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마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른스트 마흐는 체코 출신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물리학자이자 과학 철학자로, 음속과 충격파 연구로 유명하다. 그는 그라츠 대학교와 프라하 대학교 교수를 거쳐 빈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오스트리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마흐는 뉴턴의 절대 시간과 공간 개념을 비판하고, 마흐의 원리를 제시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요소 일원론적 인식론을 주장하며, 과학의 목표를 감각적 요소들의 함수 관계를 간결하게 기술하는 것으로 보았다. 마흐는 심리학과 생리학 연구에도 기여했으며, '마흐 띠'와 같은 착시 현상을 발견했다. 그의 사상은 빈 학파와 논리 실증주의에 영향을 미쳤지만, 레닌에게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감각 분석에 대한 기여》, 《기계학의 과학》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실증주의자 - 에밀 뒤르켐
에밀 뒤르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사회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정립하고 사회적 사실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구조 기능주의와 구조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실증주의자 - 신후담
신후담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성리학자로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서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했고, 천주교 교리를 비판한 《서학변》을 저술했으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며 남인 공서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조선 후기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 탄도학자 -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탈리아의 과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을 반박하고 망원경을 개량하여 천문학적 업적을 남겼으며 지동설을 옹호하다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근대 과학 발전에 기여하여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 탄도학자 -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은 영국의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연금술사, 신학자로 고전 역학의 기초를 세운 만유인력의 법칙과 뉴턴 운동 법칙을 발견했으며, 미적분학 개발, 반사 망원경 발명 등 수학과 광학 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긴 과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 오스트리아의 무신론자 - 테오도어 헤르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언론인이자 작가인 테오도어 헤르츨은 반유대주의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온주의 운동을 창시하고 『유대인 국가』를 통해 이념적 기반을 다졌으며, 시온주의 회의를 개최하여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켜 이스라엘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오스트리아의 무신론자 - 에르빈 슈뢰딩거
에르빈 슈뢰딩거는 파동역학 창시와 슈뢰딩거 방정식 유도로 양자역학 발전에 기여한 오스트리아 이론물리학자로서, 노벨 물리학상 수상,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 색채 과학 및 철학 연구, 『생명이란 무엇인가』 저술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으나 사생활 논란도 있었다.
에른스트 마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이름 | Ernst Waldfried Josef Wenzel Mach |
출생일 | 1838년 2월 18일 |
출생지 | 브르노, 합스부르크 모라비아, 오스트리아 제국 |
사망일 | 1916년 2월 19일 |
사망지 | 파터슈테텐,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
국적 | 오스트리아 |
분야 | 물리학 |
근무지 | 그라츠 대학교 프라하 카를 대학교 빈 대학교 |
모교 | 빈 대학교 |
박사 지도 교수 | 안드레아스 폰 에팅스하우젠 |
박사 제자 | 하인리히 곰페르츠 오토카르 투믈리르츠 |
주목할 만한 제자 | 안드리야 모호로비치치 |
알려진 업적 | 마흐 띠 마흐 다이아몬드 마흐 수 마흐 반사 마흐파 마흐의 원리 뉴턴의 양동이 사고 실험 비판 경험비판주의 사선 효과 관계주의 충격파 입체 운동 자극 |
학위 논문 제목 | Über elektrische Ladungen und Induktion |
학위 논문 년도 | 1860년 |
![]() | |
각주 | 그는 볼프강 파울리의 대부였다. 마흐-젠더 간섭계는 그의 아들 루드비히 마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 역시 물리학자였다. |
영향 | 구스타프 페히너 |
영향을 받은 인물 | 빈 학단 루트비히 볼츠만 피에르 뒤엠 볼프강 파울리 윌리엄 제임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발음 | |
로마자 표기 | MAHKH |
기타 | |
참고 문헌 |
2. 생애
