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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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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자흐는 우즈베키스탄 지자흐주의 도시로, 사마르칸트와 페르가나 계곡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소그드어로 '작은 요새'를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몽골 제국, 티무르 제국, 부하라 칸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1866년 러시아 제국에 점령되었으며, 1916년에는 반러시아 봉기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교통 중심지이며, 축구 클럽 소그디아나 지자흐가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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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흐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공식 명칭지자흐
로마자 표기Jizzax
기타 표기(러시아어)
ジザフ (일본어)
지자흐
지자흐
지자흐 문장
지자흐 문장
인구 (2024년)202,200명
인구 밀도3,673 명/km2
면적 (시가지)49 km2
면적 (광역)140 km2
시간대우즈베키스탄 표준시 (+5)
우편 번호130100-130117
지역 번호(+998) 72
차량 번호판25-29
웹사이트지자흐 공식 웹사이트
도시 유형도시
행정 구역
국가우즈베키스탄
지자흐 주
하킴 (시장)에르가시 살리예프
지리
해발 고도378 m
역사
최초 언급10세기

2. 어원

한 견해에 따르면, 도시 이름은 소그드어 단어 'dizak'(دزکfa)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diz'(دز|요새fa)의 지소사로 "작은 요새" 또는 "작은 성"을 의미한다.[3] 13세기 무잠 알불단에서는 'dīzak'(ديزكar)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었다.[4]

3. 역사

지자흐는 사마르칸트와 페르가나 계곡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차로였다. 골로드나야 대초원 가장자리이자 투르키스탄 산맥의 전략적 요충지인 질라누티 고개(티무르의 문) 옆에 위치하여 제라프샨강 계곡, 사마르칸트, 부하라로 가는 길을 통제했다.

'지자흐'라는 이름은 소그드어로 '작은 요새'를 뜻하며, 현재 도시는 오슈루사나에 속했던 마을에 세워졌다. 소그디아나가 아랍에 정복된 후, 지자흐는 유목민과 정착민 사이의 교역지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지자흐에 '라바트'(요새)를 건설하고 '가지'를 배치하여 사람들을 보호했다.[5]

압바스 왕조 하에서 오슈루사나 지역은 사만 왕조에 넘겨졌고, 사만 왕조는 압바스 왕조의 종주권 아래 더 넓은 지역을 분할했다. 892년, 이스마일 사마니는 이 지역들을 통일하여 압바스 왕조로부터 사실상 독립하고 사만 왕조를 건국했다. 1000년경 사만 왕조가 멸망한 후, 지자흐는 카라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카라한 왕조는 트란스옥시아나 전체를 정복하고 동쪽으로 타림 분지까지 진출했다. 1041년, 왕조는 동부와 서부 칸국으로 분열되었고, 지자흐는 서부 지역에 속했다. 1086년 셀주크 제국사마르칸트를 정복한 후, 서부 칸국은 셀주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지자흐는 이후 호라즘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호라즘 제국은 셀주크의 봉신으로 시작했지만 1190년경 독립했다. 1219년 몽골 제국이 호라즘을 침략하면서 지자흐를 포함한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다. 1220년, 도시는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인구가 살해되었다. 몽골의 지배 하에서 도시는 쇠퇴했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들에게 분할되었고, 지자흐는 차가타이 칸국에 포함되었다. 차가타이 칸국은 1300년경부터 분열되기 시작했다. 1340년대에 칸국은 둘로 분열되었다. 지자흐는 서부 지역에 속했으며, 이 지역은 카잔 칸 이븐 야사우르가 통치했다. 1346년 부족장 아미르 카자간은 카잔을 살해하고 꼭두각시 칸을 세웠다. 1370년, 티무르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했다. 지자흐는 티무르의 영토와 모굴리스탄의 경계 근처에 위치하고 중요한 산길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재건되고 요새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티무르 제국 하에서 중앙 아시아는 예술과 문화가 번성했다. 제국의 북부 국경과 수도 사마르칸트로 가는 무역로에 인접한 지자흐는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국은 15세기 후반에 약해졌다. 1488년, 무하마드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베크 분견대는 치르치크강 전투에서 타슈켄트를 정복하려는 티무르 왕조를 모굴리스탄이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 1500년에 그는 지자흐를 통제했고, 그 후 10년 동안 부하라, 헤라트 및 주변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샤이바니는 부하라 칸국을 세웠고, 이 칸국은 다음 100년 동안 지자흐를 통치했다. 1600년에서 1700년대 중반까지 지자흐는 자주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1740년대에 부하라의 아미르들은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 지도자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 이 시점과 1785년 부하라 토후국의 공식적인 건국 사이에 지자흐는 아미르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60년대까지 부하라 토후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1866년 지자흐시 지도


