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피 폰 데어 팔츠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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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피 폰 데어 팔츠 공녀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딸로, 1658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1701년 영국 왕위 계승법에 따라 잉글랜드 왕위 계승 후보가 되었으나, 1714년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조피의 아들 조지 1세가 앤 여왕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위를 계승하여 하노버 왕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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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 폰 데어 팔츠 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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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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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피 |
독일어 이름 | Sophie von der Pfalz |
다른 이름 | Sophie von Hannover |
출생 이름 | 조피 폰 데어 팔츠 공녀 |
출생일 | 1630년 10월 14일 |
출생지 | 네덜란드 공화국 덴하흐 |
사망일 | 1714년 6월 8일 |
사망지 | 하노버 선제후국 하노버 헤렌하우젠 정원 |
매장일 | 1714년 6월 9일 |
매장지 | 하노버 선제후국 하노버 라이네 궁전 (1957년 헤렌하우젠 궁전으로 이장) |
종교 | 칼뱅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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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658년 결혼, 1698년 사별) |
자녀 | 조지 1세 막시밀리안 빌헬름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자 조피 샤를로테 요크와 올버니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
가문 | |
가문 | 팔츠-짐메른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의 방계 가문) |
아버지 | 프리드리히 5세 |
어머니 | 엘리자베트 스튜어트 |
작위 | |
하노버 선제후비 | 1692년 12월 19일 – 1698년 1월 23일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부인 | 1679년 12월 18일 – 1698년 1월 23일 |
2. 생애
조피는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1658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하였고, 1698년 사별하였다. 그녀는 영국 왕위 계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부부에게 후사가 없었고, 뒤를 이은 앤 여왕의 자녀들도 모두 일찍 사망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톨릭 신자였던 앤 여왕의 이복 남동생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1701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계승 자격이 배제되었다. 이에 따라 개신교 신자 중 스튜어트 왕가와 가장 가까운 혈족이었던 조피가 왕위 계승 1순위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조피는 앤 여왕보다 몇 주 앞선 1714년 6월 8일에 사망하였고, 같은 해 8월 1일 앤 여왕도 사망하자 조피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그레이트브리튼의 국왕 조지 1세로 즉위하여 하노버 왕조를 열었다.
2. 1. 초기 생애


조피는 1630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사이에서 12번째[2] 자녀이자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보헤미아에서의 짧은 통치 기간 때문에 "보헤미아의 겨울왕과 여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피는 부모가 백산 전투 이후 망명한 네덜란드 공화국 헤이그의 바세나르 호프(Wassenaer Hof)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제임스 6세와 1세의 딸이었으므로, 조피는 제임스 1세의 외손녀였다.[3] 태어날 당시 프리슬란트 영방으로부터 40 탈러의 연금을 받았다.
어린 시절을 네덜란드에서 보내며 교육을 받았다. 수학, 법학, 역사를 배웠으며 여러 외국어에도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피는 사촌인 잉글랜드의 찰스 2세로부터 구애를 받기도 했으나, 찰스 2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후원하던 윌리엄 크레이븐 경에게서 돈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하여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4]
1648년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오빠 카를 1세 루트비히가 팔츠 선제후 지위를 되찾아 독일로 돌아가게 되자, 조피도 1650년에 팔츠로 이주했다.
조피는 처음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과 약혼했으나, 결혼 전에 천연두를 앓아 외모가 달라진 것을 이유로 파혼당했다. 이후 게오르크 빌헬름은 자신의 애첩이었던 프랑스 귀족 여성 엘레오노르 다르브리즈와 귀천상혼을 했는데, 이 일로 조피는 게오르크 빌헬름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2. 2. 결혼
결혼 전, 조피는 라인강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딸로서, 조피, 라인 팔츠 공녀 또는 팔츠의 조피로 불렸다.본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과 약혼했으나, 결혼 전 앓은 천연두로 외모가 달라졌다는 이유로 파혼당했다. 이후 게오르크 빌헬름은 자신의 애첩이었던 프랑스 소귀족의 딸 엘레오노르 다르브리즈와 귀천상혼을 했고, 이 일로 조피는 게오르크 빌헬름에게 깊은 원망을 품게 되었다.
