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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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리족은 고대 프랑크족의 한 분파로, 어원에 대한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기원과 관련하여 조시무스는 살리족이 로마 제국 외부에 살던 단일 부족으로, 색슨족에게 쫓겨 로마 제국 내로 들어왔다고 기록했으나, 마티아스 슈프링어는 단일 부족이 아닌 여러 집단의 연합체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4세기에는 로마와 협약을 맺고 텍산드리아 지역에 정착하여 로마 제국 방어에 기여했으며, 5세기에는 클로디오가 이끄는 프랑크족의 확장을 통해 서유럽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킬데리쿠스 1세와 클로도베쿠스 1세는 로마령 갈리아를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세웠으며, 살리카 법전을 제정했다. 살리족은 중앙집권적 권력이 없는 느슨한 부족 연맹체를 이루었으며, 게르만 다신교를 믿다가 클로도베쿠스 1세의 개종 이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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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족 | |
---|---|
살리 프랑크족 | |
![]() | |
기본 정보 | |
거주지 | 유럽 |
국가 | 프랑크 왕국 |
민족 | 프랑크인 |
언어 | 프랑크어 |
근연 부족 | 리푸아리족 |
역사 | |
시기 | 4세기 ~ 5세기 |
지리 | |
주요 지역 | 현재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 |
2. 어원
살리족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고대 로마의 신 마르스를 섬기며 제의에서 춤추던 사제단인 살리와는 관련이 없다.
2. 1. 에이설 강 유래설
고대 로마 제국 이전, 살리족의 거주지 근처를 흐르던 에이설강에서 부족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에이설강은 당시 살라(Sala)라고 불렸으며 히슬로아(Hisloa), 히슬라(Hisla)로도 불렸다.[20] 오늘날 이 지역은 살란트라고 불린다.2. 2. 게르만어 '살리온' 유래설
'친구', '동료'를 뜻하는 게르만어 '*saljon'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2] 이 단어는 동맹체를 의미하며, 살리족이 로마 제국과 맺은 동맹 관계를 나타낸다는 해석이다.[22] 이 가설은 살리온이라는 말이 제국과 동맹을 맺은 부족 자체를 뜻하다가 이들이 사는 지역과 강의 이름으로 남았다고 추정한다.[4]3. 기원
살리족은 로마 제국의 기록에서 네덜란드 라인강 삼각주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살리족은 본래 라인강과 베저강 사이(현 네덜란드・독일 서부)에 거주하던 부족들을 통칭하는 말이었고, 살리족은 그 북부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현재 네덜란드의 오버레이설주에는 살란트(Salland) 지방이 있으며, 아이설강의 옛 이름도 살라(Sala)라고 불렸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러한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살리족이 단일 부족이었는지, 아니면 여러 집단의 연합체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살리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조시무스와 마티아스 슈프링어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 조시무스는 살리족이 로마 제국 외부에 살던 단일 부족이었으며, 색슨족의 일파에게 쫓겨 로마 제국 내로 들어왔다고 기록했다.
