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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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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토군은 1915년 일본 가라후토에 설치된 행정 구역이다.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일본 영토로 편입된 사할린 남부에 설치되었으며, 1945년 소련에 점령되어 소멸되었다. 군 발족 이전에는 조몬 시대 유적과 오호츠크 문화, 마츠몬 문화, 아이누 문화 등이 존재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1929년에는 혼토정, 우치호로정, 요시히토 촌, 가이바 촌으로 구성되었으며, 1943년 일본 내지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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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토군
개요
위치가라후토청마오카 지청
설치1905년 12월
폐지1949년 6월 1일
인구 통계
1941년77,144명
하위 행정 구역
혼토군
마오카군
도마리오루군

2. 군역

1915년(다이쇼 4년)에 행정 구획으로 발족했을 당시의 군역은, 상기 2개 정 2개 촌의 구역에 해당한다.

3. 역사

선사 시대 군역 내 각지의 유적에서 소닌식 조몬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소닌식 명칭은 혼토정 소닌 유적에서 유래되었다. 미나미하마정 조개더미에서는 멧돼지 이빨로 추정되는 유물도 출토되었는데[1], 조몬 시대에는 멧돼지 새끼를 잡아 길러 죽여 먹는 제사가 전국에서 행해졌다. 이후 이 제사의 대상 동물이 으로 대체되어 아이누의 이요만테로 이어졌다는 설[2]도 있다.

고대 사할린 남부에서는 속 죠몬 문화에 속하는 아니와 문화가 고분 시대 전기까지 번성했으며, 도동 북부의 속 죠몬 문화와 공통되는 박편 석기나 호박 등도 출토되었다. 이후 스즈야 문화를 거쳐, 5세기 무렵부터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다. 오호츠크 문화는 아스카 시대아베노 히라후와 교전한 숙신(미시하세)으로 여겨진다.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사용된 토와다식 토기는 요시히토 촌 토와다 유적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다.

헤이안 시대 중기(10세기)까지 큰수리부엉이 깃털이나 물개 가죽 등을 얻기 위해 마츠몬 문화인이 혼토 군역에도 진출했다. 당시 와진 사회에서는 무사 계층이 대두하며 화살깃이나 갑주 등에 사용되는 수리부엉이 깃털과 해수피 수요가 증가했고, 이는 혼슈 방면으로의 중요한 교역품이 되었다[4]。 혼토정 오아자 엔세츠 아자 라네토이(良音問)의 라네토이 신사 유적이나 혼토정 오아자 엔세츠 아자 엔세츠자와 수원지의 사와 유적에서는 죠몬 토기 외에 스에키도 출토되었는데[5], 이는 와진 사회에서 공급되는 , 누룩, 등의 용기로 사용되었으며, 고쇼가와라 스에키 가마가 있던 오우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에조관령·안토 씨가 당자라고 불리는 아이누(에조)를 통괄했다(『스와다이묘진 그림말』)[6][7]。 중세 안토 씨는 도사노미나토를 거점으로 동해 북부를 중심으로 꽤 넓게 활동했다는 설이 있다(『회선식목』)[8][9]

에이닌 연간에는 닛렌종 승려 니치지가 포교를 위해 이 지역을 방문하여[11], 고토무라 시라우시와 혼토군 아코에 발자취를 남겼다.

에도 시대에 혼토 군은 서(西) 에조치에 속했으며, 1685년(조쿄 2년) 소야 장소에 포함되었다. 1790년(간세이 2년) 사할린 남단 고진 촌 시라누시에 마쓰마에 번이 사할린 상업장(장소)를 설치했다. 당시 톤나이(혼토케시, 혼토정)에도 거점이 설치되어 이후 번의 출장 기관 기능도 겸한 운상옥이 되었고, 무육 정책 옴샤가 행해졌으며, 시라누시 유력자가 오토나(역에조)로 임명되었다.

