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정 (19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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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우정은 192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 신학자, 정치인이다. 한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해방신학과 페미니즘을 강의했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서기로 활동하며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70년 교수직 사퇴 후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기독교 페미니즘 지도자로 활동하며 반독재 운동, 기생 관광 반대 운동 등을 펼쳤다. 1992년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여성 의무 할당제를 주장하며 여성 권익 보호에 힘썼고, 김대중 정부에서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 상임의장 등을 역임했다. 2002년 사망했으며, 여성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늦봄통일상, 이우정 평화상 등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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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정 (192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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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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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호 | 춘파(春坡) |
인물 정보 | |
출생 | 1923년 3월 22일 |
사망 | 2002년 4월 14일(향년 79세) |
직업 |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박순천 |
2. 생애
이우정은 1923년 경기도 포천시에서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했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봉건 가족 제도에 반감을 가졌다.[4] 부모와 형제들이 일찍 사망하여 둘째 오빠와 함께 고아가 되었고, 둘째 오빠는 한국 전쟁 때 조선인민군에 끌려가 사망했다.[4] 이우정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4]
1940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원에 입학하여 1951년 졸업했다. 이후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53년 귀국하여 한신대학교 교수가 되었다.[4] 1970년까지 해방신학과 페미니즘을 가르치며 여성운동가들을 길러냈고,[7] 문동환 목사 등과 '새벽의 집'이라는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다.[4]
1970년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으며,[7] 청계천 공장 여공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8] 1972년부터는 기생관광 반대 운동과 성매매 추방 운동을 추진했다.[5] 1976년 서울여자대학교에서 해직된 후에는[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개혁추진운동 집행위원으로서 한국방송공사(KBS) 시청료 거부운동을 전개했다.[4]
1977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에 선출되어 기층여성의 권익옹호와 최루탄 추방운동 등을 추진했다.[4] 1988년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했고,[4] 1990년 3당 통합에 반대하며 김대중을 지지했다.[4] 1992년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하여[4]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92년 9월 1일 대한민국 여성계 대표 30명을 이끌고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참석차 평양을 방문했다.[12] 1997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를 조직하고 수석대표가 되었다.[13]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 상임의장 등을 역임했다.[13]
국회의원 재직 중 호주제 폐지 법안 발의와 가정폭력처벌법 제정을 위해 노력했고, 여성 의무 할당제를 주장했다.[1] 2001년 민주화 유공자 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박종철과 이한열의 명예 회복을 추진했다.[14]
2002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서 향년 79세로 사망했다.[17]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유언에 따라 각막을 기증했다.[18][6][17]
2. 1. 생애 초반
이우정은 1923년 경기도 포천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고,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일찍이 끝났지만,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했고, 이우정이 태어날 때는 99칸의 대 저택을 포천읍내에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해조는 신소설, 신문학의 개척자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완강한 보수주의자였다. 이우정은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봉건 가족 제도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부모가 일찍 죽고 형제들 대부분 사망하여 이우정은 둘째 오빠와 함께 고아가 되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있던 둘째 오빠는 해방 후 판사가 되었지만, 한국 전쟁 때 조선인민군에 끌려가 광산에서 중노동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4] 이우정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으며, 조카가 몇 명 있었다.[4]
1940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조선신학원(한신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당시 조선신학원에는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명망있는 교수들이 숱하게 자리잡고 있어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을 키워갈 수 있었다.[4] 1951년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유학, 토론토 대학교 내 엠마누엘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53년 귀국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이우정은 1923년 경기도 포천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고,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후손이었다.왕족으로서의 예우는 일찍이 끝났지만,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했고, 이우정이 태어날 때는 99칸의 대 저택을 포천읍내에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해조는 신소설, 신문학의 개척자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완강한 보수주의자였다. 이우정은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봉건 가족 제도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
2. 1. 2. 불우한 청소년기
부모가 일찍 죽고 형제들 대부분 사망하여 이우정은 둘째 오빠와 함께 고아가 되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있던 둘째 오빠는 해방 후 판사가 되었지만, 한국 전쟁 때 조선인민군에 끌려가 광산에서 중노동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4] 이우정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으며, 조카가 몇 명 있었다.[4]2. 1. 3. 학창 시절
1940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조선신학원(한신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당시 조선신학원에는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명망있는 교수들이 숱하게 자리잡고 있어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을 키워갈 수 있었다.[4] 1951년 5년 만에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였다.1951년 캐나다로 유학, 토론토 대학교 내 엠마누엘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53년 귀국하였다.
