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급
1. 개요
윤급은 1697년에 태어나 1770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김창협, 이재, 박필주에게 수학하고 172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효장세자의 사부를 지냈으나,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을 비판하며 여러 차례 파직과 좌천을 겪었다. 청나라에 사행하여 《근암연행일기》를 저술했으며, 사도세자 공격에 가담했다. 그는 노론 강경파로서 성리학적 원칙주의를 따랐고, 서예에도 능하여 독자적인 서체를 확립했다. 저서로는 《근암집》 등이 있으며,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사후 문정의 시호를 받았고, 불천지위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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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년 출생 -
카날레토
카날레토는 "작은 운하"라는 뜻의 예명으로 알려진 베네치아 출신 화가로, 베두티스타 화풍을 발전시켜 베네치아 건축물과 도시 풍경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하는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뛰어난 투시도법과 빛의 묘사가 특징이다. -
1697년 출생 -
카를 7세
카를 7세는 바이에른 선제후이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와 동맹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으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전쟁과 영토 상실을 겪었고 바이에른 로코코 시대의 문화적 절정기를 이끌었다. -
1770년 사망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는 베네치아 출신의 로코코 화가로, 밝고 화려한 색채와 환상적인 구성을 통해 우디네 대성당,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마드리드 왕궁 등 유럽 각지의 궁전과 교회를 장식하며 18세기 유럽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770년 사망 -
스즈키 하루노부
스즈키 하루노부는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화가로, 다색 목판화 기법인 니시키에를 발전시켜 우키요에 발전에 기여했으며, 미타테에 양식으로 에도 시대 생활상을 담아낸 섬세하고 서정적인 작품을 남겼다. -
서예가 -
윤관
고려 시대 윤관은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 무신이자 정치가로, 숙종 대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고 여진 정벌을 주도하여 동북 9성을 축조했으나, 정치적 음모로 실각한 후 그의 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서예가 -
김집 (1574년)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자 조선 중기 문신이자 예학자인 김집은 율곡 이이, 성혼의 성리학과 송익필의 예학을 계승하고 인조반정 공신을 비판하는 등 강직한 성품을 보였으며, 『신독재문집』 등의 저서를 남기고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조선 후기 예학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 문묘에 배향되고 동방 18현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2. 생애
2.1. 출생과 가계
윤급은 1697년 음력 2월 30일 황해도관찰사 윤세수(尹世綏)와 이하(李夏)의 딸 전주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 정승인 의정부영의정 해평부원군 윤두수(尹斗壽), 보국숭록대부 해원부원군 윤근수(尹根壽) 형제의 후손으로, 윤두수의 넷째 아들 윤휘의 4대손이다. 그의 가계는 윤근수, 윤두수 형제가 집안을 일으킨 뒤 5대조 윤두수, 종5대조 윤근수, 종고조부 윤방이 모두 공신으로 부원군의 봉작을 받았다. 고조부 윤휘는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부 윤면지(尹勉之)는 첨정을 지내고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자 윤계는 호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아버지는 윤세수는 만학도로 4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47세인 1705년에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사간과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서인이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자, 그의 친족들도 노론과 소론으로 각각 갈라졌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윤계 때 노론을 선택하였다.
윤급은 어려서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농암 이재(李縡)의 문하에서도 수학했고, 여호 박필주(朴弼周)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2.2. 관료 생활
2.2.1.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725년(영조 1)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시권(試券, 답안지)을 봉해서 제출할 때 실수로 나이와 본관을 쓰지 않고 제출하여, 격식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탈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글재주를 아깝게 여긴 사간원헌납 채응복 등 시험관들의 구제 상소로 구제되었다. 이때 교리(校理) 이병태(李秉泰)와 수찬(修撰) 권적(權) 등이 복과(復科)를 정지하고 과시(科試)를 엄격히 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아 구제받을 수 있었다.
의정부사인(舍人), 검상(檢詳)을 지내고, 여러 벼슬을 거친 뒤 시강원설서로 효장세자의 사부가 되어 세자를 보도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효장세자는 일찍 요절하고 만다. 그뒤 사헌부지평, 수찬, 교리 등을 지냈다. 1734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소론 이조판서 송인명의 전주권(銓注權, 인사행정)을 독점하여 불법을 자행한다고 비난하다가 붕당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했다며 영조가 오히려 그를 파직되었다.
2.2.2. 탕평책 반대 운동
1744년 탕평책(蕩平策)을 소신도 없고, 선명성도 부족한 인사라며 직설적으로 반대하다가 영조의 진노를 사서 오히려 인사행정의 잘못을 지적받고 일신현감(一新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746년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고, 그해 소론 재상들을 탄핵하였다. 그해 최석항(崔錫恒)이 죽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유언술(兪彦述), 사헌부 지평 민백상(閔百祥), 홍문관 수찬 황경원(黃景源), 사간원 정언 안윤행(安允行) 등과 함께 최석항과 조태구(趙泰耉)가 무옥(신임환국)을 사주했다며 탄핵하여 관직을 추탈시켰다.
1749년 이조판서인 소론 정우량(鄭羽良)이 같은 당(黨) 사람인 소론 이창수(李昌壽)를 이조참의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하다 홍원현감으로 좌천되었다.
2.2.3. 청나라 사행과 외교 활동
1746년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근암연행일기/近庵燕行日記중국어를 저술했다.
