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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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베씨는 고대 일본의 씨족으로, 게이코 천황 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한다. 다이카 개신 이후 아베노 쿠라사다마로가 좌대신을 역임하며 세력을 떨쳤고, 이후 후세노오미와 히키다노오미로 분열되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아베노 세이메이를 배출한 계통이 음양도로 명성을 얻었고, 중세 이후에는 쓰치미카도가로 불리며 음양도 가문으로 이어졌다. 아베씨는 여러 인물을 배출했고, 혈통은 현재 일본 황실에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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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씨 - 아베노 나카마로
아베노 나카마로는 8세기 견당사로 당나라에 건너가 과거에 급제 후 당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관리로 활동하고 이백, 왕유 등과 교류하며 문학 활동을 펼쳤으나, 귀국에 실패하고 안남 도호를 지내다 장안에서 사망한 일본인 유학생이다. - 아베씨 - 아베노 히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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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지의 난은 1160년 일본에서 발생한 내란으로, 후지와라 노 미치노리의 독단적인 정치와 미나모토 씨의 불만, 니조 친정파와 고시라카와 상황의 대립을 배경으로 후지와라 노 노부요리와 미나모토 노 요시토모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나 다이라 노 키요모리의 반격으로 헤이케가 권력을 장악하며 겐페이 전쟁과 가마쿠라 시대의 도래에 영향을 미쳤다.
| 아베씨 | |
|---|---|
| 씨족 정보 | |
| 씨족 이름 | 아베씨 (후의 아베씨) |
| 한자 | 阿倍氏 (후의 安倍氏) |
| 가나 | あべうじ |
| 씨성 | 아베노 오미 |
| 후의 씨성 | 아베노 아손 |
| 시조 | 오히코노미코토 (고겐 천황의 제1황자) |
| 씨조 | 아베노 오오마로 |
| 종별 | 황별 |
| 본관 | 야마토국 토이치군 아베 |
| 주요 인물 | 아베노 히라후 아베노 쿠라사다마로 아베노 미우시 아베노 나카마로 아베노 세이메이 아베노 야스치카 아베노 아리요 |
| 후예 | 후세씨 히키다씨 츠치미카도가 (공가) 쿠라하시가 (공가) 시게하라가 (지하가) 다이코쿠가 (지하가) 가가쿠 아베씨 (음악가) 오슈 아베씨 (무가) 다이묘 아베씨 (무가) |
2. 고대 아베씨 (阿倍氏)
게이코 천황의 비 중 한 명인 타카다 히메의 아버지 아베 키코, 게이타이 천황의 비 아베 노베히메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역사상 확실하게 활약하는 것은 센카 천황 때 대부(의정관)였던 오오마로(히마로라는 설도 있음)가 처음이었다. 오오마로는 오토모노 카나무라, 모노노베노 아라카비, 소가노 이나메 다음가는 지위의 중신이었고, 스이코 천황 시대에는 소가노 우마코의 측근으로 마로가 등장한다.
다이카 개신의 신정권에서 좌대신이 된 것은 아베노 쿠라사다마로(아베노 우치노마로)였다. 아베 씨는 『일본서기』 등에서 외국 사신 등으로 파견되는 인물이 많아, 쿠라사다마로는 가문뿐 아니라, 나름대로의 식견을 인정받아 신정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쿠라사다마로의 딸 오타라시히메는 고토쿠 천황의 비가 되고, 아리마노미코를 낳았으며, 또 다른 딸 타치바나노이라츠메는 덴지 천황의 비가 되는 등, 당시 아베 씨의 세력이 막강했다.
그 후 아베씨는 일족이 분립하여 "후세노오미", "히키다노오미" (후에 같이 아손 성을 받는다) 등으로 분열해 갔다. 히키다노오미를 이끄는 아베노 히라후는 사이메이 천황을 섬겨 장군으로 활약했고, 후세노오미를 이끄는 쿠라사다마로의 아들 미우시 (635년~703년)는 다이호 율령 아래 최초의 우대신이 되었다. 후세노 미우시는 "아베노아손"의 성을 받았고, "히키다노아손"에서도 히라후의 아들들에게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견당사 유학생으로 당나라에 간 나카마로는 히라후의 손자, 후나모리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주로 미우시와 히라후의 후손이 "아베씨(阿倍氏)"라 칭하게 되었다. 츄나곤으로 훙거한 미우시의 아들 히로니와 (659년~732년)가 죽자, 후지와라씨 등의 신흥 귀족에게 밀려 침체한다.
