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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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레아 포초는 1642년 오스트리아 제국 트렌토에서 태어난 예수회 소속 화가이자 건축가이다. 그는 1665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밀라노, 제노바 등지에서 예술 활동을 시작했으며, 몬도비의 미시온 교회 내부를 장식하며 프레스코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1681년 로마로 소환되어 산 이냐치오 성당의 돔과 천장 프레스코를 제작하며 로마 바로크의 극적인 개념을 보여주는 걸작을 남겼다. 1694년 빈으로 이주하여 리히텐슈타인 정원 팰리스의 헤라클레스 홀 천장화를 그리는 등 활동을 이어갔으며, 1709년 빈에서 사망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예술적 아이디어를 담은 이론서 "Perspectiva pictorum et architectorum"을 저술하여 건축 원근법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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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포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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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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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안드레아 포초 |
출생일 | 1642년 11월 30일 |
출생지 | 트렌토, 티롤 백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709년 8월 31일 |
사망지 | 빈, 합스부르크 군주국, 신성 로마 제국 |
국적 | 이탈리아 |
직업 | 건축가, 화가, 장식가 |
교육 | |
사사 | 팔마 일 조바네 안드레아 사키 |
작품 | |
로마 (이탈리아) | 제수 교회 성 이냐시오 교회 |
빈 (오스트리아) | 리히텐슈타인 정원 궁전의 헤라클레스 홀 예수회 교회 |
류블랴나 (슬로베니아) | 류블랴나 대성당 |
영향 관계 | |
기타 | |
언어 | 이탈리아어: 라틴어: |
2. 생애
1642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트렌토에서 태어났다. 지역 예수회 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후, 1659년부터 화가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팔마 일 조바네에게서 예술 훈련을 받았으며, 이후 안드레아 사키의 작업장에서 로마의 하이 바로크 기법을 배웠다. 코모와 밀라노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1]
1665년 평수사로서 예수회에 입회하였고,[1] 1668년 밀라노의 산 피데레의 카사 프로페사에 배정되어 프란치스코 보르자를 기리는 축제 장식을 제작하여 호평을 받았다.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예술 훈련을 계속했으며, 초기 그림들은 롬바르드 학파의 영향을 받아 풍부한 색채와 강렬한 명암 대비가 특징이다. 제노바에서 "메르칸티 회중"을 위해 "예수의 생애"를 그릴 때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모데나, 볼로냐, 아레초 등지의 예수회 교회와 건물 장식을 맡았다. 1676년 몬도비에 있는 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교회의 내부 장식은 그의 후기 환상주의 기법을 보여주는 첫 대형 프레스코였다. 1678년 토리노의 SS. 마르티리 예수회 교회의 천장화는 물 침투로 인해 1844년 루이지 바카의 그림으로 대체되었고, 현재는 파편만 남아있다.
1681년 예수회 총장 조반니 파올로 올리바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가서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했으나, 원근법을 활용한 그림으로 벽과 천장 장식의 거장으로 명성을 얻었다.[2] 산 이냐치오 성당의 돔, 앱스, 천장의 프레스코화(1685-1694)는 로마 바로크 양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낮은 천장에 그린 "성 이냐시오의 영광"은 솟아오른 천장이 조각상으로 장식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를 주며,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도 성과를 축하한다. 궁륭에는 구약 성경의 전사들이 그려져 있다.
