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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굉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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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굉은 당나라 말기 선흡도 관찰사로, 주온과 친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887년 진언 휘하에서 지주자사로 있다가 선흡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선성군을 통치했다. 양행밀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선주가 포위되자 도주하려다 사로잡혔고, 주온의 요구로 인해 참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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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굉 (당나라)
인물 정보
이름조굉
한자 표기趙弘
생몰년도미상 ~ 184년
시대후한
출신지미상
사망 장소미상
직업황건적의 장수
활동 시기황건적의 난
상관장각
동료장보
장량
상세 정보
주요 활동황건적의 난 가담
최후황보숭에게 패배 및 전사

2. 생애

조굉의 초기 생애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젊은 시절 훗날 후량을 건국하는 주전충과 교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887년 지주 자사로 있던 조굉은 선흡도 관찰사 진언회남도를 차지하기 위해 양주로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선흡도 관찰사 대행으로 임명되어 선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진언이 곧 양행밀 등에게 패하고 손유에게 살해당하면서 조굉은 정치적 후원자를 잃고 고립되었다. 그는 혼란한 시기를 틈타 잔인하고 포악한 통치를 하여 부하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888년, 여주 자사였던 양행밀은 모사 원습(袁襲)의 건의에 따라 조굉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양행밀은 손단(孫端)과 장웅을 부추겨 먼저 조굉을 공격하게 한 뒤, 이 틈을 타 선주를 포위하였다. 조굉의 형 조건지(趙乾之)가 구원에 나섰으나 양행밀의 부장 도아(陶雅)에게 격퇴당했다.

889년 6월, 10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선주성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고 결국 함락되었다. 조굉은 부하 장수 주진사(周進思)에게 쫓겨나 손유에게 달아나려 했으나, 양행밀의 부장 전군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던 선무군 절도사 주전충이 조굉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자, 양행밀은 원습의 조언을 받아들여 조굉을 참수하였다.

2. 1. 가세(家世)

조굉의 가세(家世)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당나라정사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도 그의 열전이 없다. 다만 알려진 것은 그가 젊은 시절에 훗날 대군벌이 되는 주온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2. 2. 진언(陳?)의 휘하에서

광계 3년(887년) 5월, 조굉은 당시 관할 아래의 지주 자사였다. 같은 해, 절도사 고병이 다스리던 회남도에서는 고병이 총애하던 도사 여용지와 고병의 장수인 좌상도지병마사(左廂都知兵馬使) 필사탁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필사탁은 회남도군부양주 광릉포위했지만,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자 관찰사 진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승리하면 회남절도사의 직책과 권한을 진언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진언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필사탁은 이미 양주를 함락시켰다. 그럼에도 필사탁은 약속대로 절도사의 권한과 직책을 진언에게 넘겨주었다. 진언은 회남절도사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광릉으로 떠나면서, 지주자사였던 조굉을 선흡도관찰사로 임명하여 선흡도의 군부인 선주를 그에게 맡기고 자신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2. 3. 선성군(宣城郡) 선흡도(宣歙道)를 통치하다

진언광릉으로 떠나면서 조굉에게 선주(宣州)를 맡겼고, 이로써 조굉은 선성군을 중심으로 한 선흡도(宣歙道)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기반이 불안정했다. 887년 진언이 양행밀에게 패배하고 888년 손유에게 살해당하면서 조굉은 중요한 정치적 후원자를 잃고 고립되었다.

게다가 조굉은 선흡도를 다스린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혼란한 시기를 틈타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하여 부하 장수들과 병사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고립과 내부 불만은 훗날 양행밀이 선흡도를 공격하는 배경이 되었다.

2. 3. 1. 양행밀(楊行密)과의 전쟁

887년 직후, 진언과 필사탁은 여주자사 양행밀과 여용지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그들은 양주를 탈출하여 손유와 합세하였으나, 888년 손유에게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조굉은 북쪽의 동맹세력을 잃게 되었다.

문덕 원년(888년), 손유는 양행밀을 격파하여 양행밀은 다시 여주로 후퇴했다. 같은 해 8월, 손유가 여주를 공격할 것을 두려워한 양행밀은 처음에는 진남군(鎭南軍, 본부는 지금의 강서성 남창시) 절도사 종전을 공격하여 진남군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양행밀의 모사 원습(袁襲)은 조굉이 더 공략하기 쉬운 상대라고 설득했다. 원습은 그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 조굉은 선흡도를 통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난세를 틈타 잔인하고 포악하게 굴어 들이 진심으로 따르려고 들지 않고 있다.

# 진언은 광릉에 입성하러 갈 적에 조굉에게 선주를 맡기고 갔었다. 그런데 진언마저 죽은 지금, 조굉은 의지할 곳을 잃었다. 그가 선주를 지키고 있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 그의 사람 됨됨이도 양행밀의 적수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원습은 더 나아가 양행밀에게 화주자사 손단(孫端)과 상원(上元,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 강녕구)을 통치하던 장웅을 설득하여 조굉을 먼저 공격한 다음, 조굉이 손단과 장웅을 물리치는 데 전념하는 때를 틈타 진격하자고 제안하였고, 양행밀은 이에 동의하였다.

