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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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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왕국은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되어 기원전 509년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축출로 멸망한 고대 로마의 초기 국가 형태이다. 로마의 건국 신화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가 라티움에 정착하여 알바 롱가를 세우고,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늑대에게 젖을 먹고 자라 로마를 건국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로마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향으로 도시가 성장했다. 로마 왕국은 왕, 원로원, 민회로 구성된 정치 체제를 갖추었으며, 사회는 가족, 씨족, 종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폭정과 루크레티아 강간 사건으로 촉발된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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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마의 고대 구역 성장 지도
고대 로마의 구역
공식 명칭로마 왕국
일반 명칭로마 왕국
국가 표어}}
국가 표어 (번역)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암늑대
역사
존속 기간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 (추정)
건국로마 건국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멸망왕정 타도 (기원전 509년)
이전 국가라티움 문화
알바 롱가
에트루리아 문명
계승 국가로마 공화국
정치
정치 체제선출 군주제 절대적 연방제 군주국
수도로마
사용 언어고대 라틴어
종교로마 종교
국왕로물루스 (기원전 753년–기원전 716년)
누마 폼필리우스 (기원전 715년–기원전 672년)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기원전 672년–기원전 640년)
안쿠스 마르키우스 (기원전 640년–기원전 616년)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기원전 616년–기원전 578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기원전 578년–기원전 534년)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기원전 534년–기원전 509년)
입법부원로원
로마 집회
통화
통화데나리우스
현재 국가
현재 국가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2. 역사



로마는 리비우스가 "도시로 성장할 조건을 두루 갖춘 독특한 터"라고 언급한 곳에 자리 잡았다. 팔라티누스 언덕과 주변 언덕들은 방어에 유리했고, 주변에는 비옥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탈리아반도 중부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티베리스강은 수운에 유리하고 강 중간의 섬 덕분에 다리를 놓기 쉬웠다. 응회암, 온천 침전물, 포석, 화산회 등 건축 자재도 풍부했다.[49]

기원전 750년경, 로마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중심으로 여러 언덕에 촌락을 이루고 살았으며, 주로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했다.[50] 이들은 더 넓은 목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사비니 산지 주민들과 전투를 벌이다 협정을 맺고, 아펜니노산맥의 여름 방목지와 티베리스 강 하류의 겨울 방목지를 함께 이용하고 통혼도 허용했다.[51][52]

기원전 8세기경, 지중해 무역이 발달하면서 에트루리아인, 페니키아인, 그리스인들이 라티움에 진출했고, 로마는 티베리스 강 하류의 염전과 강 상류 지역을 잇는 중개지가 되었다. 기원전 7세기 말에는 수블리키우스 목교(Pons Sublicius)가 건설되어 초기 로마 발전에 기여했다.[53]

에트루리아 세력의 범위.


라티움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은 상업을 통해 문화를 발전시켰다. 에트루리아 문자를 보급하고 금속, 점토, 가죽, 양털 가공 기술과 건축 기술을 전파했다. 라틴인들은 에트루리아의 기술을 받아들여 촌락을 성채 도시로 발전시켰다. 로마 광장 자리에는 기와 지붕을 갖춘 목재 가옥이 들어섰고, 에트루리아의 문화, 종교, 신분 구조가 전래되었다. 에트루리아 지배 하에 토지 개간과 경작 기술이 발달하고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여 인구가 늘었다.[54]

리비우스, 플루타르코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등 고대 기록에 따르면, 초기 로마는 7명의 왕이 다스렸다고 한다. 바로는 이들의 재위 기간을 243년으로 기록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갈리아인들의 침략으로 인한 기록 유실을 이유로 신뢰하지 않는다.[56]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고, 기원전 509년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추방될 때까지 왕정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문자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고, 왕의 존재는 구전으로 전해져 확실한 자료가 부족하다. '로마'라는 이름은 로물루스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로물루스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전통적으로 처음 4명의 왕은 라틴계 또는 사비니계, 나머지 3명은 에트루리아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존재가 의심되며, 인원수도 확실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실제 존재했던 초기 왕들의 업적이 몇몇 왕들의 것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에트루리아계 왕이 4명 이상이었다거나, 타르퀴니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두 왕이 실제로는 한 왕의 업적을 나눈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고학적 증거는 마지막 3명의 왕에 대한 전승이 변형되었을지라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1. 로마의 건국 전승

트로이아 전쟁에서 트로이아가 멸망할 때, 그곳에서 탈출하여 수년간 방랑하다 라티움에 정착한 트로이아의 영웅 아이네아스 이야기에서 로마의 기원에 대한 표준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그곳의 왕 라비누스를 만나 그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했으며, 새 아내를 기려 라비니움이라는 도시를 건설한다. 이후 아들 아스카니우스(혹은 Iulus)는 알바 롱가를 건설했다. 아스카니우스 이후 열두 번째 알바 왕인 프로카에겐 두 아들,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가 있었다. 이들은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투었고, 승리한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를 가두고 그의 딸인 레아 실비아(Rhea silvia, 또는 Ilia)를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여사제로 만든다. 하지만 레아 실비아는 마르스에 의해 잉태되어 쌍둥이 아들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다.

아물리우스는 레아 실비아가 처녀로 지내야 할 여사제임에도 출산한 것에 분노하여 두 쌍둥이를 티베리스 강에 버렸다. 둘은 로마 땅 근처에서 암늑대에게 발견되어 젖을 먹고 자랐다. 그런 뒤 목동 파우스툴루스가 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이 둘은 목동의 아들로 성장하여 주변 양치기의 리더가 되었고, 우연히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누미토르를 만나 혈연임을 알게 된다. 누미토르의 사주로 이들은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누미토르는 알바 롱가의 왕이 된다. 그 뒤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이 두 사람은 그들의 무리와 함께 7개의 언덕에 있는 로마에 정착하여 도시를 세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각각의 언덕 위에 정착하였으나 로물루스가 레무스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죽이고 유일한 통치자가 된다. 로물루스의 통치하에 군대를 조직한 신생 도시 로마는 아내감이 부족해지자 사비니인 마을에서 여자들을 약탈하여 자기네 새 도시의 대를 잇게 된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3세기 말에 시인들과 역사가들이 각각 라틴, 에트루리아, 그리스에서 유래한 여러 다른 이야기들을 독창적으로 잘라내고 짜맞추어 지어낸 것이다.[48]

로마 건국까지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 전쟁에서 패주한 아이네이아스를 비롯한 트로이인들은 그리스의 섬들과 카르타고를 전전한 후 이탈리아 반도의 라티움에 상륙했다. 그리고 아이네이아스는 현지 왕의 딸과 결혼하여 라비니움을 건설했다. 아이네이아스가 죽은 후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30년의 치세 후 라비니움을 떠나 알바 롱가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시간이 흘러 왕의 아들 아물리우스는 형 누미토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다. 누미토르의 아들은 살해되고, 딸 레아 실비아는 처녀가 의무화된 베스타의 무녀가 된다. 어느 날 실비아가 잠든 틈에 로마의 신 마르스가 내려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실비아는 쌍둥이를 낳았지만, 분노한 삼촌인 왕은 쌍둥이를 강에 버렸다. 쌍둥이는 늑대에게, 그 후 양치기에게 길러져 로물루스와 레무스라고 불렸다. 성장하여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형제는 협력하여 큰 삼촌을 물리치고, 추방되었던 할아버지 누미토르 왕의 복위에 협력한다. 형제는 자신들이 자란 언덕으로 돌아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 한다. 그러나 형제 간에 다툼이 일어나 레무스는 살해된다. 이 언덕, 팔라티노 언덕에 세워진 도시가 로마였다. 이후 로마는 영역을 확대하여 일곱 언덕을 도시의 영역으로 삼았다.

