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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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수학자이자 예수회 사제였다. 그는 무한소 방법을 개발하여 미적분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카발리에리의 원리를 제시했다. 1616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제자 베네데토 카스텔리를 만나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1629년 볼로냐 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불가분량에 의한 연속체의 새로운 기하학』(1635)과 『집광경』(1632) 등이 있으며, 광학 연구를 통해 반사 망원경 설계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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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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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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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Bonaventura Francesco Cavalieri |
다른 이름 | Bonaventura Cavalerius |
국적 | 이탈리아 |
출생 | 1598년, 밀라노, 밀라노 공국, 합스부르크 스페인 |
사망 | 1647년 11월 30일, 볼로냐, 교황령 |
모교 | 피사 대학교 |
연구 분야 | |
분야 | 수학 |
주요 업적 | 카발리에리의 원리 카발리에리의 구적법 공식 불가분량 방법 극좌표계 |
2. 생애
카발리에리는 밀라노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이탈리아 북부에서 활동했다. 15세에 예수회(예수회와 혼동해서는 안 됨)에 입회하여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얻었고, 평생 예수회 회원으로 남았다.[3] 초기에는 피사 대학교에서 베네데토 카스텔리의 지도로 기하학을 공부하며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교류했다.
1620년대에는 밀라노와 파르마 등지의 수도원에서 신학과 수학 연구를 병행하며 여러 대학에 교수직을 지원했으나 거듭 실패했다. 1626년부터는 통풍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평생 동안 고통받았다.[4] 1629년, 갈릴레오의 지지 덕분에 볼로냐 대학교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1][9]
볼로냐에서 카발리에리는 ''무한소 기하학''을 발표하고 로그 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갈릴레오와 100통이 넘는 서신을 주고받았으며,[5] 마랭 메르센,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빈첸초 비비아니 등 당대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했다.[4] 특히 토리첼리는 카발리에리의 무한소 방법을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1]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글을 쓰기 어려워져 제자 스테파노 데글리 안젤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647년 통풍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4]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598년 ~ 1629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카발리에리는 15세에 예수회(예수회와 혼동해서는 안 됨)[2]에 입회하여 서원자가 되면서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얻었고, 사망할 때까지 회원으로 남았다.[3] 1616년, 17세의 나이로 피사 대학교에서 기하학을 공부했으며, 베네데토 카스텔리의 지도를 받았다. 카스텔리는 아마도 그를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소개했을 것이다.[1]1617년 그는 메디치 궁정에 잠시 합류하여 피렌체에서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의 후원을 받았지만, 다음 해에 피사로 돌아와 카스텔리를 대신하여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볼로냐 대학교의 수학과 교수직에 지원했지만 거절당했다.[1]
1620년, 그는 수련생으로 살았던 밀라노의 예수회로 돌아와 보로메오 추기경 아래에서 부제가 되었다. 밀라노의 산 제롤라모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로디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623년 그는 파르마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지만, 여전히 수학 분야의 직책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볼로냐와 사피엔차 대학교에 지원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1626년 그는 통풍으로 고통받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남은 생애 동안 움직임에 제약을 받았다.[4] 파르마 대학교의 직책에서도 거절당했는데, 그는 그 이유가 당시 파르마가 예수회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예수회 회원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믿었다. 1629년 그는 볼로냐 대학교의 수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갈릴레오가 볼로냐 원로원에 그를 지지한 덕분으로 여겨진다.[1][9]
어린 시절부터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종교학을 배우고 성직자를 지망했지만, 1616년 베네데토 카스텔리를 만나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2. 볼로냐 대학교 교수 시절과 연구 활동 (1629년 ~ 1647년)
카발리에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종교학을 배우고 성직자를 지망했지만, 1616년 피사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제자인 베네데토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it를 만나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밀라노나 파르마의 수도원에서 근무하면서 수학 연구를 계속하여, 1626년에 볼로냐 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요하네스 케플러의 『포도주 통의 측정』(Nova stereometria doliorum vinariorum)과 함께 근대적 구적법의 시조로 여겨지며, 1635년에 『불가분량에 의한 연속체의 새로운 기하학|Geometria indivisibilibus continuorum novapt』(Geometria indivisibilibus continuorum nova quadam ratione promota)을 발표했다. 카발리에리의 원리로 이름을 남겼다.이 외에 천문학이나 점성술 등에도 정통하여, 관련 저작을 발표했다.
