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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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중은 신라 시대의 관직으로, 왕명 집행, 귀족 회의 견제 등 왕권 강화를 위한 역할을 수행했다. 진덕여왕 5년(651년) 죽지가 최초로 집사중시가 된 이후, 태종 무열왕, 문무왕 대를 거치며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신문왕 대에는 국정 운영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며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했다. 혜공왕 이후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리면서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김우징, 김명, 이홍 등이 왕위 다툼의 중심에 섰다. 신라의 시중은 고려의 문하시중으로 이어져, 중앙 집권 체제 강화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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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대 시중
왕 이름 관등 임명 시기 비고 진덕여왕 죽지 파진찬 651년 최초의 중시(시중) 태종 무열왕 문충(文忠) 이찬 655년 문왕 이찬 658년 문무왕 문훈(文訓) 이찬 662년 진복 이찬 665년 지경(智鏡) 파진찬 668년 예원 이찬 671년 천광 파진찬 673년 춘장 대아찬 678년 이듬해 병으로 사임 천존(天存) 서불한 679년 신문왕 순지(順知) 미상 683년 대장(大莊)[1] 이찬 686년 2년 만에 사망 원사(元師) 이찬 688년 2년 만에 병으로 사임 선원(仙元) 아찬 690년 원선(元宣) 대아찬 692년 3년 뒤 노환으로 사임 효소왕 당원(幢元) 이찬 696년 순원(順元) 대아찬 698년 700년 이찬 경영(慶永)의 모반에 연루되어 파면 원훈(元訓) 아찬 702년 성덕왕 원문(元文) 아찬 703년 2년 뒤 사망 신정(信貞) 아찬 705년 1년 만에 병으로 면직 문량(文良) 미상 706년 5년 뒤 사망 위문(魏文) 이찬 712년 이듬해 연로함으로 사임 효정(孝貞) 이찬 714년 사공(思恭) 파진찬 718년 2년 뒤 사임 경덕왕 문림(文林) 파진찬 720년 2년 뒤 사망 선종(宣宗) 이찬 722년 윤충(允忠) 이찬 725년 김유신의 손자 의충(義忠) 아찬 737년 2년 뒤 사망 신충(信忠) 이찬 739년 유정(惟正) 이찬 744년 1년 만에 사임 대정(大正) 이찬 745년 조량(朝良) 이찬 750년 이때부터 시중(侍中)으로 칭함[2] 김기(金耆) 이찬 755년 3년 뒤 사망 염상(廉相) 미상 758년 2년 만에 사임, 이후 모반으로 처형 김옹(金邕) 이찬 760년 3년 뒤 사임 양상(良相) 미상 764년 훗날 선덕왕 혜공왕 김은거(金隱居) 이찬 768년 775년 반란으로 처형 정문(正門) 이찬 770년 775년까지 시중 역임, 이후 염상과 모반으로 처형 김순(金順) 이찬 775년 주원(周元) 이찬 777년 태종 무열왕의 5대손 원성왕 제공(悌恭) 이찬 785년 종기(宗基) 이찬 790년 이듬해 사임 준옹(俊邕) 대아찬 791년 이듬해 병으로 면직, 훗날 소성왕 숭빈(崇斌) 이찬 791년 3년 뒤 사임 언승(彦昇) 잡찬 794년 훗날 헌덕왕 지원(智原) 이찬 796년 1년 만에 사임 소성왕 충분(忠芬) 미상 800년 애장왕 수승(秀昇) 이찬 804년 훗날 흥덕왕 헌덕왕 김헌창(金憲昌)[3] 이찬 807년 813년 무진주도독, 814년 