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로젠츠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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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츠 로젠츠바이크는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로, 헤겔 철학을 비판하고 유대교적 관점에서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헤겔의 역사 철학을 비판하며, 유대 민족의 비시간적 역사와 구원의 개념을 강조했다. 주요 저서로는 《구원의 별》이 있으며, 마르틴 부버와 교류하며 유대 철학 발전에 기여했다. 로젠츠바이크는 근육 퇴행성 질환으로 고통받다 192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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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로젠츠바이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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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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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란츠 로젠츠바이크 |
출생일 | 1886년 12월 25일 |
출생지 | 카셀, 독일 제국 |
사망일 | 1929년 12월 10일 |
사망지 | 프랑크푸르트, 독일 |
철학적 배경 | |
지역 | 서양 철학 |
시대 | 20세기 철학 |
학파 | 대륙 철학 실존주의 |
주요 관심사 | 신학 철학 독일 관념론 종교 철학 |
사상과 영향 | |
주요 사상 | 구원의 별 |
영향 | 마르틴 부버 헤르만 코헨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쇠렌 키르케고르 Rosenstock-Huessy |
영향을 받은 인물 | 에마뉘엘 레비나스 Glatzer Santner |
2. 생애와 교육
카셀에서 독일 문화에 동화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괴팅겐 대학교, 뮌헨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의학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에게 역사학을, 하인리히 리케르트에게 철학을 배웠다. 1912년 마이네케의 지도 아래 헤겔의 정치철학과 역사 이론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는데, 이는 1920년 저서 『헤겔과 국가』(''Hegel und der Staat'')의 제1부에 해당한다.
박사 논문을 마칠 무렵, 로젠츠바이크는 독일 관념론으로 대표되는 근대 서양 합리주의 철학에 의문을 품고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연구했으나, 1913년 유대교로 돌아와 1914년 베를린 유대교 아카데미에서 헤르만 코헨의 강의를 들으며 유대 사상을 연구했다. 이 연구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고, 그는 군대에 자원하여 간호사와 하사관으로 발칸 전선에 참전했다. 1918년 참호 속에서 영감을 얻어 1921년 주저 『구원의 별』(''Der Stern der Erlösung'')을 저술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마이네케는 로젠츠바이크를 대학교수로 임용하려 했으나, 로젠츠바이크는 이를 거절했다. 대신 탈무드 연구에 집중하며, 1920년 유대인 교육 기관인 자유 유대 학사를 설립했다. 1922년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을 앓아 글을 쓰거나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아내의 도움으로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마르틴 부버와 함께 미크라(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약성서")의 새로운 독일어 번역에 착수했으나, 1929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사망하여 완성하지 못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프란츠 로젠츠바이크는 19세기 말, 독일 카셀의 부유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염료 공장을 운영하며 시의원으로 활동했다. 로젠츠바이크는 증조부 아담 로젠츠바이크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전통적인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11세 무렵에는 히브리어 수업을 요청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1]로젠츠바이크는 괴팅겐, 뮌헨, 프라이부르크 등 여러 대학에서 5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으나, 1907년 전공을 바꿔 프라이부르크와 베를린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괴팅겐 대학교, 뮌헨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의학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프리드리히 마이네케 밑에서 역사학을, 하인리히 리케르트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절친한 친구 오이겐 로젠스톡-휘시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려 했으나, 욤 키푸르 예배에 참석한 후 신비로운 경험을 하고 발 테슈바가 되었다.[2] 이후 유대 철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1913년, 로젠츠바이크는 유대 철학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헤르만 코헨의 제자가 되었고, 둘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인 '헤겔과 국가'를 쓰는 동안, 로젠츠바이크는 관념론에 반대하는 철학을 추구했다. 1912년에 마이네케의 지도 아래, 헤겔의 정치철학과 역사 이론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이것은 1920년의 저서 『헤겔과 국가』(''Hegel und der Staat'') 제1부에 해당한다.
1910년대 후반, 로젠츠바이크는 헤겔의 필체로 추정되는 원고를 발견하고 "독일 관념론의 가장 오래된 체계적 프로그램"이라고 명명했다.[3] 이 원고는 17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F. W. J. 셸링과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4][5] 학자들은 현재 이 원고를 헤겔이 쓴 것으로 인정하며, 로젠츠바이크의 발견은 헤겔 연구에 중요한 기여로 평가받는다.[6]
박사 논문을 마친 후, 로젠츠바이크는 독일 관념론으로 대표되는 근대 서양 합리주의 철학에 의문을 품고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려 했으나, 1913년 유대인으로 남기로 결심했다. 1914년 베를린에서 헤르만 코헨의 강의를 들으며 유대 사상을 연구했다. 이 연구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고, 그는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간호사와 하사관으로 발칸 전선에 참전했다.
