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디츠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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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제프 디츠겐은 19세기 독일의 노동자이자 독학으로 철학을 공부한 사회주의자이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하며 변증법적 유물론을 발전시켰으며,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사이의 중재 역할을 했다. 디츠겐은 미국과 러시아에서 제혁소 공장장으로 일하며 저술 활동을 병행했고, 대표 저서로는 『인간두뇌노동의 본성』이 있다. 그의 사상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안톤 판네쿠크 등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동독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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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디츠겐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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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제프 디츠겐 |
원어 이름 | Joseph Dietzgen |
출생일 | 1828년 12월 9일 |
출생지 | 블랑켄베르크, 독일 |
사망일 | 1888년 4월 15일 |
사망지 | 시카고,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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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 |
지역 | 서양 철학 |
시대 | 19세기 철학 |
학파 | 대륙 철학 마르크스주의 |
주요 관심사 | 인식론 논리학 변증법 |
영향 | 마르크스 포이어바흐 헤겔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칸트 |
영향을 준 인물 | 마르크스 카우츠키 레닌 파네쿠크 |
주요 사상 | 변증법적 유물론 |
2. 생애
요제프 디츠겐은 프로이센 왕국 라인도 브란켄베르크에서 태어난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이자 언론인이다.[14] 그는 무두장이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철학, 경제학 등을 공부했으며, 노동자 계급 출신의 독학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1848년 독일 혁명에 참여하며 카를 마르크스 등 당대의 주요 혁명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미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생활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디츠겐은 특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체류 중 자신의 대표 저작인 『인간두뇌노동의 본성』(Die Natur der menschlichen Kopfarbeitde)을 집필하여 1869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카를 마르크스로부터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독자적인 기여로 인정받았으며, 이후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 제2판 서문에서 디츠겐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제1인터내셔널 시기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의 이념적 갈등을 중재하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체포되는 등 정치적 탄압을 겪기도 했다.[18][4][14] 말년에는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과 시카고에서 미국 사회당 기관지 및 독일어 신문 『시카고어 아르바이터차이퉁』의 주필 등으로 활동하다가 1888년 시카고에서 사망했다.[20][7][14]
2. 1. 초기 생애와 혁명 참여
프로이센 왕국 라인도 브란켄베르크에서 무두장이 요한 고트프리트 아노 디츠겐(1794년-1887년)과 아나 마르가레타 뤼베라트(1808년-1881년) 부부의 5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무두질 공으로 일했으며, 노동자 출신으로서 문학, 경제학, 철학 등을 독학으로 연구했다.[14] 1845년부터 1849년 사이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익히고 프랑스 경제학자들의 저작을 연구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점차 기울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을 접한 것을 계기로 명확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14]1848년 독일 혁명 당시에는 유명한 48년 세대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혁명에 참여했고, 이때 카를 마르크스를 처음 만났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1849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51년까지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무두질공, 페인트공, 교사 등 다양한 노동에 종사하며 각지를 돌아다녔고, 영어를 습득했다.[14] 특히 미국 남부를 여행하며 노예주에서 자행되던 흑인 린치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1851년 독일로 귀국한 디츠겐은 이듬해 마르크스가 주도한 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했다. 1853년에는 코르둘라 핀케(Cordula Finke)와 결혼하고, 빈터샤이트(오늘날의 루피히테로트)에 제혁소를 세워 무두질 사업을 시작했다. 1859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861년까지 머물렀으며,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제혁소를 추가로 세웠다.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북군에 동조하며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1864년부터 1868년(또는 1863년부터 1869년[14])까지 아들 오이겐과 함께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국영 제혁소의 공장장(또는 감독)으로 일했다.[15][14] 그는 러시아의 제혁 기술 개선에 기여했으며,[1] 이 시기에 자신의 첫 주요 저작인 『인간두뇌노동의 본성』(Die Natur der menschlichen Kopfarbeitde)을 집필하여 1869년에 출간했다. 이 책의 초판을 읽은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사본을 보내며 디츠겐의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서술 방식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16][17][2][3] 디츠겐이 해외에 있는 동안 독일의 제혁소는 아내가 운영했으며, 그는 1869년 중순 독일에 귀국했다.[15][1] 귀국 후 마르크스와 그의 딸이 방문하여 디츠겐을 사회주의 "철학자"로 높이 평가했고, 1870년경 마르크스와 디츠겐은 친구가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 제2판 서문에서 디츠겐의 변증법적 유물론 이론을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1878년 6월 8일, 디츠겐은 쾰른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정리한 『사회민주주의의 미래』(Die Zukunft der Sozialdemokratiede)를 출간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의해 체포되었다. 재판을 기다리며 3개월간 구금되었고, 석방되었으나 이후 두 차례 더 체포되었다가 최종적으로 풀려났다.[18][4][14]
디츠겐의 사상과 활동은 제1인터내셔널 시기, 좌익이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면이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를 구분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두 진영 사이의 중재 역할을 시도하기도 했다.