시중 복귀, 816년 청주도독 양종(亮宗) 파진찬 810년 이듬해 병으로 면직 원흥(元興) 이찬 811년 후임은 김헌창 장여(璋如) 파진찬 816년 신무왕 공신 김양의 부친 김충공(金忠恭) 이찬 817년 4년 뒤 사망 영공(永恭) 이찬 821년 827년 사임 흥덕왕 김우징(金祐徵) 대아찬 828년 831년 사임, 834년 복직, 835년 사임, 훗날 신무왕 윤분(允芬) 이찬 831년 833년 사임, 후임은 김우징 김명(金明) 대아찬 835년 훗날 민애왕 이홍(利弘) 아찬 837년 838년 김명과 난을 일으켜 희강왕 자살 민애왕 헌숭(憲崇) 아찬 838년 문성왕 의종(義琮) 미상 840년 843년 병으로 면직, 836년 당나라 방문 양순(良順) 이찬 843년 1년 만에 사임, 847년 반란으로 처형 김여(金茹) 대아찬 844년 847년 사망 위흔(魏昕) 이찬 847년 1년 만에 사임 김계명(金啓明) 파진찬 848년 훗날 경문왕의 부친 경문왕 위진(魏珍) 아찬 862년 874년 상대등으로 전임 인흥(藺興) 미상 874년 헌강왕 예겸(乂謙) 대아찬 875년 880년 사임, 딸은 효공왕의 비 민공(敏恭) 이찬 880년 정강왕 준흥(俊興) 이찬 886년 진성여왕에게 왕위 계승 유조 전달, 898년 상대등 효공왕 계강(繼康) 아찬 898년 912년 상대등 효종(孝宗) 대아찬 902년 경순왕의 부친 경명왕 유렴(裕廉) 대아찬 917년 931년 왕건에게 인질 경애왕 언옹(彦邕) 미상 919년 기록상 마지막 시중
2. 1. 신라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시대 시중을 역임한 인물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왕 | 이름 | 관등 | 임명 시기 | 비고 |
---|---|---|---|---|
진덕여왕 | 죽지(竹旨) | 파진찬 | 651년 | 최초의 중시(시중) |
태종 무열왕 | 문충(文忠) | 이찬 | 655년 | |
문왕 | 이찬 | 658년 | ||
문무왕 | 문훈(文訓) | 이찬 | 662년 | |
진복 | 이찬 | 665년 | ||
지경(智鏡) | 파진찬 | 668년 | ||
예원 | 이찬 | 671년 | ||
천광 | 파진찬 | 673년 | ||
춘장 | 대아찬 | 678년 | 이듬해 병으로 사임 | |
천존(天存) | 서불한 | 679년 | ||
신문왕 | 순지(順知) | 미상 | 683년 | |
대장(大莊)[1] | 이찬 | 686년 | 2년 만에 사망 | |
원사(元師) | 이찬 | 688년 | 2년 만에 병으로 사임 | |
선원(仙元) | 아찬 | 690년 | ||
원선(元宣) | 대아찬 | 692년 | 3년 뒤 노환으로 사임 | |
효소왕 | 당원(幢元) | 이찬 | 696년 | |
순원(順元) | 대아찬 | 698년 | 700년 이찬 경영(慶永)의 모반에 연루되어 파면 | |
원훈(元訓) | 아찬 | 702년 | ||
성덕왕 | 원문(元文) | 아찬 | 703년 | 2년 뒤 사망 |
신정(信貞) | 아찬 | 705년 | 1년 만에 병으로 면직 | |
문량(文良) | 미상 | 706년 | 5년 뒤 사망 | |
위문(魏文) | 이찬 | 712년 | 이듬해 연로함으로 사임 | |
효정(孝貞) | 이찬 | 714년 | ||
사공(思恭) | 파진찬 | 718년 | 2년 뒤 사임 | |
경덕왕 | 문림(文林) | 파진찬 | 720년 | 2년 뒤 사망 |
선종(宣宗) | 이찬 | 722년 | ||
윤충(允忠) | 이찬 | 725년 | 김유신의 손자 | |
의충(義忠) | 아찬 | 737년 | 2년 뒤 사망 | |
신충(信忠) | 이찬 | 739년 | ||
유정(惟正) | 이찬 | 744년 | 1년 만에 사임 | |
대정(大正) | 이찬 | 745년 | ||
조량(朝良) | 이찬 | 750년 | 이때부터 시중(侍中)으로 칭함[2] | |
김기(金耆) | 이찬 | 755년 | 3년 뒤 사망 | |