양행밀은 손단과 장웅을 설득하여 조굉을 공격하였고, 조굉은 처음에 그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 틈을 탄 양행밀은 장수 장훈(張訓)과 안인의(安仁義)를 파견하여 조굉의 장수 소당(蘇塘)과 칠랑(漆朗)이 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갈산(曷山, 지금의 안휘성 선성시 선주구 서남쪽에 있는 )에 주둔해 있던 것을 공격하여 그들을 대패시키고 선흡도의 군부선주로 진격하여 그곳을 포위하였다. 당시 지주자사였던 조굉의 형 조건지(趙乾之)가 지주에서 군대를 이끌고 조굉을 구원하러 선주로 오려고 하던 것을 양행밀의 부장 도아(陶雅)가 구화산에서 요격하여 무찌르니 조건지는 진남군으로 달아났고, 조굉은 고립무원이 되었다. 곡계(曲溪, 지금의 강소성 회안시 우이현 서남)의 장수 유금(劉金)은 양행밀군을 따라 능양(陵陽, 지금의 안휘성 지주시 청양현 능양진)에서 조굉을 공격하였다.

2. 3. 2. 패망

용기 원년(889년) 6월, 선주 을 포위한 지 10개월째에 접어든 양행밀군은 식량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무주 자사 위전풍이 군량과 급료를 지원해주면서 버틸 수 있었다. 이 무렵 선주성 안에서는 식량이 완전히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참혹한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조굉의 심복 장수들 대부분이 성을 나와 양행밀에게 투항하였다. 조굉이 신임했던 이간 역시 수문장을 속이고 양행밀에게 달아났다.

한편, 양행밀의 부하 유금은 조굉이 도망칠 것을 예상하고 계략을 꾸몄다. 그는 조굉에게 "장군께서 나오신다면, 저의 군영을 오고 가실 수 있습니다."라고 속여 말했다. 기뻐한 조굉은 유금에게 많은 을 주고 밤중에 그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여 딸과의 혼인을 허락했다. 그러나 군영으로 돌아온 유금은 조굉의 군사가 많아 성을 나간 뒤 제압하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다음날 성 앞에서 "유랑(劉郞, 유금)은 너와 사위가 될 수 없다!"고 외치게 했다. 이 말을 들은 조굉은 크게 낙담하였다.

그날 밤, 조굉의 장수인 지휘사(持揮使) 주진사(周進思)가 성을 점거하고 조굉을 내쫓았다. 조굉은 손유에게 합류하기 위해 광릉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는 배를 타고 동쪽 계곡으로 나와 폭포를 타고 도망쳤는데, 양행밀군이 보병기병 위주라 물살 때문에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영양(永陽, 지금의 안휘성 선성시 선주구 수양진(水陽鎭))에 머물러 갑옷을 벗고 계곡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조굉의 도주를 예상하고 미리 대비하고 있던 양행밀의 대장 전군이 가볍고 빠른 작은 배를 이용해 조굉을 따라잡았고, 놀란 조굉은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전군에게 사로잡혀 양행밀에게 넘겨졌다.

조굉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무주 자사 위전풍은 양행밀과 우호 관계를 맺고 여러 차례 군량, 급료, 무기 등을 지원했다. 양행밀의 처남 주연수도 많은 공을 세웠으며, 금우진장(金牛鎭將) 대몽(臺濛), 마군부지휘사(馬軍副指揮使) 이우(李遇), 유존(劉存), 장숭(張崇), 왕관(王綰), 오장(伍長) 서온 등도 각각 공을 세웠다. 특히 서온은 양행밀이 선주성에 입성했을 때 다른 장수들이 과 비단을 약탈하는 동안 혼자 식량창고를 확보하고 을 끓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했다. 훗날 위전풍은 양융연에게 사로잡혔으나, 과거 양행밀을 도왔던 일 덕분에 석방되었다.

조굉의 측근들은 모두 흩어졌지만, 급사(給使) 이덕성과 한구(韓球)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조굉은 이덕성을 보내 주진사를 설득하려 했으나, 이덕성이 갑자기 병에 걸려 가지 못했다. 대신 한구를 보냈지만, 한구는 주진사에게 참수당하고 머리가 성 밖으로 던져졌다. 그날 이덕성의 병은 바로 나았다. 이후 성 안의 다른 장수들이 주진사를 체포하여 양행밀에게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조굉의 장수 중 가장 용맹하다고 알려진 주본은 조굉이 패망하자 양행밀에게 사로잡혔다가 석방되어 그의 휘하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한편, 조굉을 사로잡은 양행밀은 그를 자신의 동생과 함께 살게 하였다. 이때 당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 중 한 명이었던 선무군 절도사 주전충이 사자를 보내 조굉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양행밀이 원습과 상의하자, 원습은 조굉을 참수하고 그의 머리를 주전충이 있는 변주로 보내자고 제안했다. 양행밀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조굉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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