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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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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와쿠라 사절단은 1871년부터 1873년까지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한 예비 협상과 서구 문물 시찰을 목적으로 파견된 일본의 외교 사절단이다. 이와쿠라 도모미를 단장으로 하여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했으며, 불평등 조약 개정에는 실패했지만, 서구 열강의 발전된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강한 동기를 얻었다. 사절단의 활동은 기독교 금지령 철폐와 신앙의 자유 보장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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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사절단 - [대사관]에 관한 문서
외교 사절 정보
명칭이와쿠라 사절단
로마자 표기Iwakura Shisetsudan
시기1871년 ~ 1873년
대표이와쿠라 도모미
개요
목표서구 세계 탐험 및 학습
불평등 조약 개정 준비
파견 배경네덜란드 선교사 휘도 베르벡의 제안 (러시아 표트르 1세의 서유럽 대사절단 참고)
주요 경유 국가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주요 인물
사절이와쿠라 도모미 (특명전권대사)
부사절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구치 마스카
관련 자료
관련 자료메이지 150년 인터넷 특별전 - 이와쿠라 사절단 ~바다를 넘은 150인의 궤적~
참고 문헌
이미지
1872년 런던에서 촬영된 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2. 목적

1871년 12월 23일에 출발한 이와쿠라 사절단에게는 크게 세 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국가 원수에게 국서를 제출[10]

# 에도 시대 후기에 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한 예비 협상

# 서양 문물 조사

사절단의 주요 목적은 친선 도모 및 유럽과 미국 선진국의 문물 시찰과 조사였지만, 각국을 방문하는 동안 조약 개정을 타진하는 부차적인 임무도 맡고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에도 막부가 체결한 각종 조약을 신정부의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메이지 초부터 순차적으로 협상을 계속해 왔으나, 1872년 7월 1일(메이지 5년 6월 26일)을 기하여 유럽과 미국 15개국과의 수호 조약이 개정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후 1년간의 통고를 통해 조약을 개정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 기회를 통해 불평등 조약 개정을 시도했으나, 법 제도가 미비하고 기독교 금지 정책 등을 이유로 실패했다.[11]

불평등 조약 개정이라는 초기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사절단은 이를 통해 서구 문물 조사의 중요성을 더 크게 인식하게 되었다. 사절단원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목격한 산업 근대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는 귀국 후 일본 근대화 사업 추진에 강한 동기가 되었다.

2. 1. 불평등 조약 개정 시도와 실패

메이지 정부는 에도 막부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1872년 7월 1일을 기해 구미 15개국과 수교 조약 개정 시기가 도래했음을 인지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조약 개정을 시도했다.[23] 그러나 사절단의 불평등 조약 개정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사절단의 활동 기간이 거의 4개월이나 연장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구 막부가 체결한 각종 조약을 신정부의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메이지 초부터 순차적으로 협상을 계속해 왔지만, 1872년 7월 1일(메이지 5년 6월 26일)을 기하여 유럽과 미국 15개국과의 수호 조약이 개정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후 1년간의 통고를 통해 조약을 개정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불평등 조약 개정을 시도한 것이다.[11] 그러나 법 제도 미비와 기독교 금지 정책 등을 이유로 실패로 끝났다.[11]

이러한 실패는 사절단원들이 일본의 근대화와 법 제도 정비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은 조건으로 외국 정부와 새로운 조약을 협상하려는 시도는 사절단이 일본 정부가 설정한 권한을 넘어서려 한다는 비판을 야기하기도 했다.

