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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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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철은 한국 불교의 승려로, 1912년에 태어나 1993년에 입적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쇠퇴했던 한국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엄격한 수행과 돈오돈수(頓悟頓修)를 강조했다. 해인총림 초대 방장과 조계종 종정을 역임했으며,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가르침은 중도 사상과 간화선 수행을 중심으로 하며, 저서로는 《선문정로》, 《돈오입도요문강설》 등이 있다. 그는 불교 정화 운동을 지지하며, 한국 불교의 수행 전통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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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철 스님
성철 스님
본명이영주
법명성철
속명이영주
출생일1912년 4월 6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산청군
입적일1993년 11월 4일
입적지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국적대한민국
종교불교
종파조계종
법랍
은사동산
계사효봉
이력
경력조계종 종정
기타저서: 돈오돈수
저서: 벽암록 국역
저서: 선문정로
저서: 영가집
저서: 백일법문

2. 생애

성철은 1967년 해인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이후, 1993년 입적할 때까지 한국 불교를 이끌며 선(禪) 사상을 널리 알렸다. 1981년에는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를 남기고 취임 법회에는 나아가지 않았다.[1]

성철은 종정 재임 중에도 해인사에 머물며 수행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안거 때마다 상당법어를 하고, 동안거 기간에는 백일법문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다.[1] 1967년부터 1982년까지의 상당법문을 모은 『본지풍광』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이다.[1]

일본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극복하고 한국 불교의 개혁에도 앞장섰던 성철은[2] 1986년, 종단 안정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종정직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1991년 종단 분열 상황에서 다시 종정으로 추대되었다.[1] 그는 종단 운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오직 수행과 가르침을 통해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엄격한 수행과 독특한 가르침으로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성철은[1] 졸고 있는 승려들에게 "도둑아, 네 밥값을 해라!"라고 호통치며 수행을 독려했다.[1] 또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3000배를 시켜 겸손과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도 3000배를 요구하여 만나지 않은 일화는 그의 엄격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1]

2. 1. 출가 전 (1912-1936)

1912年중국어(음력 2월 19일, 양력 4월 6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율은(栗隱) 이상언(李尙彦, 1881~1959)과 어머니 강상봉(姜相鳳, 1893~1957) 사이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중국어)였다. 어머니는 성철을 임신했을 때 문밖 출입을 삼가고, 모난 음식을 먹지 않고, 모난 곳에 앉지 않는 등 정성을 다해 태교했다고 전해진다.[1] 성철은 세 살 때 글을 깨우치고 열 살이 되기 전에 중국의 고전인 ''삼국지연의''와 ''서유기'' 등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총명하였다.[2]

1920年중국어(9세) 4월, 단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 전에 서당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1]

1926年중국어(15세) 3월, 단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하였다. 몸이 약했던 성철은 이 무렵부터 요양차 대원사에 드나들었다.[1] 그는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쌀 한 가마니와 맞바꿀 정도로 독서에 열정적이었다.[2]

1931年중국어(20세), 대원사에 드나들며 불교에 심취할 것을 염려한 집안의 권유로 결혼을 서둘렀다. 11월, 이덕명(1909~1982)과 혼인신고를 하였다.[1] 성철은 서양과 동양의 수많은 철학종교 서적을 읽었지만, 이러한 책들이 그를 진리로 이끌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불만을 느꼈다고 한다.[2]

1932年중국어(21세) 12월 2일, 간례휘찬(簡禮彙纂)에 이영주서적기를 남겼다.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장자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 동서고금의 철학에 관한 책 약 70여 권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1]

20세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고 불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영가 현각(永嘉玄覺, 665~713)의 증도가를 읽고 밤중에 횃불을 만난 것 같았다고 회고하였다. 잡지 「불교」를 통해 화두 공부를 익히고 대원사 요양 중에 서장(책)을 보았다.[1] 어느 날, 한 선 승려가 성철에게 당나라 때 영가 현각이 쓴 선불교 텍스트인 ''증도가'' (증도가|證道歌중국어)를 건네주었다. 성철은 마치 "완전한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이 갑자기 켜진 것" 같았고, 마침내 궁극의 진리를 찾았다고 느꼈다고 한다.[1]

