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태저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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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랜태저넷가는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왕조로, 앙주 가문의 제프리 플랜태저넷의 별명에서 유래했다. 헨리 2세는 앙주 가문 출신으로 잉글랜드의 첫 번째 플랜태저넷 왕으로 여겨지며, 그의 치세 동안 앙주 제국으로 불리는 광대한 영토를 형성했다. 1399년 리처드 2세의 폐위로 플랜태저넷 본가는 막을 내리고, 헨리 4세가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 랭커스터 왕조는 헨리 5세, 헨리 6세로 이어졌으나, 헨리 6세의 무능한 통치로 인해 요크 가문과의 장미 전쟁이 발발했다. 랭커스터 왕조는 헨리 4세, 헨리 5세, 헨리 6세로 이어졌으며, 헨리 6세는 요크 가문과의 장미 전쟁에서 패배하며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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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주가 - 앙주 제국
앙주 제국은 12세기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이 지배했던 잉글랜드, 프랑스 등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칭하며, 헨리 2세 사후 쇠퇴하여 헨리 3세 때 붕괴되었다. - 잉글랜드의 왕가 - 앙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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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가문은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시작하여 잉글랜드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통치한 왕조로, 로버트 2세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고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며 동군 연합을 이루었으나, 왕권신수설 주장과 실정, 혁명, 왕정복고를 거쳐 앤 여왕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 플랜태저넷가 -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으로, 쿠데타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친정 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백년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으나 말년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의회 발전과 국가 정체성 강화가 이루어졌다. - 플랜태저넷가 - 랭커스터가
랭커스터가는 1267년 헨리 3세가 에드먼드에게 랭커스터 백작 작위를 수여하며 시작되어, 랭커스터 공작령을 거치며 강력한 귀족 가문으로 성장했고, 1399년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라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지만 장미 전쟁으로 몰락하여 붉은 장미는 튜더 왕조로 이어졌다.
플랜태저넷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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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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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앙주 가문 |
국가 |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주장) 아일랜드 영주국 웨일스 공국 신성 로마 제국 (명목상) |
기원 | 12세기 |
창시자 | 조프루아 5세 |
해산 | 1499년 (남성) 1541년 (여성) |
폐위 | 1485년 |
분가 | 랭커스터 가문 요크 가문 보퍼트 가문 (사생아에서 적출로 인정) |
마지막 통치자 | 리처드 3세 |
칭호 |
2. 용어
"플랜태저넷"이라는 명칭은 12세기 앙주 백작 제프리의 별명에서 유래했다. 제프리는 개나리금작화(Cytisus scoparius) (genista라고도 불림)라는 밝은 노란색 꽃을 피우는 식물을 좋아하여 별명으로 삼았다고 한다.[1]
요크 3세 공작 리처드는 15세기에 플랜태저넷을 가문의 이름으로 사용했다.[2] 장미 전쟁 동안 이 이름은 제프리의 직계 남계 후손으로서 리처드의 지위를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2] 이후 튜더 왕조 시대에 제프리의 모든 남계 후손에게 이 이름을 소급 적용하는 것이 널리 퍼졌는데, 이는 그의 증손자 헨리 8세에게 더 큰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2] 17세기 후반부터 역사가들 사이에서 플랜태저넷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3]
플랜태저넷 가문의 전신은 가티네 가문(프랑스어: Maison de Gatinais)으로, 북프랑스 가티네의 백작 가문이었다. 11세기에 가문의 풀크 4세가 앙주 백작이 되면서, 그 가문은 이후 앙주 가문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Angevin프랑스어은 프랑스어로 "앙주의"를 의미한다.[4] 앙주 출신 왕으로는 헨리 2세, 리처드 1세, 존이 있다.[4] 많은 역사가들은 앙주 가문을 잉글랜드의 독립적인 왕가로 인식한다.[4] 앙주 가문과 플랜태저넷 가문을 구분하지 않고 헨리 2세를 최초의 플랜태저넷 왕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지만,[5] 존의 아들인 헨리 3세를 최초의 플랜태저넷 군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5]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는 1887년 케이트 노르게이트가 처음 사용했다.[6] 당시에는 잉글랜드 앙주 왕들의 영토를 통칭하는 명칭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왕국과 우리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것"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6] 그러나 앙주 제국 내 영토들은 통일된 법률이나 통치 체계를 갖지 않고 각자 고유한 법률과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제국"이라는 용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6] 1986년 역사가 회의에서는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 대신 espace Plantagenet프랑스어 (플랜태저넷 지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지만,[6]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7]
2. 1. 플랜태저넷
가티네 가문에서 시작하여, 11세기 무렵에 결혼을 통해 앙주 백작령의 지배 가문이 되었다. 이후 영지를 차츰 늘려가기 시작해 12세기 무렵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최절정기에는 피레네산맥에서부터 아일랜드를 포함해 스코틀랜드와의 국경까지 앙주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방계인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를 포함해 전체 15명의 군주를 배출하며 1154년에서 1485년까지 왕위를 이어갔다. 본가는 헨리 2세에서부터 리처드 2세가 1399년에 폐위될 때까지이며, 이후 랭커스터 왕가에서 3명의 군주가 나왔고, 이후 요크 왕가에서 3명의 군주가 배출되었다. 요크 왕가의 리처드 3세가 장미 전쟁 중인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왕위가 끊겼으며, 그의 조카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1499년 처형되면서 적통마저 끊겼다.
