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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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하여 드네프르 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트족의 일파로, 375년 훈족의 압박으로 로마 제국 영내로 이주를 시작했다.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서쪽으로 이동한 부족을 서고트족으로 불렀다. 로마 제국과의 갈등과 교류를 겪으며, 378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에 승리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와 동맹을 맺고 모이시아에 정착했으나,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후 알라리크 1세의 반란으로 이탈리아를 약탈했다. 410년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한 후, 갈리아 남부에 정착했다가 히스파니아로 이동했으며, 475년 유리크 왕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나, 711년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서고트족은 독자적인 법전과 뛰어난 금세공 기술, 독특한 건축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유전학 연구를 통해 그들의 기원과 조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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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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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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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고트어 |
종교 | 고트족 이교주의 아리우스파 니케아 기독교 로마 이교 |
관련 민족 | 동고트족 크림 고트족 반달족 게피드족 |
역사 | |
기원 | 고트족 |
주요 사건 | 서고트 왕국 건설 |
사회 | |
문화 | 독수리 문양 사용 |
기타 | |
다른 이름 | 비시고티 (Visigothi) 위시고티 (Wisigothi) 베시 (Vesi) 비시 (Visi) 웨시 (Wesi) 위시 (Wisi) |
2. 역사
서고트족은 고트족에서 기원했으며,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기원하여 동유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토네스에서 파생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4세기경 서고트족은 다른 동게르만어와 구별되는 언어를 사용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남하한 고트족[1]은 드네프르 강 양안에 나뉘어 거주했다.[3] 서쪽 카르파티아 산맥 기슭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숲의 거주자"를 의미하는 '''테르빙겐''' (Terwingen)이라고 불렸지만, 후에 "선량한"을 의미하는 고트어 접두사 "wesu"를 붙여 서고트족이라 불리게 되었다.[4]
3세기와 4세기 동안 고트족과 로마 사이에는 다양한 갈등과 교류가 있었다. 로마가 다키아 영토에서 철수한 후, 고트족은 모에시아 로마 속주로 도나우 강을 건너 침략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250년에는 게르만 왕 크니바가 이끄는 대규모 침략에 합류하기도 했다. 로마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경험은 북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로의 추가 침략을 부추겼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통치 기간 동안, 서고트족은 도나우강 남쪽 로마 영토를 계속 약탈했다. 332년 고트족과 로마 간의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375년 훈족의 압박으로 서고트족은 대규모 이주를 시작했고,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5] 376년 지도자 프리티게른은 동로마 제국 황제 발렌스에게 도나우 강 남쪽에 정착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발렌스는 이를 허가했다. 그러나 기근이 발생했고 로마는 약속했던 식량이나 토지를 제공하지 않았다. 결국 서고트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군을 대파하고 발렌스 황제를 살해했다.
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고트족과 평화 조약을 맺었고, 이 평화는 395년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 해,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 1세는 왕좌를 노렸고, 스틸리코 장군이 제국 내 지위를 유지하려 하면서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이후 15년 동안 불안한 평화는 알라리크와 로마 군대를 지휘하는 게르만족 장군들 간의 갈등으로 깨졌다. 408년 스틸리코가 처형당하고 로마 군단이 수천 명의 야만족 병사 가족을 학살하자, 알라리크는 로마로 진격했다. 410년 8월 24일, 알라리크의 군대는 살라리아 문을 통해 로마에 입성하여 도시를 약탈했다.
알라리크는 북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아내의 남동생이 왕위를 계승했다. 서고트족은 갈리아 아퀴타니아에 정착했고, 이는 미래 서고트 왕국의 핵심이 되었다.
서고트 왕국은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존속했으며, 처음에는 갈리아에서 세워졌고, 이후 히스파니아에서 711년까지 존속했다. 418년, 호노리우스 황제는 갈리아 아퀴타니아에 영토를 할당하여 서고트족 연방군이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
서고트족의 두 번째 위대한 왕 에우리크는 서고트족 내 분쟁 파벌을 통일했고, 475년 율리우스 네포스 황제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독립 왕국이 되었다. 에우리크는 남부 갈리아 대부분을 점령했고, 지중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500년경, 툴루즈를 중심으로 한 서고트 왕국은 아퀴타니아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지배했다. 그러나 507년 부예 전투에서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족에게 패배하여 아키텐의 지배권을 빼앗겼다.
