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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러시아-스웨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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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러시아-스웨덴 전쟁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가 국제적 지위 향상과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 단절을 시도하며 발발했다. 구스타프 3세는 국내 정치적 이유로 짧은 전쟁을 통해 야당을 지지하게 만들고자 했고, 대영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로이센 왕국 등 열강의 지원을 받지 못했으나,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전쟁은 1788년 러시아군의 스웨덴 침공으로 시작되었으며, 호글란트 해전과 스벤스크순 해전 등 해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덴마크의 참전과 핀란드에서의 스웨덴 군의 부진으로 구스타프 3세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외교적 노력을 통해 덴마크를 전선에서 이탈시켰다. 결국 1790년 바랄라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스웨덴은 영토 변화 없이 러시아와의 평화를 이루었으나, 구스타프 3세는 1792년 암살되었다.

2. 배경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는 유럽 내 스웨덴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러시아 제국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당시 북방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에게 외교를 통해 러시아의 내정 간섭 중단과 덴마크와의 협력 관계 철폐를 요구했으나, 이러한 외교적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구스타프 3세는 전쟁을 선택하게 되었다.

구스타프 3세가 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국내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1772년 무혈 쿠데타로 권력을 강화했지만, 점차 인기를 잃어가던 그는 단기적인 전쟁 승리를 통해 국내 반대파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또한, 러시아가 스웨덴 내부의 반대 세력을 지원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전쟁을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스웨덴은 전쟁을 함께할 동맹국을 찾지 못했다. 프랑스혁명 직전의 혼란으로 인해 스웨덴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고, 과거 대북방 전쟁에서 동맹이었던 오스만 제국도 동맹 체결을 거부했다. 반면, 덴마크는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영국프로이센 등 다른 열강들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명했지만,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는 것을 경계하며 러시아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스웨덴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간접적으로 부추기기도 했다.

2. 1. 국제 정세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는 국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국제 사회에서 스웨덴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1772년 무혈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지만, 전쟁 개시 권한은 없었으며 점차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구스타프 3세는 단기적인 전쟁 승리를 통해 반대파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으며, 러시아 제국이 자신의 반대 세력을 지원하며 내정 간섭을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국제적으로 구스타프 3세는 당시 북방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에게 외교적으로 러시아의 내정 간섭 중단과 러시아-덴마크 동맹 관계 철폐를 요구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외교적 실패는 구스타프 3세가 전쟁을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된 주요 배경이 되었다.

한편,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1792)에서 러시아가 연이어 승리하자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로이센 왕국 등 서방 열강들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북방에서 스웨덴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간접적으로 부추겼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구스타프 3세는 1788년 여름 오스만 제국동맹을 추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프랑스 혁명 직전의 혼란으로 스웨덴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고, 과거 대북방 전쟁의 동맹이었던 오스만 제국마저 동맹 체결을 거부했다. 결국 스웨덴은 동맹국 없이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반면 덴마크는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했으며, 영국과 프로이센 등 다른 열강들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구스타프 3세는 1789년 리크스다그(스웨덴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전쟁 비용 조달 목적으로 국채청 설립을 승인했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스웨덴 리크스달러의 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2. 2. 구스타프 3세의 국내 정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는 국내 정치적 이유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짧은 전쟁을 통해 야당 세력이 자신을 지지하게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1772년 피를 흘리지 않은 쿠데타를 통해 의회 통치를 끝내고 절대 권력을 확립했지만, 그에게 전쟁을 시작할 법적인 권한은 없었다. 게다가 그의 인기는 점차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는 1786년 리크스다그 회기 동안 뚜렷해졌다.

이러한 구스타프 3세의 인기 하락에는 러시아 제국의 영향도 있었다. 러시아는 독재적인 성향의 스웨덴 국왕이 자국의 이익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고, 스웨덴 내 구스타프 3세 반대파를 은밀히 지원했다. 구스타프 3세는 러시아의 이러한 움직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로 삼았다.