근 300년 간의 플랜태저넷 왕가의 시대 동안 영국 고유의 문화와 예술이 태어났는데, 영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가 왕가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한 것과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요크 민스터 대성당의 고딕 건축도 이 시대였다.
프랑스 왕국의 지배권을 놓고 발루아 왕가와 다툰 100년 전쟁과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툰 장미 전쟁으로 점철된 다사다난한 시기이기도 했다. 몇몇 왕들은 그 자신들이 전사로 유명했는데, 아쟁쿠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헨리 5세와 제3차 십자군에서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영국 전래 문학에서 기사도의 상징이 된 리처드 1세가 대표적이다.
헨리 2세는 앙주, 아키텐 등을 포함한 대영토를 지배하며 국내에서는 일련의 행정 개혁을 실시하여 봉건 왕정을 확립하였으나, 그 후 왕의 전제 정치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막내 아들인 존 왕은 실정을 거듭하여 대륙의 영토를 잃었고, 귀족의 반항으로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고 타협하였다. 헨리 3세 때 왕의 전제에 반항하는 귀족 연합은 신흥 상인·기사들을 의회에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에드워드 1세는 귀족과 협조하여 일련의 제정법에 의해 봉건사회를 정비하였다.
에드워드 3세는 백년 전쟁 이후에 왕권이 실추된 반면 시민·상인층이 점차 성장하여 봉건사회를 변동시키게 된다. 특히 1381년의 농민 반란이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5세기, 왕조의 계보가 끝날 무렵, 요크 3세 공작 리처드는 플랜태저넷을 그의 가문 이름으로 채택하였다. "플랜태제네스트"(Plantegenest 또는 Plante Genest)는 12세기 그의 조상인 제프리,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의 별명이었다. 많은 유력한 이론 중 하나는 개나리금작화(Cytisus scoparius), 밝은 노란색("황금색") 꽃을 피우는 식물, 중세 라틴어로 ''genista''라고 불리는 꽃의 개화가 별명의 기원이라는 것이다.[1]
요크의 리처드가 왜 이 특정한 이름을 선택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장미 전쟁(1455–1487) 동안 이는 제프리의 직계 남계 후손으로서의 리처드의 지위를 강조했다. 제프리의 모든 남계 후손에게 이 이름을 소급 적용하는 것은 그 후 튜더 왕조 시대에 널리 퍼졌는데, 아마도 그의 증손자 헨리 8세에게 더 큰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장려되었을 것이다.[2] 17세기 후반에야 역사가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3]
2. 2. 앙주 가문
가티네 지방에서 시작해서, 11세기 무렵에 결혼을 통해 앙주 백작령의 지배 가문이 되었다.[8] 이후 영지를 차츰 늘려가기 시작해 12세기 무렵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최절정기에는 피레네산맥에서부터 아일랜드를 포함해 스코틀랜드와의 국경까지 앙주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방계인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를 포함해 전체 15명의 군주를 배출하며 1154년에서 1485년까지 왕위를 이어갔다.[1] 본가는 헨리 2세에서부터 리처드 2세가 1399년에 폐위될 때까지이며, 이후 랭커스터 왕가에서 3명의 군주가 나왔고, 이후 요크 왕가에서 3명의 군주가 배출되었다.[1] 요크 왕가의 리처드 3세가 장미 전쟁 중인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왕위가 끊겼으며, 그의 조카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1499년 처형되면서 적통마저 끊겼다.[1]
Angevin프랑스어은 프랑스어로 "앙주의"를 의미한다.[4] 세 명의 앙주 왕은 12세기 앙주의 제프리의 아들인 헨리 2세와 손자인 리처드 1세 및 존이다.[4] 귀족 가문들은 일반적으로 영토나 출생지로 명명되었는데, 예를 들어 노르망디 가문, 웨섹스 가문 등이 있다.[4] "앙주"는 그들이 통치했던 역사 시대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4] 많은 역사가들은 앙주 가문을 잉글랜드의 독립적인 왕가로 인식한다.[4] "앙주"는 또한 앙주에서 유래한 군주나 정부를 언급하는 데에도 사용된다.[4] 명사로서, 앙주의 원주민이나 앙주 통치자, 특히 잉글랜드 왕가를 형성한 세 왕의 조상들인 다른 앙주의 백작과 공작들; 예루살렘의 왕관을 가진 사촌들; 그리고 나중에 작위를 받고 다른 왕조를 형성한 프랑스 왕족과 관련 없는 구성원들, 예를 들어 앙주 카페 가문과 발루아 앙주 가문을 가리킨다.[4] 따라서 존의 아들인 헨리 3세를 최초의 플랜태저넷 군주로 간주하는 사람들과 앙주 가문과 플랜태저넷 가문을 구분하지 않고 따라서 최초의 플랜태저넷을 헨리 2세로 간주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5]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는 케이트 노르게이트에 의해 1887년에 만들어졌다.