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카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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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하카샤파는 초기 불교 경전에서 설법을 한 인물로, 다양한 전설과 일화를 통해 묘사된다. 그는 부처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출가 전에는 결혼했으나 이후 출가를 결심하고 부처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 마하카샤파는 고행 수행을 실천하며 부처의 가르침을 따랐고, 부처 열반 후 제1차 불교 결집을 주도했다. 그는 선불교의 초조로 여겨지며, 불교 미술에서 중요한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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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카샤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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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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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장로 |
다른 이름 | 두타라자 (Dhutaraja) |
출생명 | 핍팔리 (Pippali) |
출생 연도 | 기원전 603년경 또는 기원전 520년 |
출생지 | 마가다 마가다 (현재의 비하르 주, 인도)의 마하티타 |
사망 연도 | 기원전 460년경 또는 기원전 380년 |
사망 장소 | 마가다 마가다의 쿠쿠타파다 산 구르파에서 사망. 많은 전기적 기록에 따르면, 여전히 그곳에 살아 있다고 함 |
국적 | 마가다 |
종교 | 불교 |
학파 | 모든 학파, 그러나 상좌부와 선불교에서 가장 존경받음 |
주요 업적 | 제1차 불교 경전 결집의 지도자; 고행에 으뜸 (두타바다낭, dhutavādānaṃ) |
스승 | 고타마 붓다 |
교육 | 브라만 카스트 교육 |
후계자 | 아난다 |
제자 | 스로나-코티카르나; 바드라-카필라니 |
부모 | 아버지 니야그로다, 카필라 또는 코시곳타; 어머니 수마나데비 |
불교 정보 | |
존칭 | 불교 제2조, 두타 제일 |
언어별 이름 | |
산스크리트어 | 마하카샤파 (Mahākāśyapa) |
팔리어 | 마하카사파 (Mahākassapa) |
일본어 | 摩訶迦葉 (마하카쇼) |
정보 출처 | |
참조 | Tambiah 1984, p. 22 Ray 1994, p. 117 Rhys Davids 1914, p. 160 Tournier 2014, p. 27 |
2. 생애
마하카샤파는 마가다국 왕사성 부근 마하파라다 마을의 바라문인 니고르다 갓파의 아들로 태어났다. 핍팔라 나무(보리수)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적 이름은 핍팔라야나였다.
8세에 바라문에 입문하여 수행하였으나, 출가하여 구도하고 싶어했다. 20세 무렵, 부모는 가계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결혼을 권했지만, 그는 청정한 생활을 하고 싶어 거절했다. 그는 금으로 아름다운 여인상을 만들게 하여, 이와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부모는 8명의 바라문에게 여인상을 찾도록 부탁했다.
바라문들이 맛다국의 사가라 강가에서 목욕하는 곳에 상을 실은 수레를 놓고 쉬고 있었는데, 바드라 카필라니의 유모가 그 상을 보고 그녀와 착각하여 혼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바드라 카필라니는 16세였고, 그녀 자신도 출가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가섭과 바드라 카필라니는 서로 편지를 보내 결혼을 거절하려 했지만, 사자들이 길에서 만나 편지를 찢어 버렸다.
가섭은 부랑자로 변장하여 그녀의 집에 가서 서로 출가 의지가 있음을 확인하고 결혼했다. 그들은 12년 동안 아이 없이 지냈지만, 가섭의 부모가 돌아가신 어느 날, 밭일을 보던 중 흙 속에서 나온 벌레가 새에게 먹히는 것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을 느꼈다. 바드라 카필라니도 참깨를 건조하며 많은 벌레를 보고 살생을 생각하여 함께 출가를 결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머리를 깎고 거친 옷을 입고 바랑을 들고 출가했다. 가섭과 바드라 카필라니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는데, 가섭은 오른쪽으로, 그녀는 왼쪽으로 갔다.
가섭은 출가 후에도 바라문 수행을 계속했지만, 왕사성과 나다다 마을 사이의 니고르다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석가를 만나 불제자가 되었고, 이름을 가섭으로 고치고 죽림정사에 이르렀다.[4] 석가에게 입문했을 때, 이미 32상 중 7상을 갖추고 있었고, 8일째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2. 1. 출가 전
팔리어 기록에 따르면 마하카샤파는 현재 인도의 마가다 왕국 마하티타 마을의 브라만 가문에서 피팔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지주였으며,[3] 어머니는 수마나데비였다. 그는 위대한 남자의 32가지 특징 중 일부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이는 불교에서 미래의 붓다가 될 특징으로 여겨진다.[4]그는 젊은 시절부터 결혼보다는 정신적인 삶을 추구했지만, 아버지는 그가 결혼하기를 원했다.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결혼에 동의했지만, 금으로 된 여성 조각상을 만들고 아버지에게 그 조각상과 같은 여성을 찾아오라고 요청했다. 이 조각상의 복제품 4개가 전국으로 보내졌고, 카필라 출신 브라만의 딸 바드라 카필라니가 이 조각상과 매우 닮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피팔리의 가족은 바드라 카필라니에게 결혼을 제안했다.[5]
두 사람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음을 나타내는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부모님에게 가로막혀 결혼하게 되었다.[6] 뮬라사르바스티바다 버전의 이야기에서는 피팔리가 바드라를 방문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녀에게 미래의 남편은 감각적인 쾌락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자신도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고, 이에 그는 자신이 그녀의 미래 남편이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독신으로 살기로 합의했다.
