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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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명칭
- 3. 역사
- 4. 기능 및 권한
- 5. 회의 제도
- 6. 구성원 선출 방식 및 고려 사항
- 7. 역대 상무위원
- 7.1. 제6기 (1928년 ~ 1945년)
- 7.2. 제7기 (1945년 ~ 1956년)
- 7.3. 제8기 (1956년 ~ 1969년)
- 7.4. 제9기 (1969년 ~ 1973년)
- 7.5. 제10기 (1973년 ~ 1977년)
- 7.6. 제11기 (1977년 ~ 1982년)
- 7.7. 제12기 (1982년 ~ 1987년)
- 7.8. 제13기 (1987년 ~ 1992년)
- 7.9. 제14기 (1992년 ~ 1997년)
- 7.10. 제15기 (1997년 ~ 2002년)
- 7.11. 제16기 (2002년 ~ 2007년)
- 7.12. 제17기 (2007년 ~ 2012년)
- 7.13. 제18기 (2012년 ~ 2017년)
- 7.14. 제19기 (2017년 ~ 2022년)
- 7.15. 제20기 (2022년 ~ 현재)
- 8. 현재 상무위원 (2022년 10월 ~ 현재)
- 9. 비판 및 논란
- 참조
1. 개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중국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정치 의사결정 기구이다. 상위 기구인 정치국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며, 일반적으로 매주 회의를 개최하여 정책을 결정한다. 1928년 설립 이후, 중앙서기처로 불리다가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덩샤오핑 집권 이후 권력 강화와 제도화가 추진되었다. 상무위원의 수는 시대에 따라 변동되었으며, 현재는 7명으로 구성된다. 상무위원 선출은 고위급 협의와 여론조사를 통해 이루어지며, 연공서열, 나이, 지역 당 서기 역임 여부 등이 고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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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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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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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지도자 | 시진핑 |
지도자 직함 | 중국공산당 총서기 |
위원 | 시진핑 리창 자오러지 왕후닝 차이치 딩쉐샹 리시 (1956년생 정치인) |
위원 직함 | 위원 |
선출 기관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
책임 기관 |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
의석수 | 7 |
회의 장소 | 친정전, 중난하이, 베이징, 중국 |
정치 | |
역할 |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부 |
권력 | 중국의 주요 정책 결정 및 최고 권력 행사 |
기타 정보 | |
관련 문서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중국공산당 총서기 |
링크 | 바오통이 다시 보는 6.4 (2): 나는 어떻게 친청에 잡혀 들어갔나 천도수근회창상--유명산수화가 장덩탕 단독: 중국의 배후 권력 중개인, 개혁 후보자 차단 - 소식통 |
2. 명칭
중국 정치 용어에서 "상무위원회"(''Chángwù Wěiyuánhuì'')는 상위 기구(정치국)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기구를 의미한다.[5] 영어권 언론에서는 "정치국 상무위원회(Politburo Standing Committee, PSC)" 또는 "PBSC"로 약칭된다.[5] 중국 관영 언론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한다.[5]
1928년 7월의 제6기 1중 전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34년 1월의 제6기 5중 전당대회로부터 1956년 9월의 8기까지는 '''중앙서기처'''라고 불렸으나, 8기부터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라고 개칭되었다.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는 단순한 일상업무의 처리기구가 되었다.
