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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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4세기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웅변가로,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고 성령론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카파도키아 출신으로, 대 바실리오스와 친구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를 역임했다. 아리우스파와 아폴리나리우스파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했으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채택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신학자'라는 칭호로 불리며, 동방 정교회에서 존경받고, 서방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작으로는 설교, 시, 서간 등이 있으며, 현재 다양한 기독교 교파에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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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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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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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신학자 교회 박사 대교사 카파도키아 교부 에큐메니칼 교사 |
출생 | 329년경 |
출생지 | 아리안주스, 카파도키아, 로마 제국 |
사망일 | 390년 1월 25일 (61세) |
사망지 | 아리안주스, 카파도키아, 로마 제국 |
공경하는 교파 | 동방 정교회 동방 가톨릭 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
주요 성지 | 총대주교 성 조지 대성당 (페네르) |
기념일 | 가톨릭 교회: 로마 보편 전례력: 1월 2일 1960년 로마 보편 전례력: 5월 9일 동방 가톨릭 및 정교회: 1월 25일 (주요 축일) 1월 30일 (삼대 교사) 성공회 교회: 1월 2일 루터교회: 루터교-미주리 시노드: 1월 10일;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6월 14일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변모 전 네 번째 토요일 또는 성탄 전 세 번째 토요일 |
속성 | 주교로서 제의를 입고 오모포리온을 착용하고 복음서 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도상학적으로 그는 흰 턱수염을 가진 대머리로 묘사된다. |
신학 | |
시대 | 교부 시대 |
언어 | 고대 그리스어 |
전통 및 운동 | 니케아 기독교 긍정 신학 성령론 |
주요 관심사 | 해당 없음 |
주요 사상 | 삼위일체 동질성 본질 동질성 신화 위격 |
2. 생애
그레고리오스는 소아시아 카파도키아의 나지안조스 혹은 근방의 아리안조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주교 그레고리오스이고, 어머니는 논나였다. 그의 누나는 고르고니아, 동생은 카이사리오스였다.
젊었을 때 교육을 받기 위해 카파도키아의 케사리아로 갔고 거기서 평생의 친구 대 바실리오스를 만났다. 이후 팔레스타인의 케사리아, 아이깁투스의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학당에서 수사학 교육을 받았다. 아테네에선 바실리오스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와 배교자 율리아누스도 만났다. 356년까지 아테네에서 수학하다 358년에 고향 나지안조스로 돌아와 세례를 받았다. 폰토스에서 바실리오스와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하였고, 아버지의 강제적 권유로 36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직의 부담감으로 몇 개월 동안 집을 떠나있다가 돌아와 노쇠한 아버지의 사목을 도왔다. 친구 바실리오스는 아리우스파를 저지하기 위한 교회정치적 이유로 그레고리오스를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했으나, 교회행정보다 수도생활에 더 관심이 있었던 그레고리오스는 강압적인 임명으로 인해 바실리오스와의 우정에 큰 위기를 맞았다. 이후 아버지가 안식하자, 나지안조스의 주교직을 수행했다.
나지안조스 주교직을 사임하고 수도생활에 전념하려 했지만, 379년에 정통신앙의 버팀목인 바실리오스가 안식하자, 정통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정통을 옹호하며 설교를 했다. 378년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선출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지만, 그곳의 아리우스파, 아폴리나리우스파의 반대에 부딪혔다. 379년 교회 내에서 군중에게 습격당하여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임명은 주교의 이동을 금지한 교회법에 위배되어 후에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취소되었다. 그레고리오스는 이 공의회의 의장을 중도까지 맡았다. 마침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는 정통파였으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로 선출했다.
