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도니아 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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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 속주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기원전 168년 마케도니아 정복 이후 기원전 146년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마케도니아 프리마와 마케도니아 세쿤다로 분할되었고, 동로마 제국에 속해 7세기까지 존속했다. 비아 에그나티아의 건설로 로마와 동부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군사적으로도 북쪽의 공격에 대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 로마 공화정 말기 내전의 주요 무대였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브루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로마 제정 시대에는 황제 속주로 전환되기도 했으며, 395년 동로마 제국에 귀속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로마 시대의 그리스 - 자유시 (고전 시대)
자유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자체 법률로 통치되고 외부 세력에 종속되지 않는 도시를 의미하며, 마케도니아 왕국 시대의 암피폴리스, 로마 제국 내의 자치 도시 등 그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 알바니아의 역사적 지역 - 마케도니아 (지역)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왕국으로 존재했고 로마, 비잔티움 제국 시대를 거쳐 오늘날 여러 국가에 걸쳐 있으며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 로마 시대의 알바니아 - 디라키움 공방전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내전 중 디라키움에서 벌어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포위하려 했으나 패배하고 테살리아로 철수했으며, 이는 카이사르의 몇 안 되는 패배 중 하나였지만 폼페이우스의 추격 주저로 카이사르는 전력을 재정비하여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 로마 시대의 알바니아 - 아폴로니아 (일리리아)
아폴로니아는 기원전 588년 그리스인들이 일리리아에 건설한 고대 도시로, 아폴론을 기리는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에 번성했으나 지진과 환경 변화로 쇠퇴하여 현재는 유적지로 남아있다.
마케도니아 속주 | |
---|---|
지도 | |
![]() | |
기본 정보 | |
통칭 | 마케도니아 |
국가 | 로마 제국 |
시대 | 고대 |
수도 | 테살로니키 후기 고대: 테살로니키 (프리마) 스토비 (살루타리스) |
현재 국가 | 그리스 북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
로마자 표기 | Makedonia |
그리스어 표기 | Ἐπαρχία Μακεδονίας |
라틴어 표기 | Provincia Macedoniae |
역사 | |
성립 | 기원전 146년 |
소멸 | 7세기 |
소멸 원인 | 잔존 영토가 테살로니카 테마로 변경됨 |
이전 국가 | 마케도니아 왕국 |
이후 국가 | 테살로니카 테마 |
이후 국가 2 | 스트리몬 테마 |
이후 국가 3 | 디라키움 테마 |
이후 국가 4 | 헬라스 테마 |
정치 | |
정치 체제 | 속주 |
지도자 칭호 | 프로콘술 |
2. 역사
마케도니아 속주는 기원전 168년경 피드나 전투 이후 로마 공화정에 정복당했고, 기원전 146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북쪽으로는 달마티아,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 남쪽으로는 아카이아와 에피루스, 동쪽으로는 트라키아와 접해 있었다.[5]
안티고노스 왕조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패배한 기원전 168년, 로마 공화정은 마케도니아를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하여 지배했다. 기원전 148년, 마케도니아인들이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키자, 로마 장군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이를 진압했다. 이후 기원전 146년에 에피루스 베투스, 테살리아, 일리리아와 트라키아의 일부를 포함하여 마케도니아 속주가 정식으로 발족되었으며, 속주도는 테살로니키에 두었다.[5]
같은 해인 기원전 146년,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코린토스가 파괴되면서 그리스도 로마의 직할령(로마 속주 아카이아)이 되었다.