[6] 잉글랜드 앙주 왕들의 통치하에 있던 모든 영토에 대한 당시의 공통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6] 이로 인해 "우리 왕국과 우리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것, 무엇이든 간에" 또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했던 왕국의 전부"와 같은 우회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6] "앙주 제국"의 "제국" 부분은 특히 이 영토들이 통일된 법률이나 통치 시스템의 적용을 받지 않았고 각각 고유한 법률, 전통 및 봉건적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어 왔다.[6] 1986년 역사가들의 회의는 앙주 국가가 없었고 따라서 "앙주 제국"도 없었지만, espace Plantagenet프랑스어 (프랑스어로 "플랜태저넷 지역")이라는 용어는 허용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해 왔다.[7]

후대의 앙주 백작, 플랜태저넷 가문을 포함하여, 가티네 백작 제프리 2세와 그의 아내 앙주의 에르망가르드에서 비롯되었다.[8] 1060년, 이 부부는 방계 혈족을 통해 앙주 가문으로부터 작위를 상속받았는데, 이 가문은 870년부터 기록이 남아 있는 잉겔제르라는 귀족으로부터 내려온 것이었다.[8]
10세기와 11세기 동안, 앙주, 노르망디, 브르타뉴, 푸아투, 블루아 및 망주의 지배자들과 프랑스 왕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9] 12세기 초, 앙주의 제프리는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출 자녀이자 노르망디 가문 출신인 영국 왕위 계승자인 마틸다 황후와 결혼했다.[9] 이 결혼으로 제프리의 아들 헨리 2세는 영국 왕위뿐 아니라 노르망디와 앙주의 작위를 상속받게 되어, 앙주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9]
이 결혼은 제프리의 아버지인 앙주의 풀크 5세가 노르망디와 정치적 동맹을 맺으려 했던 세 번째 시도였다.[10] 그는 먼저 그의 딸인 마틸다를 헨리 1세의 후계자인 윌리엄 아델린과 결혼시키려 했다.[10] ''화이트 십'' 난파 사고로 윌리엄이 죽자, 풀크는 다른 딸인 시빌라를 헨리 1세의 형제인 로베르 쿠르토즈의 아들인 윌리엄 클리토와 결혼시켰다.[10] 헨리 1세는 윌리엄의 노르망디 왕위 계승 경쟁을 강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결혼을 무효화했다.[10] 마침내 풀크는 제프리와 마틸다의 결혼을 통해 목표를 달성했다.[10] 그리고 풀크는 그의 작위를 제프리에게 물려주고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10]
플랜태저넷 가문의 전신은 가티네 가문(프랑스어: Maison de Gatinais)으로, 북프랑스 가티네의 백작 가문이었다.[1] 11세기에 가문의 풀크 4세가 앙주 백작이 되면서, 그 가문은 이후 앙주 가문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1]
12세기에는 헨리 2세의 조부 풀크 5세가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1] 풀크 5세는 앙주 백작위를 장남 제프루아 4세(또는 5세)에게 물려주었고, 예루살렘 왕위는 멜리산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제프루아의 이복동생 보두앵 3세, 그의 동생 아모리 1세에게 계승되었지만, 아모리의 자손 대에서 단절되었다.[1] 그 후, 제3차 십자군에 참전한 리처드 1세(제프루아의 손자)는 예루살렘 왕 즉위를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1]
"플랜태저넷"은 콩과 식물 애니시다(금작화, 학명: *Genista* / 라틴어: planta genestala) 나무를 뜻하며, 제프루아 4세가 애니시다를 문장으로 사용했던 것에서 유래한 가문의 이름이다.[1] 다만, "플랜태저넷"을 성으로 사용한 것은 요크 가의 요크 공 리처드 플랜태저넷이 처음이다.[1]
노르망디 왕조의 마지막 잉글랜드 국왕이 된 헨리 1세는 1120년 장남 윌리엄을 화이트십의 난파 사고로 잃었다. 다른 적장자가 없었던 헨리 1세는 윌리엄의 누이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앙주 백작 제프리 4세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헨리 1세 사후, 그의 누이 아델을 어머니로 둔 에티엔 드 블루아가 런던을 장악하고, 잉글랜드 국왕 스티븐으로 즉위했다. 이후 스티븐과 마틸다, 그리고 각각의 지지 세력 간에 20년 가까이 내전 상태가 지속되었다(무정부 시대라 불림). 스티븐이 계승자로 삼았던 아들 우스타슈가 1153년에 급사하자, 마틸다의 아들 앙주 백작 앙리와 화평 협정(월링포드 협정)을 맺고, 자신의 왕위 승인과 맞바꾸어 앙리를 왕위 계승자로 삼고, 또 우스타슈의 동생 기욤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1154년 스티븐이 죽자, 협정대로 앙리가 헨리 2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에 즉위하고,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립했다.