공식 중국어 발표에서 이 기구 구성원을 지칭하는 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은 ''Zhōnggòng Zhōngyāng Zhèngzhìjú Chángwěi'' (中共中央政治局常委)이며, 이는 ''Zhōngguó Gòngchǎndǎng Zhōngyāng Zhèngzhìjú Chángwù Wěiyuánhuì Wěiyuán'' (中国共产党中央政治局常务委员会委员)의 약칭이다. 일부 언론 매체는 PSC 위원을 ''Zhèngzhìjú Chángwěi'' (政治局常委) 또는 간단히 ''Chángwěi'' (常委)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역사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집권 이후, 중국 공산당의 권력 강화와 정치국 및 상무위원회의 제도화가 추진되었다. 1980년대 상무위원회는 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서 기능을 회복했으며, 민주집중제에 따라 운영되었다. 즉, 합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다수결로 결정하며, 결정 후에는 전체 기구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상무위원회는 은퇴한 당 원로들(중앙고문위원회)과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으며, 덩샤오핑은 이 둘 사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89년 톈안먼 사건 당시, 상무위원회의 합의 없이 군 투입이 결정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2년 제16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 수가 7명에서 9명으로 확대되었으나, 2012년 제18차 당대회에서 다시 7명으로 축소되었다.[6]
3. 1. 초기 역사 (1928년 ~ 1945년)
1928년 7월의 제6기 1중 전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34년 1월의 제6기 5중 전당대회로부터 1956년 9월의 8기까지는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라고 불렸으나, 8기부터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라고 개칭되었다.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는 단순한 일상업무의 처리기구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 초기 역사에서 상무위원회는 당 중앙위원회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고 중앙 기구로 여겨졌다. 상무위원회는 더 큰 정치국(즉, 정치국)의 최고 지도부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레닌의 당을 모델로 한 세계 대부분의 다른 공산당과 달리, 중국 공산당은 정치국이 너무 크고 비효율적이어서 효과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제1기 상무위원회는 1928년 7월 중국 공산당 제6차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구성되었다. 1934년 1월부터 1956년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 제1차 전체회의까지 상무위원회는 중앙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로 대체되었다.3. 2. 문화 대혁명 시기 (1966년 ~ 1976년)
문화 대혁명 초기,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과 같은 주요 위원들이 마오쩌둥 주석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권력은 문화혁명 그룹에 집중되었는데, 이 그룹은 명목상으로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보고했지만, 사실상 독자적인 "권력 중심"으로 대부분 자체적으로 행동했다. 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의 급진적 지지자들인 천보다와 캉성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하면서 어느 정도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했다.
문화 대혁명의 마지막 몇 년은 내부 혼란으로 지배되었다. 1975년부터 1976년 사이에 상무위원 캉성, 저우언라이, 주더, 그리고 마오쩌둥이 모두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숙청되었다. 이 기간 동안 상무위원회는 정책 결정이나 집행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임시로만 회의를 열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 사망 당시, 회의에 참석한 위원은 화궈펑, 장춘차오, 왕훙원, 예젠잉 뿐이었는데, 장춘차오와 왕훙원은 사인방의 일원이었다. 10월 6일,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유산과 추모 행사를 논의한다는 명목으로 상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하여 현역 위원들을 초대했다. 왕훙원과 장춘차오는 회의에서 체포되어 "반혁명 범죄"로 기소되었다. 그 후 예젠잉과 화궈펑만이 공식적인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상무위원회는 1977년까지 복원되지 않았다.
3. 3. 경제 개혁 이후 (1978년 ~ 현재)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집권 이후, 중국 공산당의 권력 강화와 정치국 및 상무위원회의 제도화가 추진되었다. 1980년대 상무위원회는 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서 기능을 회복했으며, 민주집중제에 따라 운영되었다. 즉, 합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다수결로 결정하며, 결정 후에는 전체 기구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상무위원회는 은퇴한 당 원로들(중앙고문위원회)과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으며, 덩샤오핑은 이 둘 사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87년 후야오방(胡耀邦)이 상무위원회에서 축출되고 자오쯔양(趙紫陽)으로 대체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상무위원회의 합의 없이 군 투입이 결정되었다. 자오쯔양은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여 리펑(李鵬) 등과 의견이 갈렸고, 결국 장쩌민(江澤民)과 리루이환(李瑞環)으로 교체되었다.
1989년 이후 상무위원회의 운영은 대체로 안정화되었다. 1992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장쩌민, 리펑, 치아오스(喬石), 리루이환, 주룽지(朱鎔基), 류화칭(劉華清), 후진타오(胡錦濤) 7명이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9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치아오스와 류화칭이 은퇴하고, 웨이젠싱(尉健行)과 리란칭(李嵐清)이 합류하면서, 상무위원회가 임기제 기구화될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류화칭은 군 출신 마지막 상무위원이었다. 1999년 후진타오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어 장쩌민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2002년 제16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는 7명에서 9명으로 확대되었다. 후진타오 집권 시기 상무위원회는 "집단 지도부" 또는 "합동 대통령직"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2007년 황주(黃菊) 사망으로 상무위원회는 일시적으로 8명 체제가 되었다.
