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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콘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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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스콘티 가문은 11세기 밀라노에서 등장하여, 피사와 사르데냐, 밀라노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와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명문 귀족 가문이다. 이들은 피사에서 귀족으로 시작하여, 13세기에는 밀라노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14세기에는 밀라노 공작으로서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 예술과 문학을 후원하고, 유럽의 여러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으며 유럽 문화에도 기여했다. 비스콘티 가문은 다양한 분가를 형성하며, 정치,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15세기에 스포르차 가문에 의해 밀라노 공작 지위를 잃으면서 그들의 통치는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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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콘티가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가문 이름비스콘티 가문
로마자 표기Visconti
다른 이름일 카사토 데이 비스콘티
기원밀라노
국가[[파일:Flag of Milan.svg|20px|border]] 밀라노 영주권
[[파일:Flag of Milan.svg|20px|border]] 밀라노 공국
설립일1075년
설립자아리프란도 비스콘티
마지막 통치자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모토Vipereos mores non violabo
모토 번역나는 뱀의 관습을 위반하지 않겠다
분가비스콘티 디 모드론
작위
작위밀라노의 군주 (1277–1395)
밀라노 공작 (1395–1447)
파비아 백작 (1360–1447)
안게라 백작 (1277–1447)
마시노 영주 (1134–18세기 후반)
소유 영토밀라노
파비아
마시노
문장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 (1277년)
어원
어원vice: "대리" - comes: "백작"

2. 피사와 사르데냐의 비스콘티 가문

수탉을 묘사한 갈루라의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


피사에서 처음 언급된 비스콘티는 귀족 알베르토 비스콘티이다. 알베르토의 아들 엘디치오는 1184년부터 1185년까지 콘술을 지냈다. 엘디치오의 아들 람베르토와 우발도 1세는 피사와 사르데냐에 가문의 영향력을 높였는데, 둘 다 귀족 지위를 지녔고 ''포데스타''로 복무하였다.

1212년, 친 비스콘티 세력과 반 비스콘티 세력이 피사의 지배권을 두고 충돌하였다. 1213년 1월, 칼리아리의 굴리엘모 1세가 이끈 반 비스콘티 세력 연합이 마사 근처 전투에서 비스콘티 측을 격파했다. 이후 피사는 비스콘티 가문이 포함된 4명의 ''렉토레스''에게 권력이 분산되었다. 사르데냐의 비스콘티 가문은 그 세기 말까지 피사 정치에 참여했으나, 1213년 이후로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엘디치오는 칼리아리의 토르키토리오의 딸과 결혼하여 람베르토와 우발도를 낳았다. 1207년, 람베르토는 갈루라의 바리소네 2세의 상속녀 엘레나와 결혼하여 치비타를 수도로 한 사르데냐 동북부 지배권을 확보했다. 1215년, 그와 우발도는 추가적으로 사르데냐 섬 남부 칼리아리의 주디카토에서 패권을 획득했다. 람베르토의 아들 우발도 2세는 결혼 동맹을 통해 잠시 루구도로를 확보하기도 했다. 반세기 후, 피사인들의 영향력은 비스콘티 가문과 다른 피사 (게라르데스키, 카프라이아) 및 사르데냐 (라콘, 베잘루) 명가들과의 결혼 덕분에 지속되었다.

2. 1. 갈루라의 비스콘티 통치자들


  • 람베르토 (1207년–1225년)
  • 우발도 (1225년–1238년)
  • 조반니 (1238년–1275년)
  • 니노 (1275년–1298년)
  • 조안나 (1298년–1308년)


니노 비스콘티의 아내 베아트리체 데스테는 1300년 6월 24일에 밀라노의 군주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와 재혼하였다. (베아트리체 데스테는 1334년 9월 15일 사망) 조안나는 밀라노 계열의 아초네 비스콘티의 이복누이이다.

3.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

밀라노의 비스콘티 문장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 광장에 있는 대주교 관저에 있는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은 오토네가 1277년에 경쟁 가문인 델라 토레 가문에게서 도시의 지배권을 획득하면서 시작되었다.[3] 비록 가문에서는 그들의 기원을 전설로서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수수하고 초라한 시작이었다. 비스콘티 가문은 12세기부터 마조레 호수 위에 있는 마시노의 영주 지위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비스콘티 가문은 마조레 호수와 티치노 강 서쪽 고지의 전략적 장소였고, 대주교의 가신으로 12세기 이래 거주했던 마시노의 영주였다. 가문의 성은 "대리 백작(deputy counts)"을 의미하는 라틴어 comitis에서 파생되었다.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대주교인 란돌포(979- 998)가 영지에 부여한, 주교로부터 봉건 혜택을 얻은 가신 가문이라고 보여진다. 비스콘티 가문이 마리아노의 대리주권을 가졌다는 내용의 관련 문서는 1157년부터 발견된다. 1070년 이전에 그들은 이미, 이후 모든 남성 자손들에게 세습되는 공공 대리백작 사무소를 얻었다. 얼마 후 가족은 몇 개의 분가로 나뉘었고 그 중 일부는 밀라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지를 가졌다.

오토네 비스콘티의 권한은 1262년 7월 22일 밀라노 대주교로 교황 우르바노 4세에 의해 부여되었고, 그의 주권과 봉신들의 지원을 받아 델라 토레 가문이 이끄는 대중파에 대한 오랜 투쟁에서 1277년 데시오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의 증손자인 마테오 1세(1250-1322)는 1287년에 민중의 수장으로 선출되었고, 1288년 황제 루돌프는 대리권을 수여했다.

3. 1. 밀라노의 군주와 공작

비스콘티 가문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밀라노를 지배했는데, 처음에는 영주로, 그 후 1395년부터는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를 중심으로 밀라노 공국의 공작으로서 통치했다.[2] 잔 갈레아초는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 통일을 추진했던 강력한 군주였다.

1385년 잔 갈레아초는 그의 삼촌인 베르나보 비스콘티를 체포하여 권좌에서 몰아내고 비스콘티 영토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베르나보는 트레초 술라다 성에 투옥되었다가 몇 달 후 독살된 식사를 하고 사망했다.

1385년 5월 6일, 베르나보 비스콘티가 조카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사람들에게 체포됨 (19세기 판화)


잔 갈레아초는 파비아 대학교를 지원하고, 파비아 성의 도서관을 발전시키는 등 학문과 예술을 후원했다. 1395년, 잔 갈레아초는 신성 로마 제국의 벤체슬라스 4세 왕으로부터 100000florins에 밀라노 공작 작위를 얻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스콘티 영토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 도달했다.

잔 갈레아초는 1402년 페스트 또는 통풍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사후, 밀라노 공국은 위기를 겪었지만, 그의 아들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다시 권력을 회복하고 비스콘티 가문의 통치를 이어갔다.

3. 1. 1. 영주 지위로의 부상

오토네는 1262년 교황 우르바노 4세에 의해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경쟁 가문인 델라 토레 가문과의 권력 투쟁을 야기했다.[3] 교황은 델라 토레 가문의 후보인 라이몬도 델라 토레보다 오토네를 더 선호했다. 1277년 데시오 전투에서 델라 토레 가문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오토네는 밀라노에 입성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비스콘티 가문의 밀라노 통치 기반을 마련했다.[3]

오토네는 처음에 밀라노의 권력을 시모네 오렐리에게 인민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맡겼다. 1287년, 그는 이 직책을 자신의 증손자인 마테오 비스콘티에게 넘겼다. 1년 후, 마테오는 황제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로부터 황제 대리 칭호를 받았다. 1295년 오토네가 사망하면서 마테오가 밀라노의 새로운 영주가 되었다.

1302년, 델라 토레 가문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마테오는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1311년, 황제 헨리 7세가 두 가문 사이의 분쟁을 진정시키면서 마테오는 영주 지위를 회복했다. 이후 그의 자손 7명이 4대에 걸쳐 밀라노와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영토를 통치했다.

1277년 1월 21일, 델라 토레 가를 상대로 데시오에서 승리를 거둔 후, 대주교 오토네 비스콘티가 밀라노에 입성하다 (14세기 프레스코화 안제라의 로카 보로메오).