3. 기원
AngevinFr은 프랑스어로 "앙주의"를 의미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앙주 가문을 잉글랜드의 독립적인 왕가로 인식하며, "앙주"는 앙주에서 유래한 군주나 정부를 언급하는 데에도 사용된다.[4] 케이트 노르게이트가 1887년에 만든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는 이 영토들이 통일된 법률이나 통치 시스템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6]
후대의 앙주 백작(플랜태저넷 가문 포함)은 가티네 백작 제프리 2세와 그의 아내 앙주의 에르망가르드에서 비롯되었다. 1060년, 이 부부는 방계 혈족을 통해 앙주 가문으로부터 작위를 상속받았는데, 이 가문은 870년부터 기록이 남아 있는 잉겔제르라는 귀족으로부터 내려온 것이었다.[8]
10세기와 11세기 동안, 앙주, 노르망디, 브르타뉴, 푸아투, 블루아 및 망주의 지배자들과 프랑스 왕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12세기 초, 앙주의 제프리는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출 자녀이자 노르망디 가문 출신인 영국 왕위 계승자인 마틸다 황후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제프리의 아들 헨리 2세는 영국 왕위뿐 아니라 노르망디와 앙주의 작위를 상속받게 되어, 앙주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9]
이 결혼은 제프리의 아버지인 앙주의 풀크 5세가 노르망디와 정치적 동맹을 맺으려 했던 세 번째 시도였다. 풀크는 먼저 그의 딸 마틸다를 헨리 1세의 후계자인 윌리엄 아델린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화이트 십'' 난파 사고로 윌리엄이 죽자, 다른 딸 시빌라를 헨리 1세의 형제 로베르 쿠르토즈의 아들 윌리엄 클리토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헨리 1세는 이 결혼을 무효화했다. 마침내 풀크는 제프리와 마틸다의 결혼을 통해 목표를 달성했고, 그의 작위를 제프리에게 물려주고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10]
4. 앙주 왕조
가티네 지방에서 시작한 앙주 가문은 11세기에 결혼을 통해 앙주 백작령의 지배 가문이 되었다. 이후 영지를 차츰 늘려가 12세기 무렵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최절정기에는 피레네산맥에서부터 아일랜드를 포함해 스코틀랜드와의 국경까지 앙주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11]
노르망디 왕조의 헨리 1세가 1135년 사망하자 앙주에 있던 마틸다와 제프리 부부 대신 마틸다의 사촌인 스티븐이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했다. 스티븐의 즉위는 논란이 많았고, 이는 광범위한 내란으로 이어져 무정부 시대가 시작되었다.[12]
제프리 백작은 잉글랜드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대신 노르망디 공국을 정복하는 데 10년을 보냈다. 1139년 마틸다와 그녀의 이복형제인 로베르가 잉글랜드를 침략했다.[13] 헨리는 9살 때부터 잉글랜드를 정복하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여러 번 잉글랜드로 보내져 군사 원정의 남성 지도자가 되었다. 1141년 스티븐은 링컨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나중에 포로로 잡힌 로베르와 교환되었다. 제프리는 노르망디 정복을 계속했고 1150년 공국의 주요 통치 역할을 유지하면서 공국을 헨리에게 양도했다.[14]
앙주 가문이 분쟁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었던 세 가지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151년 제프리 백작이 사망하면서, 헨리와 그의 동생 제프리가 영토를 나누기 전에 제프리 백작은 헨리가 스티븐에 대한 분쟁에 필요한 자원이 있는 한 잉글랜드와 앙주를 받을 것이라고 결정했다.[15]
- 프랑스의 루이 7세는 1152년 3월 18일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 무효화를 받았고, 그녀는 1152년 5월 18일에 헨리( 헨리 2세)와 결혼했다. 결과적으로 앙주 가문은 아키텐 공국을 획득했다.[18]
- 스티븐의 아내와 장남인 외스타스가 1153년에 사망하여 월링퍼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헨리는 스티븐의 상속자로 인정되었고, 1154년 말 헨리가 왕위에 올랐다.[19]
방계인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를 포함해 전체 15명의 군주를 배출하며 1154년에서 1485년까지 왕위를 이어갔다. 본가는 헨리 2세에서부터 리처드 2세가 1399년에 폐위될 때까지이며, 이후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에서 각각 3명의 군주가 배출되었다. 요크 왕가의 리처드 3세가 장미 전쟁 중인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왕위가 끊겼으며, 그의 조카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1499년 처형되면서 적통마저 끊겼다.
근 300년 간의 플랜태저넷 왕가의 시대 동안 영국 고유의 문화와 예술이 태어났는데, 영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가 왕가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한 것과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요크 민스터 대성당의 고딕 건축도 이 시대였다.
프랑스 왕국의 지배권을 놓고 발루아 왕가와 다툰 백년 전쟁과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툰 장미 전쟁으로 점철된 다사다난한 시기이기도 했다. 몇몇 왕들은 그 자신들이 전사로 유명했는데, 아쟁쿠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헨리 5세와 제3차 십자군에서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영국 전래 문학에서 기사도의 상징이 된 리처드 1세가 대표적이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앙주 왕조 출신 잉글랜드 국왕은 다음과 같다.
