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틀랸디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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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스틀랸디야 현은 1561년부터 스웨덴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721년 니스타트 조약으로 러시아에 양도되어 러시아 제국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1719년 레발 현으로 시작하여 1796년 에스토니아 현으로 개편되었으며, 1816년 러시아의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1850년대부터 에스토니아 민족 부흥 운동이 시작되어 문화와 정체성이 강화되었고, 1880년대에는 러시아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에스토니아의 독립 열망이 커졌고, 1917년에는 에스토니아 자치현이 설립되었다. 1918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선언했으나,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897년 기준 4개의 군으로 구성되었으며, 탈린(레발)을 비롯한 주요 도시가 있었다. 1897년 인구는 412,716명이었으며, 에스토니아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루터교가 다수를 차지했다. 발트해 연안에 위치하며, 핀란드만과 접해 있었고, 저지대와 고원 지형을 이루었다.
예스틀랸디야현 지역은 16세기 중반 리보니아 전쟁 이후 스웨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61년 현지 귀족들이 스웨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스웨덴령 에스토니아가 성립되었고, 이는 약 160년간 지속되었다.
발트해 연안 현 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했으며, 핀란드만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발트해, 북쪽으로는 핀란드만, 동쪽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현, 남쪽으로는 리보니아 현 및 페이푸스 호와 접했다. 현의 가장 서쪽 지점은 히우마섬의 칼라나 곶이었고, 동쪽으로는 나르바강이 있는 나르바 시 부근이었다. 북쪽 끝은 바인데로의 스텐스케르 곶이었으며, 남쪽 끝은 페르누만 해역의 쾨르크사르였다. 육상 경계 길이는 서쪽으로 297 베르스타 (약 317km), 북쪽으로 469 베르스타 (약 500km), 동쪽으로는 네바강을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현과 75 베르스타 (약 80km), 남쪽으로는 페이푸스 호 및 리보니아 현과 371 베르스타 (약 396km)에 달했다. 비에르랜드 군과 도르파트 군 사이의 현 경계는 20,377 패덤 (약 37.3km)이었고, 비에르랜드와 펠린 군 사이는 18,669.3 패덤 (약 34.1km)이었다.
[1]
웹사이트
The Baltic States from 1914 to 1923 By LtCol Andrew Parrott
http://www.bdcol.ee/[...]
2009-03-19
2. 역사
18세기 초 대북방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승리하면서 에스토니아 지역은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다. 1710년 러시아군이 점령한 후, 1721년 니스타트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초기에는 탈린의 당시 명칭을 딴 레발 현으로 불렸으나(1719년), 1796년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해 예스틀랸디야현(에스토니아 현)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러시아 제국 통치 하에서 발트 독일인 귀족들의 특권은 상당 기간 유지되었으며, 농노제는 1816년에 폐지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에스토니아 민족 운동이 일어나 문화적, 정치적 자각이 높아졌으나, 19세기 말에는 제정 러시아의 러시아화 정책으로 인해 민족 운동이 억압받기도 했다. 20세기 초 1905년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에스토니아의 자치 요구는 더욱 거세졌고, 결국 1918년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2. 1. 스웨덴 통치 시기 (1561년 ~ 1721년)
1561년부터 에스토니아 지역은 스웨덴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는 테라 마리아나의 북부 지역이 스웨덴에 병합된 결과였다. 1558년 러시아가 리보니아를 침공하여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이 지역의 귀족들은 스웨덴 국왕 에릭 1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보호를 요청했다. 전쟁 결과, 1583년 플루사 조약이 체결되었고, 러시아는 핀란드만 남부 해안을 따라 위치한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과 잉그리아를 스웨덴에 공식적으로 할양했다.
그러나 1700년, 스웨덴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는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1세는 다른 동맹국들과 함께 스웨덴을 침공하여 대북방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기에는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게 패배하기도 했지만, 러시아는 결국 전세를 뒤집었다. 1710년, 러시아군은 스웨덴령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로 진격하여 이 지역들을 점령하고 러시아 영토로 병합했다.
