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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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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북동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지역으로, 혜화문과 숙정문 사이의 한양도성을 부채꼴 모양으로 감싸고 있다. 조선 시대 어영청의 북둔이 설치되면서 동명이 유래되었으며, 1946년 일제식 동명인 성북정을 성북동으로 변경했다. 북한산과 옛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한성대입구역이 지나고, 다양한 문화 시설과 명소가 위치해 있다. 과거에는 문인과 예술가들이 거주했으며, 현재는 부유층과 외교관, 연예인 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빈부 격차가 공존하는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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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서울)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성북동
한글성북동
한자城北洞
로마자 표기Seongbuk-dong
면적2.68 km²
인구 (2001년)16,444명
인구 밀도자동 계산
방언불명
지리
좌표37°35′49″N 126°59′37″E
행정
국가대한민국
광역시/도서울특별시
시/군/구성북구
동 주민센터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37
법정동성북동
성북동1가
동소문동1가
동소문동4가
21
177
웹사이트성북구 성북동 주민센터

2. 지명

혜화문숙정문 사이의 한양도성이 부채꼴 모양으로 감싼 성북동은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북둔(北屯)이 1765년 영조 41년에 설치된 연유로 동명이 붙여졌다.[5] 이성계가 조선의 수도를 서울로 선포했을 때, 숙정문(일명 남대문)과 동소문(일명 혜화문)을 잇는 북쪽 성벽을 성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성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을 나서서 왼쪽 일대의 계곡마을인 성북동은 예로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이 어울린 산자수명한 마을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아서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곳이다.[5]

3. 역사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가 되었다.[6]

1936년 4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성북정이 되었다.[6]

1943년 6월 1일 경기도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이 되었다.[6]

1946년 10월 9일 일제식 동명인 성북정을 성북동으로 변경하였다.[6]

1949년 8월 13일 동대문구 성북동을 성북구 성북동으로 분리 신설하였다.[6]

1949년 8월 15일 성북구 성북1동 행정동으로 관할하였다.

2007년 12월 30일 성북1동, 성북2동, 동소문1가, 동소문4가를 성북동으로 통합하여 관할하였다.

3. 1. 조선 시대

조선 시대 성북동은 노구멧골, 도둑골 등으로 불렸다. 노구메는 종교 의식에서 산과 호수의 정령에게 놋쇠나 구리 솥에 지은 밥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여인이 매일 노구메로 기도한 후 집을 나간 남편이 돌아왔다고 한다. 또한 도둑이 많은 가파른 산 때문에 도둑골이라고도 불렸다.[6]

조선 중기에는 도성을 지키기 위해 어영청의 북둔이 설치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은 농사를 짓도록 보내졌으나, 열악한 환경으로 작물 재배가 어려워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영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북동 주민들에게 궁궐에서 필요한 옷을 하얗게 만들고 콩을 발효시키는 특권을 주었다. 이러한 특권적인 직업은 빨래골, 북저골과 같은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6]

성북동은 평민들에게는 고된 삶의 터전이었지만, 귀족들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 때문에 자주 방문했다.[6]

1400년에는 성북 지역에 성암단이 세워졌고, 백성들에게 누에를 치는 방법을 가르친 서릉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암례가 열렸다. 성암례는 왕비가 주도하고 궁궐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관리하는 독특한 의식이었다. 1908년 신위가 사직단으로 옮겨가면서 성암단은 흔적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었다.[6]

3. 2. 일제강점기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로 칭해졌다.[6] 1936년 4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성북정이 되었으며[6], 1943년 6월 1일 경기도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이 되었다.[6] 1946년 10월 9일 일제식 동명인 성북정을 성북동으로 변경하였다.[6]

1930~40년대 성북동은 꿩과 늑대가 뒷마당에서 발견될 정도로 개발이 덜 된 시골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황족은 한적한 산에서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왔으며, 편리한 시설들을 함께 들여왔다. 하지만, 원래 거주하던 민간인들은 대부분 너무 가난하여 자립할 수 없었다. 일본은 주민 수탈을 위해 지역 행정 조직을 이용했다. 그러나 성북헌어(성북동의 지역 행정 조직)는 시민 자치 단체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했다. 성북헌어는 성북동에 속한 시민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3. 3. 해방 이후

1946년 10월 9일 일제식 동명인 성북정을 성북동으로 변경하였다.[6] 1949년 8월 13일 동대문구 성북동을 성북구 성북동으로 분리 신설하였고,[6] 같은 해 8월 15일 성북구 성북1동 행정동으로 관할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경제가 안정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성북동으로 이주해 왔다. 특히 함경도 함청 출신의 피난민들이 유입되어 판자촌을 형성했다. 당시 판자촌 대부분은 재개발을 위해 철거되었다. 1968년 이후 북악산로 개통과 삼청터널 완공으로 삼청동길과 성북동길이 만나 교통이 원활해졌다. 이 개발로 인해 많은 대사관들이 이 지역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성북동은 잘 정비된 성북천, 성곽 유적, 고층 아파트 등으로 대표되는 매우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현재 이 도시는 피난민과 부유한 주민들이 함께 거주하는 독특한 지역이다. 또한 이 도시에는 큰 소득 격차가 존재한다. 1960년대부터 부유했던 사람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언덕 전체에 수백만 달러 상당의 주택들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성북동에는 1960년대부터 저소득층 노인들이 정착한 작은 지역도 있어,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엄청난 격차로 인해 기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4. 지리

