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전도비
1. 개요
서울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강요로 세워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일컫는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고 청 황제를 공인하는 맹세를 한 후, 청의 덕을 기리고 조선의 과오를 반성한다는 내용의 비문이 만주어, 몽골어, 한문으로 새겨졌다. 원래 삼전도에 세워졌으나, 청일 전쟁 이후 훼손, 매몰, 복원, 이전을 거쳐 현재는 석촌호수 서호 언덕에 위치해 있다. 이 비석은 굴욕적인 역사를 상징하며, 철거 또는 보존에 대한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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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 삼전도비 |
|---|---|
| 로마자 표기 | Samjeondobi |
| 문화관광부 2000년식 표기 | Samjeondo bi |
| 매큔-라이샤워 표기 | Samjŏndobi |
| 영어 이름 | The stele to the merits and virtues of the Emperor of Great Qing |
| 한글 | 대청황제공덕비 |
|---|---|
| 한자 | 大淸皇帝功德碑 |
| 일본어 | だいしんこうていこうとくひ |
| 가타카나 | テチョンファンジェコンドクピ |
| 만주어 | ᡩᠠᡞᠴᡞᠩ ᡤᡠᠷᡠᠨ ᡳ ᡝᠨᡩᡠᠷᡞᠩᡤᡝ ᡥᠠᠨ ᡳ ᡤᡠᠩ ᡝᠷᡩᡝᠮᡠᡞ ᠪᡝᠢ |
| 만주어 (로마자) | daicing gurun-i enduringge han-i gung erdemui bei |
| 몽골어 | Dayičing ulus-un Boɤda Qaɤan-u erdem bilig-i daɤurisɤaɤsan be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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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
|---|
| 좌표 | 37° 30′ 37″ N, 127° 6′ 6″ E |
|---|
| 지정 종류 | 사적 |
|---|---|
| 지정 번호 | 101 |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 시대 | 조선 인조 17년(1639) |
| 면적 | 200m2 |
| 소유자 | 송파구 |
| 참고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
| 웹사이트 | 송파구청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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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한국 -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하여 발생한 전쟁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한 조선이 청의 압박에 굴복,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며 청의 속국이 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가는 등 큰 피해를 입어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북벌론과 북학론이 대두되는 배경이 되었다. -
1637년 한국 -
정축하성
정축하성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맞서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으나 청군의 빠른 진격과 보급 부족으로 인조가 항복을 결정하며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된 사건이다. -
1637년 한국 -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하여 발생한 전쟁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한 조선이 청의 압박에 굴복,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며 청의 속국이 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가는 등 큰 피해를 입어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북벌론과 북학론이 대두되는 배경이 되었다. -
서울 송파구의 문화유산 -
풍납토성
풍납토성은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백제 초기 왕성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최대 규모의 토성으로,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어 백제 시대 유물과 삼한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
서울 송파구의 문화유산 -
서울 몽촌토성
서울 몽촌토성은 3~4세기 백제 초기에 축조되어 서울 지역을 수비하고 하남 위례성의 주성으로 추정되는 토성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발굴 조사를 통해 백제 초기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현재는 올림픽공원 내에서 시민들의 여가 및 역사 교육 공간으로 활용된다.
2. 명칭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삼전도비, 삼전도의 욕비(辱碑), 치욕비라고도 불린다. 비문은 1637년 11월 25일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 만주어: 다이칭 구룬이 엔두링게 한이 궁 에르더무이 베이 (
* 몽골어: 다이칭 울루스-운 보그다 카간-우 에르뎀 빌리그-이 다구리스가간 베이 (
* 한문: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이는 "대청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비"로 번역될 수 있다.
3. 건립 배경 및 경위
병자호란 때 청에 패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 태종의 강요로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이 비석의 높이는 3.95m, 폭은 1.4m이며,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14세기 말 조선 건국 이후, 조선은 명나라를 사대하는 조공국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만주 지역에서 여진족이 건국한 후금이 강성해졌다. 1627년 후금의 침공(정묘호란) 이후 조선과 후금은 형제 관계를 맺었으나, 조선 내에서는 여진족을 오랑캐로 여기는 인식이 강했고, 특히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후금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등 갈등이 계속되었다.
