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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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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김시대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의 정치 시기를 일컫는 용어이다. 이들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 정권 시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하며 한국 정치의 주요 흐름을 형성했다.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해 집권 여당 대표가 되었고, 김대중은 DJP 연합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어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뤘다. 김종필은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고, 이후 자민련을 이끌었지만, 2004년 총선 참패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삼김은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대립하기도 했지만,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함께 참석하는 등 대한민국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9년 김대중, 2015년 김영삼, 2018년 김종필의 사망으로 삼김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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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김시대
삼김시대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 김대중 후보
개요
기간1960년대 ~ 1990년대
주요 인물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상세 내용
배경1960년대 이후 한국 정치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명의 정치 거물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시기
이들은 각각 강력한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국 현대 정치사의 주요 사건과 흐름에 깊숙이 관여
특징3김은 각자의 개성과 정치적 노선을 통해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며 한국 정치의 중요한 축을 형성
이들의 활동은 지역주의 심화, 정경유착, 권위주의 잔재 등 한국 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민주화와 정치 발전에도 기여
3김 시대는 한국 정치의 역동성과 함께 그 한계를 보여주는 시기로 평가
주요 사건1980년 서울의 봄
1987년 6월 민주 항쟁
1987년 대통령 선거 (김영삼, 김대중 후보 분열)
1997년 대통령 선거 (김대중 대통령 당선)
평가
긍정적 평가민주화 운동에 기여
정치적 경쟁을 통한 발전 도모
부정적 평가지역주의 심화
정경유착
권위주의 잔재

2. 군사 정권과 민주화 투쟁 (1961~1987)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가 집권하고 1980년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전두환이 집권하는 등 군사 정권이 이어지는 동안, 김영삼김대중은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김종필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김종필은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박정희 정권 수립에 기여했고,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며 권력 핵심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 이후 등장한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박정희유신 정권전두환의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김대중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겪었고, 김영삼은 초산 테러 사건 등의 탄압을 받았다. 1980년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조작해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1983년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아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4][5]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군사 독재가 막을 내린 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중심으로 민주 진영을 구축했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군부 출신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편,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던 김종필은 1987년 정치 활동을 재개하여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4위로 낙선했다.

2. 1. 박정희 정권과 김종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박정희 정권 수립에 기여했고,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며 권력 핵심에서 활동했다.[31][32]

2. 2. 김대중과 김영삼의 민주화 운동

김대중과 김영삼은 야당 정치인으로서 박정희, 전두환 군사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김대중은 19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 보궐 선거에서 처음으로 정계에 데뷔했으나, 곧이어 5.16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직을 수행하지 못했다.[1] 1963년 민주당 소속으로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정치에 복귀했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신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박정희에게 패배했다. 당시 김대중과 신민당은 100만 표 이상 조작된 부정선거라고 주장했다.[1]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김영삼은 1954년 28세의 나이에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김대중과 더불어 군부 독재 시대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 테러 사건 등의 탄압을 받았으며, 1979년 10월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켰고, 이는 부마항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내란음모를 계획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를 조작해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의 구명 서신[2]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압력으로 전두환은 1982년 김대중에게 망명 권유를 했고,[3] 그해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소하여 미국으로 출국했다.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민주화 5개 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전두환 정권의 야당 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에 돌입했다.[4][5] 1984년 5월 18일, 5.18 민주화 운동 4주년을 맞이하여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키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1985년에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올라서자,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으며, 재야인사 150여 명과 함께 고문저지 보고 대회 후 민추협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에 가담했다.[6] 1986년 11월 5일, 김대중 상임고문이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자, 다음 날인 11월 6일, 김영삼은 직선제 개헌만 된다면 김대중 고문을 지지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7]

2. 3. 6월 항쟁과 민주화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신군부의 항복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선언으로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던 오랜 군사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곧이어 김대중김영삼이 공동 대표로 있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심점으로 민주진영의 세가 구축되었다. 그리고 김영삼은 통일민주당 총재로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게 된다. 1987년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김대중은 11월 12일에 독자적으로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계속된 협상에도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끝내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12월 16일에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는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야권의 표가 양분되어 전두환의 뒤를 잇는 군부 출신의 노태우에게 간발의 차이로 밀려 동시에 2, 3등으로 낙선하고 만다.