1935年중국어(24세), 이 무렵 대원사 탑전에서 화두참구하며 42일 만에 동정일여(동정일여|動靜一如중국어)의 경지에 이르렀다. 대원사에서 해인사에 연락하여 환경(1887∼1983)의 제자 최범술(효당, 1904∼ 1979)이 대원사를 방문하였다. 최범술의 권유로 성철은 해인사에 갔다.[1]

1936年중국어(25세),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하였다.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주지 이고경(李古鏡, 1882~1943)의 호의로 정진을 계속하였다. 해인사에서 강의하던 강사 김법린(1899∼1964)이 교학 연구를 권하였다. 3월 3일 범어사 조실 하동산(河東山, 1890~1965)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하였다.[1] 당시 선사 동산은 해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고, 성철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승려가 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성철은 승려가 될 의사가 전혀 없으며, 오직 격렬한 명상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다음 안거 기간 동안 동산 스님의 법문은 그의 마음을 바꾸었다.[1]

: "길은 있다. 아무도 그 비밀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당신 스스로 그 문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문은 없다. 결국, 길조차 없다."[2]

1937年중국어 3월, 이영주는 그의 법명인 성철을 받고,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버리고, 다음과 같은 를 쓰며 승려가 되었다.[1]

2. 2. 출가와 깨달음 (1936-1940)

1936년, 성철은 25세의 나이로 범어사의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하였다.[1] 출가 시를 통해 세속적인 삶의 덧없음을 지적하고, 만고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1]

'''출가시'''

彌天大業紅爐雪이요 跨海雄基赫日露라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誰人甘死片時夢가 超然獨步萬古眞이로다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 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출가 후, 성철은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나고, 원효암에서 동안거를 났다.[1] 1937년에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았으며, 용성 스님을 시봉하였다.[1] 용성 스님은 성철을 각별히 아껴 '성철수좌', '성철스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

1938년, 범어사 내원암에서 하안거를 나고,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를 났다.[1] 1939년에는 금강산 마하연에서 동안거를 나며 평생의 도반인 자운 스님을 만났다.[1]

1940년, 성철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하안거를 나고,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읊었다.[1]

'''오도송'''

黃河西流崑崙頂하니 日月無光大地沈이라

遽然一笑回首立하니 靑山依舊白雲中이로다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는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오도송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듯한 파격적인 표현을 통해 깨달음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1][2] 이후 성철은 은해사 운부암에서 동안거를 나면서 단식 정진을 하기도 했다.[1]

당시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의 인가가 중요하게 여겨졌으나, 성철은 만공 스님에게 실망하고 전강 스님에게는 인가를 신청하지 않았다.[1]

깨달음을 얻은 후, 성철은 8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실천하고, 외부 세계와 단절한 채 수행에만 전념하는 등 철저한 수행자의 면모를 보였다.[1][2]

2. 3. 깨달음 점검과 봉암사 결사 (1941-1950)

성철은 1940년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받기 위해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 정진했다.[1] 1941년에는 송광사 삼일암과 수덕사 정혜사에서 안거를 났다.[1] 정혜사에서는 청담스님을 만나 훗날 칠일칠야 정진의 모델로 삼게 되는 철야정진을 경험했다.[1]

1943년에는 법주사 복천암에서 청담, 도우스님 등과 생식을 시작했다.[1] 청담스님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성철은 1944년 문경시 대승사 쌍련선원에서 청담, 우봉, 도우스님과 함께 동안거를 났다.[1] 1945년에는 대승사 묘적암에서 동안거를 하며 청담스님과 총림 구상 및 바른 수행 풍토에 대해 논의했다.[1]

1947년, 성철, 청담, 자운, 우봉스님 등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라는 목표 아래 봉암사 결사를 시작했다.[1] 이들은 공주규약을 체결하고 신장 등을 없애고 장삼과 가사, 발우 등을 정비하는 등 수행 환경을 정비했다.[1] 또한, 신도들에게 3배와 보살계를 처음으로 시행하고, 중국 총림의 일과에 맞게 생활하며 대불정능엄신주를 독송하게 했다.[1] 대부분의 사찰에서 사용하는 예불문도 이때 완성되었다.[1] 봉암사 결사는 훗날 교단 정화의 주요 인물들을 배출하고 종단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1]

1950년, 청담스님 등이 봉암사를 떠나면서 봉암사 결사는 막을 내렸다.[1]