그의 동료 바실리우스는 수도 영성의 이상 추구의 구체적인 내용을 명확히 했고, 그레고리오스는 많은 저작과 주교로서의 활동을 통해 그 이상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명확히 했다. 그리고 인간의 신화(테오시스) 사상의 이론화와 신의 본질의 불가지성과 신의 업에서 현현하는 신의 빛의 가시성의 이중 구조를 신학 이론으로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48]
정교회에서는 "신학자"라는 칭호로 숭경받는다. 정교회에서 이 칭호를 가진 성인은 다른 두 명뿐이다 (새로운 신학자 시메온을 포함하면 3명). 중세 중반부터, 정교회에서는 대 바실리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금구 이오안)의 세 명을 세 성자로서 합동 축일을 갖게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그레고리오스는 소아시아 카파도키아 나지안조스 근방의 아리안조스에서 태어났다.[10][11] 그의 가족 영지는 나지안조스 인근 아리안주스 마을 외곽의 카르발라에 있었으며, 카파도키아 남서부에 위치해 있었다.[11] 아버지는 그레고리오스 주교,[2] 어머니는 논나였다.[2] 누나는 고르고니아, 동생은 카이사리오스이다.젊은 시절 그레고리오스는 카파도키아의 케사리아에서 교육받았고, 그곳에서 평생의 친구 대 바실리오스를 만났다.[2] 이후 팔레스타인의 케사리아, 아이깁투스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학당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아테네에서는 바실리오스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와 훗날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되는 인물도 만났다.[2] 또한, 아테네에서 저명한 수사학자 히메리우스와 프로에레시우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12] 356년까지 아테네에서 공부한 후 358년에 고향 나지안조스로 돌아와 세례를 받았다.[13]
2. 2. 사제 서품과 주교 임명
361년, 나지안조스로 돌아온 그레고리오스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가 지역 기독교인들을 돌보는 데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2] 젊은 그레고리오스는 수도 생활을 고려하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결정이 사제 봉사와 고독한 삶 사이에서 강요하는 "폭군적인 행위"라고 비난하며 반발했다.[2][14] 며칠 후 집을 떠난 그는 친구 바실을 안네소이에서 만나 함께 고행 생활을 했다.[2] 그러나 바실은 그에게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했고, 그레고리오스는 그 후 1년 동안 그렇게 했다. 나지안조스에 도착한 그레고리오스는 지역 기독교 공동체가 신학적 견해 차이로 분열되어 있고, 그의 아버지가 지역 수도사들로부터 이단으로 고발당한 것을 발견했다.[2] 그레고리오스는 개인적인 외교와 웅변을 통해 분열을 치유하는 데 기여했다.이 시기에 황제 율리아누스는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2] 황제의 기독교 거부에 대응하여 그레고리오스는 362년에서 363년 사이에 ''율리아누스 비판''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사랑과 인내를 통해 율리아누스와 같은 불완전한 통치자들을 기독교가 극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레고리오스가 묘사한 이 과정은 신성화 과정(''테오시스'')의 공적인 발현으로, 영적인 승화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으로 이어진다.[2] 율리아누스는 362년 말, 그레고리오스와 다른 기독교 비평가들을 강력하게 기소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황제는 다음 해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에 사망했다.[2] 황제가 죽자 그레고리오스와 동방 교회는 더 이상 박해의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는데, 새로운 황제 요비아누스는 공언된 기독교인이자 교회의 지지자였기 때문이다.[2]
그레고리오스는 그 후 몇 년 동안 카파도키아 지역을 분열시킬 위협이 있었던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싸웠다. 이러한 긴장된 환경에서 그레고리오스는 친구 바실을 위해 카이사리아(마자카)의 유세비우스 주교에게 중재했다.[2] 두 친구는 그 후, 유능한 아리우스주의 신학자들과 웅변가들의 도착으로 촉발된 카이사리아 교회의 웅변 대결에 참여하면서 긴밀한 형제적 협력의 시기를 맞이했다.[6] 황제 발렌스의 대리인들이 주재한 공개 토론에서 그레고리오스와 바실은 승리했다. 이 성공은 그레고리오스와 바실 모두에게 그들의 미래가 교회의 행정에 있음을 확신시켜 주었다.[2] 오랫동안 주교직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던 바실은 370년에 카파도키아 카이사리아의 교구 주교로 선출되었다.