2. 2. 역사상의 창건과 발전

로마는 리비우스가 언급한 것처럼 "도시로 성장할 조건을 두루 갖춘 독특한 터"를 갖추고 있었다. 팔라티누스 언덕과 주변 언덕들은 방어에 유리하며, 주변에는 비옥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한가운데 입지한 덕분에 로마는 교통의 요충지가 될 수 있었으며, 교통로로 유용했던 티베리스강은 로마 쪽 강 한복판에 섬이 있어서 강 위에 수월하게 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 또 응회암, 온천 침전물, 포석, 화산회 등 좋은 건축 자재가 널려 있었다.[49] 이런 자연 환경은 도시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750년경 여타 라티움의 촌락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로마 시 터의 여러 언덕에 각자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 원시 정착촌 가운데 팔라티누스 언덕의 마을이 최초의 로마였을 것이다.[50] 로마 기원 전승에서도 알 수 있듯 이들은 주로 목축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더 넓은 목초지를 얻고, 아펜니노산맥의 여름 방목지로 가는 길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않고서는 대놓고 목초지를 찾아다닐 수 없었기에, 이들은 사비니 산지 주민[51] 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협정을 맺어 각자 아펜니노의 여름 방목지와 티베리스 강 하류의 겨울 방목지를 함께 이용하게 되었으며, 서로간의 통혼도 할 수 있게 되었다.[52]

기원전 8세기경 지중해 세계에 무역이 발달하면서 라티움 땅으로 에트루리아인과 페니키아인, 그리스인들이 진출하면서 로마의 지리적 입지가 유리해졌으며, 또 로마는 티베리스 강 하류의 염전(鹽田)과 강 상류 지역을 이어주는 중개지가 되었다. 최초의 다리는 기원전 7세기 말에 건설된 수블리키우스 목교(木橋, Pons Sublicius)였는데, 카피톨리누스 성채의 보호를 받는 이 다리는 여러 도로와 이어져 초기 로마 시가 발달하는데 이바지했다.[53]

라티움에 정착한 (아마 상인들로 보이는) 에트루리아인들은 상업 활동을 통해 이 지역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들은 이전에 그리스에서 도입한 문자(에트루리아 문자)를 라티움에 보급한 것으로 보이며, 에트루리아 장인들은 금속, 점토, 가죽, 양털 가공 등 여러 기술을 전해주었으며, 이들의 건축 기술을 받아들인 라틴인들은 기존의 산지 촌락들을 성채 도시로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 로마에서는 당시에는 습지였던 후대의 로마 광장 자리에 기와 지붕을 갖춘 목재 가옥이 들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곧 에트루리아의 문화, 종교, 신분 구조도 라티움에 전래되었다. 에트루리아의 상인들과 전쟁 제후들, 그리고 아마 몇몇 유복한 라틴인 가문들은 여러 라틴 도시에 귀족정을 수립하여 지배했다.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토지 개간과 우수한 경작 기술, 다양한 품종의 밀, 포도, 과실수의 개량으로 라티움은 농업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인구도 증가했다.[54]

테라코타 장식판 조각, 기원전 6세기 (로마 왕국 및 에트루리아 시대), 로마 포럼에서 발견되어 현재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박물관에 소장

3. 사회

로마 왕국 시대의 사회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적인 구조였다. 왕은 정치, 종교, 사법 등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왕은 원로원과 쿠리아 민회의 자문을 받았지만, 이들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57]

왕정 시대에 원로원과 쿠리아 민회는 자체적으로 회합하여 국정에 관한 문제를 논의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독립적이지 않았다. 왕만이 이들을 소집할 수 있었고, 왕이 제시한 문제만 논의할 수 있었다. 쿠리아 민회는 왕이 제출한 법을 통과시킬 권한이 있었지만, 원로원은 사실상 명예직 자문 기구였다. 원로원은 왕의 행동에 대해 조언할 수 있었지만, 왕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왕이 원로원과 쿠리아 민회의 승인 없이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은 외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다.[57]

왕은 로마의 최고 아우구르로서 로마를 위해 점술을 행할 권리를 가졌으며, 신탁을 통해 알려진 신들의 뜻 없이는 어떤 공적인 업무도 수행될 수 없었다. 백성들은 왕을 자신들과 신들 사이의 중재자로 여겼고, 종교적인 경외심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로마력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종교 의식을 주관하고 하위 종교 직책과 관리들을 임명했다.

왕이 사망하면 로마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원로원으로 넘어가고, 원로원은 새로운 왕을 찾는 책임을 맡았다. 과도기 집정관은 왕위에 적합한 후보자를 찾아 원로원에 제안했고, 원로원이 후보자를 통과시키면 쿠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왕 선출을 주재했다. 후보자가 쿠리아 회의에 제안되면 로마 시민들은 그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었다.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점술을 통해 신의 뜻을 확인하고, 쿠리아 회의에서 임페리움을 부여받아야 했다.[61]

3. 1. 가족과 씨족

로마 가족의 단위는 '''파밀리아'''(familia)로 남편, 아내, 이들의 미혼 자녀를 비롯해 집에 함께 거주하는 노예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가족 공동체에서 가부장(paterfamilias)은 가정의 모든 재산에 대한 권한뿐 아니라, 가솔들에 대한 생살여탈권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족 회의를 통해 가정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했다.[57] 초기 로마에서는 경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가 불어나면서 가족 규모도 커져 형제들과 아들들이 분가하여 새로운 가구를 세웠다. 하지만 이들 모두 가부장 아래 한 가족의 일원으로 남았다.[58]

혈연적으로 가까운 가족들이 모여서 상위 집단인 '''씨족'''(gens)를 이룬다. 귀족 가문의 씨족들은 유명한 위인 또는 신을 시조로 연결지었다. 가령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속했던 율리우스 씨족(gens Iulia)는 그 기원이 아이네아스와 안키세스를 거쳐 베누스 여신으로 연결되었다. 로마 정치에서 씨족은 공적인 지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귀족 씨족 사이의 혼맥 형성을 통해 소수 대가문들이 로마를 이끌게 되었다.[59][60]

3. 2. 종교

로마의 종교는 개인 생활과 정치 생활 모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세적이었던 로마 종교는 노동, 기율, 의무, 용기, 충성과 같은 미덕을 심어주었다. 또한 가정종교에서 발전한 로마의 국가 종교는 로마를 단일 사회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61]

로마인들은 이탈리아의 여러 선사 시대 주민들과 중앙 유럽과 발칸 반도의 인도-유럽어권 이민들, 에트루리아와 그리스 식민시 주민들에게서 종교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리하여 로마의 종교는 토템 숭배, 마술, 금기(taboo), 동력론(dynamism), 물활론, 다신교, 신인동형론 등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술과 금기는 로마 국가 종교에서 금지되었으나 평민들 사이에서는 계속 이어져갔다.[61]

로마를 대표하는 최고 아우구르로서 로마를 위해 점술을 행할 권리는 오직 왕만이 가졌으며, 신탁을 통해 알려진 신들의 뜻 없이는 어떤 공적인 업무도 수행될 수 없었다. 백성들은 왕을 자신들과 신들 사이의 중재자(cf. 라틴어 ''pontifex'', "다리 건설자",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과 신 사이의 다리)로 여겼고, 종교적인 경외심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왕을 국가 종교의 수장이자 최고 행정 책임자로 만들었다. 왕은 로마력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종교 의식을 주관하고 하위 종교 직책과 관리들을 임명했다. 로물루스 자신이 아우구르를 창설했고 모든 아우구르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여겨졌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왕 누마 폼필리우스교황들을 창설했고 그들을 통해 로마 종교 교리의 기초를 발전시켰다.[61]

왕이 사망하면 로마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원로원으로 넘어가고, 원로원은 새로운 왕을 찾는 책임을 맡았다. 원로원은 소집되어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을 과도기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5일 동안 로마의 다음 왕을 지명하는 단일 목적으로 봉사하게 했다. 5일이 지나도 왕이 지명되지 않으면 과도기 집정관은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다른 원로원 의원을 다음 5일 임기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 과정은 새로운 왕이 선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과도기 집정관이 왕위에 적합한 후보자를 찾으면 후보자를 원로원 앞에 데려왔고 원로원은 그를 심사했다. 원로원이 후보자를 통과시키면 과도기 집정관은 퀴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왕 선출을 주재했다. 후보자가 퀴리아 회의에 제안되면 로마 시민들은 그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받아들여지더라도,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즉시 직무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가 완전한 왕권과 권한을 부여받기 전에 두 가지 다른 행위가 여전히 수행되어야 했다.[61]

첫째, 왕은 로마의 대사제 역할을 할 것이므로 징조를 통해 그의 임명에 대한 신들의 신성한 뜻을 얻는 것이 필요했다. 이 의식은 점술가가 수행했는데, 그는 왕으로 선출된 사람을 요새로 데려가 돌 의자에 앉혔고, 백성들은 아래에서 기다렸다. 만약 왕위에 합당하다는 것이 밝혀지면, 점술가는 신들이 호의적인 징표를 주어 왕의 제사장적 성격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둘째, 왕에게 ''임페리움''을 부여해야 했다. 퀴리아 회의의 이전 투표는 단지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했을 뿐, 그 행위로 왕에게 필요한 권력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왕은 퀴리아 회의에 그에게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했고, 퀴리아 회의는 그 법안에 찬성 투표함으로써 그것을 부여했다. 이론적으로 로마 시민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했지만, 원로원이 그 과정에 대한 대부분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61]

4. 정치

로마 왕국의 정치 체제는 왕, 원로원, 민회의 세 기관으로 구성되었다.