팔리어 버전에서 피팔리는 많은 토지와 재산을 소유한 부유한 인물로 묘사된다.[2] 이후 피팔리와 바드라는 밭에서 일꾼들이 쟁기질을 할 때 동물들이 서로 잡아먹는 모습을 보고 연민과 두려움을 느껴 탁발승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농업을 포기했다. 뮬라사르바스티바다 버전에서는 일꾼들의 비참한 모습 때문에 속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애착을 갖지 않고, 소문을 피하기 위해 각자의 길을 갔다.
탄생과 관련된 전설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마가다국 왕사성 부근 마하파라다 마을의 바라문인 니고르다 갓파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핍팔라 나무(핍파라=보리수)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적 이름은 핍팔라야나였다는 것이다.
8세에 바라문에 입문하여 수행했지만, 출가하여 구도하고 싶어했다. 20세 무렵, 부모는 가계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결혼을 권했지만, 그는 청정한 생활을 원한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금으로 아름다운 여인상을 만들게 하여 이와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부모는 8명의 바라문에게 여인상을 찾도록 부탁했다.
바라문들이 맛다국의 사가라 강가에서 목욕하는 곳에 상을 실은 수레를 놓고 쉬고 있었는데, 바드라 카필라(바드라 카필라니)의 유모가 그 상을 보고 그녀와 착각하여 혼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16세였고, 그녀 자신도 출가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가섭과 그녀는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을 거절하려 했지만, 사자들이 길에서 만나 편지를 찢어 버렸다.
가섭은 부랑자로 변장하여 그녀의 집에 가서 서로 출가 의지가 있음을 확인하고 결혼했다. 그들은 12년 동안 아이 없이 지냈지만, 가섭의 부모가 돌아가신 어느 날, 밭일을 보던 중 흙 속에서 나온 벌레가 새에게 먹히는 것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을 느꼈다. 그녀도 참깨를 건조하며 많은 벌레를 보고 살생을 생각하여 함께 출가를 결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머리를 깎고 거친 옷을 입고 바랑을 들고 출가했다. 가섭과 그녀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는데, 가섭은 오른쪽으로, 그녀는 왼쪽으로 갔다.
가섭은 출가 후에도 바라문 수행을 계속했지만, 왕사성과 나다다 마을 사이의 니고르다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석가를 만나 불제자가 되었고, 죽림정사에 이르렀다.
2. 2. 부처와의 만남과 깨달음
여러 초기 불교 경전에 따르면, 마하카샤파는 12개의 설법을 모아 별도의 섹션으로 편집하였다. 팔리 경전에서는 ''상윳타 니까야''라고 불리는 모음의 일부이며, 중국 불교 경전에서는 ''상응 아함''이라고 불린다.[1] 후자의 모음에는 마하카샤파에 대한 섹션의 두 가지 버전이 있다.[1] 중국의 ''증일 아함''에도 부처와 마하카샤파의 만남을 묘사하는 구절과[2] 그와 승려 바쿨라에 대한 또 다른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3]
삐빨리는 부처를 만나는 순간 깊은 존경심을 느껴 제자가 되기를 청했고, 이후 '가섭'이라고 불렸다. 부처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세 가지 지침을 주었다. 가섭은 동료 수행자들에게 "생생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져야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듣고 실천해야 하며, 마음챙김 속에 살아야 했다.[4]
마하카샤파는 자신의 훌륭하고 비싼 가사를 부처의 누더기 천 조각으로 만든 옷과 교환했는데, 이는 부처가 보여준 큰 존경의 표시였다.[5]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부처가 열반한 후 마하카샤파가 제1차 결집을 주관할 것이라는 징표였다.[6] 여러 전통의 문헌에서는 마하카샤파와 같은 훌륭한 공덕을 가진 사람만이 그 옷을 입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시사한다.[5] 고타마 붓다가 마하카샤파에게 자신의 옷을 준 것은 이 제자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마하카샤파는 이 옷을 미래의 부처에게 전하기 위해 지킨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옷은 불교 가르침의 전승을 전달하는 것을 상징하게 되었고, 마하카샤파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연속성의 상징이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는 마하카샤파에게 "많은 사람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고 훈계하고, 고행 수행을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마하카샤파는 열세 가지 고행 수행(황야에서 생활하기, 걸식으로만 생활하기, 넝마 옷 입기 등)을 실천했으며 9일 만에 깨달음을 얻은 제자(''아라한'')가 되었다.
마하카샤파는 부처의 제자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출가의 전형이었다. 그는 부처로부터 고행 수행의 으뜸이며, 숲에 사는 자의 으뜸으로 칭찬받았다. 그는 초자연적 능력에 뛰어났으며, 명상 흡수에서도 부처와 동등했다.
마하카샤파의 탄생과 관련된 여러 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마가다국 왕사성 부근의 마하파라다 마을의 바라문인 니고르다 갓파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핍팔라 나무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적 이름은 핍팔라야나였다. 8세에 바라문에 입문하여 수행하였으나, 더욱 출가하여 구도하고 싶었다. 20세 무렵, 부모는 가계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결혼을 권했지만, 그는 청정한 생활을 하고 싶어 거절했다. 그는 솜씨 좋게 금으로 아름다운 여인상을 만들게 하여, 이와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부모는 8명의 바라문에게 여인상을 찾도록 부탁했다.
바라문들이 맛다국의 사가라 강가에서 목욕하는 곳에 상을 실은 수레를 놓고 쉬고 있었는데, 바드라 카필라의 유모가 그 상을 보고 그녀와 착각하여 혼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바드라 카필라는 16세였고, 그녀 자신도 출가하고 싶어했다. 가섭과 바드라 카필라는 서로 편지를 보내 결혼을 거절하려 했지만, 사자들이 길에서 만나 편지를 찢어 버렸다.