전쟁이 끝난 후 1721년에 체결된 니스타트 조약을 통해 스웨덴은 에스토니아, 리보니아를 포함한 과거 스웨덴 지배령에 대한 모든 권리를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양도했다. 이 대가로 러시아는 스웨덴에 200만 에핌키(130만러시아 루블)를 지불했다. 이로써 에스토니아 지역에 대한 스웨덴의 통치는 막을 내리고 러시아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2. 2. 러시아 제국 통치 초기 (1721년 ~ 1850년대)
대북방 전쟁에서 스웨덴 제국에 승리한 러시아 제국은 1721년 니스타트 조약을 통해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 발트해 연안 영토를 스웨덴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양도받았다. 스웨덴은 이 영토들을 넘겨주는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200만 에핌키(130만 루블)를 보상받았다. 이 지역은 1561년부터 스웨덴의 지배 하에 있었으나, 표트르 1세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1701년 전쟁을 시작했고, 초기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국 1710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점령하여 러시아에 병합했다.
러시아 통치 초기, 이 지역은 탈린의 당시 명칭인 레발을 따서 레발 현으로 불렸다. 레발 현은 1719년 5월 29일 표트르 대제의 칙령에 의해 스웨덴으로부터 획득한 영토와 리가 현에 설립되었다. 1783년에는 레발 총독부가 레발 현에서 형성되었고, 1796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에서 분리된 나르바 군(uyezd)과 합쳐져 최종적으로 예스틀랸디야현(에스토니아 현)이 되었다.
스웨덴 통치 시기에는 농민들에게 비교적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러시아 제국의 지배 하에서는 더욱 엄격한 규제가 적용되었다. 특히 러시아의 농노제는 이 지역에서도 시행되어 1816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에스토니아 현은 발트해 연안 현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으며, 서쪽으로는 발트해, 북쪽으로는 핀란드만, 동쪽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현, 남쪽으로는 리보니아 현 및 페이푸스 호와 접했다. 현의 총면적은 약 20246km2였으며, 이 중 본토가 18539km2, 섬이 1175km2, 페이푸스 호의 일부가 533km2를 차지했다.
지형적으로는 동유럽 평원에 속했으며, 고지대와 저지대가 섞여 있었다. 북부에는 석회암 고원이 북에스토니아 클린트를 형성했고, 판디베레 고지에는 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에무매기가 있었다. 서쪽으로는 서에스토니아 저지대와 서에스토니아 군도가 펼쳐져 있었다. 현 내에는 약 80개의 섬이 있었으며, 가장 큰 섬은 히우마섬(당시 다고섬)으로 면적은 989km2였다. 다른 주요 섬으로는 보름시, 카사리, 파크리 제도, 나이싸르 등이 있었다. 지하에는 쿠케르사이트 오일 셰일과 인회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2. 3. 에스토니아 민족 부흥기 (1850년대 ~ 1880년대)
알렉산드르 2세 통치 초기는 에스토니아 고유의 에스토니아 문화가 형성되고 민족 운동이 시작된 에스토니아 민족 부흥 시대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에스토니아가 발트해 지역 정치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농업 개혁, 교육의 확산, 외부 세계와의 교류 증가, 개혁적인 분위기는 민족 부흥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1860년부터 에스토니아 민족 운동은 성장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더욱 활발해졌다. 비록 많은 에스토니아인들이 여전히 독일이나 러시아 문화에 동화되기도 했지만, 에스토니아어를 사용하는 에스토니아어 알렉산더 학교, 에스토니아 문학 협회, 에스토니아 노래 축제 등을 통해 에스토니아 문화를 장려하려는 전국적인 노력이 나타났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인접한 리보니아 현 출신의 칼 로베르트 야콥손이 있다. 그는 당시 에스토니아 지역을 지배하던 발트 독일인에 맞서고, 루터교 교권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야콥손은 러시아 제국 내 다른 지역에 이미 도입된 젬스트보(지방 자치 의회)를 에스토니아에도 도입할 것을 주장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1881년 6월, 17개의 에스토니아 협회는 알렉산드르 3세에게 독일인과 에스토니아인에게 동등한 대표성을 부여하는 젬스트보 도입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 1880년대 말에는 청원서의 10개 요구 사항 중 4개가 받아들여져 시행되었다.