러시아 군대에 점령된 후 지자흐 요새의 폐허


1866년, 지자흐는 부하라 토후국의 주요 요새였다. 중앙 아시아의 러시아 정복은 18세기에 시작되었고, 1860년대에 러시아는 지자흐에서 불과 약 112.65km 떨어진 시르다리야강을 따라 요새선을 통제했다. 1864년, 러시아와 부하라 토후국 사이에 적대 행위가 발생했다.

"타슈켄트의 사자"로 불린 미하일 체르냐예프 장군은 지자흐 점령을 시도했으나, 첫 번째는 실패하고 두 번째에 병사 6명의 희생을 내고 겨우 성공했다. 이때, 시민 사망자는 6,000명에 달했다. 구시가는 거의 잿더미가 되었고, 주민이 강제 이주당하는 대신 러시아인이 이주했다.[5]

지자흐시, 미울칸릭 마할라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후, 1887년 사마르칸트주가 설립된 후 지자흐는 사마르칸트 주의 관할 하에 두었다. 19세기 말 이 지역은 우즈베크인이 주로 거주했고, 타지크인이 4분의 1을 차지했으며, 나머지는 카자흐인과 위구르인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로 구성되었다. 1906년 타슈켄트로 철도가 건설된 후 러시아 정착민들이 이주해 오면서 원주민들과 갈등이 발생했다. 러시아의 토지 측량 및 재분배 정책은 원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1916년, 지자흐는 반러시아 봉기의 중심지였다. 이 봉기는 러시아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위해 현지인들을 징집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발생했다. 이는 러시아가 이 지역 정복 중에 현지인을 징집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봉기의 대부분은 지자흐 남부 지역에 집중되었다. 1917년, 훗날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가 되는 샤로프 라시도프가 지자흐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내전 동안 지자흐는 투르케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였다가, 1924년 중앙 아시아의 민족 경계 획정을 통해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포함되었다.

3. 1. 소그드 시대와 아랍 지배

지자흐는 사마르칸트와 페르가나 계곡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차로였다. 골로드나야 대초원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투르키스탄 산맥의 전략적 요충지인 질라누티 고개(티무르의 문) 옆에 있어 제라프샨강 계곡, 사마르칸트, 부하라로 가는 길목을 통제했다.

'지자흐'라는 이름은 소그드어로 '작은 요새'를 의미하며, 현재 도시는 오슈루사나에 속했던 마을 자리에 세워졌다. 소그디아나가 아랍에 정복된 후, 지자흐는 유목민 약탈자들과 정착 농부들 사이의 시장 도시 역할을 했다. 아랍인들은 지자흐에 '라바트'(요새)를 건설하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를 배치했다.[5] 압바스 왕조 하에서 오슈루사나 지역은 사만 가문에 넘겨졌고, 사만 가문은 압바스 왕조의 종주권 아래 더 넓은 지역을 분할했다. 892년, 이스마일 사마니는 그의 가문 통치하에 이 지역들을 통일하여 압바스 왕조로부터 사실상 독립을 획득하고 사만 왕조를 건국했다.

