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로자 코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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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포로자 코자크는 12세기부터 드네프르 강 하류 지역에 형성된 코자크 공동체를 지칭한다. 이들은 다양한 사회적, 민족적 기원을 가졌으며, 자유로운 생활 방식을 추구하며 군사적 조직을 이루었다. 16세기에는 드미트로 비슈네베츠키에 의해 통합되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와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 속에서 자치권을 유지하려 했다. 17세기에는 코자크 봉기와 흐멜니츠키 봉기를 겪었으며,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 이후 러시아 차르의 보호령이 되었다. 자포로자 호스트는 자체적인 조직과 법률을 갖추었으며, 1775년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해산되었다. 자포로자 코자크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등 여러 국가에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유산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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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로자 코자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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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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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우크라이나어: Військо Запорозьке (Viisko Zaporozke) 우크라이나어 (다른 표기): Військо Запорізьке (Viisko Zaporizke) 우크라이나어: Запорожці (Zaporozhtsi) |
의미 | 여울 너머의 군대 |
위치 | 자포리자 |
역사 | |
기원 | 14세기 ~ 15세기 |
주요 활동 시기 | 16세기 ~ 18세기 |
해산 | 1775년 (러시아 제국에 의해) |
사회 및 문화 | |
주요 거주 지역 | 우크라이나 남부 |
종교 | 동방 정교회 |
언어 | 우크라이나어 |
관련 민족 | 카자크 |
구성 | 등록 카자크 자유 카자크 |
군사 조직 | 쿠린 소트냐 |
지도자 | 아타만 헤트만 |
유산 | |
현재 | 우크라이나 카자크 단체 |
상징 | 카자크 마마이 |
관련 항목 | 카자크 헤트만국 자포로제군 자포로제 카자크의 편지 자포로제 코자크 카자크의 역사 |
2. 기원
자포로자 코자크의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2세기 초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튀르크어로 "자유인"을 뜻하는 '코자크'라고 불렸으며, 카자흐와 어원을 공유한다. 이후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에서는 "프리부터"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2. 1. 초기 코자크 공동체의 형성
드네프르강 하류에서 최초의 코자크 공동체가 언제 형성되기 시작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2세기 초부터 유라시아 대초원에 비슷한 사람들이 살았다는 징후와 이야기가 있다. 당시에는 '코자크'라고 불리지 않았는데, '코자크'는 튀르크어로 "자유인"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이는 민족 이름인 "카자흐"와 어원을 공유한다. 이후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에서는 "프리부터"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흑해 북쪽의 대초원에는 쿠만족, 페체네그족, 하자르족과 같은 유목 부족들이 거주했다. 코자크의 민족 기원에서 이 부족들의 역할은 논쟁의 대상이지만, 후기 코자크 자료에서는 슬라브화된 하자르족 조상을 주장했다.압제나 범죄 추격을 피해 키예프 루스의 경작지에서 이 거친 대초원으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생활 방식은 현재 코자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크게 유사했다. 그들은 주로 사냥과 낚시로 생계를 유지했고, 말과 음식을 얻기 위해 아시아 부족을 습격했지만, 또한 이러한 유목민들과 섞여 그들의 문화적 특성을 많이 받아들였다. 16세기에 드미트로 비슈네베츠키라는 우크라이나 귀족은 이러한 다양한 집단을 강력한 군사 조직으로 통합했다.
자포로자 코자크는 다양한 사회적, 민족적 기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폴란드 귀족의 통치 하의 삶보다 거친 대초원의 위험한 자유를 선호했던 도망 노예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하급 귀족, 심지어 크림 타타르족도 코자크 호스트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은 동방 정교회를 종교로 받아들이고 그 의식과 기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유목 가설은 코자크가 북흑해 영토에 다양한 시기에 살았던 하나 이상의 유목 민족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코자크의 조상은 스키타이족, 사르마티아족, 하자르족, 폴로브치 (쿠만), 체르케스인(아디게인), 타타르족 등이었다. 코자크의 기원에 대한 유목 가설은 16-17세기 폴란드 역사학파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으며, 사르마티아 귀족의 기원 이론과 관련되었다. 고대 특정 민족으로부터 국가 또는 민족의 기원을 도출하는 전통에 따라, 18세기 코자크 연대기 작가들은 코자크의 하자르 기원을 옹호했다.[5] 자료 기반이 확장되고 역사 과학이 형성되면서 유목 가설은 공식적인 역사학에서 거부되었다. 알렉산더 리겔만은 처음으로 이 가설의 불완전성을 지적했다.[3] 20세기에 러시아 과학자 구밀료프는 폴로브치의 코자크 기원을 옹호했다.[4]
2. 2. 유목민 가설
흑해 북쪽의 대초원에는 쿠만족, 페체네그족, 하자르족 등 유목 부족들이 거주했다. 코자크의 민족 기원에서 이 부족들의 역할은 논쟁의 대상이지만, 후기 코자크 자료에서는 슬라브화된 하자르족 조상을 주장하기도 했다.[5]유목 가설은 코자크가 북흑해 영토에 다양한 시기에 살았던 하나 이상의 유목 민족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코자크의 조상은 스키타이족, 사르마티아족, 하자르족, 폴로브치 (쿠만), 체르케스인(아디게인), 타타르족 등이었다. 코자크 기원에 대한 유목 가설은 16~17세기 폴란드 역사학파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으며, 사르마티아 귀족의 기원 이론과 관련이 있었다. 고대 특정 민족으로부터 국가 또는 민족의 기원을 도출하는 전통에 따라, 18세기 코자크 연대기 작가들은 코자크의 하자르 기원을 옹호했다.[5] 자료 기반이 확장되고 역사 과학이 형성되면서 유목 가설은 공식적인 역사학에서 거부되었다. 알렉산더 리겔만은 처음으로 이 가설의 불완전성을 지적했고,[3] 20세기 러시아 과학자 구밀료프는 폴로브치의 코자크 기원을 옹호했다.[4]
3.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기
16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가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자포로제 코자크는 대부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신하로 여겨졌다.[5] 등록 코자크는 1699년까지 연방 군대의 일부였다. 그러나 코자크의 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농노제에서 도망친 우크라이나 농민들로 인해 증가했다. 슐라흐타가 자포로제 코자크를 농노로 만들려는 시도는 연방에 대한 코자크의 충성심을 약화시켰다.