문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시인 리디아 코이둘라는 에스토니아 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녀의 대표작인 ''에마요기 나이팅게일''(Emajõe ööbiket)을 1867년에 발표했다. 프리드리히 라인홀트 크로이츠발트는 에스토니아 민족 서사시로 평가받는 ''칼레비포에그''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동명의 영웅이 겪는 신화적인 모험을 다루며, 지옥 문에 묶인 채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코이둘라와 크로이츠발트 외에도 미헬 베스케, 아도 라인발트, 프리드리히 쿨바르스 등이 활동했다. 이 시대의 많은 문학 작품들은 농촌 사람들의 현실을 반영하고 지배 계층을 풍자하는 경향을 보였다. 1860년부터 1900년까지 에스토니아어로 된 책과 소책자 출판량은 55권에서 312권으로 약 6배 증가하며 급증했다.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0세 이상 에스토니아인의 문해율은 96.9%에 달해, 북부 발트해 지역은 러시아 제국 내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2. 4. 러시아화 정책 (1880년대 ~ 1905년)
1885년,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3세 황제는 세르게이 샤코프스코이를 에스토니아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이전 황제의 개혁이 러시아 문화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으며, 이는 에스토니아에서 본격적인 러시아화 정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1877년, 러시아의 1870년 도시 개혁이 발트 지역에도 적용되었다. 이 새로운 법은 25세 이상의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는데, 납부하는 도시 세금에 따라 세 개의 그룹(쿠리아)으로 나누었다. 이는 중세 신분 제도를 대체하는 것으로, 이전까지 에스토니아인들은 시 정부 참여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었다. 새로운 제도 하에서 대부분의 에스토니아인들은 세 번째 그룹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는 에스토니아 부르주아 계층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892년에는 재산 가치에 따라 선거권을 결정하는 도시법이 발트 지방에 시행되었는데, 이는 에스토니아인들이 발트 독일인의 지배를 극복할 가능성을 높이고, 부르주아 계층에게는 모든 유권자를 동등한 위치에 놓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조치였다.
1888년부터 1889년 사이에는 경찰 시스템의 러시아화가 진행되었다. 발트 독일인들은 농촌 지역에서 경찰 권력을 상실했지만, 자신들의 영지 내에서는 권력을 유지했다. 군 및 도시 수준의 경찰 시스템은 재조직되어 내무부 장관의 관할 아래 놓였고, 모든 고위 경찰관은 러시아에서 임명되었다. 새로 부임한 러시아 장교들은 에스토니아 지역 문제에 무관심했지만, 에스토니아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발트 독일인들보다는 더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발트 법전 자체는 변경되지 않았지만, 사법 시스템 역시 러시아화되었다. 농민들은 자체적인 읍 법원을 가졌고, 상급 법원에 항소할 수 있었다. 1864년 러시아의 사법 제도 개혁이 도입되면서 이전보다 공정한 재판이 가능해졌다. 평화 재판소의 판결은 평화 재판소 회의에, 순회 법원의 판결은 법정 회의에 항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요 문제는 상급 법원의 소송 절차가 전적으로 러시아어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은 통역사나 변호사를 고용해야 했으며, 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에스토니아인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러시아화 정책은 교육 분야에도 적용되었다. 모든 루터교 농촌 초등학교는 교육부의 관할 아래 놓였고, 국립 학교 운영을 감독하기 위한 이사 및 검사 직책이 신설되었다. 1887년부터는 학교 3학년부터, 1892년부터는 1학년부터 러시아어를 교육 언어로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이러한 정책의 초기 결과는 혼란스러웠다. 발트 독일인들이 항의의 표시로 지원을 철회하면서 많은 학교가 문을 닫았고, 러시아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도 부족했다. 이로 인해 주 내 학생 수는 1886년 25,646명에서 1892년 20,565명으로 감소했다.
