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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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수일은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나 북한 공작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베이징 대학교에서 유학하고, 이후 북한 국적을 취득하여 평양국제관계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1974년부터 대남 공작원으로 활동하며 12개 언어를 구사했으며, 대한민국에 잠입하여 학자로 위장, 정보를 수집하고 북한에 보고했다. 1996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이후 특별 사면 및 복권되었으며, 단국대학교 초빙교수로 활동하며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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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봉은 만주국 군인과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기여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자, 김창룡 저격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4.19 혁명 후 석방되어 국회의원과 주스웨덴 대사를 지낸 정치인 겸 외교관이다. - 룽징시 출신 - 서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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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정수일 |
다른 이름 | 무함마드 칸수 (가명) |
국적 | 만주국 (1934–1945) 중화민국 (1945–1949) 중화인민공화국 (1949–196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63–1980년대) 레바논 (1980년대–1983) 필리핀 (1983–2000년대) 대한민국 (2000년대–) |
직업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
출생일 | 1934년 |
출생지 | 만주국 옌볜 (오늘날의 중국 지린성) |
인물 정보 | |
로마자 표기 | Jeong Su-il |
한자 표기 | 鄭守一 |
중국어 표기 (병음) | Zhèng Shǒuyī |
한글 표기 | 정수일 |
한자 (한국어) | 鄭守一 |
로마자 표기 (문화어) | Chŏng Suil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 | Chŏng Suil |
학력 | |
학력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대학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연구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
가족 관계 | |
가족 | 전처 소생 자녀 있음 (북한 거주), 연변 거주 형제자매, 후처 소생 자녀 없음 |
2. 이력
정수일은 1934년 중국 지린성 룽징시에서 조선족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2년 베이징 대학에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하고, 중공 국비 유학생으로 이집트 카이로 대학에서 유학하였다. 196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하고 평양국제관계대학 및 평양외국어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4년 대남 특수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교육을 받은 후, 레바논으로 출국하여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다(이후 필리핀 국적도 취득). 1980년대에 필리핀 국적의 '무함마드 깐수'로 위장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하여 1990년 〈신라와 아랍·이슬람제국 관계사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단국대학교 초빙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9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본명 및 신분이 밝혀지면서 단국대학교 교수직 및 박사 학위를 박탈당했다.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한 후, 2003년 특별사면 및 복권되어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다. 2004년에는 불교인권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에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창립하였다.[10]
2. 1. 언어 능력
만주국 용정에서 태어난 정수일은 조선족 출신으로, 1952년 북경대학에 입학하여 1955년 졸업 후 이집트 카이로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타갈로그어, 말레이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 등 12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11]1996년 10월 21일 옥중 편지에서 정수일은 자신이 여러 외국어를 습득하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1]
- 일본어: 용정에서 성장하면서 처음 접한 글자로, 소학교 때 배우고 해방 후에도 일본 서적을 읽으며 꾸준히 접했다.
- 중국어: 고등학교에서 배웠고, 중국 외교부에서 근무하면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러시아어: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되어 자연스럽게 익혔고, 북한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학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러시아어 원전을 많이 읽어야 했다.
- 영어: 대학에서 배웠고, 이집트 유학 중 공용어로 사용되면서 더욱 익숙해졌다.
- 아랍어: 전공이었고, 10년간 아랍어권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몸에 익은 언어가 되었다. 남한에 와서도 단국대, 외대, 명지대에서 강의했다.
- 독일어: 카이로대학 유학 시절 아랍어 고전 연구를 위해 필요하여 주변의 도움으로 익혔다.
- 프랑스어: 구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등에서 근무하면서 업무상 습득했다.
- 스페인어: 모로코에서 근무할 때 스페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 호기심에 익혔다.
- 페르시아어: 아랍어와 많이 섞여 있어 학구열에 불타던 시절 이란 친구들과 어울리며 익혔다.
- 말레이어: 말레이시아 말레이 대학 교수로 지내면서 필요에 의해 배웠다.
- 타갈로그어: 필리핀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몰입하여 배웠다.