성철의 명성은 여러 일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중 하나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이다. 성철은 깨달음을 얻은 후 8년 동안 장좌불와를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한번은 도봉산 망월사의 춘성이라는 노승이 성철의 장좌불와를 믿지 못하고 밤새 지켜보았으나, 결국 그 진실을 확인하고 자신도 장좌불와를 수행했다는 일화가 있다.[1][2]

또한 성철은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수행할 때 어머니가 찾아왔음에도 만나기를 거부했다가, 동료 승려들의 비판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 금강산 유람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1][2]

2. 4. 은둔과 저술 활동 (1951-1966)

성철은 1951년 통영 안정사 은봉암에서 하안거를 하였다. 이후 사람들이 늘어나자 안정사 주지의 양해를 얻어 안정사와 은봉암 사이에 초가삼간 토굴을 짓고 천제굴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법전스님이 시봉을 맡았으며, 천제굴에서 신도들에게 3천 배와 아비라기도를 시켰다.[1] 1952년에도 천제굴에서 하안거를 하였고, 청담, 자운, 운허, 향곡, 서옹 스님 등이 다녀갔다. 천제굴이 협소하여 비구니 스님들이 성주사를 내주었고, 성철은 경남 마산시의 성주사에서 동안거를 하였다.[1] 1953년과 1954년에는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하였다.[1]

1955년, 파계사 한송스님의 초청으로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기려 했으나 건물 보수를 위해 법전스님이 먼저 수리를 하였다. 그동안 성철은 임시로 경남 남해의 용문사 백련암에 머물렀다. 같은 해 9월, 비구측이 19개 사찰의 관리권을 접수하면서 성철은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자운 스님이 대신 취임(1955년 9월 ~ 1957년 7월)하였다.[1] 가을, 성철은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1964년까지 10년간 외부 출입을 막았다. 이를 "10년 동구불출"이라 부른다.[1]

동구불출 기간 동안 성철은 거의 모든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일본 남전대장경을 비롯하여 영문 잡지와 다양한 분야의 신종 서적을 섭렵하였다.[1] 1957년, 다시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청담 스님이 취임(1957년 8월 ~ 1960년 5월)하였다.[1]

1964년, 동구불출을 마치고 부산 다대포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서울 도선사에 머물렀다. 도선사는 1961년 청담 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곳이었다. 성철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승가대학을 실현하기 위해 실달학원(悉達學園)을 열고 실달학원시행요강을 마련하였다. 청담 스님과 서원문을 썼으며, 이 무렵 청담스님과 함께 각각의 시자 천제스님과 혜성스님을 데리고 북한산, 남한산성, 회암사지 등을 순례하였다.[1]

1965년, 4월 30일 동산 스님이 입적하자, 1967년에 세운 동산 스님 사리탑 비문을 지었다. 경북 문경시 김용사에서 조실로 머물렀다. 9월 1일,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이 김용사를 방문하자 3000배를 시키고 9월 2일부터 이틀에 걸쳐 불교의 근본사상인 이변(離邊) 중도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에서 본 우주의 실상, 우리가 이 실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방법론 등을 현대 학문의 방증을 들어 설법하였다.[1]

1966년 1월 8일부터 2월 20일까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를 상대로 50일 안거 정진을 지도하였다. 참가자는 광덕 스님을 지도법사로, 박성배를 지도교수로 한 봉은사 입사생인 전창열, 김금태, 이진두, 김기중, 황귀철, 김선근, 이철교였다. 강론 내용은 ① 불교의 생명은 覺에 있다. ② 불교 근본원리로서의 중도사상 ③ 돈오점수설 비판 ④ 현대 과학과 불교의 합리성이었다.[1]

4월, 성철의 발원으로 1965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한 선방 상선원을 준공하였다. 8월 3일부터 8월 24일까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봉은사 입사생 중심) 구도법회를 지도하였다. 참선정진을 중심으로 하고 20일 간 반야심경으로 시작하여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 등의 경론과 중도법문을 하였다. 이를 '운달산법회'라고 하며 최초의 대중설법으로 기록된다. 가을 무렵 자운 스님의 권유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 동안거를 하였다. 구도법회 참가자 일부가 성철을 따라 백련암으로 옮겨 출가하였다. 11월 6일 월정사 대웅전 상량식에 참가하였다.[1]

2. 5. 해인총림과 종정 추대 (1967-1993)