한편, 대영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로이센 왕국 등 서방 열강들은 당시 진행 중이던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1792)에서 러시아가 연이어 승리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관심을 남부 전선에서 북쪽으로 돌리기 위해 스웨덴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구스타프 3세는 1788년 여름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서방 열강들은 실제 동맹 결성에는 소극적이었고, 오직 오스만 제국만이 스웨덴과 동맹 관계를 맺으려 했다. 프랑스혁명 직전의 혼란으로 스웨덴을 지원할 수 없었고, 덴마크는 여전히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1789년, 구스타프 3세는 리크스다그를 성대하게 개막하기 전에 리크스다그 행진곡 작곡을 의뢰하기도 했다. 의회는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채청 설립을 결정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스웨덴 리크스달러 가치의 하락, 즉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3. 전개

1788년 6월, 러시아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어 스웨덴 수비병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가 전쟁 명분을 만들기 위해 계획한 자작극으로 여겨진다.[1][2] 당시 스웨덴 헌법상 공격 전쟁을 시작하려면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강대국 러시아와의 전쟁을 꺼리는 의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구스타프 3세는 방어전을 가장하여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그는 이전부터 군사력 증강에 힘써 육군해군을 강화했으며, 마침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년) 중인 상황을 이용했다.[2]

구스타프 3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핀란드에 상륙하고, 과거 스웨덴 영토였던 카렐리야 반환을 요구했으나 러시아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핀란드만에서 벌어진 호글란트 해전 등 초기 해전에서는 뚜렷한 승패가 나지 않았다.[6] 핀란드에 주둔한 스웨덴군은 사기가 낮았고, 일부 핀란드 병사들이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에게 항복하려던 아니알라 사건이 발생하는 등 내부적인 어려움도 겪었다.[8] 이러한 상황에서 덴마크-노르웨이가 러시아와의 동맹 조약에 따라 스웨덴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에 개입했다.[9] 구스타프 3세는 영국프로이센의 외교적 압력을 통해 덴마크-노르웨이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데 성공했다.[9]

전쟁 초기 육전이 부진하자 구스타프 3세는 해군력에 집중했다. 러시아 역시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년)에 집중하느라 스웨덴과의 전쟁에서는 주로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다. 전쟁의 양상은 해전 중심으로 흘러갔고, 1790년 7월 스벤스순 해전에서 스웨덴 해군은 러시아 발트 함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는 약 50척의 군함을 잃고 9,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스웨덴의 손실은 군함 6척과 전사자 3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 승리에는 영국 해군에서 파견된 시드니 스미스 등의 역할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벤스순 해전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전쟁 장기화에 따른 재정 부담과 전염병 등으로 인한 손실도 컸기 때문에[2] 스웨덴은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러시아 역시 스웨덴을 쉽게 굴복시킬 수 없다는 점과 다른 전선에서의 부담 때문에 평화를 원했다. 결국 양측은 협상에 나서 1790년 8월 14일 베르얄라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종결시켰다.

3. 1. 초기 군사 행동 (1788년)

1788년 스톡홀름에서 정비된 스웨덴 군함; 루이 장 데프레의 수채화


1788년 6월, 스웨덴 왕립 오페라의 수석 재단사는 러시아 군복 제작 주문을 받았고, 이는 같은 달 27일 핀란드 국경 인근 푸우말라의 스웨덴 전초기지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에 사용되었다.[1] 이 사건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가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기 위해 계획한 위장 전술 공격으로 여겨진다. 당시 스웨덴 헌법상 공격 전쟁을 시작하려면 신분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으나, 의회는 이미 반대 의사를 표명한 상태였다.[1] 따라서 구스타프 3세는 이 사건을 러시아의 공격으로 위장하여 '방어 전쟁'을 선포할 명분을 만들고자 했다.[1][2] 그는 이전부터 군사력 증강에 힘써 이전의 자유 시대보다 강화된 육군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마침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 중인 상황을 이용했다.[2]

스웨덴은 처음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해상 공격을 계획했다. 핀란드를 통한 육군 진격, 핀란드 해안을 따르는 연안 함대의 진격, 그리고 스웨덴 주력 함대를 이용한 오라니엔바움 상륙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진격이라는 세 갈래 작전이었다.[3] 목표는 예카테리나 2세 여제를 폐위시키는 쿠데타를 유발하는 것이었으며, 스베아보리가 작전 기지로 설정되었다.[3] 그러나 이 모든 구상은 스웨덴 공해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했다.[3] 전쟁은 인기가 없었고, 특히 스웨덴 동부(핀란드)에서는 더욱 그랬다. 고위 군 지도자들조차 전쟁 계획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으며,[4] 특히 육군 장교들 사이에서 불안이 널리 퍼졌다. 이는 부분적으로 게오르그 마그누스 스프렝트포르텐의 핀란드 독립 계획을 여전히 지지하는 사람들의 영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4]

호그랜드 전투의 러시아 함대.