2.2.4. 사도세자 공격 가담
윤급은 김상로, 홍계희, 김귀주, 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이로 인해 정조 즉위 후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순조 때 복권되었다.
2.3. 은퇴와 최후
1762년 판의금부사로 승진, 1763년 참찬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당시 의정부영의정 신만(申晩)의 아들 신광집(申光輯)의 첫 관직을 임명하는 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곧 다시 복관되어 의정부우참찬이 되었다. 그는 영조의 탕평책을 여러 번 반대하다 파직 또는 좌천되었으나 시문과 서체에 능하고 고전에 밝아 영조의 총애를 받고 계속 재기용되어 이후에도 이조판서, 판의금부사로 기용되었다. 김상로, 홍계희, 김귀주, 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공격하는데 가담하였으며 한성부 판윤, 의정부좌참찬 등을 지냈다. 이후 다시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좌참찬에 이르러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관료생활 와중에도 서실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는데, 형 윤섭(尹涉)의 손자로 종손이자 후일 정조의 소론 재상인 윤시동은 그의 문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지만, 문인이자 종손자인 윤시동은 소론이었다.
글씨에 뛰어나 그만의 독특한 글씨체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문집 〈근암집 近庵集〉, 조정 출사 시의 활동을 기록한 〈근암입조시말록 近庵立朝始末錄〉, 편지·서간 모음집인 〈근암묵적 近菴墨蹟〉,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올 때의 견문 일기인 〈근암연행일기〉 등이, 글씨로는 종음군식표(종蔭軍湜表), 이도양표(李度陽表), 1744년(영조 20) 쓴 속오례의 서문 등이 있다. 1770년 5월 19일에 병으로 죽었다.
2.4. 사후
윤급의 묘는 아들 윤득의가 장단부 부청 건너편, 장단향교 맞은편 자리에 명당자리로 알려진 곳에 조성했다가 물의를 빚었다. 정승 송인명(宋寅明)은 며느리를 그 곳에 장사했다가 장단부 선비들의 상소로 즉시 이장하였으나, 윤득의는 장단의 유지들을 뇌물로 매수하고 향교 맞은편 자리에 윤급의 시신을 안장했다. 이후 정조 즉위 후 대간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묘지는 이장되고 윤득의는 방축(放逐)당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 즉위 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801년(순조 1년) 복관되었다. 1805년(순조 5년) 절개를 지키는 성품이라 하여 특별히 문정(文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1887년(고종 24년) 5월 3일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의 상소로, 고종의 특명으로 부조지전(不祧之典)을 하사받고 불천지위가 되었다.
3. 정치 활동
3.1. 탕평책 반대와 노론 강경파로서의 활동
4. 사상과 신념
4.1. 성리학적 원칙주의
5. 작품 활동
wikitext
== 저술 ==
윤급은 〈근암집〉, 〈근암입조시말록〉, 〈근암연행일기〉, 〈근암묵적〉 등을 저술하였다.
== 서예 ==
윤급은 글씨에 뛰어났으며, 독자적인 서체를 확립하였다. 그의 글씨는 종음군식표(종蔭軍湜表), 이도양표(李度陽表), 1744년에 작성된 속오례의 서문 등에 남아 있다.
5.2. 서예
윤급은 글씨에 뛰어났으며, 독자적인 서체를 확립하였다. 그의 글씨는 종음군식표(종蔭軍湜表), 이도양표(李度陽表), 1744년에 작성된 속오례의 서문 등에 남아 있다.
6. 가계
윤급의 가계는 고조부 윤휘부터 아버지 윤세수까지 여러 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증조부는 윤면지이며, 조부는 윤계(1622년 6월 27일 ~ 1689년 12월 20일)이다. 조모는 풍산홍씨(豊山洪氏)로 홍영(洪霙)의 딸이다. 아버지 윤세수(1658년 11월 21일 ~ 1714년 12월 26일)의 생모는 박씨(朴氏)로 박휘길(朴暉吉)의 딸이다. 이외 한산이씨(韓山李氏)도 조모이다.
아버지 윤세수의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형제로는 형님 윤식(尹湜, 통덕랑(通德郞) 역임), 형님 윤섭(尹涉, 행수원도호부사(行水原都護府使) 역임), 윤흡(尹潝), 동생 윤업(尹澲)이 있다. 부인은 우봉이씨(牛峰李氏)이며, 슬하에 아들 윤득의(尹得毅)를 두었다. 장인은 이만견(李晩堅)이며, 외조부는 이하(李夏)이다. 진외증조부는 박휘길(朴暉吉)이다.
7. 평가와 비판
윤급은 자기 소신과 개성이 강한 원칙론자였다. 타협을 거부하고 강경한 원칙론적인 언론으로 소론 및 남인과 심하게 갈등하였으며, 탕평론을 노골적으로 계속 반대하여 영조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과격한 언론으로 인해 영조가 부담을 느껴 자주 파직 또는 좌천되었으나,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의로운 주장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그를 신뢰하였다.
7.1. 긍정적 평가
윤급은 자기 소신과 개성이 강한 원칙론자였다. 타협을 거부하고 강경한 원칙론적인 언론으로 소론 및 남인과 심하게 갈등하였으며, 탕평론을 노골적으로 계속 반대하여 영조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과격한 언론으로 인해 영조가 부담을 느껴 자주 파직 또는 좌천되었으나,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의로운 주장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그를 신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