3. 주요 업적
카발리에리는 1632년부터 1646년까지 천문학, 시각학, 운동, 기하학 문제를 다룬 11권의 책을 출판했다.
1632년에 처음 출판되어 1650년에 재판된 Lo Specchio Ustorio, overo, Trattato delle settioni coniche|로 스페키오 우스토리오, 오베로, 트라타토 델레 세티오니 코니케|집광 거울 또는 원뿔 곡선에 관한 논문it에서[6] 그는 포물선, 쌍곡선, 타원으로 형상화된 거울과 그 조합에 대한 이론을 개발했다. 아르키메데스가 거울을 사용하여 시라쿠사로 접근하는 로마 함대를 불태울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자 했으며,[9][7] 포물선, 쌍곡선, 타원 거울의 초점에서 이미지에 최소한의 간섭이 있음을 증명했다.[9][8] 또한, 포물선, 쌍곡선, 타원에서의 빛의 반사와 관련된 여러 성질을 증명했다.[9]
그는 반사 망원경에 대한 이론적 설계를 제시했는데, 세 가지 다른 개념을 설명했다. 첫 번째는 크고 오목한 거울이 작고 볼록한 거울로 빛을 반사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요 절두 포물면 거울과 볼록 거울, 세 번째는 볼록 렌즈 대신 오목 렌즈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9]
말년에 카발리에리는 천문학에 관한 두 권의 책, Nuova pratica astrologica|누오바 프라티카 아스트롤로지카it(1639)와 Trattato della ruota planetaria perpetua|트라타토 델라 루오타 플라네타리아 페르페투아la(1646)를 출판했다. 비록 점성술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는 점성술을 믿거나 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로그 표를 출판하고,[4][1][5] 수력 펌프를 제작하기도 했다.[5]
3. 1. 불가분량의 방법과 카발리에리의 원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전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카발리에리는 무한소 방법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기하학적 접근 방식을 미적분학에 도입했고, 이에 대한 논문인 Geometria indivisibilibus continuorum nova quadam ratione promota|연속체의 무한소를 통한 새로운 방법에 의해 발전된 기하학la을 출판했다. 이 논문은 1627년에 쓰여졌지만 1635년에 출판되었다.[1] 이 연구에서 카발리에리는 도형의 '모든 선' 또는 '모든 평면'으로 지칭되는 개체를 고려했는데, 이는 도형의 면적과 부피에 각각 비유될 수 있는, 도형 내의 무한히 많은 수의 평행한 선 또는 평면이다. 이후의 수학자들은 그의 방법을 개선하여 '모든 선'과 '모든 평면'을 면적과 부피와 동등하거나 같다고 취급했지만, 카발리에리는 연속체의 구성에 대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두 가지가 비교 가능하지만 같지는 않다고 주장했다.[1]이러한 평행 요소들은 각각 면적과 부피의 무한소라고 불리며, 카발리에리의 방법의 구성 요소이자 적분 미적분학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는 또한 무한소 방법을 사용하여 현재 으로 쓰여지는 결과를 계산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다른 도형으로 일반화한 아르키메데스 나선에 갇힌 면적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예를 들어 원뿔의 부피가 그것을 외접하는 원기둥 부피의 3분의 1임을 보였다.[11]