1788년 호글란트 해전 당시의 전투 대형을 그린 스웨덴 그림


쇠데르만란드 공작 찰스가 지휘하는 스웨덴 공해 함대는 1788년 6월 9일 칼스크로나에서 출항했다.[5] 6월 21일, 함대는 사레마 섬 근처에서 러시아 함대와 만나 경례 문제로 분쟁을 유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7월 7일, 스웨덴 함대는 러시아와의 전쟁 상태가 발효되었음을 통보받았고, 7월 8일에는 준비되지 않은 러시아 프리깃 2척 - 32문 함포의 ''야로슬라베츠''(''Jaroslavets'')와 24문 함포의 ''헥토르''(''Hektor'')를 기습하여 승무원 450명과 함께 나포했다.[6] 7월 17일, 사무엘 그레이그 제독이 지휘하는 러시아 함대와 호글란트 해전에서 교전을 벌였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6] 찰스 공작의 함대는 수리를 위해 스베아보르로 돌아왔으나, 스베아보르는 연안 함대를 염두에 두고 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해 함대의 대형 대포에 대한 탄약이 부족했고 대형 범선 수리에 필요한 장비도 부족했다.[7]

연안 함대의 스톡홀름 함대는 9,000명 이상의 병력을 싣고 6월 25일 핀란드로 출발하여 7월 2일 목적지인 스베아보리에 도착했다.[7] 미카엘 앙카르스뵈르드 대령 휘하의 연안 함대 스베아보르 함대는 7월 26일, 6,000명의 병력을 싣고 하미나로 출발했고, 구스타프 모리츠 아르름펠트 장군 휘하의 4,000명 규모의 부대는 육로로 진격했다.[7] 스웨덴 연안 함대는 7월 28일 하미나 외곽에서 러시아 갤리 그룹과 잠시 충돌하여 그들을 요새 안으로 후퇴시켰다.[7] 8월 2일, 스웨덴의 최초 상륙 시도가 시작되었지만 악천후로 주력이 상륙하지 못했고 러시아의 반격으로 스웨덴 상륙 부대 300명이 함선으로 돌아가야 했다.[7] 8월 3일,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서 상륙에 성공했고, 저녁 무렵 스웨덴군은 하미나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4일 새벽, 러시아의 격렬한 저항과 장교들 사이에서 커지는 국왕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스웨덴 상륙 부대는 함선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7] 육상에서는 베르트 요한 하스트페르 대령 휘하의 1,700명 규모의 사볼락스 여단이 7월 2일 니슬로트를 기습하려 했으나 포위전으로 전환되었고, 포위 포병 부족으로 인해 8월 21일에 포위를 포기해야 했다.[8] 칼 구스타프 아르름펠트 2세 장군의 총 5,100명 병력(기존 4,000명 + 구스타프 모리츠 아르름펠트 휘하 1,100명)은 연안 함대의 하미나 점령을 지원하기 위해 7월 18일 국경을 넘었으나, 하미나에서의 실패가 분명해지자 스웨덴군은 국경으로 후퇴했다.[8]

1788년 호글란트 해전


전쟁이 의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불법으로 인식되면서 실패는 장교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8월 9일, 일부 장교들은 러시아와의 평화를 간청했고, 8월 12일에는 안얄라 선언에 서명했으며, 이는 후에 안얄라 음모로 알려지게 되었다.[8] 이러한 상황에서 덴마크-노르웨이로부터 전쟁 위협 소식이 전해지자, 반란 장교들에게 둘러싸였던 구스타프 3세의 입지는 크게 개선되었다. 그는 군대를 버렸다는 비난 없이 8월 25일 스웨덴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8] 스웨덴의 러시아 공격으로 덴마크-노르웨이는 러시아와의 조약 의무에 따라 8월에 스웨덴에 선전포고했다.[9] 노르웨이군은 잠시 스웨덴을 침공하여 크비스트룸 다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영국프로이센의 외교적 개입으로 1789년 7월 9일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들의 압력으로 덴마크-노르웨이는 분쟁에서 중립국임을 선언했다.[9] 구스타프 3세는 국내에서 성직자, 시민, 농민의 지지를 결집했다.[2]

