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1678년)
1. 개요
이진주(1678년)는 조선 숙종 시대의 문신으로, 1678년 경상북도 순흥부에서 태어났다. 171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수학했으며, 1721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병조 좌랑, 춘추관 기주관 등을 거쳐 진보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인물됨이 몽매하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이인좌의 난 당시에는 순흥 지역 의병대에서 참모로 활동했으며, 난 진압 후 분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이후 다시 진보 현감에 재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737년에 사망했다. 경연관 김상성은 그를 청렴하고 절조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
의병 -
임계영
-
의병 -
문천회맹
문천회맹은 임진왜란 초기 영남 지역 의병장들이 경주부윤 윤인함과 판관 박의장을 중심으로 경주 문천에 모여 왜군에 대한 결사항전을 다짐한 회합으로, 영남 의병들의 조직적인 항쟁에 영향을 미쳤다. -
1737년 사망 -
낙천군
조선 영조 시대 왕족 낙천군은 선조의 서자 경창군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요절하여 후사가 없어 양자 문제와 제사 봉행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
1737년 사망 -
윌리엄 웨이크
윌리엄 웨이크는 잉글랜드의 성직자이자 캔터베리 대주교로, 프랑스 성직 관련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프랑스 가톨릭 교회와의 통합을 모색했고 비국교도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했으며, 성공회 서품을 옹호하고 에라스투스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영국 교회와 성직자의 상태... 역사적으로 고찰》 등의 저서를 남겼다. -
1678년 출생 -
옹정제
옹정제는 청나라의 제5대 황제로, 황위 계승 분쟁 속에서 즉위하여 황권 강화, 재정 개혁, 영토 확장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형제 숙청과 사상 탄압에 대한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
1678년 출생 -
안토니오 비발디
안토니오 비발디는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베네치아 피에타 고아원에서 다수의 작품을 작곡했으며,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로 널리 알려져 바로크 및 후대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말년에 빈곤 속에서 사망 후 20세기에 재평가되었다.
2. 생애
1678년(숙종 4) 경상북도 순흥부에서 태어났다. 자는 문보(文甫), 문주(文周) 또는 문보(文補)이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하였으며, 1700년 경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10년 증광사마시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병조좌랑, 춘추관기주관, 성균관 학유, 학록, 학정, 박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고향인 순흥에서 의병 참모로 활동하며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였고, 그 공으로 분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성균관직강, 병조정랑 등을 지내다가 1730년 진보현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임 도중 사간원 정언 정광은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비록 시독관 김상성 등의 변호로 복직될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청렴하고 담담하게 절개를 지키는 선비로 평가받았으며, 1737년에 사망하였다.
2.1. 출생과 가계
1678년(숙종 4) 경상북도 순흥부 서남면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일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자는 문보(文甫), 문주(文周) 또는 문보(文補)이며, 아호 사용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 처형을 반대하다가 영천 감곡으로 낙향한 취사 이여빈(炊沙 李汝香+賓)의 종4대손이기도 하다.
| 구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이기효(李基孝) | 생전 무관직, 사후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추증 |
| 어머니 (적모) | 창원황씨(昌原黃氏) | 황준(黃草+俊)의 딸 |
| 어머니 (생모) | 예안 김씨 | 통덕랑 김종해(金宗海)의 딸 |
| 형 (이복) | 이진하(李鎭夏) | 창원 황씨 소생 |
| 형 (동복) | 이진상(李鎭商) | 예안 김씨 소생 |
| 본인 | 이진주(李鎭周) | 예안 김씨 소생, 6남 4녀 중 차남 |
| 동생 (동복) | 이진한(李鎭漢) | 예안 김씨 소생 |
| 동생 (동복) | 이진명(李鎭明) | 예안 김씨 소생 |
| 동생 (동복) | 이진조(李鎭朝) | 예안 김씨 소생 |
| 누이 (동복) | - | 류신석(柳申錫)에게 출가, 예안 김씨 소생 |
| 누이 (동복) | - | 김구징(金龜徵)에게 출가, 예안 김씨 소생 |
| 누이 (동복) | - | 월성인 손동필(孫東弼)에게 출가, 예안 김씨 소생 |
| 누이 (동복) | - | 월성인 손동준(孫東準)에게 출가, 예안 김씨 소생 |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활동 기록은 승정원일기, 일성록 및 무신란 관련 사료 등에서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본래 경상도 출신이었으나 과거에 급제한 후 한성으로 올라와 성균관 반촌에서 10년간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청렴한 문사로 평가받았다.