알라리크 2세 사후, 서고트족 귀족들은 어린 왕 아말라릭을 나르본을 거쳐 히스파니아로 데려갔다. 서고트족 통치의 중심지는 바르셀로나를 거쳐 톨레도로 옮겨졌다. 511년부터 526년까지 서고트족은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릭 대왕의 섭정 통치를 받았다.
서고트 왕국은 711년 로데릭 왕이 과달레테 전투에서 우마이야 칼리파조에 맞서 싸우다 사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이는 히스파니아의 우마이야 정복의 시작으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8세기 초 이슬람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서고트족 귀족 아스투리아스의 펠라요는 718년 코바동가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하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거나 그들의 통치하에 사는 것을 거부한 다른 서고트족은 프랑크족 왕국으로 도망쳤고, 샤를마뉴 제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 1. 기원과 초기 이동
서고트족은 원래 게르만족의 분파로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살고 있었다.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고트족의 일파 중 서쪽으로 진출한 부족을 서고트족이라고 부른다. 서고트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여러 족장들이 지배하는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받아들여 상당 부분 문명화되어 있었다.[1]376년까지 다키아에 살았던 서고트족은 훈족의 공격을 받자, 족장 프르티게른(376-380)은 도나우강을 건너 로마 제국으로 이주를 요청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발렌스는 이주를 허락했지만, 트라키아 속주 총독은 이들을 착취하고 괴롭혔다. 이에 서고트족은 일부 동고트족과 함께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 발칸반도의 로마 속주들을 약탈했다. 378년 8월 9일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고 발렌스를 죽였다.[1]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고트족과 동맹부족 협정을 맺고 모이시아에 정착시켰으며, 이들을 대거 로마군에 편입시켰다.[1]
서고트족은 고트족에서 기원했으며,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기원하여 동유럽으로 남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구토네스에서 파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고트족은 4세기까지 다른 동게르만어와 구별되는 언어를 사용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남하한 고트족[1]은 드네프르 강 양안에 나뉘어 거주했다.[3] 그 서쪽, 카르파티아 산맥 기슭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숲의 거주자"를 의미하는 '''테르빙겐''' (Terwingen)이라고 불렸지만, "선량한"을 의미하는 고트어의 접두사 "wesu"를 붙여 불리게 되면서, 후에 서고트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4] 서고트족이 살았던 그 지역은 토지가 척박하여 정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로마 제국 영내로, 주로 용병으로 이주했다. 로마 동부의 황제 발렌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는 고트족에게 관대하여, 제국 영내로의 이주를 인정했다.[5]
375년에 훈족의 압박으로 대규모 이주가 시작된다.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도 이때로 보인다.[5]
2. 2. 왕국 발전과 로마 약탈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25살의 족장 알라리크 1세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유린했다.[5]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알라리크 1세에게 로마군 지휘관 직책을 주어 무마하려 했고, 반달족 출신 로마 장군 스틸리코의 활약으로 고트족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다.[5] 그러나 401년, 알라리크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약탈했다.[5]아르카디우스와 스틸리코가 죽자, 서고트족은 이탈리아를 거침없이 유린했고, 410년에는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했다.[5] 로마 약탈을 피해 라벤나로 피신한 호노리우스 황제는 수도를 라벤나로 옮겼다.[5] 같은 해 알라리크가 사망하고, 아타울푸스가 뒤를 이어 서고트족을 이끌고 갈리아 남부에 정착했다가 히스파니아로 이동했다.[5]
반달족이 이베리아 반도로 몰려오자, 서고트족은 다시 갈리아 아퀴타니아로 밀려났다. 418년 호노리우스 황제는 이들을 갈리아 아퀴타니아에 정착시키고 푀데라티를 맺었다.[5] 451년, 훈족의 아틸라가 침입하자, 서고트족은 로마의 갈리아 총독 아에티우스, 프랑크인과 함께 살롱 전투에서 아틸라와 맞서 싸웠다.[5] 453년 테오도리크 1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서고트족은 영토를 지켜냈다.[5]