- 헨리 2세(Henry II)(재위: 1154년 - 1189년)
- *헨리 왕세자(Henry the Young King)(공동 국왕, 재위: 1170년 - 1183년)
- 리처드 1세(Richard I)(사자왕, 재위: 1189년 - 1199년)
- 존(John)(무지왕, 재위: 1199년 - 1216년)
- 헨리 3세(Henry III)(재위: 1216년 - 1272년)
- 에드워드 1세(Edward I)(재위: 1272년 - 1307년)
- 에드워드 2세(Edward II)(재위: 1307년 - 1327년)
- 에드워드 3세(Edward III)(재위: 1327년 - 1377년)
- 리처드 2세(Richard II)(재위: 1377년 - 1399년)
4. 1. 잉글랜드 왕위 계승
노르망디 왕조의 마지막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는 1120년 장남 윌리엄을 화이트십의 난파 사고로 잃었다. 다른 적장자(嫡長子)가 없었던 헨리 1세는 윌리엄의 누이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앙주 백작 제프리 4세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헨리 1세 사후, 그의 누이 아델을 어머니로 둔 에티엔 드 블루아가 런던을 장악하고, 잉글랜드 국왕 스티븐으로 즉위했다. 이후 스티븐과 마틸다, 그리고 각각의 지지 세력 간에 20년 가까이 내전 상태가 지속되었다(무정부 시대). 스티븐이 계승자로 삼았던 아들 우스타슈가 1153년에 급사하자, 마틸다의 아들 앙주 백작 앙리와 화평 협정(월링포드 협정)을 맺고, 자신의 왕위 승인과 맞바꾸어 앙리를 왕위 계승자로 삼았다. 또한 우스타슈의 동생 기욤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1154년 스티븐이 죽자, 협정대로 앙리가 헨리 2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에 즉위하고,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립했다.4. 2. 앙주 제국의 절정
헨리 2세는 프랑스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채 잉글랜드 국왕에 즉위하여, '''앙주 제국'''이라 불리는 거대한 영토 집단을 형성했다. 플랜태저넷 가는 또한 프랑스 왕족 여러 가문과의 혈연 관계도 강했다. 따라서 프랑스 왕실(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과의 영토·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끊이지 않고, 백년 전쟁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역대 국왕에게 혹정이 많았다고 말해지는 것도, 이러한 "대(對)프랑스 정책"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 왕조 특유의 사정이 초래한 현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헨리 2세 이외의 역대 국왕은 프랑스인으로서의 의식도 강했고, 특히 헨리의 아들인 리처드 1세는, 원래는 형 젊은 헨리가 왕위를 계승해야 할 신분이었고 자신은 외가의 아키텐에 가장 집착했던 것도 있어, 잉글랜드 통치에 대한 관심이 낮았다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4. 3. 앙주 제국의 쇠퇴
헨리 2세는 앙주, 아키텐 등을 포함한 대영토를 지배하며 국내에서 일련의 행정 개혁을 실시하여 봉건 왕정을 확립하였으나, 그 후 왕의 전제 정치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 그의 막내아들인 존 왕은 실정을 거듭하여 대륙의 영토를 잃었고, 귀족의 반항으로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고 타협하였다.[1] 헨리 3세 때 왕의 전제에 반항하는 귀족 연합은 신흥 상인·기사들을 의회에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였으며,[1] 에드워드 1세는 귀족과 협조하여 일련의 제정법에 의해 봉건사회를 정비하였다.[1]에드워드 3세는 백년 전쟁 이후에 왕권이 실추된 반면 시민·상인층이 점차 성장하여 봉건사회를 변동시키게 된다.[1] 특히 1381년의 농민 반란이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1]
5. 플랜태저넷 본가
플랜태저넷 본가는 앙주 백작령에서 시작하여 12세기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계승한 가문이다. 헨리 2세부터 리처드 2세까지 이어졌으며, 이들은 피레네산맥에서 스코틀랜드 국경, 아일랜드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려 앙주 제국이라 불리기도 했다.[1]
노르망디 왕조의 헨리 1세가 1120년 아들 윌리엄을 잃자, 딸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제프리 4세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헨리 1세 사후, 스티븐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스티븐은 1153년 아들 우스타슈가 사망하자 마틸다의 아들 앙리(헨리 2세)와 월링포드 협정을 맺고 왕위 계승자로 삼았다. 1154년 헨리 2세가 즉위하며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1]
플랜태저넷 왕가 시대에는 영국 고유의 문화와 예술이 발전했다. 제프리 초서가 왕가의 후원을 받았고,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요크 민스터 대성당의 고딕 건축 양식이 나타났다.
이 시기는 발루아 왕가와의 백년 전쟁과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한 장미 전쟁 등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헨리 5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했고, 리처드 1세는 제3차 십자군에서 용맹을 떨쳐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초상 | 이름 | 재위 시작 | 재위 종료 | 비고 |
---|---|---|---|---|
헨리 2세 | 1154년 12월 19일 | 1189년 7월 6일 | 마틸다의 아들. | |
젊은 헨리 | 1170년 6월 14일 | 1183년 6월 11일 | 15세부터 아버지 헨리 2세와 공동 통치. | |
리처드 1세 | 1189년 9월 3일 | 1199년 4월 6일 | 헨리 2세의 아들. | |
존 | 1199년 5월 27일 | 1216년 10월 19일 | 헨리 2세의 아들. | |
헨리 3세 | 1216년 10월 28일 | 1272년 11월 16일 | 존의 아들 | |
에드워드 1세 | 1272년 11월 20일 | 1307년 7월 7일 | 헨리 3세의 아들. | |
에드워드 2세 | 1307년 7월 7일 | 1327년 1월 25일 | 에드워드 1세의 아들. | |
에드워드 3세 | 1327년 1월 25일 | 1377년 6월 21일 | 에드워드 2세의 아들. | |
리처드 2세 | 1377년 6월 21일 | 1399년 9월 29일 |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 |
1399년 리처드 2세가 폐위되면서 플랜태저넷 본가는 막을 내렸다. 이후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가 왕위를 이었으나,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사망하고 1499년 그의 조카 에드워드가 처형되면서 적통이 끊겼다.[1]
5. 1. 귀족과의 갈등, 의회 설립