코자크가 슐라흐타와 동등하게 인정받으려는 야망은 번번이 좌절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이중 국가 연방을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 (우크라이나 코자크인과 함께)으로 전환하려는 계획은 코자크의 인기가 없어 거의 진전이 없었다. 코자크는 역사적으로 동방 정교회에 강하게 충성했고, 이는 가톨릭교가 지배하는 연방과 충돌을 야기했다. 연방 정책이 상대적인 관용에서 정교회 탄압으로 바뀌면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코자크는 반 폴란드와 동의어인 반 가톨릭 성향을 띠게 되었다.
3. 1.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
16세기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관계는 코자크의 공격성이 증가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코자크는 오스만 영토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정부는 코자크를 통제할 수 없었지만, 명목상 연방의 신하였기 때문에 습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5] 반면, 오스만 통치 하의 타타르족은 연방을 습격했다. 코자크는 드네프르 강 입구에서 배로 불과 이틀 거리에 있는 오스만 제국 중심부의 부유한 상업 항구 도시를 습격했다.1615년과 1625년, 코자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의 마을을 파괴하여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4세가 궁에서 도망가도록 만들었다.[6] 그의 조카인 술탄 메흐메트 4세는 코자크가 그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코자크는 도발적인 응답인 자포로제 코자크의 답장을 보냈다.[7]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사이의 조약은 양측이 코자크와 타타르족을 단속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폴란드는 내부 협정에서 코자크에게 배를 불태우고 습격을 중단하도록 강요했지만, 배는 빠르게 재건되었고 코자크의 생활 방식은 습격과 약탈을 미화했다.
이 기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는 때때로 오스만 제국이 자국 국경에 가하는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코자크 습격자를 은밀하게 고용했다. 많은 코자크와 타타르족은 양측의 습격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서로 적대감을 가졌다. 코자크 습격 후 타타르족의 보복, 또는 타타르족 습격 후 코자크의 보복은 거의 규칙적인 사건이었다. 그로 인한 혼란과 일련의 갈등은 종종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남동부 국경 전체를 저강도 전쟁 지역으로 만들었고, 몰다비아 마그나테 전쟁에서 초초라 전투 (1620)와 1633–34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연방-오스만 전쟁의 확대로 이어졌다.
3. 2. 코자크 봉기와 흐멜니츠키 봉기
16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남쪽으로 확장하면서, 자포로제 코자크는 대부분 연방의 신하로 여겨졌다.[5] 등록 코자크는 1699년까지 연방 군대의 일부였다.
16세기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오스만 제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코자크는 오스만 영토를 습격했고, 폴란드 정부는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지만 명목상 신하였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했다. 반대로 타타르족은 연방을 습격했다. 코자크는 드네프르 강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부유한 항구 도시를 습격했다.
1615년과 1625년, 코자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을 파괴하여 무라드 4세가 도망가게 만들었다.[6] 메흐메트 4세는 코자크에게 복종을 요구했지만, 코자크는 자포로제 코자크의 답장으로 도발했다.[7] 양측은 코자크와 타타르족을 단속하려 했지만,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코자크는 배를 불태우기로 했지만, 빠르게 재건했고, 습격과 약탈을 미화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코자크를 고용하기도 했다. 코자크와 타타르족은 서로 적대감을 가졌다. 코자크와 타타르족의 보복은 규칙적이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남동부 국경은 저강도 전쟁 지역이 되었으며, 몰다비아 마그나테 전쟁과 초초라 전투 (1620) 등으로 이어졌다.
코자크 수는 농노제에서 도망친 우크라이나 농민들로 인해 증가했다. 슐라흐타의 코자크 농노화 시도는 코자크의 충성심을 약화시켰다. 코자크의 슐라흐타 동등 인정 요구는 거부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 전환 계획은 진전이 없었다. 코자크는 동방 정교회에 충성했고, 가톨릭교 지배 연방과 충돌했다. 연방 정책이 정교회 탄압으로 바뀌면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코자크는 반 가톨릭이 되었다.