러시아 함대는 호글란트 해전 직후인 8월 초부터 스베아보르에서 스웨덴 공해 함대를 봉쇄하기 시작했다.[10] 제임스 트라베넨(James Trevenen)이 지휘하는 러시아 함대의 소규모 부대는 1788년 8월 말 한코 인근의 안전한 연안 항로를 차단하여 스웨덴 함대와 군대에 심각한 보급 문제를 야기했다.[10] 빅토르 폰 스테딩크 중령 휘하의 소규모 연안 함대 부대가 증원을 받아 10월 17일에 러시아군과 교전하여 봉쇄를 뚫고 보급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10] 며칠 후 러시아군은 해당 위치에서 철수하여 스웨덴 수송선이 자유롭게 보급품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10] 스베아보르에서는 공해 함대의 함선을 수리 및 개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함대는 칼스크로나로 출항해야 했다. 준비 부족과 악천후로 출발은 11월 20일까지 지연되었고, 이때 스베아보르 앞바다는 이미 얼어붙어 일부 배는 얼음을 깨고 나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대는 손실 없이 일주일 후 칼스크로나에 도착했으며, 이는 해당 항구가 얼어붙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10]

3. 2. 덴마크 참전과 외교적 노력

핀란드 전선에서 스웨덴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핀란드에 주둔한 스웨덴군은 러시아 국경까지 진군했지만 사기가 낮았고, 일부 핀란드 병사들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에게 항복 탄원서를 작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른바 '아니알라 사건'으로 불리는 이 밀의는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핀란드에서의 스웨덴 군사 행동은 부진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덴마크가 스웨덴에 선전 포고를 하며 전쟁에 참전했다. 궁지에 몰린 구스타프 3세는 방어 전쟁으로 전환하여 지원병을 모집해 덴마크에 대항했다. 동시에 물밑 외교를 통해 영국프로이센이 덴마크에 압력을 가하도록 하여, 결국 덴마크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구스타프 3세는 육전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해전에서의 승리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침공까지 고려했지만, 러시아의 국력을 감안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를 위해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 유럽 열강들과 외교 교섭을 벌였다.

3. 3. 해전 중심의 전개 (1789년-1790년)

러시아 함선이 해안 항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웨덴은 1788년에서 178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항고와 그 주변 섬에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추가 요새는 코르포 근처의 항고 서쪽에 건설되었으나, 포르칼라 곶은 요새 없이 방치되었다. 핀란드에 주둔한 스웨덴 육군의 주력 부대는 요한 아우구스트 메이예르펠트 더 영거 장군 휘하의 13,000명 병력이 키미 강에 배치되었고, 추가로 5,000명의 병력이 사볼락스에 배치되었다. 병사들은 여전히 물자가 부족했지만, 1788년에 비해 규율과 사기가 크게 향상되었다. 해군 전선에서는 스웨덴의 운이 좋지 않았다. 칼스크로나에 주둔한 원해 함대의 선원들은 열병으로 고통을 겪었고, 이로 인해 함선 장비와 인력 배치가 매우 어려워졌으며, 7월 6일이 되어서야 소데르만란드 공작 카를이 지휘하고 경험 많은 해군 장교 오토 헨리크 노르덴셸드 제독이 기함 함장으로 참여한 함대가 출항할 수 있었다.

1789년 6월 1일, 러시아 22문 커터 ''메르쿠리''가 스웨덴 44문 프리깃 ''베누스''를 나포하는 모습. (알렉세이 보골류보프)


1789년 7월, 욀란에서 벌어진 스웨덴과 러시아 해군 간의 전투


스웨덴의 어려움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 원해 함대는 이미 5월 중순에 출항했다. 5월 22일까지 몇 척의 함선이 항고에서 스웨덴 방어 시설을 정찰했지만, 짧은 교전 후 러시아 함선은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바실리 치차고프 제독 휘하의 러시아 함대 주력 부대는 7월 26일에 스웨덴 함대와 만나 욀란 해전으로 알려진 전투를 벌였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전투는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스웨덴은 칼스크로나로 향했고 러시아 함대는 덴마크 해역에서 온 러시아 분대와 합류했다. 격렬한 유행병으로 인해 스웨덴 함대는 그해 대부분을 칼스크로나에 묶여 있었다.