가섭은 부랑자로 변장하여 그녀의 집에 가서 서로 같은 출가 의지가 있음을 확인하고 결혼했다. 그들은 12년 동안 잠자리도 따로 하고 아이도 없이 지냈다. 가섭의 부모가 돌아가신 어느 날, 밭일을 보던 중 흙 속의 벌레가 새에게 먹히는 것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을 느꼈다. 바드라 카필라도 참깨를 건조하며 많은 벌레를 보고 살생을 생각하여 함께 출가를 결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하는 가운데, 머리를 깎고 거친 옷을 갈아입고 바랑을 들고 출가했다. 가섭과 바드라 카필라는 갈림길에서 이대로는 사정에 휩쓸린다 하여 가섭은 오른쪽, 그녀는 왼쪽으로 갈라졌다.
가섭은 출가 후에도 바라문의 수행을 하고 있었지만, 왕사성과 나다다 마을 사이의 니고르다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석가를 만나 불제자가 되어 이름을 가섭으로 고치고 죽림정사에 이르렀다.
2. 3. 두타행 실천
석가모니 부처는 마하카샤파에게 "많은 사람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고행 수행을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1] 마하카샤파는 이에 따라 황야에서 생활하기, 걸식으로만 생활하기, 넝마 옷 입기 등 열세 가지 고행을 실천했으며,[2] 9일 만에 깨달음을 얻은 제자가 되었다.[3]마하카샤파는 부처의 제자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출가의 모범이었다.[4][5] 그는 부처로부터 고행 수행의 으뜸이자 숲에 사는 자의 으뜸으로 칭찬받았다.[6] 그는 초자연적 능력에 뛰어났으며, 명상에서도 부처와 동등했다. 그는 불편함을 참는 능력이 뛰어나고, 최소한의 생활 필수품에 만족하는 승려로 묘사된다.
한번은 부처가 마하카샤파에게 늙었으니 고행 수행을 포기하고 부처 곁에서 생활하라고 조언했지만, 마하카샤파는 고행 수행이 자신에게 유익하고 앞으로 수행할 세대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부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행 수행의 이점을 칭찬했다.
또 다른 상황에서, 마하카샤파가 단순한 넝마 옷을 입고 부처를 만났을 때, 다른 승려들은 그가 스승을 만날 때 적절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부처는 마하카샤파를 칭찬했다. 중국어 버전에서는 부처가 마하카샤파에게 자신의 자리를 함께 사용하도록 허락했지만, 마하카샤파는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마하카샤파가 병에 걸렸을 때, 부처는 그를 방문하여 불교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상기시켰다.
2. 4. 부처의 인정
석가모니 부처는 마하카샤파에게 "많은 사람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고행 수행을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1] 마하카샤파는 열세 가지 고행 수행(황야에서 생활하기, 걸식으로만 생활하기, 넝마 옷 입기 등)을 실천했으며,[2] 9일 만에 깨달음을 얻은 제자(''아라한'')가 되었다.[3] 그는 훌륭한 자질 때문에, 그리고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승려들과 구별하기 위해 '마하카샤파'(Mahākāśyapasa)로 불리게 되었다.마하카샤파는 부처의 제자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출가의 전형이었다.[4][5] 그는 부처로부터 고행 수행(dhutavādānaṃpi)의 으뜸이며, 숲에 사는 자의 으뜸으로 칭찬받았다. 그는 초자연적 능력(iddhipi; ṛddhisa)에 뛰어났으며, 명상 흡수(jhānapi; dhyānasa)에서도 부처와 동등했다. 그는 불편함을 참는 능력이 뛰어나고, 최소한의 생활 필수품에 만족하는 승려로 묘사된다.[6]
팔리어 및 중국어 문헌에 나오는 한 설법에서 부처는 마하카샤파에게 늙었으니 고행 수행을 포기하고 부처 곁에서 생활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마하카샤파는 그 수행이 자신에게 유익하고, 앞으로 수행할 세대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거절했다. 부처는 그에게 동의했고, 고행 수행의 이점을 확인했다.
팔리어와 두 개의 중국어 문헌에 나오는 두 번째 설법에서는 마하카샤파가 단순한 넝마 옷을 입고 부처를 만났으며, 중국어 버전에 따르면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길었다고 전한다. 다른 승려들은 마하카샤파가 스승을 만날 때 적절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부처는 마하카샤파를 칭찬하며 응답했다. 중국어 버전에서 부처는 심지어 마하카샤파에게 자신의 자리를 함께 사용하도록 허락했지만, 마하카샤파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마하카샤파가 한 번 병에 걸리자 부처는 그를 방문하여 불교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상기시켰다.

팔리어 경전에는 부처가 마하카샤파를 수도승에게 활기차고 열성적인 삶을 살도록 권하는 데 있어서 동등하게 여겼으며, 부처는 가르침을 통해 재가자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그의 능력에 대해 칭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카랄루비나는 부처가 나중에 그를 ''승가''의 지도자로 삼기 위해 준비시켰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하카샤파가 등장하는 팔리어 및 중국어 병행본의 상윳타 경전에서, 마하카샤파는 순수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교리를 가르치는 예시로 제시된다. 종교학자 셰인 클라크는 대부분의 텍스트에서 제시되는 냉담하고 금욕적인 수행자라는 그의 모습이 완전한 그림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아날라요는 그가 공동체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교리를 가르치는 데 시간을 할애했으며, 동료 수도자들에게 금욕주의를 실천하도록 설득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또한 그가 제1차 결집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산스크리트어 ''마하카르마비방가''는 마하카샤파가 중요한 가르침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아반티를 시작으로 북서부 지역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파할 수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가르침과 가르침을 줄 사람들을 선택하는 방식 때문에, 그의 가르침 스타일은 다른 승려들과 ''비크슈니''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는 특히 ''비크슈니''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아날라요는 이로 인해 그가 점차 가르침에서 물러났다고 주장한다. 마하카샤파와 그의 제자인 바쿨라에서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묘사된, 금욕적인 가치를 지닌 깨달은 제자의 이러한 이상은 초창기 불교도 일부 집단의 정서와 성향을 반영할 수 있었다.
