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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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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팍스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평화의 여신으로, 전쟁의 부재보다는 로마의 우월성에 대한 복종을 의미했다. 초기에는 그리스의 에이레네와 유사하게 숭배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팍스 로마나라는 정치적 슬로건과 결합하여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했다. 팍스는 주화, 조각, 건축물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 묘사되었으며, 특히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농업의 회복과 풍요를 나타내는 이미지와 함께 묘사되었다. 로마 제국 말기에는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숭배가 쇠퇴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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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나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혜, 전략적 전투, 공예의 여신이자 아테네의 수호신으로, 제우스의 머리에서 탄생했으며 그리스 문화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예술과 문학에서 상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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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신화)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팍스
로마자 표기Pax
그리스어 대응에이레네
신화 분류로마
상징케뤼케이온
코르누코피아
곡물
올리브 가지
거주지로마
관장 영역평화의 여신
부모유피테르와 정의
로마 신화 속 팍스
역할평화의 구현
숭배팍스 여신은 로마에서 중요한 숭배 대상이었으며, 특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더욱 중요해졌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 로마 제국의 평화를 상징하기 위해 팍스 여신의 신전을 건립하였다.
팍스 여신의 상징
상징물팍스는 보통 올리브 가지, 코르누코피아 (풍요의 뿔), 그리고 홀과 함께 묘사된다. 이러한 상징물들은 평화, 번영, 그리고 권위를 나타낸다.
팍스 여신과 관련된 건축물
아라 파키스 아우구스타에아라 파키스 아우구스타에 (Ara Pacis Augustae)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운 평화의 제단으로, 팍스 여신을 기리는 중요한 장소였다. 이곳에는 팍스 여신의 이미지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나타내는 다양한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다.
팍스 신전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에 팍스 신전을 지었다. 이 신전은 로마 제국이 누렸던 평화의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관련 장소파블롭스크 궁전 정원
참고 문헌
참고 자료평화의 비전: 아시아와 서양
새로운 팍스 아우구스타 숭배
아라 파키스 아우구스타에의 팍스 아우구스타와 호라이
로마 아라 파키스 아우구스타에
제국 주화 학술 설명
추가 정보팍스 로마나

2. 역사

팍스 숭배는 로마 제국 초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팍스를 통해 자신의 통치를 안정시키고, 공화정 몰락과 관련된 이전 수년간의 내전과 혼란이 끝났으며, 자신의 통치가 황폐해진 제국에 평화와 방향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백성에게 알리고자 했다.[8] 팍스는 처음에는 아이레이네처럼 카두케우스를 들고 나타났으며,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위촉한 평화의 제단이나 당시의 주화에서 볼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팍스가 실제 여신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슬로건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8]

안토니니아누스 뒷면에 새겨진 팍스, 막시미아누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대교황이 된 것처럼 종교적 행사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강조했다. 그가 건설한 평화의 제단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로마 시민들에게 평화를 상징했고, 고대 루시타니아의 팍스 율리아가 팍스 아우구스타로 개명된 것처럼 일부 식민지는 여신과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따서 개명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를 평화의 선구자로 묘사하는 그의 흉상이 앞면에 새겨진 주화가 식민지에서 유통되었다.[8]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은 팍스 개념을 계속 강조했고, 팍스의 이미지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이르러 날개 달린 모습으로 점차 변화했다.[6]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플라비우스 왕조를 세우고 네 황제의 해의 내전과 불안정을 종식시킨 후, 팍스 숭배를 계속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서기 75년에 팍스 여신을 기리는 평화의 신전(Templum Pacis)을 건설했고, 포룸 파키스 근처의 야누스 사원(Janus Quadrifrons) 건설에서 볼 수 있듯이 야누스 신과 팍스 여신을 계속 연결시켰다. 야누스 신전(Temple of Janus)의 문이 닫히는 것은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시작을 의미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초기 몇 년 동안 행했던 일이기도 했다.[3]

로마 제국이 발전하고 로마의 평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복된 백성들은 로마 사회에 통합되었다. 노예들은 해방되었고, 평화로운 백성들에게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반란과 해적행위는 감소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 제국은 통합되고 안정되었다.[7] 로마 시민들은 점차 폭력성이 줄어들고, 군단 복무 의지가 약해졌으며, 황제에게 더 순종적으로 변했다.[7] 이는 황제와 군단과 연결되었던 전통적인 신들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7] 새로운 영적 지도자는 기독교에서 찾게 되었다. 로마의 평화는 기독교의 평화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미쳤고, 평화의 상징이었던 팍스는 예수 그리스도로 대체되었다.