2. 2. 러시아, 미국 생활과 저술 활동
1848년 독일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디츠겐은 1849년부터 1851년까지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냈다.[14] 이 기간 동안 그는 미국 남부를 여행하며 노예주에서 벌어지는 흑인 린치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1852년 독일에 일시 귀국하여 카를 마르크스가 주도한 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했다. 1853년 코르둘라 핀케(Cordula Finke)와 결혼하고 빈터샤이트(오늘날의 루피히테로트)에 제혁소를 세워 무두질 사업을 시작했다.1859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제혁소를 하나 더 세웠다.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북군을 지지하며 독일로 돌아왔다.[14]
1864년부터 1868년까지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들 오이겐과 함께 살면서 국영 제혁소 공장장을 지냈다.[15][1]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그는 첫 주요 저술인 『인간두뇌노동의 본성』 집필을 시작하여 1869년 출간했다. 이 책의 초판을 읽은 카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사본을 보냈고,[16][17][2][3] 이후 『자본론』 제1권 제2판에서 디츠겐의 변증법적 유물론 이론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철학적 기여를 인정했다. 디츠겐이 해외에 있는 동안 독일의 제혁소는 아내가 운영했으며, 그는 1869년 중순 독일에 귀국했다.[15][1] 귀국 후 마르크스 부녀가 방문하여 디츠겐을 사회주의 "철학자"로 추켜세웠다.
1878년 6월 8일, 쾰른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정리한 『사회민주주의의 미래』를 출간했다가 사회주의자 탄압법과 관련하여 체포되어 재판 전까지 3개월간 구금되었다. 이후 두 차례 더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며 탄압받았다.[18][4] 1881년, 독일 제국 육군 징집을 피하고 자신의 저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아들 오이겐을 미국으로 보냈다. 오이겐은 이후 시카고에서 성공적인 사업체(유진 디츠겐 회사)를 일구었다.[19][5][6] 같은 해 디츠겐은 국가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884년, 디츠겐 자신도 아들을 따라 뉴욕으로 이민하여 미국 사회당 기관지 『사회주의자』의 주필이 되었다.[14] 2년 뒤인 1886년에는 시카고로 이주하여 독일어 신문 『시카고어 아르바이터차이퉁』의 주필을 맡아 활동했다.[20][14] 그는 1888년 시카고에서 사망했다.[20][7]
2. 3. 제1인터내셔널과 아나키즘 논쟁
디츠겐의 언행과 삶은 제1인터내셔널이 분열되기 전, 좌익 내 아나키스트, 혁명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등 다양한 사상과 조류가 공존했던 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구분하는 데 드는 노력이 과도하며, 그러한 구분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디츠겐은 제1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 사이의 중재 역할을 맡기도 했다.그는 "나로서는, 한 사람이 아나키스트인지 사회주의자인지에 대한 구별에 거의 강조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나는 이 차이에 너무 많은 비중이 부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당시의 이념 논쟁에 대해 화해적이거나 적어도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음을 시사한다(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 참조).
3. 사상
디츠겐의 사상은 주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과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기반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설명된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발전시킨 사상과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독자적인 측면을 지닌다. 디츠겐 자신도 초기 철학 저술 이전에 공산당 선언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사고의 도구" 역시 우주의 일부이며 속성이라고 보았다. 이 도구를 통해 인간 경험의 상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이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근본적인 통일성과 그것이 드러나는 다양한 형태(다형성)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세계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 다양한 모습들이 결국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특히 디츠겐은 자신의 이러한 통찰이 고대 엘레아 학파 철학자들이 탐구했던 '하나(the One)가 어떻게 여럿(the Many) 안에 존재하고, 여럿이 어떻게 하나 안에 포함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난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틀이나 용어와는 다소 구별되는 디츠겐 사상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평가받는다.