3세기 혹은 4세기에 마케도니아 속주는 남쪽의 마케도니아 프리마(Prima)와 북쪽의 마케도니아 살루타리스(Salutaris)로 분할되었다. 318년 테트라르키 시대에는 행정 구역 재정의로 마케도니아 프리마와 마케도니아 살루타리스가 마케도니아 관구에 포함되었다. 로마는 4개의 통치령으로 분할되었는데, 그중 일리리쿰 통치령은 마케도니아 관구를 포함한 3개의 관구로 구성되었다. 379년 일리리쿰 통치령이 동서로 분할될 때 마케도니아의 두 속주는 동쪽에 포함되었다. 395년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분할될 때, 마케도니아는 동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2. 1. 마케도니아 전쟁
로마는 기원전 3세기 초에 마케도니아 왕국과 세 차례의 전쟁을 벌였다.[5]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페르세우스를 격파한 후, 로마는 마케도니아 왕정을 폐지하고 마케도니아를 네 개의 종속 공화국으로 나누었다. 이 공화국들의 수도는 각각 암피폴리스, 테살로니카, 펠라, 펠라고니아에 위치해 있었다.[5] 이들은 마케도니아 동맹의 회원국이었다. 화폐 증거에 따르면, 이 시기에 로마 숭배가 도입되었으며, 암피폴리스, 펠라, 테살로니카의 동전에 묘사되었다. 테살리아는 이미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분리되었고, 기원전 194년 로마의 허가를 받아 제우스 엘레우테리우스('자유의')와 아테나 이토니아를 수호신으로 하는 별도의 테살리아 동맹이 창설되었다. 이 동맹의 화폐는 개별 테살리아 도시들의 화폐를 대체했으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6][7]
기원전 150년, 안드리스쿠스 (또는 '가짜 필리포스')에 의해 왕국이 잠시 재통합되었고, 이는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148년 피드나 근처에서 안드리스쿠스를 격파한 후,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는 마케도니아를 로마의 다섯 번째 속주로 만들었다. 이는 기원전 197년에 히스파니아 울테리어와 히스파니아 키테리어가 건설된 이후 최초의 새로운 속주였다. 현존하는 자료는 이 지역을 영구적인 속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방법이나 이유에 대해 명시적으로 논의하지 않는다. 영토 확장에 대한 익숙함 증가, 평화를 유지하는 데 이전 시스템의 실패가 입증된 점, 전리품과 개선을 획득하기 위해 추가 군사 원정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기지 확보에 대한 열망, 그리고 추가 세입에 대한 열망 등 여러 요인이 관련되었을 수 있다. 네 개의 공화국은 속주의 하위 구역으로 계속 존재했으며, 연방 동맹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148년 가을 속주 설립 날짜는 속주 시대의 원년에 의해 표시되지만, 실제로는 점진적인 과정이었을 수 있다.
안티고노스 왕조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패배한 기원전 168년, 로마 공화정은 마케도니아를 로마의 보호국(클리엔테스)으로 하여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 지배했다. 기원전 148년, 마케도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로마의 장군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진압한 후, 기원전 146년에 '''에피루스 베투스''', 테살리아, 그리고 일리리아와 트라키아의 일부도 편입하여 '''마케도니아 속주'''로서 발족, 속주도는 테살로니키에 두었다.
2. 2. 로마 공화정 시대
로마는 기원전 3세기 초에 마케도니아 왕국과 세 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페르세우스를 격파한 후, 로마는 마케도니아 왕정을 폐지하고 마케도니아를 네 개의 종속 공화국으로 나누었다. 이 공화국들은 메리데스(merides)라고 불렸으며, 수도는 각각 암피폴리스, 테살로니카, 펠라, 펠라고니아에 있었다.[5] 이들은 마케도니아 동맹의 회원국이었다. 이 시기에 로마 숭배가 도입되었으며, 암피폴리스, 펠라, 테살로니카의 동전에 묘사되었다.[6][7]
기원전 150년, 안드리스쿠스(가짜 필리포스)에 의해 왕국이 잠시 재통합되었고, 이는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148년 피드나 근처에서 안드리스쿠스를 격파한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는 마케도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영토 확장에 대한 익숙함 증가, 이전 시스템의 실패, 전리품과 개선 획득, 추가 세입 등 여러 요인이 속주 전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8] 네 개의 공화국과 연방 동맹은 속주의 하위 구역으로 계속 존재했다.[5]
마케도니아 속주는 건국 당시 마케도니아 자체, 페오니아, 일리리아의 일부, 남쪽의 테살리아, 서쪽의 에피루스를 포함했다. 명목상 북쪽 경계는 아드리아 해안의 리수스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헤브루스 강까지 뻗어 있었으며, 이 강은 트라키아와의 동쪽 경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경계는 느슨하게 정의되었으며 총독의 군사적 능력에 따라 달라졌다. 키케로는 "마케도니아 총독에게 국경은 항상 칼과 방패로 표시된 것과 같았다"고 주장했다.[8] 수도는 테살로니카였으며 총독은 프로콘술 지위를 가졌다.