3. 2. 사만 왕조와 이후의 왕조들

사만 왕조 시대에 지자흐는 압바스 왕조의 종주권 아래 있었지만, 892년 이스마일 사마니가 사실상 독립을 획득하고 사만 왕조를 건국했다.[5] 1000년경 사만 왕조가 멸망한 후, 지자흐는 카라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5] 카라한 왕조는 트란스옥시아나 전체를 정복하고 동쪽으로 서 타림 분지까지 진출했다.[5] 1041년, 왕조는 둘로 분열되었고, 지자흐는 서부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5] 1086년 셀주크 제국사마르칸트를 정복한 후, 서부 칸국은 그들의 지배에 복종하게 되었다.[5]

지자흐는 다음으로 호라즘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5] 호라즘 제국은 셀주크의 봉신으로 시작했지만 1190년경 완전히 독립했다.[5] 1219년 몽골 제국이 호라즘을 침략하면서 지자흐를 포함한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다.[5] 1220년, 도시는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인구가 살해되고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5]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들에게 분할되었고, 지자흐는 차가타이 칸국에 포함되었다.[5] 1340년대에 칸국은 둘로 분열되었고, 지자흐는 서부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5] 1346년 부족장 아미르 카자간은 카잔 칸 이븐 야사우르를 살해하고 꼭두각시 칸을 세웠다.[5] 1370년, 티무르는 지자흐를 포함한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했다.[5] 지자흐는 지리적으로 티무르의 영토와 모굴리스탄의 경계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요한 산길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재건되고 요새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5]

티무르 제국은 15세기 후반에 약해지기 시작했다.[5] 1488년, 무하마드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베크 분견대는 치르치크강 전투에서 타슈켄트를 정복하려는 티무르 왕조를 모굴리스탄이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5] 1500년에 그는 분명히 이 도시를 통제했는데, 그는 티무르 왕조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에 이 도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5]

샤이바니는 부하라 칸국을 세웠고, 이 칸국은 다음 100년 동안 지자흐를 통치했다.[5] 1600년에서 1700년대 중반까지 지자흐는 정기적으로 주인이 바뀌었다.[5] 1740년대에 부하라의 아미르들은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 지도자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5] 이 시점과 1785년 부하라 토후국의 공식적인 건국 사이에 지자흐는 아미르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5] 1860년대까지 부하라 토후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5]

3. 3.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은 1219년 호라즘 제국을 침략하여 잔혹한 작전을 펼쳤고, 그 결과 1220년 지자흐는 파괴되고 대부분의 주민이 살해되었다.[5]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들에 의해 분할되었고, 지자흐는 차가타이 칸국에 속하게 되었다. 차가타이 칸국은 1300년경부터 분열되기 시작하여 1340년대에 모굴리스탄과 서부 지역으로 나뉘었고, 지자흐는 서부 지역에 속했다.

1370년, 티무르가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하면서 지자흐는 티무르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티무르는 모굴리스탄과 자주 전쟁을 벌였는데, 지자흐는 티무르 제국의 경계 근처에 위치하고 중요한 산길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재건되고 요새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티무르 제국 시기 중앙 아시아는 예술과 문화가 번성했으며, 제국의 북부 국경과 사마르칸트로 가는 무역로에 인접한 지자흐는 성장과 부활을 경험했을 것으로 보인다.

1488년, 무하마드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베크 분견대가 티무르 왕조를 격파하면서 티무르 왕조의 권력은 쇠퇴하고 샤이바니의 세력이 커졌다. 1500년, 샤이바니는 지자흐를 점령하고 부하라, 헤라트 등 주변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여 부하라 칸국을 세웠다.

3. 4. 부하라 칸국과 러시아 제국

사마르칸트와 페르가나 계곡을 연결하는 중요한 실크로드 교차로였던 지자흐는 골로드나야 대초원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투르키스탄 산맥의 전략적 요충지인 질라누티 고개(티무르의 문) 옆에 있어 제라프샨강 계곡, 사마르칸트, 부하라로 가는 길목을 통제했다.

'지자흐'라는 이름은 소그드어로 '작은 요새'를 뜻하며, 현재 도시는 오슈루사나에 속했던 마을에 세워졌다. 소그디아나가 아랍에 정복된 후, 지자흐는 유목민과 정착민 사이의 시장 도시 역할을 했다. 아랍인들은 '라바트'(요새)를 건설하고 '가지'를 배치하여 사람들을 보호했다. 압바스 왕조 하에서 오슈루사나는 사만 왕조에 넘겨졌고, 사만 왕조는 압바스 왕조의 종주권 아래 더 넓은 지역을 분할했다. 892년, 이스마일 사마니는 이 지역들을 통일하여 압바스 왕조로부터 사실상 독립하고 사만 왕조를 건국했다.