2. 2. 서구 문물 시찰과 조사

사절단은 미국과 유럽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다양한 분야를 시찰하고 조사했다.[23] 이들은 불평등조약 재협상이라는 초기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서구 근대 문물을 직접 접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미국의 발전된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고, 철도의 중요성을 깨달아 귀국 후 일본 철도 회사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3]

사절단은 영국에서 산업 기술에 압도되었고, 1872년 12월 5일에는 윈저 성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했다. 1873년 3월 15일에는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가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하는 등 유럽 각국에서 주요 인사들을 만나고 선진 문물을 시찰했다.[23]

이들은 영국(4개월), 프랑스(2개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3주), 러시아(2주),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빈 만국 박람회 시찰), 스위스 등 12개국을 방문했다.[23] 귀국길에는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고, 홍해를 거쳐 아시아 각지에 있는 유럽 여러 국가의 식민지(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 등)도 방문했다.[23]

이러한 경험은 사절단에게 일본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고, 귀국 후 다양한 분야에서 문명 개화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3. 구성원

왼쪽부터 나가이 시게코(10세), 우에다 테이코(16세), 요시마스 료코(16세), 쓰다 우메코(9세), 야마카와 스테마츠(12세). 이와쿠라 사절단의 여성 유학생들


이와쿠라 사절단은 특명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부사(副使) 4명, 서기관, 이사관, 수행원, 유학생 등 총 1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출신이 중심이었고, 서기관 등은 옛 막부 출신 인사들이 선발되었다.[3]

사절단에는 관리와 학자 48명, 학생과 수행원 약 53명이 동행했다. 일부 학생들은 해외에 남아 교육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미국 유학을 한 여성 5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연소 유학생이었던 6세의 쓰다 우메코는 귀국 후 1900년에 조시 에이가쿠 주쿠(현 쓰다 대학)를 설립했다. 나가이 시게코(훗날 우류 시게코 여남작)와 야마카와 스테마츠(훗날 오야마 스테마츠 공주)도 여성 유학생에 포함되었다.[18][19]

가네코 겐타로는 미국에 남아 테오도어 루즈벨트와 교류했고, 이는 훗날 러일 전쟁 종전 후 포츠머스 조약 체결 과정에서 루즈벨트의 중재로 이어졌다.[3]

법무성 소속이었던 나카에 조민은 프랑스에서 장 자크 루소 등의 사상을 일본에 소개했다. 마키노 노부아키는 회고록에서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기반을 다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았다.

3. 1. 주요 인물

직책이름비고
특명전권대사이와쿠라 도모미
부사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구치 마스카
1등 서기관다나베 다이치
가 노리유키
후쿠치 겐이치로
2등 서기관와타나베 히로모토
고마쓰 세이지
하야시 다다스
나가노 게이지로
3등 서기관가와지 간도
4등 서기관안도 타로
이케다 세에
대사 수행구메 구니다케미구회람실기 편찬
나카야마 노부요시
우츠미 다다카쓰
노무라 야스시
이츠쓰지 야스나카
이사관다나카 미쓰아키
히가시구제 미치토미
야마다 아키요시
사사키 다카유키
다나카 후지마로
히다와 마고로
수행인무라타 신파치
유리 기미마사
하라다 이치도
나가 요세사이
야스 바야스카즈
와카야마 기이치
아베 센
오키 모리카타
도미타 노부야스
스기야마 가즈나리
요시오 에쇼
니지마 조영어 통역
이와쿠라 도모쓰나
오쿠보 도시카즈
마키노 노부아키
야마가타 이사부로
야마구치 슈타로
요시이 도모자네
요시하라 시게토시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3. 2. 유학생

이와쿠라 사절단에는 총 43명의 유학생이 동행했으며, 이들은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 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3] 주요 유학생들은 다음과 같다.

국가유학생 이름
영국나카에 조민, 나베시마 나오히로, 마에다 도시쓰구, 모리 모토토시
영국, 프랑스마에다 도시아쓰
미국가네코 겐타로, 단 다쿠마, 마키노 노부아키, 구로다 나가토모, 도리이 다다후미, 쓰다 우메코(여성), 아야마 스테마쓰(여성), 우류 시게코(여성), 깃카와 조키치, 기도 다카마사, 구사카 요시오, 야마와키 마사카쓰, 다카기 테이사쿠, 미쓰오 가타케오
독일히라타 도스케
러시아시미즈다니 긴나루, 마데노코오지 마사히데
기타오구라 스미히로, 아사나가 진지로, 나가오카 지사부로, 오토리 게이스케, 보조 도시아야, 무사노코지 사네요, 니시키코지 라이겐



