neo sports' 등 TV 프로그램 출연 자제를 선언했다. 10월 15일에는 'JFA 마음의 프로젝트'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11월 15일에는 고향인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시의 스포츠 대사직을 사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알코올 의존증 회복을 위한 자조 그룹 활동에 참여하며 계몽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98]
2014년 후지 TV 계열 '와이드나 쇼' 출연을 계기로 탤런트로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2016년에는 '베스트 훈도시스트 어워드 2015'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2월 말에는 사쓰마센다이시 관광 대사로 다시 위촉되었다. 또한 '와이드나 쇼'에서의 취재 활동을 계기로 같은 해 출범한 남자 농구 리그 'B.리그'의 특명 홍보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017년 12월 24일, 10년간 교제해 온 34세의 댄서와 결혼했음을 발표했다.
=== 에피소드 ===
- 1996년 AFC 아시안컵 원정 당시, 자신이 광고 모델이었던 닛신 식품의 라오를 대량으로 가져갔다. 당시 해외 원정은 식사 등 선수 지원이 부족했는데, 낯선 음식에 지친 선수들이 저녁 식사 후 마에조노의 방에 모여 라오를 나눠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나나미 히로시는 "식사가 힘들어 조노의 라오로 버텼다"고 회상했다. 이 대회의 부진 이후 일본 대표팀의 해외 원정 지원 체제가 개선되어 일본인 셰프가 동행하게 된다.[94]
- 2006년 호놀룰루 마라톤에 참가하여 5시간 43분 만에 완주했다.[95]
- '마사키요(真聖)'라는 이름은 부모님이 기독교 신자여서 지어졌지만, 본인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96]
- 2014년 6월 22일부터 후지 TV의 『와이드나 쇼』에 고정 출연하며 축구 외 분야로 활동을 넓혔다. 방송 중 음주 문제나 사생활에 대해 마츠모토 히토시 등에게 자주 놀림을 받는데, 유독 긴장하여 엉뚱한 답변을 하는 모습이 독특한 캐릭터로 받아들여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출연이 늘었다.[97] 친구인 개그맨 쥰이치 다비드손과 함께 출연할 때는 츳코미(태클 거는 역할)를 맡기도 한다. 2015년 7월 5일에는 2015 FIFA 여자 월드컵에서 나데시코 재팬이 우승하지 못하면 삭발하겠다고 공약했고, 결과는 준우승이었다. 이에 따라, 7월 12일 방송된 『와이드나 쇼』에서 삭발한 모습을 선보였다. 2017년 12월 24일 방송된 같은 프로그램에서 결혼 및 혼인 신고 사실이 보고되었다.
- 선수 시절, 경기 후 상대 선수와 유니폼을 교환해도 땀이나 냄새 때문에 라커룸에 두고 왔다고 밝힌 바 있다.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브라질을 꺾은 경기 후 호베르투 카를루스와 교환한 유니폼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 NHK-BS에서 방송된 『더욱 시코쿠 "마에조노 마사키요 자전거 순례 여행 답례편"』에서 고야산 단조 가람을 방문했을 때, 길조로 여겨지는 삼고(三鈷)의 소나무 아래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 솔잎을 연달아 두 개 발견하여 안내하던 승려로부터 "가장 빠르다"는 말을 들었다.
=== 주요 출연 ===
==== TV 프로그램 ====
- 메가스포!, neo sports (TV 도쿄)
- toto&J리그 TV (스카이 퍼펙TV!)
- 싸워라! 스포츠 내각 (MBS TV, 2016년 10월 5일 - ) - 축구 담당 (준 레귤러)
- Football TimeLine (스카이 퍼펙TV!)