475년, 유리크 왕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서고트 왕국을 선포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다.[5]
2. 3. 이베리아반도 장악과 멸망
반달족을 북아프리카로 몰아낸 서고트 왕국은 곧 이베리아반도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알라리크 2세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와 싸우다가 전사했고, 서고트 왕국은 갈리아 남부 영토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다.[1] 이후 서고트 왕국은 몇 개로 쪼개지고 피레네산맥 이남으로 밀려났으며, 511년에는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릭 대왕의 섭정 통치를 받기도 했다.[1]서고트 왕국은 톨레도를 수도로 삼아 셉티마니아와 히스파니아 거의 대부분 지역을 다스렸으며,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할 때까지 이베리아반도의 주도적인 왕국으로 지배했다.[1]
500년경, 툴루즈를 중심으로 한 서고트 왕국은 아퀴타니아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를 지배했고, 북서부의 수에비 왕국과 바스크족 및 칸타브리족이 지배하는 작은 지역을 제외한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지배했다.[1] 그러나 507년,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족은 부예 전투에서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아키텐의 지배권을 빼앗았다.[1] 알라리크 2세는 전투에서 사망했다.[1]
갈리아 전역에 걸친 서고트족의 권력은 이탈리아의 강력한 동고트 왕국 왕 테오도릭 대왕의 지원으로 완전히 상실되지 않았는데, 그의 군대는 클로비스 1세와 그의 군대를 서고트족 영토에서 몰아냈다.[1]
알라리크 2세가 사망한 후, 서고트족 귀족들은 그의 후계자인 어린 왕 아말라릭을 먼저 나르본으로, 그리고 갈리아의 마지막 고트족 전초기지였던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로 데려갔다. 서고트족 통치의 중심지는 먼저 바르셀로나로, 그 다음 내륙으로 남쪽의 톨레도로 옮겨졌다.[1] 511년부터 526년까지 서고트족은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릭 대왕이 어린 아말라릭을 위해 섭정으로 통치했다.[1]
왕국은 711년까지 존속했는데, 로데릭 (로리고) 왕이 과달레테 전투에서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남쪽 침략에 맞서 싸우다 사망했다. 이것은 히스파니아의 우마이야 정복의 시작을 알렸는데,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8세기 초에 이슬람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
2. 4. 서고트 왕국 이후
711년 과달레테 전투에서 로데릭 왕이 우마이야 칼리파조에 맞서 싸우다 사망하면서 서고트 왕국은 멸망했다. 이는 히스파니아의 우마이야 정복의 시작으로, 8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2]아스투리아스의 펠라요는 718년 코바동가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하고 반도 북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다.[3] 히스파노-고트족 귀족들은 히스파니아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했으며, 히스파노-로마인과의 동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4] 이들은 스스로를 'gens Gothorum' 또는 'Hispani'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여겼다. 일부 귀족들은 아스투리아스나 셉티마니아로 피난했고, 펠라요의 봉기를 지원하며 토착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귀족을 형성했다. 산악 지역에는 아스투레스족, 갈리시아인, 칸타브리족, 바스크족 등 히스파노-고트족 사회에 동화되지 않은 집단들이 거주했다.[5]
이슬람 통치를 거부한 서고트족들은 북쪽 프랑크 왕국으로 이주하여 샤를마뉴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르도바 에미레이트 초기에는 무슬림 지배하에 남은 서고트족들이 에미르 알-하라스의 개인 호위대를 구성하기도 했다.
서고트족은 스페인 통치 기간 동안 5세기에서 8세기 사이 서유럽에서 건설된 유일한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했다. 레코폴리스, 비토리아-가스테이즈(아마도 이루냐-벨레아), 루세오, 올리테 등 4개 도시가 확인되었으며, 아랍 자료에는 '바이아라'(아마도 몬토로)라는 5번째 도시가 언급된다. 이 도시들은 모두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고, 그 중 3개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250년 이상 스페인을 통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어에 차용된 고트어는 거의 없다.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상속자로서 언어를 잃고 스페인의 히스파노-로마 인구와 융화되었다.