클라크는 마하카샤파가 속세와 거리를 둔 수행자라는 이미지가 초기 불교도들이 일반 대중에게 "낙인"을 찍은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계율에 관한 뮬라사르바스티바다 경전을 연구하면서, 클라크는 마하카샤파에 대한 "내부"적인 관점도 존재하며, 이는 그가 전 부인이자 ''비크슈니''가 된 반드라와 그녀를 지도하기 위해 자주 교류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마하카샤파는 부처님 밑에서 출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체 수행자들의 종교 단체에 가입한 전 부인 반드라를 만났다. 그녀는 니르간타 푸라나(Pūraṇa Kassapapi)가 이끄는 단체였다. 그녀는 동료 수행자들에게 정기적으로 강간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마하카샤파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가 대신 불교 ''비크슈니''가 되도록 설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자주 괴롭힘을 당했고, 이제는 밖에 나갈 때만 그랬다. 반드라가 탁발을 위해 마을에 나갈 때 이런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마하카샤파는 부처님께 자신이 얻은 탁발 음식의 절반을 매일 그녀에게 주어, 그녀가 더 이상 나갈 필요가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6인조라고 불리는 승려 그룹과 스툴라난다의 비판을 받았다. 클라크는 그들의 비판이 "금욕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수도자들의 양가적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툴라난다에 대해 글을 쓰면서, 오누마는 스툴라난다가 초기 불교 수도 생활에서 일반적으로 옹호되었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과 출가에 반대했고, 이것이 그녀가 마하카샤파와 반드라를 미워했던 이유라고 말한다. 그녀는 마하카샤파가 전형적인 금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때에도 자주 그에 대한 비판을 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하카샤파는 계속해서 전 부인을 지도했고 그녀는 이후 ''아라한''(arahantpi)이 되었다. 그녀에게 귀속되는 시에서, 그녀는 전 남편의 은혜, 진실에 대한 공유된 비전, 그리고 영적인 우정을 칭찬한다. 그러나 마하카샤파는 자신의 시에서 그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하카샤파는 교리 문제에 대해 다른 주요 승려들의 자문을 받기도 했다. 일부 비불교 종파의 스승들이 장로 사리푸트라에게 무응답의 질문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부처가 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마하카샤파와 상의했다. 또 다른 경우, 사리푸트라는 불교 가르침을 실천하는 노력의 발전에 대해 그와 상의했다. 마하카샤파는 또한 소나-코티칸나(Soṇa-Koṭikaṇṇapi)의 스승이자 가족의 친구였으며, 나중에는 그의 ''우파디야야''(upajjhāyapi)였다. 그는 그에게 ''앗타카바가''를 가르쳤고, 나중에 소나는 그것을 낭송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마하카샤파가 스승으로서 수행한 또 다른 역할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자비심이었다. 수많은 기록은 그가 가난한 기증자들에게 그에게 기부하고 그의 생계를 지원할 기회를 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기증자들은 일반적으로 그에게 중고 음식을 제공했고, 당시 브라만교 문화에서 이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기증자들로부터 음식을 받음으로써, 마하카샤파는 그들에게 공덕밭으로 여겨졌고, 즉, 그들이 공덕을 쌓고 그들의 나쁜 업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한 경우, 그는 죽음을 앞둔 매우 가난한 여성을 찾아가 그녀에게 약간의 기부를 할 기회를 주었다. 처음에는 음식의 질이 너무 낮다고 느껴 감히 하지 못했지만, 마하카샤파가 계속 기다리자, 그녀는 결국 그가 단지 그녀를 위해 왔다는 것을 깨닫고 기부했다. 종교학자 리즈 윌슨은 이러한 관대한 행위에 대한 기록이 베다 희생에 대한 이전의 신념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거기서 희생자과 희생물은 연결되어 있으며, 헌물은 제공하는 사람의 일부를 포함한다. 그들 자신의 일부를 줌으로써, 기증자들은 새로운 자아를 얻고, 수도자 수혜자를 통해 자신을 정화한다. 한 기록에서는, 한 나병 환자가 실수로 그녀가 제공하는 음식 그릇에 손가락이 떨어졌다. 마하카샤파는 어쨌든 그 헌물을 받아 먹었다.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이 공덕을 쌓도록 마하카샤파가 선택한 것은 신들과 같은 초자연적이거나 특별한 기증자 또는 부유한 상인이 가난한 사람들과 경쟁하게 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고, 마하카샤파는 가난한 사람만을 기증자로 받아들였다. 한 설법에서, 그는 심지어 다른 수도자들에게 "고귀한 가문"을 방문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따라서 마하카샤파에게 공물을 바치는 가난한 기증자들은 그들의 공덕을 통해 높은 지위와 권력을 얻게 된다. 윌슨은 "[마]하카샤파의 눈에 완벽한 기증자는 가장 적게 줄 수 있는 기증자이다..."라고 추측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공물을 받아들이고 높은 지위나 초자연적인 기증자의 공물을 거부하는 마하카샤파의 주장은 마하카샤파가 묘사되는 반체제적인 성격의 일부였다. 이것은 또한 그의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포함한다. 한 텍스트에서, 마하카샤파가 유명한 기증자들을 거부하자 부처는 기부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발표했다.
