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1905년 출판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저서로, 19세기 말 조선의 사회, 문화, 경제, 정치 등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비숍은 서구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조선을 바라보며, 제국주의를 미화하고, 조선인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양반과 관료의 부패, 여성의 낮은 지위에 대한 비판적인 묘사가 특징적이다. 이 책은 당시 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으로, 현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97년 책 - 자살론
    《자살론》은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요인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여 이기적, 이타적, 아노미적, 숙명적 자살 등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사회학 고전이다.
  • 기행문 - 대당서역기
    대당서역기는 당나라 승려 현장이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와 기록한 기행문으로, 중앙아시아와 인도 아대륙의 여러 국가들의 지리, 문화, 종교, 풍습 등을 기록하여 역사학, 고고학, 불교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서유기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 기행문 - 슬픈 열대
    《슬픈 열대》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 원주민 부족과의 경험을 통해 문명과 미개의 이분법적 구분을 비판하고 서구 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과 인류학적 통찰을 제시하는 책이다.
  • 영국의 책 - 국부론
    애덤 스미스가 1776년에 출판한 국부론은 고전 경제학의 시초로 여겨지며 분업,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자본 축적, 중상주의 비판, 보이지 않는 손 등의 개념을 제시하며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영국의 책 -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아이작 뉴턴이 1687년에 출판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고전 역학의 기초를 세우고 만유인력의 법칙과 운동 법칙을 제시하여 케플러 법칙을 유도했으며, 다양한 물리 현상을 수학적으로 설명하고 태양중심설을 옹호하는 근거를 제시한 과학 혁명의 중요한 저서이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 [서적]에 관한 문서
서지 정보
제목조선기행
원제Korea and Her Neighbours
저자이사벨라 버드
번역가박상득
시강경자
공등중웅
삽화가(정보 없음)
국가영국
언어영어
장르기행문
출판년도1898년 (영국), 1905년 (영국), 1925년 (일본, 초역), 1993년 (일본), 1994년 (일본), 1998년 (일본), 2008년 (일본), 2009년 (일본)
출판사1925년 (초역), 1993년, 1994년, 1998년, 2008년, 2009년 (일본)
ISBNISBN 4-582-80572-8
ISBN 4-582-80573-6
ISBN 4-8099-0724-4
ISBN 4-06-159340-4
ISBN 978-4-8447-0011-1
ISBN 978-4-256-80572-5
ISBN 978-4-256-80573-2
웹사이트(정보 없음)
기타

국가인권위원회(http://library.humanrights.go.kr/global/docs/s_detail.html?mastid=10137&p_hanja_display=0)

2. 이사벨라 버드 비숍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이다. 그녀는 조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2. 1. 출판 및 번역

1905년 영국 출판 시장의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영국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활동하던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영국인 독자들에게 조선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미지의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서문에서 유럽인들이 조선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살림출판사에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출판되었다. 당시 번역자는 소설 《영원한 제국》의 작가인 이인화이다. 이 책의 내용 중 일부는 현재 대한민국 고등학교 1학년 국어(하) 교과서에 “외국인의 눈에 비친 19세기 말의 한국”이라는 지문으로 쓰이고 있다. 김수영 시인도 자신의 에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을 인용하였다.

한국어 번역은 1993년 (헤이세이 5년) - 1994년 (헤이세이 6년)에, 박상득 번역으로 헤이본샤 동양문고 전 2권으로 출판되었다. 1995년 (헤이세이 7년)에는 도키오카 케이코 번역으로 도서출판사에서, 문고 신판은 1998년 (헤이세이 10년)에 고단샤 학술문고에서 출판되었다. 또한, 전전(戰前)인 1925년에 초역본이 『[https://dl.ndl.go.jp/info:ndljp/pid/983107 30년 전의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복각판도 있다.