- 축구의 정원~궁극의 원 플레이~ (NHK BS)
- 와이드나 쇼 (후지 TV, 2014년 6월 22일 - )
- 히메퐁! 내 코너, 마에조노 마사키요의 자전거 순례 여행 (NHK 마쓰야마, 2017년 5월 31일 - 2018년도)
- 마에조노 마사키요 시코쿠 절경 여행 (NHK 마쓰야마, 2019년도 - 2021년도)
- 마에조노 마사키요 시코쿠 함께 여행 (NHK 마쓰야마, 2022년도 -)
- 안녕 닌자대 갓챠맨, 마징가 ZIP!, 굿・모닝!!!도로됴 (니혼 TV) - 본인 역 (목소리 출연)[101]
- 바이킹 (후지 TV, 2015년 1월 16일 - 2015년 2월 6일) - 금요일 코너 레귤러
- 키쿠치 아미의 여자력 향상 위원회 (TOKYO MX, 2015년 4월 - ) - 레귤러
- SPA! 감수 비밀의 조노 (NOTTV, 2015년 7월 - 2016년 3월) - 사회[102]
- 바라이로 단디 (TOKYO MX, 2016년 4월 - ) - 목요일 격주 레귤러
- 스페인어 여행 (2022년 10월 - , NHK E 텔레비전) - 여행자
- 네플리그 (후지 TV, 2014년 10월 27일·12월 1일·15일·2015년 2월 16일·4월 13일, 2016년 1월 18일)
- 우리들은 만화로 강해졌다 ~SPORTS×MANGA~ (2017년 11월 24일 NHK BS) 게스트 출연
- 종이 토끼 로페 (2017년 10월 6일 후지 TV) '헤이헤이 패스 아저씨' 종이멧돼지 역
==== 라디오 프로그램 ====
- MIRACLE WORDS! (재팬 FM 네트워크)
- 시노조노 음악당 (전국 FM 방송 협의회, 2016년 10월 - 2019년 3월)
- 마루조노 음악당 (전국 FM 방송 협의회, 2019년 4월 - )
==== 드라마 ====
- 문제 있는 레스토랑 제6화 (2015년 2월 19일, 후지 TV) - 본인 역
==== 영화 (더빙) ====
- 앵그리 버드 (2016년, 일본어 더빙판) - 조니 / 피그 7 역
=== 광고 출연 ===
- 나이키 「축구 유신」 ※ 오구라 다카시, 키타자와 고, 나카니시 에이스케와 공동 출연.
- 나이키 ※ 단독 출연.
- 불본 「DEWA 워터, ION 워터」
- 불본 「트위스터」
- 닛신 식품 「라오」(1996년) ※ 나카타 히데토시와 공동 출연.
- AC 재팬 (1996년) (공공 광고 기구 시절 출연)
- 다이쇼 제약 「리포비탄 D」(1996년)
- 아스텔 도쿄 「PHS」(1996년) ※ BEGIN과 공동 출연.
- 만담 「ASI's」(1997년)
- 일본 스포츠 진흥 센터 「toto」(2011년, 2012년) ※ 나카니시 에이스케, 나라하시 아키라와 공동 출연.
- 2011년 - toto 백작과 OB 편
- 2012년 - Singing Soccer 편
- 오야마 주조 합명회사 「이사 오이즈미」(2015년 6월)
- 콜로플라 「하얀 고양이 프로젝트」(2015년 7월 - ) ※ 마츠키 야스타로, 후쿠다 마사히로, 쥰이치 다비드손, 사쿠라이 히나코와 공동 출연.
- 2015년 - 우리들의 방과후 편 (7월) / 사랑보다 우정 편 (7월) / 나의 여름 방학 편 (8월) / 학원제・하얀 고양이 야키소바 편 (10월) / 학원제・카페 편 (10월) / 할로윈 편 (10월) / 1년 전 편 (12월) / 모두의 하얀 고양이 (연말) 편 (12월)
- 2016년 - 모두의 하얀 고양이 (연초) 편 (1월) / 동료가 늘었다 편 (2월)
- 스퀘어 에닉스 스마트폰 게임 「별의 드래곤 퀘스트」(2017년 5월) ※ 라모스 루이, 키타자와 고, 오노 신지와 공동 출연.
- 서곡 대합창 편
- 환희의 순간 편
- 유니버설 홈 (2019년 1월 - ) 바닥 댄디 역
- J리그 (2021년 3월 4일 - ) 「넷 괴롭힘, 꼴사나워.」 ※ 유튜브 한정.