하지만, 후지와라노 무치마로의 부인 (토요나리 · 나카마로의 생모)이나 후지와라노 요시츠구의 부인, 코미나 등의 유력자의 부인을 배출했다.
2. 1. 기원과 초기 활동
게이코 천황의 비(妃) 중 한 명인 타카다 히메의 아버지 아베 키코, 게이타이 천황의 비 아베 노베히메가 있었다고 하지만, 역사상 확실하게 활약하는 것은 센카 천황 때 대부(의정관)였던 오오마로(히마로라는 설도 있음)가 처음이었다. 오오마로는 오토모노 카나무라, 모노노베노 아라카비, 소가노 이나메 다음가는 지위의 중신이었다고 한다. 스이코 천황 시대에는 소가노 우마코의 측근으로 마로가 등장한다.2. 2. 다이카 개신과 좌대신
다이카 개신의 신정권에서 좌대신이 된 것은 아베노 쿠라사다마로(아베노 우치노마로)였다. 아베 씨는 『일본서기』 등에서도 외국 사신 등으로 파견되는 인물이 많아, 쿠라사다마로는 가문뿐 아니라, 나름대로의 식견을 인정받아 신정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2] 쿠라사다마로의 딸 오타라시히메는 고토쿠 천황의 비가 되고, 아리마노미코를 낳았으며, 또 다른 딸 타치바나노이라츠메는 덴지 천황의 비가 되는 등, 당시 아베 씨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2]2. 3. 분열과 후세노오미, 히키다노오미
아베씨는 일족이 분립하여 "후세노오미", "히키다노오미" (후에 같이 아손 성을 받는다) 등으로 분열해 갔다. 히키다노오미를 이끄는 아베노 히라후는 사이메이 천황을 섬겨 장군으로 활약했고, 후세노오미를 이끄는 쿠라사다마로의 아들 미우시 (635년~703년)는 다이호 율령 아래 최초의 우대신이 되었다. 그 후, 후세노 미우시는 "아베노아손"의 성을 받았고, "히키다노아손"에서도 히라후의 아들들에 대해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견당사 유학생으로 당나라에 간 나카마로는 히라후의 손자, 후나모리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주로 미우시와 히라후의 후손이 "아베씨(阿倍氏)"라 칭하게 되었다. 하지만, 츄나곤으로 훙거한 미우시의 아들 히로니와 (659년~732년)가 죽자, 후지와라씨 등의 신흥 귀족에게 밀려 침체한다.3. 헤이안 시대 아베씨 (安倍氏)
아베노 세이메이 이후, 아베씨는 가모씨와 함께 음양도, 특히 천문도를 관장했다. 그러나 세이메이와 그의 아들 요시히라(954년~1027년)는 벼슬이 종4위상에 머물렀는데, 이는 조상인 아니오에 비해 낮은 것이었다.[1] 요시히라의 장남 도키치카는 천문밀주선지를 받았고, 차남 아키치카는 천문박사, 3남 무네치카는 천문권박사가 되어 천문도 관련 지위를 독점했다. 이후 아베씨는 대대로 천문박사와 음양두에 임명되었지만, 지위와 학설을 둘러싼 일족 간의 대립도 격화되었다.[1] 도키치카의 아들 아리유키를 시조로 하는 '야스치카류', 도키치카의 아들 구니즈이를 시조로 하는 '하루미치파', 도키치카의 동생 무네치카를 시조로 하는 '무네아키류'의 3계통으로 분리되어 치열하게 다투었다.[1]
3. 1. 엔랴쿠~고닌 연간의 개칭
엔랴쿠(延暦)~고닌(弘仁) 연간에 아베씨(阿倍氏)에서 아베씨(安倍氏)로 개칭했다는 유력설이 제시되고 있다.[1]3. 2. 주요 인물
헤이안 시대 초기 유력 고관이었던 아베노 아니오와 아베노 야스히토의 활동 이후, 아베노 세이메이가 등장하면서 아베씨는 음양도와 천문도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이메이와 그의 아들 요시히라 (954년~1027년)는 종4위상에 머물렀고, 이는 조상인 아니오에 비해 낮은 관직이었다.요시히라의 장남 도키치카는 천문밀주선지 수여자, 차남 아키치카는 천문박사, 3남 무네치카는 천문권박사가 되어 천문도 관련 지위를 독점했다. 이후 아베씨는 대대로 천문박사와 음양두에 임명되었지만, 지위와 학설을 둘러싼 일족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도키치카의 아들 아리유키를 시조로 하는 "야스치카류", 도키치카의 아들 구니즈이를 시조로 하는 "하루미치파", 도키치카의 동생 무네치카를 시조로 하는 "무네아키류"의 세 계통으로 분열되어 격렬하게 다투었다.