1658년 9월 30일, 조피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게오르크 빌헬름의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했다.[5]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조피의 어머니 보헤미아 여왕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사촌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의 증손이었다. 결혼 당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공작가의 넷째 아들이었기에 영지 계승 가능성이 희박했으나, 권력욕이 강했던 그는 천연두 후유증이 남고 결혼 적령기(당시 28세)를 넘긴 조피의 상황을 개의치 않고 결혼을 추진했다.[25]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형들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아버지 게오르크의 유산을 상속받았고, 169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아홉 번째 선제후인 하노버 선제후가 되었다.[5][26] 조피는 1698년 남편과 사별했다.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애인 클라라 엘리자베트 폰 플라텐을 공공연히 곁에 두었고 조피의 지적인 면모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부부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피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남편의 통치를 도왔다.[25]
조피는 당대의 중요한 지식인들과 교류했으며, 특히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라이프니츠가 하노버 궁정의 사서로 일하던 1676년부터 조피가 사망한 1714년까지 이어진 그들의 교류는 방대한 양의 서신으로 남아, 그녀의 뛰어난 지성과 학문적 호기심을 증명한다.[5] 그녀는 르네 데카르트와 바뤼흐 스피노자의 철학 저서들을 탐독하기도 했다.
또한 조피는 남편과 함께 헤렌하우젠 궁전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확장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헤렌하우젠 정원의 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꾼 이 정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2. 3. 자녀

조피는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의 사이에서 성인이 된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게오르크 루트비히 | 1660년–1727년 | 하노버 선제후, 그레이트브리튼 국왕 조지 1세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 1661년–1690년 | 제국군 장군, 전투 중 사망 |
막시밀리안 빌헬름 | 1666년–1726년 | 신성 로마 제국 육군 야전 원수 |
조피 샤를로테 | 1668년–1705년 | 프로이센의 왕비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 |
카를 필리프 | 1669년–1690년 | 제국 육군 대령, 전투 중 사망 |
크리스티안 하인리히 | 1671년–1703년 | 전투 중 사망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 1674년–1728년 | 요크와 올버니 공작, 오스나브뤼크의 주교 |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부부에게 후사가 없고, 뒤를 이은 앤 여왕의 자녀들도 모두 요절하면서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가 중요해졌다. 특히 앤 여왕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글로스터 공 윌리엄이 1700년 사망하자,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제외하고 개신교 신자 중 가장 가까운 왕위 계승권자는 제임스 1세의 외손녀인 조피였다.
조피의 아들 중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카를 필리프, 크리스티안 하인리히 세 명은 전투에서 사망했다.[6]
조피는 자녀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664년부터 1665년까지 약 1년간 남편과 이탈리아에서 긴 휴가를 보내는 동안에도 아들들의 가정교사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특히 하노버로 돌아온 후에는 자녀 양육에 더욱 힘썼다.[7] 그녀는 편지에서 장남 게오르크 루트비히(훗날 조지 1세)를 책임감 있고 성실하여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아이라고 묘사했다.[8]
처음에 조피는 아들 게오르크 루트비히와 체레의 조피 도로테아의 결혼을 반대했다. 조피 도로테아의 어머니 엘레오노르 데스미어 도르브루스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점(조피는 그녀를 "후추에 섞인 쥐 먼지"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과 조피 도로테아의 적자로서의 지위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결혼이 가져올 막대한 재정적 이점을 고려하여 결혼을 승낙했다.[9] 그러나 예상대로 시어머니 조피와 며느리 조피 도로테아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30]
1694년, 며느리 조피 도로테아가 쾨니히스마르크 백작과의 불륜 스캔들로 인해 아들렌 성에 유폐되자, 조피는 손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훗날 조지 2세)와 손녀 조피 도로테아 폰 하노버를 직접 양육했다.[32] 이 과정에서 조피는 손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에게서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와 관련된 모든 것을 멀리하게 했다고 한다.[32]
유일한 딸 조피 샤를로테는 초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하여 프로이센의 왕비가 되었다. 조피는 딸의 혼가인 프로이센 궁정에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요한 프리드리히의 딸 캐롤라인을 눈여겨보았다.[33] 캐롤라인은 여러 혼담이 있었으나, 1705년 조피의 손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와 결혼했다.[34] 조피는 장차 영국의 왕비가 될 손자며느리 캐롤라인에게 자신의 정치 고문이었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를 통해 교육을 받도록 주선했다.[35] 캐롤라인은 훗날 왕비로서 남편 조지 2세를 도와 로버트 월폴과 함께 영국 정치를 이끌었다.