코자크의 약해진 충성심과 슐라흐타의 오만함은 17세기 초 여러 코자크 봉기를 초래했다. 국왕의 코자크 등록부 확장 거부는 1648년 흐멜니츠키 봉기를 촉발했다. 이 봉기는 대홍수로 이어져 연방을 약화시키고 해체의 발판을 마련했다. 폴란드는 최고의 기병대를 가졌지만, 보병은 열등했다.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코자크는 최고의 보병을 소유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서 보병을 모집했기에, 이들이 폴란드 통치에서 벗어나자 연방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4. 조직
자포로지아 호스트는 군사 및 영토 행정 구역을 가진 군사-정치적 기구였다. 38개의 쿠린(소트니아)[8]과 5~8개의 '팔란카'(영토 구역)로 구성되었으며, 군 지도자, 군 관계자, 행진 지도자, 팔란카 지도자의 3단계 행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자포로지아 호스트의 지도자는 공식적으로 헤트만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코자크 부대의 모든 지도자들은 비공식적으로 그렇게 불렸다.
평화 시기에 코자크는 가족과 함께 살면서 전략과 언어를 연구하고 신병을 교육했다. 코자크는 자유롭게 무기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부유한 코자크는 갑옷을, 보병은 주로 단순한 옷을 입었지만 사슬 갑옷을 착용하기도 했다.
당시 코자크는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군사 조직 중 하나였으며, 러시아, 폴란드, 프랑스 등에서 용병으로 활동했다.
4. 1. 시치 라다와 군사 스타르시나
자포로지아 호스트는 '코자크 법전'이라 불리는 고유한 전통과 관습을 바탕으로 발전한 군사-정치적 기구였다. 이 법전은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호스트는 자체적인 군사 및 영토 행정 구역을 가지고 있었다. 38개의 쿠린(소트니아)[8]과 5~8개의 '팔란카'(영토 구역), 그리고 3단계 행정 시스템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장교단(군사 스타르시나)은 매년 1월 1일 일반 군사 위원회에서 선출되었고, 이들의 권리와 의무는 관습과 전통에 따라 명문화되었다.자포로지아 호스트는 고유한 사법 제도를 발전시켰으며, 그 기초에는 관습적인 코자크 법전이 있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시치를 "코자크 공화국"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최고 권력이 모든 구성원의 회의에 속하고 지도자(스타르시나)가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자포로지아 호스트의 최고 행정 기구는 '시치 라다'(평의회)였다. 이 평의회는 입법, 행정, 사법 기능을 수행했으며, 평의회의 결정은 전체 호스트의 의견으로 간주되어 모든 구성원에게 의무적으로 적용되었다. 시치 라다에서는 대내외 정책, 군사 '스타르시나' 선거, 토지 분배, 중범죄자 처벌 등을 논의했다.
자포로지아 호스트는 코자크 헤트만국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지만, 자체적인 행정과 질서를 유지했다. 군사 작전을 위해 코자크들은 '키쉬'라는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키쉬는 11~16세기에 사용된 요새화된 캠프를 의미하는 오래된 용어로, 코자크들이 이를 채택했다. 키쉬는 시치의 중앙 정부 기구로서 행정, 군사, 재정, 법률 등을 관할했으며, 매년 시치 라다(블랙 라다)에서 선출되었다.
코자크 군사 법원은 동료 간 폭력, 절도, 여성 동반, 음주 등을 엄격하게 처벌했다. 교회와 학교가 있어 종교 서비스와 기본적인 교육을 제공했으며, 동방 정교회가 국가 정체성의 일부로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평화 시기에 코자크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전략, 언어 등을 연구하고 신병을 교육했다. 코자크는 자유롭게 무기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부유한 코자크는 무거운 갑옷을, 보병은 주로 단순한 옷을 선호했지만 사슬 갑옷을 착용하기도 했다.
당시 코자크는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군사 조직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러시아, 폴란드, 프랑스 등에서 용병으로 활동했다.
4. 2. 키쉬와 쿠린
자포로지아 호스트는 코자크 법전이라 불리는 독특한 전통과 관습을 바탕으로 발전한 군사-정치적 기구였으며, 이는 수십 년에 걸쳐 자포로지아 호스트 코자크들 사이에서 주로 형성되었다. 호스트는 38개의 쿠린(소트니아)[8]과 5~8개의 '팔란카'(영토 구역)를 가졌다.호스트의 코자크들은 군사 작전을 위해 '키쉬'로 조직되었다. 키쉬는 11~16세기에 사용되었고 나중에 코자크들이 채택한 요새화된 캠프를 가리키는 오래된 용어이다. 키쉬는 시치의 중앙 정부 기구였으며, 행정, 군사, 재정, 법률 및 기타 사무를 관할했다. 키쉬는 모든 코자크의 평의회인 시치 라다(블랙 라다)에서 매년 선출되었다. 키쉬 선거는 1월 1일, 10월 1일(성모 호보일 축제 - 포크로바) 또는 부활절 2~3일째에 열렸다.