2012년 제18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는 다시 7명으로 축소되었다.[6] 정치법률위원회 위원장과 부주석은 새로운 상무위원회에 포함되지 않았고, 서기처 서기와 "선전부장" 직책은 류윈산(劉雲山)에게 통합되었다.[6]
4. 기능 및 권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최고위급 관리들로 구성되며 중국 공산당,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정치 의사결정 기구이다. 상무위원회 위원들은 중국의 정치 권력 중심에 있다.[13] 조직적으로 그들 아래에는 정치국, 그리고 중앙위원회가 있다.[13]
당 규약에 따르면, 당 중앙위원회는 전체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선출한다.[14]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상무위원회 위원이어야 하며, 상무위원회 회의 소집 및 의제 결정을 담당한다. 상무위원회는 대략 매주 회의를 열지만, 그 회의는 거의 공개되지 않는다.[15]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위원 수는 5명에서 9명까지 다양했지만, 현재는 7명이다.[16] 상무위원회 위원 전원은 국가급 지도자이다.
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선출된다.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권한에 대해 당규약 제22조는 “중앙정치국과 그 상무위원회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폐회 기간 중 중앙위원회의 권한을 행사하며”,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중앙서기처 구성원을 지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27]
일본의 중국 정치 연구자인 츠보타 토시타카(坪田敏孝)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구체적인 권한으로 다음과 같은 항목들을 제시하고 있다.[28]
- 당 대회와 중앙위원회가 확정한 노선·방침·정책에 따라 전체적인 측면과 관련된 활동 방침, 정책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의견을 정치국에 제출한다.
- 정치국이 제정한 방침·정책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 당 중앙 규율검사위원회·당 중앙 군사위원회·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당조[29], 국무원 당조가 제출하는 노선·방침·정책적인 문제에 대해 결정을 한다.
- 당 중앙 각 부 부장, 각 성·자치구·직할시 당위원회 서기와 국가기관 각 부 부장·위원회 주임, 각 성 성장·자치구 주석·직할시 시장의 인선을 심의하여 정치국에 제출한다. 당 중앙 각 부 부부장, 각 성·자치구·직할시 당위원회 부서기와 국가기관 각 부 부부장·위원회 부주임, 각 성 부성장·자치구 부주석·직할시 부시장의 인선을 심의하여 지명한다.
- 중대한 돌발 사건에 대해 조기에 관련 결정을 하고, 당 중앙 명의로 문서를 발행한다.
- 정치국에 대해 책임을 지고, 보고한다. 그리고 그 감독을 받는다.
5. 회의 제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일반적으로 매주 1회 회의를 개최하며, 정책 결정은 회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진다.[30] 회의 의제는 총서기 또는 총서기의 위임을 받은 상무위원이 결정한다.[30] 당 중앙서기처 또는 관련 부문이 회의의 중요 논의 문서를 준비한다.[30]
회의는 총서기가 소집하고 주재하며, 필요한 경우 위임을 받은 상무위원이 주재할 수 있다.[30] 문제에 대한 결정은 소수 의견이 다수 의견을 따르는 원칙에 따라 표결로 이루어진다.[30] 표결은 무기명 투표, 거수 등의 방식을 채택할 수 있으며, 중요 간부의 임면 또는 인선을 지명할 때는 매번 표결해야 한다.[30] 표결 결과는 주재자가 그 자리에서 공표한다.[30]
회의 결과는 기록되고 회의록으로 편찬되며, 총서기 또는 위임받은 상무위원의 서명을 거쳐 정치국 위원 전원에게 발부된다.[30] 회의 논의 후 채택되었거나 정치국 상무위원의 회람·동의를 거친 문서는 총서기 또는 그에게 위임받은 정치국 상무위원의 심사 후 서명하여 발부된다.[30]