- 마티아스 슈프링어는 살리족이 단일 부족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밀려온 사람들의 집합체였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1. 부족 기원설 (조시무스)
역사학자 조시무스는 살리족이 로마 제국 외부에 살던 단일 부족이었으며, 색슨족의 일파에게 쫓겨 로마 제국 내로 들어왔다고 기록했다.[22] 이 경우 살리족의 고향은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주의 벨루에 지역으로 추정되며, 라인강과 아이설강 사이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22]3. 2. 부족 연합체 기원설 (마티아스 스프링거)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저서 《프랑크인, 그들이 살리라 부르는 관습》[21]을 원전으로 하는 고전 기록에 따르면, 살리족은 프랑크인의 다른 부족들과 달리 처음부터 로마 제국 영토인 네덜란드의 라인강 삼각주에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마티아스 슈프링어와 같은 학자들은 살리족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일 부족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 따라 여러 곳에서 밀려온 사람들의 집합체였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암미아누스는 살리족이 로마 제국 외부의 샤마비족에 의해 고향인 바타비아(오늘날의 네이메헌에 있던 키비타스)에서 텍산드리아로 밀려났으며, 이후 통에런의 키비타스로 편입되었다고 기록했다.[21]조시무스는 살리족을 로마 제국 외부에 살던 단일 부족으로 묘사했으며, 오늘날에도 이러한 설명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경우 살리족의 고향은 오늘날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주의 벨루에 지역으로, 라인강과 에이설강 사이에 살면서 오늘날의 샐랜드란 이름의 어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2] 이 가설에 따르면, 살리족은 로마 제국 시기 색슨족과 동맹을 맺어 결성한 샤우키 연맹의 한 축이 된다. 초기 기록에서는 색슨인과 프랑크인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23]
4. 역사
로마 제국의 기록에는 기원후 286년 로마의 장군이었던 카라우시우스가 도버 해협 맞은 편 연안의 방어 임무를 맡게 된 일을 기록하면서 그 지역의 프랑크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프로부스 황제 치세의 일이다.[24] 당시 로마는 해적이라는 의미로 프랑크인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리시 해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되었다.[26] 바이킹이 등장하기 수세기 전에 "색슨"이라는 말은 선박을 타고 로마 영토를 습격하던 게르만족 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데 반해 "프랑크"는 내륙의 라인강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살리족이 바타비아에 정착하기 전 어떠한 생활을 했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살리족이 한때 로마 제국 밖에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고 색슨에게 쫓겨 로마 제국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오직 조시무스의 기록에만 나오고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시무스는 이들이 "콰디" 또는 그리스식 발음으로 "코우아도이"라 불리던 색슨 일파에게 쫓겨 바타비아를 벗어나 로마 영내로 들어왔고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조시무스가 샤마비족의 연원을 살리족의 것과 혼동하였을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27]
조시무스에 따르면 이 '색슨인'들은 배를 타고 라인강을 오르내리면서 다른 프랑크인들의 거주지를 돌아다녔고, 후에 로마 영내인 하구의 삼각주에 정착하였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들이 옛 고향 바타비아의 남쪽에 위치한 텍산드리아에 거주하도록 허용하였다.[28]
로마 영내에 정착한 살리족은 다른 프랑크인 부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4세기 후반에 쓰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은 당시 로마 영내를 침입한 게르만족으로 샤마비족을 언급하고 있지만, 대개 샤마비는 프랑크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살리족과 반대로 샤마비는 로마 제국에 복속하지 않아 축출되었고 영토 외곽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29]
5세기 전반, 프랑크인 부족들은 실바 카르보나리아의 경계를 넘어 오늘날 프랑스 북부의 솜강 지역까지 영역을 넓혔다. 클로디오는 투르나쿰(오늘날 벨기에의 투르네)과 카메라쿰(오늘날 프랑스 캉브레)을 정복하였다. (445년에서 450년 사이)[31]
451년,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아틸라에 대항하기 위해 게르만족 동맹들을 규합하였다. 프랑크인들은 서고트인과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카탈라우눔 전투에 참전하여 훈족의 위협을 종식시켰다.
5세기 로마 군대 목록인 《노티티아 디그니타툼》에는 히스파니아에 주둔한 살리 이우니오레스 갈리카니(Salii iuniores Gallicani, 갈리아 출신의 젊은 살리족), 갈리아에 주둔한 살리 세니오레스(Salii seniores, 나이 든 살리족) 등이 언급되어 있다.[32]
킬데리쿠스 1세와 클로도베쿠스 1세는 로마령 갈리아를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이들의 법률은 살리카법이라 불렸으며, 이들 왕조는 메로베우스의 이름을 따 메로베우스 왕조로 불린다.[35]
메로베우스 왕조는 496년 클로도베쿠스 1세의 세례를 통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이는 프랑크 왕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동맹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511년 클로도베쿠스의 사망 이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이후 4세기에 걸쳐 영토 상속과 분할이 반복되면서 살리카법은 남성 후계자의 독점적 상속권을 확립하게 된다.