대정봉환 이후 1868년(게이오 4년) 4월 12일, 하코다테 재판소(윤 4월 24일 하코다테 부로 개칭) 관할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말, 오카모토 겐스케와 스즈키 조스케가 파견되어 왕정복고를 포고하고 하코다테 부 공의소(재판소) 출장소를 설치했다.[44][45]

1869년(메이지 2년) 북에조치가 가라후토주(국)로 개칭[46]되고 개척사 직할령이 되었다.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이 시행되었다.

1875년(메이지 8년), 가라후토-지시마 교환 조약으로 러시아령이 되었다. 이 조약 제6조에 의해 오호츠크해 및 캄차카 반도 주변 일본인 어업권이 인정되었다.[47] 그러나 어장 경영이 어려워진 스하라야가 가라후토에서 철수하면서, 어장 노동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아이누들이 일본 국적을 선택하여 쇼우니와 시라누시에서 홋카이도로 이주했다.

1905년 7월 러일 전쟁사할린 전투에서 일본군 제13사단이 혼토군 지역을 점령했다. 8월 1일 군정이 실시되었고,[1]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혼토군은 일본 영토로 복귀했다.[1]

1907년 3월 14일 내무성 산하 가라후토청이 발족했다.[1] 1909년 가라후토청령으로 '부락 총대 규정'이 제정되어 주요 집락에 촌장에 상당하는 총대를 두고 행정 사무를 수행하게 했다.[1]

1915년 (다이쇼 4년) 6월 26일 - 「가라후토의 군과 촌의 편성에 관한 건」(다이쇼 4년 칙령 제101호) 시행으로 '''혼토군'''이 행정 구역으로 발족했다.[48]

1945년 (쇼와 20년) 8월 22일 - 니시노토로 곶 남쪽 해상에서 오사카 상선의 화물선 노토로마루 (1,100톤)가 피난민 수송을 위해 혼토에서 오토마리로 회항 중 소련 항공기 뇌격으로 침몰했다. (삼선 순난 사건#비고) 이후,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한 소련군의 가라후토 침공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었다.

1949년 (쇼와 24년) 6월 1일 - 국가 행정 조직법 시행으로 가라후토청이 법적으로 폐지되면서 혼토군도 소멸했다.

3. 1. 군 발족 이전

선사 시대에는 군역 내 각지의 유적에서 소닌식 조몬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소닌식 명칭은 혼토정 소닌 유적에서 유래되었다. 미나미하마정 조개더미에서는 멧돼지로 보이는 이빨도 출토되었는데[1], 조몬 시대에는 잡은 멧돼지의 어린 새끼를 길러 죽여 먹는 제사가 전국에서 행해졌고, 이후 대상 동물이 으로 대체되어 아이누의 이요만테로 이어진다는 설[2]도 있다.

고대 사할린 남부에서는 속 죠몬 문화에 속하는 아니와 문화가 고분 시대 전기까지 번성했으며, 도동 북부의 속 죠몬 문화와 공통되는 박편 석기나 호박 등의 출토도 보인다. 그 후 스즈야 문화를 거쳐, 5세기 무렵부터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다. 오호츠크 문화는 아스카 시대아베노 히라후와 교전하여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에 기술된 숙신(미시하세)으로 여겨진다. 5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사용된 토와다식 토기의 명칭은 요시히토 촌 토와다의 유적에서 유래한다.