스웨덴 연안 함대는 겨울 동안 스웨덴으로 항해할 수 없었고 핀란드에서 장비를 갖춰야 했다. 이 문제 외에도 연안 함대 사령관 앙카르스베르드 대령이 안잘라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칼 아우구스트 에렌스바르드 제독으로 교체되었다. 스웨덴 연안 함대는 5월 말에 스베아보르에서 출항하여 프레데릭스함 근처로 이동했다. 그러나 항고가 요새화된 후, 러시아군은 6월 10일에 포르칼라에서 연안 항로를 봉쇄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는 스웨덴 연안 함대를 효과적으로 분열시켰으며, 스웨덴에서 온 증원군이 주력 부대에 합류할 수 없어 러시아 연안 함대에 비해 심각한 불리함을 겪게 했다.

1789년 6월 중순, 러시아군은 세 방향에서 사볼락스를 공격했으며, 총 병력은 약 10,000명 대 스웨덴 수비병 4,000명이었다. 포라스알미 전투에서 분명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중요한 푸우말라 해협을 러시아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구스타브 3세 국왕은 스웨덴 육군의 주력 부대를 장악하고 6월 25일에 빌만스트란드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스웨덴은 6월 28일 우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빌만스트란드 대신 국왕은 프레데릭스함으로 향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스웨덴의 공세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프레데릭스함 외곽의 러시아 방어 시설을 제거하는 데 7월 18일까지 걸렸고, 이 기간 동안 러시아군은 사볼락스에서 남쪽으로 병력을 계속 이동시켰다. 러시아군을 막기 위해 파견된 소규모 부대(약 2,000명)는 카이피아이넨에서 패배했고, 스웨덴군은 다시 국경으로 후퇴해야 했다. 러시아군이 사볼락스에서 철수하면서 쿠르트 폰 슈테딩크 대령 휘하의 이 지역 스웨덴 부대가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의 부대는 니슬로트로 진격하여 파르쿠인매키 언덕과 나중에 라이타츠실타에서 러시아군과 여러 차례 교전에서 승리했다. 부대가 겨울 주둔지로 이동했을 때, 봄에 비해 거의 변한 것이 없었고, 사볼락스 여단은 잃었던 땅을 탈환했으며, 푸우말라만이 러시아의 통제를 받았다.

칼 하인리히 폰 나사우-지겐 휘하의 러시아 연안 함대는 8월 15일에 프레데릭스함 근처 지역을 정찰하고 있던 스웨덴 분대를 몰아냄으로써 스웨덴 연안 함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스벤스순 해전으로 이어진 스웨덴 연안 함대의 주요 거점인 스벤스순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러시아군은 연안 함대와 육군의 협력 공세를 통해 스웨덴에 대한 승리를 활용하려 했으며, 남은 스웨덴군을 키메네 강 너머로 몰아낼 수 있었다. 손상된 스웨덴 연안 함대는 곧 스베아보르에서 함선으로 증강되었고, 사령관 칼 아우구스트 에렌스바르드 제독은 먼저 수리를 감독한 칼 나타나엘 아프 클레르케르 대령으로, 나중에는 게오르그 크리스티안 데 프레세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러시아 봉쇄는 스웨덴에게 상당한 문제를 야기했다. 7월 초부터 스웨덴 포격정은 살로몬 폰 라얄린 제독의 지휘 아래 매일 더 강력한 러시아군과 교전했으며, 그는 포르칼라 지역에서 스웨덴 연안 함대를 총괄 지휘했다. 폰 라얄린의 부대는 러시아 봉쇄를 제압할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신 바뢰순 해협을 통과하는 스웨덴 수송선을 호위했다. 스웨덴군은 여름 동안 반복적으로 증강되었고, 7월 중순에는 이미 프리깃 2척, 갤리선 10척, 포격정 여러 척으로 구성되었다. 이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포대가 건설되었다. 포르칼라 곶 근처 해상에서의 전투는 9월까지 계속되었다. 1789년 8월 24일 이후 포르칼라의 러시아 봉쇄는 제임스 트레베넨 선장의 지휘를 받았으며, 그는 바뢰순에 대한 스웨덴의 장악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바뢰순에 대한 러시아 공격은 9월 18일에 시작되었다. 공격 부대는 전열함 4척, 프리깃 1척, 커터 6척으로 구성되었다. 전투는 두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스웨덴은 갤리선 1척을 잃었고, 러시아는 전열함 1척(''세베르니 오룔'')과 여러 척의 피해를 입었지만, 바뢰순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러시아에게 넘겨주었다. 포르칼라 근처 군도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고, 9월 23일 러시아군은 스웨덴으로부터 엘그숀 섬을 점령했지만, 9월 30일 구스타프 마우리츠 아르펠트 대령 휘하의 스웨덴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잃었다. 러시아 함대는 10월 23일에 갑자기 이 지역을 떠났는데, 이는 스웨덴 원해 함대가 출항했다는 소식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10월 13일에 일어났고, 10월 22일에 칼스크로나로 돌아왔다. 러시아의 철수는 스웨덴 수송선에 안전한 해안 항로를 열어주었다.