2. 2. 교육 활동과 노동 운동
이우정은 1953년 한신대학교 교수가 되어 1970년까지 해방신학과 페미니즘을 강의했다. 한신대학교 교수 재직 중 문동환 목사 등 16명과 함께 '새벽의 집'이라는 공동체 생활을 했으며,[4] YMCA 여성 기독교 청년회에도 참여했다. 1970년 한신대학교 교내 분쟁으로 교수직을 사퇴하였다.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페미니즘 운동가들을 길러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지 못하고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특히 여제자들에게 이러한 신학 사상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주었다.[7] 그의 제자들은 이후 각종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7]
교수직 사퇴 직후 서울 청계천 등 영세 공장단지 여공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작업장의 비위생, 사고 위험 요인을 목격한 후, 해방신학과 페미니즘 운동 외에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8] 이후 기독교 페미니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노동자 처우 개선 운동에도 꾸준히 참여하였다.[6]
2. 2. 1. 교육 활동과 기독교장로회 활동
1953년 한신대학교 교수가 되어 해방신학과 페미니즘을 강의하였으며 1970년까지 재직했다. 같은 해 김재준 목사가 예수교장로회에서 이단으로 파문당한 뒤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독립했는데, 이우정은 바로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서기로 활동하였다.[5] 그는 학생 때나 교수 시절에나 수줍음을 잘 탔으며, 늘 땅만 보고 다녀 '벙어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신대 여자 기숙사 사감을 하면서 여학생들과 '언니', '동생'하며 허물없이 지내던 시절부터 여성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7]한신대학교 교수 재직 중 문동환 목사 등 16명과 함께 '새벽의 집'이라는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다.[4] 그밖에 대학 교수 활동 이외에도 YMCA 여성 기독교 청년회에도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1970년 한신대학교 교내 분쟁으로 교수직을 사퇴하였다.
2. 2. 2. 여성주의 운동가 양성
대학에서 그는 신학을 가르치면서도 페미니즘 운동가들을 길러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기존의 보수 교단과 달리 역사 비판적 성격이 강했는데, "성서의 글은 인간의 글이고, 시대의 글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시대를 이해해야 하고, 성서를 분석하고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7] 이우정 역시 이러한 견해에 호응하여 신학을 가르치면서도 사회 문제까지 함께 보도록 가르쳤고,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하여 젊은 여학생들에게 각성을 요구하였다.그는 우리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지 못하고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특히 여제자들에게 이러한 신학 사상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주었다.[7]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이후 각종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여성운동에서도 밑바탕이 됐다.[7] 이후 그는 많은 기독교 페미니즘 운동가들을 길러냈다.
2. 2. 3. 노동운동 참여 계기
교수직 사퇴 직후 서울 청계천 등 영세 공장단지 여공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작업장의 비위생, 사고 위험 요인을 목격한 후, 해방신학과 페미니즘 운동 외에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8]이후 기독교 페미니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노동자 처우 개선 운동에도 꾸준히 참여하였다.[6]
2. 3. 반독재 운동과 여성 운동
1970년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을 계기로 이우정은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동시에 노동선교 활동도 시작했다.[7] 평화시장 뒷골목 피복공장에서 어린 여공들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목요기도회에 오는 여공들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어 노동운동에 참여했다.[7]1972년부터 기생관광 반대 운동과 윤락 업소 단속 운동을 추진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이끌며 일본 기독교인들과 교류하던 중,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국 여성들을 농락하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부가 외화 획득을 명분으로 이를 묵인하는 것에 분노했다.[5] 이우정은 윤락여성들을 직접 설득하고 정부 부처를 찾아다니며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문교부 과장이 "지금은 과도기니 참아달라"며 "필리핀에서는 60USD지만 우리는 100USD나 된다"고 하자,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라면 당신 딸부터 내놓으세요."라고 일갈했다.[5] 1981년 이후 성매매 추방 운동과 캠페인을 추진했다.