후금은 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며 국호를 청으로 변경하고, 조선에 조공과 명나라 공격을 위한 파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의 중립 정책과 달리, 서인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인조는 중화사상을 중시했기에 여진족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조가 조공을 거부하고 청 황제를 인정하지 않자, 홍타이지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병자호란) 조선군은 청나라 군대에 패배를 거듭했고, 개전 40여 일 만에 항복했다. 강화 조건은 청에 대한 조공, 청으로부터의 책봉, 명과의 단교,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는 것, 막대한 배상금 등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며 청 황제를 공인하는 맹세를 해야만 했다. (삼전도의 맹약)
이후 홍타이지는 자신의 "덕"과 인조의 "과오", 그리고 양국 간의 맹약을 담은 비문을 만주어, 몽골어, 한문으로 새겨 1639년 항복 장소인 삼전도에 세우도록 했다.
3.1.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17세기 초, 만주에서 성장한 후금(이후 청)은 조선에 압력을 가하며 긴장 관계를 조성했다. 1627년,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했고, 조선은 결국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 (정묘약조)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재침략,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청에 항복하고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었다. (정축하성) 이 강화 조약에는 조선이 청의 신하국이 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며, 왕자와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내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특히,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하며 항복하는 치욕을 겪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홍타이지는 자신의 "덕"과 인조의 "과오", 그리고 양자 간의 맹약을 나타내는 비문을 만주어, 몽골어, 한문으로 석비에 새겨 1639년에 항복 장소인 삼전도에 세웠다. 이것이 "대청황제공덕비"이다.
강화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항복 조건 |
|---|
| 조선은 청나라에 신하의 예를 다할 것. |
|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나라와의 교역을 금지하며, 명나라에서 보낸 칙명과 명나라에서 하사한 조선 국왕의 인신을 청나라에 반환할 것. |
| 왕의 장남과 차남,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
|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할 때 요청된 기일까지 지체 없이 원군을 파견할 것. |
| 내외(청나라)의 여러 신하와 혼인을 맺어 친교를 돈독히 할 것. |
| 성곽의 증축이나 수리에 관해서는 청나라의 사전 승낙을 얻을 것. |
| 청나라 황제의 생일인 성절, 정삭인 정월 초하루, 동지 및 경조사의 사신은 명나라와의 옛 관례에 따라 보낼 것. |
| 청나라가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을 공격할 때 병선 50척을 보낼 것. |
| 청나라로부터의 도망자를 숨겨서는 안 된다. |
| 일본과는 종전대로 무역을 행할 것. |
| 청나라에 금 100냥, 은 1000냥과 20여 종의 물품(조선 미녀, 소, 말, 돼지 등 각 3000 등 물품중국어)을 매년 상납할 것. |
3.2. 삼전도비 건립 강요
병자호란 이후, 청 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조선에 세우도록 강요했다. 1639년, 조선은 청의 요구에 따라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를 건립했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만주글자, 오른쪽에는 몽골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4. 비문의 내용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의 강요로 세워진 삼전도비의 비문은 청 태종의 '공덕'을 찬양하고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어리석은 조선 왕 (인조)은 위대한 청나라 황제에게 반항했다.
* 청나라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큰 죄를 깨우쳐 주었다.
* 양심을 깨달은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위대한 청나라 황제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했다.
* 우리 조선은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한 청나라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 이 석비를 세운다.
비문은 1636년 청나라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한다. 청은 인조가 피신했던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인조는 항복했다. 홍타이지는 조선 국왕을 불쌍히 여겨 수도로 돌려보내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다음으로 비문은 사르후 전투(1619)를 언급한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명나라를 지원하는 척했지만, 청에 항복했다. 누르하치는 고위급 인사를 제외한 병사들을 풀어주었고, 비문은 이를 자비로운 행위로 강조한다. 조선이 불복종하자, 홍타이지는 정묘호란(1627)을 일으켰다. 그는 왕국을 전복시키지 않고 "형제" 관계를 맺었다. 이어 1636년 청 선포 후 조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다시 침략한 사실을 언급하며, 전쟁 중 홍타이지의 자비로운 행위를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비문은 국왕이 청 황제의 덕을 알리기 위해 삼전도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설명하며, 일련의 사건을 운문으로 요약한다.
