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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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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룽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국무원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상하이 시장과 부총리를 거치며 경제 개혁을 주도했고, 총리 재임 기간에는 대규모 거시 경제 프로젝트를 관리하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응했다. 또한, 국영 기업 개혁, 금융 개혁, 대외 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중국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청렴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 평가받으며, '경제 차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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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룽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00년의 주룽지
2000년의 주룽지
로마자 표기Zhū Róngjī
출생일1928년 10월 23일
출생지중화민국 후난성 창사시
소속 정당중국공산당 (1949–1958; 1978–)
배우자라오안 (1956년 결혼)
자녀주옌라이 (딸)
주윈라이 (아들)
학력칭화 대학 (이학사)
직업전기 엔지니어
주요 경력
중국 국무원 총리시작: 1998년 3월 17일
종료: 2003년 3월 16일
주석: 장쩌민
선임: 리펑
후임: 원자바오
중국 국무원 제1 부총리시작: 1993년 3월 29일
종료: 1998년 3월 17일
총리: 리펑
선임: 야오이린
후임: 리란칭
중국인민은행 총재시작: 1993년 7월 2일
종료: 1995년 6월 30일
총리: 리펑
선임: 리구이셴
후임: 다이샹룽
상하이시 당 서기시작: 1989년 8월 1일
종료: 1991년 3월 20일
선임: 장쩌민
후임: 우방궈
상하이 시장시작: 1988년 4월 25일
종료: 1991년 3월 20일
선임: 장쩌민
후임: 황쥐

2. 생애

중화민국 후난성 창사시 출신으로, 1928년 10월 23일 태어났다.[1][2]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19대손이라고도 전해진다.[54]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여의고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갔고, 1947년 명문 칭화 대학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학생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5] 1949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1년 대학 졸업 후 테크노크라트로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1957년 백화 제방 운동 중 마오쩌둥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일로 1958년 반우파 운동 때 '우파'로 몰려 당적을 박탈당하고 강등되는 시련을 겪었다.[7] 문화 대혁명 시기인 1970년에는 다시 숙청되어 5.7 간부 학교로 보내져 5년간 노동 개조를 받기도 했다.

1978년 덩샤오핑 집권 이후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하고[8] 중앙 정부 부처에서 다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모교인 칭화 대학에 신설된 경제관리학원의 초대 원장을 맡아 학문 발전에도 기여했다.[9]

1987년 상하이로 자리를 옮겨 부서기를 거쳐 1988년 상하이 시장에 취임했다. 그는 푸둥 신구 개발을 이끌며 상하이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에는 텔레비전 연설 등을 통해 시민들을 설득하며 상하이의 상황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정치적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사태 이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상하이시 당서기로 승진했다.

상하이에서의 성공적인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덩샤오핑에 의해 중앙 정치 무대로 발탁되었다. 1991년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되었고,[55][56] 1992년에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여 권력 핵심부에 진입했다.[55][56] 부총리 시절, 특히 1993년부터는 중국인민은행 총재를 겸임하며 당시 심각했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과열된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59][14]

1998년 3월, 국무원 총리로 취임하여 2003년 3월까지 재임했다.[7][58] 총리로서 그는 국유 기업 개혁, 금융 시스템 개혁, 정부 기구 개혁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며,[58] 2001년 중국의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을 이끌었다.[60]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중국 경제는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했다. 또한 베이징의 우다오커우왕징 지역에 외국인 친화적인 생활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기여했다.[72]

2003년 총리직에서 퇴임한 후 정계를 은퇴했으며,[61] 이후 공식적인 정치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퇴임 후에는 주로 저술 활동에 전념하여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책 판매로 얻은 인세를 교육 관련 자선 사업에 기부하는 등 공익 활동에도 참여했다. 2022년에는 시진핑의 3연임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으며,[43][62] 같은 해 열린 제20차 당대회에는 불참했다.[63][64]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중화민국 후난성 창사시 출신으로, 1928년 10월 23일에 태어났다.[1][2] 그의 가문은 지식인이자[3] 부유한 지주 집안이었으며, 일설에 따르면 명나라의 초대 황제인 주원장의 19대손이라고 한다.[54] 5세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4] 이후 삼촌 주쉐팡의 보살핌 아래 자라며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이어갔다.[4]

후난성의 인재로서 1947년 우수한 성적으로 베이징의 명문 칭화 대학 전기 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원이둬, 주쯔칭, 허둥창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공산당(CCP)이 조직한 민주청년연맹 서클 활동에 참여했다.[5] 또한 1950년부터 1951년까지 대학 총학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해인 1949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51년 대학을 졸업했다.

2. 2. 공산당 입당과 초기 경력

1947년 칭화 대학 전기 공학과에 입학하여 원이둬, 주쯔칭 등의 영향을 받아 정치 활동에 참여했으며, 재학 중 학생회 주석(1950-1951년)을 맡았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54] 1951년 대학 졸업 후 테크노크라트로서 동북 지역 인민 정부 공업부 생산 계획실에 배치되어 부주임까지 지냈다.