1790년의 발케알라 전투


1790년, 국왕 구스타브 3세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이번에는 비보르크 근처에 상륙하려는 계획을 부활시켰다. 또한, 가능한 한 빨리 항해할 수 있도록 함대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결정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특히 연안 함대는 새로운 강력한 함선으로 보강되었으며, 일부는 다양한 스웨덴 마을에서 기증받았다. 첫 번째 작전은 1790년 3월 17일에 일어났으며, 두 척의 스웨덴 프리깃함이 러시아가 통제하는 로게르스비크(발티스키 항) 항구를 약탈했다. 스톡홀름에서 출발한 스웨덴 함대는 4월 21일에 스베아보르크를 향해 출발했고, 폼메른에서는 5월 3일에 출발했다. 스웨덴의 주요 노력이 해상에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상에서도 공격을 가해, 구스타프 모리츠 아르펠트 대령이 이끄는 스웨덴군은 4월 15일 남부 사볼락스에서 러시아 수비군을 격파했고, 구스타브 3세 국왕과 구스타프 바흐트마이스터 대령이 이끄는 군대는 발케알라 전투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 5월 5일, 킴메네강 근처에서 러시아의 공격이 성공하여 안얄라를 점령했지만, 그 달 말 전에 격퇴되었다. 그러나 육상 전투는 교착 상태에 이르렀고, 이미 6월에는 정체된 전쟁으로 변했다.

칼 13세 공작 휘하의 스웨덴 원양 함대는 5월 10일 행괴에 도착하여 5월 12일 레발 근처로 이동했다. 함대의 일부 함선이 주력 부대에서 분리된 상태였기에, 칼 공작은 유리한 바람이 여전히 존재했던 5월 12일에 공격을 감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5월 13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여, 레발 전투에서 스웨덴의 실패를 초래했다. 스웨덴 함대는 5월 말까지 레발 근처에 머물다가 연안 함대의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출항했고, 이는 크론슈타트 전투라는 또 다른 해전을 초래했다. 러시아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입히거나 러시아 함대의 분리를 막는 데 실패한 원양 함대는 비보르크만으로 항해했다.

연안 함대는 5월 8일, 국왕 구스타브 3세의 지휘 하에 데 프레세를 기함으로 하여, 스웨덴이나 폼메른에서 온 연안 함대 함대를 기다리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다. 스웨덴 연안 함대는 5월 15일 프레데릭스함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프레데릭스함 전투에서 수비군에게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스웨덴군은 도시를 봉쇄하는 대신 해안을 따라 러시아 보급품을 약탈하면서 비보르크를 향해 계속 나아가 6월 2일에 베료조비예 제도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크론슈타트 전투에서 원양 함대를 지원하려 했다.