왕은 국가의 최고 권력자였지만, 원로원과 민회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왕정 시대에 원로원과 쿠리아회는 권한이 거의 없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회합하여 국정에 관한 문제를 논의할 권리가 없었고, 왕만이 이들을 소집할 수 있었으며, 왕이 제시한 문제만 논의할 수 있었다. 쿠리아 민회는 왕이 제출한 법을 통과시킬 권한이 있었지만, 원로원은 사실상 명예직 자문 기구였다. 원로원은 왕의 행동에 대해 조언할 수 있었지만, 왕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왕이 원로원과 쿠리아 민회의 승인 없이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은 외국과의 전쟁 선포였다.[4]

로물루스는 로마 건국 후, 도시의 자문회 역할을 할 가장 고귀한 남자들을 직접 선출하여 원로원을 설립했다. 원로원은 300명의 원로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100명의 원로원은 로마의 세 부족 (라틴족, 사비니족, 에트루리아인)을 대표했다. 각 부족 내에서 각 부족의 10개 쿠리아에서 한 명의 원로원이 선출되었다. 왕은 원로원을 임명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가졌지만, 이러한 선출은 고대 관습에 따라 이루어졌다.[69]

왕정 시대에 원로원은 왕이 국가의 대부분의 정치적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권력과 권한이 거의 없었다. 원로원의 주된 기능은 왕의 자문 위원회 역할 및 입법 조정이었다. 왕이 제안한 법안이 쿠리아 회의를 통과하면,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거나 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왕은 관습에 따라 주요 문제에 대해 원로원의 조언을 구해야 했으나, 어떤 문제를 원로원에 가져갈지, 조언을 받아들일지는 왕의 자유였다. 원로원을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은 왕만이 가지고 있었지만, 과도기에는 원로원 스스로 소집할 수 있었다.[68]

로마는 타국에서 씨족과 가신을 이끌고 이민해 온 자나, 전쟁에서 굴복시킨 적국의 유력자를 씨족째 로마로 강제 이주시킨 후, 대표자를 원로원 의원으로 삼아 아군으로 끌어들여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이는 신생 로마에게 인구 증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민회는 로마 시민들의 의결 기구였다. 왕정 시대 초기에는 쿠리아회가 유일한 민회였으며, 왕의 선출을 포함한 국가 최고 의결 기관이었다. 로물루스 또한 치세 도중에 이 민회의 선거로 선출(이 경우 신임)되어, 다시 선거를 통해 왕이 되었다. 왕의 임기는 종신이었지만, 원칙적으로 세습제는 채택하지 않았다.[70]

기원전 6세기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시민들을 재산에 따라 5개 등급으로 나누고, 각 등급은 '''백인대'''라는 하위 부대로 구분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에는 백인대로 조직된 새로운 민회인 '''켄투리아회'''가 확고히 수립되어 쿠리아회를 대체하는 민회로 기능하게 되었다.[74]

4. 1. 왕

초기 로마의 지배자는 '''왕'''(rex)이었으며, 최고 권력자이자 권위의 상징이었다. 로마 왕정에서 왕은 종신토록 재임했지만, 왕권은 세습되거나 민회에서 선출되지 않고 대귀족 가문의 가부장들이 선출하여 민회에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점을 통한 길흉의 판정이 중요했다.[64][65]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의 왕이 되면서 왕권은 군 통수권, 사법권, 제사권 등을 망라하는 총체적인 국가 수장의 지위가 되었다. 군 통수권자로서 왕은 외교를 관장하며, 선전 포고와 휴전을 결정했다. 또한 군대 훈련, 시민 징병, 전시 세금 부과, 전리품 및 토지 분배도 왕의 권한이었다. 왕은 내정과 법 집행의 책임자로서 입법권과 사법권을 동시에 가졌으며, 자신의 리토르[66]들을 통해 법을 집행했다. 도시 담당관은 왕 부재시에 대신 국정을 수행하고, 재판관들은 반역이나 공공 범죄를 재판했다.

초기 로마의 법은 왕의 칙령이나 의회의 결의가 아닌 공동체의 윤리와 관습, 관행에서 발달했다. 당시에는 법이 종교와 분리되지 않아, 왕은 대사제의 권한으로 왕의 법을 공포했다. 종교는 왕권의 기초로서, 국가의 운명은 종교와 맞물려 있었다. 왕은 국가 종교의 수장으로서 국가적인 제사를 집례하고 점괘를 받아 신의 뜻을 판별하며, 사제를 임명하고 감독했다.[67]

로물루스 이후 왕들은 로마 시민에 의해 종신직으로 선출되었으며, 왕위를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 무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을 완전히 깨뜨린 유일한 왕은 마지막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로, 그는 전임자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폭군으로 통치했다.

로마 왕들의 상징은 도끼가 달린 상징적인 파스케스를 휘두르는 12명의 리토르, 쿠룰 의자에 앉을 권리, 자주색 토가 픽타, 붉은 신발, 머리 주위의 흰색 디아뎀이었다. 이 모든 상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색 '토가 픽타'였다.

국왕은 쿠리아 회의가 ''렉스 쿠리아타 데 임페리오''를 통과시켜 공식적으로 부여하는 ''임페리움''을 통해 최고의 군사, 행정, 사법 권한을 부여받았다. 국왕의 ''임페리움''은 종신직이었으며, 그의 행동에 대해 재판을 받지 않도록 보호했다. 당시 로마에서 국왕은 ''임페리움''의 유일한 소유자였으므로, 그는 모든 로마 군단총사령관으로서 최고의 행정 권력과 견제받지 않는 군사적 권한을 가졌다. 집정관이 ''임페리움''을 남용하는 것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법률은 군주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왕은 모든 관리를 임명하거나 지명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 람네스 부족의 호민관이자 국왕의 개인 경호대인 ''켈레레스''의 지휘관 ''트리부누스 켈레룸''을 임명했다. 국왕은 취임 시 호민관을 임명해야 했으며, 호민관은 국왕의 사망 시 퇴임했다. 호민관은 국왕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으며, 쿠리아 회의를 소집하고 법안을 제출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국왕이 임명한 또 다른 관리는 도시 감시관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였다. 국왕이 도시를 비웠을 때, 치안관은 도시 안에서 ''임페리움''을 부여받는 것까지 포함하여 국왕의 모든 권한과 능력을 행사했다. 국왕은 원로원에 귀족을 임명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받았다.

로마를 대표하는 최고 아우구르로서 로마를 위해 점술을 행할 권리는 오직 왕만이 가졌으며, 신탁을 통해 알려진 신들의 뜻 없이는 어떤 공적인 업무도 수행될 수 없었다. 백성들은 왕을 자신들과 신들 사이의 중재자(cf. 라틴어 ''pontifex'', "다리 건설자", 인간과 신 사이의 다리)로 여겼고, 왕을 종교적인 경외심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왕을 국가 종교의 수장이자 최고 행정 책임자로 만들었다. 그는 로마력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종교 의식을 주관하고 하위 종교 직책과 관리들을 임명했다. 로물루스 자신이 아우구르를 창설했고 모든 아우구르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여겨졌다. 누마 폼필리우스교황들을 창설했고 그들을 통해 로마 종교 교리의 기초를 발전시켰다.

왕의 ''임페리움''은 군사적 권한과 로마 대법관으로서 모든 사건에 대한 법적 판단을 내릴 자격을 부여했다. 그는 일부 사건에서 하급 판사 역할을 할 폰티펙스를 임명할 수 있었지만, 민사 및 형사를 포함하여 그에게 제기된 모든 사건에 대해 최고 권한을 가졌다. 이는 왕을 전쟁과 평화 모두에서 최고 권력자로 만들었다. 일부 저술가들은 왕의 결정에 대한 상소가 없다고 믿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귀족이 쿠리아 회의에서 왕에게 상소 제안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왕을 보좌하기 위해 평의회가 모든 재판에서 그에게 조언했지만, 이 평의회는 그의 결정을 통제할 권한이 없었다. 또한, 두 명의 형사 수사관(''퀘스토레스 파리키디'')이 그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반역 사건을 감독하는 2인 형사 법원(''두움비리 페르두엘리오니스'')도 임명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조언자 없이 사형 형사 사건을 판결하여 그에게 반대할 생각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 공포를 조성했다.[4]

왕이 사망할 때마다 로마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국가 최고 권력은 원로원으로 넘어가고, 원로원은 새로운 왕을 찾는 책임을 맡았다. 원로원은 소집되어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을 과도기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5일 동안 로마의 다음 왕을 지명하는 단일 목적으로 봉사하게 했다. 5일이 지나도 왕이 지명되지 않으면 과도기 집정관은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다른 원로원 의원을 다음 5일 임기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 과정은 새로운 왕이 선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과도기 집정관이 왕위에 적합한 후보자를 찾으면 그는 그 후보자를 원로원 앞에 데려왔고 원로원은 그를 심사했다. 원로원이 그 후보자를 통과시키면 과도기 집정관은 퀴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왕 선출을 주재했다. 후보자가 퀴리아 회의에 제안되면 로마 시민들은 그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받아들여지더라도,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즉시 직무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가 완전한 왕권과 권한을 부여받기 전에 두 가지 다른 행위가 여전히 수행되어야 했다.

첫째, 왕은 로마의 대사제 역할을 할 것이므로 징조를 통해 그의 임명에 대한 신들의 신성한 뜻을 얻는 것이 필요했다. 이 의식은 점술가가 수행했는데, 그는 왕으로 선출된 사람을 요새로 데려가 돌 의자에 앉혔고, 백성들은 아래에서 기다렸다. 만약 왕위에 합당하다는 것이 밝혀지면, 점술가는 신들이 호의적인 징표를 주어 왕의 제사장적 성격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두 번째 행위는 왕에게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퀴리아 회의의 이전 투표는 단지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했을 뿐, 그 행위로 왕에게 필요한 권력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왕은 퀴리아 회의에 그에게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했고, 퀴리아 회의는 그 법안에 찬성 투표함으로써 그것을 부여했다. 이론적으로 로마 시민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했지만, 원로원이 그 과정에 대한 대부분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 이래로, 많은 씨족을 거느린 유력자는 귀족(파트리키)으로서 종신직인 원로원을 구성하여 왕의 자문 기관으로 삼았다.