3. 1. 2. 통치자들과 그 가문

이름재위 기간비고
오토네 비스콘티(en)1277년 - 1278년, 1282년 - 1295년[2]1262년부터 밀라노 대주교. 밀라노의 시뇨레(僭主, 봉신). 밀라노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성을 강화한 시기.
마테오 1세 비스콘티(en)1287년 - 1302년, 1311년 - 1322년오토네의 조카의 아들. 밀라노 僭主. 그의 동생 우베르토의 16대손이 영화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1322년 - 1327년마테오 1세의 아들. 밀라노 僭主.
아쪼네 비스콘티(en)1329년 - 1339년갈레아초 1세의 아들. 밀라노 僭主.
조반니 비스콘티1339년 - 1354년갈레아초 1세의 동생. 밀라노 僭主. 밀라노 대주교(재위: 1342년 - 1354년).
루키노 비스콘티1339년 - 1349년갈레아초 1세, 조반니 1세의 동생. 밀라노 僭主.
마테오 2세 비스콘티1354년 - 1355년갈레아초 1세와 조반니 1세의 동생 스테파노의 아들. 밀라노 僭主.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1354년 - 1378년마테오 2세의 동생. 밀라노 僭主.
베르나보 비스콘티1354년 - 1385년마테오 2세, 갈레아초 2세의 동생. 밀라노 僭主.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1378년 - 1395년(僭主), 1395년 - 1402년(공작)갈레아초 2세의 아들. 1386년 밀라노 대성당 건설 시작. 1395년 신성 로마 제국 벤첼에 의해 최초로 밀라노 공작 칭호 받음. 비스콘티 가문의 전성기.
조반니 마리아 비스콘티1402년 - 1412년잔 갈레아초의 아들. 1402년, 어머니의 섭정 아래 밀라노 공작이 됨.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1412년 - 1447년조반니 마리아의 동생. 1412년 형이 암살당하고 밀라노 공작이 됨.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필리포 마리아의 서출 딸이자 유일한 자녀. 아버지 필리포 마리아의 사후, 남편인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이 되고, 그 지위는 스포르차 가에 찬탈당함.
루키노 비스콘티-20세기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테오발도 비스콘티 (1210년 - 1276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재위 1271년 - 1276년).

3. 1. 3. 비앙카 마리아와 발렌티나의 상속자, 밀라노 공작 (1450-1535)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아들 조반니 마리아(1389-1412)와 필리포 마리아(1392-1447)가 밀라노 공작을 계승하면서 비스콘티 가문은 단절되었다.[2] 필리포 마리아 사후, 그의 딸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와 결혼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을 계승하였다.[2]

3. 2. 정치적 발전과 밀라노의 영토적 패권



비스콘티 가문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오토네는 1277년에 경쟁 가문인 델라 토레 가문에게서 밀라노의 지배권을 획득했다.[3] 비스콘티 가문은 그들의 기원을 전설로서의 형태로 주장하는걸 좋아했지만, 실제로는 꽤나 수수하고 초라한 시작이었다. 밀라노를 통치했던 비스콘티 가문의 기원은 12세기부터 마조레 호수 위에 있는 마을인 마시노(오늘날의 마시노비스콘티)의 영주 지위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1310년 12월, 신성 로마 황제 헨리 7세의 주도로 델라 토레 가문과의 화해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 자리에는 마테오, 그의 형제 우베르토, 그리고 사촌인 로드리시오가 참석했다. 이후 약 11년 동안 마테오는 밀라노의 영주로서 단독으로 통치하면서 가문에게 밀라노의 세습 영주권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델라 토레 가문과 교황과 동맹을 맺은 앙주 왕조에 맞서 밀라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점술과 이단 혐의로 고발되어 교회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 화해를 모색하던 그는 장남 갈레아초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밀라노를 떠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인 크레센차고로 가서 1322년 사망했다.

마테오 사후, 갈레아초는 그의 형제 마르코, 루키노, 스테파노, 그리고 성직자인 조반니를 상속받은 영토의 통치에 참여시켰다. 5년 후 갈레아초는 사망했고, 그의 아들 아쪼네가 계승하여 1329년부터 1339년까지 통치했다. 스테파노는 제노바 출신의 발렌티나 도리아와 결혼했고, 1327년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그는 마테오 2세, 베르나보, 갈레아초 2세 세 아들을 남겼다. 마르코는 1329년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다.

아쪼네 통치 시대에, 1310년 델라 토레 가문과의 화해에 참석했던 마테오의 사촌 로드리시오가 반기를 들고 자신의 가문에 유리하도록 계승 순위를 바꾸려고 시도했으나, 1339년 파라비아고 전투에서 아쪼네가 이끄는 군대와 그의 삼촌 루키노와 조반니의 지원을 받아 패배했다. 아쪼네는 1339년 아들을 남기지 않고 사망했고, 권력은 루키노와 (1342년부터 밀라노 대주교였던) 조반니에게 넘어갔다.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마테오 2세, 베르나보, 갈레아초 2세는 루키노에 대한 음모를 꾸민 혐의를 받아 밀라노를 떠났다.

1349년 루키노가 사망하자 밀라노 대주교 조반니가 단독으로 권력을 잡고 마테오 2세, 베르나보, 갈레아초 2세를 밀라노로 불러들였다. 그의 통치 아래 제노바와 볼로냐까지 영토 확장이 계속되었다. 그는 조카들을 북부 이탈리아 인근 귀족 가문의 구성원들과 결혼시켰다. 1340년 마테오 2세는 에지디오라 곤자가와, 1350년 베르나보는 레지나 델라 스칼라와, 갈레아초 2세는 사보이아의 비앙카와 결혼했다. 1353년 페트라르카는 조반니의 초청을 받아 밀라노로 이주하여 1361년까지 거주하며 비스콘티 가문의 외교적 계획에 참여했고, 그의 편지에 밀라노에서의 생활과 비스콘티 가문의 사건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남겼다.

페트라르카는 1353년부터 1361년까지 밀라노에 거주하며 그의 편지에 비스콘티 궁정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남겼다.(알티키에로 다 베로나의 초상화)


1354년 10월 5일, 조반니 대주교가 사망했다. 며칠 후 페트라르카는 그를 기리는 기념 연설을 했다. 같은 달, 마테오 2세, 베르나보, 갈레아초 2세는 권력을 공유하고 비스콘티 영지를 지리적 기준에 따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마테오 2세는 이듬해 사망했고, 베르나보와 갈레아초 2세는 그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두 형제는 각각 다른 곳에 궁정을 두었는데, 베르나보는 밀라노에, 갈레아초 2세는 파비아에 두었다. 베르나보와 갈레아초 2세는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여러 유럽 귀족 가문과 비스콘티 가문의 관계를 확대했다.

1360년, 갈레아초 2세의 아들인 잔 갈레아초는 프랑스 장 2세 국왕의 딸인 발루아의 이사벨과 결혼했다. 이 결혼 협상을 위해 페트라르카가 파리로 갔다. 비스콘티 가문은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지불한 몸값에 을 기여했는데, 이는 백년전쟁의 한 사건이었다. 1368년 갈레아초 2세의 딸 비올란테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 국왕의 세 번째 아들인 클라렌스 공작 라이오넬과 결혼했다. 1377년 남편이 사망한 후, 비올란테는 몬페라토 후작 세콘도토와 결혼했고, 다시 과부가 된 후에는 1381년 베르나보의 아들 중 한 명인 사촌 로도비코와 결혼했다.

베르나보와 레지나 델라 스칼라 사이에는 15명의 자녀가 있었다. 아홉 명의 딸들(타데아, 비리디스, 발렌티나, 아녜세, 안토니아, 마달레나, 앙글레시아, 엘리사베타, 루치아)은 유럽 왕가의 사람들과 결혼하여 비스콘티 가문을 비텔스바흐 가(타데아, 마달레나, 엘리사베타), 합스부르크 가(비리디스), 푸아티에-루시냥 가(발렌티나, 앙글레시아), 뷔르템베르크 가(안토니아), 곤자가 가(아녜세), 홀란드 가(루치아)와 연결했다. 그들의 아들 마르코와 카를로는 각각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와 아르마냐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했다. 베르나보의 또 다른 딸 카테리나는 1380년에 사촌 잔 갈레아초와 결혼했다.