헤이안 시대 중기(10세기)까지 큰수리부엉이 깃털이나 물개 가죽 등을 구하기 위해 마츠몬 문화인이 혼토 군역에도 진출했다. 당시 와진 사회에서는 무사가 대두하기 시작하여, 화살깃이나 갑주 등의 무구에 사용되는 수리부엉이 깃털이나 해수피의 수요가 증가했고, 혼슈 방면으로의 중요한 교역품이 되었다[4]。 혼토정 오아자 엔세츠 아자 라네토이(良音問)에 있는 라네토이 신사 유적이나 혼토정 오아자 엔세츠 아자 엔세츠자와의 수원지인 사와 유적에서는, 죠몬 토기 등의 외에 스에키도 출토[5]되었다. 스에키는 와진 사회에서 공급되는 이나 누룩, 등의 용기로서도 사용되었으며, 고쇼가와라 스에키 가마가 있던 오우와의 연관성이 엿보인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에조관령·안토 씨가 당자라고 불리는 아이누(에조)를 통괄했다(『스와다이묘진 그림말』)[6][7]。 중세의 안토 씨는 도사노미나토를 거점으로 동해 북부를 중심으로 꽤 광범위하게 활동했다는 설이 있다(『회선식목』)[8][9]

에이닌 연간에 닛렌종의 승려 니치지가 포교를 위해 이 지역을 방문하여[11], 고토무라의 시라우시와 혼토군의 아코에 발자취를 남겼다.

에도 시대가 되면서 혼토 군은 서(西) 에조치에 속하게 되었다. 1685년(조쿄 2년) 소야 장소에 포함되었다. 1790년(간세이 2년) 사할린 남단의 고진 촌 시라누시에 마쓰마에 번이 사할린 상업장(장소)를 설치했다. 당시 톤나이(혼토케시, 혼토정)에도 거점이 설치되어, 후에 번의 출장 기관의 기능도 겸한 운상옥이 되었고, 무육 정책 옴샤가 행해졌으며, 시라누시의 유력자가 오토나(역에조)로 임명되었다.

대정봉환 이후 1868년(게이오 4년) 4월 12일, 하코다테 재판소(윤 4월 24일에 하코다테 부로 개칭)의 관할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말, 오카모토 겐스케와 스즈키 조스케가 파견되어 왕정복고를 포고하고 하코다테 부 공의소(재판소)의 출장소를 설치했다.[44][45]

1869년(메이지 2년) 북에조치가 가라후토주(국)로 개칭[46]되고 개척사 직할령이 되었다.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이 시행되었다.

1875년(메이지 8년), 가라후토-지시마 교환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다. 이 조약 제6조에 의해 오호츠크해 및 캄차카 반도 주변에서 일본인의 어업권이 인정되었다.[47] 그러나 어장 경영이 어려워진 스하라야가 가라후토에서 철수하면서, 어장 노동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아이누들이 일본 국적을 선택하여 쇼우니와 시라누시에서 홋카이도로 이주했다.

1905년 7월 러일 전쟁사할린 전투에서 일본군 제13사단이 혼토군 지역을 점령하였다. 8월 1일 군정이 실시되었고,[1]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혼토군은 일본 영토로 복귀하였다.[1]

1907년 3월 14일 내무성 산하 조직인 가라후토청이 발족하였다.[1] 1909년 가라후토청령으로 '부락 총대 규정'이 제정되어 주요 집락에 촌장에 상당하는 총대를 두고 행정 사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1]

3. 1. 1. 선사 시대

군역 내 각지의 유적에서 소닌식 조몬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소닌식 명칭은 혼토 마을 소닌 유적에서 유래되었다. 혼토정 오아자 혼토 아자 미나미하마도리 2초메에 있는 미나미하마정 조개더미에서는 멧돼지로 보이는 이빨도 출토되었다[1]. 미나미하마정 조개더미는 도콘포강 우안 하구 부근 단구 위, 곤피라 신사 경내에서 발견되었다. 조몬 시대에는 잡은 멧돼지의 어린 새끼를 길러 죽여 먹는 제사가 전국에서 행해졌다. 이후 대상 동물이 으로 대체되어 아이누의 이요만테로 이어진다는 설[2]도 있다.

3. 1. 2. 고대

사할린 남부에서는 속 죠몬 문화에 속하는 아니와 문화(엔부치식)가 고분 시대 전기까지 번성했으며, 도동 북부의 속 죠몬 문화와 공통되는 박편 석기나 호박 등의 출토도 보인다. 당시 북일본에서는 사카에하마 군산 호박이 유통되었다.