1952년 11월, 소련식 계획 경제를 주도하기 위해 신설된 국가계획위원회로 옮겨 중앙에서 근무를 시작했다.[6] 당시 위원회 주석은 가오강이었으나, 1954년 가오강·라오수스 사건으로 가오강이 실각했을 때 주룽지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위원회 내에서 조장, 부국장, 부처장 등을 역임했다.[6][54] 그러나 1957년 백화 제방 운동 기간 동안 마오쩌둥의 경제 정책을 "비합리적인 고성장"이라 비판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 이듬해인 1958년 반우파 운동 과정에서 '우파'로 낙인찍혀 당적을 박탈당하고 국가계획위원회 부속 학교 교원으로 강등되는 등 박해를 받았다.[7][54] 이 시기 그의 가족 역시 혁명 이전 부유한 지주였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962년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사면' 조치를 받아 국가계획위원회 국민경제 종합국 엔지니어로 복귀했지만, 정치적으로 완전히 복권된 것은 아니었다.[8][54]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자 1969년(또는 1970년) 다시 숙청되어 지방의 5.7 간부 학교로 하방(下放)되어 5년간 농촌에서 돼지와 소를 기르고 인분을 나르는 등 강제 노동을 통한 사상 개조를 받아야 했다.[5]

1975년 다시 복귀하여 베이징의 석유 공업부(석유화학공업부)에서 전기 공정원(엔지니어)으로 근무했다.[54][7]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하고 문화 대혁명 피해자들에 대한 복권 조치를 단행하면서, 주룽지는 1978년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중국 공산당 당적도 되찾았다(1949년 입당으로 처리).[8][7] 이후 그는 중국 사회 과학원 공업 경제 연구소 소장을 잠시 거쳐[7], 1979년 국가 경제 위원회로 옮겨 근무하며 경력을 이어갔다.

2. 3. 복권과 상하이 시절

문화 대혁명 시기 숙청되어 5.7 간부 학교에서 노동 개조를 받았던 주룽지는 1975년 석유 공업부 전기 공정원으로 복귀했다.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정치 개혁이 이루어졌고, 주룽지는 1978년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중국 공산당 당적을 회복했다.[8] 이후 중국 사회 과학원 공업 경제 연구소를 거쳐 1979년 국가경제위원회로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부부장을 역임했다. 1982년 9월에는 제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4년에는 모교인 칭화 대학에 신설된 경제관리학원의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어 17년간 재직하며[9] 문화 대혁명으로 황폐해진 경제학경영학 분야의 재건에 힘썼다. 그는 학장으로서 MIT 등 해외 유수 대학과의 교류를 증진시키기도 했다.[8]

1986년 유럽 경영 포럼에서 중국 대표단을 이끄는 주룽지 (왼쪽에서 두 번째)


1987년 12월, 주룽지는 상하이 당위원회 부서기로 임명되어 중앙에서 상하이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상하이 시장 겸 당서기였던 장쩌민을 보좌하다가, 장쩌민이 당서기에 전념하게 되면서 1988년 4월 상하이 시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상하이 시장으로서 푸둥 신구 개발을 중심으로 대규모 도시 건설과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 "기업이 시장에서 스스로 헤엄치도록 하자"는 연설을 통해 경제 자유화 지지자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14] 부패에 단호히 반대하고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여 "원-찹 주"(One-Chop Zhu, 단칼 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8] 그는 법과 규율을 엄격히 준수하여 가족의 호구 이전 청탁을 거절한 일화로도 유명하다.[8]

1989년 톈안먼 사태가 발생했을 때 상하이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베이징에서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것과 달리, 주룽지는 텔레비전 연설 등을 통해 시민들을 설득하고 상황을 평화적으로 관리했다. 비록 시위대의 기차 탈선 및 방화 사건으로 체포 및 처형된 이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유혈 사태를 피하면서 시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톈안먼 사태 이후 장쩌민이 당 총서기로 영전하면서, 주룽지는 1989년 8월 그의 후임으로 상하이시 당서기로 승진했다. 그는 상하이의 산업 발전을 위한 외자 유치와 부패 단속 등에서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또한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조직하는 데 기여했으며,[10] 1990년에는 중국 시장 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여 리처드 닉슨, 헨리 키신저, 밥 돌, 낸시 펠로시 등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11] 이러한 상하이에서의 성공적인 행정 능력은 덩샤오핑에게 높이 평가받아 이후 중앙 정부로 발탁되는 배경이 되었다.[7]

2. 4. 중앙 정치 무대 진출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상하이시 당서기로 임명된 주룽지는 외자 도입과 공산당 관료들의 부정부패 단속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과와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한 덩샤오핑에 의해 중앙 정치 무대로 발탁되었다.[55][56]

1991년 4월 8일,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에서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되었고,[55][56] 국무원 생산판공실 주임을 겸하며 경제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7] 덩샤오핑은 주룽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제를 안다"고 평가하며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당시 지도부 내에서 "주룽지가 경제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덩샤오핑의 인식은[15] 주룽지가 폭넓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92년 중국 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앙위원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며 권력 핵심부에 진입했다.[55][56] 이는 1990년대 초반 고정 자산 과잉 투자, 통화 공급 과잉, 금융 시장 혼란 등으로 20%가 넘는 인플레이션[16] 등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8] 경제 안정화에 기여한 그의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8][17]