쿠린 목록은 다음과 같다.
레부시코프스키 | 플라스투노프스키 | 댜드코프스키 |
브류호베츠키 | 베드메도프스키 | 플라트미롭스키 |
파슈코프스키 | 쿠셰프스키 | 키슬랴코프스키 |
이바노프스키 | 코넬롭스키 | 세르히예프스키 |
돈스키 | 크릴롭스키 | 카니우스키 |
바투린스키 | 포포비체프스키 | 바슈린스키 |
네자마이코프스키 | 이르클리예프스키 | 시체르비놉스키 |
티타롭스키 | 슈쿠린스키 | 쿠레네프스키 |
로고프스키 | 코르순스키 | 칼니볼로츠키 |
후만스키 | 데레뱐초프스키 | 스테블리이우스키-고등 |
스테블리이우스키-하등 | 제렐롭스키 | 페레야슬랍스키 |
폴타프스키 | 미샤스토프스키 | 민스크스키 |
티모솁스키 | 벨리치코프스키 |
위에 언급된 쿠린 외에도 호스트 외부에 많은 수의 다른 쿠린이 있었다.
4. 3. 코자크 법과 법원
군사-정치적 기구로서의 자포로지아 호스트는 코자크 법전이라 불리는 독특한 전통과 관습을 바탕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수십 년에 걸쳐 자포로지아 호스트 코자크들 사이에서 주로 형성되었다. 호스트는 자체적인 군사 및 영토 행정 구역을 가지고 있었다. 38개의 쿠린 (소트니아)[8] 와 5~8개의 '팔란카'(영토 구역) 뿐만 아니라 군 지도자, 군 관계자, 행진 지도자, 팔란카 지도자의 3단계 행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모든 장교단(군사 스타르시나)은 1월 1일에 일반 군사 위원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되었다. 동일한 관습과 전통을 바탕으로 장교의 권리와 의무가 명시적으로 성문화되었다. 자포로지아 호스트는 고유한 사법 제도를 발전시켰으며, 그 기초에는 관습적인 코자크 법전이 있었다. 법전의 규범은 코자크 사이에서 발전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확정되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자포로지아 시치를 "코자크 공화국"이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시치에서 최고 권력이 모든 구성원의 회의에 속하고, 지도자('스타르시나')가 선출되었기 때문이다.코자크 군사 법원이 있었으며, 동료 간의 폭력과 절도, 여성을 시치로 데려오는 행위, 분쟁 기간 중의 음주 등을 엄하게 처벌했다.
4. 4. 코자크 클레이노디

코자크 클레이노디(Kleinody)는 19세기까지 사용된 우크라이나 코자크의 중요한 군사적 상징, 의례 및 속성이었다. 이는 제국 의례와 관련이 있으며, 1576년 8월 20일 폴란드 왕 스테판 바토리가 보흐단 루진스키에게 수여했다. 여기에는 호루흐바, 번추크, 불라바(철퇴), 그리고 ''사모팔''(소총)을 든 코자크 문장이 새겨진 인장이 포함되었다. 클레이노디는 헤트만(최고 사령관)의 조수에게 보관되었으며, ''호론지''(깃발 운반자), ''번추즈니''(지팡이 관리자)와 같은 계급이 등장했다. 이후 페르나흐, 팀파니(리타브리), 쿠린 배너(배지), 지팡이 등이 클레이노디에 추가되었다.
권력의 가장 높은 상징은 헤트만과 키시-오타만이 소지한 불라바(철퇴)였다.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1648년부터 진주 등으로 장식된 은 도금 불라바를 사용했다. 코사크 대령은 페르나흐(''셰스토퍼'')라는 작고 늑골이 있는 불라바를 허리띠에 휴대했다.
자포로잔 호스트의 인장은 은으로 제작되었으며, 뾰족한 모자를 쓰고 가슴에 단추가 달린 카프탄을 입고, 옆에는 사브르(샤블랴)와 화약병을, 왼쪽 어깨에는 자작 소총(사모팔)을 든 코자크가 묘사되었다. 인장 둘레에는 "영광스러운 자포로잔 호스트의 인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팔란카와 쿠린의 인장은 사자, 사슴, 말, 달, 별, 왕관, 창, 칼, 활 등의 이미지를 포함한 둥근 모양 또는 직사각형이었다.
호루흐바는 주로 문장, 성도, 십자가 등으로 수놓아진 진홍색 천이었다. 헤트만 또는 오타만 옆에서 군대 앞에 운반되었다. 배지(즈나초크)는 쿠린 또는 소트니아 배너의 이름이었다. 새로 선출된 대령은 자신의 비용으로 팔란카 배너를 준비해야 했다. 쿠반에서는 1845년까지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된 배너가 보존되었다. 쇠고는 가죽이 부착된 큰 구리 보일러로, 코사크를 의회에 소집하거나 경보를 발령하는 등의 신호를 전달하는 데 사용되었다.