종교 분야에서도 러시아화가 추진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이미 1840년대부터 발트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이는 북방 십자군 이후 지역 사회의 주류였던 루터교와의 갈등을 유발했다. 1883년 비에크 군에서는 강한 반(反)독일 감정에 힘입어 3,400명의 에스토니아 농민들이 정교회로 개종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총독 샤코프스코이는 재임 기간 동안 정교회 확산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독일계가 통제하는 개신교(루터교) 아래 있던 발트 지역 원주민들 사이에서 정신적 불만을 야기하면서 정교회를 전파하려 했다. 1886년, 샤코프스코이는 성 시노드(종교 회의) 검찰관인 콘스탄틴 포베도노세프에게 정교회가 에스토니아인들을 "위대한 러시아 가족"으로 통합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1885년 알렉산드르 3세는 루터교-정교회 혼인 가정의 자녀는 반드시 정교회식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며, 과거 루터교로 개종했던 사람들도 다시 정교회 신자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정책을 재확인했다. 이는 루터교에 대한 명백한 탄압이었다.
행정 분야에서는 1885년부터 러시아어 사용이 점진적으로 도입되었고, 1889년까지 시 정부, 상급 법원, 모든 행정 기관 간의 의사소통에서 러시아어가 유일한 공식 언어가 되었다. 에스토니아어의 동등한 권리를 추구하고 발트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중시했던 에스토니아 지식인들에게 이러한 언어 정책은 큰 혼란과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독일에서 교육받은 이들 중 일부는 스스로 러시아어를 다시 배워야 했지만, 이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이러한 전방위적인 러시아화 정책은 에스토니아인들의 민족 의식을 자극하고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이 되었다.
2. 5. 1905년 혁명과 그 이후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해방 운동이 일어나면서 에스토니아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새로운 세대의 에스토니아 지식인들이 등장했다. 특히 하층 계급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되는 등 사회 및 정치적 사고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탈러시아화 시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온건한 정치 노선을 추구한 얀 퇀니손과 레발(현 탈린)에서 ''테아타자'' 신문의 편집장을 맡았던 콘스탄틴 패츠가 있다.
1905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학살 사건은 발트 지역, 특히 에스토니아 농촌 지역까지 혁명의 불씨를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은 에스토니아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에 발맞춰 8월에는 에스토니아 사회 민주 노동자당이 결성되었다. 1905년 1월, 레발, 나르바, 페르누 등 주요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농촌 지역에서는 에스토니아인들이 발트 독일인 지주들의 권력 상징으로 여겨졌던 영주 저택 120여 채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레발에서는 평화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10월 16일까지는 비교적 평온한 상황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날 러시아군은 시장 광장에서 열린 평화 시위를 향해 발포하는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는 훗날 '탈린 피의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05년 11월, 얀 퇀니손은 에스토니아 진보 인민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발트 독일인이 주도하는 발트 헌법당과 함께 당시 예스틀랸디야현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정당이었다. 11월 27일부터 29일까지 퇀니손과 그의 온건파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전 에스토니아 의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부의장 선출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의회는 퇀니손 중심의 온건파(''Bürgermusse'')와 패츠 등이 이끈 급진파(''Aula'')로 분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 러시아화 정책의 철폐를 요구했으며, 온건파는 더 나아가 에스토니아 지역과 리보니아현 북부를 통합하여 자치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12월 초,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혁명적 과격 행위"로 규정하고 무력 대응에 나섰다. 12월 10일 레발과 하리엔 현(Harrien)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러시아군과 현지 발트 독일인들로 구성된 민병대(Selbstschutz|젤프스트슈츠de)는 1905년 혁명 참가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을 샅샅이 뒤졌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지역 위원회 인사들과 다수의 에스토니아 지식인들이 체포되었다. 예스틀랸디야현에서만 300명이 처형당했고, 600명이 신체적 처벌을 받았으며, 500명 이상이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되었다. 급진파 지도자였던 콘스탄틴 패츠와 얀 테에만트는 체포를 피해 핀란드 대공국으로 망명한 뒤 서유럽으로 피신했다.