1993년 3월 29일에는 리펑 총리 아래 서열 1위의 국무원 부총리(제1부총리)로 임명되어 경제 정책 전반을 책임지게 되었다.[57] 당시 중국 경제는 급격한 성장과 함께 '경제 과열'과 높은 물가 상승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58] 같은 해 7월, 주룽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구이셴 중국인민은행 행장을 해임하고 스스로 총재직을 겸임했다.[59] 그는 1995년까지 인민은행 총재를 맡으며[14] 통화 공급 제한, 중복 투자 프로젝트 정리,[17] 금리 인하, 세제 개혁,[8] 무분별한 대출 규제 강화 등 강력한 긴축 정책과 개혁 조치를 통해 과열된 경제의 연착륙을 시도했다.[59] 또한 국영 은행의 부실 대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산 관리 회사'를 도입하고 은행 시스템 개혁을 추진했으며, 1994년에는 외국인 전용 화폐였던 외환권을 폐지하기도 했다.[13]

주룽지는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면서도 국가의 전략적 방향 설정과 거시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14] 그의 개혁 목표는 재정 및 금융 시스템을 합리화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비효율적인 국영 기업 부문을 정비하는 것이었다.[23] 이를 위해 미국의 연방 세금 제도를 참고한 '세금 분담제'를 도입하여 중앙 정부의 재정 수입 비중을 크게 늘렸고,[24] 분산된 은행 시스템에 대한 중앙은행의 감독 기능을 강화했다.[24]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기존 체제를 중시하던 리펑 총리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 리펑이 건강 문제로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주룽지는 개혁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18] 다만, 전력 부문과 같이 리펑의 영향력이 강한 분야에서는 개혁이 제한되기도 했다.[50][20]

주룽지의 경제 개혁은 덩샤오핑이 제시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을 구체화하며 중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과 국가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정책들은 인플레이션을 성공적으로 억제하고,[13] 이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등 세계 경제에 편입되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5. 국무원 총리 재임

1998년 3월 17일,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국무원 총리로 선출되었다.[7][58] 이는 이전 부총리 시절 대규모 거시 경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관리한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주룽지는 총리 취임 후 경제 개발 문제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며, 강력한 거시 경제 통제와 긴축 통화 정책을 바탕으로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개발을 추구했다. 또한 중국의 산업 및 농업 부문에 대한 투자를 계속 장려했다.[30]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주룽지는 전년도(1997년) 전국 금융 공작 회의와 중앙 경제 공작 회의에서 제시했던 국유 기업 개혁, 금융 시스템 개혁, 정부 기구 개혁을 '2000년까지 실현해야 할 3대 개혁'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추진했다.[58]

  • 국유 기업 개혁: 민간 부문이 급성장하던 시기에 맞춰 민영화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지속했다.[30] 대규모 국영 기업은 살리고 수천 개의 중소기업과 공장은 폐쇄를 유도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약 4천만 명(전체 노동력의 약 35%)의 노동자가 5년 동안 해고되어 고용, 건강 관리, 연금 등이 보장되던 '철밥통'을 잃게 되는 고통을 겪었다.[34][35] 주룽지는 살아남은 국영 기업에 대해 관리자의 급여를 성과와 시장 경쟁력에 연동시키고, 수익성과 생산성을 관리자 및 임원 승진의 주요 기준으로 삼도록 했다.[25] 2001년 전인대 보고에서 주룽지는 국유 기업 개혁 목표가 기본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평가했지만,[60] 대량 실업 문제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 금융 시스템 개혁: 부총리 시절부터 시작된 은행 부문 개혁을 이어갔다. 국영 은행들이 안고 있던 막대한 부실 대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산 관리 회사'를 설립하여 부실 채권을 분리하고, 정부 채권을 통해 은행 자본을 확충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24][25]
  • 정부 기구 개혁: 국무원의 성(省)과 청(廳)을 재편하고, 중앙 정부 관료 기구의 규모를 임기 말까지 절반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49] 또한 부패 문제에 대해 엄격하게 대처했으며, 위안화 밀수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60] 다만 중앙 정부와 달리 지방의 관료 기구는 오히려 확대되어, 일부 지방 정부와 농민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문제도 발생했다.[49]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응하여 국가 관료 기구를 대폭 축소하고,[30] 엄격한 자본 통제를 유지하며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31] 특히 국제 사회의 일부 요구에도 불구하고 위안화 평가 절하를 단호히 거부했으며,[32] 위기 이후에는 유해한 시장 투기를 방지하기 위한 국제 금융 시장 개선을 주장했다.[31]

경제 개방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여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이를 개혁 추진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60]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2001년 11월, 중국의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60]