1967년 7월 25일,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해인사에 방장 체제의 해인총림 설치가 결의되면서 성철은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었다.[1] 방장 재임 동안 성철은 안거 때마다 보름과 말일에 상당법어를 했고, 동안거 기간 중에는 백일법문(百日法門)을 했다.[1] 백일법문은 음력 11월 3일부터 이듬해 음력 1월 20일까지, 상당법어를 하는 날과 성도재일 용맹정진 등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매일 진행되었다.[1] 1967년 12월 15일, 성철은 조계종 제17회 중앙종회에 조계종 종합수도원인 해인총림의 계획안과 승가대학 설치계획안을 건의했다.[1]

1981년 1월 20일, 성철은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취임했으나 취임법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1] 이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가 화제가 되었다.[1]

'''종정수락법어'''

성철은 종정 취임 후 초파일에 최초의 한글 법어 "생명의 참모습"을 발표했다.[1] 1986년 4월 7일, 종단이 안정되었다는 이유로 종정 사퇴서를 원로회의에 제출했다.[1]

1991년 1월, 종정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종단 분열로 인해 후임 종정이 추대되지 못했다.[1] 종정 추대가 문중 문제로 번지자 성철은 1월 23일 종정직에 뜻이 없음을 통고했다.[1] 7월 5일에 다시 한번 통고문을 보냈다.[1] 8월 22일, 조계종 원로회의는 성철을 제7대 종정으로 재추대했다.[1]

해인사 주석 시절, 이 사찰은 전국에서 온 승려들을 끌어들이며 명상, 경전 연구, 율학 연구를 위한 훈련장이 되었다.[2] 명상 센터는 매년 두 번의 안거 동안 평균 약 500명의 승려를 수용했는데, 이는 혜능과 마조 도일 이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2]

성철은 일본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극복하고 한국 불교를 개혁하는 데 앞장섰다.[1] 그는 모든 사찰 자산을 대중에게 내놓고 참선에 전념하며, 원래 불교의 유랑과 탁발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2]

성철의 예측대로, 한국 불교는 그 이후 현재까지 사찰 관할권을 놓고 승려들 간의 갈등을 겪었으며, 그중 다수는 폭력적인 조치로 확대되었다.[3] 1990년대 후반, 승려들이 서울의 주요 행정 사찰인 조계사를 놓고 깡패를 고용하고 화염병을 사용하며 서로를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싸움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1]

1967년 겨울, 성철은 승려와 재가자들을 대상으로 매일 두 시간씩 법문을 시작했고, 이로써 그의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시작했다.[1] 그는 불교, 정신주의, 양자역학, 일반 상대성 이론, 시사 문제 등을 결합한 짜릿한 형식으로 변화시켜 세계화와 지적 다양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 청중에게 다가가려는 새로운 형태의 법문을 열었다.

1970년대,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군사적이고 독재적으로 변모했고, 결국 정치적 연루 혐의를 받은 많은 불교 승려들을 숙청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평신도와 승려 모두에게서 살아있는 부처로서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조계종은 성철에게 주목했고, 그를 차기 종정으로 추대했다. "만약 한국 불교를 개혁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가 그의 대답이었다.[1][2] 그의 취임사는 승려들과 독실한 불교 신자들에게만 알려졌던 무명 승려였던 그를 한국 불교의 공식적인 지도자로서 세상에 널리 알렸고, 그의 가르침을 전국에 전파했다.

성철은 취임에서 임종까지 종정으로서 모든 공식적인 의례를 거부하고, 승려의 진정한 자리는 사찰에 있다고 말하며 산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의 반은둔적 정책에 대한 거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이는 결국 조선 시대 이후 부족했던 존경심으로 바뀌었고, 한국의 승려에 대한 이미지와 대우를 크게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1]

해인사 주석과 조계종 종정으로 재임하는 동안, 성철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다. 승려들 사이에서 그는 매우 엄격한 스승으로 유명했으며,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다. 명상 중에 졸고 있는 승려들에게 그는 나무 막대기로 때리며 "도둑아, 네 밥값을 해라!"라고 외쳤다(이는 평신도의 시주와 승려가 사회에 진 빚, 즉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의무를 의미).[1]