1790년의 비보르크만 해전


바실리 치차고프 제독의 지휘 하에 있는 러시아 함대는 30,000명의 병력으로 스웨덴 함대를 비보르크만에서 봉쇄했다. 봉쇄는 한 달 동안 계속되었고, 6월 21~23일에는 보급품이 떨어지면서 스웨덴군은 유리한 바람이 불자마자 탈출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카를 올로프 크론슈테트 중령 휘하의 스웨덴 연안 함대는 6월 19일 스벤스크순에 도착하여, 미예르펠트 장군의 지상군을 지원하여 인근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크론슈테트의 함대는 현대 비롤라흐티 근처의 연안 해로를 막고 있던 로완 크라운(본래 로버트 크로닌) 선장의 러시아 프리깃함 분견대를 통과하지 못하고 스벤스크순으로 돌아가야 했다. 스웨덴의 비보르크만 탈출은 7월 3일에 시작되었고, 위험한 해역에서 시야가 좋지 않아 여러 척의 배가 좌초되어 손실되었다. 스웨덴 전함대는 수리를 위해 스베아보르크로 후퇴했고, 스웨덴 연안 함대는 스벤스크순에서 강력한 방어 태세를 취했다. 카를 하인리히 폰 나사우-지겐이 이끄는 러시아 연안 함대는 1790년 7월 9일, 두 번째 스벤스크순 해전으로 알려진 전투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공격을 시작하여 결정적인 스웨덴의 승리로 끝났다. 이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는 약 150척의 군함 중 50척이 격침되거나 파괴되었고 사망자는 약 9,000명에 달했다. 반면 스웨덴 측의 손실은 격침 6척, 전사자는 불과 300명 정도였다. 이 해전의 승리에는 영국 해군에서 파견된 시드니 스미스 등 영국 해군 군인의 역할도 컸다.

최근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구스타브 3세 국왕은 전쟁을 성공적으로 계속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그의 정부는 또한 전쟁 비용으로 인해 점점 더 늘어나는 부채로 인해 빠르게 고통받고 있었다. 한편, 예카테리나 2세 여제는 스웨덴군이 쉽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전쟁에서 평화를 갈망했다. 러시아 부총리 알렉산드르 베즈보로드코는 즉시 협상에 동의했고, 8월 14일 베르얄라 조약으로 전쟁이 종식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이 전쟁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에게 명성을 안겨주었고, 러시아예카테리나 2세는 스웨덴을 북방의 강국으로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14] 전쟁의 불리함을 느낀 러시아는 평화 협상을 추진했고, 영국프로이센의 중재 아래 1790년 8월 핀란드 바랄라에서 바랄라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영토 변화는 없었으나, 스웨덴은 구스타프 3세의 절대 왕정 강화를 용인받고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중단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얻었다.

형식상 무승부였지만, 스웨덴은 영국, 프로이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실질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을 마쳤으며, 국제적 영향력을 재확인했다. 전쟁 이후 러시아는 스웨덴 내정 간섭을 중단했고, 양국 관계는 개선되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군주정 유지를 위해 양국은 기존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반혁명 연대(반혁명 십자군)에 협력하며 1791년 10월 군사 동맹까지 체결하는 등 관계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전반적으로 이 전쟁은 양측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러시아에게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중에 발생한 방해 요소였고, 스웨덴의 공격으로 지중해 해군 파견 계획이 무산되었다.[14] 구스타프 3세에게는 일시적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 그는 1792년 암살되었다.

4. 1. 바랄라 조약

스벤스크순드 해전에서의 승리는 구스타프 3세의 명성을 높였고, 러시아예카테리나 2세에게 스웨덴이 북방의 강국임을 다시 한번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불리함을 깨달은 예카테리나 2세는 다른 강대국들과의 교섭을 통해 평화 협상을 추진했다.

영국프로이센이 중재에 나서면서, 1790년 8월 핀란드 바랄라(Värälä)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바랄라 조약). 이 조약은 양국 간 영토 변경 없이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러시아 측은 국가의 위상에 큰 손상을 입지 않았으나, 스웨덴 측은 구스타프 3세의 절대 왕정 강화를 인정받고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중단시키는 중요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형식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 스웨덴은 전쟁 기간 동안 영국, 프로이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은 셈이었다. 이 전쟁과 조약은 스웨덴의 국제적 영향력을 재확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는 스웨덴에 대한 내정 간섭을 중단했고, 양국 관계는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때마침 프랑스에서 발발한 프랑스 혁명은 군주정을 유지하던 스웨덴과 러시아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만드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구스타프 3세는 러시아에 대한 기존의 적대 정책을 중단하고,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반혁명 연대에 러시아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반혁명 십자군). 이러한 변화 속에서 1791년 10월, 스톡홀름 교외드로트닝홀름 궁전에서 스웨덴과 러시아는 군사 동맹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스웨덴이 외교적 성공을 통해 중흥의 기반을 마련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4. 2. 장기적 영향