주룽지의 총리 임기 말, 중국 경제는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2000년 전 세계 외국인 직접 투자(FDI)가 절반으로 감소했을 때 중국으로의 FDI 유입은 10% 증가했으며, 2002년에는 22.6%나 증가했다. 같은 해 세계 무역이 1% 성장에 그친 반면, 중국의 무역 규모는 18% 급증하며 수출이 수입을 크게 앞질렀다.[26]

이 외에도 주택 시스템에 제한적인 개혁을 도입하여 주민들이 처음으로 보조금을 받는 가격으로 자신의 아파트를 소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으며,[8] 베이징우다오커우왕징 지역 등에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을 위한 문화, 교육, 여가, 비즈니스 생활권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72] 또한 2000년에는 중국 지도자들과 국내외 전문가들이 정책을 논의하는 중국 발전 포럼을 창설했다.[33]

양안 관계에 있어서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장쩌민 당시 총서기의 입장을 재확인하며 일국양제 원칙 하에 대만의 군대 보유를 허용하고 통일 시 대만 지도자에게 부주석직을 제안할 수 있다는 유연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27] 그러나 2000년 대만 총통 선거를 앞두고는 대만 독립 성향의 민주진보당에 투표하지 말 것을 경고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28] 퇴임을 앞둔 200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고별 연설에서는 양안 관계 개선을 위해 경제, 교통, 문화 교류를 확대하고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이 연설에서 실수로 중국과 대만을 '양국(两國)'으로 언급했다가 즉시 '양측(兩岸)'으로 정정하는 해프닝도 있었다.[29]

2001년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나기도 했다.

2002년 11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났고, 2003년 3월 국무원 총리 임기를 마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61]

2. 6. 은퇴 이후

주룽지는 2002년 11월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2003년 3월 국무원 총리 직에서 각각 물러났으며, 후임 총리는 원자바오였다.[30]

퇴임 후 주룽지는 중국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39] 모교인 칭화 대학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칭화대학교 경제관리학원 고문 위원회의 명예 주석을 맡고 있다.[61] 그는 대학 행사나 특별한 행사에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2014년에는 칭화대학교 경제관리학원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드물게 공개 서한을 썼지만 건강 문제로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다. 이 서한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중국의 빈곤 지역과 농촌 지역을 방문하여 대다수 중국인들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도록 권장했다. 2007년 6월 5일에는 황쥐 전 부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40]

퇴임 후 주룽지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고, 그를 주제로 한 책도 다수 출간되었다. 첫 번째 저서인 『주룽지, 언론을 만나다』는 외국 및 중국 언론인, 관계자와의 연설 및 인터뷰 모음집으로 2009년에 출간되었으며, 2011년에는 영어 번역본이 나왔다.[30] 두 번째 저서인 『주룽지의 언론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의 연설, 기사, 서한을 4권으로 묶은 것으로 2011년에 출간되었고, 2013년에는 『주룽지 기록: 개혁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번역 및 출판되었다. 2013년 말까지 그의 저서들은 6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41] 헨리 키신저는 그의 책 영어 번역본이 중미 관계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중국 문화와 정치에 대한 국제적 이해를 증진했다고 평가했다.[42] 주룽지에 대한 한 서방 전기에서는 다른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이 그의 개혁을 연구하고 따르도록 권장하며, 그의 실질적인 경제 이론이 미친 영향을 케인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주룽지는 자신의 연설과 인터뷰 모음집을 출판했지만, 그의 딸은 그가 회고록을 쓰는 데는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48]

주룽지는 퇴임 후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공공 자선 활동에 투자했다. 2013년과 2014년에만 그는 자신의 책 인세 수입으로 알려진 4000만위안(약 650만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이 기부금은 가난한 농촌 지역의 교육을 지원하는 자선 재단에 전달되었으며, 은퇴한 중국 정치인으로서는 이례적인 액수로 평가받았다. 일부 논평가들은 이러한 그의 행보를 중국의 초대 총리인 저우언라이의 인품에 비견하기도 했다.

2022년 3월, 『월스트리트 저널』은 주룽지가 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인 시진핑이 지도력 승계 시스템을 깨고 이례적으로 세 번째 임기를 연임하려는 것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고 보도했다.[43][62] 같은 해 10월 16일에 개막한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 대표 대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고령 때문이라는 시각과 함께 시진핑 정권과의 갈등이 원인이라는 추측도 제기되었다.[63][64]

3. 경제 정책과 개혁

주룽지는 부패, 연고주의, 무능함에 대해 관용을 보이지 않는 강력하고 엄격한 행정가로 명성을 쌓았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추진한 경제 정책과 개혁 과정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베이징 관료 사회에서는 그의 강직하고 투명한 업무 처리 방식과 기존의 관행을 깨는 모습 때문에 "미친 주" 또는 "주 보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8]

그는 단순히 부패 공무원을 적발하는 것을 넘어, 정부 시스템 자체를 보다 규제되고 투명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를 위해 독립적인 규제 위원회의 역할과 권한을 강화하고, 비대해진 정부 조직을 축소했으며, 외부 전문가에게 정부 직책을 개방했다. 또한 능력에 기반한 공무원 채용 및 승진 시스템을 개혁하고, 법치주의를 강화하여 행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려 했다.[50] 과거 연공서열과 인맥에 의존하던 관료 임용 방식을 개선하여 유능한 인재를 유치하고 유지하는 데 힘썼으며,[50] 실제로 학계와 민간 부문의 많은 경제 전문가와 기술 관료를 정부 고문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8]