지쇼·주에이의 난(겐페이 합전) 당시 음양두였던 아베노 야스치카 (1110년~1183년)는 정사위상, 아들 스에히로 (1136년~1199년)는 정사위하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하루미치나 히로카타 및 그 자제들은 자기 가계의 설을 내세워 야스치카 부자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남북조 시대에 등장한 아베노 아리요(세이메이의 14대손, 야스치카의 8대손)는 공경인 종2위에 올랐다. 이는 아베씨 일족으로서는 500년 이상 끊이지 않았던 일이며, 음양사가 공경에 오른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야스치카에게는 구조 가네자네, 아리요에게는 아시카가 요시미쓰라는 정치적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에 승진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야스치카는 헤이시의 쇠망과 모치히토 왕의 난을, 아리요는 메이토쿠의 난 · 오에이의 난을 예언했다고 전해지며, 점성술과 음양도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
4. 음양도 아베씨
헤이안 중기 이후, 아베노 세이메이를 중심으로 아베씨는 음양도 가문으로 활동했다. 중세부터는 쓰치미카도 가문으로 불리며 음양도를 이끌었다.[1]
아베노 세이메이 이후, 아베씨는 카모씨와 함께 음양도와 천문도를 관장했다. 그러나 세이메이나 그의 아들 요시히라 모두 벼슬은 종4위상으로, 조상인 아니오에 비해 낮았다. 요시히라의 아들 대에서 천문도 관련 지위를 독점했지만, 이후 지위와 학설을 둘러싸고 일족 간 대립이 격화되어 3계통으로 분리되어 다투었다.[1]
4. 1. 아베노 세이메이와 음양도
헤이안 중기 이후, 아베씨는 아베노 세이메이를 배출한 계통이 주류를 이루면서, 중세부터는 쓰치미카도 가문으로 불리며 음양도 가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하지만, 세이메이의 계통이 아베씨 본류인지는 불분명하다. 셋쓰 국 출신이라는 설부터, 오히코노미코토를 시조로 하는 란파기촌 혹은 키시씨와 같은 도래인 계통이 칭한 아베씨 출신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1]
아베노 세이메이 이후, 아베씨는 카모씨와 함께 음양도와 천문도를 관장했다. 그러나 세이메이와 그의 아들 요시히라(954년~1027년)의 벼슬은 종4위상으로, 조상인 아니오에 비해 낮았다.[1] 이후 요시히라의 장남 토키야스는 천문밀주선지 수여자, 차남 아키치카는 천문박사, 3남 타테치카는 천문권박사로, 천문도 관련 지위를 독점했다.[1]
4. 2. 음양도 계승과 분열
요시히라의 아들들은 천문도 관련 지위를 독점했는데, 장남 토키야스는 천문밀주선지 수여자, 차남 아키치카는 천문박사, 3남 타테치카는 천문권박사였다. 이후 아베씨는 대대로 천문박사와 음양두에 임명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지위나 학설을 둘러싼 일족간의 대립도 격화되었다.아베씨는 토키치카의 아들 아리유키의 손자 야스치카를 이은 적류 가계 ("야스치카류"), 토키치카의 아들 쿠니모리의 손자 하루미치를 이은 가계 ("하루미치토"), 토키치카의 동생 야스치카의 손자 무네아키 및 그의 아들 히로카타를 이은 가계 (무네아키류)의 3계통으로 분리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2]
이러한 분열이 장기화된 배경으로는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역도 업무의 핵심인 조력(역(暦) 작성)은 공동 작업을 필요로 해 적류가 작업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반면, 천문도 업무의 핵심인 천문밀주는 개인 작업이었기 때문에 각 계파가 경합 관계에 빠지기 쉬웠다. 둘째, 칸겐 2년 (1244년)에 적류 내부의 당주 싸움으로 아베노 유키히로(토시히로의 증손자)가 동생 등 일족에게 살해당하고, 적류의 주요 인물이 처분되어 일시적으로 인재가 부족해졌다.[2]
5. 쓰치미카도가 (아베씨)
메이지 유신 혼란기에 당시 당주였던 쓰치미카도 하루오(1827년~1869년)는 구 막부의 천문방을 접수하여 천문 관측과 지도 측량 권한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서양의 근대 천문학이 사실상 배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루오는 서양의 태양력(그레고리력) 도입에 반대하며 태음태양력 유지를 위해 '메이지 개력'을 주장했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실패했다.[3]