로마는 타국에서 씨족과 가신을 이끌고 이민해 온 자나, 전쟁에서 굴복시킨 적국의 유력자를 씨족째 로마로 강제 이주시킨 후, 대표자를 원로원 의원으로 삼아 아군으로 끌어들여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이는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나 알바 롱가 등의 라틴족 도시 국가에 둘러싸인 작은 촌락 정도의 규모로 출발한 신생 로마에게 인구 증가는 최대이자 절실한 과제였으며, 인구가 늘지 않으면 자위를 위한 병력조차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로마의 특성이야말로 후에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인정받고 있다.

더욱이, 노예나 임시 거주자를 제외한 이러한 자유 시민은 로마 시민으로서 왕의 선출을 포함한 국가의 최고 의결 기관인 민회에서 투표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로물루스 또한 치세 도중에 이 민회의 선거로 선출(이 경우 신임)되어, 다시 선거를 통해 왕이 되었다. 왕의 임기는 종신이었지만, 원칙적으로 세습제는 채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민에 의한 왕의 선출은 공화정 시기에 공화정의 역사를 오래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설도 있다.

왕의 최대 책무는 로마의 방위였으며, 이를 위해 자유 시민이 윤번제로 병역을 수행하는 로마 군 전군의 지휘를 담당했다(전군이라 해도 창건 당시에는 2,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 2. 원로원

원로원(Senatus)은 왕에게 조언을 하는 원로들의 회의체였다. 최초의 원로원은 씨족 지도자들의 회의체였던 것으로 보이며[68], 왕은 자신의 권한이 커지면서 원로원을 자문 회의로 격하시켰다. 씨족들이 더 많은 유력 가문으로 분산되면서 왕은 원로원 의원 수를 늘렸다.

원로원은 입법권이 없었고 왕이 자문할 때에만 조언을 할 수 있었다. 왕이 조언을 항상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습관적으로 무시하면 유력 가문들의 증오를 사서 왕위에서 축출될 위험이 있었다.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그러한 예시이다. 원로원은 입법에 앞서 민회의 결의안을 재가하는 권한(auctoritas patrum)을 가졌다.[69]

왕은 원로원 의원을 임명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가졌다.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로마 건국 후 가장 고귀한 남자들을 직접 선출하여 원로원을 설립했다. 원로원은 300명의 원로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100명은 로마의 세 부족인 람네스(라틴족), 티티에스(사비니족), 루케레스(에트루리아인)를 대표했다. 각 부족 내에서 각 부족의 10개 쿠리아에서 한 명의 원로원이 선출되었다.

왕정 시대에 원로원은 왕이 국가의 대부분의 정치적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권한이 거의 없었다. 원로원의 주된 기능은 왕의 자문 위원회 역할 및 입법 조정이었다. 왕이 제안한 법안이 쿠리아 회의를 통과하면,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거나 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왕은 관습에 따라 주요 문제에 대해 원로원의 조언을 구해야 했으나, 어떤 문제를 원로원에 가져갈지, 조언을 받아들일지는 왕의 자유였다. 원로원을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은 왕만이 가지고 있었지만, 과도기에는 원로원 스스로 소집할 수 있었다.

로마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 이래로, 많은 씨족을 거느린 유력자는 귀족(파트리키)으로서 종신직인 원로원을 구성하여 왕의 자문 기관으로 삼았다. 타국에서 씨족과 가신을 이끌고 이민해 온 자나, 전쟁에서 굴복시킨 적국의 유력자를 씨족째 로마로 강제 이주시킨 후, 대표자를 원로원 의원으로 삼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신생 로마에게 인구 증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4. 3. 민회

로마에는 여러 민회가 있었는데, 왕정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은 '''쿠리아회'''(comitia curiata)였다. 쿠리아회는 그 기원이 분명하지 않으나, 로마 공동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쿠리아회는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시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왕이 특정 사안에 대한 승인을 얻고자 할 때 소집되었다.[70] 로마인들은 람네스(Ramnes), 티티에스(Tities), 루케레스(Luceres)라는 세 개의 트리부스(부족)로 구성되었고, 각 부족은 다시 열 개의 쿠리아(curia)로 나뉘었다. 쿠리아회에서는 단위별로 투표가 이루어졌고, 각 쿠리아는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으며, 각 투표권은 쿠리아 구성원들의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왕정 시대에 쿠리아회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초기에는 입법이 드물었고,[71] 왕이 민회를 소집하는 것은 백성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의 결정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쿠리아회는 유언과 양자 입양에 대해 증인 역할을 했고, 사법 관련 문제도 다루었다.[72]

왕정 시대에는 원로원과 쿠리아회가 권한이 거의 없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모여 국정을 논의할 권리가 없었고, 왕(쿠리아회의 경우 호민관)만이 소집할 수 있었으며, 왕이 제시한 문제만 논의할 수 있었다. 쿠리아회는 왕이 제출한 법을 통과시킬 권한은 있었지만, 원로원은 명예직 자문 기구에 가까웠다. 원로원은 왕에게 조언할 수 있었지만, 왕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왕이 원로원과 쿠리아회의 승인 없이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은 전쟁 선포였다.

왕이 사망하면 로마는 과도기를 맞았다. 국가 최고 권력은 원로원으로 넘어가고, 원로원은 새 왕을 찾을 책임을 맡았다. 원로원은 과도기 집정관을 임명하여 5일 동안 다음 왕을 지명하게 했다. 5일이 지나도 왕이 지명되지 않으면 과도기 집정관은 다른 원로원 의원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 과정은 새 왕이 선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과도기 집정관이 적합한 후보를 찾으면 원로원이 심사했고, 통과되면 과도기 집정관은 쿠리아회를 소집하여 왕 선출을 주재했다. 로마 시민들은 후보를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었다. 왕으로 선출되어도 즉시 직무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왕에게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기 전에 두 가지 절차가 더 필요했다.

첫째, 왕은 로마의 대사제 역할을 해야 하므로 징조를 통해 신들의 뜻을 얻어야 했다. 점술가가 왕으로 선출된 사람을 요새로 데려가 의식을 행했고, 왕위에 합당하다고 밝혀지면 신들이 호의적인 징표를 주어 왕의 제사장적 성격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둘째, 왕에게 ''임페리움''을 부여해야 했다. 쿠리아회의 이전 투표는 누가 왕이 될지 결정했을 뿐, 권력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왕은 쿠리아회에 ''임페리움'' 부여 법안을 제안했고, 쿠리아회는 찬성 투표로 이를 부여했다. 이론적으로 로마 시민들이 지도자를 선출했지만, 원로원이 그 과정 대부분을 통제했다.

4. 3. 1. 군대와 켄투리아회

기원전 7세기 말 이전 로마에는 조직적인 군대가 없었고, 일리아스의 용사들처럼 씨족 족장들이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에트루리아 왕들 시대에 로마의 경제와 사회가 발달하면서 시민군으로 구성된 중무장 보병대가 등장했는데, 이는 그리스의 밀집보병대(phalanx)와 비슷했다.[73]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중엽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조세와 징병을 위해 시민들을 재산에 따라 5개 등급으로 나누고, 각 등급은 '''백인대'''(centuria, 百人隊)라는 하위 부대로 구분했다. 군사 장비는 개인이 각자 능력에 따라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상위 등급은 더 많은 백인대로 구성되었고 하위 계급은 더 적은 수의 백인대에 할당되었다.[73]

기원전 5세기 중엽에는 백인대로 조직된 새로운 민회인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가 확고히 수립되어 쿠리아회를 대체하는 민회로 기능하게 되었다.[74] 켄투리아회는 백인대(군인)의 의회로, 집정관과 법무관(imperiumla) 및 감찰관을 선출하고 전쟁 선포와 인구 조사 결과 비준 등의 역할을 했다. 또한 특정 사법 사건에서 최고 항소 법원 역할도 했다.

5. 로마 왕국의 몰락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전제적인 통치와 그의 아들이 루크레티아를 겁탈한 사건은 로마 왕정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75] 수치심에 루크레티아가 자결하자,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왕족 추방을 주장했고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기원전 509년 왕정이 종식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군사적 패배로 인한 사회ㆍ경제ㆍ정치적 쇠퇴가 왕정 몰락의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당시 에트루리아 세력이 약화되었고, 사비니인 등 산지 부족들이 라티움을 침공한 것도 왕정 몰락에 영향을 주었다.[75]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선왕파 의원들을 살해하고, 시민 집회나 원로원의 승인 없이 즉위했다. 그는 원로원과 시민 집회에 자문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통치하여 평판이 좋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책략과 전쟁에 능숙하여 로마의 영토를 넓혔고, 에트루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에서 활보하게 되었고, 로마가 에트루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했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졌다.