클레이노디의 각 품목은 코사크 ''스타르시나''(장교)의 특정 구성원에게 부여되었다. 예를 들어 불라바는 오타만, 호루흐바는 호룬지, 번추크는 번추즈니 또는 번추크 동료, 인장은 군사 판사, 쿠린 인장은 쿠린 오타만, 팔란카 인장은 해당 팔란카 대령, 쇠고는 도브시(드러머), 지팡이는 군사 오사불, 배지는 지정된 배지 동료에게 주어졌다.
쇠고 스틱을 제외한 모든 클레이노디는 시치의 포크로바 교회 보물 창고에 보관되었으며, 키시 오타만의 명령에 의해서만 꺼내졌다. 쇠고 스틱은 쿠린에 보관되었다. 때로는 자포로잔 호스트 군사 서기(피사르)의 속성인 은 잉크병(칼라마르)도 클레이노디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코사크 헤트만국 등 다른 코사크 사회 장교들도 유사한 클레이노드를 가졌다.
시치 파괴와 우크라이나 코사크 해산 이후, 클레이노디는 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변용 대성당, 모스크바 크렘린 무기고 등에 보관되었다. 19세기 말 에르미타주에는 17개 쿠린 배너와 호루흐바 1개, 변용 대성당에는 20개 쿠린 배너, 번추크 3개, 은 불라바 1개, 은 도금 지팡이 1개가 보관되었다. 현재 이 국보들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2월 혁명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이를 우크라이나에 반환하려 했으나, 10월 혁명으로 인해 실행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독립 선언 후 러시아에 국가 문화 유물 반환 문제를 제기했지만,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5. 러시아와의 관계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으로 자포로지아 코자크는 러시아 차르의 보호를 받게 되었지만, 상당 기간 동안 거의 완전한 자치를 누렸다. 그러나 보흐단 흐멜니츠키 사후, 그의 후계자 이반 비호프스키는 러시아의 간섭이 커지자 폴란드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하디아흐 조약(1658)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다시 합류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코사크 평민들은 가톨릭 폴란드와의 연합을 거부하며 반발했다.
이후 자포로지아 코자크는 헤트만국과는 별개로 키시 오타만을 선출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유지했다. 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과거를 기억하며, 러시아 차르에 대항한 여러 봉기에 연루되기도 했다. 특히 1709년에는 코스트 호르디엔코가 이끄는 자포로지아 코자크가 헤트만 이반 마제파와 함께 러시아에 대항하여 스웨덴의 칼 12세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표트르 1세는 보복으로 시치를 파괴했다.
1709년 베사라비아에서 마제파가 사망한 후, 필리프 오를리크가 후계자로 선출되어 헌법 초안을 발표하고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다. 그는 크림 타타르족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1711년 러시아에 대한 군사 작전에서 패배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자포로지아 코자크는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새로운 시치를 건설하기도 했다.
일부 자포로지아 코자크는 다시 모스크바의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코스트 호르디엔코와 같은 지도자들은 반러시아적 태도를 굽히지 않아 1733년 그의 사망 전까지는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5. 1. 페레야슬라프 조약과 러시아의 보호령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 이후 자포로지아 코자크는 러시아 차르의 보호 아래 종주권을 갖게 되었지만, 상당 기간 거의 완전한 자치를 누렸다. 1657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 이반 비호프스키는 러시아의 간섭이 커지자 폴란드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하디아흐 조약(1658)을 통해 자포로지아 코자크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다시 합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세임에서 비준되었지만, 가톨릭 폴란드와의 연합을 받아들이지 않은 코사크 평민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들은 폴란드를 정교회를 억압하는 자로 인식했다. 분노한 코사크는 세임에서 비호프스키의 측근인 ''폴코브니크'' 프로킵 베레쉬차카와 스테판 술리마를 처형했으며, 비호프스키 자신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자포로지아 코자크는 헤트만국과는 별개의 정부를 유지했으며, 키시 오타만으로 알려진 지도자를 1년 임기로 선출했다. 이 시기에 헤트만국과 자포로지아 코자크 사이의 마찰이 심화되었다.
코사크는 과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싸웠으며, 이후 그들의 특권과 자치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차르에 대항한 여러 봉기에 연루되었다. 1709년에는 코스트 호르디엔코가 이끄는 자포로지아 코자크가 헤트만 이반 마제파와 함께 러시아에 대항했다. 마제파는 이전에 차르 표트르 1세의 신뢰받는 조언자이자 가까운 친구였지만, 표트르 1세에 대항하여 스웨덴의 칼 12세와 동맹을 맺었다.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한 후 표트르는 시치를 보복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1709년 베사라비아에서 마제파가 사망하자 그의 의회는 그의 전임 장군 참모인 필리프 오르리크를 후계자로 선출했다. 오르리크는 헌법 초안을 발표하여 헤트만의 권한을 제한하고, 자포로지아 코자크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며, 사회적 평등을 위한 조치를 취하고, 코사크 헤트만국에서 러시아를 분리하기 위한 단계를 약속했다. 오르리크는 칼 12세의 지원을 받아 크림 타타르족 및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지만, 1711년 러시아에 대한 초기의 성공 이후 패배했고 오르리크는 망명했다. 자포로지아 코자크는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새로운 시치, 즉 드네프르 하류의 올레슈키 시치를 건설했다.