3. 19세기 말 조선의 모습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저서에서 19세기 말 조선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녀는 부산의 거리가 좁고 불결하며, 집들은 흙으로 지은 초가집 형태라고 묘사했다. 서울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여, 좁은 길과 오물로 인한 악취,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도로와 수로 등을 지적했다.[2][3][4]

비숍은 조선의 황폐한 산, 멸시받는 수공업, 미술 공예의 부재 등을 언급하며 국토의 불행한 미래를 예견했다. 또한, 1660년부터 1864년 사이에 역병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으며, 서울에는 예술품, 고대 유적, 공원, 극장, 도서관 등이 거의 없다고 기록했다.[3][5] 화폐와 통화 유통에 있어서는 은행이 없었고, 일본 엔화가 서울과 조약항에서 통용되었다.[8]

비숍은 국왕이 사실상 조선 정부 그 자체이며, 헌법이나 의회가 존재하지 않아 국왕의 칙령 외에는 법률이 없다고 지적했다.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개혁과 국왕 권한에 대한 헌법적 억제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10]

프리모르스키 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러시아의 영향으로 근대화된 환경에서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을 보고, 비숍은 조선인들이 "쓰레기 같은 민족"이 아니라, 진정한 행정과 수입 보호가 있다면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9]

그러나 1897년부터 이채연 시장(漢城府判尹)이 시내 환경 개선 사업을 실시하면서 서울의 모습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버드는 "불결함으로 비할 데 없는 서울은 이제 극동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로 변하려 하고 있다!"라고 기록하며, 서울의 거리 환경이 눈에 띄게 개선되었음을 강조했다.

3. 1. 사회와 문화

19세기 조선의 사회는 무속, 불교 등 전통 종교와 성공회, 천주교, 개신교 등 새로운 종교가 공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버드는 조선의 불교가 일본 불교와 달리 숭고한 목적이나 향상심이 부족하고, 승려들은 무지하고 미신에 젖어 있다고 평가했다.[14]

조선 사회는 '훔치는 측'과 '훔쳐지는 측'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양반 출신 관료들은 백성을 착취하는 '흡혈귀'와 같았다.[15] 이들은 개혁에 반대하며 부패를 일삼았고, 직위와 상벌은 매매되었다.[16] 버드는 양반을 조선의 재앙으로 꼽았는데, 이들은 무능하고 하인들을 시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았다.[17] 술에 취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문화도 있었다.[18]

조선인들은 남의 호의를 악용하고 기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수입이 있는 사람은 친족, 친구, 심지어 친구의 친족까지 부양해야 했다.[21] 한글은 경시되었고, 한문만이 지식인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버드는 조선인들이 외국어 습득 능력은 뛰어나지만, 의심, 교활함, 부정직함이 있고 신뢰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조선의 교육 제도가 협량함, 매너리즘, 만심, 자기중심적 개인주의 등을 낳았다고 비판했다.[22]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낮았다. 7세 이후에는 집안에 갇혀 살아야 했고, 결혼 전에는 아버지와 형제 외의 남성과는 만날 수 없었다. 결혼 후에도 남편에게 종속되어 '○○의 부인' 등으로 불렸으며, 침묵이 강요되었다.[23] 기생을 제외한 여성에게는 교육 기회가 거의 없었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여성은 1000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24] 명예 살인이 존재했고, 다른 남자와 손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23]

한편, 버드는 명성황후를 "교양과 학식이 있고 영리"하다고 묘사했으며,[26] 고종 황제는 친절하고 "인자한 성품"을 가졌다고 평가했다.[27]

3. 2. 경제와 생활상

이사벨라 비숍은 저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에서 당시 민중들의 삶이 극심한 수탈로 피폐해졌다고 평가했다. 관리들에 대해서는 "흡혈귀"라고 비판했는데, 이는 당시 민씨 일파가 관직을 독점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백성을 수탈했기 때문이다.[3] 비숍은 러시아로 이민 간 조선인 1세대가 착취 없는 환경에서 부지런히 살며 기독교(러시아 정교회)로 종교를 바꾸고 러시아 관리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모습을 통해, 부패한 조선 사회가 발전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비숍은 서울, 조약항, 간선도로 주변의 황폐한 산, 멸시받는 수공업, 미술 공예의 부재, 그리고 국토의 불행한 미래를 언급했다. 1894년 방문 당시 서울의 길은 매우 좁고 불결했으며, 집에서 나온 오물로 악취가 심했다고 기록했다.[3] 인공적인 길이나 다리도 적고, 여름에는 흙먼지, 겨울에는 진흙탕이었다고 한다.[4] 1660년~1864년 사이에는 역병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한 번에 10만 명 이상 사망한 경우도 6번이나 있었다고 한다.[5]