6. 구성원 선출 방식 및 고려 사항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이하 상무위) 위원 선출은 현직 중앙정치국 및 상무위 위원들과 퇴임한 상무위 위원들 간의 고위급 협의를 통해 이루어진다.[7][8] 상무위원 후보들은 일반적으로 이 고위급 그룹의 개별 위원들을 자신의 후원자로 삼는다. 현직 및 전직 중앙정치국 위원들은 새로운 중앙정치국 및 상무위원 후보에 대한 지지를 결정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협의 및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이 여론조사는 구속력이 없으며, 새로운 위원의 후보 자격에 대한 그룹의 합의를 반영한다. 중앙정치국은 새로운 중앙정치국 및 상무위원 후보에 대해 모든 현직 중앙위원회 위원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할 수 있지만, 이는 자문적 성격이다.[7][8]
새로운 중앙정치국 및 상무위원 선출 과정은 가을 당 대회 이전 여름 베이다이허에서 현직 상무위원들의 비공개 회의로 시작된다. 중앙위원회가 공식적으로 확인할 중앙정치국 및 상무위원 후보 명단은 일반적으로 당 대회 몇 주 전에 완성된다.[7][8]
브루킹스 연구소의 청리(程立, Cheng Li)와 국제관계 및 태평양 연구 대학원의 수전 셔크(Susan Shirk)는 중국 정치 체제에서의 승진과 상무위원 선출이 능력보다는 강력한 후원자에 대한 충성도에 더 많이 의존한다고 분석한다.[9] 예를 들어, 제16차 당 대회 상무위원 명단에는 퇴임하는 장쩌민(江澤民, Jiang Zemin) 총서기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승진한 증칭홍(曾慶紅, Zeng Qinghong), 황주(黃菊, Huang Ju), 자칭린(賈慶林, Jia Qinglin) 등이 포함되었다.[12]
연공서열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무위원은 상무위에 입성하기 전에 중앙정치국에서 최소 한 번 이상의 임기를 수행해야 한다는 관례가 있다. 그러나 이 규칙은 1992년 주룽지(朱鎔基, Zhu Rongji)와 후진타오(胡錦濤, Hu Jintao), 2007년 리커창(李克强, Li Keqiang)과 시진핑(習近平, Xi Jinping) 등 당 지도자 또는 총리직을 맡을 사람들에 의해 여러 차례 위반되었다. 장쩌민 또한 1989년 갑자기 총서기가 되어 상무위원이 되기 전에 중앙정치국에서 첫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거의 모든 상무위원들은 성 또는 직할시의 당 서기를 역임한 경험이 있다. 1997년 이후 상무위원으로 취임한 29명 중 리펑(李鵬, Li Peng), 원자바오(溫家寶, Wen Jiabao), 리란칭(李嵐清, Li Lanqing), 로우간(羅幹, Luo Gan), 류윈산(劉雲山, Liu Yunshan), 왕후닝(王滬寧, Wang Huning), 딩쉐샹(丁薛祥, Ding Xuexiang) 등 6명만이 지역 당 서기직을 역임하지 않았다. 이 중 리펑, 원자바오, 왕후닝 3명만이 지역 지도자직을 역임한 적이 없다.
나이 역시 중요한 요소이다. 1989년 이후 모든 상무위원들은 임명 당시 최소 50세였다. 후진타오는 1992년 제14차 당 대회에서 50세, 시진핑은 2007년 제17차 당 대회에서 54세, 리커창은 52세에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10] 2002년 제16차 당 대회 이후, 당 대회 당시 68세 이상인 상무위원들은 예외 없이 퇴임하는 "칠상팔하(七上八下)" 규칙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2016년 10월, 당 고위 간부 등마오성(鄧茂生, Deng Maosheng)은 "'칠상팔하'의 엄격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설에서 나온 것이며 신뢰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이 규칙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11]
2002년, 후진타오를 제외한 모든 상무위원들이 퇴임하고 교체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엄격한 연령 기준 퇴임 제도는 임기 제한과 높은 교체율을 의미하며, 대다수 위원들이 1~2회 임기를 수행했다. 1989년 이후 상무위원으로 3회 이상 임기를 수행한 사람은 후진타오와 시진핑 두 사람뿐이다. 야심찬 지망생들의 정책적 견해는 일상적으로 감추어지며, 후진타오가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 본토 외부 학자들은 상무위 내부의 '파벌'을 식별하기 위해 여러 이론을 제기했지만, 불투명한 운영 방식 때문에 파벌 소속은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었다. 전 충칭(重慶, Chongqing) 당 서기 보시라이(薄熙來, Bo Xilai)의 행동과 같이 지나치게 과시적인 상무위 '선거 운동'은 상무위 선출에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었다.[12][9]
7. 역대 상무위원
1928년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설립된 이후 현재까지 다음과 같은 구성원 변동이 있었다.