1378년 갈레아초 2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 잔 갈레아초는 비스콘티 영토의 절반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조카보다 28살 많은 베르나보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려고 했다. 두 비스콘티는 다른 성격과 통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데, 베르나보는 본능적이고 괴팍하며 공포 정치를 세웠고, 잔 갈레아초는 신중하고 백성들에게 비교적 온화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두 비스콘티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1385년, 베르나보는 조카 잔 갈레아초에 의해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잔 갈레아초는 그의 장군들(자코포 달 베르메, 안토니오 포로, 구글리엘모 베빌라쿠아)과 중무장한 호위대와 함께 파비아에서 바레세 근처 벨라테의 산타 마리아 델 몬테로 순례 여행을 떠났고, 다음 날 밀라노에서 베르나보를 만나 체포했다. 베르나보의 영지 백성들, 특히 밀라노 사람들은 즉시 잔 갈레아초에게 복종했다. 트레초 술라다 성에 투옥된 베르나보는 몇 달 후 독살된 식사를 한 후 사망했다.

베르나보의 죽음으로 잔 갈레아초는 비스콘티 영토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베르나보와 함께 체포된 그의 두 아들(루도비코와 로돌포)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냈다. 잔 갈레아초는 궁정을 위해 밀라노보다 파비아를 선호했고, 지역 대학교를 지원했다. 그의 딸 발렌티나는 1389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실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잔 갈레아초와 카테리나는 두 아들을 두었다. 1388년에 태어난 조반니 마리아와 1392년에 태어난 필리포 마리아이다. 1395년, 잔 갈레아초는 에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스 4세 국왕으로부터 밀라노 공작 작위를 얻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스콘티 영토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 도달했다. 이전 영토 중에서는 대주교 조반니가 통치하는 제노바만이 제외되었다. 페스트 또는 통풍으로 추정되는 짧은 질병 이후, 잔 갈레아초는 1402년 9월 3일에 사망했다.

잔 갈레아초의 예상치 못한 죽음은 비스콘티 궁정에 심각한 어려움을 야기했다. 겨우 12세와 10세였던 두 아들은 잔 갈레아초의 유언에 따라 섭정으로서 행동한 어머니 카테리나의 보살핌을 받았다. 카테리나를 지지하는 섭정 평의회가 설립되었지만, 곧 내부에서 대립이 나타났다. 1404년, 조반니 마리아가 새로운 밀라노 공작이 되었으나, 어머니의 반대자들의 영향 아래 통치하며 어머니를 몬차로 떠나도록 유도했고, 그곳에서 1404년 10월 17일, 그녀는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사망했다.

조반니 마리아 통치 기간 동안 정치 위기는 악화되었다. 잔 갈레아초의 장군 중 한 명인 파치노 카네는 비안드라테 백작 작위를 얻었고 비스콘티 영토에서 상당한 권력을 얻었다. 다른 지역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영토 통합이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412년 파치노 카네가 사망하고 조반니 마리아에 대한 음모로 그가 암살당하면서 끝났다. 같은 해, 그의 형제 필리포 마리아는 파치노 카네의 미망인인 텐다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했는데, 그녀와 결혼하는 비스콘티 가문에게 유리한 유언장 조항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 결혼은 베아트리체에 대한 간통 혐의, 그녀의 투옥, 그리고 1418년 비나스코 성에서 집행된 사형 선고로 끝났다.

1428년, 필리포 마리아는 사보이의 마리아와 결혼했지만, 아들이 없었다. 1425년, 그의 정부인 아녜세 델 마이노는 사생아 딸인 비안카 마리아를 낳았다. 1432년, 비안카 마리아는 필리포 마리아의 콘도티에로인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 약혼했고, 1441년 결혼하여 그에게 밀라노 공국의 계승권을 부여했다. 그들의 결혼 흔적은 오늘날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인코로나타의 쌍둥이 교회에서 볼 수 있다.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인코로나타의 쌍둥이 정면은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가 원래 교회를 건설한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의 결혼의 불가분성의 표시로 세운 두 번째 교회의 추가를 보여준다.


1447년 필리포 마리아 사후 잠시 존속했던 암브로시오 공화국(1447–1450) 이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새로운 밀라노 공작이 되었다. 비안카 마리아와 그녀의 남편은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여 1535년까지 밀라노를 단속적으로 통치하였다.

비스콘티 가문의 통치 아래, 밀라노 시의 정부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으며, 영토적 패권은 크게 확장되었지만, 잔 갈레아초 사후 위기를 겪게 되었다.

오토네와 마테오의 영주 통치는 13세기 밀라노에서 점점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된 귀족과 평민 세력 간의 대립을 종식시켰다. 비스콘티 가문의 새로운 권력은 초기에는 대주교(오토네)와 민중 대장(Matteo)의 결합된 역할과, 황제 대리(Imperial Vicar) 칭호에서 비롯되는 권위에 의존했다. 마테오 이후, 도시의 통치는 그의 가문 내에서 세습적인 성격을 띠게 되어, 공동체 기관의 공식적인 승인이 불필요해졌다. 최초의 비스콘티 가문은 교황과 황제에게 보존된 것과 비슷한 절대 권력(''plenitudo potestatis'')을 주장했으며, 베르나보에 이르러서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영토 내에서 그들의 권위를 무관하다고 여겼다. 밀라노의 정치적 변화는 코무네(Commune)의 일반적인 쇠퇴와 13세기와 14세기 동안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에 영향을 미친 시뇨리아(Signoria)의 부상의 일부였다.

안제라(Rocca Borromeo di Angera)와 마조레 호의 항해를 지키는 아로나(Arona) 성과 같은 요새를 포함한 밀라노 교회의 재산을 합병한 것은 마테오 비스콘티가 밀라노 교구 지역에서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취한 첫 번째 조치였다. 그러한 점령은 이후 수십 년 동안 교황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밀라노 교구 외부로 비스콘티의 통치가 확장된 것은 호엔슈타우펜 황제에 대한 전쟁 중 롬바르드 동맹에서 수행한 주요 역할에 의해 강화된 북부 이탈리아에서 밀라노의 전통적인 중요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가 1162년에 가한 파괴 이후, 밀라노 사람들은 몇 년 만에 도시를 재건하고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황제를 물리쳐 콘스탄스 평화를 강요하여 밀라노와 동맹을 맺은 도시들에게도 자치권을 부여했다.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한 전쟁이 재개되어 결국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유리한 위치를 바탕으로, 1313년 헨리 7세 사후 마테오와 그의 아들 갈레아초는 북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인 베르가모, 토르토나, 알레산드리아, 베르첼리, 그리고 피아첸차의 영주가 되었다. 비스콘티를 지지하는 정권은 코모, 노바라, 그리고 파비아에 자리 잡았다. 이 첫 번째 확장 단계에서 비스콘티 가문은 계속해서 겔프 동맹(교황청, 안주 가문, 델라 토레 가문)의 반대에 직면했다.

14세기 중반경 비스콘티 영토


갈레아초 1세 시대에 겪었던 위기 이후, 아쪼네의 영주 통치 아래 그의 삼촌 루치노의 군사적 지원으로 확장이 계속되었다. 1334년 크레모나는 아쪼네에게 항복했다. 1337년 루치노는 브레시아에 진입하여 아쪼네가 도시의 영주가 되도록 허락했다. 1339년 아쪼네와 루치노는 파라비아고 전투에서 사촌 로드리시오 비스콘티와 베로나의 영주인 델라 스칼라 가문이 결성한 군대를 물리쳤다. 1341년 루치노는 교회와 화해했다. 1346년 루치노는 파르마를 점령했고, 1347년에는 서알프스 기슭의 몬도비와 쿠네오까지 이르는 지역을 따라 비스콘티 영토의 서쪽 경계를 확장했다.