2. 6. 제1차 세계 대전과 독립 (1914년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현 내에서 엇갈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에스토니아인들 사이에서는 역사적인 적인 제국 독일과의 싸움에 대한 열의가 있었지만, 발트 독일인들에게는 같은 민족과 싸운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발트 독일인들이 독일 제국과 협력할 가능성을 의심하며 독일 학교를 폐쇄하고 공공장소에서 독일어 사용을 금지했다.[1] 에스토니아어 사용 역시 제한되었다. 에스토니아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10만 명의 남성이 러시아 제국군에 동원되었으나, 전쟁 사상자 규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고 신뢰할 만한 자료도 부족하다.[2][3] 에스토니아인들은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 같은 적과 싸우면서, 독일어권 문화를 대표했던 발트 독일인에 대한 반감을 쉽게 표출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발트 독일 지도부 역시 러시아 제국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3]
러시아 제국이 붕괴될 무렵, 에스토니아인들은 에스토니아어를 사용하는 지역, 특히 에스토니아 전체와 북부 리보니아현의 통합을 강하게 원했다.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동부 전선에서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얀 퇼니손을 비롯한 온건파 정치인들은 이 시기를 기회로 삼아 임시 정부에 북부 발트 지역의 개편을 요구하는 로비를 벌였다.[4] 페트로그라드에서 4만 명의 에스토니아인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열린 후, 임시 정부는 4월 12일 북부 발트 지역의 자치 정부 개편에 동의했다. 이 법령은 에스토니아현과 리보니아현 북부의 군(郡)들(도르파트, 펠린, 외젤, 페르나우, 베로, 그리고 발크 일부)을 통합하여, 칼 로버트 야콥슨이 주창했던 "에스토니아"라는 이름의 자치 정치체를 만들었다. 또한 이 법령은 지방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 젬스트보를 설립했다.[5] 발트 독일인이 장악했던 기존 지방 의회와 제국 지방 행정 기관은 해산되었다.[5][4]
4월, 임시 정부는 레발 시장 얀 포스카를 초대 행정위원으로 임명했다. 5월에는 마아파에브(Maapäev)로 알려진 지방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를 통해 여러 정당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며, 농업 동맹과 노동당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6] 그러나 1917년의 지방 선거 결과는 정치 세력 간의 상당한 분열을 보여주었고, 정당 그룹의 구성은 불안정했다. 주로 온건파가 작은 도시 지역에서 우세했고, 좌파는 더 큰 산업 도시에서 강세를 보였다. 초기 에스토니아에서 등장한 소비에트는 주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었으며, 이들은 주요 도시와 군사 주둔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4월에는 에스토니아 민족 군사 부대 창설이 원칙적으로 허가되었지만, 전쟁 장관 알렉산더 케렌스키는 소비에트의 압력으로 인해 단일 연대 설립으로 제한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에스토니아 연대는 7월 말까지 8,000명으로 성장하여 원래 계획보다 두 배나 커졌고, 임시 정부는 9월에 두 번째 연대 창설을 승인했다.[8]
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빅토르 킹기세프가 이끄는 에스토니아 군사 혁명 위원회는 임시 정부 행정위원으로부터 권력을 장악했다.[6] 그러나 볼셰비키는 기존 정부 관료들을 대체할 인력이 부족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기존 관료들은 볼셰비키에 협력하기를 거부하며 파업을 벌였다.[9] 에스토니아 볼셰비키는 1918년 1월 21~22일과 2월 3~4일에 치러질 예정이었던 에스토니아 제헌 의회 선거를 취소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크게 잃었다.[10] 독일군이 남부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로 진격해오고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러시아로 도주하자, 에스토니아 지방 의회(마아파에브)는 1918년 2월 24일 "역사적, 민족적 경계" 내에서 에스토니아 "독립 민주 공화국"을 선언했다. 콘스탄틴 패츠가 새로운 임시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11][12] 그러나 이 선언은 상징적인 의미에 그쳤고, 바로 다음 날 독일군이 레발(탈린)에 진입하여 에스토니아를 점령했다.