4.1. 개요
1637년 11월 25일(인조 15년) 이경석이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 왼쪽에는 몽골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다.
비문 내용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에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 협정을 맺은 뒤, 청 태종의 강요에 따라 그의 '공덕'을 찬양하고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비석은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으며, 높이 3.95m, 폭 1.4m이다.
이 비문은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4.2. 한문 비문 원문 및 해석
大淸皇帝功德碑중국어 (한문)
Daicing gurun-i enduringge han-i gung erdemui beimnc (만주어)
Dayičing ulus-un Boγda Qaγan-u erdem bilig-i daγurisγaγsan bei몽골어 (몽골어)
大淸崇德元年冬十有二月 寬温仁聖皇帝 以壞和自我 始赫然怒 以武臨之 直擣而東 莫敢有抗者중국어
時我寡君棲于南漢 凛凛若履春冰而待白日者 殆五旬 東南諸道兵 相繼崩潰 西北帥逗撓峽内 不能進一歩 城中食且盡중국어
當此之時 以大兵薄城 如霜風之卷秋蘀 爐火燎鴻毛 而皇帝以不殺爲武 惟布德是先 乃降勅諭之曰 來 朕全爾 否 屠之중국어
有若英馬諸大將 承皇命相屬於道 於是 我寡君集文部諸臣謂曰 予托和好于大邦 十年于茲矣 由予惛惑 自速天討 萬姓魚肉 罪在予一人 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 予曷敢不欽承 以上全我宗社 下保我生靈乎중국어
大臣協贊之 遂從數十騎 詣軍前請罪 皇帝乃優之以禮 拊之以恩 一見而推心腹 錫賚之恩 遍及從臣 禮罷 即還我寡君于都城 立召兵之南下者 振旅而西 撫民勸農 遠近之雉鳥散者 咸復厥居 詎非大幸歟중국어
小邦之獲罪上國久矣 己未之役 都元帥姜弘立 助兵明朝 兵敗被擒 太祖武皇帝 只留弘立等數人 餘悉放回 恩莫大焉 而小邦迷不知悟 丁卯歳 今皇帝命將東征 本國君臣 避入海島 遣使請成 皇帝允之 視爲兄弟國 疆土復完 弘立亦還矣 自茲以往 禮遇不替 冠盖交跡 不幸浮議扇動 搆成亂梯 小邦申飭邊臣 言渉不遜 而其文爲使臣所得 皇帝猶寬貸之 不即加兵 乃先降明旨 諭以師期丁寧反覆 不翅若提耳面命 而終未免焉 則小邦君臣之罪 益無所逃矣중국어
皇帝既以大兵圍南漢 而又命偏師 先陷江都 宮嬪王子曁卿士家小 倶被俘獲 皇帝戒諸將 不得擾害 令從官及内侍看護 既而 大霈恩典 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 復歸於舊 霜雪變爲陽春 枯旱轉爲時雨 區宇既亡而復存 宗社已絶而還續 環東十數千里 咸囿於生成之澤 此實古昔簡策所稀覯也중국어
於戯盛哉 漢水上流三田渡之南 即皇帝駐蹕之所也 壇塲在焉 我寡君爰命水部 就壇所增而高大之 又伐石以碑之 垂諸永久 以彰夫皇帝之功之德 直與造化而同流也 豈特我小邦 世世而永賴 抑亦大朝之仁聲武誼無遠不服者 未始不基于茲也 顧搴天地之大 畫日月之明 不足以彷彿其萬一 謹載其大略 銘曰중국어
天降霜露 載蕭載育 惟帝則之 竝布威德중국어
皇帝東征 十萬其師 殷殷轟轟 如虎如豼중국어
西蕃窮髪 曁夫北落 執殳前驅 厥靈赫赫중국어
皇帝孔仁 誕降恩言 十行昭回 既嚴且温중국어
始迷不知 自貽伊慼 帝有明命 如寐之覺중국어
我后祗服 相率而歸 匪惟怛威 惟德之依중국어
皇帝嘉之 澤洽禮優 載色載笑 爰束戈矛중국어
何以錫之 駿馬輕裘 都人士女 乃歌乃謳중국어
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 活我赤子중국어
哀我蕩析 勸我穡事 金甌依舊 翠壇維新 枯骨再肉 寒荄復春중국어
有石巍然 大江之頭 萬載三韓 皇帝之休중국어
嘉善大夫禮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 臣呂爾徵 奉敎篆중국어
資憲大夫漢城府判尹 臣吳竣 奉敎書중국어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臣李景奭 奉敎撰중국어
崇德四年十二月初八日立중국어
4.3. 주요 내용 요약 (일본어 문서 내용 참고)
大淸皇帝功德碑중국어 (한문), Daicing gurun-i enduringge han-i gung erdemui beimnc (만주어), Dayičing ulus-un Boγda Qaγan-u erdem bilig-i daγurisγaγsan bei몽골어 (몽골어)는 1639년 12월 31일(음력 12월 8일)에 건립된 비석으로,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의 요구로 건립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어리석은 조선 왕 (인조)은 위대한 청나라 황제에게 반항했다.