그는 또한 독특한 삼천 배로도 알려졌다.[1][2][5][6] 한국 전쟁 이후, 성철은 안정사 근처에 작은 토굴 암자를 짓고 천제굴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무렵,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찾아왔고, 순례자들의 수행을 더욱 지도하기 위해 성철은 그의 유명한 삼천 배를 처음 시작했다. 방문자는 대웅전의 부처님 앞에서 삼천 배를 마쳐야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후, 일부 평신도들은 성철이 오만하다고 비난했지만, 그는 이 수행이 수행자들이 자신의 자아를 파괴하고 더욱 쉽게 일심을 얻도록 돕는, 자신의 수행을 지도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참고: 삼천 배는 실제로 한국 불교 수행의 주된 기반이며, 한국의 대부분의 사찰에서 매달 수행된다. 수행자의 경험에 따라 약 8시간에서 12시간이 소요되며, 이 기법은 "마음을 비우고", 겸손함을 심어주고, 수행자의 인식과 집중력을 높이는 데 자주 사용된다). 그의 명성과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를 원했기에 삼천 배는 더욱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다. 독특했던 점은 이 요구 사항이 균일했다는 것이며, 즉, 그는 그 사람의 재산, 명성 또는 권력에 관계없이 어떠한 예외도 두지 않았다. 3000배의 어려운 과제와 성철의 엄격한 자기 규칙 준수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박정희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서울-부산 간 새로운 고속도로를 개통하면서 해인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행정승은 급히 성철에게 연락하여 대통령을 맞이하러 토굴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그러나 성철은 평소대로 대통령에게 대웅전에 가서 삼천 배를 먼저 올린 후에 자신을 만나도록 요구했다. 박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고, 둘은 결국 만나지 못했다.[1]

3. 교리적 견해

성철의 선불교 교리 사상은 저서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있다.[10] 지눌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깨달음 이후에는 더 닦아야 할 수행이 필요 없다'고 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으며,[10]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10]

성철은 지행합일(知行合一) 단계의 지(知)만이 진정한 지(知)이고, 지눌돈오점수는 관념에 치우쳐 실증성이 부족한 이론에 근거한 지(知)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주장했다.[10]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으므로 시비(是非)를 가리기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성철은 수행하는 승려를 대상으로 설법했다.[10]

향곡혜림(香谷慧林)과 서옹상순(西翁尚純)은 돈오돈수론자들이였다. 도림법전(道林法典)과 혜암성관(慧庵性觀) 또한 철저한 돈오돈수론자들이였다. 진제법원(真際法遠) 또한 '돈오돈수는 오종(五宗) 가풍의 법칙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돈점논쟁은 관법(觀法)과 간화선 사이에서, 혹은 교종과 선종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이것을 그렇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이 논쟁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돈오돈수론 주장은 선종에 속한 스님들이 제대로 수행을 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것이 교종이나 관법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원효는 교학자였지만 현대 한국의 선사들 중 그 누구도 원효를 지해종도(知解宗徒)라고 부르지 않는다. 원효는 교(教)의 길을 철저하고 뛰어나게 걸어갔으며, 성철의 돈오돈수론 주장도 선(禪)의 길을 본분사대로 걸어갔던 것 뿐이다.

3. 1. 돈오돈수(頓悟頓修)

성철의 선불교 교리 사상은 저서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있다.[10]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깨달음 이후에는 더 닦아야 할 수행이 필요 없다'고 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10] 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10] 성철은 지행합일(知行合一) 단계의 지(知)만이 진정한 지(知)이고 지눌돈오점수는 실제(實際)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현실을 좇지 않는 직접 지각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관념과 표상(表象)에 경도(傾倒)되어 실증성이 희박(稀薄)하게 조직된 이론에 근거한 지(知)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주장(主張)하였다.[10]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으므로 시비(是非)를 가리기가 어렵다.[10] 지눌은 일반인에게 불교 교의를 풀어서 밝혔고 성철은 수행하는 승려에게 설법하였다.[10]