루치노 사후, 대주교 조반니는 밀라노의 통제하에 있는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1350년 그는 페폴리 가문으로부터 볼로냐를 얻었고, 1353년에는 제노바의 영주직을 받아들였다. 그의 조카들(마테오 2세, 베르나보, 갈레아초 2세)의 결혼을 통해 그는 비스콘티 영토의 서쪽과 동쪽을 통치하는 가문들: 곤자가, 델라 스칼라, 사보이아 가문과 비스콘티 가문을 가계적으로 연결했다. 교황령 영토에 속한 도시인 볼로냐를 획득하면서 교황과의 갈등이 재개되었다. 1352년, 교황 사절인 수도원장 기욤 드 그리무아르(후일 우르바노 5세가 됨)와의 협상을 통해 조반니는 교황 대리로 볼로냐를 계속 통치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에 도달했다.

1354년 대주교 조반니의 사망과 베르나보와 갈레아초 2세에게로의 권력 이양은 제노바와 볼로냐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356년 제노바는 독립을 되찾았다. 볼로냐에서는 대주교 조반니의 보호를 받았던 전직 부관인 조반니 비스콘티 디 올레지오의 반란이 알보르노스 추기경의 개입의 길을 열었고, 그는 1360년 도시를 교황령으로 되돌렸다. 비스콘티 영토의 동부 지역 통치자였던 베르나보는 반복적으로 볼로냐를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교회와의 다른 분쟁들과 함께 그에게 인노켄티우스 6세로부터 파문 판결을 받게 했다. 1361년 산 루필로 전투에서 패배한 후, 베르나보는 마침내 볼로냐 상실을 받아들였다. 베르나보와 갈레아초 2세는 황제 권위와도 격렬한 충돌을 벌였다. 몬페라토 후작이 카를 4세에 의해 파비아의 황제 대리로 임명된 후, 황제와 비스콘티 가문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4. 분가



비스콘티 가문은 마조레 호수와 티치노 강 서쪽 고지의 전략적 장소였던 마시노의 영주 지위에서 시작되어, 12세기에 대주교의 가신으로 거주했다. 가문의 성은 "대리 백작(deputy counts)"을 의미하는 라틴어 comitis에서 파생되었다.[3] 1070년 이전에 이미 세습되는 공공 대리백작 사무소를 얻었으며, 이는 아이를 삼키는 독사 표시 채택으로 이어졌다.

얼마 후 가문은 여러 분가로 나뉘었고, 그 중 일부는 밀라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지를 가졌다. 13세기 전반에 사망한 우베르토(Uberto)에서 시작되는 분가가 귀족 왕조가 되었다.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비스콘티 가문은 대주교 란돌포(979-998)로부터 봉건 혜택을 얻은 가신 가문으로, 1157년 문서에서 마리아노(오늘날의 마리아노 코멘세)의 대리주권을 가졌다는 내용이 발견된다.

우베르토의 아들 오토네(1207-1295)는 1262년 교황 우르바노 4세에 의해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1277년 데시오에서 승리했다. 그의 증손자 마테오 1세(1250-1322)는 1287년에 민중의 수장으로 선출되었고, 1288년에 대리권을 받았다. 1302년 망명했으나, 헨리 7세의 지원으로 밀라노로 돌아왔다. 마테오 1세는 아들 갈레아초 1세(1277c. - 1328)에게 퇴위했고, 갈레아초 1세는 교황과 겔프(Guelph)파에 대항하다 포로가 되었다.

갈레아초 1세의 아들 아쪼네 비스콘티(1302-1339)가 1329년 지위를 회복했고, 그의 사후 루치노(1292-1349)와 조반니(1290-1354)가 지배를 맡았다. 루치노의 아들 루치노 노벨로(1399년 사망)는 조반니의 영주권에서 제외되었다. 왕조는 마테오의 아들 스테파노의 자손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그의 세 아들 마테오 2세(1319-1355), 갈레아초 2세(1320-1378), 베르나보(1323-1385)가 가문을 이끌었다.

1378년 갈레아초 2세는 아들 잔 갈레아초(1351-1402)에게 양위했다. 잔 갈레아초는 1385년에 삼촌 베르나보를 축출했고, 1395년에 초대 밀라노 공작이 되었다. 그의 딸 발렌티나는 루이 1세 드 오를레앙과 결혼했다. 잔 갈레아초의 자녀 조반니 마리아(1389-1412)와 필리포 마리아(1392-1447)에 의해 밀라노 공작이 계승된 후 비스콘티 가문이 단절되었다. 필리포 마리아 사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을 계승했다.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밀라노 공작으로 임명된 후, 비스콘티 가문은 트로이의 에네아의 아들 앙글로(Anglo)를 시조로 하는 가계 전설을 만들었다. 비스콘티 가문의 초기 구성원들은 11세기 후반 밀라노에 나타났다. 1075년 아리프란도 비스콘티와 그의 아들 오토네가 법률 문서에 서명했다. 아리프란도 가문은 이미 밀라노에 존재했고, 남계로 상속되는 영지 백작 작위를 획득한 것으로 여겨진다.

4. 1. 베르간테 분가 (12세기부터)

비스콘티 가문은 11세기 후반 밀라노에 처음 등장했으며, 1075년 아리프란도 비스콘티와 그의 아들 오토네가 법률 문서에 서명한 기록이 있다.[1] 아리프란도 가문은 이미 밀라노에 정착해 있었고, 영지 백작 작위를 상속받은 것으로 보인다.[2][3]

오토네 비스콘티는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아들 콘라트를 섬겼으며, 1111년 하인리히 5세를 보호하려다 처형되었다. 오토네와 그의 자손들은 롬바르드 법을 따랐고, 귀족 가문들과 함께 행동했다. 리타 가문과의 관계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비스콘티 가문에 종속되어 있었다.

1134년, 오토네의 아들 귀도 비스콘티는 생갈 수도원장으로부터 마시노 영지를 받았다. 마시노는 마조레 호 인근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12세기 후반에는 다른 가족 구성원이 현지 대주교 요새의 성주로 있었다. 1142년, 콘라트 3세는 귀도에게 이 영지를 확인해 주었다. 또한 비스콘티 가문은 알부시아고와 베스나테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1157년 문서에 따르면, 비스콘티 가문은 마리아노(오늘날 마리아노 코멘세)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귀도의 아들인 두 번째 오토네는 1134년에서 1192년 사이의 문서에 나타나며,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의 대결 시기에 밀라노 코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62년 3월 1일, 도시 함락 후 황제에게 항복한 밀라노 지도자 그룹에 그의 이름이 처음 언급된다.

1162년 3월 1일, 오토네 비스콘티는 도시 함락 후 바르바로사에게 항복한 당국자 목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밀라노인이다 (19세기 판화)


다음 세대의 아리프란도는 1208년부터 1213년까지 베르첼리의 주교였으며, 인노켄티우스 3세의 교황 특사 역할도 했다. 1212년 밀라노 대주교로 선출되려 했으나 실패했고, 1213년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했다.

비스콘티 가문은 여러 분가로 나뉘었고, 일부는 밀라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영지를 얻었다. 그중 밀라노의 영주와 공작의 기원이 된 가문은 13세기 전반에 사망한 우베르토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다른 분가들은 자신의 성에 거주지의 이름을 추가했는데, 마시노, 인보리오, 올레지오 카스텔로의 비스콘티 가문이 그 예이다. 이 지역에는 성 (마시노), 성의 잔해 (인보리오), 초기 건물의 후기 재건축 (올레지오 카스텔로)이 남아있다.

1075년 이후 비스콘티 가문은 계속해서 분파들이 생겨났다. 초기에는 형제들 중 장남이 가장 뛰어난 가문 구성원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후반 밀라노의 초대 영주였던 오토네 대주교와 그의 조카 마테오의 가문은 약 2세기에 걸쳐 장자 상속을 통해 최초의 아리프란도 비스콘티의 후손으로 간주된다. 막내 형제들은 밀라노에 계속 거주하며 밀라노 코뮌의 정치 생활에 참여하는 분가들을 낳았다.