기원전 146년 이후, 그나이우스 에그나티우스는 로마 도로인 비아 에그나티아의 건설을 시작했다. 이 도로는 이탈리아의 아피아 가도 종착점 맞은편의 아드리아해 해안에 있는 디라키움에서 시작하여 핀두스 산맥을 가로질러 테살로니카까지 마케도니아를 통과했으며, 거기에서 헤브루스강 동쪽 강둑에 있는 킵셀라까지 이어졌다. 이 도로는 군사적 및 경제적 목적으로 중요했으며, 로마와 동부 지중해 지역의 로마 영토 사이의 주요 육상 연결로를 제공했다.
같은 기원전 146년에는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코린토스가 파괴되고, 그리스도 로마의 직할령이 되었다.
2. 3. 로마 제정 시대
기원전 168년, 안티고노스 왕조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패배하자, 로마 공화정은 마케도니아를 4개의 속국(클리엔테스)으로 분할했다. 기원전 148년,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마케도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마 장군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에게 진압되었다.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 속주'''가 설치되었고, '''에피루스 베투스''', '''테살리아''', '''일리리아'''와 '''트라키아''' 일부가 포함되었다. 속주도는 테살로니카(현 테살로니키)였다.같은 해,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코린토스를 파괴하고, 그리스는 로마의 직할령(로마 속주 아카이아)이 되었다.
3세기 혹은 4세기에 마케도니아 속주는 남쪽의 '''마케도니아 프리마'''(Prima)와 북쪽의 '''마케도니아 살루타리스'''(Salutaris)로 분할되었다.
318년, 테트라르키 (4분 통치) 시대에 행정 구역이 재정의되어 마케도니아 프리마와 마케도니아 살루타리스는 '''마케도니아 관구'''(diocese)에 포함되었다. 로마는 4개의 통치령(prefecture)으로 분할되었고, 그중 일리리쿰 통치령은 마케도니아 관구를 포함한 3개의 관구로 구성되었다. 379년 일리리쿰 통치령이 동서로 분할될 때 마케도니아의 두 속주는 동쪽에 포함되었다. 395년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으로 분할될 때, 마케도니아는 동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3. 행정 구역
기원전 168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안티고노스 왕조가 패배한 후, 로마 공화정은 마케도니아를 로마의 보호국(클리엔테스)으로 삼아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하여 지배했다. 기원전 148년, 마케도니아인들이 반란(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키자, 로마의 장군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이를 진압했다. 이후 기원전 146년에 '''에피루스 베투스''', '''테살리아''', '''일리리아''', '''트라키아'''의 일부를 편입하여 '''마케도니아 속주'''를 발족하고, 속주도는 테살로니키에 두었다.
같은 기원전 146년,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코린토스가 파괴되고, 그리스는 로마의 직할령(로마 속주 아카이아)이 되었다.
3세기 혹은 4세기에 마케도니아 속주는 분할되어 남쪽이 '''마케도니아 프리마'''(Prima), 북쪽이 '''마케도니아 살루타리스'''(Salutaris)가 되었다.