1000년경 사만 왕조가 멸망한 후, 지자흐는 카라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카라한 왕조는 트란스옥시아나 전체를 정복하고 동쪽으로 타림 분지까지 진출했다. 1041년, 왕조는 동부와 서부 칸국으로 분열되었고, 지자흐는 서부 지역에 속했다. 1086년 셀주크 제국이 사마르칸트를 정복한 후, 서부 칸국은 셀주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지자흐는 호라즘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호라즘 제국은 셀주크의 봉신으로 시작했지만 1190년경 독립했다. 호라즘 제국은 페르시아와 중앙 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여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1219년 몽골 제국이 호라즘을 침략하면서 번영은 끝났다. 호라즘 제국에 대한 몽골의 침략으로 지자흐를 포함한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다. 1220년, 도시는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인구가 살해되었다. 몽골의 지배 하에서 도시는 쇠퇴했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들에게 분할되었고, 지자흐는 차가타이 칸국에 포함되었다. 차가타이 칸국은 1300년경부터 분열되기 시작했다. 1340년대에 칸국은 둘로 분열되었다. 지자흐는 서부 지역에 속했으며, 이 지역은 카잔 칸 이븐 야사우르가 통치했다.

1346년 부족장 아미르 카자간은 카잔을 살해하고 꼭두각시 칸을 세웠다. 1370년, 티무르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했다. 지자흐는 티무르의 영토와 모굴리스탄의 경계 근처에 위치하고 중요한 산길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재건되고 요새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티무르 제국 하에서 중앙 아시아는 예술과 문화가 번성했다. 제국의 북부 국경과 수도 사마르칸트로 가는 무역로에 인접한 지자흐는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국은 15세기 후반에 약해졌다. 1488년, 무하마드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베크 분견대는 치르치크강 전투에서 타슈켄트를 정복하려는 티무르 왕조를 모굴리스탄이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 이 패배 이후 티무르 왕조의 권력은 쇠퇴했고 샤이바니의 권력은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사이 지역에서 커졌다. 1500년에 그는 지자흐를 통제했고, 그 후 10년 동안 부하라, 헤라트 및 주변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샤이바니는 부하라 칸국을 세웠고, 이 칸국은 다음 100년 동안 지자흐를 통치했다. 1600년에서 1700년대 중반까지 지자흐는 자주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이 시대에는 우즈베크 귀족들이 도시를 통치했다. 1740년대에 부하라의 아미르들은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 지도자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 이 시점과 1785년 부하라 토후국의 공식적인 건국 사이에 지자흐는 아미르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60년대까지 부하라 토후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1866년, 지자흐는 부하라 토후국의 주요 요새였다. 중앙 아시아의 러시아 정복은 18세기에 시작되었고, 1860년대에 러시아는 지자흐에서 불과 70마일 떨어진 시르다리야강을 따라 요새선을 통제했다. 1864년, 러시아와 부하라 토후국 사이에 적대 행위가 발생했다.

러시아 장군 미하일 체르냐예프는 지자흐를 점령하려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하여 수비 측의 사망자 6000명에 비해 6명의 사망자를 냈다. 옛 도시는 대부분 파괴되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러시아 정착민들이 들어왔다.[5]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후, 제국 요원들은 1887년 사마르칸트주가 설립된 후 지자흐를 사마르칸트 주의 관할 하에 두었다. 19세기 말에 이 지역은 우즈베크인이 주로 거주했고, 타지크인이 또 다른 4분의 1을 차지했으며, 나머지 인구는 카자흐인과 위구르인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로 구성되었다. 1906년에 타슈켄트로 철도가 건설된 후 러시아 정착민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원한이 생겼고, 토지는 종종 정부에 의해 현지인들로부터 빼앗겨 정착민들에게 넘겨졌다. 러시아의 토지 측량 및 재분배 정책은 목초지 및 기타 주요 상품에 대한 권리가 제한된 원주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1916년, 지자흐는 반러시아 봉기의 중심지였다. 이 봉기는 러시아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전선 뒤에서 현지인들을 육체 노동에 징집하겠다고 발표한 후 발생했다. 이는 러시아가 이 지역 정복 중에 서명한 조약, 즉 현지인을 징집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봉기의 대부분은 지자흐 지역의 남부 지역에 집중되었다. 1917년, 지자흐 출신의 샤로프 라시도프는 훗날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서기가 되었다. 러시아 내전 동안 지자흐는 처음에는 투르케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였다. 중앙 아시아의 민족 경계 획정은 1924년에 시작되었고, 지자흐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배치되었다.