3. 제6공화국과 3당 합당 (1988~1992)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자,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은 1990년 1월,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김대중3당 합당을 3당 야합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11] 이후 김대중은 1990년 10월 8일 삼당합당을 성토하고 내각제 합의 폐기,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으나, 10월 29일, 김영삼 민자당 대표와 만나 내각제 합의 폐기와 지방자치제 실시에 대한 약속을 받고 단식투쟁을 그만두었다. 이후 김대중은 민주당을 창당했다.[13] 이듬해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가 치러졌지만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일어난 정원식 국무총리 폭행사건[14]으로 인해 참패하게 된다.[15] 김대중은 1991년 4월 15일에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확대, 재개편한 후 당 총재에 취임했고, 곧 이기택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3. 1.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며 학생운동권 출신 청년 정치 지망생들을 대거 영입하자, 김영삼통일민주당은 영향력이 감소했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이 제1야당이 되었고, 통일민주당부산, 경상남도에서만 압승하여 제2야당에 머물렀다. 김영삼은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영입하기도 했다.[8]

여소야대 정국에서 위기감을 느낀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제2야당 지위에 불만을 느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내각제 개헌을 노리던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이 물밑 협상을 시작했다. 김영삼은 분열된 야당으로는 집권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 3당 통합을 통해 정치 자금을 확보하여 차기 집권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9] 1990년 1월, 세 당은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했고, 김영삼은 민주자유당 대표로 취임했다.

3당합당에 대해 김영삼은 구국적 결단이라 주장했지만, 노무현은 이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김영삼과 결별했다.[10] 김영삼은 집권 여당의 2인자가 되었고, 1990년 1월 30일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 7월 당 대표에 선출되었다.

김대중3당 합당을 3당 야합이라 비판하며 투쟁을 선언했다.[11] 노태우, 김종필과의 3당 합당 과정에는 내각제 이면 합의가 있었는데, 1년 이내 의원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12] 김대중은 1990년 10월 8일 내각제 합의 폐기 등을 외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고, 10월 29일 김영삼과 만나 약속을 받고 단식을 중단했다. 이후 김대중은 잔류 세력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13]

3. 2. 내각제 합의와 파기

1990년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개헌에 대한 이면 합의가 있었으나, 김영삼은 이를 무시하고 노태우를 압박하여 백지화하였다.[16] 또한 노태우박철언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강하게 반발하여 무산시켰다. 그 뒤 일부 민정계와 공화계 의원들의 반발을 누르고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4. 문민정부와 IMF 외환위기 (1993~1997)

1997년 1월 7일, 김영삼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노동법 개정 강행 의사를 밝혀 노동계와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19] 이후 전국에서 노동법 개정 반대 총파업이 벌어졌다. 같은 해 2월에는 뇌물수수 의혹을 받던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이 구속되었고, 김영삼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20]

4. 1. 제14대 대통령 선거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은 민주자유당 후보로, 김대중은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16] 1992년 5월 1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 다음 날 출마를 선언하고[17] 26일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18]

1992년 제14대 대선은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이었다. 김기춘 등 김영삼 측 선거대책회의 참석자들은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와 같은 지역 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하여 문제가 되었다. 정주영 후보 측은 이러한 사실을 폭로했으나, 불법 도청으로 인해 공격받았다. 이 사건은 "초원복집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초원복집 사건 폭로는 오히려 영남 지역의 표를 결집시키는 역풍을 일으켰다. 선거 유세 과정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유행했다. 1992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은 김대중을 193만 표 차로 꺾고 승리하였다. 김대중은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12월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4. 2. IMF 외환위기와 극복 노력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이 부도 처리되었고, 정태수 회장은 구속되었다. 한보 사태 수사 중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이 비리에 연루되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20] 1997년 2월, 뇌물 수수 및 권력 남용 혐의로 김현철이 체포되었고, 김영삼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후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의 연쇄적인 부도 사태는 IMF 구제금융으로 이어지는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에 금융 지원을 신청했고,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김영삼의 대통령 지지율은 임기 마지막 해에 8.4%를 기록했다.[21]