결국 왕의 아들 섹스투스가 루크레티아를 겁탈한 사건으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루크레티아는 남편 앞에서 모든 것을 고백하고 자결했고,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왕족 추방을 연설하여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왔지만, 이미 성문은 닫힌 후였다. 그는 에트루리아로 떠났고, 섹스투스는 도망가다 살해되었다.

타르퀴니우스의 추방으로 왕정은 종말을 고하고, 기원전 509년부터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두 명의 집정관이 로마를 통치하게 되었고, 최초의 집정관으로는 브루투스와 루크레티아의 남편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이후 로마인들은 "왕을 두지 않는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특히 동방의 전제 군주에 대해 강하게 거부했다.

6. 왕의 치세

로물루스 이후 로마의 왕들은 시민들에 의해 종신직으로 선출되었으며,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무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을 깨뜨린 유일한 왕은 마지막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로, 그는 전임자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폭군으로 통치했다.[41]

로마 왕들의 상징은 도끼가 달린 상징적인 파스케스를 휘두르는 12명의 리토르(시종), 쿠룰 의자에 앉을 권리, 자주색 토가 픽타, 붉은 신발, 머리 주위의 흰색 디아뎀이었다. 이 모든 상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색 '토가 픽타'였다.

리비우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로마 왕들의 재위 기간과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기타 주목할 만한 정보
기원전 753–716년로물루스로물루스와 레무스 신화; 로마 건국; 로마 원로원, 군대, 최초의 종교 기관 설립.
기원전 715–672년누마 폼필리우스종교 및 정치 기관 설립; 12개월 태양력 도입.
기원전 672–640년툴루스 호스틸리우스알바 롱가 파괴; 알바 귀족을 로마에 통합.
기원전 640–616년안쿠스 마르키우스오스티아 항구 건설; 사비니족 격파.
기원전 616–578년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로마의 헤게모니 확장; 원로원 200명으로 증원; 로마 포럼 배수, 클로아카 막시마와 키르쿠스 막시무스 건설.
기원전 578–534년세르비우스 툴리우스세르비우스 부족과 켄투리아 설립; 다이아나 신전과 새로운 성벽 건설; 콤피탈리아 제정.
기원전 534–509년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로마의 마지막 왕; 세르비우스 전복; 라틴 도시 정복 및 식민지 건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 건설; 폐위 후 로마 공화국 설립.


6. 1. 로물루스



로마의 기원에 대한 표준적인 이야기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트로이가 멸망할 때 그곳에서 피해 수년간 방랑하다 라티움에 정착했다는 트로이아의 영웅 아이네아스(Aeneas)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그곳의 왕 라비누스를 만났고, 그의 딸 라비니아에게 구애하던 선주민과 전쟁을 벌인 끝에 그녀와 결혼했으며, 새 아내를 기려 라비니움이라는 도시를 건설한다. 이후 아들 아스카니우스(Ascanius)는 알바 롱가를 건설했다. 아스카니우스 이후 열두 번째 알바 왕인 프로카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였다. 이 둘은 왕위 계승을 놓고 암투를 벌였고 승리한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를 감옥에 가두고 그의 딸인 레아 실비아(Rhea silvia)를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여사제로 만든다. 하지만 레아 실비아는 마르스에 의해 잉태되었고 두 쌍둥이 아들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다.

아물리우스는 레아 실비아가 처녀로 지내야 할 여사제임에도 출산한 것에 분노하여 두 쌍둥이를 티베리스 강에 버렸다. 둘은 로마 땅 근처에서 암늑대에게 발견되어 젖을 먹고 자랐다. 그런 뒤 목동 파우스툴루스가 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이 둘은 목동의 아들로 성장하며 주변 양치기의 리더가 되었고, 우연히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누미토르를 만나 혈연임을 알게 된다. 누미토르의 사주로 이들은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누미토르는 알바 롱가의 왕이 된다. 그 뒤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이 두 사람은 그들의 무리와 함께 7개의 언덕에 있는 로마에 정착하여 도시를 세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각각의 언덕 위에 정착하였으나 로물루스가 레무스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죽이고 유일한 통치자가 된다. 로물루스의 통치하에 군대를 조직한 신생 도시 로마는 아내감이 부족해지자 사비니인 마을에서 여자들을 약탈하여 자기네 새 도시의 대를 잇게 된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3세기 말에 시인들과 역사가들이 라틴, 에트루리아, 그리스에서 유래한 여러 다른 이야기들을 짜맞추어 지어낸 것이다.[48]

753년 로마 지도. 색상은 지형을 나타내며 녹색은 저지대, 갈색은 고지대를 나타낸다.


전설적인 로물루스는 베스타 여신 레아 실비아의 아들로, 표면적으로는 신 마르스의 아들이며, 로마의 창시자이자 초대 왕이었다. 그와 그의 쌍둥이 형제 레무스가 알바의 아물리우스 왕을 폐위시키고 왕의 형제이자 그들의 할아버지인 누미토르를 왕위에 복귀시킨 후, 그들은 유아 때 버려졌던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다툼 끝에 죽인 후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 건설을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요새화로 시작되었다. 그는 노예와 자유인을 포함하여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로마 시민이 되도록 허용했다.[5] 그는 도시의 종교, 법률 및 정치 제도를 확립한 것으로 여겨진다. 로물루스가 정부를 결정하기 위해 시민들을 의회에 소집했을 때, 왕국은 만장일치로 그를 수장으로 하여 설립되었다.[6][7][8][9]

로물루스는 지역 사회에서 가장 고귀한 남성 100명을 임명하여 자문 위원회로서 원로원을 설립했다. 그는 이들을 '파테르'(아버지,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파테르'에서 유래)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후손은 귀족이 되었다. 그는 지휘를 과시하기 위해 특히 12명의 릭토르와 함께 수행원들을 거느렸다.[6][10] 그는 기병('에퀴테스')을 '세기'라는 세 개의 부서로 나누었는데, '람네스'(로마인), '티티에스'(사비니 왕의 이름을 따서)와 '루케레스'(에트루리아인)였다. 또한 그는 인구를 30개의 '쿠리아'로 나누었는데, 이는 로물루스와 티투스 타티우스 사이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개입했던 사비니 여성 30명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쿠리아'는 민회('코미티아 쿠리아타')에서 투표 단위를 형성했다.[11]

왕국 시대의 도시 지역 성장


로물루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사건 중 하나인, ''사비니 여인의 강탈'' 사건의 배후에 있었다. 로물루스는 시민들에게 아내를 제공하기 위해 이웃 부족들을 로마로 축제에 초대하여 로마인들이 참석자들 중에서 젊은 여성들을 대규모 납치했다. 그 기록은 30명에서 683명의 여성을 납치한 것으로 다양하며, 이는 3,000명의 라틴인(그리고 아마도 사비니인에게도)에게 상당한 숫자였다. 로물루스가 포로들을 돌려주기를 거부했을 때 전쟁이 발발했다. 사비니인들이 로마의 언덕 정착지에 세 번의 실패한 침략을 시도한 후, 여성들 자신이 쿠르티우스 호수의 전투에서 개입하여 전쟁을 종식시켰다. 두 민족은 공동 왕국으로 통합되었으며, 로물루스와 사비니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왕위를 공유했다.[12][13][14] 사비니인과의 전쟁 외에도, 로물루스는 피데나테스와 베이엔테스 및 다른 사람들과 전쟁을 벌였다.[15]

그는 37년 동안 통치했다.[16][17]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54세에[17]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자신의 군대를 검토하던 중 사라졌다. 그는 소용돌이 속에서 올림푸스 산으로 끌려 올라가 신이 되었다고 한다. 대중의 초기 수용 이후, 귀족들의 불법 행위에 대한 소문과 의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는 귀족들이 그를 살해하고 시신을 해체하여 그 조각들을 자신의 땅에 묻었다고 생각했다.[18] 존경받는 귀족이 로물루스가 환영 속에서 자신에게 나타나 자신이 신 퀴리누스라고 말했다고 증언한 후 이들은 제쳐졌다.[19] 그는 로마의 세 주요 신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도시 자체의 모습이 되었다.[20][21]

로물루스의 오두막의 복제품은 로마 제국 말기까지 로마 중심부에 보존되었다.[22]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4월 21일로물루스가 왕이 되어 테베레 강(테베레 강) 기슭에 도시 로마를 건설했다. 당시 로마는 언덕 두 개를 둘러싼 방어 시설만 갖춘 작은 마을이었고 인구는 수천 명이었다. 이 최초의 로마는 라틴족의 나라였다.

이윽고 인근 부족과의 분쟁이 일어났다. 로마가 인접한 사비니족의 언덕 마을 처녀들을 축제에 초대했을 때, 처녀들을 갑자기 껴안아 집으로 데려가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처녀들은 옆 언덕의 남자들에게 자신들은 아내로서 대우받았으며, 결코 학대받지 않았기에, 싸움을 멈춰 달라고 간청했다. 사비니족의 타티우스 왕은 평화를 수락했고, 나아가 로물루스의 권유로 부족 전체가 로마로 이주했다. 로마가 사비니족을 병합한 것이 아니라,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이 주어졌고, 타티우스 왕은 로물루스와 공동으로 통치를 했다.