2. 1. 초기 묘사와 그리스의 영향

초기 로마의 종교와 신화는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3] 정복, 힘, 실용주의와 같은 로마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마르스와 유노 같은 고대 그리스 신들은 로마 왕국과 초기 로마 공화정 시대에 일찍부터 받아들여졌다.[7]

팍스는 로마 철학과 거의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초기 공화정 시대에는 비교적 인지도가 낮은 신이었다.[2] 그러나 이 시기에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청동기 시대 초기부터 팍스에 해당하는 에이레네를 숭배했으며, 아테네 제국의 부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에 그 숭배가 절정에 달했다.[1]

바인스톡의 설명에 따르면, 로마의 평화 개념과 '팍스(pax)'라는 단어는 'pacisci'에서 유래했는데, 오늘날처럼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평화보다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다른 세력과의 항복이나 동맹으로 이어지는 협정에 가까운 의미였다. 평화는 로마의 우월성에 대한 복종으로 간주되었으며,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닌 전쟁의 결과였다. 정복은 평화로 이어졌다.[8]

2. 2. 팍스 로마나와 초기 제국

팍스 숭배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로마 제국 초기 제국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팍스를 통해 자신의 통치를 안정시키고, 공화정 몰락과 관련된 이전 수년간의 내전과 혼란이 끝났으며, 자신의 통치가 황폐해진 제국에 평화와 방향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백성에게 알리고자 했다.[8] 팍스는 처음에는 아이레이네처럼 카두케우스를 들고 나타났으며,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위촉한 평화의 제단이나 당시의 주화에서 볼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팍스가 실제 여신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슬로건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내전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제국 시스템을 통해 제국에 번영을 가져다주기 위한 약속이었다.[8]

아우구스투스는 대교황이 된 것처럼 종교적 행사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강조했다. 그가 건설한 평화의 제단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로마 시민들에게 평화를 상징했고, 고대 루시타니아의 팍스 율리아가 팍스 아우구스타로 개명된 것처럼 일부 식민지는 여신과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따서 개명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를 평화의 선구자로 묘사하는 그의 흉상이 앞면에 새겨진 주화가 식민지에서 유통되었다.[8] 아우구스투스는 스페인갈리아와 같이 속주에서 황제 숭배를 했던 것처럼 팍스 숭배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다.[2] 제국의 메시지는 로마의 신민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제국과 그의 강력한 군대 덕분에 여신 팍스와 그녀의 혜택을 누렸다는 것을 전달했을 수 있다.[2] 황제와 팍스 또는 그에 상응하는 존재를 연결하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폼페이우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거치면서 그리스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에 팍스는 주피터와 같은 강력한 신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황제의 힘과 영향력의 결과였다.[8]

2. 2. 1. 아우구스투스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은 팍스 개념을 계속 강조했고, 팍스의 이미지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이르러 날개 달린 모습으로 점차 변화했다.[6]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플라비우스 왕조를 세우고 네 황제의 해의 내전과 불안정을 종식시킨후, 팍스 숭배를 계속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서기 75년에 팍스 여신을 기리는 평화의 신전(Templum Pacis)을 건설했고, 포룸 파키스 근처의 야누스 사원(Janus Quadrifrons) 건설에서 볼 수 있듯이 야누스 신과 팍스 여신을 계속 연결시켰다. 야누스 신전(Temple of Janus)의 문이 닫히는 것은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시작을 의미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초기 몇 년 동안 행했던 일이기도 했다.[3]

팍스와 평화는 나중에 팍스 아우구스타(Pax Augusta)로 알려진 시대에 아우구스투스와 동의어가 되었고, 후대 학자들은 평화의 시대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불렀다. 즉, 제국의 내분을 제한하고 게르마니아, 파노니아, 이집트 등의 외세의 위협을 물리침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통해 안정과 평화가 달성되었다는 의미이다.