372년, 그레고리오스는 바실에 의해 사시마의 주교로 서품되었다.[2] 바실은 안티무스 티아나 주교와의 분쟁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 관할구를 만들었다.[2] 그레고리오스의 아버지가 아들이 교회 계급에서 상승하기를 바라는 야망과 친구 바실의 주장은 그레고리오스가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직책을 수락하도록 설득했다. 그레고리오스는 나중에 그의 주교 서품을 그의 고집 센 아버지와 바실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고 언급할 것이다.[2] 그는 새로운 주교직을 "완전히 끔찍하고 작고 초라한 구멍, 주요 도로의 보잘것없는 말 정류장... 물, 초목, 또는 신사의 동반자가 없는... 여기가 나의 사시마 교회였다!"라고 묘사하며 한탄했다.[15] 그는 새로운 교구를 관리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고, 바실에게 오히려 명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불평했다.[2]
2. 3.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379년, 안티오키아 공의회와 그 대주교인 메레티우스는 그레고리오스에게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니케아 정통주의로 그 도시를 개종시키기 위한 신학적 캠페인을 이끌 것을 요청했다.[2] 그레고리오스는 많은 망설임 끝에 동의했다. 그의 사촌 테오도시아는 그에게 별장을 제공했고, 그레고리오스는 즉시 그곳의 많은 부분을 교회로 개조하여 '믿음의 부활을 위한 장소'라는 의미로 아나스타시아라고 명명했다.[2][18] 이 작은 예배당에서 그는 삼위일체의 본질과 신성의 통일성을 설명하는 니케아 교리에 대한 다섯 편의 강력한 설교를 했다.[2]그레고리오스의 설교는 호평을 받았고, 아나스타시아에는 점점 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의 인기를 두려워한 반대 세력은 공격을 결심했다. 379년 부활절 전날, 아리우스파 폭도들이 예배 중 그의 교회에 난입하여 그레고리오스에게 부상을 입히고 다른 주교를 살해했다. 폭도들로부터 벗어난 그레고리오스는 이전의 친구였던 철학자 견유학자 막시무스에게 배신당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베드로와 은밀히 동맹을 맺고 있던 막시무스는 그레고리오스의 지위를 빼앗고 스스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서임하려 했다. 충격을 받은 그레고리오스는 사임하려 했지만, 그에게 충실한 파벌이 그를 머물게 했고 막시무스를 몰아냈다. 이 사건으로 그레고리오스는 당황했고, 제국의 도시의 음모에 대처할 수 없는 시골뜨기 단순자로 비난받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상황은 그레고리오스의 지위가 여전히 공식적이지 않고, 아리우스파 사제들이 여전히 많은 중요한 교회를 점유하고 있어 혼란스러웠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도착은 그레고리오스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아리우스주의를 근절하려는 황제는 데모필루스 주교를 추방했다. 그레고리오스는 이후 사도 바실리카에서 데모필루스를 대신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즉위했다.[2]
2. 4.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은퇴

테오도시우스는 정통파 입장을 지지하며 제국 전체를 더욱 통합하고자 했고, 신앙과 훈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그레고리오스 역시 기독교를 통합하고자 하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81년 봄,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2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했고, 150명의 동방 주교가 참석했다. 의장 주교였던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가 사망한 후, 그레고리오스가 공의회를 이끌도록 선출되었다. 그는 서방과 동방을 화해시키기 위해 파울리누스를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막시무스의 서임을 지지했던 이집트와 마케도니아 주교들은 공의회에 늦게 도착했다. 그들은 그레고리오스가 사시마 교구에서 옮겨온 것이 정당하지 않다며, 그레고리오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수장 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2]
그레고리오스는 육체적으로 지쳐 있었고, 주교들과 황제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고 걱정했다.[2]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며 더 이상의 분열을 감수하기보다는, 그의 직책을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예언자 요나와 같게 하소서! 나는 폭풍의 원인이었지만, 배의 구원을 위해 나를 희생하겠노라. 나를 잡아서 던지소서… 나는 왕위에 올라 기쁘지 않았고, 기꺼이 내려가고자 한다."[20] 그는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공의회에 충격을 주었고, 테오도시우스에게 그의 직무에서 해임해 달라는 극적인 연설을 했다. 황제는 그의 말에 감동하여 박수를 치고 그의 노고를 칭찬하며 그의 사임을 허락했다. 공의회는 그에게 작별 의식과 축하 연설을 위해 한 번 더 나타나 달라고 요청했다. 그레고리오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마지막 연설( 42)을 했고, 그 후 떠났다.[2]
3. 신학 사상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는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신학자였다. 그는 특히 성령의 본성에 관한 신학, 즉 성령론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21]
그는 초기 기독교의 주요 문필가 중 한 명으로, 뛰어난 웅변가였으며, 아마도 당대 최고의 웅변가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2] 그는 신학적, 도덕적, 전기적인 시를 쓰는 다작의 시인이기도 했다. ''그리스어 선집'' 제8권에는 그의 경구 254편이 수록되어 있다.