특히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공직 사회의 부패 척결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36] 그는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연간 수천 통의 민원 편지를 직접 읽었다고 전해진다.[8] 또한 중국 인민 해방군이 막대한 이익을 얻던 사업에서 손을 떼도록 요구하고, 공무원의 영리 활동 참여를 금지했다. 지방 지도자들이 사업가와 결탁하여 국고를 횡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더욱 엄격한 감독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했다.[36]

주룽지의 강력한 반부패 조사는 여러 대규모 비리 사건을 드러냈다. 6년간 곡물 구매에 배정된 258억위안 중 최소 100억위안 가량이 호텔, 고급 아파트 건설 및 투기성 사업 투자 등으로 유용된 정황을 포착하고 조사를 시작했으며,[37] 2001년에는 푸젠 성의 최고위 관리들이 연루된 대규모 밀수 조직 사건을 적발하여 관련자 다수를 처벌했다.[37] 그는 부실 공사 현장을 보고 "개 같은 건설 프로젝트"라며 격노하기도 했으며, 부패와의 전쟁에 대한 의지를 "나는 부패한 자들을 위해 100개의 관을 준비할 것이고, 나 자신을 위해 하나를 준비할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37] 이러한 반부패 노력은 시장 경제 원칙을 확대하고 기업 활동에 대한 법적 보호를 강화하며 투명한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그의 경제 개혁 방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37]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2001년 가입을 실현했다.[8] 이는 중국 경제의 국제화를 촉진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국제적인 무역 및 경제 규범 준수를 통해 국내 개혁을 가속화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더불어 농촌 지역에서 지방 관리들이 임의로 각종 수수료를 부과하여 농민들에게 부담을 주는 관행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38]

3. 1. 사회주의 시장경제 추진

주룽지는 시장 경제를 옹호하면서도 시장의 전략적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 국가의 역할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14] 그는 경제에 대한 포괄적인 국가 계획의 효능에는 다소 회의적이었으나,[22] 간접적인 경제 수단과 중앙 정부의 지침 모두를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13] 그의 이러한 개혁 노선은 덩샤오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덩샤오핑은 주룽지가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제를 안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당시 지도부 중 경제를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로 꼽기도 했다.[15] 덩샤오핑과 주룽지는 단순한 경제 성장을 넘어,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발전을 이루는 미래를 구상했다.[23]

주룽지가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된 1991년 이후 중국 경제는 1990년대 초반 불황을 겪으며 고정 자산 과잉 투자, 과도한 통화 공급, 금융 시장 혼란 등의 문제에 직면했고, 인플레이션율은 20%를 넘어서기도 했다.[8][16] 부총리 겸 중국 인민은행 총재로서 주룽지는 통화 공급 제한, 중복되는 저기술 산업 프로젝트 정리, 위안화 평가 절하, 금리 인하, 세금 제도 개혁, 운송·농업·에너지 부문에 대한 국가 투자 확대 등 다각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경제 안정화를 도모했다.[17][8] 그의 노력 덕분에 중국 경제는 급격한 물가 변동 없이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이는 1992년 그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8][17] 그는 인플레이션을 성공적으로 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

주룽지는 재정 및 금융 시스템 개혁에도 집중했다. 그는 먼저 분산되어 있던 국가의 세수를 중앙 정부로 집중시키기 위해 직접 각 성을 순회하며 미국 연방 세금 제도를 모델로 한 새로운 "세금 분담" 제도를 도입하도록 설득했다. 이 제도는 각 성의 수입을 일단 중앙 정부로 보낸 뒤 일부를 성에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시행 후 중앙 정부의 재정 수입 비중이 크게 늘어나 예산 균형을 맞추는 데 기여했다.[24] 금융 부문에서는 중앙은행의 감독 아래 국책 은행과 국영 상업 은행을 중심으로 다양한 금융 기관이 공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14] 이를 위해 수출입 은행 설립, 전국 은행 간 대출 시스템 구축, 단기 채권 시장 육성, 시장 환율에 기반한 위안화 환율 메커니즘 도입 등을 제안했다.[14] 또한 무분별한 대출을 막기 위해 감독을 강화하고, 국영 은행들이 안고 있던 막대한 부실 대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산 관리 회사"를 도입했으며, 대형 은행을 민영화하여 시장 경쟁에 노출시키려 시도했다.[25] 1994년에는 외국인을 위한 별도의 통화 시스템이었던 외환 증서를 폐지했다.[13]