테트라르키 (4분 통치) 시대인 318년에 행정 구역이 재정의되어 마케도니아 프리마와 마케도니아 살루타리스는 '''마케도니아 관구'''(diocese)에 포함되었다. 로마는 4개의 통치령(prefecture)으로 분할되었고, 그 중 하나인 일리리쿰 통치령은 마케도니아 관구를 포함한 3개의 관구로 구성되었다. 379년에 일리리쿰 통치령이 동서로 분할되었지만, 이때 마케도니아의 두 속주는 동쪽에 포함되었다. 395년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으로 분할되었을 때, 마케도니아는 동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4. 경제
에그나티아 가도 건설로 로마 상인을 위한 시설이 마련되고 로마인들의 정착지가 건설되면서 마케도니아 속주는 더욱 발전했다. 로마 제국의 지배는 마케도니아에 새로운 가도와 행정 제도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에 사는 로마인들에게 계급을 막론하고 호경기를 가져왔다. 이 지역에는 풍요로운 농지와 목초지가 있었고,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대규모 지주들은 재산을 축적했다.[35]
생산자 계층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 지역의 기술자와 공예가도 늘어났다. 다양한 상업과 제조업 사업이 늘어나 석공, 탄광부, 대장장이 등이 고용되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로마 세계에서 가정교사, 교직, 의사로 요구되었다.[35]
주요 수출 품목은 농작물과 가축이었고, 그 외에도 철, 구리, 금을 비롯해 목재, 송진, 기름, 삼, 어류 등도 수출되었다. 속주 내 항구(디오, 펠라, 테살로니카, 카산드레이아)도 이 속주에 부를 가져다주었다.[35]
5. 문화
마케도니아는 로마 공화정 말기 내전의 주요 무대 중 하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루비콘 강을 건너 카이사르의 내전을 시작하자, 폼페이우스는 5개 군단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후퇴했다.[12] 약 200명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테살로니키에 망명 원로원을 세웠다.[12] 기원전 48년 초, 카이사르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디라키움을 포위했고, 이 과정에서 메네데모스가 폼페이우스 군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2] 폼페이우스는 다키아 왕국의 왕 부레비스타와 동맹을 제안했지만,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했다.[12]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암살자들은 동쪽으로 도망쳤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에게 속주를 넘기도록 요구했지만, 호르탈루스는 브루투스에게 속주를 넘겼다. 이로 인해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제2차 삼두정치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를 침략,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를 격파했다.[12]
필리피 전투 이후, 마케도니아는 안토니우스에게 할당되었으나,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면서 옥타비아누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2]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293년경)으로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마케도니아 속주는 모에시아 교구에 속했다가, 이후 마케도니아 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교구는 일리리쿰 프라이펙투라를 구성하는 세 교구 중 하나였다. 한편, 마케도니아 속주는 여러 개의 작은 속주로 분할되었다.
- ''에피루스 노바'' ("새로운 에피루스") 또는 ''일리리아 그라이카''[18][19][20]: 디라키움을 수도로 했다.[23]
- ''마케도니아 프리마'' ("제1 마케도니아"): 테살로니키를 수도로 했다.
- ''마케도니아 살루타리스'' ("건강한 마케도니아"), 또는 ''마케도니아 세쿤다'' ("제2 마케도니아"): 스토비를 수도로 했다.
- ''테살리아'': 고대 테살리아 지역을 포함하며, 테살리아 프리마와 테살리아 세쿤다로 세분되었다.
379년 마케도니아 프라이펙투라가 분할되었을 때, 마케도니아 속주는 동부 일리리쿰에 포함되었다. 395년 제국이 영구적으로 분할되면서 마케도니아는 비잔틴 제국으로 넘어갔다.