헨리 2세는 앙주, 아키텐 등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국내에서 행정 개혁을 실시하여 봉건 왕정을 확립하였으나, 그의 통치 이후 왕의 전제 정치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막내 아들인 존 왕은 실정을 거듭하여 대륙의 영토를 잃었고, 귀족의 반항으로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고 타협하였다.[64] 헨리 3세 때 왕의 전제에 반항하는 귀족 연합은 신흥 상인·기사들을 의회에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에드워드 1세는 귀족과 협조하여 일련의 제정법으로 봉건사회를 정비하였다.[65]에드워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규모 법 개혁이 이루어졌다. 사망자 재산 규정을 통해 에드워드는 교회에 대한 권한을 행사했다. 이 법령은 교회에 대한 토지 기증을 금지하고, 전통적인 봉건적 특권을 희생하여 왕관의 권리를 주장했으며, 사법의 균일한 행정을 증진하고, 소득을 증대시켰으며, 법 체계를 성문화했다. 그의 군사 원정으로 그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고, 1294년 프랑스의 필립 4세가 가스코뉴 공국을 몰수하자 에드워드는 프랑스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에드워드는 군사 재정을 위해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해 전례 없는 회의를 소집하여 소규모 지주와 상인들을 포함시켰다. 그 결과 의회에는 최초로 귀족, 성직자, 기사, 자치시민이 포함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백년 전쟁 이후에 왕권이 실추된 반면 시민·상인층이 점차 성장하여 봉건사회를 변동시키게 된다. 특히 1381년의 농민 반란이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5. 2. 헌법 변화와 봉건제 개혁
헨리 2세는 앙주, 아키텐 등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국내에서 행정 개혁을 실시하여 봉건 왕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후 왕의 전제 정치는 비난받았다. 존 왕은 실정을 거듭하여 대륙 영토를 잃었고, 귀족의 반항으로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고 타협하였다. 헨리 3세 때 귀족 연합은 상인, 기사들을 의회에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였고, 에드워드 1세는 귀족과 협조하여 봉건사회를 정비하였다.에드워드 3세는 백년 전쟁 이후 왕권이 실추되었고, 1381년 농민 반란은 봉건사회의 변동을 상징한다. 에드워드 1세는 영국 제도에서의 우위를 주장하며 북웨일스를 통치하던 럴웰린 압 그리피드를 반역자로 여겨 공격했다. 앵글로-노르만 기병과 웨일스 궁수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럴웰린을 제압하고 루들란 법령으로 잉글랜드의 웨일스 지배권을 확립했다. 에드워드의 아들은 최초의 잉글랜드 웨일스 공으로 선포되었다. 에드워드는 두 차례의 웨일스 원정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고, 성곽 네트워크 건설에 상당 부분을 사용했다.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국왕이 자신에게 봉건적 충성을 빚진다고 주장하며 에드워드와 노르웨이의 마가렛의 결혼으로 두 나라를 통합하려 했다. 마가렛 사망 후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경쟁이 일어났고, 에드워드 1세는 존 발리올을 국왕으로 세웠으나, 발리올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여 폐위했다.
윌리엄 월리스가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탈환했으나 폴커크 전투에서 패배했고, 로버트 더 브루스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원정 중 사망했다.

1307년 에드워드 2세의 즉위 선서는 공동체가 "선택할" 법률을 유지할 책임을 반영했다 (프랑스어: aura eslufrm).[66] 그는 측근 피어스 개버스턴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의회의 요구에 따라 개버스턴을 추방해야 했다.[67],[68] 개버스턴 처형 후, 에드워드는 배넉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브루스의 스코틀랜드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67]
프랑스 왕국은 가스코뉴에서 에드워드의 권리를 침해했고, 생사르두 판결에 대한 저항으로 샤를 4세는 공국을 몰수했다. 이사벨라 왕비가 협상하여 에드워드가 프랑스에서 샤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에드워드는 아들 에드워드에게 영토를 양도했고,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사벨라는 로저 모티머 1세와 함께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에드워드 2세를 체포하고 퇴위시켰다.[67],[69] 에드워드 2세는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70] 에드워드 3세의 쿠데타로 이사벨라와 모티머의 통치는 끝났다.[67]
5. 3. 브리튼으로의 확장
앙주 백작령의 지배 가문이었던 플랜태저넷 가문은 12세기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며 그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은 피레네산맥에서 스코틀랜드 국경, 그리고 아일랜드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앙주 제국'으로 불리기도 했다.헨리 2세는 앙주, 아키텐 등 대영토를 지배하며 행정 개혁을 통해 봉건 왕정을 확립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존 왕은 실정을 거듭하여 대륙 영토를 잃고,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해야 했다. 헨리 3세 시기에는 귀족 연합이 상인, 기사들을 의회에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귀족과 협조하여 봉건사회를 정비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로 발루아 왕가와 백년 전쟁을 시작했다. 1328년 프랑스의 샤를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 프랑스의 이사벨라가 프랑스 필리프 4세의 딸이라는 점을 들어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3세의 손자 중 장자 계승 순위에 있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1337년,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의 사촌이자 반역자인 아르투아의 로베르 3세를 숨겨주고 있다는 이유로 아키텐과 퐁티외를 몰수했다.[71]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스스로 프랑스 왕임을 선포하고, 플랑드르인들이 프랑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백년 전쟁 동안 잉글랜드는 슬뤼스 해전과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며 칼레를 점령했다.[71] 네빌 크로스 전투에서는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를 사로잡아 스코틀랜드의 위협을 줄였다.[71] 그러나 흑사병으로 에드워드 3세의 원정은 중단되었고, 그의 딸 조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71]

흑태자 에드워드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의 잔 2세를 사로잡았다. 이후 브레티뉴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갈등은 계속되었다. 흑태자가 병으로 사망한 후, 그의 동생 랭커스터 공작 존 고트가 프랑스 전선을 이끌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73]
한편, 헨리 2세는 아일랜드 영주 칭호를 가지고 1171년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여러 왕들의 복속을 받았다. 이 칭호는 존에게 이어졌고, 이후 잉글랜드 왕들의 칭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플랜태저넷 왕조 시대 동안 아일랜드 지배는 제한적이었다.