타티우스 왕은 이후 곧 전사했고, 그 후 로마의 지휘는 로물루스가 맡았다.

기원전 715년 어느 날, 로물루스 왕이 열병하던 중, 갑자기 눈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뇌우가 덮쳐왔다. 비와 천둥이 지나간 후, 병사들이 옥좌를 보니 왕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방을 찾아도 발견되지 않아, 이때 왕은 죽었다고 여겨졌다.

6. 2. 누마 폼필리우스

48 BC ''데나리우스''에 묘사된 누마


로물루스가 죽은 후, 1년 동안 공위 시대가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원로원에서 선출된 10명의 남자가 차례로 로마를 다스리는 ''인테르렉스''로 활동했다. 민중의 압력에 따라 원로원은 마침내 정의와 경건함으로 명성이 높았던 사비니족 누마 폼필리우스를 로물루스의 후임으로 선택했고, 이 선택은 쿠리아 회의에서 받아들여졌다.[23][24][25]

누마의 치세는 평화와 종교 개혁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야누스 신전을 새로 건설했고, 로마의 이웃 국가들과 평화를 확립한 후 평화로운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신전 문을 닫았다. 이 문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 닫혀 있었다.[26] 그는 로마에 베스타의 처녀와 살리, 그리고 플라미네스를 유피테르, 마르스, 퀴리누스를 위해 설립했다. 그는 또한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직책과 임무를 확립했다. 누마는 43년 동안 통치했다.[27][28] 그는 총 개월 수를 12개월로 만들기 위해 1월과 2월을 추가하여 태양력과 음력에 맞게 조정하여 로마력을 개혁했다.[26]

다음 왕이 선출될 상황이 되었지만, 로물루스를 누군가가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누구를 왕으로 선출해도 의혹이 생길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로물루스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를 왕으로 세우는 생각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없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시외 인물 중에서 왕을 뽑기로 했다. 로마인이 선택한 사람은 현자로 알려진 사비니 출신 누마 폼필리우스였다. 로마에 살지도 않았던 누마는 당연히 사양했지만, 원로원의 원로들에게 거듭 부탁받자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누마는 온화한 인격자였다고 전해지며, 이 왕의 시대에는 로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누마는 주로 국내 개혁을 실시했다. 로물루스가 제정했다고 전해지는 로마력을 개정한 것도 그였다. 농업을 권장한 외에, 직업별 조합을 만들었다. 종교 개혁을 실시하여 신관도 정했다. 로마 신화의 골격과 주요 신의 이름이 정해진 것도 누마의 시대였다. 이는 누마의 조상 사비니인의 신앙을 바탕으로 했다고 전해진다. 누마의 죽음도, 그 치세와 마찬가지로 평온했다.

또한, 누마의 치세에 하늘에서 12개의 안킬레(성스러운 방패)가 내려와 로마의 수호의 상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는 아마도 남하해오는 에트루리아인의 위협에 로마인이 군비를 갖춘 것을 신화로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6. 3.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로물루스처럼 호전적인 왕으로, 누마와는 정반대로 신을 전혀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알바 롱가, 피데나이와 베이이, 사비니족과 전쟁을 벌였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의 재위 기간 동안 알바 롱가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로마로 통합되었다.[29] 그는 원로원의 새 건물인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건설했는데, 이 건물은 그가 죽은 후에도 562년 동안 존속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재위 말년까지 신을 숭배하지 않다가 병에 걸려 미신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유피테르에게 도움을 청하자, 유피테르는 번개로 응답하여 왕과 그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었다고 한다.[30][31] 그의 재위 기간은 32년이었다.[32]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누마 폼필리우스의 평화적인 치세로 국력을 축적한 로마를 바탕으로 팽창 정책을 펼쳤다. 그는 인근 라틴 도시 중 가장 강력했던 알바 롱가를 정복하고 왕을 살해하여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알바 시민들은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여졌고, 알바 귀족들은 로마 귀족으로 원로원 의석을 얻었다. 이때 로마로 이주해 온 귀족 가문 중에는 훗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을 배출한 율리우스 가문이 있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6. 4. 안쿠스 마르키우스

기원전 57년 ''데나리우스''에 묘사된 안쿠스 마르키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 로마인들은 평화롭고 종교적인 왕인 누마의 손자 안쿠스 마르키우스를 왕으로 선출했다.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할아버지처럼 로마의 국경을 확장하는 데는 거의 기여하지 않았고,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만을 수행했다. 그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로마 최초의 감옥을 건설했다.[33]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서쪽 강둑에 있는 야니쿨룸 언덕을 더욱 강화하고, 테베레 강에 최초의 다리를 건설했다. 또한 티레니아 해에 오스티아 안티카 항구를 건설하고, 로마 최초의 염전과 도시 최초의 수도교를 건설했다. 그는 외교를 통해 주변의 작은 도시들을 로마와 평화적인 동맹으로 이끌면서 로마를 성장시켰다. 그는 라틴족 정복을 완료하고 그들을 아벤티노 언덕으로 이주시켜 로마의 평민 계급을 형성했다.[34]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25년간 왕으로 재위한 후, 할아버지처럼 자연사했으며, 이로써 로마 라틴-사비니 왕들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32] 그는 내정에도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에 최초로 수도를 설치하고, 해변의 오스티아를 정복하여 로마에 소금을 가져왔다.

6. 5.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마의 다섯 번째 왕이었으며, 에트루리아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로마로 이주한 후 그는 안쿠스에게 호감을 얻었고, 안쿠스는 그를 아들로 입양했다.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사비니족과 에트루리아족과 전쟁을 벌여 로마의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 도시에 막대한 보물을 가져왔다. 인구 유입을 수용하기 위해 아벤티노 언덕과 카엘리우스 언덕에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었다.[35]

그의 첫 번째 개혁 중 하나는 정복한 에트루리아 부족 출신 100명의 새로운 상원 의원을 추가하여 전체 상원 의원 수를 200명으로 늘린 것이다. 그는 정복을 통해 로마가 획득한 보물을 사용하여 로마를 위한 웅장한 기념물을 건설했다. 여기에는 로마의 거대한 하수도 시스템인 클로아카 막시마가 포함되었으며, 이를 사용하여 로마의 일곱 언덕 사이의 늪지대와 같은 지역을 배수했다. 그 자리에 그는 로마 포럼 건설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로마의 게임을 창시했다.

프리스쿠스는 도시 최초의 다리인 폰스 수블리키우스를 포함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36] 가장 유명한 것은 전차 경주를 위한 거대한 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이다. 그 후 그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주피터 신을 위한 사원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왕으로 38년 만에, 공사가 완료되기 전에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32] 그의 통치는 군사 및 민간 관청의 로마 상징을 도입하고, 로마 최초로 로마 개선식을 거행한 것으로 가장 잘 기억된다.[37]

제5대 왕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고풍왕)는 에트루리아인이었다. 로마에서는 이방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말을 듣고 이주해 왔다. 그리고 시민권을 얻은 후, 선왕의 사후에 입후보하여 왕이 되었다. 시외 출신이라는 점은 누마 왕의 선례도 있어 문제 삼지 않았다.

이 왕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주민을 로마로 이주시키지 않았다. 대신 전리품을 로마로 운반했다. 어차피 져도 로마 시민이 될 뿐이라고 생각한 인근 도시 국가들은 잠시 잠잠해졌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병사를 동원하여 수도교를 건설했다. 로마에는 그 기술이 없었기에 왕의 고향인 에트루리아에서 기술을 도입했다. 이로 인해 산업이 활성화되었다. 로마인들은 기술도 잘 배워 도시가 더욱 발전했다.

그러나 왕은 왕위를 노리는 선왕의 아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6. 6.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로마의 두 번째 왕이자, 노예의 아들이었다. 장인과 마찬가지로 세르비우스는 에트루리아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전리품을 사용하여 로마의 일곱 언덕 전체를 둘러싸는 최초의 벽인 ''포메리움''을 건설했고, 군대를 재편성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시민 계급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로마 최초의 인구 조사를 실시하여 인구를 다섯 개의 경제 계층으로 나누고 백인회를 구성했다. 그는 인구 조사를 사용하여 인구를 지역에 따라 네 개의 도시 부족으로 나누어 부족회를 설립했다. 그는 또한 아벤티노 언덕에 디아나 신전의 건설을 감독했다.

세르비우스의 개혁은 로마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 경제적 지위에 따른 투표권은 엘리트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르비우스는 평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종종 귀족을 희생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점점 더 선호했다. 44년간의 통치[32] 후, 세르비우스는 딸 툴리아 마이너와 그녀의 남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음모로 살해되었다.[38]

제6대 왕으로는 제4대 왕의 아들이 아닌 고아 출신으로 선왕의 양자이자 사위였던 에트루리아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선출되었다. 이 왕이 행한 큰 사업은 성벽 건설이었다. 이 성벽은 "세르비우스 성벽"이라고 불리며, 현재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는 로마 시의 7개 언덕을 둘러싼 대규모 공사였다. 또한 군제를 개혁하고 전쟁도 수행했다. 전법도 개발했다.