3. 부처 열반 후 활동
부처의 마지막 날과 열반에 드는 것에 대한 초기 팔리어 경전에 따르면, 마하카샤파는 부처의 '''파리니르바나'''(죽음과 최종 열반의 성취)를 7일 후에 알게 되었다.[1] 그는 승려들과 여행을 하던 중 산호수에서 온 꽃을 든 아지비카 수행자를 만나 부처가 죽은 쿠시나가라 지역 전체가 꽃으로 덮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티베트 자료에는 마하카샤파가 지진 때문에 부처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2][3] 팔리어 경전에서 마하카샤파는 파바 산에서 급히 돌아와 7일 후에 쿠시나가라에 도착했다. 티베트 경전에서는 아자타샤트루 왕이 부처의 죽음을 듣고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여 궁궐에서 일하는 바라문에게 경고했고, 왕이 죽는 것을 막은 후 쿠시나가라로 갔다.[4]
쿠시나가라의 말라 사람들이 부처의 다비식 제단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팔리어 기록에 따르면, 승려 아누룻다는 신들이 마하카샤파가 도착할 때까지 다비식 제단에 불을 붙이는 것을 막았다고 말했고, 6세기 중국 불교 경전에서는 부처의 영적인 힘이 지연을 야기했다고 한다.[5] 마하카샤파는 부처의 발에 "깊고 부드러운 존경"을 표했고, 부처의 시신은 여러 겹의 천으로 덮여 관에서 부처의 발이 기적적으로 나타났다. 그가 끝내자 제단은 자발적으로 불이 붙었고, 어떤 버전에서는 마하카샤파 자신이 전통적인 인도 장남의 역할로 제단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불교학자 앙드레 바뢰는 마하카샤파가 부처의 ''파리니르바나''를 알고 제단에 불을 붙인 이야기가 마하카샤파의 인물을 강조하기 위해 서기전 5, 4, 3세기에 승려 규율의 저자들이 삽입한 장식으로 여겼다. 바뢰는 마하카샤파가 원래 버전에서 부처의 화장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추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하카샤파가 결국 다비식 제단에 불을 붙인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 보여주며, 그는 부처의 가르침을 가장 중요하게 계승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여러 불교 종파의 아비달마 경전에서 마하카샤파가 쿠쿠타파다 산에서 서원을 완수한 것은 고타마 붓다가 마하카샤파가 스승의 화장터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시신이 화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서원과 관련이 있다. 그레고리 쇼펜은 여러 후기 경전 불교 텍스트를 분석하여 두 경우 모두 신통력을 바탕으로 서원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 죽은 후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내린다. 마하카샤파의 신통력은 그가 부처의 가르침을 보존하는 자로서 텍스트에서 그의 역할에 필요했다. 후기 불교 텍스트는 마하카샤파를 부처의 맏아들로 묘사하며,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이끌고, 그의 상속자로서 제1차 불교 결집을 주재한다. 결국, 그는 부처 이후 최초의 스승이자 스승 계보의 시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상좌부 불교와 대중부를 포함한 여러 불교 종파에서 발견된다. 실제로, 상좌부는 그를 일종의 "교회의 아버지"로 본다.
마하카샤파는 《디가 니까야》에 대한 팔리어 주석에서 《상윳타 니까야》와 《상윳타 아가마》의 전신이 되는 경전을 보존하는 책임을 맡은 인물로 묘사된다. 니까야와 아가마 버전 모두에서 그에게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으며, 투르니에는 이 경전을 보존한 스승들의 계보가 마하카샤파의 유산을 보존하는 사람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는 5~6세기경 스리랑카 승려 마하나만의 비문에 사용된 언어와 스리랑카 전통에서 사용된 후기 텍스트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이들은 마하나만의 계보를 마하카샤파의 계보와 미래의 부처인 미륵의 계보와 연결한다. 그러나 일부 팔리어 자료에서는 마하카샤파가 대신 《앙굿따라 니까야》의 낭송가 계보에 속했다고 한다.
초기 불교 학교 중 하나인 카샤피야(Kassapīya)는 학자 파라마르타와 쿠이지에 따르면 마하카샤파에 의해 창시되었다. 다른 전통 학자들은 대신 부처 이후 3세기 후에 살았던 또 다른 카샤파라고 주장했다. 초기 불교 학교 간의 차이점이 더욱 두드러지자 마하상기카는 마하카샤파라는 인물과 관계를 맺고 그를 자신들의 창시자이자 수호성인으로 여겼다. 그들은 테라바다와 같은 다른 학교보다 자신들을 더 정통하다고 제시했다.