3. 명칭
서고트족은 507년 클로비스 1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카시오도루스가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냥 고트족이라고 불렸다. 카시오도루스는 동고트족을 모델로 이 용어를 만들었으며, 5세기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가 이미 서고트족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베시(Vesi)라는 옛 이름을 사용했다.[1] 동고트족 이름의 첫 부분은 "동쪽"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으며, 중세 작가 요르다네스는 그의 저서 ''게티카''에서 "서고트족은 서부 지역의 고트족이었다"라고 명확히 대조했다.[2]
로마와 그리스 작가들은 3세기에 고트족 부족들을 처음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아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고트족이라고 언급했던 테르빙기가 포함된다.[3] "베시" 또는 "비시"는 "서고트족"이라는 용어가 파생된 곳으로,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 이전에 4세기 말 또는 5세기 초 로마 군대 목록인 노티티아 디그니타툼la에 처음 언급되었다. 이 목록에는 테르빙기에 대한 마지막 언급도 포함되어 있다.[3]
요르다네스는 베시, 테르빙기 등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알라리크 1세부터 알라리크 2세까지의 서고트족 왕들을 4세기 테르빙기 왕 아타나리크의 후계자로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많은 학자들은 "베시"와 "테르빙기"를 하나의 부족으로, "오스트로고티"와 "게루퉁기"를 다른 부족으로 간주해 왔다.[4]
볼프람은 "베시"와 "오스트로고티"는 각 부족이 스스로를 칭찬하는 용어였고, "테르빙기"와 "게루퉁기"는 서로를 묘사하는 지리적 식별자였다고 주장한다.[5] 이는 400년경 이후 훈족의 침략으로 인해 후자의 용어가 사용되지 않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피터 헤더와 같은 학자들은 서고트족의 정체성이 로마 제국 내에서 나타났다고 본다. 로저 콜린스는 376–382년 고트 전쟁에서 테르빙기, 게루퉁기 및 기타 "야만족" 부대가 발칸 반도에서 알라리크 1세 휘하의 다민족 ''포에데라티''로 뭉치면서 서고트족 정체성이 나타났다고 본다.
''테르빙기''(Tervingi)는 "숲의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으며, 고트어 ''triu'' 및 영어 "tree"와 관련이 있다. 서고트족은 트레벨리우스 폴리오, 클라우디안,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에 의해 ''웨시''(Wesi) 또는 ''위시''(Wisi)라고 불린다. 이 단어는 "좋은"을 의미하는 고트어(Gothic language)로, "좋은 또는 가치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4. 문화
서고트족은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서유럽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로마 제국의 쇠퇴 이후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지역을 통치했다. 이들의 문화는 로마 문화와 게르만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특징을 보이며, 후대 서유럽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우리크는 서고트족 내 분쟁을 통일하고 475년 율리우스 네포스 황제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독립 왕국을 이루었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후계 국가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다.[1] 500년경 툴루즈 중심의 서고트 왕국은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지배했으나,[2] 507년 부예 전투에서 프랑크족에게 패배하여 아키텐을 상실했다.[3]
이후 서고트족은 아말라릭 왕을 통해 왕국을 재분할했고, 동고트족 출신 테우디스가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다.[4] 549년경 아타나길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여 비잔틴 제국에 스파니아 지방을 빼앗기기도 했다.[5]
리우비길드는 북부 지역과 수에비 왕국을 정복하고 비잔틴에 빼앗긴 남부 지역 일부를 되찾았다. 이후 웜바 왕, 에르비그 왕, 에기카 왕, 비티자 왕 순으로 왕위가 이어졌다. 711년 로데릭 왕이 과달레테 전투에서 우마이야 칼리파조에 맞서 싸우다 사망하며 히스파니아의 우마이야 정복이 시작되었다.