1134년, 귀도 비스콘티는 베르간테 지역의 마시노 성을 얻었다. 그의 장남 오토네는 12세기 후반 밀라노에서 활동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후손들은 베르간테 지역에 정착하여 비스콘티 디 마시노, 비스콘티 디 인보리오, 비스콘티 디 올레지오 카스텔로 분가를 이루었다. 비스콘티 디 마시노에는 우베르토 피코가 속해 있었는데, 그는 밀라노 영주 마테오의 형제인 우베르토 비스콘티와 혼동되기도 했다. 비스콘티 디 올레지오 카스텔로의 일원인 조반니는 볼로냐와 페르모(Fermo)의 영주(1355–1360)였으며, 조반니 비스콘티 대주교의 사생아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마테오와 우베르토 사이에 상속 분할이 이루어졌는데, 마테오는 밀라노의 영주가 되었고, 우베르토는 치슬라고와 솜마 롬바르도의 성과 토지를 받았다. 우베르토의 장남 베르첼리노는 베르첼리(1317년)와 노바라(1318년~1320년)의 포데스타를 지냈다.

15세기에 베르첼리노의 후손인 지암바티스타 비스콘티가 나타났다. 1473년 그의 사후 솜마 롬바르도 성은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와 귀도 사이에 분할되었다. 프란체스코와 귀도의 자손들은 비스콘티 디 솜마라는 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프란체스코의 후손들 중에는 비스콘티 디 산 비토와 비스콘티 델라 모타가 있고, 귀도의 후손들 중에는 비스콘티 디 모드로네와 비스콘티 디 치슬라고가 있다.

4. 2. 피에트로의 후손 (13세기부터)

비스콘티 가문은 13세기에 피에트로 비스콘티의 후손들로부터 여러 분가로 나뉘었다.

1134년, 귀도 비스콘티는 생갈 수도원으로부터 마조레 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베르간테 지역의 마시노 성을 얻었다. 귀도의 장남인 오토네는 12세기 후반 밀라노에서 활동하며 밀라노 공동체의 공공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의 후손들은 베르간테 지역에 정착하여 비스콘티 디 마시노, 비스콘티 디 인보리오, 비스콘티 디 올레지오 카스텔로 분가를 이루었다.

귀도 비스콘티의 아들 오토네로부터 대주교 오토네와 그의 조카 테발도의 가계가 이어졌다. 테발도는 1276년 델라 토레 가문을 지지하는 반대파에 의해 처형되었다. 1288년, 테발도의 아들들(마테오와 우베르토)과 대주교 오토네의 또 다른 조카인 피에트로 사이에 가족 상속 재산 분할이 이루어졌다. 피에트로는 갈라라테 근처 지역과 그 지역 언덕에 흩어져 있는 성들을 받았다.

피에트로의 후손들 사이에서도 추가적인 분할이 있었다. 그의 아들들인 로드리시오와 가스파레 사이에, 그리고 한 세대 후에는 그의 손자들 사이에 분할이 있었다. 로드리시오의 아들들로부터 비스콘티 디 크렌나 가문과 비스콘티 디 베스나테 가문이, 가스파레의 아들들로부터 비스콘티 디 예라고, 비스콘티 디 오라고, 비스콘티 디 폰타네토 가문이 유래했다. 이 분가들은 후대에 멸족했고, 그들의 성과 토지는 다른 가문들에게 넘어갔다.

17세기에 프란체스코 비스콘티 디 솜마의 후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는 1629년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산 비토 후작 작위를 받았다. 그로부터 비스콘티 디 산 비토 가문이 시작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비스콘티 디 산 비토 가문은 1473년 분할 이후 분열되었던 솜마 롬바르도 성의 재산을 다시 통합했다. 비스콘티 디 산 비토 가문은 1998년에 멸족했다.

4. 3. 마테오의 형제 우베르토의 후손 (14세기부터)

마테오 1세 비스콘티의 동생 우베르토 비스콘티(약 1280년~1315년)는 치슬라고와 솜마 롬바르도의 성과 그에 속한 토지를 받아 여러 분가(cadet branch)를 낳았다.[1] 우베르토의 장남인 베르첼리노는 베르첼리(1317년)와 노바라(1318년~1320년)의 포데스타(Podestà)를 지냈다.

15세기 베르첼리노의 후손인 지암바티스타 비스콘티가 나타났다.[1] 1473년 그의 사후 솜마 롬바르도 성은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와 귀도 사이에 분할되었다. 프란체스코와 귀도의 자손들은 비스콘티 디 솜마라는 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프란체스코의 후손들 중에는 비스콘티 디 산 비토와 비스콘티 델라 모타가,[1] 귀도의 후손들 중에는 비스콘티 디 모드로네와 비스콘티 디 치슬라고가 있다.[1]

4. 3. 1. 비스콘티 디 산 비토

17세기 프란체스코 비스콘티 디 솜마의 후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는 1629년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산 비토 후작 작위를 받았다. 이로부터 비스콘티 디 산 비토 가문이 시작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비스콘티 디 산 비토 가문은 1473년 분할 이후 분열되었던 솜마 롬바르도 성의 재산을 다시 통합했다. 비스콘티 디 산 비토 가문은 1998년에 멸족했으며,[1] 마지막 구성원은 솜마 롬바르도의 소유권을 그들의 이름을 딴 재단에 남겼고, 그 재단은 나중에 성을 대중에게 공개했다.[1]

4. 3. 2. 비스콘티 디 모드로네

귀도 비스콘티 디 솜마의 후손 중 비스콘티 디 모드로네 분가가 나왔다. 1694년부터 비모드로네 후작, 1813년부터 비모드로네 공작 작위를 받았다.[1] 이 가문에는 영화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디 모드로네와 에리프란도 비스콘티 디 모드로네가 속해 있었다. 루키노는 이탈리아 신사실주의 영화의 가장 저명한 감독 중 한 명이었다.

4. 4. 기타 구성원

비스콘티 가문의 기타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이름생몰년비고
페데리코 비스콘티1617년–1693년밀라노 대주교(1681년–1693년), 추기경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대주교)1721년–1801년밀라노 대주교(1784년–1801년)
가스파레 비스콘티? - ?밀라노 대주교(1584년–1595년)
로베르토 비스콘티? - ?밀라노 대주교(1354년–1361년)
테오발도 비스콘티1210년 - 1276년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재위 1271년 - 1276년)
오토네 비스콘티(en)1213년 - 1295년밀라노 대주교(1262년–1295년), 밀라노 시뇨레(僭主, 봉신)(재위: 1277년 - 1278년, 1282년 - 1295년)[2]
마테오 1세 비스콘티(en)1250년 - 1322년밀라노 僭主(재위: 1287년 - 1302년, 1311년 - 1322년)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1277년 - 1328년밀라노 僭主(재위: 1322년 - 1327년)
아쪼네 비스콘티(en)1302년 - 1339년밀라노 僭主(재위: 1329년 - 1339년)
조반니 비스콘티1290년? - 1354년밀라노 僭主(재위: 1339년 - 1354년), 밀라노 대주교(재위: 1342년 - 1354년)
루키노 비스콘티1287년? - 1349년밀라노 僭主(재위: 1339년 - 1349년)
마테오 2세 비스콘티1319년?-1355년밀라노 僭主(재위: 1354년 - 1355년)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1321년 - 1378년밀라노 僭主(재위: 1354년 - 1378년)
베르나보 비스콘티1323년 - 1385년밀라노 僭主(재위: 1354년 - 1385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1351년 - 1402년밀라노 僭主(재위: 1378년 - 1395년), 밀라노 공작(재위: 1395년 - 1402년)
조반니 마리아 비스콘티1388년 - 1412년밀라노 공작(재위: 1402년 - 1412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1392년 - 1447년밀라노 공작(재위: 1412년 - 1447년)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1425년 - 1468년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결혼
루키노 비스콘티? - ?영화 감독



5. 예술과 문학의 건축가이자 후원자

비스콘티 가문은 밀라노 통치 초기부터 가문의 업적을 기념하며 예술과 문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당대 도미니크회 수도사 스테파나르도 다 비메르카테(Stefanardo da Vimercate)가 쓴 시 "밀라노 시에서의 업적에 관하여(Liber de gestis in civitate Mediolani)"는 오토네 비스콘티 대주교가 1277년 델라 토레(Della Torre) 가문을 상대로 승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13세기 말, 마에스트로 디 안제라(Maestro di Angera)로 알려진 익명의 화가는 안제라 성의 법정(Sala di Giustizia) 벽에 이 승리를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조토가 아쪼네 비스콘티의 의뢰로 밀라노의 코르테 다렌고(Corte d'Arengo)에서 작업한 것은 롬바르디아 회화의 전환점이 되었고, 다른 비스콘티 건물에서 일하는 지역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1] 조반니 비스콘티 치하의 인근 대주교궁과 베르나보 비스콘티 치하의 산 조반니 인 콘카(San Giovanni in Conca) 교회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으나, 현재는 일부 조각만 남아있다.[1]