그 후 사할린에서 일어나 4세기 말까지 이어진 스즈야 문화를 거쳐, 5세기 무렵부터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다. 오호츠크 문화는 아스카 시대아베노 히라후와 교전하여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에 기술된 숙신(미시하세)으로 여겨진다. 전투 장소에 대해서는 미시하세의 본거지인 사할린으로 비정하는 설[3]도 있다. 5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사용된 토와다식 토기의 명칭은 요시히토 촌 토와다의 유적에서 유래한다. 그 후, 마츠몬 문화 진출에 따라 오호츠크인은 사할린 남부에서 구축되었다.

헤이안 시대 중기(10세기)까지 큰수리부엉이 깃털이나 물개 가죽 등을 구하기 위해 마츠몬 문화인이 혼토 군역에도 진출했다. 속 죠몬 문화나 마츠몬 문화의 담당자는 죠몬 문화의 담당자의 자손이며, 아이누의 조상에 해당한다. 그들이 진출했을 당시, 와진 사회에서는 무사가 대두하기 시작하여, 화살깃이나 갑주 등의 무구에 사용되는 수리부엉이 깃털이나 해수피의 수요가 증가했다. 이것들은 혼슈 방면으로의 중요한 교역품이 되었으며, 아베 씨나 오슈 후지와라 씨를 비롯한 오우호족의 손을 거쳐 전국 각지로 유통되었다[4]。 동시에, 에조 사회로의 와산물의 유입도 있었으며, 마츠몬 문화에서 아이누 문화로의 전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혼토정 오아자 엔세츠 아자 라네토이(良音問)에 있는 라네토이 신사 유적이나 혼토정 오아자 엔세츠 아자 엔세츠자와의 수원지인 사와 유적에서는, 죠몬 토기 등의 외에 스에키도 출토[5]되었다. 전자는, 소조개더미를 동반하는 수혈 건물로, 라네토이 신사 부근에 있었다. 스에키는, 와진 사회에서 공급되는 이나 누룩, 등의 용기로서도 사용되었으며, 고쇼가와라 스에키 가마가 있던 오우와의 연관성이 엿보인다.

3. 1. 3. 중세

가마쿠라 시대 이후, 에조관령·안토 씨가 당자라고 불리는 아이누(에조)를 통괄했다(『스와다이묘진 그림말』)[6][7]。 중세의 안토 씨는 도사노미나토를 거점으로 동해 북부를 중심으로 꽤 광범위하게 활동했다는 설이 있다(『회선식목』)[8][9]。 오슈 후지와라 씨를 계승하는 육지의 호족이자 안도 수군을 이끌며, 에조 사회에서 소란이 발생하면 종종 쓰가루 해협 이북으로 출병했다[10]

또한, 에이닌 연간에 닛렌종의 승려 니치지가 포교를 위해 이 지역을 방문하여[11], 고토무라의 시라우시와 혼토군의 아코에 발자취를 남겼다.

3. 1. 4. 근세

에도 시대가 되면서 혼토 군은 서(西) 에조치에 속하게 되었다. 1603년(게이초 8년) 소야에 설치된 역사가 사할린을 관할하게 되었고, 1685년(조쿄 2년) 소야 장소에 포함되었다. 소야에서는 사할린 아이누에 대해서도 무육 정책으로 '''옴샤''' 등이 행해졌다. 1752년(호레키 2년)경 시라누시에서 교역이 이루어졌고, 여러 곳의 어장이 개설되었다. 1790년(간세이 2년) 사할린 남단의 고진 촌 시라누시에 마쓰마에 번이 사할린 상업장(장소)를 설치, 장소 청부인은 아베야 무라야마 가였다. 막부는 근번소를 설치했다. 이때 톤나이(혼토케시, 혼토정)에도 거점이 설치되어, 후에 번의 출장 기관의 기능도 겸한 운상옥이 되었고, 무육 정책 '''옴샤'''가 행해졌으며, 시라누시의 유력자가 오토나(역에조)로 임명되었다. 당시 지방 행정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장소 청부제 성립 후의 행정 및 에도 시대의 일본 인구 통계를 참조할 수 있다. 그 후, 장소 청부인은 1796년(간세이 8년)부터 오사카 상인・고야마야 곤베에와 번사・이타가키 도요시로, 이듬해인 1797년(간세이 9년)부터는 이타가키 도요시로가 단독으로 맡았다. 1800년(간세이 12년) 마쓰마에 번은 카라후토 장소를 직영하였다. 직영 시대에는 번사・다카하시 쇼시로와 메타니 야스지로가 관리했고, 효고 상인・시바야 조타유가 매입을 청부했다.