염상(廉相) | 미상 | 758년 | 2년 만에 사임, 이후 모반으로 처형 | |
김옹(金邕) | 이찬 | 760년 | 3년 뒤 사임 | |
양상(良相) | 미상 | 764년 | 훗날 선덕왕 | |
혜공왕 | 김은거(金隱居) | 이찬 | 768년 | 775년 반란으로 처형 |
정문(正門) | 이찬 | 770년 | 775년까지 시중 역임, 이후 염상과 모반으로 처형 | |
김순(金順) | 이찬 | 775년 | ||
주원(周元) | 이찬 | 777년 | 태종 무열왕의 5대손 | |
원성왕 | 제공(悌恭) | 이찬 | 785년 | |
종기(宗基) | 이찬 | 790년 | 이듬해 사임 | |
준옹(俊邕) | 대아찬 | 791년 | 이듬해 병으로 면직, 훗날 소성왕 | |
숭빈(崇斌) | 이찬 | 791년 | 3년 뒤 사임 | |
언승(彦昇) | 잡찬 | 794년 | 훗날 헌덕왕 | |
지원(智原) | 이찬 | 796년 | 1년 만에 사임 | |
소성왕 | 충분(忠芬) | 미상 | 800년 | |
애장왕 | 수승(秀昇) | 이찬 | 804년 | 훗날 흥덕왕 |
헌덕왕 | 김헌창(金憲昌)[3] | 이찬 | 807년 | 813년 무진주도독, 814년 시중 복귀, 816년 청주도독 |
양종(亮宗) | 파진찬 | 810년 | 이듬해 병으로 면직 | |
원흥(元興) | 이찬 | 811년 | 후임은 김헌창 | |
장여(璋如) | 파진찬 | 816년 | 신무왕 공신 김양의 부친 | |
김충공(金忠恭) | 이찬 | 817년 | 4년 뒤 사망 | |
영공(永恭) | 이찬 | 821년 | 827년 사임 | |
흥덕왕 | 김우징(金祐徵) | 대아찬 | 828년 | 831년 사임, 834년 복직, 835년 사임, 훗날 신무왕 |
윤분(允芬) | 이찬 | 831년 | 833년 사임, 후임은 김우징 | |
김명(金明) | 대아찬 | 835년 | 훗날 민애왕 | |
이홍(利弘) | 아찬 | 837년 | 838년 김명과 난을 일으켜 희강왕 자살 | |
민애왕 | 헌숭(憲崇) | 아찬 | 838년 | |
문성왕 | 의종(義琮) | 미상 | 840년 | 843년 병으로 면직, 836년 당나라 방문 |
양순(良順) | 이찬 | 843년 | 1년 만에 사임, 847년 반란으로 처형 | |
김여(金茹) | 대아찬 | 844년 | 847년 사망 | |
위흔(魏昕) | 이찬 | 847년 | 1년 만에 사임 | |
김계명(金啓明) | 파진찬 | 848년 | 훗날 경문왕의 부친 | |
경문왕 | 위진(魏珍) | 아찬 | 862년 | 874년 상대등으로 전임 |
인흥(藺興) | 미상 | 874년 | ||
헌강왕 | 예겸(乂謙) | 대아찬 | 875년 | 880년 사임, 딸은 효공왕의 비 |
민공(敏恭) | 이찬 | 880년 | ||
정강왕 | 준흥(俊興) | 이찬 | 886년 | 진성여왕에게 왕위 계승 유조 전달, 898년 상대등 |
효공왕 | 계강(繼康) | 아찬 | 898년 | 912년 상대등 |
효종(孝宗) | 대아찬 | 902년 | 경순왕의 부친 | |
경명왕 | 유렴(裕廉) | 대아찬 | 917년 | 931년 왕건에게 인질 |
경애왕 | 언옹(彦邕) | 미상 | 919년 | 기록상 마지막 시중 |
2. 1. 1. 초기 시중 (진덕왕 ~ 문무왕)
진덕여왕 5년(651년)에 죽지가 파진찬으로서 집사부의 최고 관직인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시중(侍中)의 시초이다.[1] 초기 시중은 왕권 강화와 귀족 세력 견제를 위한 역할을 수행하였다.태종 무열왕 대에는 문왕이 중시를 맡았으며, 문무왕 대에는 진복, 예원, 천광, 춘장, 천존 등이 중시를 역임하였다. 이들은 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운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 시중(진덕여왕 ~ 문무왕) 목록은 다음과 같다.