화폐·통화 유통과 관련해서는 은행이 없었고, 일본 엔화가 서울과 조약항에서 통용되었다고 기록했다.[8]

프리모르스키 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러시아의 영향으로 근대화된 환경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 비숍은 이를 통해 조선인들이 "쓰레기 같은 민족"이 아니라, 진정한 행정과 수입 보호가 있다면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고 밝혔다.[9]

비숍은 조선의 문제점으로 양반을 지적했다. 양반은 공인된 흡혈귀였으며, 대다수의 비귀족은 "아랫사람"으로서 흡혈귀에게 피를 제공하는 존재였다.[15] 조선의 관료들은 일본의 발전에 관심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혁에 반대했는데, 이는 착취와 부정 이득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16]

조선에서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18]

조선인들은 남의 호의를 악용하는 체질이 있었고, 기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비난하는 여론도 없었다.[21] 어느 정도 수입이 있는 사람은 친족, 친구, 심지어 친족의 친구까지 부양해야 했고, 사람들은 이득이 많은 관직에 오르려고 했으며, 직위는 매매되었다.[21]

3. 3. 도시와 환경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외국인 거류지 주변 고지대에 삼나무 숲을 조성하였고, 부산 구시가지 역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다.[1] 그러나 버드는 부산의 거리가 좁고 지저분하며, 건물들은 흙으로 지어져 창문이 없고 초가지붕을 얹은 판잣집 형태라고 묘사했다. 또한, 집집마다 불규칙한 도랑에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나는 등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조선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고 한다.[2]

버드는 서울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고 평가했다. 1894년 당시 서울의 길은 매우 좁고 미로 같았으며, 집에서 나온 오물로 인해 악취가 심했다. 그녀는 베이징을 보기 전까지 서울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거리"라고 표현할 정도였다.[3] 또한, 제대로 된 길이나 다리가 부족했고, 그나마 있는 길도 여름에는 흙먼지가, 겨울에는 진흙탕이 되는 등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시냇물인지 하수구인지 모를 수로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쌓여 악취를 풍겼다.[4]

1660년부터 1864년 사이에는 역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한 번에 1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경우도 6번이나 있었다.[5] 버드는 서울에 예술품, 고대 유적, 공원, 극장, 도서관 등이 거의 없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사찰도 없었고, 미신 때문에 묘지도 없었다. 공자묘와 비석을 제외하면 공인된 사찰이 하나도 없었으며, 승려가 성 안에 들어오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5]

그러나 1897년부터 이채연 시장(漢城府判尹)이 시내 환경 개선 사업을 실시하면서 서울의 모습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버드는 "불결함으로 비할 데 없는 서울은 이제 극동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로 변하려 하고 있다!"라고 기록하며, 서울의 거리 환경이 눈에 띄게 개선되었음을 강조했다.

3. 4. 정치와 외교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 나라》에서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언급하며, 김개남, 전봉준 등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과 전쟁으로 황폐해진 평양의 참상에 대해 기록했다. 또한 1895년 10월 을미사변에 대해서는 "야만적인 살해", "난폭한 암살", "악마적인 살해" 등으로 표현하며 일본을 강하게 비판했다. 비숍은 이 사건이 서울 주재 일본 공사관의 소행이라고 보았다.[3]

4. 비숍의 시각과 비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저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는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비숍의 관점은 서구 중심적 시각, 조선인에 대한 이중적 시각, 양반과 관료에 대한 비판,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 등 여러 측면에서 비판과 한계를 보인다.