자포로지아 코자크 중 일부는 모스크바의 보호로 돌아갔지만, 지도자 코스트 호르디엔코는 반러시아적인 태도를 굳건히 유지했으며, 173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화해는 불가능했다.
5. 2. 이반 마제파와 필리프 오를리크의 반란
이반 비호프스키는 보흐단 흐멜니츠키 사후, 헤트만국의 일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이 커지자 폴란드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하디아흐 조약(1658)을 통해 자포로지 코사크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다시 합류시키려 했으나, 가톨릭 폴란드와의 연합을 반대하는 코사크 평민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분노한 코사크는 비호프스키의 측근인 ''폴코브니크''들을 처형했고, 비호프스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자포로지족은 헤트만국과는 별개로 키시 오타만을 1년 임기로 선출하여 정부를 유지했다. 이 시기 헤트만국과 자포로지족 사이의 마찰은 심화되었다.
코사크는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싸웠고, 이후 특권과 자치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차르에 대항한 여러 봉기에 가담했다. 1709년, 코스트 호르디엔코가 이끄는 자포로지 호는 헤트만 이반 마제파와 함께 러시아에 대항했다. 스웨덴의 칼 12세와 동맹을 맺은 마제파가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하자, 표트르 1세는 시치를 보복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1709년 베사라비아에서 마제파가 사망하자, 그의 의회는 전임 장군 참모인 필리프 오를리크를 후계자로 선출했다. 오를리크는 헌법 초안을 발표하여 헤트만의 권한을 제한하고, 자포로지족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며, 사회적 평등을 위한 조치를 취하고, 코사크 헤트만국을 러시아에서 분리하기 위한 단계를 약속했다. 오를리크는 칼 12세의 지원을 받아 크림 타타르족 및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지만, 1711년 러시아에 대한 초기 성공 이후 패배하여 망명했다. 자포로지족은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드네프르 하류에 올레슈키 시치를 건설했다.
자포로지 코사크 중 일부는 모스크바의 보호로 돌아갔지만, 지도자 코스트 호르디엔코는 반러시아적 태도를 굳건히 유지하여 173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화해는 불가능했다.
5. 3. 러시아 제국 내에서의 자치권 축소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으로 자포로지예는 러시아 차르의 보호 아래 종주권을 가지게 되었지만, 상당 기간 거의 완전한 자치를 누렸다. 1657년 보흐단 흐멜니츠키 사후, 후계자 이반 비호프스키는 러시아의 간섭이 커지자 폴란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658년 하디아흐 조약을 체결, 자포로지예 코자크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합류하여 세 개의 구성 국가 연방으로 복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세임에서 비준되었지만, 가톨릭 폴란드와의 연합을 받아들이지 않은 코자크 평민들에 의해 헤르마니우카 라다에서 거부되었다. 그들은 폴란드를 정교회를 억압하는 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자포로지예는 헤트만국과는 별개의 정부를 유지했으며, 키시 오타만이라는 지도자를 1년 임기로 선출했다. 이 시기에 헤트만국과 자포로지예 사이의 마찰이 심화되었다. 코자크는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싸웠으며, 이후 그들의 특권과 자치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차르에 대항한 여러 봉기에 연루되었다. 1709년에는 코스트 호르디엔코가 이끄는 자포로지예가 헤트만 이반 마제파와 함께 러시아에 대항했다.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한 후 표트르는 시치를 보복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1709년 베사라비아에서 마제파가 사망하자 그의 의회는 필리프 오르리크를 후계자로 선출했다. 오르리크는 헌법 초안을 발표, 헤트만의 권한을 제한하고 자포로지예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며, 코자크 헤트만국에서 러시아 국가를 분리하기 위한 단계를 약속했다. 오르리크는 크림 타타르족 및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지만, 1711년 러시아에 대한 초기의 성공 이후 패배하여 망명했다. 자포로지예는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새로운 시치, 즉 드네프르 하류의 올레슈키 시치를 건설했다.
자포로지예 코자크 중 일부는 모스크바의 보호로 돌아갔지만, 지도자 코스트 호르디엔코는 반러시아적인 태도를 굳건히 유지했으며, 173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화해는 불가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코자크와 러시아 차르 정부 간의 마찰은 줄어들었고, 특권은 코자크 자치권의 감소와 교환되었다. 마제파 편에 서지 않은 우크라이나 코자크는 이반 스코로파드스키를 헤트만으로 선출했다. 스코로파드스키는 헤트만 자치권과 스타르시나의 특권을 보존하는 것을 옹호하면서도 러시아와의 연합에 충실했다. 러시아 군사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스코로파드스키는 헤트만령 영토에 러시아 연대 10개의 주둔을 허용했다. 많은 코자크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요새화 및 운하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뼈 위에 세워졌다"고 언급되기도 한다.
1734년,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면서 러시아와 자포로자 코자크 사이에 루브니 조약이 체결되었다. 자포로자 코자크는 키예프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지휘를 받는 대가로 이전의 모든 토지, 특권, 법률 및 관습을 되찾았다. 새로운 ''시치''(''노바 시치'')가 건설되었다. 자포로자의 내정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 가능성에 대해 우려한 코자크는 폴란드와 러시아 본토에서 농노제를 피해 도망온 우크라이나 농민들과 함께 그들의 땅을 정착시키기 시작했다. 1762년까지 33,700명의 코자크와 15만 명이 넘는 농민이 자포로자를 거주했다.