메로베우스 왕조가 갈리아 지역을 통치하면서 자신들의 법 체계를 우위에 두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를 렉스 살리카(Lex Salica, 살리카족의 법률)이라 불렀고, 이는 훗날 살리카 법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4. 1. 로마 제국과의 관계 (4세기)
358년, 살리족은 로마와 모종의 협약을 맺고 텍산드리아 남쪽의 삼각주를 거처로 삼았다. 이 지역은 스헬더강, 뫼즈강, 데머강 사이에 놓여 있으며 오늘날 네덜란드의 노르트브라반트주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주, 림뷔르흐주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 켐펜이라 불린다.[22]로마의 사료에서는 기원후 286년 로마의 장군이었던 카라우시우스가 도버 해협 맞은 편 연안의 방어 임무를 맡게 된 일을 기록하면서 그 지역의 프랑크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프로부스 황제 치세의 일이다.[24] 프로부스 시대의 기록 가운데에는 흑해 연안에서 로마 선박을 나포하여 사람들을 납치한 뒤 그리스와 시칠리아를 거쳐 지브롤터를 통해 대서양으로 빠져나간 대규모 해적 무리에 대한 기록도 있다.[25] 당시 로마는 해적이라는 의미로 프랑크인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리시 해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되었다.[26]
율리아누스 황제는 살리족이 옛 고향 바타비아의 남쪽에 위치한 텍산드리아에 거주하도록 허용하였다. 율리아누스는 살리족을 죽이지도, 로마 영토 밖으로 쫓아내지도 말라고 명령했다.[28]
로마 영내에 정착한 살리족은 다른 프랑크인 부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4세기 후반에 쓰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은 당시 로마 영내를 침입한 게르만족으로 샤마비족을 언급하고 있지만, 대개 샤마비는 프랑크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살리족과 반대로 샤마비는 로마 제국에 복속하지 않아 축출되었고 영토 외곽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29]
4. 2. 프랑크족의 확장과 살리족 (5세기)
5세기 전반, 프랑크족은 로마인들이 거주하던 실바 카르보나리아의 경계를 넘어 오늘날 프랑스 북부의 솜 강 지역까지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했다. 클로디오라는 인물이 이 프랑크족을 이끌었으며, 투르네(투르나쿰)와 캉브레(카메라쿰)를 정복했다. 이 사건은 445년에서 45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31]451년,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로마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동쪽에서 침입해 온 훈족의 아틸라에 대항하기 위해 영역 내의 게르만족 동맹을 규합했다. 프랑크족은 이에 호응하여 서고트족과 일시적 동맹을 맺고 카탈라우눔 전투에 참전했고, 이 전투로 훈족의 위협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5세기 로마 군대 목록인 《노티티아 디그니타툼》에는 살리족 출신 부대가 언급되어 있다. 히스파니아에 주둔한 살리 이우니오레스 갈리카니(Salii iuniores Gallicani, 갈리아 출신의 젊은 살리족)와 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살리 세니오레스(Salii seniores, 나이 든 살리족)가 그 예이다.[32]
4. 3. 메로베우스 왕조와 살리족
킬데리크 1세와 그의 아들 클로비스 1세[17]는 로마 갈리아를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이들이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루아르 강과 실바 카르보나리아 사이의 지역(훗날 네우스트리아로 불림)에 대해 발표한 법률은 살리카법으로 불리게 되었다.[16] 메로빙거 왕조는 킬데리크의 아버지 메로베우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17] 그의 출생은 초자연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었다. 킬데리크와 클로비스는 프랑크족의 왕이자 벨기카 세쿤다 로마 속주의 통치자로 묘사되었다. 클로비스 1세는 486년에 혼합된 갈로로만-게르만 인구를 가진 게르만 왕국의 절대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갈로로마인과 다른 모든 프랑크족 부족과의 승리를 통해 그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수도를 파리에 세웠다. 그는 서고트족과 알레만니족을 물리쳤으며, 그의 아들들은 서고트족을 스페인으로 몰아내고 부르군트족, 알레만니족 및 튀링기아족을 정복했다.메로빙거 왕조는 250년 동안 내분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점차 쇠퇴했다. 메로빙거 왕조의 사회적 지위는 현재 벨기에와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뫼즈 강 주변의 북부 지역에서 온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 인수되었다. 갈리아에서는 로마 사회와 게르만 사회의 융합이 일어나고 있었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프랑크족은 496년 클로비스 1세의 세례를 시작으로 기독교(가톨릭)를 수용하였으며, 이 사건은 프랑크 왕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동맹을 시작했다. 고트족, 부르군트족 및 롬바르드족과는 달리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였지만, 살리족은 초기에 가톨릭 기독교를 받아들여 정복된 영토에서 교회 계층 및 그들의 신민과의 관계를 맺었다.