하지만, 향곡혜림(香谷慧林)과 서옹상순(西翁尚純)은 돈오돈수론자들이였다. 도림법전(道林法典)과 혜암성관(慧庵性觀) 또한 철저한 돈오돈수론자들이였다. 그리고 진제법원(真際法遠) 또한 '돈오돈수는 오종(五宗) 가풍의 법칙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돈점논쟁은 관법(觀法)과 간화선 사이에서, 혹은 교종과 선종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이것을 그렇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이 논쟁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돈오돈수론 주장은 선종에 속한 스님들이 제대로 수행을 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것이 교종이나 관법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효는 교학자였지만 현대 한국의 선사들 중 그 누구도 원효를 지해종도(知解宗徒)라고 부르지 않는다. 원효는 교(教)의 길을 철저하고 뛰어나게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성철의 돈오돈수론 주장도 선(禪)의 길을 본분사대로 걸어갔던 것 뿐인 것이다.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를 임제 의현(臨済義玄) 계보의 진정한 후계자로 여기고 지눌이 아닌, 그는 지눌의 '돈오점수'(돈오점수|頓悟漸修한국어)에 반대하여 혜능의 '돈오돈수'(돈오돈수|頓悟頓修한국어)의 원래 입장을 옹호했다.[4] 지눌은 깨달음과 함께 수백만 번의 윤회를 통해 얻은 업의 흔적을 점진적으로 없애는 수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혜능과 성철은 완전한 깨달음과 함께 모든 업의 흔적이 사라지고 즉시 부처가 된다고 주장했다.[5][6][7][8]

3. 2. 중도(中道) 사상

중국 대륙에서 임제종을 개종(開宗)한 임제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선종의 내밀(內密)한 특징인 도교에서 영향받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을 가르치기 위한 취지(趣旨)로 다음과 같은 설법(說法)을 하였다.

  •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성철은 이 설법 중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고측(古則)을 원용(援用)하여 인상(印象)을 남기면서 일반인에게도 유명해졌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話頭)는 수도(修道)하기 이전 평범한 일상에서는 산은 산, 물은 물로 보이지만, 수도를 통해 득도(得道)하면 평범한 일상을 완벽히 초월하여 일상에서의 착각(錯覺)이 적멸(寂滅)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진정하게 득도하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평범한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화광동진을 통해 다시 돌아온 그 세계는 겉으로는 평범한 단계와 같으나 내면은 처음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는 나선형(螺旋形) 성격을 띤 회귀를 뜻한다. 임제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설법한 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공안(公案)은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사상을 그대로 해설한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 수도자(修道者)가 작게 득도(得道)했을 때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인 듯 혼란(混亂)스럽지만, 크게 득도하면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 즉,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관망(觀望)하는 태도를 얻는다는 뜻이다.

성철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중도(中道)를 감각적 쾌락과 자기 고행이라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선과 악, 자아와 비자아가 무의미해지는, 모든 이원성이 융합되어 개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는 열반의 상태가 바로 중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을 에너지와 질량이 별개라는 아인슈타인 이전의 물리학이 흔히 가지는 오해에 비유했는데, 아인슈타인은 ''E=mc²''라는 관계로 상호 교환 가능한 이중 형태로 설명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와 동등함을 증명했다. 그는 또한 이것을 공간과 시간이 시공간으로 융합되는 것에 비유했으며, 얼음과 물의 비유를 제시했다. 중도는 얼음과 물의 '중간' 또는 '평균'이 아니라 각자의 진정한 형태인 H₂O이며, 열반의 상태 역시 이와 같아서 모든 이원성의 진정한 형태가 동일하게 드러나는 상태라고 주장했다.[5][8]

3. 3. 간화선(看話禪) 강조

성철은 공안(公案중국어) 참선 기법을 강력히 옹호하며,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라고 주장했다.[1][5][7][8] 그가 일반 신도들과 제자들에게 자주 제시한 공안은 다음과 같다.

#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 이것이 무엇인고? (不是心, 不是物, 不是佛, 是什麼?중국어)[8]

# 한 승려가 동산 선사에게 "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동산은 "삼 근의 삼" (마삼근|麻三斤한국어)이라고 답했다.[1][6][8]

3. 4. 불교 정화 운동 지지

성철은 대처불교로 대표되는 일본 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현대 불교의 새로운 길을 찾고자 1947년 공주규약을 함께 제정하였다.[11] 이는 1954년 비구승들이 본격적으로 추진한 불교정화운동이었다.[12] 만해는 사회참여를 통해 역사 현장에 투신한 반면, 성철은 세속 일에 간섭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종교적 이상만으로 근현대의 질곡에 휘말리지 않았다.[11]