5. 4. 발루아 가문과의 갈등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발루아 왕가와 백년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인해 왕권이 실추된 반면, 시민과 상인층이 점차 성장하여 봉건사회를 변동시키게 되었다. 특히 1381년에 일어난 농민 반란은 이러한 사회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에드워드 3세와 헤이놀트의 필리파의 결혼으로 13명의 자녀와 32명의 손주가 태어났다.[76]
에드워드 3세의 장기 집권은 중세 영어가 정부의 구어 및 문어로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문화적 측면에서 정복 이후 첫 번째 '잉글랜드인' 통치자로 여겨진다.[71]
에드워드 3세와 헤이놀트의 필리파 사이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사망 | 배우자 | 자녀 |
---|---|---|---|
에드워드 | 1330~1376 | 켄트의 조앤 | 에드워드, 리처드 2세 |
이사벨라 | 1332~1382 | 쿠시의 앵게랑 7세 | 마리, 필리파 |
조앤 | 1335~1348 | ||
윌리엄 | 1334/6~1337 | ||
라이오넬 | 1338~1368 | 엘리자베스 드 버그 | 필리파 |
존 | 1340~1399 | 랭커스터의 블랑슈, 콘스탄스, 캐서린 스윈포드 | 필리파, 존,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존, 헨리 4세, 이사벨라, 캐서린, 존, 존, 헨리, 토마스, 조앤 |
에드먼드 | 1341~1402 |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 에드워드, 콘스탄스, 리처드 |
블랑슈 | 1342 | ||
메리 | 1344~1362 |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 없음 |
마거릿 | 1346~1361 | 존 헤이스팅스 | 없음 |
조앤 | 1351 | ||
토마스 | 1355~1397 | 글로스터의 앤 |
5. 5.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
에드워드 3세 치세에 백년 전쟁으로 왕권이 실추된 반면 시민·상인층이 성장하여 봉건사회가 변동되었다. 1381년의 농민 반란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에드워드 3세의 손자인 흑태자 리처드 2세는 열 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여 여러 의회의 지원을 받으며 명목상 왕권의 모든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군사 원정 자금 조달을 위해 부과된 인두세는 경제적 빈곤과 맞물려 1381년 농민 반란을 초래했고, 이후 반란군에 대한 잔혹한 보복이 뒤따랐다.[77]
리처드 2세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토마스(Thomas of Woodstock, 1st Duke of Gloucester),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Richard FitzAlan, 11th Earl of Arundel), 워릭 백작 토마스 드 보샹(Thomas de Beauchamp, 12th Earl of Warwick)은 왕의 총신 다섯 명을 탄핵하고 폭정으로 치닫는 통치를 억제하려 하면서 항소 귀족들(Lords Appellant)로 알려졌다. 이들은 헨리 볼링브룩(존 오브 곤트의 아들이자 상속자)과 노퍽 공작 토마스 드 모브레이(Thomas de Mowbray, 1st Duke of Norfolk)의 지지를 받았다. 항소 귀족들은 1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할 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성공했으나,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어가 이끄는 군대를 래드콧 다리에서 격파하면서 리처드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77]
리처드 2세는 권력이 거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무자비한 의회 결과, 해외로 도피했던 드 베어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Michael de la Pole, 1st Earl of Suffolk)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Alexander Neville)은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리처드 2세의 의회 구성원 여러 명이 처형되었다. 존 오브 곤트가 스페인에서 돌아온 후, 리처드 2세는 칼레에서 글로스터를 감금 상태에서 살해함으로써 권력을 회복했다. 워릭은 작위를 박탈당했고, 볼링브룩과 모브레이는 유배되었다.[77]
1399년 존 오브 곤트가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의 상속권을 박탈했다. 이에 헨리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는데, 이 부대는 빠르게 규모가 커졌다. 헨리는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잉글랜드의 헨리 4세로 즉위하였다. 리처드 2세는 다음 해 초 감금 상태에서 사망했는데, 아마도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써 플랜태저넷 왕가의 본가는 막을 내렸다. 헨리 4세의 상속자들은 리처드 2세의 진정한 상속인이 아니라는 점과 랭커스터 왕조가 강탈 행위로 왕위를 획득했다는 이유로 도전을 받았다.[77]
5. 6. 본가의 몰락
본가는 헨리 2세에서부터 리처드 2세가 1399년에 폐위될 때까지이며, 이후 랭커스터 왕가에서 3명의 군주가 나왔고, 이후 요크 왕가에서 3명의 군주가 배출되었다. 요크 왕가의 리처드 3세가 장미 전쟁 중인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왕위가 끊겼으며, 그의 조카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1499년 처형되면서 적통마저 끊겼다.[1]리처드 2세는 후계자가 없었으며, 백년 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한 증세로 인해 민중의 반란에 직면했다. 백년전쟁에서의 패전을 둘러싼 궁정 투쟁도 끊이지 않았고, 왕은 사촌인 헨리 4세의 영지를 몰수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내전을 일으켜 잡히고 살해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남자 계통 손자인 헨리는 랭커스터 왕가를 창시했다. 랭커스터 왕조에서 세 명의 왕이 등극한 후, 역시 에드워드 3세의 남자 계통 자손인 에드워드 4세가 요크 왕가를 세웠다. 그 후, 랭커스터 가문 방계인 보포르 가문의 여자 계통 자손으로 남자 계통의 피를 잇지 않은 헨리 7세가 튜더 왕가를 창시하여 명실상부하게 플랜태저넷 왕조는 막을 내렸다.[1]
6. 랭커스터 왕조
헨리 4세는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 복잡한 법적 수단을 동원했다. 많은 랭커스터 지지자들은 헨리 3세의 장남이었지만 기형으로 제외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에드먼드 크라우치백을 통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80] 앤트워프의 리오넬(Lionel of Antwerp), 클래런스 1세 공작의 증손자였던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Edmund Mortimer, Earl of March)는 리처드 2세의 예비 상속인이었고, 헨리는 그의 플랜태저넷 혈통, 신의 은총, 강력한 친구들, 그리고 리처드의 잘못된 통치를 강조하는 여러 가지 논리를 사용했다.[81]
모티머는 왕위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누이인 앤(Anne de Mortimer)과 캠브리지 3세 백작 리처드(Richard of Conisburgh, 3rd Earl of Cambridge)의 결혼은 왕위에 대한 주장을 요크 가문의 주장과 결합시켰다. 헨리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할 계획이었지만 재정 문제, 건강 악화, 빈번한 반란에 시달렸다.[82] 그는 스코틀랜드의 침략, 북부의 노섬벌랜드 1세 백작 헨리 퍼시(Henry Percy, 1st Earl of Northumberland)의 반란, 그리고 웨일스의 오와인 글린드르(Owain Glyndŵr)의 반란을 진압했다.[82] 많은 사람들은 헨리가 나중에 알려지지 않은 만성 질병으로 쓰러진 것을 신의 벌로 여겼다.