- '''제4차 상무위원회''' (1927년 4월 선출): 구추바이, 탄핑산, 장궈타오
- '''제5차 상무위원회''' (1927년 5월 선출): 천두슈, 구추바이, 장궈타오, 채허썬, 리웨이한, 저우언라이, 리리산, 장타일레이, 쑤자오정, 로위농
- '''제6차 상무위원회''' (1928년 7월 선출): 샹중파 '''(사망)''', 보구 (1934년 1월 승격), 구추바이, 장궈타오, 채허썬, 저우언라이, 리리산, 쑤자오정 '''(사망)''', 샹잉, 장원톈, 왕밍
- '''제6차 상무위원회''' (1935년 1월 遵義 회의 재편): 장원톈, 마오쩌둥 (1937년 7월 승격), 저우언라이, 보구, 왕밍, 왕자샹, 천윈, 강성, 런비시, 류샤오치, 주더
- '''제7차 서기처''' (1945년 6월 선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천윈, 런비시 '''(사망)''', 주더, 류샤오치
- '''제8차 상무위원회''' (1956년 9월 선출):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린뱌오 '''(제명)''', 덩샤오핑
- '''제8차 상무위원회''' (문화대혁명 재편, 1966년 8월 선출): 마오쩌둥, 린뱌오 '''(제명)''', 저우언라이, 타오주, 천보타 '''(제명)''', 덩샤오핑, 강성 '''(제명)''', 류샤오치 '''(제명 후 복권)''', 주더, 리푸춘, 천윈
- '''제9차 상무위원회''' (1969년 4월 선출): 마오쩌둥, 린뱌오 '''(사망, 제명)''', 저우언라이, 천보타 '''(제명)''', 강성 '''(사망, 제명)'''
- '''제10차 상무위원회''' (1973년 8월 선출): 마오쩌둥 '''(사망)''', 화궈펑 (1976년 4월 승격), 저우언라이 '''(사망)''', 왕홍원 '''(제명)''', 강성 '''(사망, 제명)''', 예젠잉, 리더성, 주더 '''(사망)''', 장춘차오 '''(제명)''', 둥비우 '''(사망)''', 덩샤오핑 (1975년 1월 선출)
- '''제11차 상무위원회''' (1977년 8월 선출): 화궈펑, 예젠잉, 덩샤오핑, 리시엔녠, 왕둥싱 (1980년 2월 사임), 천윈, 후야오방, 자오자양 (1980년 2월 선출)
- '''제12차 상무위원회''' (1982년 9월 선출): 후야오방 (1987년 1월 해임), 예젠잉 (1985년 9월 사임), 덩샤오핑, 자오자양, 리시엔녠, 천윈
- '''제13차 상무위원회''' (1987년 11월 선출): 자오자양, 리펑, 차오스, 후치리, 야오이린
- '''제13차 상무위원회''' (천안문 사건 이후 재편, 1989년 6월 선출): 장쩌민, 리펑, 차오스, 야오이린, 송핑, 리루이환
- '''제14차 상무위원회''' (1992년 10월 선출): 장쩌민, 리펑, 차오스, 리루이환, 주룽지, 류화칭, 후진타오
- '''제15차 상무위원회''' (1997년 9월 선출): 장쩌민, 리펑, 주룽지, 리루이환, 후진타오, 웨이젠싱, 리란칭
- '''제16차 상무위원회''' (2002년 11월 선출): 후진타오, 우방궈, 원자바오, 자칭린, 증칭홍, 황주 '''(사망)''', 우관정, 리창춘, 뤄간
- '''제17차 상무위원회''' (2007년 10월 선출): 후진타오, 우방궈, 원자바오, 자칭린, 리창춘, 시진핑, 리커창, 허궈창, 저우융캉 '''(제명)'''
- '''제18차 상무위원회''' (2012년 11월 선출): 시진핑, 리커창, 장더장, 위정성, 류윈산, 왕치산, 장가오리
- '''제19차 상무위원회''' (2017년 10월 선출): 시진핑, 리커창, 리잔슈, 왕양, 왕후닝, 자오러지, 한정
- '''제20차 상무위원회''' (2022년 10월 선출): 시진핑, 리창, 자오러지, 왕후닝, 차이치, 딩쉐샹, 리시
7. 1. 제6기 (1928년 ~ 1945년)
1928년 7월 제6기 1중전회에서 소조정(1929년 봄 사망), 향충발, 항영, 주은래, 채화선(1928년 11월 해임), 이립삼(이후 합류)이 임명되었다. 1930년 8월 6일 중앙행동위원회 주석단 위원으로 향충발, 이립삼, 주은래, 구추백, 서석근, 고순장, 원병휘가 선출되었다.1930년 9월 24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6기 3중전회에서는 향충발, 주은래, 구추백이 임명되었다. 1931년 1월 제6기 4중전회에서는 향충발, 주은래, 장국도, 진소우(2월 합류)가 선출되었다. 1931년 6월 향충발 체포 후에는 노복탄, 주은래, 장문천이 활동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박구, 장문천, 노복탄이 임명되었다.
1934년 1월 제6기 5중전회에서는 박구, 장문천, 주은래, 항영이 선출되었다. 1935년 1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준의회의)에서는 장문천, 모택동, 주은래, 박구, 항영이 활동했다. 1937년 12월 중앙정치국 회의에서는 장문천, 모택동, 진소우, 진운, 강생이 참여했다.