1976년 서울여자대학교가 반성문을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해직된 후, 기독교 페미니즘, 노동, 인권 운동과 유신 정권 비판 활동에 전념했다.[4] 1977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개혁추진운동 집행위원으로서 한국방송공사(KBS) 시청료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군사 독재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언론에 대한 시민운동으로, KBS가 정권 홍보 방송이니 시청하지 말고 시청료 납부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1977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에 선출되어 기층여성의 권익옹호와 최루탄 추방운동 등을 추진했다. 1989년 KNCC 부회장, 1990년 한국여성단체연합회 고문을 역임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통일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보수 세력의 공격에도 유창한 언변으로 반박했으며, 노태우 정부 때 보안사 사찰대상 민간인[11] 명단에 올랐다.
1988년 13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총선거 직전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4] 1990년 3당 통합으로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손을 잡자, 김대중을 지지하며 재야 세력을 규합해 신민당을 창당하는 데 기여했다.[4]
2. 3. 1. 노동운동 참여
이우정은 1970년 가을에 있었던 전태일 분신자살사건을 접하고 노동운동에 본격 투신하였고, 동시에 노동선교 활동도 추진하게 되었다.[7]그는 평화시장 뒷골목의 ‘삼일사’라는 피복공장에서 어린 여공들이 착취당하는 참상을 목격한 뒤 노동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목요기도회에 찾아오는 여공들의 구원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료인 박형준 목사와 조화순 목사가 이미 빈민운동과 노동현장에 참여해 노동자들과 아픔을 나누고 있었다.[7] 유신시절 기독교회관 대강당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민주인사들이 모였다. 이른바 ‘목요기도회’였다.[7] 이우정은 매일 기독교회관 대강당에 나갔고 목요기도회에도 꾸준히 참여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기도회 참여자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도청했다. 그러나 목요기도회는 억울한 이들과 그 가족들이 찾아드는 공간으로 변해갔다. 수사기관에 붙들려갔다가 풀려난 사람은 반드시 이곳에 찾아와 진실을 밝혔다. 그래서 이 모임은 당시의 인권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모임이 됐다. 이곳말고는 어디에도 그들의 아픔을 들어줄 곳이 없었다. 이우정 선생은 그곳에서도 ‘중심’이었다.[7] 이우정은 비기독교신자인 운동가들도 받아들여 쉼터 내지는 피난처로 삼게 했다.
2. 3. 2. 기생 관광 반대 운동
1972년부터 기생 관광 반대 운동과 윤락 업소 단속 운동을 추진했다. 1960년대 말 교수 시절, 그리고 1970년대 초 해직된 후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이끌 무렵 일본에 자주 왕래하며 일본 기독교인들과 교류했다.[5] 그때 이우정에게 과제로 부여된 것이 ‘기생관광’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굴욕외교를 벌이던 당시,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은 한국 여성들을 농락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외화획득이라는 명분으로 이를 공창(公娼) 비슷하게 묵인했다.[5]하지만 이우정은 그런 불의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윤락여성들을 직접 설득하기도 하고, 정부 관련부처를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기도 하며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놓았다.[5] 당시 문교부의 한 과장은 그에게 “지금은 과도기니 조금만 참아달라”며, “필리핀에서는 60USD지만 우리는 100USD나 된다”고 덧붙였다.
이에 이우정은 정색을 하고 매섭게 쏘아붙였다.[5]
:그게 그렇게도 자랑스러운 일이라면 당신 딸부터 내놓으세요.[5]
그는 기생관광 반대운동이 성과를 거두자 1981년 이후에는 성매매 추방 운동과 캠페인을 추진하였다.