아스투리아스의 펠라요는 718년 코바동가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하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다. 프랑크족 왕국으로 도망친 서고트족은 샤를마뉴 제국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서고트족은 5세기에서 8세기 사이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했다. 스페인어에는 고트어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상속자로서 그들의 언어를 잃고 히스파노-로마 인구와 결혼했다.
4. 1. 법
서고트 법전(라틴어: ''Forum Iudicum'', '판관의 서' 또는 '서고트 율법'으로 불림)은 킨다스윈트 왕(재위 642년 ~ 653년)이 처음 제정하고 654년에 기록된 법률이다. 귀족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을 성문화한 것이다. 이 법전은 현대 헌법보다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어 서고트 사회 구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서고트 법전은 로마인(''leges romanae'')과 서고트인(''leges barbarorum'')에게 서로 다른 법을 적용하던 오랜 관습을 폐지했다. 이로써 서고트 왕국의 모든 신민은 '로마인'과 '고트인'이 아닌 '히스파니'로 불리게 되었고, 동일한 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1] 이는 사회적, 법적 차이를 없애고 다양한 인구 집단의 동화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1] 서고트 법전은 로마법에서 초기 게르만법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서고트인들이 가족법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 중 하나는 기혼 여성의 재산권을 보호한 것이다. 이는 스페인법에 계승되었고, 나아가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시행되는 공동 재산 제도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2]
4. 2. 종교
서고트족은 원래 게르만 이교 신앙을 따랐지만, 로마 제국의 경계 밖에 있는 동안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리우스파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리로,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로마인들은 이들을 이단으로 여겼다.
리우비길드 왕(568–586)은 아리우스파와 가톨릭 사이의 교리적 합의를 통해 왕국을 통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아들 레카레드 1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톨레도 제3차 공의회를 소집하여 종교 분쟁을 해결했다. 그러나 이 공의회에서 통과된 유대인 차별 법률은 보편적으로 시행되지 않았고, 이후 여러 차례의 톨레도 공의회에서 반복되고 강화되었다.
서고트족이 아리우스파 신앙을 유지하는 동안, 유대인들은 비교적 관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유대인들은 종교적 관행에 대한 조사를 받고 박해를 받았다. 시세부트 왕은 유대인들에게 강제 개종을 포고했고, 이후 왕들도 유사한 칙령을 반복했다.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강제 세례를 받거나 유대교 의식을 금지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톨레도 제4차 공의회(633년)에서는 주교들이 왕족 중에서 왕을 선출하는 권한을 얻었는데, 이는 종교적 다원주의 시대가 끝나고 교회 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7세기 말까지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서고트족과 이베리아 반도의 토착 로마 시민들을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4. 3. 건축
서고트족은 히스파니아를 통치하면서 바실리카 양식 또는 십자형 양식의 여러 교회를 건설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교회로는 산 페드로 데 라 나베, 산타 마리아 데 멜케, 알쿠에스카르의 산타 루시아 델 트람팔, 반데의 산타 콤바, 킨타니야 데 라스 비냐스의 산타 마리아 데 라라 등이 있다. 팔렌시아 대성당의 산 안톨린 지하 묘지는 7세기 중반 웜바 왕이 성 안토니누스의 유해를 보존하기 위해 지은 서고트 시대 예배당이다.서고트족은 5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했다. 레코폴리스, 빅토리아쿰(현대 비토리아-가스테이즈), 루세오, 올리테 등이 대표적이다. 이 도시들은 모두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그 중 3개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레코폴리스는 서고트 왕 리우비길드가 그의 아들 레카레드를 기리기 위해 건설한 도시로, 켈티베리아에서 레카레드가 공동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4. 4. 금세공
스페인 톨레도 주의 과다무르에서 발견된 서고트족 금속 세공품 컬렉션은 과라자르 보물로 알려져 있다. 이 고고학적 발견물은 톨레도 왕실 공방에서 제작된 26개의 봉헌 왕관과 금 십자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잔틴의 영향을 보여준다. 스페인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 보물은 서고트족 금세공의 절정을 나타낸다.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봉헌 왕관은 레체스빈트의 왕관과 수인틸라의 왕관으로, 마드리드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두 왕관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사파이어, 진주 및 기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수인틸라의 왕관은 두 번째 발견물의 발견자가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에게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일부 조각품을 주었을때 포함되어 있었으나, 1921년에 도난당해 아직까지 회수되지 못했다. 과라자르 보물에는 여러 개의 작은 왕관과 많은 봉헌 십자가가 있다.