3. 1. 마르크스, 엥겔스와의 관계 및 평가
요제프 디츠겐은 카를 마르크스나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유사하게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과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영향을 받아 변증법적 유물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의 초기 철학 저술 이전에 공산당 선언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디츠겐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사고의 도구" 역시 우주의 일부이며, 세계의 통일성과 다형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작업이 고대 엘레아 학파 철학의 난제였던 '하나'와 '여럿'의 관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논의와는 다소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디츠겐 사후, 그의 아들 오이겐 디츠겐은 아버지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충분히 다루지 못한 정신의 본성과 우주와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관념론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오이겐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이 경제적 요인을 강조했지만 정신 자체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으며, 디츠겐의 인식론적 접근이 이러한 공백을 메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초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플레하노프는 오이겐의 주장이 디츠겐과 마르크스, 엥겔스 사이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8]
한편, 블라디미르 레닌은 에른스트 마흐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를 비판한 자신의 주요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에서 디츠겐의 저술을 인용하며 그의 사상을 활용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후 작성된 『철학 노트』에서 디츠겐을 포이어바흐와 비교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 생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 포이어바흐에 비해 디츠겐의 설명이 다소 미흡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9]
4. 저작
- 186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체류 중 작성:[21]
- * 「화폐의 본성에 관한 몇 마디」 (Einige Worte über das Wesen des Geldesde)
- * 「라살식 사고」 (Die Lassalleschen Ideende)
- * 「사회문제 (경제위기)」 (Die Soziale Frage (Wirtschaftskrisen)de)
- * 「노동과 자본」 (Arbeit und Kapitalde)
- * 「기능과 수공」 (Die Kunst und das Handwerkde)
- * 「과학과 수공」 (Die Wissenschaft und das Handwerkde)
- 「정치경제학 분야 문집」 (Skizzen aus dem Gebiete der politischen Ökonomiede). 『게르버차이퉁: 피혁제조 및 피혁유통 신문』(Gerber-Zeitung. Zeitung für die Lederfabrikation und Lederhandelde) 1868년 5월 31일자 기고.
-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비판서 『자본론』, 1867년 함부르크에서」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 von Karl Marx. Hamburg 1867de). 『민주주간지』 1868년 8월 1일자 31호, 8월 22일자 34호, 8월 29일자 35호, 9월 6일자 36호 게재.
- 『인간두뇌노동의 본성』 (Das Wesen der menschlichen Kopfarbeit. Dargestellt von einem Handarbeiter. Eine abermalige Kritik der reinen und praktischen Vernunftde), 오토 마이스너, 함부르크, 1869. [http://books.google.de/books?id=phxVAAAAMAAJ&printsec=frontcover&hl=de#v=onepage&q&f=false 온라인판]. 영어 번역: The Nature of Human Brainwork영어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1869/brain-work/index.htm]
- 『사회민주주의의 종교』 (Die Religion der Sozial-Demokratie. Fünf Kanzelredende). 1870년부터 1875년까지 6편의 설교 포함. 3판, 라이프치히 협동조합 인쇄소, 1877.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1870s/religion.htm 영어판]
- 「과학적 사회주의」 (Scientific Socialism영어), 1873.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works/1870s/scientific-socialism.htm]
- 「사회 민주주의의 윤리」 (The Ethics of Social Democracy영어), 1875.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works/1870s/ethics.htm]
- 「사회 민주주의 철학」 (Social-Democratic Philosophy영어), 1876.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1876/philosophy.htm]
- 『시민사회논의』 (Die bürgerliche Gesellschaft. Vortragde). 라이프치히 협동조합 인쇄소, 1877. (원본 소스에는 1867년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다른 자료 및 맥락상 1877년이 더 가능성 있음)
- 『국민경제논의』 (National-Oekonomisches. Vorträgede). 2판, 라이프치히 협동조합 인쇄소, 1877. [http://nbn-resolving.de/urn:nbn:de:hbz:061:1-34460 디지털판] (뒤셀도르프 대학교 및 주립도서관)
- 「상상할 수 없는 것: 사회 민주주의 철학의 특별한 장」 (The Inconceivable: A Special Chapter in Social-Democratic Philosophy영어), 1877.
- 「인식의 한계」 (The Limits of Cognition영어), 1877.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1877/limits-cognition.htm]
- 「인식의 한계에 대한 우리 교수들의 견해」 (Our Professors on the Limits of Cognition영어), 1878.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1878/professors.htm]
- 「논리학에 관한 편지」 (오이겐 디츠겐에게 보냄) (Letters on Logic영어), 1880–1884.
- 「은폐신학」 (Verkappte Teologiede). 『디 노이 차이트: 정신생활 및 공공생활 비평』에 익명 기고. 1883, Heft 7, S. 327–331. [http://library.fes.de/cgi-bin/neuzeit.pl?id=07.00054&dok=1883&f=1883_0327&l=1883_0331&c=1883_0327 온라인판]
- 「사회주의자의 인식론 분야로의 여행」 (Excursions of a Socialist into the Domain of Epistemology영어), 1886.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1887/epistemology.htm]
- 『지식분야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단견』 (Streifzüge eines Sozialisten in das Gebiet der Erkenntnißtheoriede). 호팅겐-취리히 인민서점 출판, 1887 (=Sozialdemokratische Bibliothekde XVIII).