2. 3. 숭배의 쇠퇴와 기독교의 영향

로마 제국이 발전하고 로마의 평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복된 백성들은 로마 사회에 통합되었다. 노예들은 해방되었고, 평화로운 백성들에게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반란과 해적행위는 감소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 제국은 통합되고 안정되었다.[7] 플루타르코스는 "평화에 관한 한, 현재 백성들에게는 지도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와 외국의 모든 전쟁이 우리들 사이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했다.[7]

로마 시민들은 점차 폭력성이 줄어들고, 군단 복무 의지가 약해졌으며, 황제에게 더 순종적으로 변했다.[7] 이는 황제와 군단과 연결되었던 전통적인 신들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7] 새로운 영적 지도자는 기독교에서 찾게 되었다. 로마의 평화는 기독교의 평화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미쳤고, 평화의 상징이었던 팍스는 예수 그리스도로 대체되었다. 4세기 교회 지도자 에우세비우스는 "보편적인 평화 제국이 보편적인 평화 종교를 위해 때맞춰 온 것은 단순한 인간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배려였다"라고 기록했다.[7] 그러나 당시 로마의 평화는 여전히 폭력으로 유지되었고, 파르티아게르마니아의 야만인 영토에 대한 습격은 여전히 필요했다.

기독교는 로마 세계에서 '평화'라는 단어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평화는 비무장화된 개념으로 변형되었다.[9]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4세기와 5세기의 야만족 침입은 팍스 숭배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졌다. 팍스와 예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로마의 평화 기간 동안의 평화 개념은 기독교의 평화 강조와 번영과의 연관성에서 볼 수 있는 평화로운 메시지의 일부를 고무했을 수 있다.[9]

3. 팍스의 예술적 묘사

기원전 44년 이전의 로마 공화정 시대 주화에는 파크스를 암시하는 장면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파크스의 의인화 자체를 보여주거나 이름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기원전 44년 이후의 일이다.[2] 로마 주화에 처음 등장한 평화의 묘사는 기원전 137년의 데나리우스로, 로마와 에피루스 간의 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유통되었다.[2] 이 주화에는 농장 동물들(예: 돼지)에 둘러싸인 여성이 묘사되어 있으며, 앞면에는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두 명의 병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기원전 49년에는 시키누스라는 주화 제작자가 월계관, 카두케우스,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가 새겨진 데나리우스를 발행했는데, 이는 국내 화합과 번영과의 평화 연관성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2] 아우구스투스 치하의 파크스는 평화가 부를 가져온다는 그의 주장을 통해 알려진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전통적인 로마의 이해와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로마에서는 전쟁과 정복을 통해서만 약탈의 형태로 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 파크스의 이미지에는 과일과 곡물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당시 농업의 회복과 풍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특히 내전 이후 제국의 많은 퇴역군인들이 농장에 정착했기 때문이다.[6] 파크스는 쌍둥이와 함께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는 팍스 로마나를 통해 달성된 가정의 화합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가정의 가장이 군단에서 싸우러 가지 않고 집에 있을 때 가정의 생식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2] 아라 파키스의 , 돼지, 이미지는 팍스 로마나 시대의 풍부한 식량과 축산업을 보여주며, 이러한 동물들은 파크스에게 정기적으로 제물로 바쳐졌다.[2] 파크스는 또한 코르누코피아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로마 황금 시대의 풍요와 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숭배 후기에는 카두케우스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매우 드물어졌고, 아우구스투스와 공통된 특징을 더 많이 공유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이는 팍스 아우구스타를 암시하는 것이다.[6]

참조

[1] 서적 Visions of Peace: Asia and The West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02-17
[2] 학술지 The new cult of Pax Augusta 13 BC – AD 14 https://www.research[...] 2015-03-01
[3] 학술지 Pax Augusta and the Horae on the Ara Pacis Augustae 1990-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제공됨. 1월 1일로 가정.
[4] 서적 The Grandmother of Time Harper & Row
[5] 웹사이트 Ara Pacis Augustae in Rome https://romesite.com[...] 2023-01-27
[6] 웹사이트 Imperial Coinage Academic Description http://academic.sun.[...] 2020-05-22 # access-date를 date로 변환
[7] 학술지 The Roman State and Genetic Pacification 2010-07-01
[8] 학술지 Pax and the 'Ara Pacis' 1960-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제공됨. 1월 1일로 가정.
[9] 학술지 Pax, Peace and the New Testament. 1995-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제공됨. 1월 1일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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