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탐진 안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탐진 안씨는 전라남도 강진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시대 군부판서 등을 역임한 안우이며, 안지는 세종 때 용비어천가를 지었고, 안의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다. 주요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안희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등이 있으며, 과거 급제자 21명을 배출했다. 2015년에는 강진 안씨와 탐진 안씨를 합하여 약 26,098명이 있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탐진 안씨 - 안철상
    안철상은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2018년부터 2024년까지 대법관을 역임하며 법원행정처장 겸임 및 대법원장 권한대행을 맡았고, 현재는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법부 독립과 민주적 사법 운영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탐진 안씨 - 안민석
    안민석은 서울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교수를 지낸 5선 국회의원으로, 2004년 열린우리당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다양한 당적과 상임위 활동을 했으며, 국정조사 참여, 남북 체육 회담 대표 등의 활동과 기부금품법 위반 등의 법적 판결을 받은 경력이 있다.
탐진 안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탐진 안씨
기본 정보
관향전라남도 강진군
시조안원린
집성촌
주요 인물
통계
2015년 인구26,098명

2. 역사

조선 세종 때 안지(安止)가 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공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1]

중종 때 안우(遇)는 효행으로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안기종은 유곡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며, 안의(義)는 내장산으로 실록을 옮겨 보관하였다. 고종 때 안찬은 시문으로 명성을 떨쳤다.[1]

2. 1. 시조 및 초기 역사

《만성보(萬姓譜)》와 1845년 탐진 안씨 족보 을사보 서문에는 탐진 안씨의 시조가 '''안우(安祐)'''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안우'''(安祐, ? ~ 1362년)는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로서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였고, 전리판서·지추밀원사를 거쳐 지문하성사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기철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홍건적이 침입해 의주·정주 등지가 함락되자 서북면부원수로서 적을 대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 고선주에 이르러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추충절의정란공신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를 거쳐, 상원수가 되었고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영변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가 되었다.[1]

현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조 안원린(安元璘)은 고려 공민왕 때 순흥군에 봉해진 문숙공 안목(安牧)의 셋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 검교중추원사를 지내고 탐진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안원린이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문학 등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등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이 아니며, 순흥 안씨와 계보를 짜맞추기 위해 만든 가상인물이기 때문에 순흥 안씨의 분파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안사종(安士宗)의 아들 안지(安止)가 14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찬진하였으며, 공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고 중추원영사·봉조하에 이르렀다.

2. 2. 조선 시대

《만성보(萬姓譜)》와 1845년 탐진 안씨 족보 을사보 서문에는 탐진 안씨의 시조가 안우(安祐)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안우(安祐, ? ~ 1362년)는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로서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였고, 전리판서·지추밀원사를 거쳐 지문하성사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홍건적이 침입해 의주·정주 등지가 함락되자 서북면부원수로서 적을 대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 고선주에 이르러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추충절의정란공신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를 거쳐, 상원수가 되었고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영변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가 되었다.[1]

안사종의 아들 안지(安止)가 14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찬진하였으며, 공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고 중추원영사·봉조하에 이르렀다.

이밖에 중종 때 효행으로 이름난 안우(遇), 임진왜란 때 유곡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안기종, 임진왜란 때 어용(御容)과 실록(實錄)을 정읍 내장산에 봉안한 안의(義), 고종 때 시문으로 명성을 날린 안찬 등이 있다.

3. 본관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탐진으로 고쳐서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시대에는 영암에 속하였다가 장흥으로 이속시켰다.[1] 1417년(조선 태종 17)에 병마도절제사영을 도강현(道康縣) 소재지에 옮기고 두 현을 합쳐 강진으로 개칭하였고 치소는 탐진으로 하였다.[1] 1429년(세종 11)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는데 1475년(성종 6)에 탐진으로 돌아갔다.[1]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탐진군으로 승격되어 나주부의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백도면(白道面) 일부를 해남군에 이속하였고, 가우도(加牛島)를 합쳤으며, 1936년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다.[1]

4. 주요 인물

안지14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공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중추원영사, 봉조하 등을 역임하였다.[2]

그 외에 중종 때 효행으로 이름난 안우(遇), 임진왜란 때 유곡싸움에서 공을 세운 안기종, 임진왜란실록정읍 내장산에 봉안한 안의, 고종 때 시문으로 명성을 날린 안찬(鑽) 등이 있다.

4. 1. 고려

《만성보(萬姓譜)》와 1845년 탐진 안씨 족보 을사보 서문에는 탐진 안씨의 시조가 '''안우'''(安祐)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안우'''(安祐, ? ~ 1362년)는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로서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였고, 전리판서·지추밀원사를 거쳐 지문하성사에 임명되었다.[1] 1357년 참지중서정사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를 겸임하였다.[1] 이듬해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1]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부원수로서 적을 대파하였고,[1] 1359년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가 고선주에서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추충절의정란공신이 되었다.[1] 이어 참지정사를 거쳐 상원수가 되었고,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영변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1]

현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조 안원린(安元璘)은 고려 공민왕 때 순흥군에 봉해진 문숙공 안목의 셋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 검교중추원사를 지내고 탐진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안원린이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문학 등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등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이 아니며, 순흥 안씨와 계보를 짜맞추기 위해 만든 가상인물이기 때문에 순흥 안씨의 분파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4. 2. 조선