2.2. 생애 초반
어려서 글을 배웠으나 스승이 누구인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재생(齋生)으로 공부했다.
1700년 (숙종 26년) 3월 7일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701년 3월 11일, 의금부에서 관원들을 나추현고(拿推現告, 잡아다가 현재 상황을 고하게 함)할 때 같은 경릉참봉 윤성임 등 다른 참봉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702년 (숙종 28년) 6월 1일 숙종의 명으로 직첩(職牒, 관직 임명장)을 돌려받았다. 같은 해 10월 18일, 경진년(1700년) 가을·겨울, 신사년(1701년) 봄·가을·겨울, 임오년(1702년) 봄·여름 등에 포폄(褒貶, 공과에 따른 상벌)에서 낮은 등급을 받았던 다른 관원들과 함께 직첩을 돌려받으라는 숙종의 명에 따라 다시 직첩을 받았다.
2.3.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유학(幼學) 신분으로 1710년(조선 숙종 36년) 경인년에 시행된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시에 3등 5위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714년에는 성균관 학유(學諭)로 임명되었다.
1719년(숙종 45년) 1월 12일, 조선 숙종이 전강(殿講)에서 직접 낸 문제에 대한 응제(應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급2분(給二分)을 하사받고, 같은 날 직부전시(直赴殿試)의 명을 받았다. 1721년(조선 경종 1년) 4월 3일에 시행된 식년 문과(式年文科)에서 을과(乙科) 4위로 급제하였다. 다만, 청대 권상일(權相一)의 일기인 《청대일기(淸臺日記)》 4권에 따르면 이진주의 과거 급제일은 1721년 3월 22일이라고도 한다.
문과 급제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과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으며, 지방관 적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관료 생활 초반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날짜 | 직책 및 활동 | 비고 |
|---|---|---|---|
| 1723년 (경종 3년) | 3월 25일 | 성균관 학유 | |
| 1723년 | 5월 24일 | 성균관 학록(學錄) | |
| 1723년 | 8월 6일 | 성균관 학정(學正) | |
| 1724년 (경종 4년) | 2월 | 양현고 직장(養賢庫直長) | |
| 1724년 | 2월 26일 | 성균관 학정 | |
| 1724년 | 2월 29일 | 겸 양현고 직장(兼養賢庫直長) | |
| 1724년 | 5월 17일 | 성균관 학정 | 이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 역임 |
| 1724년 | 5월 17일 | 행약(行藥) 역모 혐의자 김상궁(金尙宮) 조사 및 처형 상소 동참 | 윤성시(尹聖時)의 상소에 공동 서명 |
| 1724년 | 7월 17일 | 성균관 박사(成均博士) | |
| 1726년 (영조 2년) | 12월 28일 | 성균관 박사 | |
| 1726년 | 12월 29일 | 성균관 박사 재임명 | 영조 주관 이비(吏批)에서 임명 |
| 1727년 | 3월 15일 | 양현고 직장 | |
| 1727년 | 8월 7일 | 전적(典籍) | 이비 정사(吏批 政事)에서 임명 |
| 1728년 (영조 4년) | 2월 3일 | 양현고 주부(主簿) |
2.4. 무신사태 전후
1728년(영조 5) 3월부터 4월까지 이인좌의 난이 발생했을 때, 이진주는 순흥 지역 의병대장 이휘도 휘하에서 순흥 의병대 참모로 활동했다. 이때 그의 친척 중 유학(幼學) 이세식(李世植)은 정제유사 중 한 명이었고, 친동생 유학(幼學) 이진한(李鎭漢)은 소모장 중 한 명으로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 종성 부사로 부임하던 황익재 등도 영남초모사로서 의병 모집에 힘을 보탰다.
4월 1일에는 향청에 모여 순흥 지역 의병장 이징도(李徵道), 참모 이진주, 참모 진사 황우일(黃宇鎰) 등이 회합하여 조약을 세우고 도내 고유문을 작성했으며, 안동군에도 사발통문을 보냈다.