체코 모라비아 지방 브르노 인근(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 주 히르리츠)에서 태어나 빈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그라츠 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 교수를, 프라하 대학교에서 실험물리학 교수를 역임했다. 1895년에는 빈 대학교로 돌아와 신설된 《귀납적 과학의 역사와 이론》 강좌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1901년 오스트리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빈 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2. 1. 초기 생애
마흐는 1838년 2월 18일 오스트리아 제국 모라비아 크를리체(Chrlice|크를리체cs, Chirlitz|히를리츠de, 현재 체코 브르노의 일부)에서 태어났다. 일부 자료에서는 마흐의 출생지를 크를리체 시청이 있던 투르자니(Tuřany|투르자니cs, Turas|투라스de, 브르노의 일부)로 기록하기도 한다.그의 아버지는 프라하의 찰스 페르디난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모라비아 동부 즐린(Zlín)에 있는 귀족 브레톤(Brethon)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벤츨 란하우스(Wenzl Lanhaus|벤츨 란하우스cs)는 크를리체 영지의 관리자이자 거리 건설 책임자였는데, 그의 활동은 후에 에른스트 마흐의 이론적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마흐는 14세까지 부모에게서 가정 교육을 받았다. 그 후 크로메리시( Kroměříž|크로메리시cs, Kremsier|크렘지어de)의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했다. 1855년 그는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과 한 학기 동안 의학 생리학을 공부했다. 1860년 안드레아스 폰 에팅스하우젠(Andreas von Ettingshausen)의 지도 아래 "전기적 하전과 유도(Über elektrische Ladungen und Induktionde)"라는 논문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자격 논문(하빌리타치온)을 제출했다. 그의 초기 연구는 광학과 음향학에서 도플러 효과에 초점을 맞추었다.
2. 2. 학문적 경력
1864년, 잘츠부르크 대학교의 외과학과 교수직을 거절하고 그라츠 대학교의 수학 교수직을 수락했으며, 1866년에는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마흐는 정신물리학과 감각 지각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1867년에는 프라하의 카를 페르디난트 대학교 실험 물리학과 교수직을 맡아, 빈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28년 동안 재직했다.[3] 1871년에는 보헤미아 왕립 과학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1895년 빈 대학교로 옮겨 신설된 '귀납 과학의 역사와 이론'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898년 중풍을 겪은 후 건강상의 이유로 1901년 빈 대학교에서 은퇴하였고, 같은 해 오스트리아 상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3]
2. 3. 말년
1901년 오스트리아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빈 대학교를 퇴직했다. 이후 1916년 2월 19일, 독일 뮌헨 교외 하알에서 사망했다.3. 물리학 연구
마흐의 초기 실험 물리학 연구는 주로 빛의 간섭, 회절, 편광, 굴절 현상을 다루었다.[3] 이후 그는 초음속 유체 역학 분야 연구에 집중하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마흐의 물리학 분야 주요 공헌은 스파크 충격파와 탄도 충격파에 대한 설명과 사진 촬영이다. 그는 총알이나 포탄이 음속보다 빠르게 움직일 때 그 앞쪽에 공기 압축이 발생하며, 이로 인해 원뿔 모양의 충격파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3] 마흐는 물리학자이자 사진가인 페터 잘허(Peter Salcher)와 함께 1887년 이 주제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12] 이 논문은 포탄의 초음속 운동 중에 관찰되는 음향 효과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충격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확인한 중요한 연구였다.
마흐는 보이지 않는 충격파를 시각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슐리렌 사진법을 활용했으며, 그의 아들 루트비히 마흐(Ludwig Mach)와 함께 충격파의 그림자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루트비히는 1890년대 초 자맹 간섭계를 개량하여 훨씬 더 선명한 충격파 사진을 얻을 수 있게 했다.[3] 이러한 실험적 연구는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사진 촬영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12]
이러한 업적을 기려, 유체 속을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와 그 매질에서의 국소 음속의 비율( ''v''p/''v''s )을 나타내는 중요한 무차원 수에 그의 이름을 따 마하 수라는 명칭이 붙여졌다.[12] 마하 수는 오늘날 항공역학과 유체역학 분야에서 고속 유체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매개변수로 사용된다.[3]
이 외에도 마흐는 관성의 물리적 기원에 대한 가설인 마흐의 원리를 제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비록 마흐 자신이 직접 명명하거나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우주의 전체 질량 분포가 국소적인 관성 기준계를 결정한다는 개념으로, 후대의 물리적 우주론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3]
4. 과학철학
에른스트 마흐는 과학사 및 과학철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의 대표적인 과학사 저작으로는 『역학의 발달』(1883년), 『열역학의 원리』(1896년), 『물리광학의 원리』(1921년)가 있으며, 이들은 흔히 과학사 3부작으로 불린다.