왕정복고 이후, 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적인 천문과 측량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서양 근대 국가와 대등해지기 위해 합리주의에 기반하여 미신을 배척하고 가학을 폐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음양도와 음양사의 세습은 근대화의 걸림돌로 여겨졌고, 음양료는 해체되었다. 메이지 3년(1870년)에는 음양도가 공적 분야에서 배제되었고, 천문과 역산 분야는 대학교 천문력도국, 해군 수로국, 문부성 천문국, 천문대로 이관되었다.[3][4]
하루오의 뒤를 이은 하루에이 이후 쓰치미카도 가는 도쿄로 이주했으며, 화족 제도 도입 후 자작 작위를 받았다. 쓰치미카도 히사나가의 후손이자 아베씨의 서류인 구라하시 가 역시 자작 작위를 받았다.
다이쇼 4년(1915년), 쓰치미카도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천문 기록과 당주의 일기 등이 궁내성에 헌상되어 현재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되어 있다.
5. 1. 남북조 시대의 아베노 아리요
아베노 아리요는 종2위 공경이라는, 당시 음양사로서는 파격적인 지위에 올랐다. 이는 그의 뛰어난 음양도 실력과 더불어 구조 가네자네, 아시카가 요시미쓰 등 유력한 후원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의 후원은 아리요의 승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5. 2. 무로마치 시대와 쓰치미카도가의 성립
아베노 아리요가 '쓰치미카도'를 칭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아베노 아리노부 이후부터 쓰치미카도가를 칭하게 되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후원으로 아리요의 가계가 당상가(반가)의 자격을 얻게 된 배경이 있었다.5. 3. 에도 시대의 번영과 쇠퇴
메이지 유신 혼란기에 당시 당주 쓰치미카도 하루오는 구 막부의 천문방을 접수하여 천문 관측 및 지도 측량 권한을 획득했다. 이로 인해 서양의 근대 천문학이 배제되는 현상이 빚어졌다. 하루오는 서양의 태양력 도입을 막고 태음태양력 유지를 위해 메이지 개력을 제창했으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좌절되었다.[3]왕정복고 이후, 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 천문 및 측량이 필수적이며, 서양 근대 국가와 대등해지기 위해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미신과 음양사 세습을 근대화의 걸림돌로 여겼다. 음양료는 해체되었고, 메이지 3년 (1870년)에는 음양도의 공적 분야 배제, 천문 및 역산 분야가 대학교 천문력도국, 해군 수로국, 문부성 천문국, 천문대로 이관되었다.[3][4]
5. 4.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의 혼란기에 당시 당주 쓰치미카도 하루오(1827년~1869년)는 구 막부의 천문방을 접수하고 천문 관측 및 지도 측량 권한을 획득했다. 이로 인해 서양의 근대 천문학이 배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루오는 서양의 태양력 도입을 막고 태음태양력 유지를 위해 메이지 개력을 제창했으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좌절되었다.왕정복고 이후, 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 천문 및 측량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서양 근대 국가와 대등한 위치를 위해 합리주의에 따라 미신 배척, 가학 폐지를 추진했고, 음양도와 음양사 세습은 근대화의 걸림돌로 여겨 음양료는 해체되었다. 하루오의 양자 하루에이가 어렸기 때문에, 메이지 3년(1870년) 음양료 폐지, 음양도의 공적 분야 배제가 이루어졌다. 천문 및 역산 분야는 대학교 천문력도국, 해군 수로국, 문부성 천문국, 천문대로 이관되었다.[3][4]
하루에이 이후 쓰치미카도 가문은 도쿄로 이주했고, 화족 제도 도입 후 자작 작위를 받았다. 구라하시 가(쓰치미카도 히사나가의 후예, 아베씨 서류)도 자작 작위를 받았다.
다이쇼 4년(1915년), 쓰치미카도가가 보유했던 천문 기록과 당주 일기 등이 궁내성에 헌상되어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되었다.