1702년 빈으로 이주하여[6] 군주, 궁정, 예수회 교회 등에서 프레스코화와 트롱프뢰유 돔을 제작했다. 리히텐슈타인 정원 팰리스 헤라클레스 홀의 천장 프레스코화(1707년)인 헤라클레스의 올림포스 입성은[6]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1709년 빈에서 사망하여[6] 빈 예수회 교회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예수회 입회
1642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트렌토에서 태어났다. 지역 예수회 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했다. 예술적 재능을 보인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17세 때인 1659년부터 화가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팔마 일 조바네에게서 예술 훈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년 후에는 안드레아 사키의 작업장에서 온,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화가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는 포초에게 로마의 하이 바로크 기법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코모와 밀라노로 여행을 떠났다.[1]1665년 12월 25일, 23세의 나이로 평수사로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1] 1668년에는 밀라노의 "산 피데레의 카사 프로페사"에 배정되었는데, 이곳에서 1671년에 성인으로 추대된 프란치스코 보르자를 기리는 축제 장식을 제작하여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예술 훈련을 계속했다. 그의 초기 그림들은 롬바르드 학파의 영향을 보여주는데, 풍부한 색채와 강렬한 명암 대비가 특징이다. 제노바에서 "메르칸티 회중"을 위해 "예수의 생애"를 그릴 때, 그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 2. 예술 활동의 시작과 발전
1665년 12월 25일, 안드레아 포초는 평신도 형제로서 예수회에 입회했다.[1] 1668년, 밀라노의 산 피데레의 카사 프로페사에 배정되었는데, 이곳에서 최근 성인으로 추대된(1671) 프란치스코 보르자를 기리는 그의 축제 장식은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예술 훈련을 계속했다. 그의 초기 그림들은 롬바르드 학파의 영향을 보여주며, 풍부한 색채와 강렬한 명암 대비가 특징이다. 제노바에서 "메르칸티 회중"을 위해 "예수의 생애"를 그릴 때, 그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에게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포초의 예술 활동은 예수회 교단의 예술적 요구와 관련이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많은 예수회 교회가 건축되었지만 그림 장식이 부족했다. 그는 모데나, 볼로냐, 아레초와 같은 예수회 교회와 건물 장식을 위해 예수회에 의해 자주 고용되었다. 1676년, 몬도비에 있는 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교회의 내부를 장식했는데, 여기서 그는 후기 환상주의 기법을 엿볼 수 있다. 가짜 금박, 청동색 조각상, 대리석 기둥, 평평한 천장에 있는 ''트롱프뢰유'' 돔은 건축적 배경에서 단축된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이것은 그의 첫 번째 대형 프레스코였다.
1678년 토리노에서 포초는 SS. 마르티리 예수회 교회의 천장을 그렸다. 프레스코는 물 침투로 인해 점차 악화되어, 1844년 루이지 바카가 그린 새로운 그림으로 대체되었다. 원래 프레스코의 파편만 남아있다.
2. 3. 로마에서의 활동
1681년, 예수회 총장 조반니 파올로 올리바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갔다. 처음에는 성경극을 위한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했으나, 원근법을 활용한 그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곧 벽과 천장 장식의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2]그의 대표작으로는 산 이냐치오 성당의 돔, 앱스, 천장의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1685년부터 1694년 사이에 그려졌다. 이 작품들은 로마 바로크 양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낮은 천장에 그는 "성 이냐시오의 영광"을 숨 막힐 듯한 원근법으로 그렸다. 본당 바닥에 박힌 황동색 원으로 표시된 한 점에서 보면, 솟아오른 천장이 조각상으로 장식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다른 대륙으로의 로마 가톨릭교회 포교에 열심이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도 성과를 축하하는 그림이다. 궁륭에는 구약 성경에서 활약하는 전사들(유딧과 홀로페르네스, 다윗과 골리앗, 야엘과 시스라,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본당의 프레스코화에서는 성부로부터 빛이 성자에게 비치고, 그 빛이 성 이냐시오에게 보내진다. 거기에서 네 갈래의 빛으로 뻗어 나가 네 대륙으로 퍼져 나간다. 포초는 루카 복음의 그리스도의 말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를 그림 속에 그려 설명하고 있다.
당초 계획되었던 돔의 완공이 취소되자, 포초는 착시를 이용한 돔(내부에서 보면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트롱프뢰유 기법으로 그려진 돔은 실감 나는 표현으로 천장이 들려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며,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후진의 그림에는 성 이냐시오의 생애와, 그곳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가 등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알로이시오 곤자가의 유물을 보관한 오른쪽 익랑의 제단도 제작했다. 1681년에는 코시모 3세에게 자화상을 그려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 캔버스 유화 자화상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자세로 오른손은 돔의 트롱프뢰유를 가리키고, 왼손은 세 권의 책 위에 놓여 있다. 이 그림은 1688년에 대공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로마의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교회의 예수회 수련원에 있는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의 방에는 이 성인의 생애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포초는 "화가와 건축가를 위한 원근법"이라는 이론서를 출판했다(2권, 1693년부터 1698년). 이 책은 118개의 삽화가 첨부되었고, 레오폴트 1세에게 헌정되었다. 초기의 원근법 해설서로, 19세기까지 여러 번 간행되었으며,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중국어 등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1695년 포초는 제수 교회의 왼쪽 익랑에 있는 성 이냐시오 예배당의 제단 설계를 위촉받았다. 1701년부터 1702년에는 몬테풀치아노의 제수 교회 설계도 부분적으로 담당했다. 1702년에는 아레초의 산테 플로라 에 루칠라 수도원의 트롱프뢰유 돔을 그렸다.