3. 5. 러시아 통치와 소련 시대

1866년, 지자흐는 부하라 토후국의 주요 요새였으며, 러시아령 투르케스탄과의 국경 근처에 있었다. 중앙 아시아의 러시아 정복은 18세기에 시작되었고, 1860년대에 러시아는 지자흐에서 불과 약 112.65km 떨어진 시르다리야강을 따라 요새선을 통제했다. 1864년, 러시아와 부하라 토후국 사이에 적대 행위가 발생했다.

"타슈켄트의 사자"로 불린 미하일 체르냐예프 장군은 지자흐 점령을 시도했으나, 첫 번째는 실패하고 두 번째에 병사 6명의 희생을 내고 겨우 성공했다. 이때, 시민 사망자는 6,000명에 달했다. 구시가는 거의 잿더미가 되었고, 주민이 강제 이주당하는 대신 러시아인이 이주했다.[5]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후, 제국 요원들은 1887년 사마르칸트주가 설립된 후 지자흐를 사마르칸트 주의 관할 하에 두었다. 19세기 말에 이 지역은 러시아 당국이 민족으로 분류한 우즈베크인이 주로 거주했는데, 이들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타지크인이 또 다른 4분의 1을 차지했으며, 나머지 인구는 카자흐인과 위구르인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로 구성되었다. 1906년에 타슈켄트로 철도가 건설된 후 러시아 정착민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원한이 생겼고, 토지는 종종 정부에 의해 현지인들로부터 빼앗겨 정착민들에게 넘겨졌다. 소수의 정착민들만이 지자흐 지역으로 이주했지만, 러시아의 토지 측량 및 재분배 정책은 목초지 및 기타 주요 상품에 대한 권리가 정부에 의해 제한된 원주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1916년, 지자흐는 반러시아 봉기의 중심지였다. 이 봉기는 러시아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전선 뒤에서 현지인들을 육체 노동에 징집하겠다고 발표한 후 발생했다. 이는 러시아가 이 지역 정복 중에 서명한 조약, 즉 현지인을 징집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봉기의 대부분은 지자흐 지역의 남부 지역, 즉 도시와 그 남쪽의 산들에 집중되었다. 1917년, 훗날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가 되는 샤로프 라시도프가 지자흐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내전 동안 지자흐는 처음에는 투르케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였다. 이 지역이 더 범튀르크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더 작은 민족 공화국으로 분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산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벌어진 후, 후자의 입장이 승리했다. 중앙 아시아의 민족 경계 획정은 1924년에 시작되었고, 지자흐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배치되었다.

4. 지리

지자흐는 고대 오아시스이다. 투르케스탄 산맥과 누라타 산맥이 지자흐 주의 남부와 서부 일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북부에는 아르나사이-아이다르-투즈칸 호수가 있어 온화한 기후를 제공한다. 봉우리들은 눈과 빙하로 덮여 있고, 우스투르쇼나 시스템의 산기슭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다.

해발 1800m 높이의 산비탈에서 소나무 숲이 시작되며, 산이 높아질수록 더욱 울창해진다.

이 지역에는 20개가 넘는 동굴이 있다. 전문가들이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페샤와르 동굴을 관찰한 아마추어들은 동굴 내부에 크고 긴 사각형(홀), 붉은 화덕, 돌 벽에 그림, 암각 비문이 많다고 전한다. 긴 동굴은 인위적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다음 홀로 가는 추가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원시 시대에 이곳에 원시인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몰구자르 산 남쪽에 있는 거대한 동굴은 한때 불교 사찰로 사용되었다. "수이서(隋書)"에는 동쪽 차오(Usturshona)에 대해 "예차(Yecha)라는 도시가 있다. 도시에는 닫힌 동굴이 있으며, 일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해발 2600m 높이의 몰구자르 산에 위치한 문화 유적 타바쿨라크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바흐말 지역의 악타쉬 강에는 가파른 산에 거대한 묘지가 있고, 그 옆에는 웅장한 협곡 "피의 방울"이 있다.