1788년부터 1790년까지 이어진 러시아-스웨덴 전쟁은 전체적으로 관련 당사자들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러시아예카테리나 2세는 이 전쟁을 상당한 방해 요소로 여겼는데, 당시 러시아 육군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묶여 있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5월 3일 헌법, 1791년)과 프랑스 왕국(프랑스 혁명)에서 일어나는 혁명적 사건들에 대한 우려도 컸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공격으로 러시아 해군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방어에 집중해야 했고, 이는 오스만 제국과 싸우는 자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지중해로 해군을 파견하려던 계획을 좌절시켰다.[14]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에게 이 전쟁은 일시적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그는 1792년 스톡홀름의 오페라에서 암살당했다.

전쟁의 결과,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는 명성을 얻었고, 예카테리나 2세는 스웨덴을 북방의 강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전쟁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예카테리나 2세는 열강의 중재를 요청하여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영국프로이센이 중재에 나서 1790년 8월, 핀란드의 뱌롸랠래에서 바랄라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양국 모두 영토 변화 없이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국가적 위상에 손상을 입지 않았고, 스웨덴은 구스타프 3세의 절대 왕정이 용인되었으며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이 중단되었다.

핀란드 우티에 세워진 우티스말름 전투 기념비 (1931)


그러나 스웨덴은 영국, 프로이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 전쟁은 스웨덴의 국제적 영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스웨덴에 대한 내정 간섭을 중단했고, 양국 관계는 개선되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발발은 두 나라의 관계를 급속히 호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구스타프 3세는 러시아에 대한 적대 정책을 중단하고, 반혁명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반혁명 십자군). 이듬해인 1791년 10월, 스웨덴은 스톡홀름 교외드로트닝홀름 궁전에서 러시아와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공은 스웨덴의 중흥을 이룩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5. 더 읽어보기


  • 다케다 타츠오 『이야기 스웨덴사』 신평론, 2003년, ISBN 978-4-7948-0612-3
  • 다케다 타츠오 『이야기 북유럽의 역사』 주오코론 신서, 1993년, ISBN 978-4-12-101131-2
  • 다케다 타츠오 『북유럽의 외교』 도카이 대학 출판회, 1998년, ISBN 978-4-486-01433-1
  • 모모세 히로시, 쿠마노 사토시, 무라이 마코토 『북유럽사 (세계 각국사)』 야마카와 출판사, 1998년, ISBN 978-4-634-41510-2

참조

[1] 서적 Gustav III:s ryska krig : När tidens brev och dagböcker berättar https://www.bokus.co[...] 2015
[2] 서적 Enlightening Europe on Islam and the Ottomans: Mouradgea d'Ohsson and His Masterpiece https://books.google[...] BRILL 2019-02-04
[3] 서적 1001 Battles That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 https://books.google[...] Book Sales 2017-10-24
[4] 웹사이트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1844
[5] 웹사이트 Gustav III https://sok.riksarki[...]
[6] 논문 Beginners and Winners: The Fate of Initiators of Interstate Wars Involving Great Powers Since 1495 https://doi.org/10.2[...] 1994
[7] 웹사이트 Russian Expansion in the Baltic in the 18th Century https://www.ejournal[...] 2023-12-25
[8] 간행물 "Cousins at War - Nothing Changed? An Offensive of Gustav III against Catherine II, 1788 - 1790." 2014
[9] 간행물 Catherine the Great's Woeful knight: a slanted parody 2001
[10] 웹사이트 Swedish Military - Hans Högman https://www.hhogman.[...]
[11] 웹사이트 The Swedish–Russian War of 1788–1790 http://www.zum.de/wh[...] Zentrale für Unterrichtsmedien im Internet e.V. 2011-11-18
[12] 웹사이트 Statistics of Wars, Oppressions and Atrocities of the Eighteenth Century (the 1700s) http://necrometrics.[...] 2021-09-10
[13] 서적 War and Peace in the Baltic, 1560–1790 Routledge 1992
[14] 서적 War in the Early Modern World, 1450–1815 UCL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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