2. 3. 1. 제수 교회와 산 이냐치오 성당
제수 교회와 성 이냐시오가 살았던 방을 연결하는 복도에 성인의 삶을 묘사한 ''트롱프뢰유'' 건축과 그림을 자코모 보르고뇨네의 기존 그림과 조화시켰다.[3]
그의 걸작은 산 이냐치오 성당의 돔,[3] 앱스, 그리고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의 환상적인 원근법으로, 1685년부터 1694년 사이에 그려졌으며, 로마 바로크의 극적인 개념을 상징한다. 포초는 원근법의 대가였으며, 빛, 색상, 건축적 배경을 환영을 창조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산 이냐치오 성당은 가톨릭 유럽 전역의 후기 바로크 천장 프레스코 장식의 표준을 제시했다.
산 이냐치오 성당은 1642년 헌당 후에도 천장이 비어있는 채로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원래 기증자인 루도비시 가문과의 분쟁으로 인해 계획되었던 돔의 완성이 지연되었다. 포초는 내부에서 볼 때 돔의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평평한 천장에는 숨 막힐 듯한 원근법으로 ''성 이냐시오의 신격화''를 묘사한 알레고리를 그렸다. 지름 17m의 이 그림은, 네이브 바닥에 설치된 금속판으로 표시된 지점에서 바라보는 관찰자가, 실제로는 천장이 평평함에도 불구하고 조각상으로 장식된 높다란 아치형 지붕을 보는 것처럼 보이도록 고안되었다.[4] 이 그림은 다른 대륙에서 로마 가톨릭교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사도적 목표를 기념한다. 반종교개혁은 또한 호전적인 가톨릭교를 장려했다. 예를 들어, 펜덴티브에 일반적인 복음사가나 교리의 학문적 기둥을 배치하는 대신, 포초는 구약의 승리한 전사들을 묘사했다. 즉,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다윗과 골리앗'', ''야엘과 시스라'', 그리고 ''삼손과 블레셋인''이다.

그는 선형 원근법, 빛, 음영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성당의 네이브의 거대한 통 모양 볼트를 이상화된 강당으로 만들었으며, 그 강당에서 성 이냐시오가 열린 천국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1] 빛은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아들에게서 오고, 아들은 그것을 성 이냐시오에게 전달하며, 거기에서 네 개의 대륙으로 이어지는 네 개의 광선으로 뻗어 나간다. 포초는 그가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이냐시오의 "가서 모든 것에 불을 지르라"는 말씀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광선은 예수의 이름을 비춘다.
''트롱프뢰유'' 돔의 건축물은 천장을 지우고 들어 올리는 듯한 현실적인 인상을 주어 실제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기 어렵다. 안드레아 포초는 이 천장과 트롱프뢰유 돔을 폭 17m의 캔버스에 그렸다. 앱스에 있는 그림은 성 이냐시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의 생애의 장면을 묘사한다.
1695년, 그는 세바스티아노 치프리아니와 조반니 바티스타 오리고네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후 제수 교회 좌익 익랑에 있는 성 이냐시오 예배당 제단을 제작하는 영예로운 의뢰를 받았다.[1] 희귀한 대리석과 귀금속으로 지어진 이 웅장한 제단은 성인의 무덤 위에 있으며, 삼위일체를 묘사하고, 네 개의 청금석 기둥(현재는 복제품)이 피에르 르그로가 조각한 성인의 거대한 조각상을 둘러싸고 있다. 이 제단은 피에르 르그로, 베르나르디노 루도비시, 일 로렌초네, 장바티스트 테오동을 포함하여 100명 이상의 조각가와 장인의 공동 작업이었다. 안드레아 포초는 같은 교회의 성 프란체스코 보르자 예배당의 제단도 설계했다.