정수일은 60 평생 동안 외국어 학습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으며, 이는 그의 기구한 인생 역정과 문명교류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그는 외국어 학습이 세계로의 지평을 넓혀주는 큰 자산이라고 강조하며, 앞으로도 인도 고대어를 비롯한 몇 가지 언어를 더 배울 계획이라고 밝혔다.[11]
2. 2. 북한 공작원 활동
1974년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특수 교육을 받았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타갈로그어, 말레이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 등 12개 언어를 구사했다.[10] 이후 튀니지 대학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말레이시아 말라야 대학교 이슬람 아카데미 교수 등을 거치며 해외에서 활동했다. 레바논 조선친선협회의 도움으로 '''무하마드 칸스'''라는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획득했고,[2][3] 1984년 2월에는 필리핀 국적을 획득했다.[4]1984년 4월,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입학을 구실로 한국에 잠입했다. 필리핀 국적을 유지하며 학자로 위장, 정계, 학계, 언론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고급 정보를 수집했다. 암호와 은어를 사용한 국제 우편, 팩스 등을 이용하여 80여 차례에 걸쳐 중국의 공작 거점을 통해 북한에 고급 정치·군사 정보를 보고했다.
1987년 7월부터 1995년 2월 사이에는 4차례에 걸쳐 중국, 오스트리아 등을 경유하여 북한을 방문했다. 김일성/김정일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대남 공작 공로로 조국통일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단파 라디오, 암호표, 독약 앰플 등의 공작 장비와 공작금(19000USD)을 수수하고 한국에 다시 잠입하여 활동했다.
3. 옥중서신
정수일은 1996년 10월 21일과 1997년 1월 20일에 옥중에서 편지를 보냈다. 1996년 10월 21일 편지에서는 여러 외국어를 습득하게 된 과정과 자신의 인생 역정, 외국어 학습의 관련성에 대해 썼다.[11] 1997년 1월 20일 편지에서는 분단 비극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단국대학교 제자와 법정에서 만났던 일화를 소개하며 분단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12]
3. 1. 이방어의 여신에 사로잡혀 (1996년 10월 21일)
'이방어중국어의 여신에 사로잡혀'라는 제목으로 1996년 10월 21일에 보낸 옥중편지의 일부이다.[11] 정수일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여러 외국어를 습득하게 된 과정을 회고했다.정수일은 룽징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처음 접한 글자는 중국 한자가 아닌 일본어였다. 소학교 때 일본어를 배우고 해방 후에도 일본 서적을 읽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웠고, 중국 외교부에서 근무하며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러시아어는 대학 교재로 채택되어 자연스럽게 익혔고, 북한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러시아 원전을 많이 읽어야 했다. 영어는 대학에서 배웠지만 이집트 유학 중 공용어로 사용되어 더욱 가까워졌다.
아랍어는 전공이었고 10년간 아랍어권에서 생활하며 몸에 익었다. 귀국 후에는 단국대, 외대, 명지대에서 아랍어를 강의했다. 독일어는 카이로 대학교 유학 시절 아랍어 고전 연구를 위해 필요하여 익혔다. 프랑스어는 구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등에서 근무하며 업무상 습득했다. 스페인어는 모로코에서 있을 때 스페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 호기심에 익혔다.
페르시아어는 향학열에 불타던 시절 아랍어와 많이 섞여 있어 도전했고, 이란 친구들과 어울리며 웬만한 대화가 가능해졌다. 말레이시아어는 말레이 대학 교수로 지내면서, 필리핀어는 필리핀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몰두했다. 이렇게 동서 12개 언어와 씨름했다.