3. 1. 제1차 불교 결집 주도
여러 문헌 전통의 초기 불교 경전에는 마하카샤파에게 귀속된 12개의 설법이 여러 텍스트 모음 내에서 별도의 섹션으로 편집되어 있다. 팔리 경전에서는 이것이 ''상윳타 니까야''라는 모음의 일부이며, 중국 불교 경전에서는 ''상응 아함''이라고 불린다. 후자의 모음에는 마하카샤파에 대한 섹션의 두 가지 버전이 포함되어 있으며, 번호는 대정 2:99 및 2:100이다.[1] 중국의 ''증일 아함''에도 부처와 마하카샤파의 만남을 묘사하는 팔리 ''상윳타'' T2:99 및 T2:100과 유사한 구절[2]과 그와 승려 바쿨라에 대한 또 다른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3] 티베트 불교 경전에는 마하카샤파에 대한 물라사르바스티바다 전통의 율 텍스트도 있다.[4]3. 2. 아난존자와의 관계
아난다는 부처의 측근이었던 반면, 마하카샤파는 초기 경전에 아난다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인물로 자주 묘사된다. 예를 들어, 마하카샤파는 아난다를 심한 말로 꾸짖으며, 훈련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평판이 좋지 않은 어린 비구들과 함께 다니는 것을 비판했다.[1] 초기 경전에 따르면, 아난다가 비쿠니(여승) 교단을 창설하는 데 기여하면서 ''비쿠니''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고, 종종 그들을 가르치고 출가를 권했다. 마하카샤파에게 비판을 받았을 때, 여러 ''비쿠니''들이 그를 옹호하려 했다. pi라는 한 ''비쿠니''는 마하카샤파가 더 훌륭한 승려라고 생각하는 아난다 앞에서 가르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마하카샤파는 아난다에게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지 물었지만, 아난다는 그녀를 어리석은 여자로 일축했다.[1] 그러자 마하카샤파는 아난다가 부처가 공개적으로 마하카샤파의 성취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했다. 또 다른 사건에서, 마하카샤파는 제자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은 아난다를 질책했고, 이 경우에도 스툴라난다는 마하카샤파를 비판하며 그가 비불교 종교의 추종자였다고 비난했다.인도학자 오스카 폰 히뉘버는 아난다의 친 ''비쿠니''적인 태도가 잦은 분쟁의 이유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분쟁은 마하카샤파가 제1차 불교 결집 동안 아난다에게 여러 위법 사항을 제기하게 했고, 두 제자와 관련된 ''상가''에 두 파벌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종교학자 레이코 오누마는 마하카샤파와 아난다의 성격 차이가 사건을 더 잘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마하카샤파는 냉정함과 고독을 사랑하는 엄격한 멘토였고, 아난다는 부처의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부처에게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시중든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어 부처에게 가사를 받지 않았다.[1]
제1차 결집 때, 아난다는 부처의 가사를 밟았다는 혐의로 범죄를 저질렀다.[1] 팔리어 학자 룬 요한슨은 마하카샤파, 아난다, ''비쿠니''를 둘러싼 사건들이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조차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교학 학자 비쿠 아날라요는 마하카샤파가 아난다에게 편애를 버리도록 가르치기로 선택했고, ''비쿠니''들을 아난다 스스로 처리하도록 남겨두었다고 추측한다.
4. 후대의 평가와 영향
마하카샤파는 초기 불교 승가에서 가장 높은 이상을 구현한 인물로 여겨진다. 불교 승가의 역사에서, 마하카샤파의 금욕적이고 엄격한 가치관과 여성에 대한 혐오, 그리고 아난다의 적극적이고 도시에 거주하는 가치관과 여성에 대한 지지는 대조적인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난다. 승려의 소명과 승단은 자비로운 참여와 무심한 초탈이라는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2] 상좌부 불교 전통은 마하카샤파의 모델에 큰 영향을 받았다.[2] 일부 초기 상좌부 불교 텍스트에서는 숲에서의 출가 수행의 가치가 정착된 승원 생활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2]
초기 경전에서 마하카샤파는 제1결집 동안 불교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으로 묘사되며, 그가 미륵불을 기다리는 이야기에 이 역할은 확장된다.[2] 여러 불교 종파의 아비달마 경전에서 마하카샤파가 닭발산(계족산)에서 서원을 완수한 것은 고타마 붓다가 마하카샤파가 스승의 화장터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시신이 화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서원과 관련이 있다.[2] 불교 연구 학자 그레고리 쇼펜은 여러 후기 경전 불교 텍스트를 분석하여 두 경우 모두 신통력을 바탕으로 서원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 죽은 후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내린다. 마하카샤파의 신통력은 그가 부처의 가르침을 보존하는 자로서 텍스트에서 그의 역할에 필요하다.[2] 실제로, 후기 불교 텍스트는 마하카샤파를 부처의 맏아들로 묘사하며,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이끌고, 그의 상속자로서 제1차 결집을 주재한다. 결국, 그는 부처 이후 최초의 스승이자 스승 계보의 시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2]
일반적으로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는 마하카샤파가 자주 언급된다.[2] 불교학자 실크는 마하야나 논쟁가들이 초기 경전에서 나타나는 그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입장과 혁신에 대한 반대, 그리고 고타마 붓다와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그의 대화 상대로 마하카샤파를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초기 마하야나 저술가들의 불교 수행에 대한 보수적인 생각과 마하야나 교리를 정당화할 필요성에 부합하며, 그들에게 진정성의 아우라를 부여했다.[2]
4. 1. 선불교의 초조


2세기경부터 여러 인도 산스크리트어 및 동아시아 텍스트에서 마하카샤파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수한 계보의 첫 번째 종주로, 아난다는 두 번째 종주로 여겨진다.[2] 초기 종주 전통의 모티프 중 하나는 5명의 다르마 스승(dharmācāryasa)으로, 이는 2세기 CE의 산스크리트어 텍스트인 ''아쇼카아바다나''와 ''대승열반경'' 등에서 발견되며, 여러 고고학적 발견에서도 나타난다. 이 전통은 최초의 불교 회의에 대한 초기 불교 기록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이나, 가르침의 보존이라는 개념을 더욱 확장했다. 이들 텍스트는 다르마 스승들에게 붓다와 유사한 역할과 카리스마를 부여했는데, 불교학자 존 S. 스트롱은 이를 "어떤 의미에서 그들 시대의 부처님"이었다고 표현한다. 이는 고대 인도의 상속 개념, 즉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뿐만 아니라 지위와 정체성까지 물려받는다는 개념과 일치한다. 사르바스티바딘, 물라사르바스티바딘, 스타비라 등 몇몇 초기 불교 학교는 5명의 다르마 스승 개념을 확장하여 각 학교의 스승을 종주로 포함시켰다.