1938년 9월부터 11월까지 열린 제6기 6중전회에서는 모택동, 장문천, 진운, 강생, 진소우, 임필시(1940년 7월 합류)가 활동했다. 1943년 3월 20일 중앙정치국 회의에서는 모택동(중앙정치국 주석 겸 중앙서기처 주석), 류소기, 임필시가 임명되었다.
1944년 5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열린 제6기 7중전회에서는 모택동, 주덕, 류소기, 임필시, 주은래가 주석단을 형성하고, 모택동이 주석단 주석이 되었다. 회의 기간 중 주석단이 당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고, 정치국과 서기처는 직무를 정지했다.
7. 2. 제7기 (1945년 ~ 1956년)
wikitable임기 | 구성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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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기 1중전회 (1945년 6월) | 마오쩌둥(중앙위원회 주석),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런비시(1950년 10월 사망), 천윈(1950년 6월, 제7기 3중전회에서 취임) |
7. 3. 제8기 (1956년 ~ 1969년)
1956년 9월 제8기 1중전회에서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덩샤오핑이 임명되었고, 1958년 제8기 5중전회에서 린뱌오가 추가로 임명되었다.- 중앙위원회 주석: 마오쩌둥
- 중앙위원회 부주석: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린뱌오(제8기 5중전회에서 취임)
- 중앙서기처 총서기: 덩샤오핑
1966년 8월 제8기 11중전회에서는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타오주, 천보다, 덩샤오핑, 캉성, 류샤오치, 주더, 리푸춘, 천윈이 임명되었다. 류샤오치는 제8기 12중전회에서 해임되었다.
- 주석: 마오쩌둥, 부주석: 린뱌오
7. 4. 제9기 (1969년 ~ 1973년)
1969년 4월에 열린 제9기 1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이 주석, 린뱌오가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천보다, 캉성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7. 5. 제10기 (1973년 ~ 1977년)
1973년 8월, 제10기 1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부주석으로는 저우언라이, 왕홍원, 캉성, 예젠잉, 리더생, 등소평(제10기 2중전회에서 취임)이 선출되었다. 리더생은 1975년 1월에 사임하였고, 저우언라이는 1976년 1월에 사망, 캉성은 1975년 12월에 사망, 둥비우는 1975년 6월 사망하였다.1976년 4월 중앙정치국 회의에서는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화궈펑, 왕홍원, 예젠잉을 부주석으로 선출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주더가 사망했고, 9월에는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10월에는 왕홍원과 장춘차오가 해임되었다.
1976년 10월 7일 중앙정치국 회의에서는 화궈펑을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하고, 예젠잉을 선출하였다. 1977년 7월 제10기 3중전회에서 화궈펑은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예젠잉과 등소평은 선출되었다.
7. 6. 제11기 (1977년 ~ 1982년)
1977년 8월 제11기 1중전회에서 화궈펑, 예젠잉, 덩샤오핑, 리셴녠, 왕둥싱이 선출되었다. 제11기 3중전회에서 천윈이 상무위원으로 취임하였다. 제11기 5중전회에서 왕둥싱이 해임되고,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상무위원으로 취임하였다.1981년 6월 제11기 6중전회에서는 후야오방, 예젠잉, 덩샤오핑, 자오쯔양, 리셴녠, 천윈, 화궈펑이 선출되었다.
7. 7. 제12기 (1982년 ~ 1987년)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후야오방이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예젠잉(제12기 5중전회에서 사임), 덩샤오핑, 자오쯔양, 리셴녠, 천윈이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7년 1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자오쯔양이 총서기 대리를 맡았고, 덩샤오핑, 리셴녠, 천윈, 후야오방이 상무위원이었다.7. 8. 제13기 (1987년 ~ 1992년)
제13기 1중전회 (1987년 11월)에서는 자오쯔양이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리펑, 차오스, 후치리, 야오이린이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3기 4중전회 (1989년 6월)에서는 장쩌민이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리펑, 차오스, 야오이린, 쑹핑, 리루이환이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7. 9. 제14기 (1992년 ~ 1997년)
장쩌민/江泽民중국어江澤民
리펑/李鹏중국어
李鵬

차오스/喬石중국어
喬石
리루이환/李瑞环중국어
李瑞環
주룽지/朱镕基중국어
朱鎔基
류화칭/劉華清중국어
劉華清
후진타오/胡锦涛중국어
胡錦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