3. 영국 왕위 계승
이에 1701년, 잉글랜드 의회는 1701년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앤 여왕 사후 왕위가 조피와 그녀의 개신교 후손들에게 돌아가도록 명시했다. 이는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법의 통과로 조피는 70세의 나이에 영국의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별도의 국가였기에 이 법이 직접 적용되지는 않았으나, 이는 이후 1707년 연합법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일부 영국 정치인들은 앤 여왕 사후의 혼란을 막기 위해 조피를 영국으로 초청하려 했으나, 앤 여왕은 자신의 왕국 내 경쟁적인 궁정의 등장을 우려하여 이를 반대했다.[12] 조피 역시 왕위 계승의 불확실성을 인지하고 "의회가 오늘 하는 일을 다음 날에는 없앨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14] 1705년에는 1705년 조피 귀화법이 통과되어 조피의 가톨릭이 아닌 후손들에게 영국 국적이 부여되기도 했다.[16][17]
조피는 앤 여왕보다 35세나 많았지만 비교적 건강했으나,[15] 1714년 6월 8일, 앤 여왕보다 약 두 달 먼저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9] 그 결과 조피는 직접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같은 해 8월 앤 여왕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법에 따라 그녀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조지 1세로 즉위하여 하노버 왕가 시대를 열었다.
3. 1. 배경
17세기 후반 이후 잉글랜드는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 왕정복고, 명예 혁명이 연이어 일어나며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겪었다. 명예 혁명 이후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메리 2세의 뒤를 이은 앤 여왕 역시 여러 차례의 임신과 출산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녀를 어릴 때 잃었다. 특히 1700년에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아들 글로스터 공 윌리엄마저 사망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심각해졌다.[10] 앤 여왕의 이복동생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있었지만, 그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영국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임스 1세의 외손녀이자 개신교 신자인 조피가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로 떠올랐다. 그녀의 형제자매들과 그 후손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했거나, 혹은 사생아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 자격이 없었다. 따라서 스튜어트 가문의 혈통을 이으면서도 개신교 신자인 인물 중에서는 조피가 가장 가까운 계승권자가 되었다.
결국 1701년, 잉글랜드 의회는 1701년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앤 여왕 사후 왕위는 조피와 그녀의 개신교 후손들에게 계승되도록 명시했다. 이는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나 다른 가톨릭 신자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3. 2. 1701년 왕위 계승법
1700년, 앤 여왕의 유일하게 생존했던 아들 글로스터 공 윌리엄이 사망하면서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 같은 해 9월, 당시 왕이었던 윌리엄 3세는 후사가 없었고 재혼할 의사도 보이지 않았기에, 네덜란드 헤트 로 궁전에서 자신의 사촌이자 개신교 신자인 조피를 만나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했다. 조피는 네덜란드에서 성장하여 윌리엄 3세와 네덜란드어로 유창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10]
결국 1701년, 잉글랜드 의회는 1701년 왕위 계승법(Act of Settlement 1701)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윌리엄 3세나 앤 여왕에게 적법한 후사가 없을 경우,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는 "가장 훌륭한 공주 조피, 하노버 선제후비이자 과부 공작부인"과 "그녀의 신체의 개신교 후계자들"에게 돌아간다고 명시했다. 이 법의 주요 목적은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제임스 2세의 아들로, 제임스 3세 및 8세로도 불림)와 다른 가톨릭 신자 및 그 배우자들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 왕위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아니며 로마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지 않은 조피의 '개신교 후계자'에게만 계승되도록 제한되었다.