세르비우스는 제5대 왕의 손자 타르퀴니우스와 그의 아내이자 자신의 딸인 툴리아에 의해 암살당했다.

6. 7.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로마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프리스쿠스의 아들이자, 그와 그의 아내가 살해한 세르비우스의 사위였다.[39]

타르퀴니우스는 볼스키, 가비이, 루툴리를 포함하여 로마의 이웃 국가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그는 또한 로마를 라틴 동맹 도시들의 수장으로 만들었다. 그는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 완공, 클로아카 막시마 및 키르쿠스 막시무스 공사 등 일련의 공공 사업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의 통치는 폭력과 협박을 사용하여 로마를 통제하고, 로마의 관습과 로마 원로원을 무시한 것으로 기억된다.[40] 그는 25년 동안 통치했다.[32]

후에 '오만한 왕(수페르부스)'이라고 불린 이 신임 왕은 전임 왕의 장례를 금지하고, 선왕파 의원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 왕의 즉위에는 시민 집회의 선출도, 원로원의 승인도 없었다. 그 후의 정치도 원로원이나 시민 집회에 자문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했다. 당연히 시민들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왕은 책략과 전쟁에 능숙하여 로마는 더욱 영토를 넓혔다. 이윽고 왕은 로마보다 훨씬 강대했던 에트루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로마 근처에는 강국이 없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 안을 활보하게 되었고,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했다고 생각하는 시민도 많아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5대부터 모든 왕이 에트루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강력한 로마 귀족의 아내이자 딸인 루크레티아를 강간하면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루크레티아는 친척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치의 굴레를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네 명의 남자, 즉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는 기원전 509년 타르퀴니우스와 그의 가족을 로마에서 폐위시키고 추방하는 혁명을 일으켰다.[41]

타르퀴니우스는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져, 왕을 뜻하는 단어인 ''렉스''는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라틴어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42]

마침내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날이 온다. 왕의 아들 섹스투스가 친척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짝사랑하여 침실에 숨어들어 그녀를 범한 것이다. 루크레티아는 친척, 친구들과 함께 달려온 남편 앞에서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남자들이 복수를 맹세하는 것을 지켜본 후 단검으로 자결했다. 남편의 친구이자 이 현장을 목격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왕 일족을 추방해야 한다고 연설했고, 시민들은 이에 따랐다. 전쟁 중이던 왕은 사태의 급변을 알고 급히 로마로 돌아왔지만, 문은 모두 닫힌 후였다. 왕은 따르는 병사들만 데리고 에트루리아로 떠났다. 왕의 세 아들 중 두 명은 왕과 함께 떠났지만, 사건의 발단이 된 섹스투스는 따로 도망갔고, 후에 다른 사건으로 살해되었다. 왕비 툴리아는 따로 도망쳐 무사했다.

7. 제도

로마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 이래로, 많은 씨족을 거느린 유력자는 귀족(파트리키)으로서 종신직인 원로원을 구성하여 왕의 자문 기관으로 삼았다.

로마의 특징은 타국에서 씨족과 가신을 이끌고 이민해 온 자나, 전쟁에서 굴복시킨 적국의 유력자를 씨족째 로마로 강제 이주시킨 후, 대표자를 원로원 의원으로 삼아 아군으로 끌어들여 세력 기반으로 삼은 점이다. 이는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나 알바 롱가 등의 라틴족 도시 국가에 둘러싸인 작은 촌락 정도의 규모로 출발한 신생 로마에게 인구 증가는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였으며, 인구가 늘지 않으면 자위를 위한 병력조차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로마의 특성이야말로 후에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인정받고 있다.

노예나 임시 거주자를 제외한 자유 시민은 로마 시민으로서 왕의 선출을 포함한 국가 최고 의결 기관인 민회에서 투표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로마 건국의 왕이었던 로물루스 또한 치세 도중에 이 민회의 선거로 선출(이 경우 신임)되어, 다시 선거를 통해 왕이 되었다. 왕의 임기는 종신이었지만, 원칙적으로 세습제는 채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민에 의한 왕의 선출은 공화정 시기에 공화정의 역사를 오래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설도 있다.

왕의 최대 책무는 로마의 방위였으며, 이를 위해 자유 시민이 윤번제로 병역을 수행하는 로마 군 전군의 지휘를 담당했다(전군이라 해도 창건 당시에는 2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8. 공화정 이후의 공직

로마 왕국이 멸망하고 로마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왕이 가지고 있던 행정 권한은 여러 공직으로 분산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직책은 집정관이었다. 집정관은 이전 왕의 imperium|임페리움la과 새로운 원로원 의원 임명 권한을 포함하여 민사 및 군사 문제 모두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졌다.[44] 각 집정관에게는 원로원에 의해 provincia|프로빈키아la가 할당되었는데, 이는 해당 관직 담당자의 권한 범위였다. Imperium|임페리움la은 군대 지휘권, 외교, 사법 시스템 등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극단적인 경우 로마 시민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도 있었다.[44]

집정관의 권한은 collega|콜레가la('동료성')와 provocatio|프로보카티오la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각 집정관직은 최소 두 명이 동시에 수행했으며, 로마 시민은 provocatio|프로보카티오la에 의해 강압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이는 인신 보호 영장la의 전조였다. 집정관이 시민에 대해 국가의 권한을 사용하려 할 때, 시민은 집정관의 결정에 대해 호민관에게 항소할 수 있었다.[44] 또한 집정관은 1년 임기가 만료되면, 10년을 기다려야 다시 그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독재관은 군사적 비상사태 시기에 6개월 임기로 임명되었으며, 헌법 정부는 해산되고 독재관은 국가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었다.[44]

감찰관은 인구 조사를 유지하고, 공공 도덕을 감독하며, 정부 재정의 특정 측면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44] 법무관은 민법을 관리하고[44] 지방 군대를 지휘했다. 조영관은 로마의 국내 문제를 처리하고 공공 경기 및 쇼를 관리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재무관은 로마의 집정관과 지방 총독을 도왔다.

호민관은 평민의 화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성스러운 존재였다. 호민관을 해치거나 그의 거부권을 무시하거나 그를 방해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44]

8. 1. 원로원

원로원의 권위는 원로원 의원들의 존경과 위신에서 비롯되었다.[1] 이러한 존경과 위신은 선례와 관습,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의 역량과 평판을 바탕으로 하였다. 원로원은 senatus consultala(원로원 결의)라고 불리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원로원이 집정관에게 보내는 "조언"이었지만, 실제로는 집정관들이 대개 따랐다.[2] 중기 공화정과 로마의 팽창을 거치면서 원로원은 국가에서 더욱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국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전문 지식을 가진 유일한 기관으로서 원로원은 국가 재정, 집정관 임명, 외교 문제, 군사력 배치를 통제했다. 또한 강력한 종교 단체로서 징조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이에 대한 로마의 대응을 지시했다.[3]

기원전 2세기에 원로원의 특권에 도전이 시작되면서 원로원은 법안에 대한 관례적인 사전 승인을 잃었다. 게다가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살해로 기원전 121년에 선례가 만들어진 후, 원로원은 senatus consultum ultimumla(최후 원로원 결의)를 발동할 권한을 주장했다. 이러한 결의는 집정관에게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고, 합법성과 상관없이, 이러한 조치가 나중에 법원에서 이의가 제기될 경우 원로원이 해당 집정관을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알렸다.[4]

원로원 의원들은 일반적으로 감찰관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감찰관은 보통 새로 선출된 집정관을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하여 원로원을 부분적으로 선출된 기관으로 만들었다. 지위는 세습되지 않았고 항상 새로운 인물들이 있었지만, 전직 집정관의 아들들은 자격을 갖춘 집정관직에 쉽게 선출되었다. 비상사태 시에는 원로원 의원을 임명할 목적으로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예: 칸나이 전투 이후).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카이사르와 제2차 삼두정치의 구성원과 같은 인물들이 이러한 권한을 스스로 찬탈했다.[3]

8. 2. 입법 의회

로마 시민권은 재판 및 상소, 결혼, 투표, 공직 수행, 계약 체결, 세금 면제 등 여러 법적 권리를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모든 법적, 정치적 권리를 갖춘 성인 남성 시민은 optimo iure|최고의 권리를 가진 자la로 불렸다. 이들은 의회를 통해 집정관을 선출하고, 법률을 제정하며, 사형 사건 재판을 주재하고, 전쟁과 평화를 선포하며, 조약을 맺거나 해소하는 권한을 가졌다.