왕 | 이름 | 관등 | 임명 시기 | 비고 |
---|---|---|---|---|
진덕여왕 | 죽지 | 파진찬 | 651년 | 최초의 중시(시중) |
태종 무열왕 | 문충(文忠) | 이찬 | 655년 | |
문왕 | 이찬 | 658년 | ||
문무왕 | 문훈(文訓) | 이찬 | 662년 | |
진복 | 이찬 | 665년 | ||
지경(智鏡) | 파진찬 | 668년 | ||
예원 | 이찬 | 671년 | ||
천광 | 파진찬 | 673년 | ||
춘장 | 대아찬 | 678년 | 이듬해 병으로 사임 | |
천존(天存) | 서불한 | 679년 |
2. 1. 2. 중기 시중 (신문왕 ~ 경덕왕)
신문왕 대에 이르러 시중은 국정 운영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순원은 698년 2월에 대아찬으로서 중시가 되었다가, 700년 여름 5월에 이찬 경영(慶永)의 모반에 연루되어 파면당했다.[1] 이후 시중을 역임한 주요 인물로는 김주원, 김헌창 등이 있다.[3] 이들은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1. 3. 후기 시중 (혜공왕 ~ 경순왕)
혜공왕 대 이후 시중은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리면서 그 권위가 약화되었다. 김은거는 혜공왕 4년(768)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77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태종 무열왕의 5대 손 김주원은 혜공왕 13년(777)에 시중에 임명되었다. 원성왕 원년(785)에는 제공이 시중에 임명되었다.소성왕의 아버지인 수승(秀昇)은 애장왕 5년(804)에 시중에 임명되었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3]은 애장왕 8년(807)에 시중에 임명되었다가 헌덕왕 6년(814)에 다시 시중이 되었다.
원성왕의 증손자 김우징(金祐徵)은 흥덕왕 3년(828)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흥덕왕 9년(834)에 다시 복직했다가 이듬해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왕위 다툼에서 민애왕이 되는 김명에게 쫓겨 청해진(淸海鎭)으로 내려가 장보고(張保皐)와 결탁해 쿠데타를 일으켜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흥덕왕 10년(835) 시중에 임명된 김명은 흥덕왕 사후 왕위 다툼에서 희강왕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얼마 뒤 희강왕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했다. 이후 김우징의 공격을 받아 왕위에서 쫓겨나 시해되었다. 김명과 함께 희강왕 즉위에 공을 세운 이홍(利弘)은 837년에 시중이 되었으나, 이듬해 김명을 도와 난을 일으켜 희강왕을 자살로 몰았다. 김명이 죽은 뒤 이홍은 산으로 도망쳤으나 김우징에게 살해되었다.
문성왕 2년(840)에는 의종(義琮)이 시중에 임명되었고, 경문왕 2년(862)에는 위진(魏珍)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헌강왕 원년(875)에는 예겸(乂謙)이, 헌강왕 6년(880)에는 민공(敏恭)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정강왕 원년(886)에 시중이 된 준흥(俊興)은 정강왕의 유조를 받아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했다. 효공왕 2년(898)에는 계강(繼康)이 시중에 임명되었고, 효공왕 6년(902)에는 효종(孝宗)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효종의 아들이 경순왕이다. 경명왕 원년(917)에는 유렴(裕廉)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2. 2. 고려
고려 시대의 문하시중과 연관성을 간략하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의 시중직은 고려의 문하시중으로 이어져 중앙 집권 체제 강화에 기여했다.3. 시중의 역할과 위상 변화
신라의 시중은 초기에는 왕을 보좌하는 단순한 역할에서 점차 그 권한과 위상이 강화되었다. 최초의 시중(중시)은 진덕여왕 5년(651년)에 임명된 죽지였다.[1] 태종 무열왕 대에는 문왕, 문훈 등 여러 인물이 시중을 역임하며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신문왕 대에는 시중 대장이 2년 만에 사망하고, 원사가 병으로 물러나는 등 잦은 교체가 있었다. 효소왕 대에는 원선이 노환으로 물러나고, 성덕왕 대에는 원문, 신정, 문량 등이 연이어 시중을 맡았으나 단기간 재임 후 사망하거나 병으로 물러났다. 이러한 잦은 교체는 시중의 권한이 강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견제와 갈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경덕왕 대에 이르러 시중의 명칭이 '시중(侍中)'으로 변경되었고,[2] 이는 시중의 역할이 왕을 단순히 '모시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국정 전반에 관여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혜공왕 대에는 김은거가 시중에 임명되었다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는 등 시중의 권력이 왕권에 위협이 될 정도로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원성왕 대에는 제공, 종기, 준옹, 숭빈, 언승 등이 시중을 역임하며 왕실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졌다. 