마흐의 과학철학은 특히 『역학의 발달』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는 이 책에서 당시 물리학의 근간이었던 뉴턴의 역학 체계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마흐는 뉴턴이 제시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같은 개념이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가정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과학은 직접적인 감각 경험에 기반해야 한다는 실증주의적 입장을 강조했다. 이러한 비판은 훗날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구상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마흐는 물체의 관성이 우주 전체 물질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마흐의 원리를 제안했는데, 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영감을 주었다.
인식론적으로 마흐는 『감각의 분석』(1886년)과 『인식과 오류』(1905년)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주-객 이원론과 같은 전통적인 철학적 구분을 비판하고, 세계가 근본적으로 색채, 소리 등 중립적인 감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요소 일원론"을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물체'나 '자아'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안정된 감각 요소들의 복합체이며, 과학의 목표는 이러한 감각 현상들 사이의 함수 관계를 사고 경제의 원리에 따라 가장 간결하게 기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엄격한 경험주의적 태도는 마흐로 하여금 당시 직접 관찰이 불가능했던 원자론이나 에너지 보존 법칙과 같은 이론적 구성물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그는 볼츠만이나 플랑크와 같은 동시대 물리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14] 마흐는 물리학과 심리학 등 분과 학문의 구분이 대상의 차이가 아닌 기술 방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보며 '통일 과학'을 구상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큰 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평생 상대성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4. 1. 경험비판론
'''경험비판주의'''(Empiriokritizismusde)는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가 기초를 놓고 마흐, 요제프 페츠돌트 등이 발전시킨 엄격한 실증주의이자 급진적인 경험론 철학이다.[13] 이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감각뿐이며, 모든 지식은 순수한 경험에 국한되어야 한다. 마흐는 1895년부터 1901년까지 빈 대학교에서 "귀납 과학의 역사와 철학" 교수직을 맡으며 이러한 현상론적 과학철학을 발전시켰다.마흐의 인식론적 핵심은 "요소 일원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주-객 이원론이나 물심이원론과 같은 근대 철학 및 과학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직접적인 경험에서부터 지식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흐에 따르면, 세계는 본질적으로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색채, 소리, 감촉과 같은 중립적인 감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물체'나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감각 요소들이 안정적인 관계를 이루며 나타나는 복합체일 뿐이며, 결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는 인과관계 역시 감각 요소들, 즉 현상들 사이의 함수 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의 목표는 감각적 요소(현상)들 사이의 함수 관계를 '사고 경제의 원리'에 따라 가장 간결하고 경제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마흐는 "물리 과학이 스스로 설정한 목표는 사실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가장 경제적인'' 추상적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학 법칙을 처음에는 복잡한 데이터를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실험적 사건의 요약으로 보았으나, 나중에는 수학적 함수가 감각적 외관을 묘사하는 더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과학 법칙은 이상화된 측면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감각 너머의 현실보다는 감각 자체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다.