6. 수상 경력
'''클럽'''
'''국가대표'''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 * 다이너스티컵: 1995
- 일본 비치사커 국가대표팀
- * AFC 비치 사커 선수권 대회: 2009
'''개인'''
- J리그 베스트 11: 1996
6. 1. 클럽
1996년 U-23 일본 대표팀 주장으로 애틀랜타 올림픽을 경험하면서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해외 진출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30]。1996년 시즌 후 요코하마 플뤼겔스와의 재계약 협상에서는 스페인 이적을 염두에 두고, 일본 축구계에서 처음으로 에이전트를 통해 계약 협상에 임했다[31][32]。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에이전트를 선임한 것에 대한 비판도 받았다[31][32]。그러나 요코하마 플뤼겔스 측은 이적료 전액(3.5억엔)이 지불될 경우에만 해외 이적을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33]。세비야 외에도 여러 클럽이 요코하마 플뤼겔스에 접촉했지만, 그 내용은 마에조노 본인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마에조노는 구단에 대한 불신을 키워갔다[33]。마에조노는 "플뤼겔스에 남을 생각은 없었고, 더군다나 J리그의 다른 팀으로 가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34]고 밝혔지만, 과거 미우라 가즈요시의 해외 이적을 허용한 실적이 있는 도쿄 베르디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결국 이적 협상 기한 마지막 날인 1997년 1월 31일에 당시 '베르디 가와사키'였던 도쿄 베르디로의 이적이 발표되었다[35]。도쿄 베르디가 요코하마 플뤼겔스에 지불한 이적료는 당시 J리그 최고액인 추정 3.5억엔으로 보도되었으나, 축구 작가 도츠카 게이에 따르면 실제로는 구단 간의 협상으로 인해 대폭 삭감되어 2억엔에서 2.5억엔 정도로 정해졌다고 한다[36][37]。마에조노는 이적 기자 회견에서 도쿄 베르디가 해외 이적을 용인했다는 점을 이적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당시 도쿄 베르디의 신임 감독 가토 히사시는 일본 축구 협회(JFA) 강화 위원장 시절 올림픽 대표팀을 지원한 경험이 있어 이전부터 마에조노를 잘 알고 있었으며[38], 선수로서 높이 평가했다[39]。
이후 브라질의 산투스 FC(1998년)와 고이아스 EC(1999년), 일본의 쇼난 벨마레(2000년)에서 임대 선수로 활동했다. 2003년에는 대한민국 K리그의 안양 LG 치타스(현 FC 서울)로 이적했고, 2004년에는 인천 유나이티드 FC에서 활약한 후 은퇴했다.
기간 | 클럽 | 비고 |
---|---|---|
1992년 - 1996년 | 요코하마 플뤼겔스 | |
1997년 - 2002년 | 도쿄 베르디 | |
1998년 중반 - 1998년 말 | 산투스 FC | 임대 이적 |
1999년 | 고이아스 EC | 임대 이적 |
2000년 | 쇼난 벨마레 | 임대 이적 |
2003년 | 안양 LG 치타스 | 현 FC 서울 |
2004년 | 인천 유나이티드 FC |
'''클럽 우승 경력'''
6. 2. 일본 대표팀
마에조노는 일본 대표로서 1995년 다이너스티컵 우승에 기여했다. 다만 결승전에는 경고 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했고, 대회가 끝나기도 전에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 합류를 위해 귀국했다.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에서는 1995년 5월 28일 중화 타이베이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현역 은퇴 후에는 베르디 가와사키 시절 팀 동료였던 라모스 루이 감독의 부름을 받아 일본 비치사커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동했다. 마에조노가 속한 일본 비치사커 대표팀은 2009년 AFC 비치사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09년 FIFA 비치사커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6. 3. 개인
- J리그 베스트 11: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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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園氏、出身地のスポーツ大使辞任 暴行トラブルで引責:朝日新聞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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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園真聖氏、初冠番組が決定 ナレーションは矢口真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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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園真聖、『アングリーバード』で声優初挑戦 ペットの豚から役作りのヒン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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