4. 1. 서구 중심적 시각

일본조선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제국주의를 "개혁"이라고 미화하고, 불교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조선인들에 대해 종교 없이도 잘 살아온 민족이라고 평가하는 서구 기독교인으로서의 시각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14]

4. 2. 조선인에 대한 이중적 시각

일본조선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제국주의를 “개혁”이라고 미화한다든지, 불교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조선인들에 대해 종교 없이도 잘 살아온 민족이라고 평가하는 서구 기독교인으로서의 시각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러시아 국경 부근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에서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근대화가 진행되어 수로가 정비되고 위생에도 신경을 썼으며, 거기에 사는 조선인들의 가옥은 한반도의 것보다 훌륭했고, 그들은 대다수가 기근에서 도망쳐 온 굶주린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자벨 비숍은 "조선에 있을 때, 나는 조선인이라는 것은 쓰레기 같은 민족으로 그 상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했으나, 한반도에서의 조선인들과는 다른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조선인들을 보고 그 생각을 크게 수정해야만 했다고 밝혔다.[9] 조선의 모든 사람들은 가난이 자신의 최선의 방어 수단이며, 자신과 가족의 의식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것을 가지면 탐욕스럽고 부패한 관료에게 빼앗길 것을 알고 있다고 분석했다.[9]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조선인들의 풍요로움과 품행이 좋음을 보고 "조선 본국에서도 진지한 행정과 수입의 보호만 있다면, 사람들은 서서히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나에게 품게 한다"라고 하여 한반도가 타국의 통치를 받으면 반도의 사람들도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조선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9]

4. 3. 양반과 관료에 대한 비판

이사벨라 비숍은 저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에서 당시 조선양반과 관료 계층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녀는 양반을 "공인된 흡혈귀"로 묘사했는데, 이는 민씨 일파의 매관매직과 백성 수탈이 극심했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15] 또한, 관료들을 "훔치는 측"으로 규정하고, 대다수의 비귀족들을 "훔쳐지는 측"으로 나누어 조선의 신분제를 강하게 비판했다.[15]

비숍은 조선의 관료들이 일본의 발전에 관심을 가지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신의 착취와 부정 이득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개혁에 반대했다고 지적했다.[16] 그녀는 조선의 관료주의가 만연하고, 정부 기구 전체가 부패와 약탈의 기관으로 전락하여 근면의 싹을 잘라 버린다고 비판했다.[16]

또한, 비숍은 양반 계층의 무능함과 그들에 의한 폐해를 지적했다. 양반들은 자신의 담뱃대조차 가지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 주민들을 협박하여 재물을 빼앗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고 묘사했다.[17]

비숍은 조선인들이 남에게 기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수입이 있는 사람이 친족, 친구, 심지어 친구의 친족까지 부양해야 하는 사회 구조를 비판했다.[21] 이러한 사회 구조 때문에 사람들이 이득이 많은 관직에 오르려 하고, 직위가 상품처럼 매매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지적했다.[21]

4. 4.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 여성의 낮은 지위와 남존여비 사상을 비판했다. 조선 여성들은 교육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하고 가정 내에서 억압받는 존재로 여겨졌다.[23] 7세가 되면 남녀를 분리하여 여성은 집안에 갇혀 지냈고, 결혼 전에는 아버지와 형제, 결혼 후에는 친정과 시댁 친족 외의 남성과는 만날 수 없었다.[23] 혼기를 놓친 미혼 여성은 비구니 사찰로 쫓겨나기도 했다.[23]

여성은 출생 시 아들보다 낮은 지위를 가졌고, 선조의 제사를 지내는 남자 혈족 집단의 칭호인 '성'에도 포함되지 않았다.[23] 결혼한 여성은 며느리의 도움을 받기 전까지 혼자 집안일을 하며 몸치장할 여유조차 없었다.[23] 출산한 여성만이 가슴을 드러낸 저고리를 입을 수 있었고, 친정에서 받은 이름은 결혼 후 사용되지 않고 "○○의 부인"이나 "○○의 어머니"로 불렸다.[23] 남편은 아내를 '여보'(이쪽을 보라는 뜻)라고 불러 남존여비 사상을 드러냈다.[23] 침묵은 아내의 의무였으며, 결혼식 날 신부는 조각상처럼 말없이 있어야 했다.[23]