마흐는 이러한 경험주의적 입장에서 뉴턴이 『프린키피아』에서 제시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개념을 "인간이 감각한 적 없는 형이상학적 요소"라고 비판했다. 또한 힘이라는 개념의 문제점도 지적하며, 뉴턴 역학을 '역학적 물리학'이라 부르고 대신 '현상적 물리학' 또는 '물리학적 현상학'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아인슈타인에게 영향을 주어 특수상대성이론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후설은 마흐의 사상에 지향성 개념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으며,[13] 마흐 자신은 상대성이론을 평생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개념 배제"라는 원칙에 따라, 마흐는 원자론적 세계관과 에너지 보존 법칙 개념도 비판했다. 원자는 직접 관찰할 수 없으며, 당시의 어떤 원자 모형도 일관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자 가설은 마흐에게 정당화되지 않고 비경제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로 인해 그는 루트비히 볼츠만이나 막스 플랑크와 같은 실재론적 관점의 물리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14]
마흐의 실증주의는 알렉산더 보그다노프와 같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일부 인사들(보그다노프, 바자로프, 유시케비치 등)은 마흐의 사상을 바탕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수정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레닌은 1908년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5]에서 마흐주의(Machism)를 강하게 비판했다. 레닌은 마흐의 철학이 결국 유일론으로 귀결되며, "몸이 '감각의 복합체'라면 필연적으로 전 세계는 나의 생각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마흐의 학설이 버클리주의의 단순한 재탕인 주관적 관념론[16]이라고 비판하며,[17] 인간 이전의 자연 존재를 부정하는 불합리한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흐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은 빈 서클 철학자들과 논리 실증주의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물체의 관성은 우주 전체 물질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는 마흐의 원리는 아인슈타인에게 영감을 주어 일반 상대성 이론 구축의 한 축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마흐를 일반 상대성 이론의 선구자로 인정했지만, 마흐 자신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알렉산더 리글러 등은 마흐의 연구가 지식은 학습자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구성한다는 구성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급진적 구성주의의 창시자인 에른스트 폰 글라서스펠트 역시 마흐를 사상적 동지로 여겼다.
마흐는 물리학과 심리학의 차이가 연구 대상의 차이가 아니라 기술하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통일 과학'을 구상하기도 했다.
4. 2. 마흐의 원리
마흐는 그의 저서 『역학의 발달』(1883년)에서 당시 물리학계를 지배하던 역학적 자연관을 비판하며, 특히 뉴턴이 제시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같은 기본 개념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고 지적했다.[13] 이러한 비판적 접근은 아인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쳐 특수상대성이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마흐는 더 나아가 마흐의 원리를 제창했다. 이 원리의 핵심은 물체의 관성력은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물질과의 상호작용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물체가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인 관성은 그 물체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물질 분포와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이 아이디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마흐는 “여러분, 과연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이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며 절대적인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흥미롭게도, 마흐 자신은 상대성이론에 대해 평생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4. 3. 현상학적 구성주의