특히 왕족 출신이 시중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시중은 왕권의 핵심 지지 기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헌덕왕 대에는 김헌창이 시중에 임명되었다가 지방관으로 내려가는 등[3] 중앙과 지방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후 김충공, 김우징, 김명 등이 시중을 역임하며 왕위 계승 분쟁에 깊이 관여하는 등 시중의 정치적 영향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문성왕 대 이후에도 시중은 여전히 중요한 직책이었으나, 잦은 반란과 왕위 다툼 속에서 그 위상은 점차 약화되었다. 경문왕 대에는 위진, 인흥 등이 시중을 역임했고, 헌강왕 대에는 예겸, 민공 등이 시중을 맡았다. 민공은 헌강왕에게 백성들의 풍요로운 생활상을 전하며 왕의 덕치를 칭송하는 등 왕권 안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정강왕 대에는 준흥이 시중을 맡아 왕의 유조를 받드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효공왕 대에는 계강, 효종 등이 시중을 역임했고, 경명왕 대에는 유렴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경순왕 대에는 언옹이 시중을 맡았으나, 이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시중이다.
이처럼 신라의 시중은 시대에 따라 그 역할과 위상이 변화하면서 신라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왕을 보좌하는 역할에서 점차 국정 운영의 핵심 직책으로 성장했으며, 왕권 강화와 견제, 중앙과 지방 세력 간의 갈등, 왕위 계승 분쟁 등 신라 정치사의 주요 사건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4. 주요 시중 인물 분석
신라의 역대 시중(侍中)은 신라 정치와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주요 시중들의 활동과 업적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 초기 시중:
- 죽지(竹旨): 진덕왕 5년(651년) 최초의 시중(당시 명칭은 집사중시)이 되었다.
- 문왕(文王): 태종 무열왕 5년(658년) 시중이 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 예원(禮元): 문무왕 11년(671년) 시중에 임명되어 외교와 내정에 기여했다.
- 중대 시중:
- 순원(順元): 효소왕 7년(698년)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700년 모반에 연루되어 파면당했다.
- 주원(周元): 태종 무열왕의 후손으로, 혜공왕 13년(777년) 시중에 임명되어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 양상(良相): 혜공왕 23년(764년)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훗날 선덕왕으로 즉위하여 신라 중대 왕실의 권위를 회복했다.
- 하대 시중:
- 언승(彦昇): 원성왕의 아들로, 794년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훗날 헌덕왕으로 즉위하여 왕권 안정을 꾀했다.
- 김헌창(金憲昌): 김주원의 아들로, 애장왕 8년(807년)과 헌덕왕 6년(814년) 두 차례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김헌창의 난을 일으켰다.
- 김우징(金祐徵): 원성왕의 증손자로, 흥덕왕 3년(828년)과 834년 두 차례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훗날 신무왕으로 즉위하여 왕위 계승 분쟁을 종식시켰다.
- 김명(金明): 원성왕의 손자로, 흥덕왕 10년(835년)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훗날 민애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신무왕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했다.
- 김주원계: 김주원계 인물들이 다수 시중에 임명되어 신라 하대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라의 시중은 왕권 강화, 왕위 계승 분쟁, 정치 개혁 등 신라 정치사의 주요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왕위 계승 분쟁이 격화되면서 시중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으며, 일부 시중은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참조
[1]
문서
장을 장(將)으로도 썼다.
[2]
역사
경덕왕 6년([[747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를 시중으로 고쳤다.
[3]
문서
창을 정(貞)으로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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