1728년 6월 1일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7월 15일에는 이인좌의 난 진압에 기여한 공로로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8월 2일부터 8월 12일 사이에는 이인좌의 난 진압을 기념하고 의병을 해산하는 의미에서 이지성(李知聖), 성기인(成起寅), 이중배(李重培), 이유(李濰), 김시빈(金始賓), 이시항(李時沆), 김성흠(金聖欽), 권오응(權五應), 이수겸(李守謙), 황윤후(黃允垕), 이식명(李埴命), 황계후(黃啓垕) 등 영남 지역의 진신(縉紳)들과 함께 공동 연명 상소에 서명했다. 상소의 내용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하늘과 땅이 있은 즉 군신(君臣) 관계가 있으니, 만약 군신 관계가 없다면 이는 하늘과 땅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과 땅이 없다면 어찌 다시 인륜(人倫)이 있겠습니까? (伏以有天地。卽有君臣。若無君臣。是無天地也。無天地。寧復有人理)"라며 군신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729년 11월 25일 이조의 구전정사를 통해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며, 11월 29일에는 병조의 건의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는 겸춘추(兼春秋)직에 임명되어 입직하게 되었다.
2.5. 관료 생활 후반
1730년(영조 6년) 1월 14일 병조정랑으로서 춘향대제(春享大祭)에 제관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2월 8일에는 역시 병조정랑으로 석전대제(釋奠大祭)의 제관으로 참여하였다. 1730년 2월 10일 이비(吏批)의 정사(政事)에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되었고, 3월 25일에는 사예 등을 역임했다.
1730년 12월 10일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임 직후부터 사간원 정언 정광은(鄭光殷)에게 '몽매하고 생각이 없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논핵(論劾, 탄핵)을 당했다. 정광은은 영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일전에 진보 현감(眞寶縣監) 이진주(李鎭周)가 신에게 와서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한번 그 사람됨을 보니 몽매하여 생각이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령을 각별히 가려 뽑는 때에 결단코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는 책무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새로 제수된 진보 현감 이진주를 개차(改差, 관직을 바꿈)하소서."라고 주장했다.
결국 12월 29일, 정광은의 거듭된 탄핵 상소를 영조가 받아들여 이진주는 체직(遞職, 관직에서 물러남)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진보현으로 부임하던 도중에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와야 했다.
2.6. 은퇴와 최후
1731년 1월 9일 영조가 진수당에서 신하들을 불러 만나는 자리(소대, 召對)를 가졌을 때, 시독관 김상성(金尙星)이 이진주를 옹호하였다. 김상성은 "최근 새로 임명된 진보 현감 이진주(李鎭周)가 마침 대간의 탄핵을 받아 직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근래 조정 관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진주는 실로 담담하게 절개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이 이미 그 대간을 꾸짖기를 ‘한 번 보고서 어찌 그 사람됨을 알 수 있겠는가. 어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영남 사람으로서 성균관 근처 마을(반촌, 泮村)에 와서 머문 지 10여 년입니다. 재상이나 이름난 신하들은 그의 얼굴을 모르고, 다만 겸춘추로서 궁궐 안에서 마주칠 때가 있었을 뿐입니다. 신의 형님 김상규(金尙奎) 또한 성균관의 직책을 맡았을 때 서로 만나보아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데, 대간의 탄핵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여겼습니다. 도승지 또한 말하기를 ‘그 대간에게 스스로 피하게 하려 했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담담하게 절개를 지키는 이는 실로 드문 귀한 인물로서, 영남 지역에서는 명망 있는 선비입니다. 우연히 작은 고을을 맡았다가 공론에 배척을 받아 안타까워하는 이가 많습니다. 신은 비록 그 얼굴도 모르지만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이조에 분부하여 다시 벼슬에 임명하신다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영조는 "이진주의 사람됨에 대해 나는 실로 그가 그러한지 모른다. 어찌 외모로 사람을 판단했겠는가. 이렇게 아뢰는 내용을 듣고 보니, 이번 수령을 뽑을 때에는 담담한 사람을 뽑아야 마땅하다. 앞으로 수령 자리가 비거든 특별히 후보로 추천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후 영조의 조정에 입시한 한 신하가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키며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상이나 이름난 선비들이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아뢰자, 영조는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하였다. 곧이어 이진주는 다시 진보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1737년 10월 28일에 사망하였으며, 사망 장소와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3. 평가
경연관 김상성은 이진주를 '실로 담담히 절조를 지킴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상성은 이진주가 영남 사람으로 반촌에 10여 년간 머물렀으며, 재상이나 유명한 신하들과는 교류가 적어 얼굴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다만 성균관 직책을 맡았을 때 김상성의 형인 김상규가 그를 만나보고 사람됨을 알게 되었으며, 이진주에 대한 대계(臺啓)가 매우 잘못되었다고 여겼다고 전했다. 김상성은 이진주를 '담담히 절조를 지키는 드문 인물'이자 영남 지방에서 명망 있는 선비로 평가하며, 작은 고을을 맡았다가 공론에 의해 배척받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고 언급했다.