마흐는 1895년부터 1901년까지 빈 대학교에서 "귀납 과학의 역사와 철학" 교수직을 맡으며, 19세기와 20세기에 영향을 미친 현상론적 과학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초기에 과학 법칙을 복잡한 데이터를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실험적 사건의 요약으로 보았으나, 나중에는 감각적 외관을 묘사하는 데 수학적 함수가 더 유용하다고 강조했다. 즉, 과학 법칙은 이상화되었지만, 감각 너머의 현실보다는 감각 자체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마흐에 따르면, 물리 과학의 목표는 "사실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가장 경제적인 추상적 표현"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방대한 세계를 반영하려 할 때 경제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과학 법칙은 사실 전체가 아닌 우리에게 중요한 측면만을 재현한다고 보았다. 또한, 우리가 환경에서 몸을 분리할 때 실제로는 생각 속에서 안정적인 감각의 집단을 분리하는 것이며, 자연은 단 한 번만 존재하므로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효과를 찾는 것은 정신적 모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마흐의 실증주의는 알렉산더 보그다노프와 같은 많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08년 레닌은 ''경험론 비판과 유물론''에서 마흐주의와 러시아 마히스트들을 비판했다. 레닌은 마흐의 철학이 유일론으로 이어지며, 인간 이전에는 자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마흐는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가 확립하고 요제프 페츠돌트 등과 함께 발전시킨 경험비판주의 철학의 주요 인물이다. 이 철학은 엄격한 실증주의이자 급진적인 경험론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감각뿐이며 지식은 순수한 경험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3]
인식론 분야에서 마흐의 핵심 사상은 현재 “요소 일원론”이라 불린다. 그는 근대 철학과 과학의 주-객 이원론이나 물심이원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직접적인 경험에서 지식을 재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흐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는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닌 중립적인 감각적 요소들(색채, 소리, 감촉 등)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물체'나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감각 요소들의 안정적인 복합체일 뿐, 실제로는 '실체'가 아니다. 인과관계 역시 감각 요소들(현상)의 함수 관계로 표현될 수 있으며, 과학의 목표는 이러한 함수 관계를 '사고 경제의 원리'에 따라 간결하게 기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흐는 물리학과 심리학의 차이를 연구 대상의 차이가 아닌 기술 관점의 차이로 보았고, "통일 과학"을 구상했다. 그는 감각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 것을 선험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실증주의 입장을 취했다. 이로 인해 원자론적 세계관을 지지했던 루트비히 볼츠만이나 막스 플랑크 등과 논쟁을 벌였다.[14]
알렉산더 리글러는 마흐의 연구가 구성주의라는 영향력 있는 관점의 선구자였다고 평가한다. 구성주의는 모든 지식이 학습자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하며, 마흐는 매우 이원론적이지 않은 현상학적 입장을 취했다. 급진적 구성주의의 창시자인 에른스트 폰 글라서스펠트는 마흐를 동지로 인정했다. 마흐를 단순히 경험주의자이자 논리 실증주의와 빈 서클의 선구자로 보는 관점도 타당하며, 이 관점에서 과학의 목적은 관찰 사이의 기능적 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5. 심리학 및 생리학 연구
마흐는 물리학 외에도 정신물리학과 감각 지각 연구를 통해 심리학과 생리학 분야에도 중요한 기여를 남겼다. 특히 인간의 균형 감각과 시각 현상에 대한 그의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
1873년, 마흐는 생리학자이자 의사인 요제프 브로이어와 각자 독립적으로 평형 감각(머리의 기울어짐을 인지하는 감각)의 작동 원리를 발견했다. 이들은 뇌가 내이에 있는 반고리관 내부 내림프의 움직임으로부터 전달받는 정보를 통해 평형 감각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오늘날 ‘마흐-브로이어 설’이라고도 불린다. 평형 감각이 세 개의 반고리관에 의존한다는 사실 자체는 1870년 생리학자 프리드리히 골츠가 먼저 발견했지만, 그 기능까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마흐는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직접 회전 의자를 고안하기도 했으며, 이는 내이 기능의 비음향적 기능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감각 지각 연구 분야에서는 착시의 일종인 마흐 띠 발견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흐 띠는 인간의 시각 시스템이 가장자리를 감지하는 과정에서, 서로 인접한 약간 다른 회색 음영 사이의 대비를 실제보다 더 강조하여 인식하는 현상이다.[3] 또한 마흐는 "생리적 공간"(특히 시각적 공간)과 "기하학적 공간" 사이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기도 했다.