2. 3. 3.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
1976년 서울여자대학교가 반성문을 요구했으나 이우정은 이를 거절하고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이후 기독교 페미니즘 운동, 노동운동, 인권 운동, 유신 정권 비판 강연 및 칼럼 등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독재정권에 맞선 언론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4] 1977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개혁추진운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한국방송공사(KBS) 시청료 거부운동을 전개했다.여신도들의 금반지를 모아 동아일보에 십여 차례 격려 광고를 냈고, KBS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에 앞장섰다. 이는 우리나라 불복종운동의 선구이며,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언론에 대한 대대적인 시민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4] 이우정은 한국방송공사가 군사 독재정권의 어용 방송이며 정권 홍보 방송이니 KBS 방송을 시청하지 말고, KBS 방송 시청료 납부를 거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우정은 다른 기독교인사들, 한빛교회와 갈릴리교회, 목요기도회를 중심으로 뭉쳤고, 해직교수들과 학생들은 서울 충정로에 있는 한신대 선교교육원과 종로5가 기독학생총연맹(KSCF)에 모여 시국에 대한 담론을 했다.[4] 그는 한신대 선교교육원에서 해직교수인 백낙청, 박현채, 리영희, 정창열, 강만길 등과 함께 민중신학과 우리 역사, 문학 등에 대해 토의하면서 보냈다.[4]
1977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에 선출되어 3년간 재직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기층여성의 권익옹호와 최루탄 추방운동 등을 추진했다. 198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부회장, 1990년 한국여성단체연합회 고문을 역임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통일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해방신학, 여성운동 등에 대한 반감을 품은 보수 세력의 공세가 있었지만 유창한 언변으로 이를 모두 반박하였다. 결국 노태우 정부 때 이우정은 보안사 사찰대상 민간인[11] 명단에 오르게 된다.
2. 3. 4. 3당 통합과 김대중 지원
1988년 13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총선거 직전 김영진, 박영숙, 임채정 등의 재야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하였다.[4] 1990년 3당 통합으로 김영삼이 통일민주당을 이끌고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통합을 하자 그는 김영삼을 비판하고 김대중의 편에 서게 되었다.[4]13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 진출에 뜻을 두지 않다가 3당 합당을 계기로 그는 김대중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4] 그는 재야 세력을 규합, 신민주연합을 만들어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와 손잡고 다시 신민당을 만들기에 이른다.[4]
2. 4. 생애 후반
1991년 신계륜, 박우섭과 함께 신민주연합당을 창당하여 신민당 수석최고위원이 되었고, 3월 30일 평화민주당과 합당했다. 그해 8월 박찬종 등과 야권통합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공동 의장이 되어 야권 정당, 시민사회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1992년 5월 제14대 총선에 비례대표로 입후보,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4] 1991년 민주당 최고의원에 선출되었다. 국회 진출 이후 이우정은 정치권에서 여당 및 보수 세력을 상대로 장내 투쟁을 벌이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국회 재직 중에는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과 국회 외교통일위원분과 위원을 맡았고, 1994년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2년 9월 1일 대한민국 여성계 대표 30명을 이끌고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참석차 평양을 다녀왔다.[12] 1996년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새정치국민회의로 입당하여 상임고문이 되었다.
1997년 박용길 등과 함께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를 조직하고 수석대표가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다.[13] 1998년 통일부 통일자문회의 고문, 2000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등에 위촉되었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에 다시 위촉되고, 같은 해 민주화 유공자 심의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민주화 운동 참가자들의 심사와 보상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1999년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사, 2000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민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국민정치연구회에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13]
2. 4. 1. 통일 운동과 여성 운동
1991년 3월 23일 신계륜, 박우섭과 함께 신민주연합당을 창당하였고, 신민당 수석최고위원이 되었으며, 3월 30일 평화민주당과 합당했다. 그 해 8월 박찬종 등과 함께 야권통합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공동의장이 되어 야권 정당, 시민사회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1992년 5월 제14대 총선에 비례대표로 입후보, 민주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해 김영삼의 대북 강경책과 여성 정치인의 공천 배제를 비판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4] 1991년 민주당 최고의원에 선출되었다. 국회 진출 이후 이우정은 정치권에서 여당 및 보수세력을 상대로 장내 투쟁을 벌이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정계 진출 이후에도 여성 운동과 성매매 추방 운동, 호주제 폐지 발의 등을 추진하였다.