무한소 방법의 즉각적인 적용은 카발리에리의 원리인데, 이는 두 물체의 해당 단면의 면적이 모든 경우에 같으면 두 물체의 부피가 같다는 것을 명시한다. 두 단면은 선택된 기준 평면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평면과의 교차점인 경우 서로 대응한다. (같은 원리는 이전에 중국의 조충지(480–525)에 의해 구의 부피를 계산하는 특별한 경우에 사용되었다.[12])
카발리에리가 제시한 무한소 방법은 강력했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유용성이 제한되었다. 첫째, 카발리에리의 증명은 직관적이었고 나중에 정확한 것으로 입증되었지만, 엄밀하지 않았다. 둘째, 그의 글은 난해하고 모호했다. 많은 동시대 수학자들이 무한소 방법을 발전시켰지만, Geometria indivisibilibus|연속체의 무한소la에 대한 비판적인 반응은 심각했다. 앙드레 타케와 파울 굴딘 모두 Geometria indivisibilibus|연속체의 무한소la에 대한 응답을 출판했다. 굴딘의 특히 심도 있는 비판은 카발리에리의 방법이 요하네스 케플러와 바르톨로메오 소베로의 연구에서 파생되었으며, 엄밀성의 부족으로 그의 방법을 공격했고, 두 무한대 사이에는 의미 있는 비율이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를 다른 하나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4][1]
카발리에리의 ''Exercitationes geometricae sex'' (''6개의 기하학적 연습'', 1647)은 굴딘의 비판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여 쓰여졌다. 처음에는 갈릴레오의 방식처럼 대화 형식으로 초안이 작성되었지만, 통신원들은 불필요하게 선동적일 수 있다며 그 형식을 반대했다. 표절 혐의는 근거가 없었지만, ''Exercitationes''의 많은 부분이 굴딘의 주장의 수학적 내용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위선적으로 그의 연구가 '모든 선'을 도형의 면적과는 별개의 개체로 간주한다고 주장한 다음, '모든 선'과 '모든 평면'은 절대적인 무한대가 아니라 상대적인 무한대를 다루며, 따라서 비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Exercitationes''는 무한소 방법에 상당한 개선을 나타냈다. 그는 변환을 적용하여 이전의 적분 결과를 일반화하여, n=3에서 n=9까지 임을 보였으며, 이는 현재 카발리에리의 구적 공식으로 알려져 있다.[4][11]
3. 2. 카발리에리의 구적 공식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전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카발리에리는 무한소 방법이라는 새로운 기하학적 접근 방식을 미적분학에 도입했고, 이에 대한 논문인 ''Geometria indivisibilibus continuorum nova quadam ratione promotala''(연속체의 무한소를 통한 새로운 방법에 의해 발전된 기하학)을 출판했다. 이 논문은 1627년에 쓰여졌지만 1635년에 출판되었다.[1] 이 연구에서 카발리에리는 도형의 '모든 선' 또는 '모든 평면'으로 지칭되는 개체를 고려했는데, 이는 도형의 면적과 부피에 각각 비유될 수 있는, 도형 내의 무한히 많은 수의 평행한 선 또는 평면이다.[1]이러한 평행 요소들은 각각 면적과 부피의 무한소라고 불리며, 카발리에리의 방법의 구성 요소이자 적분 미적분학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는 또한 무한소 방법을 사용하여 현재 으로 쓰여지는 결과를 계산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다른 도형으로 일반화한 아르키메데스 나선에 갇힌 면적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예를 들어 원뿔의 부피가 그것을 외접하는 원기둥 부피의 3분의 1임을 보였다.[11]
이후 그는 변환을 적용하여 이전의 적분 결과를 일반화하여, n=3에서 n=9까지 임을 보였으며, 이는 현재 카발리에리의 구적 공식으로 알려져 있다.[4][11]