마흐의 이러한 심리학 및 생리학 연구는 후대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매개 구조에 대한 견해는 B. F. 스키너의 강력한 귀납적 입장에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지각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6. 정치 및 사회 사상
자유주의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마흐는 1848년 혁명 이후 들어선 "매우 반동적인 성직자적" 시대를 비판적으로 보았으며, 이에 실망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계획하기도 했다.[5]
1901년에는 오스트리아 상원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과학자가 귀족 작위를 받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작위는 거절했다.[6] 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 빅토르 아들러와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유언을 통해 사회민주당 신문인 아르바이터 차이퉁에 기부금을 남기기도 했다.[7]
또한 마흐는 당시 유럽 열강들이 벌이던 식민지 정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이러한 행위가 "다가올 세대에게… 역사에서 가장 불쾌한 장을 구성할 것"이라고 예견했다.[8]
7. 영향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빈 대학교에 다닐 때 "철학적 논의는 본질적으로 마흐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회고했다.[9] 마흐의 업적은 빈 학파 결성의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의 논리 실증주의와 통일 과학 운동의 기초를 제공하여 "논리적 실증주의의 주요 선구자"로 평가받는다.[10] 또한 그의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11]
과학사 분야에서는 『역학의 발달』(1883년), 『열역학의 원리』(1896년), 『물리광학의 원리』(1921년)가 과학사 3부작으로 불린다. 특히 『역학의 발달』에서는 당시 물리학계를 지배하던 역학적 자연관을 비판했다. 마흐는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제시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개념에 대해,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생각은 아인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주어 특수상대성이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마흐는 "물체의 관성력은 우주 전체 물질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는 마흐의 원리를 제창했는데, 이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구축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마흐 자신은 평생 상대성 이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마흐는 뉴턴이 도입한 힘 개념의 문제점도 지적하며, 뉴턴 역학 및 그 계승을 "역학적 물리학"이라 부르고, 감각적 경험에 기반한 '현상적 물리학' 또는 '물리학적 현상학'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후설의 현상학과 유사점이 있지만, 후설은 마흐의 사상에 지향성 개념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13] 마흐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배제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원자론적 세계관이나 에너지 보존 법칙 등도 비판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실증주의적 태도는 루트비히 볼츠만이나 막스 플랑크와 같은 실재론적 관점의 물리학자들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4]
인식론 분야에서는 『감각의 분석』(1886년)과 『인식과 오류』(1905년)가 대표적인 저서이다. 마흐의 인식론의 핵심은 현재 “요소 일원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주-객 이원론이나 물심이원론 등의 근대적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직접적인 경험으로 돌아가 지식을 재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세계는 원래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감각적 요소들(색채, 소리, 감촉 등)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물체’나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감각적 요소들의 안정적인 복합체일 뿐 실체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또한 인과관계도 감각적 요소들(현상)의 함수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과학의 목표가 감각적 요소들의 함수 관계를 《사고 경제의 원리》에 따라 간결하게 기술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흐는 물리학과 심리학의 차이는 연구 대상이 아닌 기술 관점의 차이일 뿐이며, '통일 과학'이라는 구상을 제시했다.
마흐의 사상은 관념론과 유물론적 실재론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평가받으며,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보그다노프, 바자로프, 유시케비치 등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흐의 영향을 받아 변증법적 유물론을 변혁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자신의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5]에서 마흐의 철학을 "감각의 복합으로서의 사물이라는 E. 마흐의 학설은 주관적 관념론[16]이며, 버클리주의의 단순한 재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17] 이러한 논쟁은 역설적으로 마흐의 사상이 당대 지성계에 미친 폭넓은 영향력을 보여준다.
8. 주요 저서
에른스트 마흐는 물리학,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요한 저작을 남겼다.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Optisch-akustische Versuchedeu (광학-음향 실험) (1873년, 프라하): 초기 실험 연구 결과를 담았다.
- Die Mechanik in ihrer Entwicklung historisch-kritisch dargestelltdeu (역학의 과학, The Science of Mechanics) (독일어 초판 1883년, 영어판 1919년): 고전역학의 발전을 역사적, 비판적 관점에서 분석한 저서로, 마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책 중 하나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 Beiträge zur Analyse der Empfindungendeu (감각의 분석, The Analysis of Sensations) (독일어 초판 1886년, 영어판 1897년): 감각 경험을 과학적 탐구의 기초로 삼는 경험주의 철학을 제시하며, 후속 판에서는 'Analyse der Empfindungen und das Verhältnis des Physischen zum Psychischendeu (감각 분석과 물리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논리실증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 Photographische Fixirung der durch Projectile in der Luft eingeleiteten Vorgängedeu (공기 중에서 발사체에 의해 유도되는 과정의 사진 고정) (1887년): 페터 잘허(Peter Salcher)와 공저한 논문으로, 초음속 발사체가 만드는 충격파를 사진으로 촬영한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
- Popular Scientific Lectureseng (대중 과학 강좌) (1895년, 개정 및 확장판 1898년): 과학적 주제들을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강연 모음집이다.