1697년, 그는 로마의 산타냐치오 성당 후진에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생애를 묘사한 바로크 양식의 제단을 건축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제단들은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와 성 요한 베르크만스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2. 3. 2. 기타 작품 활동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 데 메디치의 요청으로 공작 컬렉션을 위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 그림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으며, 매우 독창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대각선 구도로 그려진 이 그림에서 포초는 오른손 검지로 자신이 그린 환상적인 이젤 그림(아마도 아레초의 바디아 교회에 있는 트롱프뢰유 돔으로 추정)을 가리키고, 왼손은 세 권의 책 위에 올려놓고 있다. 이 책들은 아직 출판되지 않은 원근법에 관한 그의 논문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자화상은 1688년에 대공에게 전달되었다.[5]또한, 포초는 로마의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예수회 수련원에 있는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의 방에 성인의 생애를 묘사한 장면들을 그렸다. 이 외에도 몬테풀치아노, 아레초 등지의 교회에서 프레스코화와 환상적인 돔을 제작했다.
2. 4. 빈에서의 활동과 사망
1694년 안드레아 포초는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안톤 플로리안 공작이자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로마 교황청 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환영 기법을 설명했다. 리히텐슈타인 공작의 추천과 레오폴트 1세의 초청으로 안드레아 포초는 1702년(1703년?) 빈으로 이주했다.[6] 그는 빈에서 군주, 궁정, 요한 아담 폰 리히텐슈타인 공작, 그리고 예수회 교회 등 다양한 종교 단체와 교회를 위해 프레스코화와 트롱프뢰유 돔을 제작했다.빈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현존하는 작품은 리히텐슈타인 정원 팰리스 헤라클레스 홀의 기념비적인 천장 프레스코화(1707년)인 헤라클레스의 올림포스 입성이다.[6] 이 작품은 환영 효과를 통해 건축 회화가 천장의 경계에서 펼쳐지기 시작하고 천장이 올림포스 신들로 가득 찬 천상의 영역으로 열리는 것처럼 보이게 묘사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존경받았다.
그의 빈 제단화 중 일부는 빈 예수회 교회에 현존한다. 그의 제단화와 환영 천장 프레스코화 구성은 빈의 바로크 미술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헝가리,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폴란드에도 많은 추종자를 두었다.
포초는 1709년 빈에서 사망했다.[6] 그는 베네치아의 새로운 예수회 교회를 설계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던 중이었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빈 예수회 교회에 안장되었다.
3. 이론 저술 및 건축 설계
포초는 자신의 예술적 아이디어를 담은 이론서인 ''Perspectiva pictorum et architectorumla''(화가와 건축가를 위한 원근법)을 1693년과 1698년에 2권으로 출판하여 레오폴트 1세 황제에게 헌정했다.[8] 이 책에는 118개의 판화 삽화가 곁들여져 있었으며, 건축 원근법과 무대 세트를 그리는 방법을 설명했다. 이 책은 예술가와 건축가를 위한 초기 원근법 교본 중 하나로, 19세기까지 여러 번 출판되었고, 포초의 예수회와의 관계 덕분에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8]
포초의 저서 ''Perspectiva pictorum et architectorumla''에는 여러 건축 디자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가 1690년 이전에 건축 설계를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디자인들은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S. 아폴리나레 교회를 위한 디자인은 트렌토의 예수회 교회인 산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1700–1702)에 사용되었다. 이 교회의 내부 또한 포초가 디자인했다.
1701년과 1702년 사이에 포초는 산 베르나르도와 몬테풀치아노의 치에사 델 제수를 설계했지만, 치에사 델 제수를 위한 그의 계획은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4. 영향 및 평가
안드레아 포초의 환상적인 프레스코화는 바로크 미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중부 유럽의 바로크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포초의 예술은 예수회의 선교 활동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 1. 한국과의 관계
포초의 저서 "Perspectiva pictorum et architectorum"(Perspectiva pictorum et architectorum|페르스펙티바 픽토룸 엣 아르키텍토룸la)은 예수회와의 관계를 통해 중국어로 번역되었다.[8] 이 책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의 트롱프뢰유 기법은 조선 후기 궁중 회화, 특히 책가도(冊架圖)에 나타나는 다시점 표현 방식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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