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에 따라 개신교 계통의 왕위 계승에 대한 추가 조항을 위해, 폐하의 가장 충실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인 본 의회에 소집된 주교와 귀족 및 평민은 폐하께 앤 여왕 폐하와 전하의 폐하의 칙령 및 동의로 인해 제정 및 선언되도록 간청드립니다. 폐하의 칙령 및 동의로 제정 및 선언되도록 간청드립니다. 이에 조피 선제후비이자 하노버 과부 공작부인, 보헤미아 여왕 엘리자베스의 딸인 훌륭한 공주, 고귀하신 선조이신 국왕 제임스 1세의 딸인 폐하를 개신교 계통의 제국 왕관과 존엄성의 다음 계승자로 선언합니다. 잉글랜드, 프랑스, 아일랜드, 그리고 폐하와 덴마크 공주 앤, 그리고 앤 공주와 폐하의 적절한 자녀가 없는 경우, 이와 관련된 영토 및 지배권을 갖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별개의 국가였으므로 이 법이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까지 자동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으나, 이는 이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거쳐 1707년 연합법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조피가 계승자로 지명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제임스 1세의 외손녀로서 스튜어트 가문의 혈통을 이었고, 개신교 신자라는 점이었다. 그녀의 오빠들 중 자손을 남긴 경우는 있었으나, 팔츠-짐메른 백작 에두아르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카를 1세 루트비히의 적자 계열 후손(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자손) 역시 가톨릭 신자였다. 다른 자녀들은 사생아로 간주되어 유럽 왕실의 계승 관례상 자격이 없었으므로, 조피가 유일한 적격 계승권자가 되었다.
법 통과 당시 조피는 70세였고 앤 여왕보다 35세나 많았지만, 건강 상태가 양호했으며 자신 또는 아들인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15] 일부 영국 정치인들은 앤 여왕 사후의 혼란을 막고 조피의 즉각적인 승계를 보장하기 위해 그녀를 영국으로 초청하려 했으나, 앤 여왕은 자신의 왕국 내에 경쟁적인 궁정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아 이를 거절했다.[12] 앤 여왕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발했던 조피가 자신보다 더 유능하게 보일 것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13] 조피 자신도 왕위 계승의 불확실성을 인지하고 "의회가 오늘 한 일을 내일 뒤집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14]
1705년에는 1705년 조피 귀화법(Sophia Naturalization Act 1705)이 통과되어, 조피의 가톨릭이 아닌 후손들에게 영국 국적(정확히는 당시 잉글랜드 국적)이 부여되었다.[16] 이 법에 따른 국적 부여는 1948년 영국 국적법에 의해 폐지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17]
그러나 조피는 1714년 6월 8일, 앤 여왕보다 약 두 달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8월 1일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법에 따라 조피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이로써 하노버 왕가 시대가 시작되었다.
3. 3. 정치적 갈등
일부 영국 정치인들은 앤 여왕이 사망할 경우 조피가 즉시 정부를 맡을 수 있도록 그녀를 영국으로 데려오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이는 앤 여왕의 가톨릭 신자인 이복동생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조피보다 런던에 훨씬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조피의 왕위 계승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되었다. 조피 자신도 런던으로 이주하기를 열망했지만,[12] 앤 여왕은 자신의 왕국에 경쟁적인 궁정이 생기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기에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앤 여왕은 또한 노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동적이고 건강한 조피가 자신보다 더 나은 통치자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의식했을 가능성도 있다.[13] 조피는 앤 여왕 사후 상황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며, "의회가 오늘 하는 일을 다음 날에는 없앨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14]
3. 4. 사망
조피는 앤 여왕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건강 상태는 더 좋았다. 그러나 1714년 6월 5일, 앤 여왕으로부터 불쾌한 내용의 편지를 받은 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18] 그로부터 3일 뒤인 6월 8일, 조피는 헤렌하우젠 정원에서 산책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폭우를 피하려다 쓰러졌다. 그녀는 며느리인 안스바흐의 캐롤라인(당시 하노버 선제후비)의 품에서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고령이었다.[19]
앤 여왕은 조피가 사망한 지 약 두 달 뒤인 1714년 8월 1일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만약 조피가 앤 여왕보다 오래 살았다면, 영국 왕위에 오르는 가장 나이 많은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조피의 사망으로 그녀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조지 루이(1660–1727)가 추정 상속인이 되었고, 앤 여왕이 사망하자 그레이트브리튼의 국왕 조지 1세로 즉위했다. 조피의 딸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1668–1705)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하여 후대의 프로이센 및 독일 군주들의 조상이 되었다.
조피는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아들 조지 1세와 함께 하노버 라이네 궁전 예배당에 묻혔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공습으로 궁전과 예배당이 파괴되자, 그들의 유해는 1957년 헤렌하우젠 정원의 베르크가르텐에 있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1세 국왕의 영묘로 옮겨졌다.