  • '''안우'''(安祐, ? ~ 1362년) :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로서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고, 전리판서·지추밀원사를 거쳐 지문하성사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기철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부원수로서 적을 대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 고선주에 이르러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추충절의정란공신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를 거쳐, 상원수가 되었고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영변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가 되었다.[1]
  • '''안지'''(安止, 1384년1464년) :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 1416년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의 수찬·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45년(세종 27) 공조참판으로 권제·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집현전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필의 일로 고신을 환수당하였다. 1455년(세조 1)에 소환되어 지중추원사에 복관이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에 올랐다.[2]
  • '''안의'''(安義, 1529년 ~ 1596년) : 자는 의숙(宜叔), 호는 물재(勿齋). 전라도 태인 출신. 병조판서 안사종(士宗)의 후손이며, 이항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손홍록과 함께 의곡계운장이 되어 곡식과 포목을 행재소로 수송하였다. 그 해 7월 왜장 고바야카와전주를 공격하자 경기전참봉 오희길·손홍록과 함께 경기전을 지켰고, 태조의 수용과 제기, 사고의 역대실록과 전적을 정읍내장산용굴암에 옮겨 보존하였다. 1593년 행재소에 나아가 중흥의 6책을 아뢰고 별제를 제수받았다. 전라도 태인의 남천사에 제향되었다.
  • '''안기종'''(安起宗, 1556년 ~ 1633년)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이끌고 홍의장군 곽재우의 휘하로 들어가서 유곡·영천·화왕산성 등지에서 적을 무찔러 많은 전공을 세웠다.
  • '''안몽상'''(安夢祥, ? ~ 1637년) :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삼학사와 더불어 강화군영에 파총으로 있었을 때 갑곶진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조정에서 병조참의에 추증하였다가 다시 병조판서로 증봉하였다.
  • '''안효제'''(安孝濟, 1850년 ~ 1912년) : 안기종의 후손.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84년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의복제도를 변경하는 영이 내려지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887년 성균관전적으로 다시 등용되어 지평을 거쳐, 1889년 정언이 되었다. 그때 관황녀가 고종의 총애를 받아 진령군에 봉해지는 한편, 위복을 전단하자, 그녀를 벨 것을 상소하여 고종의 분노를 사서 추자도에 귀양을 갔다. 1894년 임자도로 옮겨진 뒤 곧 귀양이 풀리고 홍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흥해군수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어 치적을 올렸다. 1895년 복제가 개정되어 검은 옷을 입으라는 영이 내려지자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8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왕후폐위조칙이 내려지자 명성황후의 복위를 건의하였고, 단발령을 적극 반대하였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하자 산중에 들어갔고, 그해 11월 일제가 이른바 은사금을 지급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창녕경찰서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뒤에도 일제에 항거하고 또 투옥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안희제''' : 독립운동가
  • '''안준상''' : 제헌 국회의원
  • '''안호상''' : 독립운동가, 초대 문교부 장관
  • '''안경수''' : 제5대 인천대학교 총장
  • '''안철상'''(安哲相) : 대법관
  • '''안민석''' : 제17·18·19·20대 국회의원

4. 3. 근현대


  • 안효제(安孝濟, 1850년 ~ 1912년) : 안기종(安起宗)의 후손이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84년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의복 제도 변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1887년 성균관전적으로 등용되어 지평, 정언을 역임했다. 1889년 관황녀(關皇女)의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추자도에 유배되었다. 1894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같은 해 흥해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895년 복제 개정에 반대하여 사임하고, 민비 시해 후 민비 복위를 건의하고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1910년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하자 은사금을 거부하여 투옥되었고, 이후에도 일제에 항거하다 투옥되었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안희제 : 독립운동가
  • 안준상 : 제헌 국회의원
  • 안호상 : 독립운동가, 초대 문교부 장관
  • 안경수 : 제5대 인천대학교 총장
  • 안철상(安哲相) : 대법관
  • 안민석 : 제17·18·19·20대 국회의원

5. 과거 급제자

탐진 안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6명, 무과 급제자 5명, 생원·진사 10명을 배출하였다.[2]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2]
문과무과생원시진사시
안여지(安汝止)안경천(安敬天)안극가(安克家)안여지(安汝止)
안중의(安仲毅)안봉서(安鳳瑞)안선(安璇)안정휘(安廷輝)
안지(安止)안시형(安時亨)안성수(安成壽)안형(安炯)
안홍기(安鴻起)안신(安紳)안신로(安莘老)
안효제(安孝濟)안철(安喆)안찬(安鑽)
안택수(安澤壽)
안효손(安孝孫)


6. 인구

耽津 安氏중국어는 1985년에는 15,948명, 2000년에는 23,281명이었다. 2015년에는 강진 안씨 15,585명, 탐진 안씨 10,513명을 합쳐 총 26,098명이다.[1] 현대에 순흥 안씨로 합본하여 탐진군파라고 참칭한 인구까지 합하면 더 많다.[1]

탐진 안씨 인구[1]
연도강진 안씨탐진 안씨합계
1985년1,429가구, 5,925명2,399가구, 10,023명15,948명
2000년3,764가구, 12,248명3,558가구, 11,033명23,281명
2015년15,585명10,513명26,098명


참조

[1] 고문헌 『高麗史』 卷 一百十三, 列傳 二十六 https://terms.naver.[...]
[2] 간행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