성북동은 총 면적이 2.85km²이다.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위치해 있으며, 부채꼴 모양으로 서울의 옛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5. 인구

2008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성북동의 인구는 19,308명이었다. 2016년에는 18,397명, 2017년에는 17,664명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6. 교통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이 성북동을 지난다. 01, 02, 03 성북 마을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7. 행정

성북동은 성북구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관습법에 의해 지정된 성북동, 성북동1가, 동소문1가, 동소문동4가 등 4개의 동을 관할한다.

8. 문화

1968년 11월 《월간 문학》에 실린 김광섭의 서정시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의 호화로운 배경을 모티브로 했다. 이 시는 젊은 시절 고독과 불안의 의례를 썼던 김광섭 시인이 노년기에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소재로 인간애를 담아 쓴 작품이다. 시의 형식은 3연으로 이루어진 현대 서정시로, 풍자적인 경향을 보인다. 향수를 주제로 현대 문명의 파괴성을 드러낸다.

시는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하느님의 광장 같은 아침 하늘", "돌의 온기로 입을 닦는다" 와 같이 부드럽고 감미로운 묘사를 보여준다. 첫 번째 연에서 산은 파괴되고 있다. 자연 파괴의 진실은 "비둘기 가슴에 금이 갔다"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두 번째 연에서 묘사된 성북동 골짜기에는 쉴 곳이 없다. 세 번째 연에서는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비둘기가 사라졌고, 인간의 마음으로 가득했던 사랑과 평화는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인간성은 파괴되었다. 이제 인간은 그들이 세운 문명에 의해 "쫓기는 새"가 되었고, "마음으로 다가가" "산을 잃고 사람을 잃었다". 이는 주제가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태준이 쓴 성북동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 ≪달밤≫에서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1인칭 시점 화자의 연민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지만, 화자는 주인공 '황수건'의 불행과 관련된 정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다른 사건의 서술로 넘어가 독자가 주인공의 불행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을 막는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감정은 멀리서 지켜보는 연민에 머무르게 된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황수건'이라는 인물의 성격과, 그러한 인물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을 보여준다. 즉, 빠르고 경쟁적인 행운아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황수건'처럼 신문 배달만 하는 사람은 도시 경쟁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이러한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갈 방법이 없음을 보여준다.

8. 1. 문화 다양성

서울의 대사관들은 종종 외국인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문화 교류 축제를 개최한다. 유럽 크리스마스 마켓은 매년 겨울,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경험하고 기념할 수 있도록 열린다. 이틀 동안 열리는 축제 기간 동안 각 국가의 크리스마스 휴일에 즐겨 먹는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부스들이 운영된다.

8. 2. 문학

1968년 11월 《월간 문학》에 실린 김광섭의 서정시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의 호화로운 배경을 모티브로 했다. 이 시는 젊은 시절 고독과 불안의 의례를 썼던 김광섭 시인이 노년기에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소재로 인간애를 담아 쓴 작품이다. 시의 형식은 3연으로 이루어진 현대 서정시로, 풍자적인 경향을 보인다. 향수를 주제로 현대 문명의 파괴성을 드러낸다.

시는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하느님의 광장 같은 아침 하늘", "돌의 온기로 입을 닦는다" 와 같이 부드럽고 감미로운 묘사를 보여준다. 첫 번째 연에서 산은 파괴되고 있다. 자연 파괴의 진실은 "비둘기 가슴에 금이 갔다"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두 번째 연에서 묘사된 성북동 골짜기에는 쉴 곳이 없다. 세 번째 연에서는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비둘기가 사라졌고, 인간의 마음으로 가득했던 사랑과 평화는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인간성은 파괴되었다. 이제 인간은 그들이 세운 문명에 의해 "쫓기는 새"가 되었고, "마음으로 다가가" "산을 잃고 사람을 잃었다". 이는 주제가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태준이 쓴 성북동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 ≪달밤≫에서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1인칭 시점 화자의 연민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지만, 화자는 주인공 '황수건'의 불행과 관련된 정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다른 사건의 서술로 넘어가 독자가 주인공의 불행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을 막는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감정은 멀리서 지켜보는 연민에 머무르게 된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황수건'이라는 인물의 성격과, 그러한 인물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을 보여준다. 즉, 빠르고 경쟁적인 행운아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황수건'처럼 신문 배달만 하는 사람은 도시 경쟁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이러한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갈 방법이 없음을 보여준다.

8. 3. 한옥 마을

앙두 마을은 앵두와 유사한 한국의 과일인 앙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혜화문 바로 바깥인 성북동 1가 105-11번지에 위치해 있다. 앙두 마을은 서울의 서대문 밖 최초의 한옥 지구 중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총 면적은 31,245 m2이다. 마을 내 한옥은 품질에 따라 가, 나, 다 세 등급으로 분류되며, 가 등급 10채, 나 등급 6채, 다 등급 22채가 있다.