4. 유산
앤 여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건강 상태가 더 좋았던 것으로 알려진 조피는, 앤 여왕으로부터 불쾌한 내용의 편지를 받은 후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전해진다.[18] 1714년 6월 8일, 헤렌하우젠 정원에서 산책하던 중 갑작스러운 폭우를 피하려다 쓰러져 며느리인 안스바흐의 캐롤라인의 품에서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9] 이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고령이었다. 조피가 사망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714년 8월 1일, 앤 여왕 역시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만약 조피가 앤 여왕보다 오래 살았다면, 영국 왕위에 오르는 최고령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조피의 사망으로 그녀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조지 루이가 추정 상속인 자격을 이어받았고, 앤 여왕 사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조지 1세로 즉위하였다. 이를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영국 왕실의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었다. 또한 조피의 딸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하여, 이후 프로이센과 독일 군주들의 조상이 되었다. 조피는 젊은 시절 수학, 법학, 역사를 배웠으며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피는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아들 조지 1세와 함께 하노버 라이네 궁전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공습으로 궁전과 예배당이 파괴되자, 1957년 헤렌하우젠 정원 베르크가르텐에 있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1세 국왕의 영묘로 유해가 이장되었다.
조피가 남긴 『하노버 선제후 소피아 회고록 1630-1680』(H. Forester 번역, 런던, 1888)은 그녀의 삶과 당시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5. 가계
조피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사이에서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팔츠 선제후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스튜어트 왕조 출신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1세의 딸이었다. 이러한 혈통은 조피가 훗날 영국 왕위 계승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는 배경이 되었다.
1658년, 조피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했다.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결혼 당시에는 네 번째 아들이었기에 공위 계승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그러나 형들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남편이 아버지 게오르크의 유산을 상속받았고, 1692년에는 선제후 지위를 얻었다.[26] 조피는 남편의 권력욕을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그를 도왔으나, 남편에게는 애인 클라라 엘리자베트 폰 플라텐이 있었고 조피의 재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부부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25]
17세기 후반 영국은 청교도 혁명, 왕정복고, 명예 혁명 등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명예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 부부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다음 왕위 계승자인 앤 여왕 역시 여러 차례 임신과 사산을 겪으며 살아남은 자녀가 없었다. 유일하게 성장했던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마저 1700년에 사망했다. 또한 앤 여왕의 이복 남동생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가톨릭 신자였기에 1689년 권리장전과 이후 제정된 1701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왕위 계승 자격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피는 외조부 제임스 1세의 혈통을 이은 가장 가까운 개신교 신자 친척으로서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가 되었다. 그녀의 오빠, 언니와 그 자손들은 대부분 사망했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했거나 서자였기 때문이다. 결국 1701년 왕위계승법은 앤 여왕 다음의 왕위 계승자로 조피와 그녀의 개신교 후손들을 지명했다.
가족 관계에서 조피는 조카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리젤로테)와 각별한 사이였다. 1659년부터 1663년까지 어린 리젤로테를 맡아 길렀으며, 그녀가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와 결혼한 후에도 사망할 때까지 서신을 교환했다.[31] 반면, 며느리 조피 도로테아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30] 1694년 며느리가 쾨니히스마르크 백작과의 불륜 스캔들로 유폐되자, 조피는 두 손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훗날 조지 2세)와 조피 도로테아를 직접 양육했다.[32] 이 과정에서 조피는 손자 게오르크에게서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을 멀리하려 했다.[32]
조피는 딸 조피 샤를로테가 시집간 프로이센 궁정에서 캐롤라인을 눈여겨보았고, 그녀가 손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와 결혼하도록 주선했다.[33][34] 조피는 장래 영국 왕비가 될 캐롤라인에게 자신의 정치 고문이었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를 통해 교육을 제공하기도 했다.[35]
조피는 1714년 6월 8일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앤 여왕이 그녀보다 약 두 달 뒤인 8월 1일에 사망하면서, 조피는 영국의 왕관을 쓰지 못했다. 왕위는 조피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드비히에게 돌아갔고, 그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조지 1세로 즉위하여 하노버 왕가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조피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부부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모든 영국 왕위 계승권 보유자들의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이 되었다.
5. 1. 조상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6세
헤센의 엘리자베트
나사우의 루이제 율리아나
오라녜 공 빌럼 1세
부르봉의 샤를로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와 1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 여왕
덴마크의 앤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조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