자아민 지역의 산 정상에 있는 수파 광장에서 솟아나는 샘, 인근 무즈불라크, 박흐말의 높은 산 정상에 지어진 정원은 모두 고대 역사를 말해준다. 산에 붙어 있는 강, 빙하에서 흘러내리는 샘, 계곡을 덮고 있는 숲, 약 100가지 약초, 지자흐 지역의 포이마르 강둑, 높이 20m의 바위 노두 중간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자연 기념물이며, 모두 원시인의 존재를 증명한다.

4. 1. 기후

지자흐는 지중해성 기후(쾨펜 ''Csa'')의 급격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1월 최저 기온은 평균 -4°C이고, 7월 최고 기온은 평균 34.9°C이다. 산기슭의 기후는 사막과 대초원보다 온화하다. 연 강수량은 남쪽에서 400mm에서 500mm이고 북쪽에서는 250mm에서 300mm이다. 무상 기간은 총 210일에서 240일 사이이며, 연간 일조 시간은 총 2800시간에서 3000시간이다. 산에서 많은 강이 흐르는데, 그중 가장 큰 강은 상조르 강과 자아민 강이다.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평균 최고 기온 (℃)6.7°C9.1°C15.6°C22.2°C28.4°C34°C35.4°C33.8°C28.8°C22.2°C13.9°C8°C21.5°C
평균 기온 (℃)2°C3.8°C9.8°C15.9°C21.6°C26.8°C28.3°C26.3°C20.7°C14.2°C7.8°C3.1°C15°C
평균 최저 기온 (℃)-1.5°C-0.2°C5.1°C10.3°C14.8°C18.7°C20°C18.2°C13.1°C8°C3.3°C-0.5°C9.1°C
강수량 (mm)41.3mm57.4mm69mm60.5mm39.3mm11mm2.9mm1.8mm4.7mm21.2mm47.5mm46.2mm402.8mm
평균 강수일수 (≥ 1.0 mm)1314141110522361012102
평균 일조 시간92.7107.1154.2217.5302.7355.3388.0368.0305.4229.7129.090.92740.5



출처: NOAA[6]

4. 2. 자연 환경

지자흐는 고대 오아시스이다. 지자흐 주의 남부와 서부 일부를 둘러싼 투르케스탄 산맥과 누라타 산맥, 그리고 북부에 있는 아르나사이-아이다르-투즈칸 호수는 온화한 기후를 제공한다. 봉우리들은 눈과 빙하로 덮여 있고, 우스투르쇼나 시스템의 산기슭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다.

해발 1800m 높이의 산비탈에서 소나무 숲이 시작된다. 산이 높아질수록 소나무 숲은 더욱 울창해진다.

이 지역에는 20개가 넘는 동굴이 있다. 전문가들이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페샤와르 동굴을 관찰한 아마추어들은 동굴 내부에는 크고 긴 사각형(홀), 붉은 화덕, 돌 벽에 그림, 암각 비문이 많다고 기억한다. 또한 긴 동굴은 인위적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다음 홀로 가는 추가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원시 시대에 이곳에 원시인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몰구자르 산 남쪽에 있는 거대한 동굴은 한때 불교 사찰로 사용되었다. "수이서(隋書)"에는 동쪽 차오(Usturshona)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예차(Yecha)라는 도시가 있다. 도시에는 닫힌 동굴이 있으며, 일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낸다." 또는 해발 2600m 높이의 몰구자르 산 어깨에 위치한 문화 유적 타바쿨라크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바흐말 지역의 악타쉬 강에는 가파른 산의 어깨에 거대한 묘지가 있고, 그 옆에는 웅장한 협곡 "피의 방울"이 있다.