입법 의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모든 optimo iure|최고의 권리를 가진 자la 시민들의 의회인 comitia|위원회la와 특정 optimo iure|최고의 권리를 가진 자la 시민 그룹의 의회인 consilia|평의회la였다.[1]

시민들은 백인대와 부족을 기반으로 조직되었으며, 각자는 자체 의회에 모였다. Comitia Centuriata|백인대 회의la는 군인들의 의회였다. 의장은 보통 집정관이었다. 백인대는 한 번에 한 백인대씩 투표하여 과반수의 지지를 얻을 때까지 투표했다. Comitia Centuriata|백인대 회의la는 imperium|임페리움la을 가진 집정관과 법무관을 선출했다. 또한 감찰관도 선출했다. Comitia Centuriata|백인대 회의la만이 전쟁을 선포하고 인구 조사의 결과를 비준할 수 있었다.[2] 이는 특정 사법 사건에서 최고 항소 법원 역할을 했다.

Comitia Tributa(부족 회의)는 로마 시민의 의회로, 집정관이 주재했으며 35개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과반수 부족의 지지를 받으면 투표가 종료되었다. Comitia Tributa|부족 회의la는 퀘스토르, 쿠룰 아이딜 및 군사 호민관을 선출했다.[3] 평민 평의회[4]는 부족 회의와 동일했지만 귀족은 제외되었다. 그들은 자체 관료, 평민 호민관 및 평민 아이딜을 선출했다. 보통 평민 호민관이 의회를 주재했다. 이 의회는 대부분의 법률을 통과시켰고 항소 법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8. 3. 집행관

각 공화정의 집정관은 헌법적 권한을 가졌다. 각 집정관은 원로원에 의해 provincia|프로빈키아la가 할당되었는데, 이는 해당 관직 담당자의 권한 범위였다. Imperium|임페리움la은 집정관과 법무관 모두에게 있었으며, 군대 지휘권, 외교, 사법 시스템 등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 극단적인 경우, 임페리움 권한을 가진 자는 로마 시민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모든 집정관은 또한 coercitio|코에르키티오la(강압)의 권한을 가졌다.[44] 집정관들은 범죄에 대한 처벌을 부과하여 공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를 사용했다.[44]

집정관의 권한에 대한 제약은 collega|콜레가la('동료성')였다. 각 집정관직은 최소 두 명이 동시에 수행했다. 또 다른 제약은 provocatio|프로보카티오la였다. 로마에 있는 동안 모든 시민은 적법 절차의 초기 형태인 provocatio|프로보카티오la에 의해 강압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이는 인신 보호 영장la의 전조였다. 만약 어떤 집정관이 시민에 대해 국가의 권한을 사용하려 한다면, 그 시민은 집정관의 결정에 호민관에게 항소할 수 있었다.[44] 또한 집정관의 1년 임기가 만료되면, 그 직책에서 다시 봉사하기 전에 10년을 기다려야 했다.

군사적 비상 사태 시기에는 독재관이 6개월의 임기로 임명되었다.[44] 헌법 정부는 해산되었고, 독재관은 국가의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감찰관은 고대 로마집정관으로서, 인구 조사를 유지하고, 공공 도덕을 감독하며, 정부 재정의 특정 측면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44] 감찰관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44]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은 최고위의 일반 집정관이었다. 각자 1년 동안 재임했다.[44] 집정관의 권한에는 이전 왕의 imperium|임페리움la과 새로운 원로원 의원 임명이 포함되었다. 집정관은 민사 및 군사 문제 모두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졌다.

호민관들은 평민의 화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은 성스러운 존재였다. 그들의 신성함은 호민관의 임기 동안 호민관을 해치거나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이겠다는 평민의 서약에 의해 강제되었다. 호민관을 해치거나, 그의 거부권을 무시하거나, 그를 방해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44]

법무관들은 민법을 관리했고[44] 지방 군대를 지휘했다. 조영관들은 로마의 국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선출된 관료였으며, 공공 경기 및 쇼를 관리하는 것과 같은 업무를 수행했다. 재무관들은 로마의 집정관과 지방의 총독을 도왔다.

참조

[1] 웹사이트 Palatinus (Palatine Hill) https://penelope.uch[...] 2021-04-17
[2] 서적 Asimov's Chronology of the World https://archive.org/[...] HarperCollins
[3] 간행물
[4] 기타 Ab urbe condita
[5] 기타 Ab urbe condita
[6] 웹사이트 Titus Livius (Livy), The History of Rome, Book 1, chapter 8 https://www.perseus.[...] 2015-12-09
[7] 간행물 2021-04
[8] 간행물
[9] 간행물
[10] 문서 He may have chosen this number from the number of the birds who foretold his sovereignty
[11] 기타 Ab urbe condita
[12] 기타 Ab urbe condita
[13] 간행물
[14] 간행물
[15] 기타 Ab urbe condita
[16] 기타 Ab urbe condita
[17] 기타 Life of Romulus
[18] 기타 Ab Urbe
[19] 기타 Life of Romulus
[20]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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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A history of Rome http://worldcat.org/[...] Wiley-Blackwell 2009
[23] 기타 Ab urbe cond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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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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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기타 Ab urbe cond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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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문서 Everitt 2012, p. 28
[37] 문서 Matyszak 2003, p. 36
[38] 문서 Matyszak 2003, pp. 38–39
[39] 문서 Matyszak 2003, p.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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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문서 Matyszak 2003, p. 42
[42] 서적 Cicero: Politics and Persuasion in Ancient Rome https://books.google[...] A&C Black 2011-01-20
[43] 문서 Matyszak 2003, pp. 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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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서적
[47] 문서 M.하이켈하임, p.60
[48] 문서 M.하이켈하임, pp.58~59
[49] 문서 M.하이켈하임, p.27
[50] 문서 M.하이켈하임, p.62
[51] 문서 사비니인들은 퀴리날리스 언덕에 정착했다고 한다. 《로마문명사》, 도널드 더들리 저, p.8
[52] 문서 M.하이켈하임, pp.62~63
[53] 문서 M.하이켈하임, p.64
[54] 문서 M.하이켈하임, pp.65~67
[55] 문서 바로의 연대기에 따른 것.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전투의 연도는 기원전 387 혹은 386년이다.
[56] 서적 Asimov's Chronology of the World HarperCollins 1991
[57] 문서 더들리, p.23
[58] 문서 M.하이켈하임, p.81
[59] 문서 초기 로마인들은 저마다 두 가지 이름이 있었다. 하나는 개인 이름(praenomen)이고, 다른 하나는 씨족의 이름 이었다. 후대에 씨족이 규모가 커지고 가족들이 분화하면서 셋째 이름, 즉 가문명(cognomen)도 덧붙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Caius Iulius Cæsar)의 경우, 가이우스가 개인 이름, 율리우스는 씨족 이름,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씨족에 속한 그의 가문 이름이었다.《로마사》, 프리츠 하이켈하임 저, p.81.
[60] 서적
[61] 문서 M.하이켈하임, pp. 87~88
[62] 문서 M.하이켈하임, p.98
[63] 문서 더들리, p.27
[64] 문서 더들리, p.29
[65] 문서 공화정 시대 집정관 선출을 위해 마련된 제도를 감안하여 제기된 것이 틀림없는 한 고대의 견해에 따르면, 왕이 죽고 새 왕을 선출하여 왕권에 신의 재가를 부여하는 점을 쳐서 신들의 뜻을 판별하는 권리가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면 원로원 의원 가운데 한 명을 선출하여 간왕(簡王, interrex, 왕권 대행)으로 닷새를 봉직하게 했다. 그렇게 하여 신들과 원로원을 다 만족시키는 왕이 선출될 때까지 계속 다른 의원을 간왕으로 선출한다는 것이다. 왕이 선출되면 [[쿠리아회]](comitia curiata)의 비준을 받아 왕의 명령권(imperium)을 부여했다.《로마사》, 프리츠 하이켈하임 저, p.69.
[66] 문서 릭토르는 나무 다발에 도끼를 묶은 파스케스(fasces)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왕을 보좌했다. 이들은 왕이 시민들에 대해 생사 여탈권을 가지고 있음을 상징했다. 릭토르를 두는 관습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도 이어져, 최고 정무관인 [[집정관]]을 보좌하게 된다. 《로마문명사》, 도널드 더들리 저, p.29.
[67] 문서 M.하이켈하임, pp.68~69
[68] 문서 전승에 따르면 왕에게 조언을 하던 100명의 귀족들의 모임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이들 귀족은 로마 국가 건국에 참여한 대가문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부유한 지주들이었다. 《로마문명사》, 도널드 더들리 저, p.29.
[69] 문서 M.하이켈하임, p.70
[70] 문서 초기에는 전령들이 소집을 주도했지만, [[에트루리아]] 왕 시대에는 릭토르들의 소집으로 법적 자격이 있는 시민들이 정기적으로 로마 광장에서 모였으며, 경우에 따라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모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쿠리아(curia)라는 무리를 단위로 대오를 정렬했다. 각 쿠리아는 일정한 지역에 사는 친족들의 무리였던 것 같으며 이들은 조세와 선거 뿐 아니라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목적을 위한 하나의 단위로 조직된 듯하다. 쿠리아회의 명칭도 이 쿠리아 단위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사》, 프리츠 하이켈하임 저, p.71.
[71] 문서
[72] 서적
[73] 서적 로마사
[74] 서적
[7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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