1353년 루키노 비스콘티와 서신을 교환한 페트라르카는 조반니 비스콘티 대주교의 초청을 받아 8년 동안 밀라노에 머물렀다.[2] 그는 갈레아초 2세와 친구로 지내며 파비아와 밀라노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2]

갈레아초 2세는 파비아의 비스콘티 성의 수많은 방들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했다. 그는 만토바의 곤자가 가문에게 예술가들을 파비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많은 화가가 필요했다.[3] 파비아 성 서쪽 탑 1층에는 갈레아초 2세가 설립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고전 및 현대 작가들의 책 약 1,000권을 소장하여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3]

파비아 비스콘티 성 서쪽 탑에는 유명한 비스콘티 도서관이 있었다.


비스콘티 가문은 파비아 대학교를 후원하여 유럽에서 가장 명망 있는 대학교 중 하나로 만들었다. 갈레아초 2세는 기금을 통해 학생들을 지원했다.

비스콘티 가문은 조반니 디 발두치오와 보니노 다 캄피오네 등 저명한 조각가들에게 조각상과 묘비 제작을 의뢰했다. 조반니 디 발두치오는 산 고타르도 인 코르테(San Gottardo in Corte) 교회에 아쪼네 비스콘티의 묘비를 제작했다. 보니노 다 캄피오네는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기마상을 조각했는데, 이 기마상은 나중에 산 조반니 인 콘카 교회에 있는 그의 석관에 놓였고, 그의 아내 레지나 델라 스칼라(Regina della Scala)의 무덤도 장식했다. 이들은 현재 스포르차 성 박물관(Museo d'Arte Antica)에 보존되어 있다.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보니파치오 벰보의 초상화를 선호했다.

잔 갈레아초가 시작한 종교 건물(밀라노 대성당과 파비아 카르투시오 수도원)을 특징짓는 대리석 건축과 조각 장식은 그 후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비스콘티 통치 기간 동안 그곳에서 일한 최초의 조각가는 조반니노 데이 그라시와 자코모 다 캄피오네였다. 화가 미켈리노 다 베조조는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했다.

비스콘티 가문이 다른 유럽 통치 가문들과 맺은 관계는 초기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이탈리아 밖으로 퍼져나가는 데 기여했다.

밀라노에 머무는 동안 비스콘티 가문은 페트라르카를 유럽으로 두 차례 파견했다.[2] 1356년 그는 프라하로 가서 카를 4세를 만났다.[2] 1361년 갈레아초 2세는 페트라르카를 파리로 보내 영국 포로 생활 후 석방된 장 2세 국왕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게 했다. 페트라르카는 프라하와 파리의 궁정에 큰 인상을 남겼지만, 두 경우 모두 밀라노로 돌아가는 것을 선호했다.[2] 밀라노 문학 문화의 영향 아래 구상된 페트라르카의 저서 ''De remediis utriusque fortune''은 유럽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2]

1368년 비올란테 비스콘티와 영국 국왕의 아들의 결혼식과 결혼 피로연에는 페트라르카, 장 프로이사르, 제프리 초서가 참석했다.[2] 1372/1373년과 1378년에 제프리 초서는 밀라노와 파비아를 여행하여 비스콘티 도서관을 이용하고 페트라르카를 만나 이탈리아 인문주의 영향을 받았다.[2]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다섯 딸들(뷔르템베르크의 안토니아, 바이에른의 타데아, 마달레나, 엘리사베타, 오스트리아의 비리디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왕자들과 결혼하여 문화 전파에 기여했다. 발렌티나가 1389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와 결혼한 것은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대성당 건설 현장은 프랑스와 독일 출신의 건축가, 엔지니어, 조각가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이탈리아 사람들과 교류했다. 결과적으로 밀라노 대성당은 국제 롬바르드 고딕 양식의 상징이 되었다.

이탈리아 전쟁 기간 동안, 1,000권의 사본을 보관했던 파비아의 비스콘티 도서관은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그 대부분을 프랑스 블루아로 옮겼다. 오늘날 그들은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5. 1. 14세기의 화려함 정책

비스콘티 가문은 초기 세력권과 이후 확장된 영토에서 세속 건축물과 종교 건축물 건설을 장려했다. 14세기에 주로 밀라노파비아를 위해 구상된 그들의 가장 독특한 프로젝트들의 장엄함은 그들의 통치 아래 있는 지역에 대한 권위 주장 정책을 반영했다.[1]

예술과 문학에 대한 후원은 비스콘티 가문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2] 14세기에 그들의 결혼 정책으로 형성된 많은 가족 관계는 비스콘티 가문을 유럽 귀족 사회의 중심에 위치하게 했다.[3] 미술사가 세레나 로마노(Serena Romano)에 따르면, 이는 비스콘티 가문과 후대의 스포르차 가문 시대의 밀라노를 "유럽에서 무적의 예술적 교차로"로 만들었다.

1329년부터 1339년까지 밀라노의 영주였던 아쪼네 비스콘티는 그의 영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인상적인 건축 사업을 벌인 최초의 비스콘티 가문 인물이었다. 그는 밀라노 코뮌 시대의 도시 계획을 계승하여 도시 중심부에 개입했고, 코뮌 통치의 중심지였던 베키오 브롤레토(Broletto Vecchio)를 그의 정부 청사인 코르테 다렌고(Corte d'Arengo, 오늘날의 밀라노 왕궁)로 개조했다. 당시 베투스 성당이었던 밀라노 대성당 근처에는 그의 통치하에 있는 영토 내 다른 어떤 건물보다 높은 종탑을 세웠는데, 심지어 크레모나의 토라쪼보다도 높았다. 이 종탑은 1353년에 무너져 복원되지 않았다. 1335년 아쪼네는 조토를 밀라노로 불러 코르테 다렌고 장식을 의뢰했다. 오늘날에는 사라졌지만, 세속적 영광과 과거 위대한 통치자들 사이에 있는 아쪼네 자신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그에게 돌려진다.

아쪼네의 화려한 정책은 그의 후계자 루키노(Luchino)와 조반니(Giovanni)에 의해 계승되었고, 14세기 후반에는 갈레아초 2세, 베르나보, 잔 갈레아초에 의해 유럽에서 인정받는 웅장한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코르테 다렌고 근처에는 조반니가 새로운 주교궁을 건설했다. 루키노는 복도와 다리를 이용하여 코르테 다렌고를 인근 비스콘티 가문의 사유 건물과 연결했는데, 이 다리들은 공공 도로 위를 지나갔다.

1360년부터 1365년 사이에 갈레아초 2세는 파비아에 광대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파비아의 비스콘티 성을 건설했고, 그와 그의 아들 잔 갈레아초는 이곳에서 영토를 통치했다. 1365년 파비아를 방문했던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성을 "거대한 궁전"이라고 언급했고, 보카치오 자신은 "모든 현대 건축물 중 가장 장엄한 것"이라고 평가했을 것이다.

1370년경 베르나보는 트레쪼 술라다의 비스콘티 성에 몇 년 만에 성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42미터 높이의 거대한 탑과 트레쪼 술라다 다리가 포함되었다. 이 다리는 72미터 너비의 단일 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이전에는 전례가 없었고 20세기까지 석조 구조물에서는 넘어서지 못한 경간이었다.

1386년, 단독 통치자로서 권력을 잡은 지 1주년이 되던 해 잔 갈레아초는 밀라노 대성당 건설을 시작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될 예정이었다. 비스콘티 가문의 상징인 빛나는 태양(''Razza Viscontea'')이 중앙 후진부의 주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장식하는 데 선택되었다.