18세기 말, 우크라이나의 코자크 장교 계급의 대부분은 러시아 귀족에 편입되었지만, 상당수의 일반 코자크는 농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자유를 유지하며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농노제를 피해 도망온 사람들에게 계속 피난처를 제공했고, 이는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분노를 자아냈다. 1775년까지 헤트만령과 폴란드 통치 우크라이나에서 자포리자로 도망온 농노의 수는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퀴취크 카이나르자 조약 (1774)으로 크림 칸국이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자포로자가 수행했던 남부 국경 방어의 필요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노보로시야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고, 뉴 세르비아가 자포로자 시치 토지 바로 옆에 위치하면서 토지 소유권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는 종종 폭력으로 이어졌다.
6. 자포로자 호스트의 해산 (1775)
자포로자 시치의 해산은 1775년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표트르 테켈리 장군이 자포로자 시치를 파괴하고 자포로자 코사크를 해산한 사건이다.
1775년 6월 5일, 테켈리 장군의 군대는 5개 분견대로 나뉘어 포병과 보병으로 시치를 포위했다. 남쪽 국경에 적이 없어 전투 능력이 약화된 코사크는 포위된 후에야 러시아 보병이 자신들을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러시아군은 국경 수비를 위해 이동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코사크를 속였고, 기습 포위는 코사크의 사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페트로 칼니셰프스키는 여제의 최후통첩에 대한 결정을 내릴 두 시간을 받았다. 그동안 ''스타르쉬나'' 랴흐의 지시에 따라 50명의 코사크가 오스만 제국 영토인 남부 부크 강 인훌에서 낚시를 하는 척하며 탈출을 시도했다. 5천 명의 코사크가 이들과 합류하여 포위망을 뚫고 다뉴브 델타로 이동,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새로운 다뉴브 시치를 형성했다.
테켈리가 탈출을 알게 된 후, 시치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코사크는 무장 해제되었고, 보물과 기록 보관소는 압수되었다. 칼니셰프스키는 솔로프키로 유배되어 112세까지 감금되었다.[10] 파블로 홀로바티 등 상위 코사크 평의회 구성원도 유배되었지만, 하위 지휘관 및 일반 코사크는 러시아 경기병 및 용기병 연대에 합류했다.
6. 1. 해산 배경
1775년 5월 7일, 예카테리나 2세의 어전 회의에서 자포로자 시치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표트르 테켈리 장군은 시치를 점령하고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에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참여했던 31개 연대(총 65,000명)가 동원되었다. 공격은 5월 15일에 시작되어 6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몇 년 전 흐리츠코 네체사라는 이름으로 명예 자포로자 코사크가 된 그리고리 포툠킨이 이 명령을 내렸다.예카테리나 2세는 1775년 8월 8일 칙령에서 자포로자 시치가 파괴되었고 자포로자 코사크라는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을 언급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밝혔다.
1775년 6월 5일, 테켈리 장군의 군대는 시치를 포위했다. 코사크는 러시아군이 국경을 지키기 위해 이동한다는 소문에 속아 넘어갔다. 기습 포위는 코사크의 사기에 큰 타격을 주었다.
페트로 칼니셰프스키는 최후통첩에 대한 결정을 내릴 두 시간을 받았다. 그 사이 50명의 코사크 그룹이 오스만 제국 영토로 낚시를 가는 척하며 탈출을 시도했고, 5천 명이 합류하여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다뉴브 델타로 이동하여 다뉴브 시치를 형성했다.
테켈리가 탈출을 알게 된 후, 시치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코사크는 무장 해제되었고, 보물과 기록 보관소는 압수되었다. 칼니셰프스키는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로 유배되었고, 112세까지 살았다.[10] 파블로 홀로바티 등 상위 코사크 평의회 구성원도 유배되었지만, 하위 지휘관 및 일반 코사크는 러시아 경기병 및 용기병 연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6. 2. 해산 이후
예카테리나 2세의 어전 회의에서 1775년 5월 7일 자포로자 시치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표트르 테켈리 장군은 시치를 점령하고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에는 31개 연대(총 65,000명)가 동원되었다. 공격은 5월 15일에 시작되어 6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명령은 몇 년 전 흐리츠코 네체사라는 이름으로 명예 자포로자 코사크가 된 그리고리 포툠킨이 내렸다.1775년 6월 5일, 테켈리 장군의 군대는 5개의 분견대로 나뉘어 포병과 보병으로 시치를 포위했다. 코사크들은 포위된 후 러시아 보병이 자신들을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페트로 칼니셰프스키는 최후통첩에 대한 결정을 내릴 두 시간을 받았다. 칼니셰프스키의 뒤에서, ''스타르쉬나'' 랴흐의 지시에 따라 50명의 코사크 그룹과 함께 오스만 제국 영토에서 낚시를 하려는 음모가 꾸며졌다. 이들은 다뉴브 델타로 이동하여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새로운 다뉴브 시치를 형성했다.