국영 기업 개혁 역시 주룽지가 추진한 핵심 과제였다.[23] 그는 비효율적인 국영 기업을 정리하고 경쟁력 있는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많은 중소 국영 기업과 공장을 폐쇄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 문제는 민간 부문의 성장을 통해 흡수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25] 이 개혁으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평생 고용, 의료, 연금을 보장받던 소위 '철밥통'을 잃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25] 대신 국영 기업 관리자들의 급여와 승진은 철저히 성과와 시장 경쟁력, 수익성과 생산성을 기준으로 결정되도록 시스템을 바꾸었다.[25] 주룽지의 목표는 국영 부문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을 높여 덩샤오핑이 제시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는 것이었다.[26] 총리 재임 초기에는 민간 부문의 급속한 성장에 발맞춰 민영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도 했다.[30]

이러한 개혁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당시 총리였던 리펑은 주룽지의 개혁 방향에 비판적이었으며, 양측은 초기 2년간 여러 차례 충돌했다. 리펑은 특히 주룽지가 추진하려던 전력 회사에 대한 규제나 정부 감독 강화를 막아서기도 했다.[18][50][20] 그러나 리펑의 건강 문제 등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주룽지는 개혁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할 동력을 얻게 되었다.[18]

주룽지는 중국의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2001년 가입을 실현했다.[8] 그는 WTO 가입이 외국인 직접 투자(FDI)를 유치하고 중국 경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았다. 동시에 WTO 회원국으로서 국제적인 무역, 지식재산권, 환경 규범 등을 준수해야 하는 상황을 통해, 국내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웠던 경제 및 법률 시스템 개혁을 강제하는 효과도 기대했다.

주룽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개혁은 중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과 국제적 위상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FDI 유입이 급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영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약 4천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 등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기도 했다.[34][35] 그는 또한 주민들이 보조금을 받는 가격으로 자신의 아파트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제한적인 주택 개혁을 도입하여 도시 주민들의 생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8]

3. 2. 금융 개혁

1991년 상하이에서의 성공적인 개발 관리 경험을 바탕으로[7] 리펑 총리 아래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되어 중앙 정부에 합류했다. 그는 경제 문제 해결에 집중했으며,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중국 인민은행 총재를 겸임했다.[14] 덩샤오핑은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제를 안다"고 평가하며 그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15]

주룽지가 중앙 정부에 합류했을 때 중국 경제는 1990년대 초반 불황의 여파로 고정 자산 과잉 투자, 과도한 통화 공급, 혼란스러운 금융 시장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인플레이션율은 20%를 넘어서는 상황이었다.[8][16] 부총리 겸 인민은행 총재로서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광범위한 금융 개혁을 추진했다. 주요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거시 경제 안정화: 통화 공급을 제한하고, 중복되는 저기술 산업 프로젝트를 정리했으며,[17] 중국 통화 가치를 절하하고 금리를 인하하는 등 거시 경제 안정을 위한 조치를 시행했다.[8] 이를 통해 중국 경제는 급격한 물가 변동 없이 안정적인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8][17] 인플레이션 감소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3]
  • 금융 시스템 정비:
  • 중앙은행 역할 강화: 1993년 7월 제1차 전국 금융 업무 회의에서 인민은행 총재 자격으로 연설하며, 중앙은행의 감독 아래 국책 은행과 국영 상업 은행을 중심으로 다양한 금융 기관이 공존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는 분산된 은행 시스템을 중앙 정부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으며,[24] 수출입 은행, 전국 은행 간 대출 시스템, 단기 채권 시장, 시장 환율 기반의 위안화 환율 메커니즘 도입 등을 제안했다.[14] 이러한 구상은 이후 중국의 금융 시스템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14]
  • 은행 감독 강화 및 부실 채권 처리: 무분별한 대출을 막기 위해 은행 감독을 강화했다. 또한, 국영 기업에 대한 과도한 대출로 인해 국영 은행들이 안고 있던 막대한 부실 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산 관리 회사'를 설립하여 부실 채권을 분리하고, 정부 채권을 통해 은행 자본을 확충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25]
  • 국영 은행 개혁: 대형 국영 은행을 민영화하고 자유 시장 경쟁에 노출시켜 효율성을 높이려 시도했다.
  • 재정 개혁: 미국 연방 세금 제도를 모델로 한 새로운 '세금 분담' 제도를 도입했다. 각 성(省)을 직접 방문하여 설득했으며, 이 제도를 통해 성의 세수가 중앙 정부로 먼저 귀속된 후 일부가 반환되도록 하여 중앙 정부의 재정 통제력을 크게 강화했다.[24]
  • 외환 제도 개혁: 1994년, 외국인 전용으로 사용되던 외환 증서를 폐지하여 통화 시스템을 단일화했다.[13]


주룽지의 금융 개혁 목표는 단순히 경제 성장을 넘어, 재정 및 금융 시스템을 합리화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며, 국영 기업 부문을 효율화하는 것이었다.[23] 그는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면서도 국가의 전략적 방향 설정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14] 이러한 개혁은 리펑 총리 등 일부 보수 세력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으나,[18][50] 덩샤오핑의 지지와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추진될 수 있었다.[19] 그의 개혁 노력은 중국 경제를 안정시키고 2001년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8]