선잠단지(Seonjam Danji)는 1400년대에 설치된 제단으로, 양잠의 번영을 기원하는 장소였다. 성북동 6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5,868 m2이다. 선잠단지 내 한옥은 가 등급 2채, 나 등급 2채, 다 등급 16채로 분류된다.

9. 교육

성북동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위치해 있다. 서울성북초등학교가 있으며, 중학교로는 삼선중학교,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동구여자중학교가 있다. 고등학교는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서울동구고등학교가 있다.

10. 명소

성북동에는 다양한 명소가 있다. 최순우 옛집, 간송미술관, 이태준 고택, 심우장, 숙정문, 혜화문, 북악산로, 삼청각, 미아리고개 등이 있다.

한국가구박물관은 2,000점 이상의 전통 가구와 10채의 한옥을 소장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 큐레이터와 디자이너들이 성북동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찾는 곳 중 하나이며, 방문을 위해서는 예약이 필요하다.[3]

길상사는 도심에 위치한 사찰로, 원래 김영한이 소유한 요정이었으나 법정에게 기증되어 사찰로 바뀌었다.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과 불교 관련 서적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

심우장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지은 집으로, '본능의 소를 찾는다'는 뜻의 '심우(尋牛)'에서 이름을 따왔다. 조선총독부를 마주하지 않도록 북쪽을 향해 지어졌으나, 집 안은 어둡고 습했다. 앞마당에는 소나무와 향나무 등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다. 한용운 선생은 일제에 항거하다가 이 집에서 별세했다. 한용운 선생의 방에는 많은 저술, 연구 논문, 재판 기록 등이 보존되어 있다.

간송미술관간송 전형필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훈민정음을 포함한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화각을 설립하여 유물을 보호하고 보존했다. 보화각은 이후 간송미술관으로 발전했다. 간송은 또한 보성학교를 인수하여 한국 문화 예술 교육과 장학 사업에도 힘썼다.

한국석조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석조 유물 전문 박물관으로, 약 1,250점의 석조 유물, 280점의 자수 작품, 100점의 현대 및 동시대 회화를 소장하고 있다. 반환 유물, 동자상, 벽수, 자수, 현대/동시대, 야외 전시 등 6개의 전시회를 운영하며, 장수, 행복, 행운을 기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1. 거주자

주로 부유한 권력자의 자손, 재벌가의 자손과 같은 현시대의 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4] 노재헌, 김양과 같은 정치인 2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 김영무 김앤장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등이 거주하거나 거주했다. 청와대로의 접근성이 좋아 많은 외국 대사관저가 위치해 있으며, 이로 인해 인종, 국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4]

김선호, 엄기준, 양경원, 범키와 같은 연예인, 그리고 웬디 (레드벨벳)같은 K팝 아이돌도 거주한다.[4]

11. 1. 과거 거주 문인/예술가

조선 시대에는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성북동에 거주했는데, 이는 성북의 계곡이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사냥터이자 은신처였기 때문이다. 성북동은 최순우, 염상섭, 이태준, 한용운, 김광섭 등 훌륭한 문인들의 고향이다.

11. 2. 현재/과거 주요 거주자

성북동에는 주로 부유한 권력자의 자손, 재벌가의 자손과 같은 현시대의 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4] 노재헌, 김양과 같은 정치인 2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 김영무 김앤장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등이 거주하거나 거주했다. 청와대로의 접근성이 좋아 많은 외국 대사관저가 위치해 있으며, 이로 인해 인종, 국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4]

김선호, 엄기준, 양경원, 범키와 같은 연예인, 그리고 웬디 (레드벨벳)같은 K팝 아이돌도 거주한다.[4]

12. 소득 격차

6·25 전쟁 이후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이 정착하면서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경제 개발과 함께 산동네는 새로운 주거 구역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성북동은 좋은 전망과 쾌적한 환경으로 인기를 얻으며 고급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 소문이 외교가에 퍼져 여러 나라 대사관저들이 이 지역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현재는 30개국 대사관저가 자리잡고 있다.

현재 성북동에는 많은 부유층이 거주하고 있으나,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인 북정마을도 공존하고 있어 빈부 격차가 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ko:성북동 (Seongbuk-dong 城北洞) http://www.encyber.c[...] Doosan Encyclopedia 2008-04-22
[2] 웹사이트 Introduction about Seongbuk-dong http://www.seongbuk.[...] Seongbuk District official site 2008-04-22
[3] 뉴스 13 things you've got to do in Seoul http://travel.cnn.co[...] 2013-02-26
[4] 웹사이트 "'굿모닝FM' 양경원x유수빈 \"실제 새터민으로 오해..성북동+부천 출신\"" https://www.chosun.c[...] 2023-01-11
[5] 웨이백 성북동 - 우리 동 유래 http://www.seongbuk.[...] 2017-07-09
[6] 문서 대통령령 제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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