2. 2. 기독교 개종 시도와 유대교 회귀
로젠츠바이크는 친구 오이겐 로젠스톡-휘시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려 했다. 그는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살기로 했다. 베를린의 한 유대교 회당에서 욤 키푸르 예배에 참석한 후 신비로운 경험을 하고 발 테슈바가 되었다.[2]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후 다시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1913년, 그는 유대 철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기독교로 개종하려 했던 사촌이자 친구인 오이겐 로젠스톡-휘시에게 보낸 편지들은 '기독교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3년 유대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로젠츠바이크는 1914년 베를린 유대교 아카데미에서 헤르만 코헨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 유대 사상 연구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다. 그는 스스로 군대에 지원하여 처음에는 간호사로, 이후 하사관으로 발칸 전선에 참전했다. 1918년 참호 속에서 영감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1921년 주저 『구원의 별』(''Der Stern der Erlösung'')을 저술하였다.2. 4. 전후 활동과 교육 사업
로젠츠바이크는 학문의 비인격적인 학습 방식에 불만을 느껴, 1920년 프랑크푸르트에 Freies Jüdisches Lehrhaus|he|בית המדרש היהודי החופשי|유대인 학습의 집de을 설립했다. 이곳은 지식 축적보다는 인간과의 대화를 중시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독일에서 '레르하우스'로 알려진 이 기관에는 레오 로벤탈, 자유주의 랍비 벤노 야콥, 의학사학자 리하르트 코흐, 화학자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페미니스트 베르타 파펜하임,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문화 평론가, 훗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S.Y. 아그논, 카발라와 유대교 신비주의에 대한 현대 세속 연구의 창시자 게르숌 숄렘 등 저명한 유대인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이들 중 일부는 비판 이론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와도 관련이 있었다. 1922년 10월, 루돌프 할로가 레르하우스의 지도자직을 맡았다. 레르하우스는 1930년까지 운영되었고, 1933년 마르틴 부버에 의해 재개장되었다.전쟁이 끝난 후, 마이네케는 로젠츠바이크를 대학교수로 임용하려 했으나, 로젠츠바이크는 이를 거절했다. 대신 그는 탈무드 연구에 집중하며, 1920년 유대인 교육 기관인 자유 유대 학사를 설립했다. 이 기관에는 마르틴 부버, 게르숌 숄렘, 에리히 프롬, 레오 로벤탈, 레오 슈트라우스, 카를 라인홀트 등 쟁쟁한 인물들이 강사로 참여했다.
2. 5. 질병과 죽음
로젠츠바이크는 근육이 퇴행하는 질환인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 일명 루게릭병)을 앓았다. 말년에 그는 아내 에디트의 도움을 받아 글을 써야 했다. 에디트는 그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알파벳을 소리 내어 읽었고, 그는 그녀가 의도하는 단어나 구절을 추측할 때까지 계속했다. 때로는 로젠츠바이크가 타자기의 문자판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그가 눈을 깜빡이는 것을 기반으로 한 통신 시스템을 개발했다.[11]로젠츠바이크가 타자기-알파벳 방식을 통해 생각을 전달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다음과 같은 미완성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온다, 모든 것의 요점, 주님께서 내 잠 속에서 진정으로 내게 드러내신 모든 것의 요점, 그곳에..." 이 글쓰기는 그의 의사에 의해 중단되었고, 그는 같은 방식을 사용하여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의사가 떠난 후, 로젠츠바이크는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1929년 12월 10일 밤 프랑크푸르트에서 미완성 문장을 남긴 채 사망했다.[11]
로젠츠바이크는 1929년 12월 12일에 매장되었다. 장례 연설은 없었고, 부버가 시편 73편을 낭독했다.[12]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라파엘은 1939년 독일을 탈출하여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약 3,000권으로 구성된 로젠츠바이크의 서재는 그를 따르려고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화물선이 튀니지로 방향을 돌렸다. 현재 이 서재는 튀니지 국립 도서관(Dâr Al-Kutub Al-Wataniya)에 있다.[13]
3. 사상
로젠츠바이크는 헤겔의 역사 철학과 국가론을 비판하며, 역사는 유기적이고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 민족을 헤겔적 역사 밖에 존재하는, 비시간적인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정의하고, 구원과 메시아적인 것의 역사를 전개했다. 그는 이중 계약 신학의 주창자이다.[1]
3. 1. 헤겔 철학 비판
로젠츠바이크는 헤겔 철학(특히 헤겔의 역사 철학, 국가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헤겔 역사 철학의 기독교적=근대적 역사(확실히 완성에 가까워지는 역사), 전체성의 역사를 강하게 비판하고, 역사는 유기체적이며 불완전한 역사라고 주장했다.[1]헤겔적 역사에 외적으로 존재하는 민족으로서 유대 민족을 비시간성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정의하고, 거기에서 구원의 역사(구원은 항상 미래의 것이므로 역사를 가질 수 없다), 메시아적인 것(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의 역사, 비시간성의 역사를 전개했다. 그는 이중 계약 신학의 주창자이다.[1]
3. 2. 유대 민족과 비시간성의 역사
로젠츠바이크는 헤겔 철학(특히 헤겔의 역사 철학, 국가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헤겔 역사 철학의 기독교적=근대적 역사(확실히 완성에 가까워지는 역사), 전체성의 역사를 강하게 비판하고, 역사는 유기체적이며 불완전한 역사라고 주장했다.그는 헤겔적 역사에 외적으로 존재하는 민족으로서 유대 민족을 비시간성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정의하고, 거기에서 구원의 역사(구원은 항상 미래의 것이므로 역사를 가질 수 없다), 메시아적인 것(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의 역사, 비시간성의 역사를 전개했다. 그는 이중 계약 신학의 주창자이다.