- 「철학의 긍정적 결과」 (The Positive Outcome of Philosophy영어), 1887.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1887/positive-outcome/index.htm]
- 「인간 영혼」 (Die menschliche Seelede). 『디 노이 차이트: 정신생활 및 공공생활 비평』. 6(1888), Heft 6, S. 272–278. [http://library.fes.de/cgi-bin/neuzeit.pl?id=07.00484&dok=1888&f=1888_0272&l=1888_0278 온라인판]
'''최근 판본'''
- Nature of Human Brain Work: An Introduction to Dialectics영어, 좌파 은행 서적, 1984년 재판.
- Philosophical Essays on Socialism and Science, Religion, Ethics; Critique-Of-Reason and the World-At-Large영어, 케싱거 출판사, 2004.
- The Positive Outcome of Philosophy; The Nature of Human Brain Work; Letters on Logic영어, 케싱거 출판사, 2007.
- 요제프 디츠겐, Sämtliche Schriftende (전집), 편집: 오이겐 디츠겐, 제4판, 베를린, 1930.
- 요제프 디츠겐, Schriften in drei Bändende (3권의 저작), 편집: 동독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 철학 연구 그룹, 베를린, 1961–1965.
5. 영향
안톤 판네쿠크는 네덜란드의 천문학자이자 평의회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는데, 그는 레닌이 자신의 저서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질병에서 비판했던 좌익 공산주의 그룹에 속해 있었다.[11] 판네쿠크는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디츠겐의 후기 저작인 "논리학에 관한 편지"는 인용했지만, 그의 마지막 철학 저작인 "철학의 긍정적 결과"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1938년, 판네쿠크는 레닌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레닌의 철학을 비판했다. 특히 그는 레닌이 디츠겐의 마지막 철학 저작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디츠겐 사상의 발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12]
디츠겐의 저술은 주로 판네쿠크와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추종자들, 특히 평의회 공산주의 그룹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지지와 정당성을 찾으려 하면서 논의되고 관심을 받았다. 실제로 판네쿠크는 디츠겐의 저작을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핵심적인 자료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판네쿠크 외에는 디츠겐의 동시대 이후 역사적으로 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판네쿠크가 디츠겐에게 주목한 이유는 당시 "주류" 마르크스주의 담론의 일부 경향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찾으려 했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담론의 틀 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면서도, 더 넓은 철학적 탐구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디츠겐은 초기 마르크스주의 세대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지만, 판네쿠크가 디츠겐에게 매력을 느꼈던 지점들은 점차 다른 사상들로 대체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디츠겐은 마르크스주의의 특정 규범적 틀을 따르면서 입장의 정당화를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판네쿠크에게 의미가 있었을 수 있다.
제2 인터내셔널의 붕괴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 이후 새로운 사상적 분열이 나타나면서, 판네쿠크가 했던 것처럼 특정 텍스트 해석에 기반하여 권위를 주장하는 방식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갔다.
한편, 디츠겐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에서 발행된 기념 우표에 등장하기도 했다.[13]
참조
[1]
인터뷰
interview by Joshua J. Morris
Joseph Dietzgen Research
2008-04-16
[2]
편지
Letter to Engels
1868-10-04
[3]
웹사이트
Marx-Engels Collected Works, Volume 43
https://web.archive.[...]
2014-11-13
[4]
웹사이트
Joseph Dietzgen - a sketch of his life
http://libcom.org/hi[...]
[5]
문서
Eugene Dietzgen
[6]
웹사이트
Eugene Dietzgen Company Historÿ
https://web.archive.[...]
Dietzgen (division of Nashua Paper)
2013-05-26
[7]
인터뷰
interview by Joshua J. Morris
Joseph Dietzgen Research
2008-05-02
[8]
웹사이트
Plekhanov, "Joseph Dietz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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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논문
On Lenin’s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10]
웹사이트
The Original Joseph Dietzgen Web Page
https://web.archive.[...]
2006-07-16
[11]
문서
Lenin, V. "Left-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
[12]
웹사이트
Lenin as Philosopher
https://www.marxists[...]
marxists.org
[13]
웹사이트
Stamp Name: ddrp-008-05
http://www.old-stamp[...]
old-stamps.de
2010-09-12
[14]
서적
戸坂潤全集 別巻
勁草書房
[15]
인터뷰
interview by Joshua J. Morris
Joseph Dietzgen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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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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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6
[20]
인터뷰
interview by Joshua J. Morris
Joseph Dietzgen Research
2008-05-02
[21]
간행물
Über die Propagierung der ökonomischen Lehre von Karl Marx in Rußland in den sechziger Jahren des 19. Jahrhunderts. Sechs Beiträge Joseph Dietzg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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