6. 주요 인물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기원전 27년~서기 14년) 동안 생산 계급의 생활 조건이 개선되면서 이 지역의 장인과 수공업자들이 증가하였다. 석공, 광부, 대장장이 등은 모든 종류의 상업 활동과 수공예에 고용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또한 로마 전역에서 가정교사, 교육자, 의사로 널리 고용되었다.[26]
6. 1. 성직자
- 아가페, 키오니아, 이레네 (304년 사망)
- 아가토푸스, 부제
- 데살로니가 출신 아리스타르코, 1세기
- 데모필루스 (386년 사망),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 데살로니카 출생
- 빌립보의 에파프로디토, 빌립보의 초대 주교
- 가이우스, 데살로니카의 초대 주교
- 두아디라의 루디아, 1세기
- 데살로니카의 마트로나
- 오네시모, 베리아의 초대 주교
- 성 데메트리오스, 수호성인, 306년 순교
- 테오둘루스, 독서가
6. 2. 작가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기원전 27년~서기 14년) 동안 생산 계급의 생활 조건이 개선되면서 이 지역의 장인과 수공업자들이 증가하였다. 석공, 광부, 대장장이 등은 모든 종류의 상업 활동과 수공예에 고용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또한 로마 전역에서 가정교사, 교육자, 의사로 널리 고용되었다.[26]마케도니아 속주 출신의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 암피폴리스의 크라테루스(기원전 100-30년경): 암피아리안 게임의 광시곡 우승자[33]
- 피에리아의 파이드루스(기원전 15년경 – 서기 50년경): 우화 작가
- 테살로니키의 안티파테르(기원전 1세기 후반): 경구 시인 및 도시 총독
- 테살로니키의 필리푸스(서기 1세기 후반): 경구 시인이자 그리스 선집 편찬자
- 아르키아스: 경구 시인
- 안티파네스(1세기 후반): 경구 시인
- 파르메니오(1세기 후반): 경구 시인
- 피에리아의 크리톤: 역사가
- 폴리아에누스(2세기): 군사 작가
- 스토바에우스(5세기): 그리스 작가들의 선집 편집자
- 테살로니키의 마케도니우스(6세기): 그리스 선집의 경구 시인
6. 3. 의사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원전 27년~서기 14년)는 마케도니아에 오랫동안 평화, 번영,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소아시아와 비교했을 때 로마 세계에서의 경제적 위상은 감소했다.[26]경제는 기원전 130년대와 120년대에 비아 에그나티아 건설, 로마 상인들의 도시 정착, 로마 식민지 설립으로 크게 활성화되었다. 제국 정부는 도로와 행정 시스템과 함께 경제적 호황을 가져왔고, 이는 로마 지배 계급과 하층 계급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 광대한 경작지와 비옥한 목초지를 바탕으로, 대규모 지배 가문들은 노예 노동에 기반한 사회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26]
생산 계급의 생활 조건 개선은 이 지역의 장인과 수공업자 증가를 가져왔다. 석공, 광부, 대장장이 등은 모든 종류의 상업 활동과 수공예에 고용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또한 로마 전역에서 가정교사, 교육자, 의사로 널리 고용되었다.[26]
수출 경제는 기본적으로 농업과 축산업에 기반을 두었으며, 철, 구리, 금과 더불어 목재, 송진, 피치, 삼, 아마, 생선과 같은 제품도 수출되었다. 또 다른 부의 원천은 테살로니카와 카산드레이아와 같은 왕국의 항구였다.[26]
7. 로마 총독 목록
악티움 해전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마케도니아를 위임하였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27년까지 북쪽으로 원정을 이끌어 도나우강 남쪽의 모든 지역을 정복했고, 이 공로로 개선식을 거행했다.[13]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의 정착에서 속주는 황제가 임명한 레가투스가 통치하는 황제 속주와 이전에 집정관이나 법무관을 지낸 원로원이 통치하는 원로원 속주로 나뉘었다. 제국의 국경에 대규모 군사력이 주둔하는 대부분의 속주는 황제 속주였지만, 마케도니아는 군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원로원 속주라는 점에서 예외적이었다. 서기 15년, 총독의 부패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자 티베리우스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를 모이시아 총독의 통제를 받는 황제 속주로 전환했지만,[14] 클라우디우스는 서기 44년에 다시 원로원 속주로 만들었다.[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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