특히, 미국에는 가네코 겐타로 외에도 5명의 여학생이 유학했다. 쓰다 우메코는 귀국 후 조시 에이가쿠 주쿠(현 쓰다 대학)를 설립했으며, 나가이 시게코(후일 우류 시게코 여남작)와 야마카와 스테마츠(후일 오야마 스테마츠 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다.[18][19]

마키노 노부아키는 회고록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의 파견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기반을 세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았다. 사절단 직원이자 법무성 소속이었던 나카에 조민은 프랑스에 머물면서 장 자크 루소와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을 일본에 소개했다.

4. 여정

1871년 12월 23일 미국 태평양 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 증기선 ‘아메리카 호’(SS America)를 타고 요코하마 항을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9] 이후 미국 대륙을 횡단하여 워싱턴 D.C.를 방문, 약 8개월간 장기 체류했다.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서는 영국(4개월), 프랑스(2개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3주), 러시아(2주),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비엔나 만국박람회 시찰), 스위스 등 12개국을 순방했다.

귀국길에는 지중해에서 수에즈 운하를 지나 홍해를 거쳐 아시아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 등 유럽 국가 식민지를 방문했으나, 체류 기간은 유럽에 비해 짧았다.[9]

1873년 9월 13일 태평양 우선회사 ‘황금시대 호’를 타고 요코하마 항에 도착, 1년 10개월간의 여정을 마쳤다.[9]

4. 1. 미국 (1871.12 ~ 1872.8)

1871년 12월 23일,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 태평양 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의 증기선 ‘아메리카 호’(SS America)를 타고 요코하마 항을 출발하여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9]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사절단은 솔트레이크시티시카고를 경유하여 기차로 이동,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사절단은 미국의 교육 제도, 산업 시설, 사회 기반 시설 등을 시찰했다. 특히, 워싱턴 D.C.에 머무는 동안 역사적으로 흑인 대학인 하워드 대학교를 방문하여 당시 미국의 인종, 교육, 계층에 대한 분석을 수행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과 회담하고,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한 예비 협상을 진행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사절단은 1872년 8월 영국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4. 2. 영국 (1872.8 ~ 1872.12)

이와쿠라 사절단은 1872년 8월 17일 큐나드 해운의 올림푸스 호를 타고 리버풀에 도착했다.[4] 런던을 시작으로 브라이턴, 포츠머스 해군 기지, 맨체스터를 거쳐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글래스고, 에든버러, 심지어 하이랜드 지방까지 방문하고, 이어 잉글랜드로 돌아와 뉴캐슬, 볼턴 애비, 솔테어, 할리팩스, 셰필드, 챗스워스 하우스, 버밍엄, 우스터, 체스터 등을 방문한 후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맨체스터에서는 시민 환영회와 만찬이 열렸고, 이 자리에서 세계 제조업, 기술, 도시 행정에서 이 지역의 주도적인 역할이 강조되었다.[4] 글래스고에서는 블랜타이어 경의 초대로 어스킨 하우스에 머물며 클라이드 강 기슭의 조선 및 제강 시설을 견학했다.[4]

뉴캐슬 어폰 타인에서는 실업가인 윌리엄 암스트롱 경을 만나 엘즈위크 엔진 및 무기 공장을 방문하여 암스트롱과 개틀링 건의 제작을 조사했다. 또한 고스포스 탄광을 방문하여 광산 안으로 직접 내려가기도 했다.[4] 미들즈브러의 볼크로우와 보건 철공소, 클리블랜드의 철광석 광산도 방문했다.[4] 뉴캐슬게이츠헤드 상공회의소는 타인 강에서 강 여행을 주선하여 하이 레벨 브리지, 타르시스 황동 및 구리 회사 헤번 및 자로 화학 공장을 둘러보았다.[4]

요크셔에서는 볼턴 수도원을 방문한 후 살테어의 솔츠 밀과 할리팩스의 딘 클러프 밀에서 섬유 제조 시설을 검사했다. 타이투스 솔트 경과 존 크로슬리 경이 노동자들을 위해 제공한 마을, 학교, 구빈원, 병원, 공원도 둘러보았다.[5]

1872년 12월 5일에는 윈저 성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고, 세계 최고의 산업 선진국의 실태를 자세히 시찰했다. 12월 9일에는 샌드링엄에서 웨일스 왕자와의 접견이 있었다.