기생을 제외하면 여성 교육 기관은 없었으며, 상류층 여성은 글을 읽을 수 있었지만, 읽고 쓸 수 있는 여성은 1000명 중 한 명뿐이었다.[24] 대부분의 부인은 집 안에 갇혀 살았고, 자신이 사는 거리조차 본 적 없는 사람도 많았다.[24]

조선에는 명예 살인이 있어, 다른 남자와 손이 닿기만 해도 딸이나 아내가 살해당하거나 자해하는 경우도 있었다.[24]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사례를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5.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현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숍의 기록은 과거 극복과 발전, 사회 개혁, 역사 교육, 문화 다양성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5. 1. 과거 극복과 발전

이사벨라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민중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주 극심한 수탈로 인해 피폐해진 삶을 느끼게 해 준다고 일갈하였고, 위생 상태가 극심할 정도로 최악이라고 하거나 관리들에 대해서는 “흡혈귀”라고 할 정도로 비판적이었다.[1] (이사벨라 여사가 방문한 당시에는 민씨 일파의 관직 독점과 매관매직, 그리고 백성 수탈이 극심할 때였다.)[1] 작가는 기행문 속에서 서양의 신식 문물로 방을 장식하는 관리의 천박하리만치 사치스러움과 민중을 잔악하게 착취하는 극심한 탐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관료의 탐욕에 대해서는 러시아에 이민한 조선인 1세대가 착취가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부지런하게 사는 모습과 기독교(러시아 정교회)로 종교를 바꾸고 러시아 관리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발빠른 적응을 언급하면서,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비판했다.[1]

5. 2. 사회 개혁의 중요성

이사벨라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당시 조선 민중들의 삶이 극심한 수탈로 인해 피폐해졌다고 지적하고, 관리들을 "흡혈귀"라고 비판했다.[1] 비숍은 기행문에서 서양 신식 문물로 방을 장식하는 관리들의 사치스러움과 민중을 잔악하게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모습에 대해 언급했다. 특히, 러시아로 이민 간 조선인 1세대가 착취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부지런히 살아가고, 기독교(러시아 정교회)로 종교를 바꾸어 러시아 관리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모습을 통해, 조선 관리들의 탐욕이 나라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비판했다.[1]

5. 3. 역사 교육의 중요성

일본조선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제국주의를 “개혁”이라고 미화한다든지, 불교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조선인들에 대해 종교 없이도 잘 살아온 민족이라고 평가하는 서구 기독교인으로서의 시각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1]

한국의 역사교육에서도 갑오, 을미년의 조치를 개혁이라는 용어로 가르치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일본이 제국주의적인 목적이 있었어도 개혁이라는 워딩 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1]

5. 4. 문화적 다양성 존중

일본조선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제국주의를 “개혁”이라고 미화한다든지, 불교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조선인들에 대해 종교 없이도 잘 살아온 민족이라고 평가하는 서구 기독교인으로서의 시각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1]

참조

[1] 서적 バード、時岡 1998
[2] 서적 バード、時岡 1998
[3] 서적 バード、時岡 1998
[4] 서적 バード、時岡 1998
[5] 서적 バード、時岡 1998
[6] 서적 バード、時岡 1998
[7] 웹사이트 19世紀末〜日本植民地時代の長安寺について http://www.norihuto.[...] norihuto.com 2012-02-25
[8] 서적 バード、時岡 1998
[9]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0]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1]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2]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3]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4]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5]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6]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7]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8] 서적 バード、時岡 1998
[19] 서적 バード、時岡 1998
[20] 서적 バード、時岡 1998
[21] 서적 バード、時岡 1998
[22] 서적 バード、時岡 1998
[23] 서적 バード、時岡 1998
[24] 서적 バード、時岡 1998
[25] 웹인용 국가인권위원회 https://web.archive.[...] 2008-10-06
[26] 인용문
[27]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