3. 1. 삼위일체론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는 "하나를 생각하는 즉시로 셋의 광채로 둘러싸이며, 셋을 분별하자마자 즉각적으로 하나로 되돌아 간다."라며 삼위일체 신학에 대해 설명했다.[49] 그는 '나의 삼위일체'를 성부, 성자, 성령을 일컫는다고 말하며, 이 세상의 어떠한 비유로도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그레고리오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채택했다. 이를 통해 아리우스파, 네스토리우스파, 가현설, 시벨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스주의, 호모이우시오스주의 등의 이단을 규정하고 배척했다.[50]
그레고리오는 삼위일체 교리, 특히 성령론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21] 그는 성령과 신격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발현'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성령은 참으로 영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오지만 아들의 방식은 아니며, 이는 생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발현''에 의한 것이니, 명확성을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22] 비록 그레고리오스가 이 개념을 완전히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발현'은 이후 성령에 대한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23]
그는 예수가 사람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이며, 인간 본성을 취했을 때 신성한 속성을 잃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 영혼을 포함한 완전한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령의 영원성을 선포하며, 구약 시대에는 성령의 행동이 다소 숨겨져 있었지만, 예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더욱 분명해졌다고 말했다.[24]
네오 아리우스파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지 않다"고 믿었고, 세미 아리우스파는 아들이 아버지와 homoiousiosgrc, 즉 "유사하다"고 주장한 반면, 그레고리오스와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니케아 교리를 고수했다.[25]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단일 신격으로 연합된 세 위격, 즉 위격grc의 틀을 발전시켰다. 또한 예수가 아버지의 이콘grc임을 설명하고, 모든 기독교인이 "육화하신 아들을 신성한 모델로 모방하여" 하나님과 동화될 수 있다는 신화grc 개념을 설명했다.[2]
그레고리오스의 일부 신학 저술은 그가 아포카타스타시스, 즉 만물 회복 교리를 지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6] 필립 샤프와 J. W. 핸슨은 그레고리오스의 신학을 만인 구원론적이라고 묘사했으며,[27] 존 색스도 그레고리오스가 아포카타스타시스에 대한 "경향"을 가졌다고 말했다.[28] 그러나 그레고리오스가 이 교리를 실제로 고수했는지는 불분명하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29]
3. 2. 기타 신학 사상
그레고리오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며 성령론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성령과 신격 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발현'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22] "성령은 참으로 영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오지만 아들의 방식은 아니며, 이는 생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발현''에 의한 것이니, 명확성을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22] 비록 그레고리오스가 이 개념을 완전히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발현이라는 아이디어는 이후 성령에 대한 대부분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23]그는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을 때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게 된 것이 아니며, 인간 본성을 취하셨을 때 그분의 신성한 속성을 잃지도 않으셨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의 영혼을 포함하여 완전한 인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령의 영원성을 선포하며, 성령의 행동은 구약 시대에는 다소 숨겨져 있었지만, 예수의 승천과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 이후에는 훨씬 더 분명해졌다고 말했다.[24]
아들이 아버지와 "같지 않다"는 네오 아리우스파의 믿음과, 아들이 아버지와 homoiousios|호모이우시오스|유사하다grc는 세미 아리우스파의 주장에 반하여, 그레고리오스와 그의 동료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니케아 교리를 고수했다.[25]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에게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단일 신격으로 연합된 세 위격, 즉 위격|히포스타시스grc의 틀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예수가 아버지의 이콘|에이콘grc임을 설명했고, 모든 기독교인이 "육화하신 아들을 신성한 모델로 모방하여" 하나님과 동화될 수 있다는 믿음인 신화|테오시스grc의 개념을 설명했다.[2]