4. 3. 유럽 대륙 (1873.1 ~ 1873.9)

이와쿠라 사절단은 1873년 상반기에 프랑스(2개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3주),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빈 만국 박람회 시찰), 스위스 등 유럽 대륙의 여러 국가를 방문했다.[9] 1873년 3월 15일에는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가 주최한 관저 만찬회에 참석했다.[9]

1872년 12월 26일, 프랑스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를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

4. 4. 귀국길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고, 홍해를 지나 아시아 각지에 있는 유럽 국가의 식민지(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 등)를 방문했다. 이 지역들에서의 체류는 유럽 각국에 비해 짧았다.[9] 이 여정을 통해 사절단은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 현실을 목격하고, 일본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5. 결과 및 영향

사절단의 초기 목표 중 하나는 불평등 조약 개정이었으나, 이는 실패했다. 이로 인해 사절단 활동 기간이 약 4개월 연장되었지만, 사절단원들은 서구 문물을 시찰하고 배우는 두 번째 목표의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더 나은 조건으로 외국 정부와 새로운 조약을 협상하려는 시도는 일본 정부의 권한을 넘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절단원들은 미국과 유럽의 산업 근대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는 귀국 후 근대화 사업 추진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사절단은 1871년 11월 12일(음력) 미국 태평양 郵船회사의 증기선 아메리카호로 요코하마 항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 약 8개월간 미국에 체류했다. 이후 대서양을 건너 영국(4개월), 프랑스(2개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3주), 러시아(2주),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빈 만국 박람회 시찰), 스위스 등 12개국을 순방했다. 귀국길에는 지중해, 수에즈 운하, 홍해를 거쳐 아시아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 등 유럽 국가의 식민지를 방문했지만, 체류 기간은 짧았다.

당초 계획보다 1년 10개월 늦어진 1873년 9월 13일, 태평양 郵船의 골든 에이지호로 요코하마 항에 귀국했다. 류수 정부에서는 조선 출병을 둘러싼 정한론이 논쟁 중이었고, 사절단 귀국 후 메이지 6년 정변이 일어났다.

오쿠마 시게노부의 제안으로 소규모 사절단을 파견할 계획이었으나, 정치적 사정으로 대규모 사절단이 되었다. 정부 수뇌부 절반이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는 것은 이례적이었지만, 서양 문명과 사상에 직접 접하고 여러 국가 상황을 비교 체험한 것은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권한을 넘어 조약 개정 협상을 시도해 류수 정부와 마찰, 체류 기간 대폭 연장, 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의 불화 등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고, 당시 "조약은 맺지 못하고 돈만 낭비했다"는 狂歌가 불릴 정도였다.[9]

5. 1. 일본에 끼친 영향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양 문명과 사상에 직접 접하고, 여러 나라의 국정을 비교 체험하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사절단에 동행한 유학생들은 귀국 후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일본의 문명개화에 크게 공헌했다.[23]

  • 정치: 사절단은 불평등 조약 개정을 목표로 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일본 근대화 추진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얻었다. 귀국 후 사절단원들은 메이지 정부의 주요 요직을 맡아 정치 개혁을 주도하였다.
  • 경제: 미국과 유럽의 산업 시설과 경제 구조를 시찰하면서 일본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특히, 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귀국 후 일본 철도 회사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본 근대 산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 사회: 서구 사회의 발전된 모습은 사절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서구의 사회 제도와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일본 사회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앞장섰다.
  • 문화: 서구의 선진 문물을 접하면서 일본의 문화와 교육 제도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귀국 후 이들은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새로운 학문을 장려하는 등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 외교: 불평등 조약 개정에는 실패했지만, 서구 열강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사절단이 권한을 넘어 조약 개정 협상을 시도하여 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외유 기간이 대폭 연장되고, 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의 불화가 발생하는 등 정치적 문제도 있었다. 당시에는 "조약은 맺지 못하고 돈만 낭비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9]