* 청나라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꾸짖고, 자신의 큰 죄를 깨우쳐 주었다.
* 양심을 깨달은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렬히 반성하고, 위대한 청나라 황제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했다.
* 우리 조선은 이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한 청나라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 이 석비를 세우기로 한다.
비문은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청나라는 인조가 피신했던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인조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했다. 홍타이지는 조선 국왕을 불쌍하게 여겨 그를 수도로 돌려보내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신속하게 군대를 철수시켰다.
다음 단락에서 비문은 사르후 전투(1619)를 언급한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명나라를 지원하는 척했지만, 청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고위급 인사를 제외한 모든 병사들은 누르하치에 의해 풀려났고, 비문은 이를 자비로운 행위로 강조한다. 조선이 여전히 불복종하는 태도를 보이자, 홍타이지는 정묘호란(1627)을 일으켰다. 그는 왕국을 전복시키지 않고 유교적 "형제" 관계를 맺었다. 비문은 이어서 두 번째 침략에 대해 설명한다. 홍타이지가 1636년에 청나라를 선포했을 때, 조선은 청나라가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문은 전쟁 중 그의 자비로운 행위를 강조했다.
다음으로, 비문은 기념비 건립의 배경을 설명한다. 국왕이 청나라 황제의 훌륭한 덕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삼전도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비문은 일련의 사건들을 운문으로 요약하고 있다.
5. 비석의 형태
비석은 거북 모양 받침돌(귀부) 위에 비신(몸돌)을 세우고 이수(머릿돌)를 올린 형태이다. 높이는 5.7m, 폭은 1.4m, 깊이는 3.95m이며, 재질은 대리석이다. 현존하는 것 중 1기는 귀부만 남아있다.
앞면 왼쪽에는 몽골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뒷면에는 한문이 새겨져 있다. 세 언어의 비문 내용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으며, 한문에는 조선 왕신(王臣)이 글을 지어 새겼다는 내용이, 만주 문에는 상세한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6. 역사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졌으며,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인조 14년(1636) 청 태종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는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군대에 항복하고 강화협정을 맺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 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만주글자, 오른쪽에는 몽골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삼전도비는 강물에 수장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다시 세웠으나, 1945년 광복 직후 주민들이 땅 속에 묻었다. 1963년 홍수로 다시 드러난 후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에 옮겨졌다. 2010년 고증을 거쳐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근처로 이전되었다.