국회 재직 중에는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과 국회 외교통일위원분과 위원을 맡았다.
1992년 9월 1일 대한민국 여성계 대표 30명을 이끌고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참석차 평양을 다녀왔다.[12] 1994년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96년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새정치국민회의로 입당하여 상임고문이 되었다.
2. 4. 2. 호주제 폐지 발의와 가정폭력 문제 조명
국회의원으로 재직 중 그는 이태영 등이 추진하던 호주제 폐지 운동을 계승하여 호주제 폐지 법안과 호주제의 위헌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남성 의원들은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였고, 보수 세력에게 공격당하였다.[1]한편 성폭력에 대한 엄격한 법 적용을 주장하였고, 동시에 가정폭력처벌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무산되었다.[1]
"가정폭력처벌법을 성폭력특별법 안에 집어넣으려고 여성계와 여성 의원들이 그렇게 노력했는데, 국회 안에서 남자 의원들이 아무도 동의를 안 해 주는 거야. 만약에 그런 법을 만들면 남자들이 아침에 출근 못하고 줄줄이 잡혀간다나. 여편네 두들겨 패는 정도는 흔히 있는 것 아니냐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거야. 법사위원회에 있는 의원들이 모두 남자이니 여자 사정을 어떻게 알아." (이야기 여성사 이우정 편)[1]
성폭력특별법 주장은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져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대대적인 성매매 단속으로 이어졌다.[1]
2. 4. 3. 여성 의무 할당제 주장
국회의원으로 재직 중 이우정은 여성 의무 할당제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정치는 호흡하는 공기와 같다. 그 공기를 정화하려면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해야 한다.’는 지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여성의 최대 취약점이 정치적 열세임을 절감하고 여성할당제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3] 그러나 그의 여성 의무 할당제 주장은, 남자들이 정당하게 채용시험을 보고 들어갈 자리를 강제로 빼앗는다는 점과 군 복무 등으로 남성에게 시간적, 물리적 제약이 있다는 이유로 보수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2. 4. 4.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1997년 박용길 등과 함께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를 조직하고 수석대표가 되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대중 정권하에서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다.[13] 1998년 통일부 통일자문회의 고문, 2000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등에 위촉되었다. 2001년에는 다시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에 위촉되고 그 해 민주화 유공자 심의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민주화 운동 참가자들의 심사와 보상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1999년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사, 2000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이 되었다. 1999년 4월에는 민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국민정치연구회에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13]
2. 5. 민주화 운동가 명예 회복과 최후
2001년 3월 박종철과 이한열의 명예 회복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다.[14] 그해 3월 9일 민주화 유공자 심의위원회 분과위에서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박종철과 이한열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이한열, 박종철의 공식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15]만년에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대표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으로 활동했다.[16]
2002년 5월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노환으로 입원해 있다가 28일 숙환으로 의식을 잃고,[17] 5월 30일 오후 4시 30분경 서울대학교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했다. 향년 79세였다.
2. 6. 사후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고 이우정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가 구성되었다.[18][6]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사후 각막을 기증했다.[17] 장례식 날, 한신대 교정에는 생전에 그가 가장 좋아했던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울려 퍼졌다.[4]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의 장례는 주변 지인과 제자들에 의해 사회장(5일장)으로 치러졌고, 재야운동가인 김상근 목사가 호상을 맡았다.[17]2004년 12월 11일, 사단법인 통일맞이(이사장 장영달 열린우리당 의원)는 이우정이 통일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기려 늦봄통일상[19]을 추서하였다. 같은 날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2층 대강당에서 시상식이 개최되었으며, 유족 대표로 조카인 이근기가 대리 수상했다.[20]
2004년 5월에는 그를 기리는 이우정 평화상이 제정되었다.[21]
3. 평가와 비판
여성의 권익 보호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제1세대 여성운동가이자,[6] 여성운동과 기독교 인권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7]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기독교 인권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진보적 민권운동에 헌신했다는 평가도 있다.