6. 아베씨 후예
아베노 세이메이의 남계 혈통은 단절되었으며, 현재 쓰치미카도가와 구라하시가는 여러 차례 양자 상속을 거듭한 결과 여계를 통해 이어져 오고 있다. 쓰치미카도 아리나가는 쓰치미카도 야스토미의 딸들을 통해 일부 당상공가, 화족, 현 일본 황실에 아베 씨의 혈맥이 이어지고 있다.[3][4]
7. 주요 인물 목록
| 아베씨 | 쓰치미카도씨 | ||
|---|---|---|---|
| 이름 | 생몰년도 | 이름 | 생몰년도 |
| 미우시 | 635년 ~ 703년 | 아리토키 | ? ~ 1465년 |
| 우치노마로 | ? ~ 649년 | 야스키요 | ? ~ 1511년 |
| 히라후 | 생몰년 미상 | 아리노부 | 1433년 ~ 1514년 |
| 후나모리 | 아리하루 | 1501년 ~ 1569년 | |
| 스쿠나마로 | ? ~ 720년 | 아리나가 | 1527년 ~ 1577년 |
| 히로니와 | ? ~ 732년 | 히사나가 | 1560년 ~ 1625년 |
| 사미마로 | ? ~ 758년 | 야스시게 | 1586년 ~ 1661년 |
| 시마마로 | ? ~ 761년 | 야스히로 | 1611년 ~ 1652년 |
| 에미시 | ? ~ 772년 | 타카토시 | 1626년 ~ 1687년 |
| 나카마로 | 698년 ~ 770년 | 야스토미 | 1655년 ~ 1717년 |
| 아니오 | ? ~ 808년 | 야스마사 | 1677년 ~ 1691년 |
| 히로마로 | 757년 ~ 820년 | 야스렌 | 1685년 ~ 1752년 |
| 야스히토 | 795년 ~ 859년 | 야스쿠니 | 1711년 ~ 1784년 |
| 세이메이 | 921년 ~ 1005년 | 야스아니 | 1728년 ~ 1754년 |
| 요시히라 | 954년 ~ 1026년 | 아리쿠니 | 1753년 ~ 1759년 |
| 요시마사 | 955년 ~ 1031년 | 야스노부 | 1752년 ~ ? |
| 나리치카 | 생몰년 미상 | 야스에이 | 1758년 ~ 1806년 |
| 야스치카 | 1110년 ~ 1183년 | 야스타네 | 1782년 ~ ? |
| 토시히로 | 1136년 ~ 1199년 | 하레치카 | 1787년 ~ 1842년 |
| 야스키치 | 생몰년 미상 | 하루오 | 1827년 ~ 1869년 |
| 아리요 | 1327년 ~ 1405년 | 하레나가 | 1859년 ~ 1915년 |
| 아리모리 | 생몰년 미상 | ||
| 모리츠네 | ? ~ 1422년 | ||
| 야스이에 | ? ~ 1417년 | ||
| 아리모리 | ? ~ 1433년 | ||
| 아리시게 | 생몰년 미상 | ||
| 아리토미 | |||
8. 계도
9. 한국과의 관계 (별도 추가)
게이코 천황의 비 중 한 명인 다카타히메의 부친은 아베노키코토라고 전해지며, 게이타이 천황의 비로는 아베노하에히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역사상 뚜렷하게 활약한 것은 센카 천황의 대부(의정관)였던 오오마로 (히마로라고도 한다)가 처음이다. 오오마로는 오오토모노카네무라, 모노노베노아라카비, 소가가메 다음가는 지위의 중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스이코 천황 시대에는 소가가 우마코의 측근으로 마로가 등장한다.
다이카 개신의 신정권에서 좌대신이 된 것은 아베노쿠라하시마로(우치마로라고도 함)였다. 아베 씨는 『일본서기』 등에서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인물이 많았으며, 특히 백제, 신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활약하였다. 쿠라하시마로는 가문뿐만 아니라 그만한 견식을 인정받아 신정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쿠라하시마로의 딸 오아시히메는 고토쿠 천황의 비가 되어 아리마 황자를 낳았으며, 또 다른 딸 타치바나히메는 덴지 천황의 비가 되는 등 당시 아베 씨의 세력을 엿볼 수 있다.