2007년 2월에는 30대 남성이 삼전도비에 붉은 페인트로 '철거 370'이라고 적어 훼손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나라를 잘못 이끌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 훼손했다고 밝혔다. '370'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꿇은 지 370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6.1. 조선 시대
조선은 17세기에 들어 만주에서 여진족이 건국한 후금이 부흥하면서 위협을 받았다. 1627년 후금의 침공(정묘호란)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청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고 화친했다.(정묘약조)
이후 삼전도비는 소중화사상을 가진 조선 사대부들에게 치욕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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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송시열은 이경석이 삼전도비 비문을 지은 것을 문제삼아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남한산성이 함락된 후, 인조는 1636년 청나라에 항복하고 조공 체제를 받아들였다. 이듬해, 청나라의 창시자인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청 황제의 훌륭한 덕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1639년, 항복 의식이 거행되었던 삼전도에 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앞면에 만주어와 몽골어, 뒷면에 한문으로 쓰여졌으며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한문 버전은 이경석이 지었으며, 나머지 언어는 이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삼전도는 "세 밭을 건너는 곳"이라는 뜻으로, 조선 초기에 한강의 주요 도하 지점이었던 삼밭나루 근처에 위치했다. 삼밭나루 길은 광주와 남부 지방으로 가는 가장 빠른 경로였다. 또한 태종의 묘를 대모산 기슭에서 방문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길이기도 했다.
6.2.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조선은 청과의 조공 관계에서 벗어났고, 삼전도비는 강물에 수장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삼전도비를 다시 세웠다. 1945년 광복 직후, 주민들은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었다. 1963년 홍수로 비석이 다시 드러났고, 이후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했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에 공원이 조성되고 비석이 이전되었다. 2010년 고증을 거쳐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근처로 이전되었다.
6.3. 2007년 훼손 사건
2007년 2월 3일 오후 9시 40분경, 백 모씨(39)가 삼전도비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철거 370' 등의 글자를 쓰는 사건이 발생했다. '370'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지 370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송파구청 공무원은 2월 7일 비석에서 붉은 스프레이 낙서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37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파악하고 전국의 유사 사건을 검색해 백씨를 검거했다. 백씨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생활정보 사이트를 운영했으며,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아 "치욕의 상징인 삼전도비를 철거하거나 위정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청와대로 이전해야 한다"라고 주장해왔다.
백씨는 2007년 1월 16일 경상남도 함양읍의 역사인물공원에서 비석 40여 개를 망치 등으로 훼손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는 "동학혁명의 원인 제공자인 조병갑의 공덕비가 세워졌다는 기사를 읽고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란 생각에 함양에서 공덕비를 훼손한 뒤 치욕스런 삼전도비도 훼손키로 마음먹고 범행했다"라고 범행 취지를 밝혔다.
문화재청은 3개월간 복구작업을 거쳐 7월 15일 삼전도비를 본래 모습으로 복원했다. 복구에는 문화재연구소가 고안한 '습포법'이 사용되었다. 습포제(세피올라이트 점토)와 유기용제를 혼합한 페인트 제거용 팩을 비석에 발라 페인트를 녹여 제거했다. 습포제가 페인트를 흡수하면 굳어지는데, 이를 저압스팀세척기로 세척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7. 논란과 평가
최기호는 "1895년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서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될 수 있었다. 국호는 청나라와 대등한 국가로서 대한제국으로 개정되었고, 제26대 고종은 중화권에서 중국 황제의 신하를 의미하는 국왕 칭호를 폐지하고 처음으로 황제를 칭했다. 대청 황제 공덕비는 1895년에 너무나 치욕스럽다 하여 강물에 던져졌다. 하지만 이 비석은 한일 병합 후에 강 바닥에서 파내어져 사적비로서 같은 장소에 다시 세워졌다. 1897년에는 서울 서대문구 근처에 있던 영은문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독립을 기념하는 서양식 독립문이 세워졌다. 영은문은 조선을 통해 명나라 또는 청나라 황제의 칙사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조선 국왕이 그곳까지 나가 칙사에게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던 곳이었다. 오늘날 독립문은 대한민국 사적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인 중 과연 몇 명이 그곳에 한민족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을 가져다준 상징인 영은문이 세워져 있었는지를 알고 있을까. 일본에는 그 역사 동안 대청 황제 공덕비도 영은문도 없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과거 조선은 중국에 대한 비굴한 복종 관계와 부정 부패를 덮어 가리는 명분으로 사대 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자존심을 잃은 조선의 최후는 망국일 수밖에 없었다"라고 평했다。
8.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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