5. 국민의 정부와 DJP 연합 (1998~2002)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을 장악하는 등 대승을 거두자, 김대중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22] 1996년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 데 그쳐 참패했고, 야권의 대권 가도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때 김대중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태재단의 이강래 상임고문은 김종필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연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1997년 5월, 야권 일각에서는 김대중으로는 정권교체가 어렵다며 제3후보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는 전당대회를 통해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23] 신한국당에서는 이회창 대표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어 5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얻고 있었다.[24] 이에 1997년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는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김종필, 박태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는데, 이를 DJP연합이라 부른다.[25] 신한국당은 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고, 조순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냈다.[26] 이때 김원기, 노무현 등 국민통합추진회의 소속 8명은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27]

5. 1.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정권 교체

1997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김대중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39만여 표 차로 누르고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22][23][24][25][26] 이는 김영삼 정부의 IMF 금융위기를 일으킨 경제 정책에 대한 실정과,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그리고 김종필과의 단일화 (DJP연합)와 이인제로 인한 보수 표의 분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군사 독재에서 이어지던 세력을 이기고 사실상 첫 정권 교체에 성공하였다.

199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는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겸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자행하였는데, 1998년 3월 국가안전기획부와 검찰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이었던 권영해가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DJP연합으로 김대중의 대선 승리에 기여한 김종필은 국민의 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김종필은 DJP연합으로 합의된 연립정권의 한 축으로서 총리를 포함한 일부 각료의 인사권 등을 행사하였고 국민연금 등의 주요 정책은 직접 권한을 행사하며 챙기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3년차였던 2000년부터 남북정상회담과 내각제 개헌 등을 놓고 김대중과 갈등하였고,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안에 자민련이 동조하면서 DJP연합은 붕괴되어 김대중과 정치적으로 결별하였다.

5. 2. IMF 외환위기 극복과 햇볕정책

1998년 2월 25일 김영삼김대중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퇴임하였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김영삼 정부 말기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 사태를 극복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출범하였다. IMF의 요구에 따라 기업 구조조정, 기업 투명성 강화, 부채비율 축소 정책을 추진하여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 앞당겨 IMF 차입금 195억달러를 전액 상환했다.[28] 이는 국민의 정부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명예퇴직으로 인해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몰락하는 등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정책을 추진했다.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에 합의했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회의를 벌였다.[29] 1998년 11월엔 첫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출항하였고, 1999년엔 대북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 평양에 체육관을 건설하는 등 대북 협력에 박차를 가했다. 2000년 6월 15일에는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30]

6. 삼김시대의 종말 (2003~2018)

김영삼자유북한방송 명예위원장을 맡았고, 민주동지회를 결성하여 통일민주당과 문민정부에서 일했던 인사들을 상대로 신년 하례회 및 포럼을 개최하며 활동하였다. 김대중은 해외 강연 및 노벨평화상 관련 학술활동을 하였고, 2003년 11월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 도서관인 김대중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김종필은 정계 은퇴 이후 자민련을 탈당하였으며, 건강 악화로 삼김 중 가장 적은 대외 활동을 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김대중은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였다. 김종필은 이명박 선대위의 명예고문으로 위촉되어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6. 1. 김종필과 자민련의 몰락

DJP연합 결렬 이후 김종필자민련을 이끌었으나, 2004년 총선에서 4석을 얻는 참패를 당하고 비례대표 득표율 미달로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31][32] 자민련은 2006년 2월 한나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6. 2. 삼김의 서거

김대중이 2009년 8월 18일에 서거하였다. 김영삼은 중환자실과 빈소를 직접 찾아 위로 방문을 하였고, 김종필 역시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했다.[1] 김영삼은 이후 몇 년간 정치 원로로 활동하였으나, 2013년부터 뇌졸중 증상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입원 치료를 시작하였다.[1] 김종필은 2008년 뇌졸중 증세를 보여 한쪽 손이 마비되는 등 상태가 위태로웠으나, 건강을 회복하였다.[1]

2015년 11월 23일 김영삼이 노환으로 서거했고, 김종필은 휠체어를 타고 빈소에 직접 조문하여 "신념의 지도자로 역사가 기억할 것"이라는 방명록을 남겼다.[1] 이후 3년 뒤인 2018년 6월 23일, 김종필까지 노환으로 타계하면서 삼김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

7. 삼김시대의 유산과 평가

삼김은 대한민국 민주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지역주의 심화, 권위주의적 리더십, 부정부패 등의 문제점을 남겼다. 더불어민주당은 삼김시대를 민주화 투쟁과 IMF 극복 등 긍정적 유산과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등의 부정적 유산을 함께 가지고 있는 시대로 인식하고 있다.