밀라노 대성당 중앙 후진부의 비스콘티 가문 상징 빛나는 태양


밀라노 대성당 중앙 통로 끝에서 보이는 빛나는 태양


10년 후 잔 갈레아초는 그의 가족 묘지를 위한 파비아의 세르토자를 설립했다. 엄청난 크기와 화려한 장식으로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기념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잔 갈레아초는 파비아 성을 그의 아버지가 시작한 넓은 폐쇄된 공원으로 북쪽 약 7km 떨어진 세르토자와 연결했다. 전적으로 흰색 대리석으로 건설되고 장식된 파비아의 세르토자의 호화로움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그는 수도원으로서는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비스콘티 가문과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영토에서는 사유 건물과 공공 건물(주로 성과 교회)의 건축 의뢰가 빈번했고 널리 퍼져 있었다.

5. 2. 건축가

비스콘티 가문은 자신들의 기원과 영토 확장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개조했다.

1134년, 귀도 비스콘티는 마조레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마시노 성을 받았다.[2] 14세기 초, 아쪼네 비스콘티는 밀라노 중심부에 있는 베키오 브롤레토를 코르테 다렌고(오늘날의 밀라노 왕궁)로 개조하고, 베투스 성당 근처에 높은 종탑을 세웠으나, 이 종탑은 1353년에 무너졌다., 그는 조토를 초빙하여 코르테 다렌고를 장식하게 하기도 했다.

이후 루키노와 조반니가 아쪼네의 건축 정책을 이어받았고, 14세기 후반에는 갈레아초 2세, 베르나보, 지안 갈레아초가 이를 더욱 확장했다. 조반니는 코르테 다렌고 근처에 새로운 주교궁을 건설했고, 루키노는 코르테 다렌고를 인근 비스콘티 가문의 사유 건물과 다리로 연결했다.

갈레아초 2세는 파비아의 비스콘티 성을 건설했고, 베르나보는 트레쪼 술라다의 비스콘티 성과 트레쪼 술라다 다리를 건설했다. 지안 갈레아초는 밀라노 대성당 건설을 시작하고 파비아의 세르토자를 설립했다.

5. 2. 1. 성, 궁전, 공공 건물

비스콘티 가문은 1075년 밀라노에 등장한 이후, 여러 분파로 나뉘어 발전했다. 이들은 롬바르디아와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자신들의 기원과 영토 확장을 상징하는 수많은 성, 궁전, 공공 건물들을 건설하거나 개조했다.[1]

1329년부터 1339년까지 밀라노의 영주였던 아쪼네 비스콘티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인상적인 건축 사업을 벌였다. 그는 밀라노의 중심부에 있는 베키오 브롤레토를 코르테 다렌고(오늘날의 밀라노 왕궁)로 개조했다. 또한, 베투스 성당 근처에 당시 크레모나의 토라쪼보다 높은 종탑을 세웠으나, 1353년에 무너져 복원되지 않았다. 1335년에는 조토를 밀라노로 불러 코르테 다렌고를 장식하게 했으며, 이 프레스코화는 아쪼네를 과거 위대한 통치자들과 나란히 묘사했다.

아쪼네의 정책은 루키노와 조반니에 의해 계승되었고, 14세기 후반에는 갈레아초 2세, 베르나보, 지안 갈레아초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다. 조반니는 코르테 다렌고 근처에 새로운 주교궁을 건설했고, 루키노는 복도와 다리를 이용해 코르테 다렌고를 인근 비스콘티 가문의 사유 건물과 연결했다.

1360년부터 1365년 사이에 갈레아초 2세는 파비아의 비스콘티 성을 건설했고, 1370년경 베르나보는 트레쪼 술라다의 비스콘티 성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42미터 높이의 탑과 트레쪼 술라다 다리가 포함되었다. 이 다리는 72미터 너비의 단일 아치로, 당시에는 전례가 없었고 20세기까지 석조 구조물에서는 넘어서지 못한 경간이었다.

1386년, 지안 갈레아초는 밀라노 대성당 건설을 시작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될 예정이었다. 10년 후, 그는 가족 묘지를 위한 파비아의 세르토자를 설립했다.

비스콘티 가문의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건물이름위치건설/개조 시기비고
마시노 성마조레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베르간테 지역1134년생갈 수도원장으로부터 귀도 비스콘티가 받음[2]
코르테 다렌고 (오늘날의 밀라노 왕궁)밀라노1329년 ~ 1339년아쪼네 비스콘티가 베키오 브롤레토를 개조
베투스 성당 근처 종탑밀라노1329년 ~ 1339년아쪼네 비스콘티 건설, 1353년 붕괴
파비아의 비스콘티 성파비아1360년 ~ 1365년갈레아초 2세 건설
트레쪼 술라다의 비스콘티 성트레쪼 술라다1370년경베르나보 건설, 42미터 탑과 트레쪼 술라다 다리 포함
밀라노 대성당밀라노1386년지안 갈레아초 건설 시작
파비아의 세르토자파비아1396년지안 갈레아초 설립
크렌나 성크렌나
제라고 성제라고
솜마 롬바르도 성솜마 롬바르도
카스텔레토 소프라 티치노 성카스텔레토 소프라 티치노
인보리오 성인보리오
올레지오 카스텔로 성올레지오 카스텔로
스포르체스코 성밀라노14세기, 15세기포르타 조비아 성 재건
베르가모 성베르가모
카사노 다다 성카사노 다다
카스텔라르쿠아토 성카스텔라르쿠아토
케라스코 성케라스코
갈리아테 성갈리아테
레냐노 성레냐노
로카르노 성로카르노
로디 성로디
몬차 성몬차
노바라 성노바라
피아첸차 성피아첸차
베르첼리 성베르첼리
보게라 성보게라
보고냐 성보고냐
아비아테그라소 성아비아테그라소
베레구아르도 성베레구아르도
쿠사고 성쿠사고
판디노 성판디노
비제바노 성비제바노
칠라고 성칠라고
브리냐노 제라 다다 성브리냐노 제라 다다
파냐노 올로나 성파냐노 올로나
사로노 성사로노
팔라초 비스콘티 디 그라차노밀라노
팔라초 디 프로스페로 비스콘티밀라노
아쪼네 비스콘티 다리레코
비스콘티 다리발레지오 술 민초
바사노 델 그라파 댐바사노 델 그라파
카 그란다밀라노1457년필라레테 계획, 개인 기부금으로 건설



이 외에도 비스콘티 가문은 레코와 트레초 술라다에 요새화된 다리를 건설했으며, 발레지오 술 민초와 바사노 델 그라파에 댐을 건설했다. 1457년에는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에 대규모 도시 병원인 카 그란다를 설립했다.

5. 2. 2. 교회와 수도원

비스콘티 가문은 1329년부터 1339년까지 밀라노의 영주였던 아쪼네 비스콘티(Azzone Visconti)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축 사업을 시작한 이래,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건설하거나 후원했다.

아쪼네 비스콘티(Azzone Visconti)는 밀라노 코뮌 시대의 도시 계획을 계승하여, 코뮌 통치의 중심지였던 베키오 브롤레토(Broletto Vecchio)를 그의 정부 청사인 코르테 다렌고(Corte d'Arengo, 오늘날의 팔라초 레알레(''Palazzo Reale''))로 개조했다. 또한,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Santa Maria Maggiore church)였던 밀라노 대성당 근처에 높은 종탑을 세웠는데, 이는 크레모나의 토라쪼(Cremona's Torrazzo)보다도 높았다. 이 종탑은 1353년에 무너져 복원되지 않았다.

조토(Giotto)를 밀라노로 불러 코르테 다렌고 장식을 의뢰했는데, 오늘날에는 사라졌지만 세속적 영광과 과거 위대한 통치자들 사이에 있는 아쪼네 자신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그에게 돌려진다.

아쪼네의 정책은 그의 후계자 루키노(Luchino)와 조반니(Giovanni)에 의해 계승되었고, 14세기 후반에는 갈레아초 2세(Galeazzo II), 베르나보(Bernabò), 지안 갈레아초 비스콘티(Gian Galeazzo Visconti)에 의해 유럽에서 인정받는 웅장한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코르테 다렌고 근처에는 조반니가 새로운 주교궁을 건설했다.