또는 자아민 지역의 산 정상에 있는 수파 광장에서 솟아나는 샘, 인근 무즈불라크, 박흐말의 높은 산 정상에 지어진 정원은 모두 고대 역사를 말해준다. 산에 붙어 있는 강, 빙하에서 흘러내리는 샘, 계곡을 덮고 있는 숲, 약 100가지 약초, 지자흐 지역의 포이마르 강둑, 높이 20m의 바위 노두 중간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자연 기념물이며, 모두 원시인의 존재를 증명한다.

5. 인구

2020년 기준 도시 인구는 179,900명이다. 인구의 압도적인 부분은 우즈베크인이다. 도시 주민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 인구의 전반적인 증가와 더불어, 이 도시가 행정 중심으로서 자국민과 다른 지역의 방문객들에게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2011년 기준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민족인구비율(%)
우즈베크인140,700명87.8%
러시아인6,300명3.9%
타지크인2,720명1.7%
기타 (카자흐인, 타타르인, 우크라이나인, 키르기스인 등 포함)10,600명6.6%


6. 교육


지자흐 국립 교육 대학교

7. 스포츠

지자흐는 오랜 스포츠 전통을 가진 도시이며, 프로 스포츠가 활발히 발전하고 있다. 스포츠 발전은 지자흐주 문화체육부에서 관리한다.

이 도시에는 축구 클럽 "소그디아나"(1970-1972년 및 1975-1976년에는 "지자흐"라고 불림)가 있다. 이 팀은 2015년에 재건되어 현재 11,65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경기장인 "소그디아나" 스포츠 단지의 경기장에서 홈 경기를 치른다(이전에는 "중앙" 경기장, "지자흐" 경기장이었음). 국내 최상위 축구 리그인 우즈베크 리그에 소속된 PFC 소그디아나 지자흐가 이 곳을 본거지로 하고 있다.

8. 교통

Trans-Caspian railway


지자흐는 주요 교통 중심지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중앙 및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을 연결하는 철도고속도로가 이 도시를 통과한다.

상조르강 계곡을 따라 "빅 우즈베크 루트" 고속도로가 지나가며, 타슈켄트사마르칸트를 연결한다. 이 두 도시는 우즈베키스탄의 가장 큰 도시이자 두 개의 수도이다.

타슈켄트사마르칸트를 연결하는 전철화된 철도 노선이 지자흐 시를 통과하며, 호보스 시를 지난다. 과거에는 시르다리야 역을 통과하는 비전철화된 철도 노선도 있었으나 1990년대에 운행이 중단되었다.

2010년까지 이 도시에서는 트롤리 버스 교통망이 운영되었다. 트롤리 버스는 Isuzu 섀시를 기반으로 한 SamKochAvto에서 생산된 버스와 대우 다마스 마이크로카를 기반으로 한 셔틀 버스로 대체되었다.

9. 주요 명소

10. 유명 인물

참조

[1] 웹사이트 Classification system of territorial units of the Republic of Uzbekistan https://stat.uz/uplo[...] The State Committee of the Republic of Uzbekistan on statistics 2020-07
[2] 웹사이트 Permanent population of Jizzakh region as of July 1, 2020 https://data.gov.uz/[...] Republic of Uzbekistan Open Data Portal
[3] 서적 Туркестанская область. Заметки Бекчурина (рус.).
[4] 서적 Mu'jam ul-Buldān https://books.google[...] c. 1220
[5] 서적 Туркестанская область. Заметки Бекчурина.
[6] 웹사이트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Climate Normals for 1991-2020 — Jizzakh https://www.nodc.no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2024-01-19
[7] 웹사이트 ZiyoNET › Ta'lim muassasalari › Maktablar http://institutions.[...] 2021-02-01
[8] 웹사이트 ZiyoNET › Ta'lim muassasalari › Litseylar http://institutions.[...] 2021-02-01
[9] 웹사이트 ZiyoNET › Ta'lim muassasalari › Kollejlar http://institutions.[...] 2021-02-01
[10] 웹사이트 Uzbekistán: Las ciudades más grandes con estadísticas de población http://population-st[...] population-statistics.com 2012-12-20
[11] 웹인용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Climate Normals for 1991-2020 — Jizzakh https://www.nodc.noa[...] 미국 해양대기청 202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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