마하카샤파가 죽기 전 붓다의 가르침을 아난다에게 공식적으로 전달하고, 아난다에게 그의 제자 샤나카바시(Saṇavāsīpi, 샤나카바신 또는 샤나바시카)에게 가르침을 전하라고 말했다는 기록은 사르바스티바다 및 물라사르바스티바다 텍스트 전통에서 유래한다. 마하카샤파는 샤나카바시라는 재가자가 연회 기간 동안 "상가"에 많은 선물을 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고, 이 사건 이후 아난다는 그를 설득하여 출가시키고 제자로 삼는다. 훗날 아난다는 죽기 직전 마하카샤파의 말대로 그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레이는 마하카샤파가 자신의 후계자뿐만 아니라 후계자의 후계자까지 선택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그의 뛰어난 지위를 강조한다고 지적한다.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1915–2002)와 비부티 바루아는 마하카샤파와 아난다 사이의 사제 관계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초기 텍스트에 나타난 둘 사이의 불화를 지적했다. 히라카와는 더 나아가 마하카샤파와 아난다가 고타마 붓다를 스승으로 둔 공동 제자이므로 둘 사이에 전승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동아시아 종교학자 엘리자베스 모리슨은 선학 기송(1007–1072)의 불교 종주 전통에 관한 논문을 인용하며, 스승과 제자가 아닌 공동 제자 사이의 전승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마하카샤파와 아난다가 출생 순서에 따라 상속하는 형제자매에 비유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히라카와의 주장에 대해 실크는 전승의 단선적인 성격상 마하카샤파와 아난다 모두 붓다로부터 전승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아난다가 대신 마하카샤파로부터 전승을 받아야 했다고 주장한다.
마하카샤파는 선불교 전통 텍스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아시아에는 선과 선종 전통이 있는데, 이는 최초로 ''경덕전등록''에 기록된 선불교에 관한 1036년의 계보 기록이다. 이 전통에 따르면, 마하카샤파는 고타마 붓다로부터 직접적인 "전수"를 받았다. 선과 선종은 신자들을 붓다가 ''화엄경''에서 말한 것과 유사한 통찰력으로 이끌려고 한다. 붓다가 영취산에서 말없이 흰 꽃을 들고 감탄했을 때, 모든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바라보기만 했지만, 마하카샤파만이 미소를 지었고, 붓다는 그를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특별한 "심심상인(心心相印)" 전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선택했다.
이처럼 불교 내에서 합리적인 신조나 계시된 경전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에 집중하는 방식이 발전했다. 선은 마하카샤파가 경험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명상적 종교의 방법이 되었다. "경전 밖의 특별한 전수, 인간의 마음을 직접 가리키며,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전수는 붓다가 마하카샤파에게, 마하카샤파가 다시 인도와 중국의 긴 조상 목록에게, 궁극적으로 달마(5세기 또는 6세기)에게 전해졌고, 달마는 선불교를 중국으로 가져와 혜가(487–593 CE)에게 전수했다. ''경덕전등록''은 붓다 고타마로부터 마하카샤파에게 가사(袈裟)를 전하는 것을 특정 선 계보 내의 선 가르침의 비밀 전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겼다. 화엄경 이야기는 11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후대 텍스트에도 기록되었다. 이 텍스트 중 적어도 하나는 선(禪)에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던 화엄경의 진정성을 옹호하기 위해 쓰였을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불교 승려와 선 지향적인 사대부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228년 선 텍스트 ''무문관''에 명상 주제로 포함되었는데, 여기서 붓다는 심심상인의 전수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했다. 화엄경의 주요 요점은 "가르침 밖"의 무언어적인 특별 전수를 묘사하는 것이지만, 이 전통은 불교 경전을 통해 옹호되고 승인되었다.
화엄경 사건은 현대 학자들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간주되지만, 선불교의 철학적 관심사와 정체성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2] 선불교는 경전보다 스승의 마음에서 제자의 마음으로의 직접적인 전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끊임없는 조상 계보는 이 전통의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많은 불교 전통에서 마하카샤파가 고타마 붓다의 가사를 미륵불에게 전하는 것으로 전해지는 반면, 선에서는 마하카샤파가 가사를 다음 조상인 아난에게, 그리고 인도와 중국 조상들의 목록을 통해 전하는 다른 전통이 발전했다. 도겐(1200–1253)과 같은 일부 선 스승들은 이 가사가 결국 마하카샤파에게 전해지고 결국 미륵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 불교 텍스트는 고타마 붓다의 가사 전수를 탄생과 임신의 상징으로, 화엄경의 꽃은 죽음과 화장의 상징으로 보았다. 화엄경 외에도 마하카샤파가 마지막 경의를 표할 때 붓다의 발현과 붓다가 마하카샤파와 자리를 나누는 것도 심심상인의 전수로 여겨진다.