이러한 발견물은 인근 지역의 다른 발견물들과 스페인 공공사업부 및 왕립 스페인 역사 아카데미의 고고학적 발굴(1859년 4월)과 함께 다음 그룹을 형성했다.
박물관 | 유물 |
---|---|
스페인 국립 고고학 박물관 | 여섯 개의 왕관, 다섯 개의 십자가, 펜던트와 호일 및 채널의 잔해 (거의 모두 금으로 제작). |
마드리드 왕궁 | 왕관 하나, 금 십자가 하나, 수태고지가 새겨진 돌 하나. 왕관 하나와 수정 구슬이 달린 다른 조각들은 1921년 마드리드 왕궁에서 도난당했으며, 그 행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
국립 중세 박물관, 파리 | 세 개의 왕관, 두 개의 십자가, 연결고리와 금 펜던트. |
두라톤, 마드로나 또는 카스틸티에라 (세고비아 시)와 같은 묘지에서 발견된 독수리 모양의 섬유는 스페인에서 서고트족의 존재를 나타내는 확실한 예이다. 이 섬유는 옷을 연결하기 위해 금, 청동 및 유리에 개별적으로 또는 쌍으로 사용되었으며, 서고트 히스파니아의 금세공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서고트족 벨트 버클은 서고트족 여성 의류의 특징적인 지위와 계급의 상징이며, 금세공의 작품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일부 조각품에는 예외적인 비잔틴 양식의 청금석 상감 세공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구리 합금, 석류석 및 유리를 사용하여 직사각형 모양으로 제작되었다.
5. 유전학
2019년 3월 사이언스에 게재된 유전학 연구에서는 6세기에 플라 데 라 오르타에 매장된 서고트족 8명의 유해를 분석했다. 유전자 분석 결과, 이들의 조상은 73%가 7~8세기 북동부 이베리아 인구(약 3/4는 철기 시대 이베리아인, 1/4는 중부/동부 지중해인)에서 유래했으며, 23%는 중부/북부 유럽 인구와 관련이 있었고, 나머지 4%는 추가적인 중부/동부 지중해 기원으로 추적되었다.[1] 2024년 3월 BioRxiv에 게시된 사전 인쇄본에 따르면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은 조상의 대부분을 남유럽에서 얻었다.[2]
6. 더불어민주당 관점 각색 (개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남하한 고트족[1]의 일파는 드네프르 강 서쪽 카르파티아 산맥 기슭에 정착했는데, 이들은 "숲의 거주자"라는 뜻의 테르빙겐으로 불렸다.[3][4] 이후 "선량한"을 의미하는 고트어 접두사 "wesu"가 붙어 서고트족으로 불리게 되었다.[5]
서고트족은 척박한 환경 때문에 로마 제국 영내로 이주하여 용병으로 활동했다. 발렌스, 테오도시우스 1세 등 로마 황제는 이들의 이주를 허용했다. 375년 훈족의 압박으로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5세기 초, 알라리크 1세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했으나, 갈리아로 철수했다. 418년 로마 제국과의 계약으로 툴루즈를 중심으로 서고트 왕국을 세우고, 훈족 및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게르만족과 싸웠다. 5세기 중반에는 서고트 왕이 실질적으로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로마 제국과 대립하기도 했다.
이후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의 이베리아인, 켈트인, 라틴인, 무어인과 융합하여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의 선조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五十嵐 1992
[2]
서적
シュライバー,岡ら訳 1979
[3]
서적
シュライバー,岡ら訳 1979
[4]
서적
松谷 2003
[5]
서적
シュライバー,岡ら訳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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