아베 씨는 일족이 분립하여 "'''후세노오미'''"・"'''히키타노오미'''"(둘 다 후에 아손의 성씨를 받음) 등으로 분열되었다. 히키타노오미를 이끄는 아베노히라후는 사이메이 천황을 섬기며 장군으로 활약했고, 후세노오미를 이끄는 쿠라하시마로의 아들 미누시 (635년 - 703년)는 다이호 율령 하에서 최초의 우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과의 연관성에서 쓰치미카도 히사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략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는 주장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음양료가 해체되고 음양사의 세습이 근대화의 방해가 되는 구폐로 인식되면서 아베씨는 공적인 존재성을 잃었다.[3][4]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역사 왜곡 발언과 우경화 행보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강하며, 특히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을 중심으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아베 정권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불복, 수출 규제 조치 등은 한일 관계 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며,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
9. 1. 고대 한반도와의 관계
게이코 천황의 비 중 한 명인 다카타히메의 부친은 아베노키코토라고 전해지며, 게이타이 천황의 비로는 아베노하에히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역사상 뚜렷하게 활약한 것은 센카 천황의 대부(의정관)였던 오오마로 (히마로라고도 한다)가 처음이다. 오오마로는 오오토모노카네무라, 모노노베노아라카비, 소가가메 다음가는 지위의 중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스이코 천황 시대에는 소가가 우마코의 측근으로 마로가 등장한다.다이카 개신의 신정권에서 좌대신이 된 것은 아베노쿠라하시마로(우치마로라고도 함)였다. 아베 씨는 『일본서기』 등에서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인물이 많았으며, 특히 백제, 신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활약하였다. 쿠라하시마로는 가문뿐만 아니라 그만한 견식을 인정받아 신정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쿠라하시마로의 딸 오아시히메는 고토쿠 천황의 비가 되어 아리마 황자를 낳았으며, 또 다른 딸 타치바나히메는 덴지 천황의 비가 되는 등 당시 아베 씨의 세력을 엿볼 수 있다.
아베 씨는 일족이 분립하여 "'''후세노오미'''"・"'''히키타노오미'''"(둘 다 후에 아손의 성씨를 받음) 등으로 분열되었다. 히키타노오미를 이끄는 아베노히라후는 사이메이 천황을 섬기며 장군으로 활약했고, 후세노오미를 이끄는 쿠라하시마로의 아들 미누시 (635년 - 703년)는 다이호 율령 하에서 최초의 우대신으로 임명되었다.
9. 2. 임진왜란과의 연관성 (부정적 서술)
쓰치미카도 히사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략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의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 시기까지 음양사로 활동하며, 조선 침략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음양도를 계승했다는 비판을 받는다.쓰치미카도 하루오는 메이지 유신의 혼란기에 구 막부의 천문방을 접수하여 천문 관측과 지도 측량 권한을 손에 넣었는데, 이는 조선의 지리 정보를 파악하여 침략에 활용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하루오는 서양의 태양력(그레고리력) 도입을 저지하고 태음태양력 유지를 도모했는데, 이는 근대화를 거부하고 미신적인 음양도를 유지하여 조선 침략의 명분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3][4]
음양료 폐지와 음양도 배제는 근대화의 일환이었지만, 쓰치미카도 가는 화족 자작에 서임되어 여전히 특권을 누렸다. 이는 임진왜란에 연루된 가문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9. 3. 현대 한국 사회의 인식 (부정적 서술)
메이지 유신 이후 음양료가 해체되고 음양사의 세습이 근대화의 방해가 되는 구폐로 인식되면서 아베일본어씨는 공적인 존재성을 잃었다.[3][4]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역사 왜곡 발언과 우경화 행보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강하며, 특히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을 중심으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아베 정권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불복, 수출 규제 조치 등은 한일 관계 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며,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참조
[1]
서적
赤澤春彦 2011 - 第二部第二章「鎌倉期における安倍氏の動向」
[2]
뉴스
安倍晴明の子孫の墓ピンチ 京都、連絡取れず寺が供養
http://www.kyoto-np.[...]
京都新聞
2017-02-11
[3]
웹사이트
暦Wiki/歴史/明治以降の頒暦
https://eco.mtk.nao.[...]
2019-10-09
[4]
웹사이트
東京天文台、明治前期の歩み
https://www.ne.jp/as[...]
2019-10-09
[5]
문서
安倍春材가 安倍兄雄의 子로 하는 계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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