3. 1. 5. 대정봉환 이후

대정봉환 이후 1868년(게이오 4년) 4월 12일, 하코다테 재판소(윤 4월 24일에 하코다테 부로 개칭)의 관할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말, 오카모토 겐스케와 스즈키 조스케가 파견되어 왕정복고를 포고하고 하코다테 부 공의소(재판소)의 출장소를 설치했다.[44][45]

1869년(메이지 2년) 북에조치가 가라후토주(국)로 개칭[46]되고 개척사 직할령이 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개척사에서 분리된 가라후토 개척사령이 되었다가, 1871년(메이지 4년) 가라후토 개척사 재통합으로 개척사 직할령으로 돌아온 후 8월 29일 폐번치현이 시행되었다.

이 시기 문명개화기의 사건으로는 신불분리령, 임신호적 편제, 단발탈도령, 평민 묘자 필칭 의무령 공포 등이 있다. 아이누는 백성 신분이었기 때문에 평민이 되었다.

1875년(메이지 8년), 가라후토-지시마 교환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다. 이 조약 제6조에 의해 오호츠크해 및 캄차카 반도 주변에서 일본인의 어업권이 인정되었다.[47] 러시아령 시대에는 니시노토로 곶에서 구슌나이까지 서해안 어구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어장 경영이 어려워진 스하라야가 가라후토에서 철수하면서, 어장 노동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아이누들이 일본 국적을 선택하여 쇼우니와 시라누시에서 홋카이도로 이주했다. 남은 아이누들도 생활 수단을 잃고 곤궁해졌다.

3. 1. 6. 일본령 복귀

1905년 7월 러일 전쟁사할린 전투에서 일본군 제13사단이 혼토군 지역을 점령하였다. 7월 10일 노토로 곶 등대 점령 전투, 7월 29일 카이바 섬의 일본인 주민이 러시아군을 격퇴하는 등 전투가 벌어졌고, 7월 31일 사할린 주둔 러시아군이 항복하였다.[1]

8월 1일 군정이 실시되어 남사할린에 4개의 군정서가 설치되었고, 남사할린 서안 마오카 부근에는 제4가군정구의 마우카 군정구서가 설치되었다.[1] 8월 28일 내무성 산하 가라후토 민정서 코르사코프(오토마리정) 지소 관할이 되었다가,[1] 9월 1일 러일 휴전 조약 체결,[1] 9월 4일 가라후토 민정서 마우카 지소 관할로 변경되었다.[1]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혼토군은 일본 영토로 복귀하였다.[1]

1907년 3월 14일 내무성 산하 조직인 가라후토청이 발족하면서 마우카 지청 관할이 되었고, 카이바 섬에는 출장소가 설치되었다.[1] 1908년 4월 관할 지청이 마오카 지청으로 개칭되었고, 7월에는 카이바 섬 출장소가 폐지되었다.[1] 1909년 10월 마오카 지청 혼토 출장소가 설치되었다.[1]

1909년 가라후토청령으로 '부락 총대 규정'이 제정되어 주요 집락에 촌장에 상당하는 총대를 두고 행정 사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1]