4. 2. 불교 미술에서의 묘사
마하카샤파는 2세기경부터 시작된 많은 인도 산스크리트어 및 동아시아 텍스트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전수한 계보의 첫 번째 종주로 여겨지며, 아난다는 두 번째 종주로 여겨진다.[3] 종주 전통은 5명의 다르마 스승(dharmācāryasa)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2세기 CE의 산스크리트어 텍스트와 고고학적 발견에서 나타난다. 이 전통은 최초의 불교 회의에 대한 초창기 불교 기록에 기반을 두고 가르침의 보존에 대한 아이디어를 더욱 확장한 것이다. 텍스트는 다르마의 스승들에게 부처와 유사한 역할과 카리스마를 부여했는데, 불교학자 존 S. 스트롱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 시대의 부처님"이었다고 표현했다. 이는 고대 인도의 상속 개념과 일치한다.[3]몇몇 초기 불교 학교는 5명의 다르마 스승의 아이디어를 확장했는데, 각 학교는 자체 스승을 종주로 포함하도록 목록을 확장했다.[3] 마하카샤파가 죽기 전에 부처의 가르침을 아난다에게 권위의 공식적인 전달로서 부여하고 아난다에게 그의 제자 샤나카바시(Saṇavāsīpi)에게 가르침을 전하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3]

불교 미술에서 마하카샤파의 묘사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안심을 주기 위해 ''열반'' 장면에 묘사되었으며, 미래에 대한 예시로 미륵불 옆에 묘사되었다.[3] 그가 부처님께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장면은 불교 미술에서 잘 알려진 묘사가 되었으며, 부처의 발자국 숭배로 이어졌을 수 있다.[3]
중국 미술에서 마하카샤파는 보통 긴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대승 불교 도상학에서 마하카샤파는 종종 부처의 왼쪽에, 아난다는 오른쪽에 배치되어 묘사된다.[3] -- 두 제자는 그레코-불교 시대부터 미술 묘사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3] 선종 사찰에서 마하카샤파의 이미지는 종종 중심적인 위치에 놓인다.[3] 대승 불교의 역사에서 마하카샤파의 누더기 의복 고행은 동아시아 불교의 아이콘이 되었다.[3]
4. 3. 닭발산(계족산) 전설
5세기 주석서에 따르면, 마하카샤파는 부처의 유해가 흩어지는 것을 우려하여 열반 후 부처의 유물을 8개 부분으로 나누었다고 한다.[1] 그는 유물을 보관했던 가족들에게 요청하여 부처의 유물 일부를 모았지만, 소량의 유물은 가족들에게 남겨두었다.[2] [3] 그 후, 아자타샤트루 왕의 도움을 받아 라자가하 동쪽에 있는 "80명의 제자를 위한 사당"이라는 지하 묘실에 유물을 보관했다.[4] [5] 나중에, 경전 이후 불교 문헌인 테라바다의 ''파타마삼보디''에 따르면, 이렇게 한 곳에 안치된 유해는 아쇼카 대왕(기원전 268–232년)에 의해 인도 전역에 84,000개 부분으로 나뉘었다.[6]마하카샤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아바다나와 같은 정통 산스크리트 텍스트, 중세 중국 순례자들의 기행문, 수많은 중국어 번역, 동남아시아의 토착 텍스트 등에서 언급된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은 4세기 CE의 중국어 번역본과 2세기 CE로 추정되는 ''아쇼카바다나''이다. 이들에 따르면, 마하카샤파의 시신은 다음 부처인 미륵(Mettiya|미륵pi)이 나타날 때까지 마가다의 쿡쿠타파다 산( 구루파다카) 아래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마하카샤파는 부처로부터 받은 가사를 입고 쿡쿠타파다 산의 세 봉우리 가운데 있는 동굴에 정착하여 미륵 부처가 올 때까지 자신의 몸이 그곳에 머물 것이라는 서원을 했다고 한다. 그의 몸은 그 기간 동안 썩지 않고 미륵 부처의 시대에 나타나 흩어질 것이라고 한다. 마하카샤파는 서원 후에 죽었지만 그의 결심에 따라 그의 몸은 온전하게 유지되었고, 세 개의 산봉우리가 그의 몸 위로 닫혔다.
훗날, 미륵 부처 시대에 산이 열리면, 미륵 부처의 제자들은 마하카샤파를 멸시하지만, 미륵 부처는 마하카샤파의 시신을 손에 들고 제자들에게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마하카샤파의 서원에 따라 그의 손에서 시신이 기적적으로 불타는 것을 본다. 그러나 현장의 기록과 토하라어 ''마이트레야사미티나타카'' 및 기타 기록에서 마하카샤파는 미륵이 올 때까지 자신의 "명상의 동굴"에서 살아 기다린다고 한다. 그는 미륵 부처에게 가사를 건네주며 그것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설명하고, 두 부처를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다. 그런 다음 그는 공중에 뜬 채 고타마 부처를 연상시키는 초자연적인 업적을 보여주고 기적적으로 불길에 휩싸인다.

쿠쿠타파다 산은 전통적으로 북인도의 여러 장소와 동일시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중국 순례자 법현(337–422 CE)과 현장이 방문했을 때 순례와 숭배의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6세기 중국 비석에서 마하카샤파는 종종 동굴에서 미륵불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가사와 두건을 쓰고 있다. 그는 고타마 붓다의 후계자 역할을 부여받았다. 불교학자 미야지 아키라는 동굴에서 마하카샤파가 기다리는 이야기가 한국 불교 미술에서 승려들이 동굴에서 명상하는 주제의 기초가 되었다고 제안한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Evolution of Buddhist Schools
https://www.worldhis[...]
2017-04-03
[2]
웹사이트
Chan Buddhism
https://plato.stanfo[...]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9
[3]
간행물
"''Lepidagathis mahakassapae'' sp. nov. (Acanthaceae: Barlerieae) from the high elevated Lateritic Plateau of northern Western Ghats of Maharashtra, India"
https://onlinelibrar[...]
[4]
백과사전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역사 > 교단의 발달 > 10대제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
백과사전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역사 > 교단의 발달 > 마하가섭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6]
백과사전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역사 > 교단의 발달 > 제1결집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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