문동환 목사는 이우정을 "현장에서 성장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이우정의 제자인 김성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선생은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 자신의 틀을 가지고 운동한 분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고 회고했다.[5] 민중에 대한 사랑이 이우정에게 끝없는 용기와 힘을 주었다는 것이다.[5]
한국 여성운동, 민주화운동, 평화운동의 큰 별이자 기독교 여성운동계의 거목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6]
4. 수상 경력
5. 학력
한신대학교 신학 학사
6. 저서
- 《여성신학의 이해》(1980)
- 《한국기독교여성 백년의 발자취》(1985)
- 《한국기독교장로회여성 60년사》(1989)
7. 연보
연도 | 내용 |
---|---|
1952년 | 캐나다 유학 중 한국신학대학 교수에 임명됨 |
1953년 | 귀국, 한국신학대학 교수 |
1970년 | 학원 민주화 운동에 참여, 한신대학교 학내분규로 교수직 사퇴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
1973년 |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재선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
1976년 | 시국사건 등으로 문제가 되었으나 반성문 제출을 거부하고 해직됨 |
1977년 ~ 1981년 |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 회장 |
1984년 ~ 1986년 | 여신학자협의회 회장 |
1985년 ~ 1991년 | WCC세계선교위원회 부위원장 |
1987년 | 한국여성단체연합회 초대 회장 |
1989년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부회장 |
1990년 | 한국여성단체연합회 고문 |
1991년 | 신민당 수석최고위원 민주당 여성위원회 위원장 |
1992년 | 민주당 전국구 제14대 국회의원 |
1994년 |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
1997년 |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수석대표 |
1998년 | 통일부 통일자문회의 통일고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民和協) 상임의장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
1999년 |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사 |
2000년 |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 |
참조
[1]
웹사이트
Lee Wu-jong
http://100.daum.net/[...]
[2]
웹사이트
이우정:대한민국 국회의원
http://www.rokps.or.[...]
2013-05-01
[3]
웹인용
낮은 이들의 처소 이우정 2
https://web.archive.[...]
2013-04-16
[4]
웹사이트
고 이우정 선생의 아름다운 삶 4
http://shindonga.don[...]
[5]
웹사이트
고 이우정 선생의 아름다운 삶 3
http://shindonga.don[...]
[6]
뉴스
'[부음] 여성계 원로 이우정씨 별세'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2-05-30
[7]
웹사이트
고 이우정 선생의 아름다운 삶 2
http://shindonga.don[...]
[8]
웹사이트
고 이우정 선생의 아름다운 삶
http://shindonga.don[...]
[9]
서적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동아일보사
1991
[10]
뉴스
'[민주화 발자취] <24> 3·1 민주구국선언(명동 선언)'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11]
웹사이트
보안사 사찰대상 민간인 명단 - 11
https://news.naver.c[...]
[12]
뉴스
오늘의 소사-9월 1일
https://news.naver.c[...]
대전일보
2008-08-31
[13]
웹사이트
'<국민정치연구회 내일 창립대회>(종합)'
https://news.naver.c[...]
[14]
웹사이트
http://news.mk.co.kr[...]
[15]
웹사이트
http://news.mk.co.kr[...]
[16]
뉴스
여성운동가 이우정씨 별세
http://legacy.www.ha[...]
한겨레신문
2002-05-30
[17]
뉴스
이우정 전의원 별세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02-05-30
[18]
웹사이트
이우정 여성연합 초대회장 30일 오후 별세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19]
문서
문익환의 통일운동을 기념하여 제정하였다.
[20]
뉴스
늦봄통일상 수상자에 故 이우정 여사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04-12-07
[21]
웹사이트
이우정 평화상에 두레방의 유영님씨
http://news.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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