3. 3. 《구원의 별》
로젠츠바이크의 주요 저작은 1921년에 처음 출판된 《구원의 별》이다. 이 책은 창조, 계시, 그리고 구원을 통해 연결되는 신, 인류, 그리고 세계 간의 관계를 묘사한다. 신을 꼭대기에, 세계와 자아를 아래에 두고 도표를 그리면 상호 관계가 다윗의 별 지도를 형성한다. 그는 실제 인간의 존재를 이상으로 대체하려는 모든 시도에 비판적이다. 로젠츠바이크의 계획에서 계시는 형이상학이 아닌 현재 여기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신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두 개의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는데, 가장 최근 번역본은 2005년 맥길 대학교의 바바라 E. 갈리 박사에 의해[7], 다른 하나는 1971년 윌리엄 볼프강 할로 교수에 의해 이루어졌다.[8]
3. 4. 마르틴 부버와의 관계
프란츠 로젠츠바이크는 유대인 시온주의 학자인 마르틴 부버와 비판적으로 교류했다. 두 사람은 부버가 진행한 강연 시리즈를 주제로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1923년 로젠츠바이크는 이 서신 중 하나를 "건축가들"이라는 제목의 공개 서한으로 출판했다.[9]부버와 달리 로젠츠바이크는 이스라엘로의 귀환이 유대인들을 피해야 할 세속적인 역사에 얽히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버의 대화 철학이 '나-너' 관계뿐만 아니라 '나-그것'에도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며 이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나-너'에 대한 대응은 '그분-그것', 즉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와 같아야 하며, 인간의 "나"—인간의 마음—를 중심으로 "그것"을 구축하는 것은 관념적인 실수라고 생각했다.[10]
로젠츠바이크와 부버는 타나크(히브리어 성경)를 히브리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함께 했다. 이 번역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동일한 방법론과 원칙을 사용하는 다른 언어의 여러 번역본으로 이어졌다. 번역의 본질과 철학에 관한 그들의 출판물은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다.
4. 번역 활동
(내용 없음)
5. 저작
- ''인간과 그의 작품. 전집 I-IV'', 1976년 이후, 헤이그
권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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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1 및 1, 2 | 서신과 일기 |
2권 | 구원의 별 |
3권 | 두 강 사이의 땅. 소품 |
4권, 1 | 번역에서의 언어 사유 (예후다 할레비의 찬가와 시) |
4권, 2 | 번역에서의 언어 사유 (성경 독일어 번역을 위한 작업 자료) |
- ''헤겔과 국가'', 2권 (1920), 1962년, 아알렌
- ''구원의 별'' (1921), 1988년, 프랑크푸르트 (Der Stern der Erlösung|구제의 별de 무라오카 신이치 외 번역, 미스즈 서방, 2009년)
6. 관련 사상가
참조
[1]
서적
Franz Rosenzweig. His life and thought
Schocken Books
1962
[2]
서적
To Mend the World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Fateful Question of Culture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Romantic Conception of Life: Science and Philosophy in the Age of Goe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5]
서적
The Myth of Disenchantment: Magic, Modernity, and the Birth of the Human Scienc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7
[6]
서적
Hegel and the Hermetic Tradition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
[7]
웹사이트
https://uwpress.wisc[...]
[8]
서적
Der Stern Der Erlosung (The Star of Redemption)
Holt, Rinehart and Winston
[9]
서적
The Builders
[10]
서적
Franz Rosenzweig
Thomson Gale
[11]
서적
Franz Rosenzweig: His Life and Thought
Schocken Books
[12]
서적
Martin Buber's Life and Work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3]
학술지
A Diaspora of Books - Franz Rosenzweig's Library in Tu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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