테켈리가 탈출을 알게 되었을 때, 나머지 12,000명의 코사크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시치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코사크는 무장 해제되었으며, 그들의 보물과 기록 보관소는 압수되었다. 칼니셰프스키는 체포되어 솔로프키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112세까지 감금된 채 살았다.[10]
자포로자 시치의 파괴 이후, 1784년 포템킨은 "충성스러운 자포로지 코자크 군"을 창설하여 남부 부크강과 드네스트르강 사이에 정착시켰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1792)에서 그들의 공헌으로 쿠반 땅을 하사받았고 1792년에 그곳으로 이주했다.
1828년, 다뉴브 시치는 니콜라이 1세 황제에 의해 사면된 후 소멸되었고, 그 구성원들은 베르댠스크와 마리우폴 사이의 북부 아조우해 해안에 정착하여 아조우 코자크 군을 형성했다. 1862년 그들 또한 쿠반으로 이주하여 쿠반 코자크와 합병되었다. 1828년 러시아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코자크들의 후손 3만 명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의 다뉴브 삼각주 지역에 살고 있으며, "루스나크"로 알려져 있다.
7. 유산
자포로자 코자크는 1775년에 공식적으로 소멸했지만,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튀르키예 등 여러 국가에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깊은 유산을 남겼다. 코자크의 변화하는 동맹은 특히 20세기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인들에게 페레야슬라프 조약은 러시아 차르국과 러시아 제국이 루테니아 땅을 점령하고 키예프 루스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권리를 주장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이는 러시아 차르가 모든 러시아의 보호자로 선포되는 결과를 낳았고, 19세기의 범슬라브주의 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 흐멜니츠키 봉기와 자포로잔 코자크의 몰락은 대홍수와 함께 연방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는 18세기 후반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는 연방의 점진적인 쇠퇴로 이어졌다.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자포로잔 코자크는 이들의 수많은 공격을 견뎌냈고, 러시아군이 튀르키예의 북부 및 중앙 유럽 확장 야망을 꺾는 데 기여했다.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크림 반도를 잃은 오스만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목 | 제작 연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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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편지 (1972) | 1972년 | 우크라이나 |
시치로 가는 길 (1994) | 1994년 | 우크라이나 |
불과 검 (1999) | 1999년 | 우크라이나, 폴란드 |
헤트만 (2015) | 2015년 | 우크라이나 |
7. 1. 현대의 코자크 부흥 운동
1775년 자포로자 코자크는 공식적으로 소멸했지만,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튀르키예 등 코자크와 접촉한 여러 국가에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깊은 유산을 남겼다.
오늘날 자포로잔의 후손인 쿠반 코사크 대다수는 러시아에 충성하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소련 해체 이후 지역 분쟁에서 싸웠으며, 혁명 이전 황제의 사설 경호원을 구성했던 것처럼 현재 크렘린 대통령 연대의 대다수도 쿠반 코사크로 구성되어 있다.
자포로잔 코자크의 역사적 유산은 19세기 후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아드리안 카첸코, 올레나 아파노비치와 같은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1775년 자포로잔 시치의 최종 폐지가 역사적인 우크라이나 요새의 종말이었다고 주장한다. 1917년 혁명 이후, 새로 선포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방어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자유 코사크 군단이 조직되었다.[11] 소련 시대에는 민족주의 정서 고조를 억제하기 위해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공식적으로 억제되었고, 대신 자포로잔 코자크가 튀르크로부터 모스크바를 방어한 역사적 역할이 기념되었다. 1990년, 소련 정부와 우크라이나 독립 운동은 자포로잔 시치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협력했다.[12]

자포로잔의 복장, 노래, 음악은 공식적인 국가 춤 및 음악 앙상블에 도입되어 우크라이나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코사크 생활 양식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정치, 승마 및 문화적 노력에 집중되었다.[13] 2016년 11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의 코사크 노래가 UNESCO 긴급 보호가 필요한 무형 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14]
현재 자포로잔 코자크의 요새인 호르티차는 우크라이나 국가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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Русская старина
187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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Главы 1-5. Рігельман Олександр. Літописна оповідь про Малу Росію та її народ і козаків узагал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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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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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ПОХОДЖЕННЯ ОСНОВНИХ ГРУП КОЗАЦТВА ЗА ДАНИМИ ПРО ПОЛІМОРФІЗМ Y ХРОМОСОМ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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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sack Navy 16th - 17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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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in Dominican Cathedral, Lub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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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алнишевскій, послъдній кошевой Запорожской Съчі. 1691 –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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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Архівні фото відзначення у 1990 році 500-ліття Запорозького козацтва
https://www.radiosvo[...]
2023-04-16
[13]
뉴스
Yanukovych cancels three decrees on Ukrainian Coss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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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iv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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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sack's songs of Dnipropetrovsk Region"
http://www.unesco.or[...]
UNESCO official web-site
2016-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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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Where to go on Independence Day: 21 sights for the statehood of Ukraine
https://www.radiosvo[...]
Radio Free Europe
202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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