3. 행정 구역
1897년 당시 에스토니아 현은 4개의 군(уѣзды, Kreise|크라이제deu)으로 구성되었다.[6] 각 군의 정보는 아래와 같다.군 행정 중심지 면적 인구
(1897년 인구 조사)[7]독일어 이름 러시아어 이름 1897[8] 비르랜드 Везенбергскій/Вирляндскій 베젠베르크 5,890 7143.2km2 120,230 예르벤 Вейсенштейнскій/Ервенскій 바이센슈타인 2,507 2871.2km2 52,673 비크 Гапсальскій/Викскій 합살 3,212 4697.9km2 82,077 하리엔 Ревельскій/Гарріенскій 레발 64,572 5739.5km2 157,736
4. 인구
1881년에 실시된 에스토니아 현의 첫 번째 일반 인구 조사는 376,337명으로, 남성 184,323명과 여성 192,014명으로 구성되었다. 1887년까지 인구는 393,983명으로 6년 동안 17,646명이 증가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유일하게 실시된 전국 인구 조사는 1897년 인구 조사로, 1897년 1월 28일(구력)/2월 9일(신력)에 실시되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에스토니아 현의 인구는 412,716명(남성 202,409명, 여성 210,307명)이었다. 인구의 대다수는 에스토니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으며, 상당수의 러시아어 및 독일어 사용 소수 민족이 거주했다.[9]
현의 도시 인구는 77,081명으로 전체 인구의 18.68%를 차지했다. 주요 도시로는 레발(64,572명), 베젠베르크(5,890명), 합살(3,212명), 바이센슈타인(2,507명)이 있었으며, 이들 도시에서도 에스토니아어 사용자가 다수를 이루었다.[9]언어 남성 여성 모국어 화자 비율 (%) 에스토니아어 176,972 188,987 365,959 88.67 대러시아어 12,441 7,998 20,439 4.95 독일어 6,991 9,046 16,037 3.89 스웨덴어 2,725 3,043 5,768 1.40 유대어 852 417 1,261 0.31 폴란드어 921 316 1,237 0.30 라트비아어 351 121 472 0.11 핀란드어 271 91 362 0.09 백러시아어 215 15 230 0.06 소러시아어 210 20 230 0.06 노르웨이어 131 29 160 0.04 기타 329 224 553 0.13 합계 202,409 210,307 412,716 100.00
5. 지리
지형적으로 현은 동유럽 평원에 위치했으며, 고지대와 고원 구조가 저지대와 계곡 구조와 혼합된 형태를 보였다. 석회암 고원의 북쪽 부분은 북에스토니아 클린트를 형성했다. 가장 높은 지역은 판디베레 고지와 요흐비 고지였으며, 판디베레 고지에는 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에무매기가 위치했다. 서쪽 지역은 넓고 평탄하여 서에스토니아 저지대와 문순드 군도를 이루었다. 외젤섬과 문섬의 절벽, 그리고 서부 대륙 지역의 절벽은 실루리아 클린트를 형성했다. 지하 기저의 가장 낮은 부분에는 결정암이 형성되었으며, 북동부 지역에서는 지표면 아래 60m에서 70m 사이에 결정암이 존재했다. 지표면 아래에는 웨젠베르크 매장지를 중심으로 발트 오일 셰일 분지 내에 다량의 인회석과 쿠케르사이트 오일 셰일이 매장되어 있었다.
서쪽에는 리보니아 현과 공유하는 문순드 군도가 위치했다. 현에는 약 80개의 섬이 있었으며, 이 중 다고섬(현재 히우마섬)이 면적 989km2로 가장 컸다. 군도의 다른 주요 섬으로는 보름시, 카사르, 그로스 파크리 및 클라인 파크리, 그리고 나르겐이 있었다.
에스토니아 현의 총 면적은 17,791.7 제곱 베르스타 (약 20250km2)였다. 이 중 본토 면적은 16,290.5 제곱 베르스타 (약 18540km2), 섬 면적은 1,032.7 제곱 베르스타 (약 1175km2)였으며, 현에 속한 페이푸스 호의 면적은 468.5 제곱 베르스타 (약 533km2)였다.
현은 북부 에스토니아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략적으로 현재의 하르주, 래네비루, 이다비루, 라플라, 얘르바, 래네, 히유 및 페르누의 일부에 해당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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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Russian Gazetteer and Guide
Russian Outlook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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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ev: A Portrait, 1800–1917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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