5. 2. 기독교 탄압 문제와 신앙의 자유 보장

이와쿠라 사절단은 불평등 조약 개정 예비 협상을 진행하면서 각국으로부터 일본의 우라가미 사건 등 기독교 탄압에 대한 강한 비판을 받았다.[20] 특히 기독교도에 대한 대규모 체포는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다.[21]

사절단은 기독교 탄압이 조약 개정의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고, 이 내용을 일본 정부에 긴급히 알렸다. 그 결과, 1873년(메이지 6년) 2월 24일 태정관 포고 제68호에 의해 기독교 금지령이 해제되었다.[20][21] 이로써 에도 시대 초기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 금지 정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같은 해 3월 14일, 정부는 각 지역에 유배되었던 우라가미의 기독교도들을 귀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5년간의 유형 생활을 마치고 1,930명이 우라가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1889년(메이지 22년) 메이지 헌법이 공포되면서,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었다.[20]

참조

[1] 웹사이트 The Iwakura Mission: Japan's 1871 Voyage to Discover the Western World https://www.nippon.c[...] 2021-06-18
[2] 서적 The Iwakura Mission to America and Europe: A New Assessment https://books.google[...] Japan Library (Curzon Press) 2016-02-03
[3] 문서 Baron Kaneko and the Russo-Japanese War, Part One, Chapter Four 2009
[4] 서적 The Iwakura Mission, industries and exports http://eprints.lse.a[...] The Suntory Center 2016-02-03
[5] 서적 Japan Rising: The Iwakura embassy to the USA and Europ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6] 서적 The Iwakura Embassy to the USA and Europe 1871-1873
[7] 웹사이트 明治150年 インターネット特別展 -岩倉使節団 〜海を越えた150人の軌跡〜- https://www.jacar.go[...]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24-05-23
[8] 웹사이트 岩倉使節団とは?『明治維新政府首脳による西洋文明調査旅行』 http://www.iwakura-m[...] 米欧亜回覧の会 2017-02-04
[9] 서적 黒髪と美女の日本史 水曜社 2012
[10] 문서 미국에서는 유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 프랑스에서는 아돌프 티에르 대통령, 벨기에에서는 레오폴드 2세 국왕, 네덜란드에서는 빌헬름 3세 국왕, 독일에서는 빌헬름 1세 황제와 면담했다.
[11] 저널 アメリカにおける岩倉使節団 : 岩倉大使の条約改正交渉 法政大学 1992-01
[12] 웹사이트 長野桂次郎 https://www.jacar.go[...] 国立公文書アジア歴史センター
[13] 웹사이트 池田寛治 https://www.jacar.go[...] 国立公文書アジア歴史センター
[14] 웹사이트 阿部潜 https://www.jacar.go[...] 国立公文書アジア歴史センター
[15] 웹사이트 岩倉使節団メンバー(出発時) http://www.iwakura-m[...] 米欧亜回覧の会
[16] 웹사이트 吉雄永昌 https://www.jacar.go[...] 国立公文書アジア歴史センター
[17] 웹사이트 瓜生震(読み)うりゅう しん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18] 웹사이트 津田塾大学デジタルアーカイブ「津田梅子 4, 五人の女子留学生たち、シカゴにて」 https://lib.tsuda.ac[...] 津田塾大学 2022-10-24
[19] 서적 2005
[20] 웹사이트 『高札撤去―信教の自由獲得へ―』 https://www.mlit.go.[...] 国土交通省 観光庁
[21] 웹사이트 『キリスト教禁止の高札が撤廃される』 https://www.archives[...] 国立公文書館
[22] 웹사이트 MUFGのある暮らし 5号 https://www.mufg.jp/[...] 2021-04-18
[23] 저널 미국의 이와쿠라 사절단 : 이와쿠라 대사의 조약 개정 협상 호세이 대학 19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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