헨리 4세는 플랜태저넷 가문의 사촌인 메리 드 보훈(Mary de Bohun)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부계로는 에드워드 1세, 모계로는 에드먼드 크라우치백의 후손이었다.[78] 그들에게는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다.[79]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에드워드 | 1382년 출생, 어린 시절 사망 | 몬머스 성에 매장됨 |
헨리 5세 | 1386–1422 | 헨리 6세 (1421–1471)의 아버지, 헨리 6세는 에드워드 (1453–1471)의 아버지 |
토마스 | 1387–1421 | 보주 전투에서 사망. 마가렛 홀랜드(Margaret Holland)와의 결혼은 자녀가 없었으며, 존(John)이라는 사생아 존재. |
존 | 1389–1435 | 부르고뉴의 앤(Anne of Burgundy), 룩셈부르크의 자케타(Jacquetta of Luxembourg)와 두 번 결혼했으나 모두 자녀가 없었다. 리처드와 메리라는 사생아 아들과 딸이 있었다. |
험프리 | 1390–1447 | 헨리 6세에 대한 반역죄로 투옥 중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사망; 뇌졸중으로 인한 사망일 가능성이 있다. |
블랑슈 | 1392–1409 | 1402년 라인 팔라틴 백작 루이 3세(Louis III, Count Palatine of the Rhine)와 결혼. |
필리파 | 1394–1430 | 1406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인 포메라니아의 에릭(Eric of Pomerania)과 결혼. |
6. 1. 헨리 4세

헨리 4세 (헨리 볼링브로크)는 1399년 9월 30일부터 1413년 3월 20일까지 재위하였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아들로, 사촌인 리처드 2세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모계로는 헨리 3세의 다른 아들 에드먼드 랭커스터의 증손이 된다.
6. 2. 헨리 5세
헨리 4세가 1399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헨리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정신 질환으로 인해 프랑스가 불안정한 틈을 타 플랜태저넷 가문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프랑스를 침략,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거의 완승을 거두었다.[83] 이후 몇 년 동안 헨리 5세는 노르망디 대부분을 탈환하고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했다. 그 결과 체결된 트루아 조약은 헨리 5세의 상속자들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명시했지만, 도팽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헨리 5세는 1422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홉 달 된 아들이 잉글랜드의 헨리 6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6. 3. 헨리 6세
헨리 6세는 1422년 8월 31일부터 1461년 3월 4일까지, 그리고 1470년 10월 30일부터 1471년 4월 11일까지 잉글랜드 왕을 지냈다. 헨리 5세의 아들이다.헨리 6세가 정신착란을 겪자 요크의 리처드가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 왕위 계승 문제는 왕자의 탄생으로 해결되었다.[92] 헨리 6세가 정신을 회복하자 궁정 세력이 권력을 되찾았으나, 요크의 리처드와 네빌 가문은 세인트 올번스 제1차 전투에서 그들을 패배시켰다. 지배 계급은 큰 충격을 받았고 화해가 시도되었다.[92] 요크와 네빌 가문은 해외로 도피했으나, 네빌 가문은 돌아와 노섬프턴 전투에서 승리하고 헨리 6세를 사로잡았다.[92]
요크의 리처드가 합류하자 의회에서 왕위를 주장했고, 헨리 6세는 생존하는 동안 왕으로 남지만 요크가 계승한다는 내용의 협정법을 통과시켰다. 마거릿은 아들의 주장이 무시된 것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었고, 갈등은 계속되었다. 요크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머리는 믹게이트 바에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와 붙잡혀 참수된 리처드 네빌 솔즈베리 백작의 머리와 함께 전시되었다.[92]
이후 튜크스베리 전투는 보퍼트 가문 남계의 마지막을 끝맺었다. 웨일스 공 에드워드의 전장에서의 사망[96]과 이후 헨리 6세의 살해는 랭커스터 가문을 멸망시켰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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