그레고리오스의 일부 신학 저술은 그의 친구 니사의 그레고리오처럼, 그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천국과 조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인 아포카타스타시스, 즉 만물 회복 교리의 어떤 형태를 지지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26] 이는 필립 샤프와 19세기 후반의 기독교 만인 구원론자인 J. W. 핸슨으로 하여금 그레고리오스의 신학을 만인 구원론적이라고 묘사하게 했다.[27] 그러나 그레고리오스가 아포카타스타시스 교리를 고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29]
4. 저작
- Περὶ συντάξεως|페리 신탁세오스grc (45편)
- * 오기노 히로유키 역 Περὶ θεολογίας|페리 테올로기아스grc (5편) - 헤이본샤 1992년 (제3-5강화 수록)[1]
- Ἔπη|에페grc (교리시, 찬가, 애가, 격언시, 약 400편)
- * 구쓰카케 요시히코 역 Γρηγορίου τοῦ Ναζιανζηνοῦ ἐπιγράμματα|그리고리우 투 나지안제누 에피그람마타grc - 교토 대학 학술 출판회 서양 고전 총서 2016년 (후세의 시선집에 흡수된 형태로 전해짐)[2]
- Ἐπιστολαί|에피스톨라이grc (249 서간)
- * 고다카 다케시 역 Πρὸς Κληδόνιον ἐπιστολὴ πρώτη|프로스 클레도니온 에피스톨레 프로테grc - 헤이본샤 1992년[3]
5. 유산과 영향
그레고리오스의 조카 니코불로스는 그의 문학 유언 집행인으로 일했으며, 그의 많은 저작물을 보존하고 편집했다. 사촌인 율랄리오스는 391년에 그레고리오스의 더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출판했다.[6] 400년까지 루피니우스는 그의 웅변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오스의 작품들이 제국 전역에 유통되면서 신학적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웅변은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되었다. 451년까지 그는 칼케돈 공의회에서 ''신학자''로 지정되었는데,[6] 이 칭호는 사도 요한[2]과 새로운 신학자 시므온 외에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동방 정교회 신학자들에게 널리 인용되고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기여는 서방 교회에서도 영향력이 있으며 자주 인용된다.[30] 파울 틸리히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결정적인 공식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31] 또한, 콥트 교회에서 사용되는 신학자 성 그레고리오의 전례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2]
6. 기념
그가 죽은 후, 그레고리오는 나지안조스에 묻혔다. 그의 유해는 신체와 의복의 일부로 구성되었으며, 95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사도 교회로 이관되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해의 일부가 로마로 옮겨졌다.[33]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유해들을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유해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로 반환했으며, 바티칸은 두 사람의 유해 중 작은 부분을 보관했다. 현재 이 유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의 파나르에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33]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는 기독교 전반에서 다양한 날짜에 기념된다.
교파 | 기념일 |
---|---|
로마 가톨릭교회, 영국 성공회[1][36] | 1월 2일 |
미주리 시노드 루터교회[37] | 1월 10일 (대 바실리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카파도키아 교부들)와 함께) |
동방 정교회, 동방 가톨릭 교회[38][39] | 1월 19일 (유해 이관 기념),[40] 1월 25일 (주요 축일), 1월 30일 (세 위대한 교부들의 축일,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와 함께) |
성공회[41] | 5월 9일 |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 6월 14일 (대 바실리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42] | 성십자가 발견 축일 전 토요일 (10월 26일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 11명의 다른 교회 박사들과 함께), 예수 변모 축일의 네 번째 일요일 전 토요일 또는 예수 탄생 축일 후 셋째 일요일 전 토요일 (성모 승천 축일 기간에 따라)[43] |
참조
[1]
Britannica
Saint Gregory of Nazianzus
[2]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Church of England
2020-01-02
[3]
웹사이트
Commemoration of St. Gregory the Theologian
https://web.archive.[...]
2021-07-31
[4]
간행물
Liturgy of the Hours
[5]
웹사이트
Ορθόδοξος Συναξαριστής :: Άγιος Γρηγόριος ο Θεολόγος
http://www.saint.gr/[...]
2016-01-25
[6]
서적
Saint Gregory of Nazianzus: An Intellectual Biography
Crestwood,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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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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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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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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