3. 3. 국유 기업 개혁

주룽지는 덩샤오핑의 지지 아래 중국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며, 그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국영 기업 부문을 간소화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다.[23] 이는 단순히 급성장을 넘어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는 비전의 일부였다.[23][26]

개혁 초기, 주룽지는 부총리로서 1990년대 초반 불황으로 인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국영 은행 부문의 개혁을 시도했는데, 특히 비생산적인 국영 기업에 대한 무분별한 대출로 발생한 막대한 부실 대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부실 대출을 처리할 "자산 관리 회사"를 설립하고, 정부 채권을 통해 은행 자본을 확충하는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24]

1998년 총리로 승진한 후, 주룽지는 국영 기업 개혁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경쟁력 있는 대형 국영 기업은 살리고, 수천 개의 비효율적인 중소 규모 기업과 공장은 폐쇄하는 과감한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25] 이 과정에서 민간 부문의 성장이 실업 문제를 완화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고용, 의료, 연금 등을 보장받던 소위 '철밥통'을 잃게 되면서 대규모 실업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25] 이는 장기적인 경제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동시에 주룽지는 살아남은 국영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관리 시스템을 개혁했다. 관리자들의 급여를 성과와 시장 경쟁력에 연동시키도록 요구했으며, 기업 내 승진 역시 수익성과 생산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도록 했다.[25] 이러한 노력은 국영 부문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을 높여 덩샤오핑이 제시한 새로운 형태의 시장 사회주의, 즉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26] 결과적으로 주룽지의 개혁은 중국의 경제력과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중국 공산당의 통치 기반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6]

다만, 이러한 개혁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리펑 전 총리와 같은 일부 보수 세력은 주룽지의 개혁 방향에 반대했으며, 특히 리펑은 주룽지가 중국 전력 회사에 대한 규제나 정부 감독을 도입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18][50]

3. 4. 대외 개방

주룽지는 중국 경제의 대외 개방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94년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사용되던 병행 통화 시스템인 외환 증서를 폐지하여[13] 외국과의 경제 교류를 원활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중국의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 협상을 주도했으며, 마침내 2001년 중국은 WTO에 가입하여 국내외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8] WTO 가입은 중국이 외국인 투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무역, 지적 재산권, 환경 관리 등 국제적인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주룽지는 WTO 가입이 중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 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웠던 경제 및 법률 시스템 개혁을 외부적인 요인을 통해 강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4. 외교 및 대외 관계

주룽지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실용주의 노선을 바탕으로 중국의 대외 관계를 이끌었다. 특히 톈안먼 사건 이후 악화된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했으며,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정치 및 경제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11][12] 양안 관계에 대해서는 일국양제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초기에는 타이완의 자치권 보장 등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27] 2000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를 앞두고는 타이완 독립 움직임에 대해 강경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등[28]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반적으로 그는 중국의 경제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안정적인 국제 환경 조성에 외교적 노력을 집중했다.

4. 1. 한반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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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양안 관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 회견에서 주룽지는 양안 관계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미국 군대의 영향, 중국 통일 시한, 타이완 방문 의향 등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중국 공산당 중앙 총서기 장쩌민의 발언을 인용하여 중국의 통일 정책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다. 주룽지는 일국양제 원칙을 고수하며, 홍콩처럼 타이완에도 높은 수준의 자치를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타이완이 자체 중화민국 군대를 유지하도록 허용하고 타이완 지도자가 중국 부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유화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27]

그러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타이완에 대한 그의 입장은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0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 당시에는 타이완 유권자들에게 타이완 독립을 추구하는 민주진보당에 투표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친 타이완 독립 세력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라는 강경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28]

이후 그의 태도는 다소 완화되었다. 200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고별 연설에서는 중국 정치인들에게 양안 관계를 논의할 때 더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할 것을 권장하며, 중국 본토와 타이완이 관계 개선을 위해 경제, 교통, 문화적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설 도중 실수로 중국과 타이완을 "두 국가"라고 언급했다가 즉시 "두 측면"으로 정정하는 해프닝도 있었는데, 이는 타이완 언론에 의해 "실수"로 보도되었다.[29]

4. 3. 대미 관계

1990년, 주룽지는 중국 시장 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여 현지 및 국가 정치 및 재계 지도자들과 만나 정치적, 사업적 관계를 유지하고 개선하려 했다. 이는 1989년 톈안먼 광장 시위 진압 이후 중국 고위급 인사가 미국을 방문한 첫 사례였다.[11] 주룽지가 방문 중 만난 관리들 중에는 리처드 닉슨, 헨리 키신저, 밥 돌, 낸시 펠로시 등이 있었다.[12] 방문 중 주룽지는 중국어와 영어로 즉흥 연설을 했으며, 그의 솔직함, 개방성, 에너지 및 기술적 배경은 미국 언론인, 정치인 및 기업 지도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2]

그는 대규모의 철저한 법적, 경제적 개혁과 중국 정부를 보다 효율적이고 투명하게 만들기 위한 정치 개혁을 시행하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90년 미국 방문 중 기자 회견에서 주룽지는 "당신들은 당신들의 민주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우리들의 민주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11] 서방 언론인들이 그에게 중국의 고르바초프인지 묻자, 그는 "아니요, 나는 중국의 주룽지입니다"라고 답했다.[13]