3. 2. 군 발족 이후

1915년 (다이쇼 4년) 6월 26일 - 「가라후토의 군과 촌의 편성에 관한 건」(다이쇼 4년 칙령 제101호) 시행으로, '''혼토군'''이 행정 구역으로 발족하였다. 마오카 지청 혼토 출장소가 관할하였으며, 발족 당시 소닌 촌, 미나미나요시 촌, 우치호로 촌, 혼토 촌, 아코 촌, 가이바 촌의 6개 촌이 있었다.[48]

1918년 (다이쇼 7년) - 공통법 (다이쇼 7년 법률 제39호, 다이쇼 7년 4월 17일 시행) 1조 2항에 따라 가라후토가 내지에 포함되어[48], 기본적으로 국내법이 적용되었다.

1922년 (다이쇼 11년)

  • 4월 1일 - 「가라후토의 지방 제도에 관한 법률」(다이쇼 10년 4월 8일 법률 제47호) 및 세칙 「가라후토 정촌제」(다이쇼 11년 1월 23일 칙령 제8호) 동시 시행. 「부락 총대 규정」 폐지.
  • 10월 - 관할 지청이 혼토 지청으로 변경.


1923년 (다이쇼 12년) 4월 1일 - 소닌 촌과 미나미나요시 촌이 합병하여 요시히토 촌이 되고, 아코 촌이 혼토 촌에 합병되어 4개 촌이 되었다.

1929년 (쇼와 4년) 7월 1일 - 가라후토 정촌제 시행으로 '''혼토정'''(1급 정촌), '''우치호로 촌''', '''요시히토 촌'''(2급 정촌)이 발족하여 1정 3촌이 되었다.

1941년 (쇼와 16년) 4월 1일 - 우치호로 촌이 정으로 승격하여 '''우치호로정'''(1급 정촌)이 되고, '''가이바 촌'''(2급 정촌)이 가라후토 정촌제를 시행하여 2정 2촌이 되었다.

1942년 (쇼와 17년) 11월 - 관할 지청이 마오카 지청으로 변경.

1943년 (쇼와 18년)

  • 4월 1일 - 「가라후토에 시행하는 법률의 특례에 관한 건」(다이쇼 9년 칙령 제124호) 폐지로 내지 편입.
  • 6월 1일 - 가라후토 정촌제 폐지로 가라후토에서 정촌제 시행. 2급 정촌은 지정 정촌이 됨.


1945년 (쇼와 20년) 8월 22일 - 니시노토로 곶 남쪽 해상에서 오사카 상선의 화물선 노토로마루 (1,100톤)가 피난민 수송을 위해 혼토에서 오토마리로 회항 중 소련 항공기의 뇌격으로 침몰하였다. (삼선 순난 사건#비고) 이후,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한 소련군의 가라후토 침공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었다.

1949년 (쇼와 24년) 6월 1일 - 국가 행정 조직법 시행으로 가라후토청이 법적으로 폐지되면서 혼토군도 소멸하였다.

참조

[1] 서적 新岡武彦・宇田川洋著
[2] 서적 瀬川拓郎 アイヌ学入門
[3] 문서 西鶴定嘉 「樺太の栞」
[4] 간행물 9 ~ 11・12 世紀における北方世界の交流 https://cir.nii.ac.j[...] 2019-03
[5] 서적 新岡武彦・宇田川洋著
[6] 웹사이트 函館市史 通説編1 通説編第1巻 第3編 古代・中世・近世 第1章 安東氏及び蠣崎氏 第2節 安東氏の支配 https://adeac.jp/hak[...]
[7] 웹사이트 十三湊から解き明かす 北の中世史 - JR東日本 https://www.jreast.c[...]
[8] 웹사이트 五所川原市の地域経済循環分析 https://www.chisou.g[...]
[9] 웹사이트 十三湊遺跡 http://www.go-kankou[...]
[10] 서적 木村裕俊 「道南十二館の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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