정수일은 자율적, 타율적으로 외국어를 익혔으며, 현재 문명 교류학을 개척하며 인도 고대어를 비롯한 두세 개 언어를 더 배울 필요성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60 평생 외국어의 여신에 사로잡혀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이는 자신의 꿈과 기구한 인생 역정과 관련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외국어 학습에 시간과 정력을 많이 소진했지만 예정된 운명으로 여기고 신명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으며, 오히려 결실을 맺고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외국어는 아는 만큼 세계로의 지평이 넓어지는 자산이며, 자신의 경험이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3. 2. 스승과 제자가 한 포승줄에 묶여 (1997년 1월 20일)
나는 분단 비극의 체험자이자 산 증인으로서, 이 민족의 운명과 미래에 대해 많은 고뇌를 해왔다.[1] 한국에 와서는 분단된 국토의 비운을 더욱 실감하고 통일을 위한 방법을 숙고해왔다.[1]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긍지와 저력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빨리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1]우리는 불신과 반목을 극복하고, 뼈를 깎는 자성을 통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1] 민족 구성원 간의 일체감과 연대 의식을 발휘하여 민족을 위한 마음, 즉 하나 되어 함께 걷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1] 민족애와 공동체 의식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가치이며, 버려야 할 것은 민족 배타주의와 허무주의뿐이다.[1]
며칠 전, 나는 내가 재직했던 단국대학교의 한 재학생과 한 밧줄로 묶여 법정에 출두한 적이 있었다.[1] 그는 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 나를 알아보고 목례를 했고, 수갑을 찬 채로 내 입에 사탕을 넣어주었다.[1] 그 순간 나는 큰 감동을 받았고, 남북의 기성세대가 역할을 다하지 못해 젊은이들이 고생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1] 스승과 제자가 한 밧줄로 묶이는 이 드문 현실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자 아픔이다.[1]
분단이 없었다면, 우리의 젊은이들이 감옥에 오는 일 없이,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1] 내가 구속되어 강좌가 폐강되고, 학생들이 표류하게 된 것에 대해 교수로서 죄책감을 느꼈다.[1] 이러한 분단의 비참함과 불행은 기성세대가 감수해야 할 몫이며,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1]
4. 평가
김정남 전 청와대 수석은 정수일을 정약용과 비교하며, "다산이 겪은 고난은 우리를 연민에 빠지게 한다. 다산의 18년 유배 생활이 없었다면 과연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5백여 편의 저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참으로 오묘한 섭리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힘이랄까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에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이 당시에 겪어야 했던 고난의 기록들은 우리를 안타깝고 또 슬프게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인생의 기구한 것이 그러하고, 나라와 겨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그러하며, 고난 속에서도 불태우고 있는 학문적 열정이 또한 그러하다"라는 말로써 두 인물의 공통점을 제시하며 정수일의 학문에 대한 집념을 높게 평가했다.
5. 저서
출판 연도 | 제목 |
---|---|
1992 | 신라와 서역(중국)의 교류사 |
1994 | 신라 서역 교류사 |
1995 | 기초 아랍어 |
1995 | 세계속의 동과 서 |
2001 | 고대문명교류사 |
2001 | 씰크로드학 |
2002 |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
2002 | 이슬람 문명 |
2002 | 문명 교류사 연구 |
2002 | 실크로드, 문명의 길 |
2004 |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
2004 |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
2005 | 한국 속의 세계 (2권) |
2006 | 실크로드 문명기행 |
2006 |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 |
2008 | 시대와 소통 (공저) |
2009 | 문명담론과 문명교류 (한국문명교류연구소 학술총서 1) |
2010 |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창비사) |
2013 | 실크로드 사전[6] |
2018 |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
2020 | 우리 안의 실크로드 |
6. 역서
참조
[1]
웹사이트
A life stranger than fiction
https://www.koreaher[...]
2024-07-22
[2]
뉴스
Man arrested suspected of spying for North Korea
http://www.aparchive[...]
2018-11-21
[3]
웹사이트
[THIS WEEK IN HISTORY]A cult leader falls, a spy is exposed and a coup succeeds
https://koreajoongan[...]
2024-07-22
[4]
뉴스
Cloaks and Daggers
http://koreajoongang[...]
JoongAng Ilbo
2018-11-21
[5]
웹사이트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Silk-Road Studies
http://www.sun-silkr[...]
Silk Road Universities Network
2018-11-21
[6]
뉴스
The Sea Completes Silk Road
http://www.koreafocu[...]
Hankook Ilbo
2018-11-21
[7]
뉴스
무하마드 깐수는 교수위장 남파간첩
KBS NEWS
1996-07-21
[8]
뉴스
무함마드 깐수, 남파간첩으로 밝혀져 (1996.7.21.)
KBS NEWS
202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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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특사 대사면 실시
KBS NEWS
200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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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간첩 깐수에서 실크로드 박사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http://www.yeongnam.[...]
영남일보
2013-12-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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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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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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