참조

[1] 뉴스 金大中(김대중)후보聲明(성명) "「不正(부정)」黙認(묵인)할수없다「百萬票差(백만표차)」이상造作(조작)]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1-04-29
[2] 뉴스 죽음 앞둔 DJ 구한 ‘교황의 자비’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05-19
[3] 뉴스 남산의 부장들 (174) 全(전)씨 民心(민심)수습 겨냥"金大中(김대중)석방"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4-02-13
[4] 백과사전 김영삼 http://enc.daum.net/[...]
[5]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6
[6] 웹사이트 고문저지 보고대회후 철야농성 http://www.demos.or.[...] 1985-11-11
[7] 뉴스 직선개헌 실현되면 김대중씨 출마 권유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6-11-06
[8] 백과사전 노무현 http://enc.daum.net/[...]
[9]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6
[10] 뉴스 노무현의 '이의 있습니다' 사진을 찍기까지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9-05-29
[11] 뉴스 박철언 "3당합당 전후 YS에 40억+α 전달" http://media.daum.ne[...] 세계일보 2005-08-12
[12]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6
[13] 뉴스 盧대통령, 여소야대 몰리니까 지역구도 해체? https://news.naver.c[...] 노컷뉴스 2005-07-29
[14] 뉴스 정부, 총리 폭행 사건 계기로 반체제 색출 http://imnews.imbc.c[...] mbc뉴스데스크 1991-06-04
[15] 뉴스 국민들이 민자당의 압승을 안겨준 뜻 http://imnews.imbc.c[...] mbc뉴스데스크 1991-06-20
[16] 뉴스 오늘의 소사-5월 19일 https://news.naver.c[...]
[17] 웹인용 민주당의 김대중 대표, 대통령후보 경선출마 공식 선언[김원태] http://imnews.imbc.c[...] 2013-05-04
[18] 웹인용 민주당, 14대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 후보 확정[김원태] http://imnews.imbc.c[...] 2013-05-04
[19] 뉴스 김영삼 대통령 노동법 개정의 필요성 강조 등 http://imnews.imbc.c[...] mbc뉴스데스크 1997-01-07
[20] 뉴스 1997년 4월 25일 mbc뉴스데스크 http://imnews.imbc.c[...]
[21] 뉴스 노대통령 지지도, 역대 대통령중 '최악' 기록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6-12-06
[22] 뉴스 김대중 이사장, 신당 창당 선언 http://imnews.imbc.c[...] MBC 1995-07-18
[23] 뉴스 국민회의 전당대회 결과 김대중 후보 78% 지지 얻어 http://imnews.imbc.c[...] MBC 1997-05-19
[24] 뉴스 이회창.김대중.김종필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 실시 http://imnews.imbc.c[...] MBC뉴스데스크 1997-07-22
[25] 뉴스 국민회의. 자민련 대선후보 단일화 서명, 김대중 야당후보로 http://imnews.imbc.c[...] MBC 1997-11-03
[26] 뉴스 "[선택 97] 3김 청산 내건 한나라당 공식 출범" http://imnews.imbc.c[...] MBC 1997-11-21
[27] 뉴스 통합추진회의 8명 국민회의 입당키로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97-11-12
[28] 뉴스 "[['국민의 정부' 5년 정책 평가해 보니] 환란 극복·정보화 구축 'B+ 이상'" http://www.fnnews.co[...]
[29] 뉴스 鄭周永명예회장 오늘 소몰고 訪北 http://dna.naver.com[...] 매일경제 1998-06-16
[30] 뉴스 김전대통령 빈소 국회 마련..조문객 발길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9-08-20
[31] 뉴스 JP 대선중립 재확인 .. "여기도 저기도 못마땅" https://n.news.naver[...] 한국경제 2002-12-16
[32] 뉴스 탄핵반대 2명은 이낙연ㆍ김종호의원 https://www.hankyung[...] 한국경제 2004-03-17
[33] 뉴스 “보고만 있자니…” YS-JP 2년만에 회동 정치재개 시사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2006-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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