1386년, 지안 갈레아초 비스콘티(Gian Galeazzo Visconti)는 밀라노 대성당 건설을 시작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될 예정이었다. 비스콘티 가문의 상징인 빛나는 태양(''Razza Viscontea'')이 중앙 후진부의 주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장식했다.

10년 후 지안 갈레아초 비스콘티(Gian Galeazzo Visconti)는 그의 가족 묘지를 위한 Charterhouse of Pavia)를 설립했다.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인 비스치오네(''Biscione'')은 그들의 후원을 받은 작은 밀라노 교회들의 정면을 장식했고, 오늘날에도 그들을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산 크리스토포로(San Cristoforo), 산타 마리아 인코로나타(Santa Maria Incoronata)).

베르나보(Bernabò)의 아내인 레지나 델라 스칼라(Regina Della Scala)는 그녀의 성을 따서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Santa Maria della Scala)를 세웠다. 이 교회는 18세기에 새 극장(La Scala) 건설을 위해 철거되었는데, 극장 역시 그녀의 성을 따서 이름 지어졌다.

비스콘티 가문은 카르투시오회를 선호했다. 파비아의 웅장한 카르투시오 수도원은 1349년에 조반니 비스콘티(Giovanni Visconti) 대주교가 세운 가레냐노 카르투시오 수도원(Garegnano Charterhouse)에 앞서 세워졌다.

비스콘티 가문은 밀라노와 파비아에 세운 교회들을 매장지로 사용했다. 오토네(Ottone)와 조반니 비스콘티(Giovanni Visconti)는 대성당에, 아쪼네(Azzone)는 산 고타르도 인 코르테에, 스테파노(Stefano)는 산 에우스트르지오에, 베르나보는 산 조반니 인 콘카에, 그리고 지안 갈레아초 비스콘티(Gian Galeazzo Visconti)는 파비아 카르투시오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5. 3. 예술과 문학의 후원자

비스콘티 가문은 예술과 문학을 후원하여 권위를 과시하고 유럽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4세기에 결혼 정책을 통해 유럽 귀족 가문들과 많은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밀라노를 "유럽에서 무적의 예술적 교차로"로 만들었다.

아쪼네 비스콘티는 1329년부터 1339년까지 밀라노 영주로 재임하면서 조토를 초청하여 밀라노 왕궁을 장식하게 하는 등 인상적인 건축 사업을 벌였다.[1] 그의 정책은 루키노, 조반니에게 계승되었고, 14세기 후반 갈레아초 2세, 베르나보, 잔 갈레아초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다.[2]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파비아를 선호하며 지역 대학교를 지원했고,[3] 파비아의 비스콘티 성, 파비아의 세르토자를 건립하고 밀라노 대성당 건설을 시작했다.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비스콘티 가문과 교류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페트라르카는 카를 4세와 장 2세를 만나기 위해 프라하와 파리를 방문했다. 제프리 초서는 밀라노와 파비아를 여행하며 비스콘티 도서관을 이용하고 페트라르카를 만나 이탈리아 인문주의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전쟁 기간 동안 1,000권의 사본을 보관했던 파비아의 비스콘티 도서관은 프랑스의 루이 12세에 의해 프랑스로 옮겨져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5. 3. 1. 롬바르디아에서

비스콘티 가문은 롬바르디아 지역을 다스리면서 여러 건물들을 지었고,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다.

오토네 비스콘티 대주교는 1277년 델라 토레 가문을 상대로 승리했는데, 이를 기념하는 시가 쓰여졌고, 안제라 성의 법정 벽에는 이 승리를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졌다.

조토아초네 비스콘티의 의뢰로 밀라노에서 작업하며 롬바르디아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반니 비스콘티와 베르나보 비스콘티 시대에는 여러 건물들이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1]

루키노 비스콘티와 서신을 교환한 페트라르카는 조반니 비스콘티 대주교의 초청으로 밀라노에서 8년간 머물렀다. 그는 갈레아초 2세와도 친구로 지냈다.[2]

갈레아초 2세는 파비아 성에 많은 방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고, 약 1,000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을 설립하여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3] 또한 파비아 대학교를 후원하여 유럽에서 가장 명망 있는 대학교 중 하나로 만들었다.

비스콘티 가문은 조반니 디 발두치오, 보니노 다 캄피오네 등 유명 조각가들에게 조각상과 묘비 제작을 의뢰했다. 보니파치오 벰보는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초상화를 그렸다.

잔 갈레아초는 밀라노 대성당과 파비아 카르투시오 수도원 등 종교 건물을 짓고 대리석과 조각으로 장식했다. 조반니노 데이 그라시와 자코모 다 캄피오네 등이 조각가로 참여했고, 미켈리노 다 베조조는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했다.

6. 대중 문화에서의 묘사

토머스 해리스의 1999년 소설 《한니발》에서 연쇄 살인범 한니발 렉터는 어머니 시모네타를 통해 비스콘티 가문의 후손으로 묘사된다.[1]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이 책 표지로 사용되었다.[1]

7. 가계도

wiki

;테오발도 비스콘티 (1210년 - 1276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재위 1271년 - 1276년).

;오토네 비스콘티(en) (1213년 - 1295년)

:1262년부터 밀라노 대주교를 역임하고, 1277년에 밀라노의 시뇨레(僭主, 봉신)가 됨(시뇨레 재위: 1277년 - 1278년, 1282년 - 1295년[2]). 밀라노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성을 강화한 시기이다.

;마테오 1세 비스콘티(en) (1250년 - 1322년)

:오토네의 조카의 아들. 밀라노 僭主(재위: 1287년 - 1302년, 1311년 - 1322년). 그의 동생 우베르토의 16대손이 유명한 영화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이다.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 (1277년 - 1328년)

:마테오 1세의 아들. 밀라노 僭主(재위: 1322년 - 1327년).

;아쪼네 비스콘티(en) (1302년 - 1339년)

:갈레아초 1세의 아들. 밀라노 僭主(재위: 1329년 - 1339년).

;조반니 비스콘티 (1290년? - 1354년)

:갈레아초 1세의 동생. 밀라노 僭主(재위: 1339년 - 1354년). 밀라노 대주교(재위: 1342년 - 1354년).

;루키노 비스콘티 (1287년? - 1349년)

:갈레아초 1세, 조반니 1세의 동생. 밀라노 僭主(재위: 1339년 - 1349년).

;마테오 2세 비스콘티 (1319년?-1355년)

:갈레아초 1세와 조반니 1세의 동생 스테파노의 아들. 밀라노 僭主(재위: 1354년 - 1355년).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 (1321년 - 1378년)

:마테오 2세의 동생. 밀라노 僭主(재위: 1354년 - 1378년).

;베르나보 비스콘티 (1323년 - 1385년)

:마테오 2세, 갈레아초 2세의 동생. 밀라노 僭主(재위: 1354년 - 1385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1351년 - 1402년)

:갈레아초 2세의 아들. 1386년, 밀라노 대성당 건설을 시작함. 1395년, 신성 로마 제국 벤첼에 의해 최초로 밀라노 공작의 칭호를 얻음. 비스콘티 가문의 전성기이다(재위: 1378년 - 1395년, 공작 재위: 1395년 - 1402년).

;조반니 마리아 비스콘티 (1388년 - 1412년)

:잔 갈레아초의 아들. 1402년, 어머니의 섭정 아래 밀라노 공작이 됨(재위: 1402년 - 1412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1392년 - 1447년)

:조반니 마리아의 동생으로, 1412년 형이 암살당하고 밀라노 공작이 됨(재위: 1412년 - 1447년).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 (1425년 - 1468년)

:필리포 마리아의 서출 딸이자 유일한 자녀. 아버지 필리포 마리아의 사후, 남편인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이 되고, 그 지위는 스포르차 가에 찬탈당함.

;루키노 비스콘티: 20세기 이탈리아의 저명한 영화 감독.

참조

[1] 서적 るるぶイタリア'14 https://books.google[...] JTBパブリッシング
[2] 서적 別巻 世界歴史地図 学習研究社
[3] 웹인용 Storia di Milano ::: I Visconti: http://www.storiadim[...] Storiadimilano 2006-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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