총리 재임 시절, 주룽지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 회견에서 양안 관계와 관련된 세 가지 질문(미군의 영향, 중국 통일 시한, 타이완 방문 의사)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 총서기였던 장쩌민의 이전 발언을 언급하며 일국양제 원칙을 고수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통일 시 타이완이 자체 군대를 유지하도록 허용하고, 타이완 지도자가 중국 부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덧붙였다.[27]

5. 평가 및 유산

주룽지는 강력하고 엄격한 행정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부패, 연고주의, 무능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베이징에서는 그의 강한 추진력과 관료주의 타파 성향 때문에 '주 보스(朱老板)'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8] 그의 대담한 경제 개혁과 단호한 리더십, 그리고 명나라 황제의 후손이라는 점 때문에 언론에서는 그를 '경제 차르(Economic Czar)'라고 칭하기도 했다.[65][66] 그는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하고 형식주의를 싫어했으며, 정치적 반발을 감수하고서라도 필요한 개혁을 추진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주룽지는 공무원 부패 척결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36] 그는 "나는 부패한 자들을 위해 100개의 관을 준비할 것이고, 나 자신을 위해 하나를 준비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부패와의 전쟁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37] 이를 위해 중국 인민 해방군의 영리 활동 금지, 공무원의 사업 참여 금지, 지방 정부의 부정부패 방지를 위한 감독 강화 등을 추진했다.[36] 또한, 기존의 연공서열과 정치적 인맥 중심의 관료제를 개혁하여 능력 중심의 채용 및 승진 시스템을 도입하고, 외부 전문가를 적극 영입하여 정부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고자 했다.[50][8]

주룽지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중국의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이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은 국내외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8] 주룽지는 이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중국 내 경제 및 법률 시스템 개혁을 가속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 특히 국유 기업 민영화는 논란을 낳기도 했다. 국유 기업 매각 과정에서 공산당 간부나 태자당 등 특정 계층에게 특혜를 주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68] 이 과정에서 약 4천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으나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기존 국유 기업이 제공하던 의료, 주택 등 복지 혜택이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했다.[34][35][68] 또한 국유 기업에 높은 세율을 부과하고 외자 기업에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정책이 국유 기업의 경영난을 가중시켜 헐값 매각을 유도했으며, 결과적으로 빈부 격차 심화와 대량 실업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68] 일부에서는 그를 "중국 내 만연한 부패와 환경 파괴를 초래한 장본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67] 경제 개혁을 강력히 추진한 반면,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 민주화 운동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주룽지는 2003년 퇴임하면서 후임자인 원자바오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언급하며 자신의 임기 내에 모든 개혁을 완수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49] 퇴임 후 후진타오 정부 시기에 국유 기업의 역할이 다시 강화되는 등 그의 개혁 중 일부는 후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은 지속되어, 그의 측근으로 알려진 왕치산이 2012년 이후 시진핑 주도의 반부패 운동을 이끌었으며, 주룽지는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52]

퇴임 후 주룽지는 저서 출간을 통해 얻은 인세를 기부하는 등 공익 활동에도 힘썼다. 2013년과 2014년에만 약 4000만위안 (당시 약 650만달러)를 빈곤 농촌 지역 교육 지원 재단에 기부했는데, 이는 은퇴한 중국 고위 지도자로서는 이례적인 행보로 평가받았다. 2022년에는 월스트리트 저널을 통해 시진핑 총서기의 3연임 추진에 대해 지도부 승계 관례를 깨는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43]

국제 사회에서 주룽지는 지적 능력, 추진력, 날카로움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능숙한 영어 구사 능력과 유머 감각으로도 주목받았다.[8] 전임자인 리펑과 비교했을 때 국내외적으로 더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 경제 운용 능력 면에서도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49]

2001년, 주룽지는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및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만났다.

6. 기타

주룽지와 부인 라오안(1956년)


주룽지는 훌륭한 연설가로 인정받았으며, 영어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경력 동안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종종 원고 없이 공개 연설을 했으며, 그렇게 할 때 그의 연설은 재미있고 극적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는 문학을 즐기며, 퇴임 후에는 재임 중에는 읽을 시간이 없었던 책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는 두 줄의 바이올린과 유사한 악기인 얼후를 연주한다. 그는 경극을 좋아하며, 한때 공연에서 배우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44]

그의 부인 라오안은 한때 중국 국제 엔지니어링 및 컨설팅 이사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녀와 주는 후난 제1성 중학교와 칭화대학교에서 함께 학교를 다녔다. 그들은 아들과 딸, 두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 주윈라이는 1957년에 태어났다.[45] 그는 한때 중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투자 은행 중 하나인 중국 국제 금융 공사(China International Capital Corp.)의 사장 겸 최고 경영자였다.[46] 그의 딸 주옌라이는 1956년에 태어났다.[47] 그녀는 현재 중국은행(홍콩)의 최고 경영자 보좌관이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이다.[4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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