클로비스의 네 아들 간의 프랑크 왕국의 분할(511년)은 프랑크 역사에서 4세기 이상 반복될 사건이었다. 당시 살리카 법은 남성 후손의 상속권을 확립했다. 이 원칙은 새로운 상속 모델의 단순한 구현이라기보다는 해석의 실천으로 밝혀졌다. 프랑크족 외에는 게르만 민족 사이에서 영토 분할의 확립된 관행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갈리아를 정복한 후기 메로빙거 왕들은, 그들이 로아르 강과 실바 카르보나리아 사이의 로마인 거주 지역에서 소위 살리카법(''렉스 살리카'')을 적용했기 때문에, 살리족의 조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라인란트 또는 리푸아리아 프랑크족과의 연관성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18]
5. 문화
살리족의 언어는 프리지아어라고 불렸으며 프랑스의 저방언 그룹에 속한다. 살리족은 고대 네덜란드의 문화와 사회의 중추를 이룬 민족 가운데 하나였으며, 프리지아인, 바타보이와 작센인 등과 함께 프랑크 왕국의 주요 민족이 되었다. 오린 W. 로빈슨(Orrin W. Robinson)과 같은 현대 연구자에 따르면, 살리족의 언어는 고대 게르만어의 한 방언에서 프리지아어, 프랑코니아어를 거쳐 네덜란드어로 진화했다고 한다.[18] 살리 프랑크어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인 것들 뿐이지만, 오늘날 저지 프랑크어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의 선조격으로 추정된다.[37]
5. 1. 사회 구조
메로베우스 왕조 수립 이전 살리족은 중앙집권적 권력이 없는 느슨한 부족 연맹체였고, 로마와 협상하기 위해 대표를 뽑는 정도였다.[37] 각 부족은 확대 대가족의 성격을 갖는 혈족이었고 살리카법은 가족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를 규정하고 있을 뿐 단독적인 개인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37]가족 유대감의 중요성은 살리카법에 잘 나타나 있는데, 개인은 가족의 일원이 아니면 보호받을 권리가 없다고 규정했다.[19] 각 부족은 특히 명망 있거나 귀족 가문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살리족은 느슨한 연합을 구성하여 로마령과 교섭하기 위해 조직화했다. 각 부족은 가족·친척 단위의 소규모 그룹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고 강하며, 고귀하다고 여겨지는 특정 가족을 중심으로 모여 집락을 형성했다.[18]
5. 2. 종교
고트족이나 반달족의 경우 4세기 중반 이후 부분적인 기독교 개종이 시작되었지만, 살리족은 클로도베쿠스 1세가 개종할 때까지 게르만 다신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군주들이 기독교화를 추진하면서 다신교에 대한 믿음은 점차 감소하였다.[37] 한편 갈리아 지역의 로마화된 살리족들은 클로도베쿠스 1세의 세례 이전에 이미 독자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수 있다.[38]참조
[1]
서적
The Franks, from their first appearance in history to the death of King Pe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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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man, Brown, Green, Longmans, and Robe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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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De 14C-chronologie van de Nederlandse Pre- en Protohistorie VI: Romeinse tijd en Merovingische periode, deel A: historische bronnen en chronologische sche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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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os, eos videlicet quos consuetudo Salios appellav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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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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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am regio: Salland (in Dutch)
https://cultureelerf[...]
Rijksdienst voor het Cultureel Erfgoed
[5]
서적
Die Franken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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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idgement of Rom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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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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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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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mpreintes inédites de l'anneau sigillaire de Childéric Ier : état des connaissances"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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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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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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