무신창의록 건권 참모조에는 이진주가 스스로 몸을 경계하고 삼가서 행실이 발랐으며, 청렴하고 매사에 조심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을 미리 헤아리고 추측하는 데 있어 매우 주도면밀하고 상세했다고 평가한다.(飭躬廉謹 料事周詳)
4. 가족 관계
도촌 이수형(桃村 李秀亨)의 8대손이며, 7대조는 사헌부감찰, 홍천현감을 지낸 이대근(大根)이고, 5대조는 장사랑 기자전참봉, 군자감참봉을 역임한 이효신이다.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 처형에 반대하다가 영천으로 낙향한 취사 이여빈(炊沙 李汝香+賓)의 종4대손이 된다.
아버지 이기효는 생전에 관직 없이 학생(學生) 신분이었으나, 이진주의 출세 후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예안김씨 김종해(金宗海)의 딸이다.
* 증조부 : 이성간(李成幹, 1585년 5월 21일 ~ 1668년 3월 1일)
* 할아버지 : 이최(李火+崔)
* 할머니 : 영천이씨(永川李氏), 통덕랑 이무(李茂)의 딸
* 아버지 : 이기효(李基孝, 1640년 ~ 1717년)
* 어머니 (계모) :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준(黃草+俊)의 딸
이복 형 : 이진하(李鎭夏, 1663년 ~ ?)
* 어머니 (생모) : 예안김씨(禮安金氏), 통덕랑 김종해(金宗海)의 딸
형 : 이진상(李鎭商, 1675년 ~ ?)
본인 : 이진주(李鎭周)
동생 : 이진한(李鎭漢, 1684년 ~ 1744년)
동생 : 이진명(李鎭明, 1691년 ~ 1747년)
동생 : 이진삼(李鎭參, ? ~ ?)
누이 : 류신석(柳申錫)에게 출가
누이 : 김구징(金九徵)에게 출가
누이 : 손동필(孫東弼, 월성인)에게 출가
누이 : 손동준(孫東準, 월성인)에게 출가
* 부인 : 창원황씨(昌原黃氏), 호군 황창렬(黃昌烈)의 딸
아들 : 이권(李權, 1705년 ~ ?)
* 며느리 (초취) : 덕수이씨(德水李氏), 이만화(李萬華)의 딸
* 며느리 (후취) : 전주이씨(全州李氏)
손자 : 이상택(李相宅, 1741년 ~ ?)
아들 : 이매(李梅, 1720년 ~ ?)
* 며느리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열(權説)의 딸
손자 : 이상우(李相宇, 1748년 ~ ?)
* 사위 : 서유진(徐愈晉), 달성인(達城人)
외손자 : 서성시(徐聖時)
외손자 : 서성훈(徐聖勳)
외손자 : 서성철(徐聖喆)
* 사위 : 김도운(金道運), 안동인(安東人)
** 외손녀사위 : 금진옥(琴振玉), 봉화인(奉化人)
5. 기타
| 연도 | 월일 | 활동 내용 |
|---|---|---|
| 1703년 | 8월 4일 | 순흥향교 서무찬인(西廡賛引), 봉작(奉爵) |
| 1705년 | 2월 3일 | 봉작(奉爵), 제물유사(祭物有司) |
| 1706년 | 2월 8일 | 서종사찬인(西從祀賛引) |
| 1706년 | 8월 2일 | 봉로(奉爐) |
| 1710년 | 8월 | 대축(大祝) |
| 1711년 | 2월 | 서무헌관(西廡獻官) |
| 1711년 | 8월 | 찬자(贊者) |
| 1712년 | 2월 | 축(祝) |
| 1716년 | 2월 6일 | 대축(大祝) |
| 1717년 | 2월 2일 | 대축(大祝) |
| 1718년 | 2월 8일 | 대축(大祝) |
| 1718년 | 8월 1일 | 대축(大祝) |
| 1719년 | 8월 7일 | 종헌관(終獻官) |
| 1720년 | 2월 10일 | 대축(大祝) |
| 1721년 | 8월 9일 | 아헌관(亞獻官) |
| 1722년 | 2월 2일 | 초헌관(初獻官) |
| 1722년 | 8월 4일 | 초헌관(初獻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