성철은 일본식 선(禪) 명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5][6][7][8] 일본식 선은 많은 공안을 점진적으로 연구하는 방식을 선호하는데, 이는 수련자가 각 공안을 시간 순서대로 숙달하면서 쉬운 공안에서 어려운 공안으로 나아가는 교육 과정과 유사하다. 성철을 비롯한 많은 선사들은[9] 이러한 방식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명상의 핵심은 오직 하나의 공안에 마음을 깊이 집중하여 다른 모든 생각을 파괴함으로써, 업의 윤회와 고통의 원인이 되는 모든 분별심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 과정처럼 공안을 연구하는 것은 마음을 더욱 단련하는 것일 뿐이며, 이는 마음을 소멸시키는 원래 목표와 정반대된다. 따라서 이러한 점진적인 명상 방식은 지눌의 점진적 수행과 유사하며, 수련자에게 시간 낭비가 된다. 공안은 합리적이거나 직관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풀 수 없으며, 오직 최종적이고 완전한 깨달음만이 공안, 그리고 동시에 모든 공안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다.[5][6][7][8]

그러므로 성철은 여러 공안을 연구하는 것이 진정한 명상과 상반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부처가 되는 것과 같으며, 이는 또한 공안을 결정적으로 푸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이는 자신의 독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육조 혜능, 마조, 그리고 현재의 많은 선사들의 가르침이라고 언급했다.[1][2][5][6][7][8][9] 여러 공안을 풀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수련자들이 믿는 순수한 망상이며, 성철은 자신의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이 점을 명확히 하는 데 할애했다.

4. 평가 및 영향

성철은 일제강점기 동안 깊은 혼란에 빠졌던 한국 불교를 되살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 그는 개혁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한국 불교에 독신 생활, 엄격한 수행, 수도 생활, 탁발을 되돌렸다. 말년에는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대중들 사이에서 훼손된 불교의 평판을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 당시 불교계는 결혼하고 사업체를 소유하며 일본 점령자들과 빈번히 결탁하는 명목상의 승려 집단이 있었는가 하면, 결혼하지 않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진지한 수행자들도 있었다. 성철은 또한 혜능의 '돈오점수' 사상을 되살리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공안 수행, 참선, 수도 생활, 깨달음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의 저서들은 여전히 널리 읽히고 존경받고 있으며, 해인사 순례는 불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5. 저서

성철은 만년에 수많은 저서를 간행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강연을 담은 11권의 책과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선(禪) 고전을 번역한 37권의 책이 포함되었다. 전자는 혜능육조단경, 신심명信心銘|신심명중국어, 증도가證道歌|증도가중국어,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돈오입도요문론중국어에 대한 강연의 전체 기록과 그의 법문 등이 포함되었다. 후자는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선림고경총서중국어》라고 불리며, 출판 전까지는 주로 승려들만 알고 있던 중국 및 한국 선(禪) 고전의 모음집이었다.[1] 이러한 출판물들은 그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과 지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돈오입도요문강설》(1986)이 있다. 그 외에도 《육조단경》, 《전등록》 등 선문의 조사(祖師) 어록을 중심으로 많은 법어를 펴냈는데, 관념의 도그마[15]에 빠지지 말 것과 견성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성철 대선사의 저작 중 영어 번역본으로는 1988년 서울 창경각 출판의 "Echoes from Mt. Kaya"(현재 절판)와 2002년 서울 김명인터내셔널에서 출판된 "Opening the Eye"가 있다. 두 책 모두 브라이언 배리가 한국어에서 번역한 것이다.

참조

[1] 서적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김영사 2001
[2] 웹사이트 인터넷 사바세계와 함께 하는 성철큰스님 http://www.songchol.[...]
[3] 뉴스 Violent clashes in the Jogye order https://web.archive.[...]
[4] 서적 한국불교의 법맥 장경각 1976
[5] 서적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장경각 1987
[6] 서적 영원한 자유 장경각 1988
[7] 서적 선문정로 장경각 1987
[8] 서적 백일법문 장경각 1992
[9] 웹사이트 용화선원 http://www.yonghwasu[...]
[10] 백과사전 성철
[11] 뉴스 성철, ‘부처님 법대로’ 살기를 주창한 수행자 http://www.budreview[...] 불교평론 2018-03-18
[12] 뉴스 [정화운동]불교중흥 제일과제는 교단의 청정성 회복 / 박희승 http://www.budreview[...] 불교평론 2012-03-21
[13] 뉴스 장좌불와 10년 "역대 최고"/성철스님 수행기록과 내용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1993-11-08
[14] 웹인용 선림산책 60회 - 천제스님2부 http://www.bbsi.co.k[...] BBS불교방송 2021-09-23
[15] 문서 종교 용어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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