3. 3. 광학 연구와 반사 망원경
카발리에리는 1632년부터 1646년까지 천문학, 시각학, 운동, 기하학 문제를 다룬 11권의 책을 출판했다. 카발리에리의 첫 번째 저서는 1632년에 처음 출판되어 1650년에 재판된 Lo Specchio Ustorio, overo, Trattato delle settioni coniche|로 스페키오 우스토리오, 오베로, 트라타토 델레 세티오니 코니케it (, 집광 거울 또는 원뿔 곡선에 관한 논문)이었다.[6] ''Lo Specchio Ustorio''의 목적은 아르키메데스가 거울을 사용하여 시라쿠사로 접근하는 로마 함대를 불태울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9][7] 이 책은 이 목적을 넘어 원뿔 곡선, 빛의 반사, 포물선의 성질도 탐구했다. 이 책에서 그는 포물선, 쌍곡선, 타원으로 형상화된 거울과 이러한 거울의 다양한 조합에 대한 이론을 개발했다. 그는 나중에 밝혀진 바와 같이 빛이 유한하고 결정된 속도를 갖는다면, 당시 기술로는 제작할 수 없었던 거울이 필요했지만, 포물선, 쌍곡선 또는 타원 거울의 초점에서 이미지에 최소한의 간섭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은 당시 존재했던 망원경보다 더 나은 이미지를 생성했을 것이다.[9][8]그는 또한 곡선의 몇 가지 성질을 증명했다. 첫 번째는 포물선의 축에 평행한 빛줄기가 초점을 통과하도록 반사될 경우, 입사각과 반사각의 합이 다른 유사한 광선의 합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쌍곡선과 타원에 대해 유사한 결과를 증명했다. 반사 망원경 설계에 유용한 두 번째 결과는, 포물선의 외부 점으로부터 초점으로 선을 연장하면 포물선의 외부 표면에서 이 선의 반사가 축에 평행하다는 것이다. 다른 결과로는, 선이 쌍곡선과 외부 초점을 통과하면 쌍곡선의 내부에서 반사된 빛이 내부 초점을 통과한다는 성질, 이전의 역으로, 포물선을 통과하여 내부 초점을 향하는 광선이 외부 표면에서 반사되어 외부 초점으로 향한다는 성질, 그리고 선이 타원의 한 내부 초점을 통과하면 타원의 내부 표면에서 반사된 빛이 다른 내부 초점을 통과한다는 성질이 있다. 이러한 성질 중 일부는 이전에 언급되었지만, 카발리에리는 많은 성질에 대한 최초의 증명을 제시했다.[9]
''Lo Specchio Ustorio''에는 실용적인 사용을 위한 반사 표면과 반사 방식에 대한 표도 포함되어 있다.[9]
카발리에리의 연구에는 또한 거울을 사용하는 새로운 유형의 망원경인 반사 망원경에 대한 이론적 설계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처음에 아르키메데스의 거울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개발되었고, 이후 망원경으로 훨씬 작은 규모로 적용되었다.[9][10] 그는 자신의 망원경 모델에 반사 거울을 통합하는 세 가지 다른 개념을 설명했다. 첫 번째는 태양을 향한 크고 오목한 거울이 두 번째로 작고 볼록한 거울로 빛을 반사시키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카발리에리의 두 번째 개념은 주요 절두 포물면 거울과 두 번째 볼록 거울로 구성되었다. 그의 세 번째 옵션은 볼록한 보조 렌즈를 오목 렌즈로 대체하여 이전 개념과 매우 유사했다.[9]
3. 4. 기타
카발리에리는 1632년부터 1646년까지 천문학, 시각학, 운동, 기하학 문제를 다룬 11권의 책을 출판했다.말년에 카발리에리는 천문학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비록 그 책들이 점성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는 텍스트에서 자신이 점성술을 믿거나 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 책들은 Nuova pratica astrologicait(1639)와 Trattato della ruota planetaria perpetuala(1646)였다.