- Principien der Wärmelehredeu (열역학 원리, Principles of the Theory of Heat) (독일어 초판 1896년, 영어판 1986년): 열 현상에 대한 역사적, 비판적 고찰을 담고 있다.
- Space and Geometry from the Point of View of Physical Inquiryeng (물리적 조사의 관점에서 본 공간과 기하학) (1903년): S.J.B. 서그던(Sherwood J. B. Sugden)과 공저한 논문으로, 공간과 기하학에 대한 마흐의 생각을 보여준다.
- Erkenntnis und Irrtum: Skizzen zur Psychologie der Forschungdeu (인식과 오류, Knowledge and Error) (독일어 초판 1905년, 영어판 1976년): 과학 연구의 심리적 과정을 분석하고, 인식의 본질과 오류의 발생 원인에 대해 탐구한다.
- History and Root of the Principle of the Conservation of Energyeng (에너지 보존 원리의 역사와 뿌리) (1911년): 에너지 보존 법칙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추적한다.
- The Principles of Physical Opticseng (물리 광학의 원리) (1926년, 사후 출판): 광학 현상에 대한 역사적,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 Fundamentals of the Theory of Movement Perceptioneng (운동 지각 이론의 기초) (2001년, 사후 출판): 운동 지각에 대한 그의 이론적 기초를 다룬다.
참조
[1]
백과사전
Ernst Mach
http://www.britannic[...]
2016-01-06
[2]
서적
Ernst Mach: A Deeper Look
Springer
1992
[3]
학술지
Contributions of Ernst Mach to Fluid Mechanics
https://www.annualre[...]
2023-02-23
[4]
서적
The Innermost Kernel Depth Psychology and Quantum Physics - Wolfgang Pauli's Dialogue with C.G. Jung
Springer
2005
[5]
서적
Ernst Mach: A Deeper Look
Springer
1992
[6]
서적
The Austrian Mind An Intellectual and Social History, 1848-1938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3
[7]
서적
The Austro-Marxists 1890–1918 A Psychobiographical Study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21
[8]
서적
Ernst Mach His Life, Work, and Influenc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3
[9]
간행물
Diskussionsbemergungen über Ernst Mach und das sozialwissenschaftliche Denken in Wien
Symposium
1967
[10]
웹사이트
Ernst Mach
https://www.oxfordre[...]
[11]
백과사전
Ernst Mach
2023
[12]
문서
遷音速での飛行機の空力特性など、対気速度そのものよりも音速との比が重要な場合について使われる値である。
[13]
웹사이트
現象学と経験の可能性の条件
http://www2.ipcku.ka[...]
[14]
문서
당시 분자의 존재 여부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마하의 견해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지지하는 과학자가 많았다. 그러나 볼츠만의 세계관을 지지하는 과학자도 있었고, 과학계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이 브라운 운동 연구에서 분자의 존재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일단 의견이 수렴되었고, 1916년 마하가 사망했기 때문에, 수렴된 형태가 되었다. 그 후, '원자'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 같다고 과학자들이 인식하게 되었지만, 그 후 '원자'라고 불리고 불가분의 것으로 믿어졌던 존재에도 내부 구조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 직접 지각할 수 없는 최소 단위를 전제로 가설(원자론이나 소립자론)과 같은 방법으로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인식론적 회의는 수십 년 후 재인식되고 있으며, 인식론적으로 마하의 사상의 가치는 현재에도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리학적으로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든 아니든 측정값은 사실이며, 또한 직접 지각할 수 없는 단위와 같은 것을 '모델'로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는 꼬리표가 있어도 그것은 물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원자보다 작은 소립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에'라고 해서 이전과 같은 의제를 제기하는 것과 같은 논법은 어떤 종류의 무한 후퇴라고 할 수 있다.
[15]
웹사이트
唯物論と経験批判論
http://100.yahoo.co.[...]
[16]
웹사이트
観念論
http://100.yahoo.co.[...]
[17]
서적
唯物論と経験批判論 上
新日本出版社
197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