그는 천문학과 지리학 분야에서 실용적인 사용을 강조하며 로그 표를 출판했다.[4][1][5]
카발리에리는 또한 자신이 관리하던 수도원을 위해 수력 펌프를 제작했다. 만토바 공작은 이와 유사한 펌프를 얻었다.[5]
4. 비판과 논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카발리에리는 미적분학에 무한소 방법이라는 새로운 기하학적 접근 방식을 도입하고, ''연속체의 무한소를 통한 새로운 방법에 의해 발전된 기하학''(Geometria indivisibilibus continuorum nova quadam ratione promotala)을 출판했다. 많은 수학자들이 그의 방법을 개선했지만, 카발리에리의 방법에 대한 비판적인 반응은 매우 강했다.[1]
앙드레 타케와 파울 굴딘은 Geometria indivisibilibusla에 대한 반박을 출판했다. 특히 굴딘은 카발리에리의 방법이 요하네스 케플러와 바르톨로메오 소베로의 연구에서 파생되었으며, 엄밀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두 무한대 사이에는 의미 있는 비율이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를 다른 하나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4][1]
카발리에리는 굴딘의 비판에 대응하여 ''6개의 기하학적 연습''(Exercitationes geometricae sexla)(1647)을 썼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모든 선'을 도형의 면적과는 별개의 개체로 간주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선'과 '모든 평면'은 절대적인 무한대가 아니라 상대적인 무한대를 다루며, 따라서 비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었다.[1]
5. 영향
질-가스통 그랑제에 따르면, 카발리에리는 뉴턴, 라이프니츠, 파스칼, 월리스, 매클로린과 함께 17~18세기에 "수학적 객체를 재정의"한 인물 중 하나이다.[13]
달 분화구 카발리에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저서
카발리에리는 1632년부터 1646년까지 천문학, 시각학, 운동, 기하학 문제를 다룬 11권의 책을 출판했다.[6]
1632년에 처음 출판되어 1650년에 재판된 카발리에리의 첫 번째 저서는 Lo Specchio Ustorio, overo, Trattato delle settioni conicheit (''집광 거울 또는 원뿔 곡선에 관한 논문'')이었다.[6] 이 책에서 그는 포물선, 쌍곡선, 타원으로 형상화된 거울과 이러한 거울의 다양한 조합에 대한 이론을 개발했다.[9][8] 또한 반사 망원경 설계에 유용한 몇 가지 성질을 증명했다.[9] ''Lo Specchio Ustorio''에는 실용적인 사용을 위한 반사 표면과 반사 방식에 대한 표도 포함되어 있었다.[9] 카발리에리는 이 연구에서 거울을 사용하는 새로운 유형의 망원경인 반사 망원경에 대한 이론적 설계를 제시하기도 했다.[9][10]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카발리에리는 무한소 방법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기하학적 접근 방식을 미적분학에 도입했고, 이에 대한 논문인 Geometria indivisibilibus continuorum nova quadam ratione promotala (''연속체의 무한소를 통한 새로운 방법에 의해 발전된 기하학'')을 1635년에 출판했다. (1627년 작성)[1] 이 연구에서 카발리에리는 도형 내의 무한히 많은 수의 평행한 선 또는 평면을 고려했는데, 이는 도형의 면적과 부피에 각각 비유될 수 있다.[1] 그는 무한소 방법을 사용하여 현재 으로 쓰여지는 결과를 계산했고, 이를 다른 도형으로 일반화했다.[11] 또한 카발리에리의 원리를 제시했는데, 이는 두 물체의 해당 단면의 면적이 모든 경우에 같으면 두 물체의 부피가 같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이전에 중국의 조충지가 구의 부피를 계산하는 데 사용한 바 있다.[12]
카발리에리의 방법은 강력했지만, 그의 증명은 직관적이었고 엄밀하지 않았으며, 글은 난해하고 모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 앙드레 타케와 파울 굴딘은 Geometria indivisibilibusla에 대한 비판을 출판했다.[4][1]
카발리에리는 1647년에 굴딘의 비판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여 ''Exercitationes geometricae sex'' (''6개의 기하학적 연습'')을 썼다.[1] 그는 이 책에서 변환을 적용하여 이전의 적분 결과를 일반화하고, n=3에서 n=9까지 임을 보였다. 이는 현재 카발리에리의 구적 공식으로 알려져 있다.[4][11]
말년에 카발리에리는 천문학에 관한 두 권의 책, Nuova pratica astrologicait(1639)와 Trattato della ruota planetaria perpetuala(1646)를 출판했다. 그는 이 책들에서 자신이 점성술을 믿거나 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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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cing it T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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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Bonaventura Francesco Cavali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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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Bonaventura Cavalieri, Marin Mersenne, and the Reflecting Telesc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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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ume 3; Mathematics and the Sciences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Caves Books, Ltd. Taipei
[13]
서적
Formes, opérations, obj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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